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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반야심경

무한대자유 2013. 8. 23. 16:24

  

 

 

반야심경 (般若心經)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亦復如是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타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罫碍 無罫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究竟涅槃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3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이 오묘한 반야바라밀다를 닦으실 때
몸과 마음의 욕망이 모두 공한 것임을 비추어 보시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의 바다를 건너셨느니라.
사리자여
색(色)이 공한 까닭에 괴롭다거나 무너진다는 상이없으며
수(受)가 공한 까닭에 느낀다는 상이 없으며
상(想)이 공한 까닭에 안다는 상이 없고
행(行)이 공한 까닭에 짓는다는 상이 없으며
식(識)이 공한 까닭에 깨닫는다는 상이 없느니라
삼라만상은 공한 것이며 공한 그 모습이 삼라만상이니
감정이나 생각 욕망 의식 등 마음의 작용도 또한 공한 것이니라
사리자여
이 모든 공한 모습에는 생기고 없어지는 것도 없으며
더러웁거나 깨끗함도 없으며 늘어나거나 줄어듬도 없나니라
그러므로 공의 세계에는 이렇다 할 실체도 없고
감정도 생각도 욕망도 의식도 없고 감각의 주체도 없으며
빛깔이나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촉감의 관념도 없으며
그러한 것들의 모든 상대 또한 없느니라
고로 미혹된 어리석음도 없고 어리석음을 벗어나는 것도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으며 끝내 늙고 죽음을 벗어나는 것도 없나니
괴로움도 없고 괴로움의 원인도 없고
괴로움을 없애는 일도 없으며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도 없으며
지혜가 따로이 있을수없으며 아무런 얻음과 잃을것이 없으므로
모든 보살은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닦아가나니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
잘못된 망상을 떠나 마침내 열반에 이르나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최고의 올바른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진언이고 가장 밝은 진언이며
위없는 진언이며 비길데 없는 진언이니
능히 일체의 괴로움을 없애고 참으로 진실하여 허망함이 없느니라
이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하노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세번)

 

 

 

 

법성게(法性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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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성게는 신라시대의 고승인 의상대사(義湘大師)(625-702)께서 깨닭음의 경계를 글로서 표현한 게송입니다.
 아시다 싶이 의상대사께서는 신라시대(선덕여왕 13년)때 19세로 출가하였으며 당나라에 유학을가서 당나라의 지엄선사 문하에서 8년간 수행을 하면서 깨닭음을 성취하셨고 화엄경의 은밀한 부분까지 공부를 하여 신라에 돌아와 화엄사상을 전국적으로 전파를 하신 분입니다.
 법성게의 본이름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로서 210자 한자로 하나의 도표형식으로 구성되었으며 도장모양으로 "법(法)"자로 시작하여 "불(佛)"자로 끝맺음을 하였고 현시대로 보면 훌륭하고 기발한  아이디어 산물이라 볼 수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불교에서 사용하는 "법(法)"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을 해보아야 되겠습니다.
 저 역시도 불교에 입문하면서 "법(法)"에 대하여 사회에서 사용하는 "법(法)" 과 불교에서 사용하는 "법(法)"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게되어 혼동을 한적이 있었습니다.
 불교에서 많이 쓰고 있는 "법(法)"자가 들어있는 용어로서는  법문,법계,설법,법회,법성,일체법,유위법,무위법, 색성향미촉법 등등 많은 용어를 우리는 볼수 있습니다.
 "법(法)" 은 산스크리트의 다르마(dharma), 팔리어의 담마(dhamma)를 중국어로 번역된 것이며
   1. 불변의 진리
   2. 부처님의 말씀
   3. 삼라만상의 실상
   3. 우주만물의 본성
   4. 마음의 이치
   5. 허공
  등으로 불릴수 있습니다. 결국 이세상의 모든"법"은 꿈과 같고 환과 같이 잠시 일어 났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법"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고 법성게를 읽는다면 공부하는데 많는 도움이 될것입니다. 본 법성게의 참뚯은 수행을 하신 깨닭은이만의 그 참맛을 알뿐입니다.
 
 

 

 

 義湘祖師法性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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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법의 성품은 원융하여 두모습이 본래없고 모든법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니 진여의 세계로다.

 

 無名無相絶一切  證知所知非餘境(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
 이름도 붙일수 없고 형상도 없어 온갖것 끊겼으니 깨닭음의 지혜로만 알뿐 다른 경계 아니로다.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수연성)
 참된 성품은 참으로 깊고도 오묘하니 자기 성품을 지키거나 집착하지 않고 인연따라 이루워지네.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하나속에 일체있고 여럿속에 하나 있어 하나가 곧 일체요 여럿이 곧 하나로다.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
 한 작은 티끌속에 시방세계 머금었고 온갖 티끌 가운데도 또한 이와 다름없네.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한량없는 오랜세월이 한생각 찰나요,찰나의 한생각이 무량한 시간이네.

 

 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구세십세호상즉  잉불잡란격별성)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다른듯하면서도 모두가 현재의 이 마음에 함께 있어서 얽힌 듯 얽히지 않고 각각 뚜렸하게 이루워 졌도다. 

 

 初發心時便正覺  生死涅槃相共和(초발심시변정각  생사열반상공화)
 부처를 이루고자 처음 마음 낼때의 그 마음이 곧 바로 깨닭은 부처의 근본 마음이요, 생사와 열반이 언제나 함께하네.

 

 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이사명연무분별  시불보현대인경)
 진리의 본체계(리)와 나타난 현상계가 한결같이 평등하여 분별할길 없으니 수 많은 부처님과 보현보살님의 경지로다.

 

 能仁海印三昧中  繁出如意不思議(능인해인삼매중  번출여의부사의)
 부처님은 고요한 해인 삼매 가운데서 온갖 불가사의한 법을 나투시네.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
 중생을 이익되게하는 허공가득한 진리의 보배가 비처럼내리고 중생들은 저마다 그룻에 따라 얻는다네.

 

 是故行者還本際   息妄想必不得(시고행자환본제  파식망상필부득)
 그러므로 수행자가 이 도리를 얻어 본바탕에 이르려면 헛된 집착을 끓지 안고서는 얻을수 없네.

 

 無緣善巧捉如意  歸家隨分得資糧(무연선교착여의  귀가수분득자량)
 걸림이 없는 방법으로 여의주를 마음되로 잡아쥐어 진리의 고향에 돌아갈 자질과 능력대로 얻는도다.

 

 以多羅尼無盡寶  莊嚴法界實寶殿(이다라니무진보  장엄법계실보전)
 신묘한 다라니의 다함없는 보배로서 온 세상을 장엄하여 보배궁전 만드네.

 

 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궁좌실제중도상  구래부동명위불)
 마침네 실다운 진리의 세계인 중도에 자리에 앉았으니 옛부터 변함없는 그이름 부처로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의상조사 법성게(義湘祖師 法性偈)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원융한 법의성품 두 모습이 아니로다.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모든 법은 변함없이 본래가 고요한데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想絶一切) 이름없고 모습없어 일체가 끊어지니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깨닫는 지혜일뿐 지식으론 알 수 없네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참된 성품 깊고 깊어 지극하고 오묘하니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자기성품 못 지키고 인연따라 이어지니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하나속에 모두있고 여럿속에 하나있어
일즉일체아즉일(一卽一切多卽一) 하나가 모두이고 모두가 하나이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한티끌 가운데에 시방세계 담겨있고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일체의 티끌마다 시방세계 들어있네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무량한 오랜세월 한 생각 찰나이고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한생각 순간속에 무량세월 들어있네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삼세속 또 삼세가 엉켜있는 모양이나
잉불잡난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 어지럽지 아니하여 서로가 뚜렷하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첫 발심했을 때가 부처님 자리이고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생사와 열반이 서로 같은 모양일세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 진리와 형상은 항상하여 분별없으니
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 열분의 부처님과 보현보살 경지일세
능인해인삼매중(能仁海印三昧中) 능히 사람들은 해인삼매 가운데에
번출여의부사의(繁出如意不思議) 여의롭게 나타나니 불가사의 법이로다.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중생위한 감로법은 허공에 가득하니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 중생은 근기따라 이익을 얻는구나
시고행자환본제(是古行者環本際) 우리가 이 도리를 얻고자 원한다면
파식망상필부득( 息妄想必不得) 망상을 쉬지않곤 아무것도 못얻으리
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 조건없는 방편으로 여의주를 취할지니
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資糧) 고향갈제 분수따라 노자를 얻는도다.
이다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 신묘한 다라니는 다함없는 보배이니
장엄법계실보전(莊嚴法界實寶殿) 온 법계 장엄하면 참다운 보전일세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 마침내 실다운 중도자리 않제 되면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옛부터 변함없는 그 이름이 부처로다

 

 

 

 

 

반야심경도 광역본 반야심경도

모두 600권짜리 대반야바라밀다경의 축약입니다.

특히 제가 저번에 인용한 학관품에

반야심경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나오는 데 참조하시면

반야심경의 원본이 어떠한 것인지 알수 있을 것입니다.

 

반야심경과 대반야바라밀다경의 원본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은

 

반야심경은 5온/18계/12연기/4성제까지만 법무아를 말하고 있는데

 

대반야바라밀다경은 6바라밀/4무량심/보살10지/18공/여래십력/18불공법/일체지/번뇌소멸/아라한/독각/보리/보살행/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없다라고 하여 일반적인 대승에서 말하는 법들에 대해서도 법무아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기존의 반야심경에 무고집멸도 이후에

무6바라밀

무보살10지

무18공

무여래10력

무18불공법

무일체지

무보살행

무아뇩다라삼먁삼보리

같은 것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들어가면 반야심경은

금강경과 유사해집니다.

 

 

아래에 제가 대반야바라밀다경을 참조하여 적어보았습니다.

 

_()_

 

 

 

 

摩何般若波羅蜜多心經 (완전판 ? ^^ )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空中


 

 

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기존 반야심경입니다.)

 

無布施波羅密多 乃至 無般若波羅密多 (육바라밀다도 없고)

무보시바라밀다 내지 무반야바라밀다

 

無大慈大悲大喜大捨(대자대비 대희대사도 없고)

무대자대비대희대사

 

無極喜地 乃至 法雲地 (보살십지도 없고)

무극희지 내지 법운지

 

無獨覺菩提(독각의 깨달음도 없고)

무독각보리

 

無內空無外空無內外空無空空乃至無性自性空(내공 외공 내외공 공공 내지 무자성공도 없고)

무내공무외공무내외공무공공내지무성자성공

 

無如來十力(무여래십력)

무여래십력

 

無如來十八不供法(무십팔불공법)

무여래십팔불공법

 

無一切菩薩摩訶薩行 (일체보살의 마하살행도 없고)

무일체보살마하살행

 

無諸佛無上正等菩提 (일체 부처님의 무상정등각도 없다)

무제불무상정득보리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眭礙

無眭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故知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

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莎婆訶

 

 

_()_

 

아래부분은 제가 저번에 올렸던 것인데 반야심경의 원본이라고 할수 있는 대반야바라밀다경 학관품의 내용입니다. 사실 바로 이 학관품을 제대로 읽어야 좋습니다.

 

 

반야심경은 대반야바라밀다경의 축약본입니다. 반야심경의 제법공상이후 부분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아래의 대반야바라밀다경 제4권 2. 학관품 ②의 부분을 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축약본으로 읽는 반야심경에선 오온 사성제 12연기가 없다는 부분만 나오는데 이것은 대반야바라밀다경의 본뜻을 절반만 담고 있는 것입니다. 바르게 제법공상을 살피려면 아래와 같이 모든 법들에 대하여 바르게 반조하여야 할것입니다. 그랫을때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제법공상 불생불멸에 대한 좀 더 바른 견해에 접근할수 있을 것입니다.

 

 

대반야바라밀다경 학관품에 나온 법공과 아공 요약

 

1.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법무아(법공)

 

보살도 없고, 부처도 없고, 반야바라밀다도 없고, 오온도 없고, 육입도 없고, 육경도없고, 육식도 없고, 육촉도 없고, 육수신도 없고,  6계도 없고, 인연법도 없고, 12연기도 없고, 6바라밀다도 없고, 18공도 없고, 4념처, 4정단, ... 8정도, 3해탈, 4성제도, 4선, 4무량, 4무색정, 8해탈도없고 , 다라니도 없고, 삼마지도 없고, 보살10지도 없고, 정관지..여래지도없고, 5안도 없고, 6신통, 여래십력, 18불공법도 없고 일체지도 없고, 번뇌소멸도 없고, 아라한도없고, 독각도 없고, 보리도 없고, 보살마하살의 행도 없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없다라고 합니다.

 

2.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아공(나가 없음, 무아)


사리자야, 마치 나[我]는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인데 나라고 하나 실로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유정(有情)과 목숨[命者]과 나는 것[生者]과 기르는 것[着者]과 장부[士夫]와 보특가라(補特伽羅)와 뜻대로 나는 것[意生]과 어린이[儒童]와 짓는 것[作者]과 짓게 하는 것[使作者]과 일으키는 것[起者]과 일으키게 하는 것[使起者]과 받는 것[受者]과 받게 하는 것[使受者]과 아는 것[知者]과 보는 것[見者]

 

 

 

대반야바라밀다경 학관품에 나온 법공과 아공 본문

*굵은 글씨는 제가 요약하기 위하여 내용을 뽑아 제목으로 뺏습니다

 

 

1.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법무아(법공)

 

보살도 없고, 부처도 없고, 반야바라밀다도 없고, 오온도 없고, 육입도 없고, 육경도없고, 육식도 없고, 육촉도 없고, 육수신도 없고,  6계도 없고

 

또 사리자야, 모든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는 이렇게 관해야 하느니라.

'보살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부처는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반야바라밀다는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다.

물질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느낌 생각 지어감 의식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눈의 영역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귀 코 혀 몸 마음의 영역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빛깔의 영역[色處]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의 영역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눈의 경계[眼界]는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귀 코 혀 몸 마음의 경계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빛깔의 경계는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소리 냄새 맛 접촉 법의 경계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안식의 경계[眼識界]는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의 경계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눈의 접촉[觸]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귀 코 혀 몸 마음의 접촉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눈의 접촉이 연(緣)이 되어 생긴 모든 느낌[受]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귀 코 혀 몸 마음의 접촉이 연이 되어 생긴 느낌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지계(地界)는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수계(水界) 화계(火界) 풍계(風界) 공계(空界) 식계(識界)의 요소도 이름이 있을 뿐이다.


 

인연법도 없고, 12연기도 없고, 6바라밀다도 없고, 18공도 없고, 4념처, 4정단, ... 8정도, 3해탈, 4성제도, 4선, 4무량, 4무색정, 8해탈도없고 

 

인연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등무간연 소연연 증상연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연(緣) 에 생기게 되는 모든 법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다.

무명(無明)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지어감[行] 의식[識] 이름과 물질[名色] 여섯 감관[六處] 접촉[觸] 느낌[受] 애욕[愛] 잡음[取] 존재[有] 태어남[生] 늙음과 죽음[老死]과 걱정하고 한탄하고 고통받고 근심하고 번민하는 것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보시바라밀다는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정계 안인 정진 정려 반야바라밀다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다.

내공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외공 내외공 공공 대공 승의공 유위공 무위공 필경공 무제공 산공 무변이공 본성공 자상공 공상공 일체법공 불가득공 무성공 자성공 무성자성공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4념주는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4정단 4신족 5근 5력 7등각지 8성도지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공해탈문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무상 무원 해탈문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괴로움의 발생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4정려는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4무량 4무색정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다.
8해탈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8승처 9차제정 10변처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다라니도 없고, 삼마지도 없고, 보살10지도 없고, 정관지..여래지도없고, 5안도 없고, 6신통, 여래십력, 18불공법도 없고

 

다라니문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삼마지문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극희지는 다만 이름이 뿐이요, 이구지 발광지 염혜지 극난승지 현전지 원행지 부동지 선혜지 법운지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정관지(正觀地)는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종성지(種性地) 제팔지(第八地) 견지(見地) 박지(薄地) 이욕지(離欲地) 이판지(已辦地) 독각지(獨覺地) 보살지(菩薩地) 여래지(如來地)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5안(眼)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6신통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여래의 10력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4무소외와 4무애해와 대자 대비 대희 대사와 18불불공법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32대사상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80수호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니라.

 

 

일체지도 없고, 번뇌소멸도 없고, 아라한도없고, 독각도 없고, 보리도 없고, 보살마하살의 행도 없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없다라고 합니다.

 

잊음이 없는 법[無忘失法]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항상 평정에 머무는 성품[恒住捨性]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일체지는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도상지 일체상지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일체지지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영원히 번뇌의 습기를 뽑아 계속함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예류과는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일래과 불환과 아라한과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독각 보리는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온갖 보살마하살의 행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모든 부처님의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다.


세간의 법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출세간의 법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유루(有漏)의 법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무루(無漏)의 법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요, 무위(無爲)의 법도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다.'

 

 

_()_

 

 

그러므로 사실 반야심경의 완전본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대반야바라밀다경 학관품의 내용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르게 아는 것이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같습니다. 실제로 반야바라밀다심경이 축약본임을 모르고 과도한 비약으로 대반야바라밀다경의 원뜻에서 벗어난 주장들이 간혹 있으니까 말입니다.

 

법우님도 대승보살도를 지향하시니 반야심경과 대반야바라밀다경 학관품 그리고 금강경을 연결하는 이 기막힌 퍼즐을 잘 공부하시면 무상/고/무아 그리고 공성을 터득하여 반야바라밀다를 증득하는데 도움이 되실것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고려대장경의 반야심경판본입니다.


 

이미지의 주소는 http://211.46.71.249/image/05_1035-01.gif 입니다.


고려대장경을 살펴보다가 반야심경의 주문부분이 알고 있던 글자와 다르다는것을 알았습니다. 위의 고려대장경 반야심경과 보통의 반야심경을 비교하면 끝 부분이 다음과 같이 다릅니다.


고려: 揭 般羅揭帝 般羅僧揭帝 菩提僧莎
일반: 揭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薩婆訶


그래서 살펴보니 반야심경에 여러 판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아래와 같이 훌륭한 자료를 발견하였습니다.

http://myhome.naver.com/springtemple/fm3_heart_3.html

 

② 竭帝竭帝  波羅竭帝  波羅僧竭帝  菩提僧莎呵
③ 揭帝揭帝  般羅揭帝  般羅僧揭帝  菩提僧莎訶
⑤   諦  諦  波羅  諦  波羅僧  諦  菩提莎婆訶
⑥  唵-    帝  帝  播羅  帝  播羅散  帝  冒-地娑縛賀-
⑦  峨帝峨帝  波羅峨帝  波羅僧峨帝  菩提莎訶
⑧  但  他-  唵-  帝-    帝-  播-羅  帝-  播-羅僧  提-  冒提莎-賀-

위의 번호에 대한 경전의 번역자들입니다.


② 鳩摩羅什(5C초)    : 摩訶 般若波羅蜜大明呪經
③ 玄裝(649)             : 般若波羅蜜多心經
⑤ 般若,利言(790)     : 般若波羅蜜多心經
⑥ 智慧輪(-859)       : 般若波羅蜜多心經
⑦ 法成()                  : 般若波羅蜜多心經(燉煌石室本)
⑧ 施護(982-)           : 佛說聖佛母 般若波羅蜜多經

 

위의 자료를 참조한다면 고려대장경의 반야심경은 般羅라는 말의 유사성을 보이는 ③번 玄裝역 같습니다.

 

질문입니다.
1. 우리나라 승가는 고려대장경의 반야심경을 사용하지 않는 것인가요?

2. 고려시대에는 당연히 고려대장경을 사용하였을 것이고 언제부터 반야심경을 고랴대장경과 다른것을 사용하는 것입니까?

 

3.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반야심경은 누구의 번역을 사용하는 것인가요?


4. 고려대장경의 마지막 부분 菩提僧莎 은 보통 "모지 사바하" 부분인 것같은 데 "하"에 해당하는 발음 한자가 없는 것 같습니다.
위의 판본들은
② 呵
③ 訶
⑤ 訶
⑥ -
⑦ 訶
⑧ 賀
같이 "하"에 해당하는 발음이 있는데요. 빠진 것일까요?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법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고려: 揭帝揭帝 般羅揭帝 般羅僧揭帝 菩提僧莎
일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薩婆訶



② 竭帝竭帝 波羅竭帝 波羅僧竭帝 菩提僧莎呵
③ 揭帝揭帝 般羅揭帝 般羅僧揭帝 菩提僧莎訶
⑤ 諦 諦 波羅 諦 波羅僧 諦 菩提莎婆訶
⑥ 唵- 帝 帝 播羅 帝 播羅散 帝 冒-地娑縛賀-
⑦ 峨帝峨帝 波羅峨帝 波羅僧峨帝 菩提莎訶
⑧ 但 他- 唵- 帝- 帝- 播-羅 帝- 播-羅僧 提- 冒提莎-賀-



② 鳩摩羅什(5C초) : 摩訶 般若波羅蜜大明呪經
③ 玄裝(649) : 般若波羅蜜多心經
⑤ 般若,利言(790) : 般若波羅蜜多心經
⑥ 智慧輪(-859) : 般若波羅蜜多心經
⑦ 法成() : 般若波羅蜜多心經(燉煌石室本)
⑧ 施護(982-) : 佛說聖佛母 般若波羅蜜多經

般羅 玄裝



4. 고려대장경의 마지막 부분 菩提僧莎
② 呵
③ 訶
⑤ 訶
⑥ -
⑦ 訶 部首索引 總畫索引 字音索引 字訓索引 附錄 揭示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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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揭帝揭帝 般羅揭帝 般羅僧揭帝 菩提僧莎
일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薩婆訶



② 竭帝竭帝 波羅竭帝 波羅僧竭帝 菩提僧莎呵
③ 揭帝揭帝 般羅揭帝 般羅僧揭帝 菩提僧莎訶
⑤ 諦 諦 波羅 諦 波羅僧 諦 菩提莎婆訶
⑥ 唵- 帝 帝 播羅 帝 播羅散 帝 冒-地娑縛賀-
⑦ 峨帝峨帝 波羅峨帝 波羅僧峨帝 菩提莎訶
⑧ 但 他- 唵- 帝- 帝- 播-羅 帝- 播-羅僧 提- 冒提莎-賀-




② 鳩摩羅什(5C초) : 摩訶 般若波羅蜜大明呪經
③ 玄裝(649) : 般若波羅蜜多心經
⑤ 般若,利言(790) : 般若波羅蜜多心經
⑥ 智慧輪(-859) : 般若波羅蜜多心經
⑦ 法成() : 般若波羅蜜多心經(燉煌石室本)
⑧ 施護(982-) : 佛說聖佛母 般若波羅蜜多經


般羅 玄裝



4. 고려대장경의 마지막 부분 菩提僧莎
② 呵
③ 訶
⑤ 訶
⑥ -
⑦ 訶
⑧ 賀


漢字(한자) 한자(漢字)

고려: 게제게제(揭帝揭帝) 반라게제(般羅揭帝) 반라승게제(般羅僧揭帝) 보제승사(菩提僧莎)
일반: 게체게체(揭諦揭諦) 파나게체(波羅揭諦) 파나승게체(波羅僧揭諦) 보제(菩提) 살파가(薩婆訶)



② 갈제갈제(竭帝竭帝) 파라갈제(波羅竭帝) 파라승갈제(波羅僧竭帝) 보제승사가(菩提僧莎呵)
③ 게제게제(揭帝揭帝) 반라게제(般羅揭帝) 반라승게제(般羅僧揭帝) 보제승사가(菩提僧莎訶)
⑤ 체(諦) 체(諦) 파라(波羅) 체(諦) 파라승(波羅僧) 체(諦) 보제사파가(菩提莎婆訶)
⑥ 암(唵)- 제(帝) 제(帝) 파라(播羅) 제(帝) 파라산(播羅散) 제(帝) 모(冒)-지사박하(地娑縛賀)-
⑦ 아제아제(峨帝峨帝) 파라아제(波羅峨帝) 파라승아제(波羅僧峨帝) 보제사가(菩提莎訶)
⑧ 단(但) 타(他)- 암(唵)- 제(帝)- 제(帝)- 파(播)-라(羅) 제(帝)- 파(播)-라승(羅僧) 제(提)- 모제사(冒提莎)-하(賀)-



② 구마라집(鳩摩羅什)(5C초) : 마가(摩訶) 반야파라밀대명주경(般若波羅蜜大明呪經)
③ 현장(玄裝)(649) : 반야파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⑤ 반야(般若),리언(利言)(790) : 반야파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⑥ 지혜륜(智慧輪)(-859) : 반야파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⑦ 법성(法成)() : 반야파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돈황석실본(燉煌石室本))
⑧ 시호(施護)(982-) : 불설성불모(佛說聖佛母) 반야파라밀다경(般若波羅蜜多經)


반라(般羅) 현장(玄裝)


4. 고려대장경의 마지막 부분 보제승사(菩提僧莎)
② 가(呵)
③ 가(訶)
⑤ 가(訶)
⑥ -
⑦ 가(訶)
⑧ 하(賀)
 
 
1. 우리나라 승가는 고려대장경의 반야심경을 사용하지 않는 것인가요?
우리가 조석독송 하는 반야심경이 곧 고려대장경의 반야심경입니다

2. 고려시대에는 당연히 고려대장경을 사용하였을 것이고 언제부터 반야심경을 고려대장경과 다른것을 사용하는 것입니까?
고려대장경과 다른 것은 마지막 주문 부분만 (揭帝揭帝 般羅揭帝 般羅僧揭帝 菩提 僧莎訶

揭帝(帝 또는 諦) 揭帝 波羅揭帝 波羅僧揭帝 菩提 娑婆訶

) 바뀐 것입니다


3.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반야심경은 누구의 번역을 사용하는 것인가요?
현장역 입니다

4. 고려대장경의 마지막 부분 菩提僧莎 은 보통 "모지 사바하" 부분인 것같은 데 "하"에 해당하는 발음 한자가 없는 것 같습니다.
위의 판본들은
② 呵
③ 訶
⑤ 訶
⑥ -
⑦ 訶
⑧ 賀
같이 "하"에 해당하는 발음이 있는데요. 빠진 것일까요?

고려대장경의 마지막 부분 菩提僧莎 는 본래 菩提僧莎訶 인데 訶자가 마모등의 이유로 빠진 것입니다

중국의 대표적인 불경번역가 두분을 꼽으라면 흔히 구마라집(343-413)과 현장(622-664) 두분입니다.
이 두분의 번역은 중국에서 불경번역의 역사 자체입니다 그래서 이 두분의 번역을 舊譯과 新譯이라고 구분합니다
흔히 예로 드는 두분의 번역가운데 하나가 "아바로키테스바라 보디사트바"의 번역인데 구역에서는 관세음보살이라고 신역에서는 관자재보살로 번역을 했습니다
이 두호칭 모두가 현재 한국불교에서 우열없이 통용되고 있답니다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로 나오니 신역이고 현장의 번역이고 고려대장경 역시 현장역(위 인용 경판에 그렇게 새겨져 있습니다)이고 우리가 조석으로 독송하는 반야심경도 현장역이고 고려대장경본입니다
우리가 지금 외우는 주문부분은 마갈타국의 삼장법사인 法月이 738년에 번역한 경전에서 처음 보입니다
즉 지금 우리가 독송하는 반야심경은 고려대장경 본에다 주문부분만 법월의 번역으로 대체해서 유통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성법스님의 반야심경 해설-세존사이트에서 퍼옴

 

 

 

관자재보살 觀自在菩薩

= 관세음보살의 전생이야기 =

옛날 남인도에 한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만 부인이 병들어 죽었습니다. 아버지는 몇 년 후 재혼을 하였습니다.
한동안 단란한 생활을 하던 중 어느 해 큰 흉년이 들어 생활이 어렵게 되자 아버지는 이웃나라로 장사를 하러 떠나게 되고, 새어머니 혼자 두 아이들을 데리고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새어머니가 아이들을 바라보며 생각해보니 장차 아이들이 자신이 사는데 큰 장애물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바다에 버리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느 날 저녁, 새어머니는 사공과 짜고 바다 위에서 아버지가 기다린다며 아이들을 조각배에 태워 바다 한가운데로 보내 버렸습니다.
엉겁결에 조각배에 타게 된 형제는 곧 태풍을 만나게 되어 무서움과 추위에 서로를 부둥켜 안고 어머니를 부르며 울어댔지만, 당연히 바다 한가운데서 불쌍한 그들을 구해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결국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야속하게도 조각배는 뒤집혀져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한편 새어머니는 사공과 정을 통하고 바다에 빠진 아들들을 찾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행히 형제는 파도에 휩쓸려 한 무인도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아무도 없는 그곳 무인도에서 근근히 목숨만을 연명해가던 중 어느 날 형이 굶주림에 지쳐 울면서 동생과 마지막 ‘다짐’을 하였습니다.
“아우야, 이제 우리 목숨이 다 된 것 같구나.
아무리 살려 해도 이제는 살 방법이 없는 우리 신세가 가련하구나.
그러나 세상에는 우리와 같은 신세를 가진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와 같이 부모형제를 잃고 배고픔과 추위에 떠는 사람, 풍랑에 휩싸여 고생하는 사람, 독을 가진 짐승에 물리거나 악한 귀신에 시달려 고난이 많은 사람, 부처님의 바른 법을 만나지 못해 깨달음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는 이 세상의 고통을 걷어주되, 그들에게 합당한 몸을 나투어 구제해 주도록 하자.”
이 같은 32가지의 원願을 그들은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찢어진 옷자락에 써서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이 가슴 아픈 이야기는 관세음보살의 전생에 관한 설화입니다. 곧, 형제의 간절한 원이 관세음보살이 자비로써 중생을 구제하는 바로 그 마음이란 말입니다.

반야심경의 첫 말인 관자재보살이 실은 이렇듯 자비의 상징인 관세음보살과 같은 분이십니다. 그런데 '관세음보살'이란 말은 익숙해도 '관자재보살'이란 말은 생소할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표현의 차이 말고도 깊은 의미가 있는데, 이제 예를 하나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아버지가 사장인 회사에 아들이 직원으로 아버지를 돕고 있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직원회의 때 아들이 아버지가 사장이라고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그 회의 분위기는 가족회의 수준이 되어버리고 말 겁니다.

반대로 집에서 가족끼리 단란하게 밥을 먹으며 아버지에게
‘사장님’한다면, 만약 내가 아버지라도 숟가락으로 머리통을 쥐어 박을 것입니다.

이처럼 관세음보살과 관자재보살의 차이는 위의 예와 같이 사장님과 아버지를 구별해 불러야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관세음보살은 자비로써 우리 중생을 구제해 주시는 분
[아버지]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그렇다면 관자재보살[사장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원효와 마음의 자재 =

원효가 한 암자에서 혼자 수도할 때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느날 밤, 길 잃은듯한 여인이 찾아와 하룻밤만 묵고 갈 것을 청했습니다. 원효는 차마 비바람 속으로 여인을 내칠 수 없어 허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워낙 허름하고 단칸인 방인지라 원효와 그 여인의 거리는 숨소리도 들릴 정도였습니다. 더욱 침침하지만 등불에 비친 그 여인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젊은 원효는 공연히 여인을 맞아들였다고 후회하였지만 돌이킬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도 여인의 모습이 떠올라 원효는 정진을 할 수 없었습니다. 원효는 여인의 생각에서 벗어나고자 밤새 염불로 지새웠습니다. 젊은 원효에게 그 밤은 길고긴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드디어 새벽녘이 되었습니다. 원효는 밤새 뜨거워진 몸을 간밤에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난 계곡에 들어가 식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알몸으로 따라 들어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원효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따지듯이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밤새 나를 괴롭혔으면 됐지 이거 너무하지 않소, 이젠 알몸으로 나를 유혹하려 들다니.’
이에 여인은 ‘제가 밤새 뭘 어쨌게요. 그리고 지금은 저도 목욕을 할 뿐인데요.’ 라고 답하고는 바로 무지개를 타고 폭포위로 사라졌습니다.

이 설화는 소요산 자재암에 얽힌 설화입니다.
우리나라의 유명 사찰들의
‘안내문’에 보면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태반은 원효나 의상이 창건했거나 한때 머물러 수행하던 도량이라 주장합니다. 자재암도 그런 절 중 하나인데 이 자재암은 원효가 머물렀던 곳임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요석공주와 그 아들 설총이 살았었다는 사적史蹟이 있기 때문입니다.
설화에서도 어쨌든 젊은 원효는 한때 정을 나누었던 요석공주보다 오히려
‘이상한’여인의 지극히 당연한 대꾸의 말에서 크게 깨침을 얻었습니다. 즉, 모든 것은 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불법의 진수를 뼈져리게 실감한 것입니다. 원효가 얻은 그 진수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마음의 자재自在함을 얻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절을 자재암이라 부른다는 이야기인데, 이젠 제가 이 특정 절의 설화를 소개하는 이유를 말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원효에게 그렇게 갈등을 주었던 여인이 앞서 말씀 드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관세음보살의 32가지 모습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이 젊은 구도자 원효에게
‘한 수’ 가르쳐주기 위해 그런 모습과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불,보살의 응신應身방편方便 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자재自在란 개념을 이해시켜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자재自在를 알아야 관자재보살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관세음보살이 원효에게 여인의 몸으로 직접 체득시킨 것이 바로 자재의 경지입니다.
이 자재의 경지는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외부의 어떤 자극이나 변화에도 마음의 흔들림이 없는 경지이고, 또 하나는 외부의 어떤 자극이나 변화를 아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제가 설명 드린, 다를 것 같은 두 가지 마음의 경지는 물론 다른 것이 아닙니다. 관세음보살이 원효에게 일깨워주고자 했던 것은 마음의 흔들림이 없는 경지에 가깝고,
반야심경 첫머리에 나오는 관자재보살의 ‘자재’는 모든 것을 아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경지에 합당하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풀이는 제가 앞에서 말씀 드린 관세음보살[아버지]와 관자재보살[사장]의 차이인 것이기도 합니다.

 

 

 

 

行深般若波羅蜜多時

= 지혜의 완성인 반야바라밀 =

보살은 연꽃과 같아서
자비는 뿌리 되고 편안한 것 즐기며
지혜는 꽃술이요
계율은 깨끗한 향기

부처님 법의 광명을 놓아
그 연꽃 피게 하니
함이 있는 물이 묻지 못하며
보는 이는 모두 다 기뻐하더라.

보살의 묘한 법 나무
정직한 마음 땅에 나나니
신심은 종자되고 자비는 뿌리
지혜로 밑등이 되고

방편은 가지와 회초리
다섯 바라밀다 아주 번성해
선정의 잎에 신통의 꽃이 피고
온갖 지혜의 열매 맺히니
가장 굳센 힘 덩굴이 되었고
늘어진 그늘 삼계에 덮이네.

이 멋진 詩는 화엄경 이세간품의 보현보살의 게송 중 하나입니다.

여기에 대승불교의 가르침의 핵심인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여섯 가지 필수 덕목인
육바라밀六波羅蜜(밀 자를 비밀스럽다는 이 아니라 벌꿀처럼 달다는 을 쓰는 것이 재미 있습니다)이 다 담겨져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관자재보살이 행하셨다는 '반야바라밀'이 바로 보살의 수행의 핵심이며, 또 마지막 단계입니다. 육바라밀의 마지막 단계인 반야바라밀을 설명드리기 전에 앞의 다섯 가지 수행의 바라밀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라밀波羅蜜’
은 수행의 완성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반야바라밀 하면 지혜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실천한다’
라고 했습니다. 바라밀다는 바라밀과 같은 말입니다.

바라밀, 혹은 바라밀다는 명사이지 행위를 말하는 동사가 아닌 것입니다. 다시 육바라밀의 설명으로 돌아오면 육바라밀 자체는 수행의
'덕목'이지 행위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문제가 왜 중요한지를 짚어 보겠습니다.

웬만큼 공부한 불교 신도들은 육바라밀 하면,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하고 줄줄 외웁니다. 그리고 첫 번째 수행의 과제인 보시布施 가 절에 시주를 한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베푸는 행위라고 정확히 답 합니다. 그럼, 이 답이 정답일까요?

앞으로 이 책의 곳곳에서 여러분이 지금까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불교 교리의 풀이를 두고 다른 각도에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제 모습을 보실 겁니다. 이번 경우가 첫 번째가 될 것 같습니다.

알고 계시다시피 보시란 ‘
주는 것’
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주는 것'이 모두 관세음보살의 경우와 같이 ‘구제’‘수행’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겠습니까?  아주 노골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신도가 부처님께 복을 지으려고 절에 보시를 하는데, 그 돈을 받는 것은 부처님이 아니라 스님입니다. 그 보시 받은 돈으로 한 스님은 그간 돈이 없어 못 사 본 경전을 사서 공부하는 데 쓰고, 한 스님은 결혼을 했기 때문에 자기 애 옷 사주는데 썼다고 가정합시다.

말이 가정이지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 아닙니까? 신도의 보시를 어느 쪽으로 사용하는 게 더 불교적 이겠습니까?

이런 제 말에 속으로 흥분하는 스님들이 있을 겁니다. ‘저 놈이 조계종이라고 대처승帶妻僧들을 모함한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조계종 스님들 중에도 호적에는 올리지 못하지만 여자를 취한 스님이 있을 수 있고, 조계종이 아니라고 모두 결혼한 스님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더욱이 저는 신도나 일반인이
‘부인을 가진 승려’라는 뜻으로 대처승이란 말을 쓰는 것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차라리 ‘보살승菩薩僧’이라는 말이 더 합당할 듯합니다. 보살이란 원래 ‘부처에 버금가는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나, 부처가 되려고 수행하는 사람’
을 이르는 말이니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원효가 설총을 출생시켰다는 이유로 그를 폄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그
‘보살승菩薩僧’
들에게 당당히 말하고자 합니다. 여자를 취하건 말건 그것은 순전히 개인의 수행의 문제라고.. 그러나 출가하고 나서도 여자와 매일 밤 같이 자게 되는 결혼생활을 아무런 고민이나 번민 없이 당연시하는 것이 과연 자신의 수행과 불교를 위해 문제될 것이 정말 없겠는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그것도 불교에서 말하는 옷 깃만 스쳐도 이루어진다는
‘인연’이라고요?  아닙니다. 그건 분명 욕망에 의해 옷 깃이 아니라 옷 속까지 스쳐버린 ‘연인’
의 결과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게 역정을 내실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행에 도움이 된다고 확신하여 결혼하였다거나, 그 결과 부인을 통해 내가 하지 못하고 있는 신도들에 대한 교육이나 포교를 아주 잘해내고 있어 한국불교에 드러나지 않는 힘이 되고 있다고 당당히 말하거나, 불교 내에서나 사회적으로도 그렇다고 인정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보시에 대해 예를 들다 이번에는 제 분수도 모르고 옆길로 새버렸습니다. 덕분에 여러분은 이제 간단히 육바라밀을 이해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견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시 + 반야 = 보시바라밀(지혜롭게 보시를 함)
지계 + 반야 = 지계바라밀(지혜롭게 계를 지킴)
인욕 + 반야 = 인욕바라밀(지혜롭게 욕됨을 참음)
정진 + 반야 = 정진바라밀(지혜롭게 열심히 수행을 함)
선정 + 반야 = 선정바라밀(지혜롭게 선정에 듦)

이것이 다 완성되면 곧 지혜의 완성인 반야바라밀. 간단하지 않습니까?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 '관'觀, '견'見의 차이 =

한글은 장점이 많은 우리의 국어입니다. 특히 다채로운 형용사와 그것의 활용은 단연 최고라고 할 만합니다. 노란 색을 표현하는 데만도 얼핏 노랗다, 누렇다, 노르스름하다, 누리끼리하다 등등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형용사는 색을 표현하는 데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지러워 하늘이 노랗다’, ‘놀라서 얼굴이 똥 빛이 된다’등에도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장점이 영어나 한문으로 번역할 때는 참 난감한 문젯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언어의 번역에 따른 난관과 오해의 한 예가 있습니다.

컴퓨터 수리를 맡은 사람이 이상한 파일을 발견하였습니다. 한글 파일인데 이름이 제비.hwp, 참새. hwp, 비둘기.hwp, 뻐꾸기.hwp, ……다시 청둥오리.hwp, 호사도요.hwp, 딱따구리.hwp, 직박구리. hwp, ……심지어 시조새.Hwp 도 있었습니다.
궁금하여 옆에서 지켜보는 컴퓨터 주인인 교수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무슨 연구를 하시는데 이렇게 새 이름만 가득하십니까?"
"아, 그것 때문에 고생 좀 했습니다. 문서를 모두 ‘새’ 이름으로 저장하라고 해서요."


물론 웃자고 든 예입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한글은 영문이나 한문에 비해 동사의 표현이 제한적입니다.
'보다'
라는 한글에서 우리는 사물을 눈으로 인식한다는 뜻 이상을 연상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영사전에서
‘보다’
에 해당하는 단어를 찾아보면 얼핏 추려도, see(단순히 보인다), look(정지해 있는 것을 주의하여 보다), watch (움직이는 대상을 주의하여 보다), view(경치를 보다), sight(시계 범위 안의 것을 보다)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한문의 경우도 이렇게 많지는 않지만
‘아’다르고, ‘어’ 다르듯이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단어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에 쓰일 경우, 그 진의眞義
에 큰 차이가 나 버릴 수도 있습니다.

반야심경조견照見은 어떤 마음으로 보는 경지를 말하려는 것일까요? 흔히 쓰이는 견見 혹은 관觀과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제 나름대로 정리한 것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견見은 본다는 대상이 물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금강경‘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모양 있는 것의 모양에 집착하지 않아야 법신을 보는 것 - 제 번역에 이의를 제기하실 분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을 염두에 두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관觀
은 모양이나 형태를 갖추지 않은 대상, 즉 소리나 의식 같은 감각작용의 상대적 받아들임 쪽에 더 비중을 둔 표현인 듯합니다.
몇 년 새 한층 고조된 위빠사나 수행도 결국은 자신의 의식을 따라 이
관觀
함을 놓치지 않는 수행법입니다.
관觀세음보살도 ‘세상의 소리를 관하는 수행’을 하는 보살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풀이는 제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고  ‘이근원통耳根圓通’을 관세음보살의 수행법이라고 한 능엄경
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이제 좀 복잡해 집니다. 관자재보살이 관세음보살과 같은 분이라고 누차 말씀드렸습니다.그리고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은 ‘관 오온개공’이 아니라, ‘조견照見 오온개공’
한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관 오온개공’
이라 해도 조견과 같은 의미로 받아드릴 수 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인도에서 경을 구해와 이렇게 번역한 현장스님에게 그 의도를 물어보고 싶지만, 그거야 불가능한 일이니 답답할 뿐입니다.

그러나 조그만 단서를 가지고 그 차이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발견한 단서란
반야심경은 모든 언어적 표현이 대단히 선적禪的
이라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두루마리로 600권에 이르는 반야부 경전 중 하나입니다. 반야부의 경전은 잘 알려진 금강경반야심경이 속해 있는, 불법의 정수인 공空반야般若(지혜)
를 설하는 경전들입니다.

그런데 불과 본문이 260자에 불과한 이
반야심경이 실은 금강경을 능가하는 절묘한 표현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법성게가 단지 210자로 방대한 80권 화엄경
을 기막히게 담은 것을 연상케 합니다.
이 의미의 압축과 용어의 사용에 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위해
'관', '조견'의 선택의 문제는 잠시 접어둡니다. 아니, 이어지는 제 횡설수설을 보시면 차차 납득할 만하실 것입니다.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 금강경 과 반야심경의 차이 =

반야심경을 해설하는 초장부터 금강경을 들먹이는 까닭은, 두 경이 공과 지혜를 설하는 같은 반야부의 경전에 속하기 때문인데, 그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참선만 해야지 경전을 보면 소위 알음알이를 일으켜 분별심만 더한다고 야단을 치는
선사禪師들도 이 금강경반야심경 만큼은 소중히 여길 정도로 '마음 다스리는 방법'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경이 바로 금강경반야심경
입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금강경이 대승불교의 핵심인 공사상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놀랍게도 '공'空
이란 단어는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공을 말하는데
비非, 무無
등의 부정을 통해 긍정을 유도하는 형식입니다.
이에 반해
반야심경은 공을 사용하긴 하지만 '역무'亦無, '무무'無無
등 이중부정의 논리를 통해 재차 공의 개념을 확인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은
금강경
이 번역될 시기에는 중국불교에서는 공이라는 용어를 발견하지 못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후에
반야심경
이 번역될 때는 공의 개념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문제는
금강경반야심경
을 이해하는 데에는 물론 현재의 한국불교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소상히 다루어 보겠습니다.

금강경은 구성은 동진東晉때의 도안(道安, 314-385)이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으로 구분하고, 달마와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없다'는 유명한 대화를 나눈 양무제의 아들 소명태자(501-531)가 32分으로 나눈 것이 틀림없습니다. 여기서 확인되는 것은 그 귀신같은 소명태자도 공空이란 단어를 쓰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소명태자의 탓이 아니라 그 당시에는 전혀 새로운 개념에 대한 '대체어'
를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마치
'인터넷'이란 개념을 대체할 우리말이 아직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그 '대체어'
는 일반인들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널리 알려지고 보편화된 후에야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불경佛經을 처음 번역한 것은 기원 직후의 일로 지금으로부터 약2천여 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최초로 번역한 불경이 '42장경'
입니다. 그런데 중국에 최초의 번역경이 등장한 이 시기는 불교사적으로 보면, 이미 인도에서 불교가 발생한 지 500~700년이란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때 입니다.
이 역시 인도에서는 이미 불교가 아주 대중적이고 보편적 사상이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현재를 기준으로 비교하면 임진왜란 때의 일이 이제야 알려진 것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중국에
'최초의 불교'가 알려질 때 인도에서는 이미 수출된 불교사상은 사라지고 새 불교인 이른바 '대승불교'
가 흥기하게 됩니다.
요즘이야 세계 곳곳에 인터넷이나 무선통신으로 실시간 연결되는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이 실현되었지만, 그 당시로서는 직접 가서 읽고 오거나 경전의 원본이나 필사본을 가져오는 방법밖에 없을 테니 사상의 국외 수출은 간단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사상의 수출은 생각의 바탕이 공유되거나 일반화되어야 가능한데 그런 면에서 보더라도 사상의 수출입은 큰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인도에서는 이미 대승사상으로 발전해 간 불교가 중국에 처음 수입이 되자 사상적으로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불교를 표현할 마땅한 단어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중국에는 이미 공자와 노자의 사상은 충분히 전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노'孔老의 사상에 불교를 담고 표현해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언어적 표현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중국불교를 격의格儀불교라고 합니다. 무위無爲 같은 말도 실은 도가道家의 용어이지 불교의 용어는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란 말도 그렇습니다. 차라리 우리말 '깨달음' 혹은 '깨침'
이 우리에게는 더 실감나는 말인지 모릅니다.
격의불교는 중국에서 불교가 사상적으로 독립된 대우를 받을 때까지 계속되는데, 불교가 독립된 대우를 받은 것은 바로
공空이란 단어를 불교 전문용어로 채택하면서부터입니다. 그러니 '공'
이란 단어가 불교에 있어서 얼마나 큰 사상적 도약이며, 또한 대중에 뿌리를 내렸음을 뜻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공이 불교 전문용어로 처음 등장하는
반야심경
은 현장스님의 번역했는데, 현장스님은 서기 602년에 출생하여 627년에 장안을 출발하여 인도로 향했고, 645년에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 인도에서 모셔 온 불경을 번역하는데 일생을 바쳐 무려 75종 1,335권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그전에는 못 보던
'공'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반야심경은 적어도 645년 이후에 한역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금강경을 처음 도안스님이 한역한 것과 비교하면 '공'
이란 단어를 발견하는 데 300년 이상이 걸린 셈 입니다
이제 이 문제가 한국불교와 관련하여 무엇을 시사하는지 짚어 보아야 할 듯합니다. 아, 그전에 현장스님이 인도로 구도의 길을 다녀오는 역사적 사건이 설화처럼 꾸민 것이
서유기임을 다들 아실 것이라 믿고, 싱거운 소리 하나 하겠습니다.

손오공이 삼장법사를 모시고 가던 중 이번에는 만만찮은 수의 요괴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에 손오공이 머리털을 한 움큼 뽑아 예의 분신술로 수많은 손오공을 만들어 대적하였다.
그런데 한쪽에서 머리가 허옇고, 흰 도복을 입은 ‘노인’이 열심히 싸우는 것이었다.
이에 손오공이 다가가 말하였다.
“아니, 왠 영감님까지 나서서 싸우십니까?”
이에 그 ‘노인’ 하는 말,
“저… ‘새친데요’.”.

= '무아'라면 어떻게 윤회하는가? =

절대적이어야 할 종교에도 아킬레스건이 있습니다.
수년 간 세계적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킨, 댄 브라운의
'다 빈치 코드'
란 소설에 나오는 그런 음모론적인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특정 종교의 교리 자체를 이해해보려고 하는 사람이나, 심지어 자신의 종교에 절대적 믿음을 가진 신자들에게는 이성적으로 무조건 납득하고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당연히 일어나는 본질적인 의문들, 즉 교화시켜야 하는 처지에서는 설명해주기 아주 어렵고, 받아들이는 처지에 있는 사람은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네가 믿는 종교이니 무조건 받아 들여라' 한다거나, '의심은 믿음이 부족한 탓이다' 라고 밀어붙여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들이 종교의 교리 속에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경우 인간이 겪는 희로애락 중 어느 경우까지가 '신의 뜻'이고, 어느 경우까지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지'에 의한 것인가에 대한 회의에 납득할만한 기준점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신의 뜻이라고 단정 지으면서 경우에 따라서 선택적이고 자의적으로 자유의지 운운 하는 것은 분명 기독교의 교리 설명에 아킬레스건입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오히려 신의 뜻에 왜 교리 설명과 인간의 논리가 필요하냐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바로 그런 점이 한국 기독교의 최대 불행이라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의
'의지'
까지 신의 뜻과 범벅이 되어 인간 존재의 능동적 결정은 하나도 인정할 수 없는 결과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논리라면 심지어 중인 제가 이런 글을 쓰는 것도
'신의 의지'
에 따른 행동이 됩니다.
물론
'사탄의 사주'
가 더 기독교적 판단이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역설적으로
'신의 뜻' 중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왜 석가모니를 '있게'하여 가엾은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불교 역시 아킬레스건이 있습니다. 무아無我윤회輪廻에 대한 논쟁입니다.
내가 없다면 어찌 윤회를 거듭할 내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다시 말해 내가 없는 것이 나의 실체라면, 윤회의 주체인 내가 없는 윤회가 어찌 있을 수 있는가?
실제로 이 골치 아픈 논쟁은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논쟁인데, 필경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불교 쪽에서는 당연히 온갖 논리를 동원해 무아와 윤회를 둘 다 방어하려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아는 불교의 헌법격인
삼법인三法印에서 제법무아(모든 법은 실체가 없다)
라고 했고, 윤회 또한 불교의 사상적 특허인데 절대 포기할 수 없지요.
그런데 냉정히 양쪽 주장을 검토해 보면 언어적으로는 방어하는 불교 쪽에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이 제 개인의 소견입니다.
불교 바깥쪽에서는 무아란 분명
'내가 없음'을 표현하는 말인데, 거기에 나의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그것이 씨가 되어 윤회로 거듭난다면 '내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고 들이대면, 불교 안쪽에서는 논쟁의 방어고지를 사수하기 위해 무아란 '내가 전혀 없는 무의 개념이 아니다'
라고 열심히 설명합니다.
불교를 옹호하는 사람이야 불교 안쪽의 논리를 당연시 여기며 너희는 불교의 무아의 개념을 전혀 모르는구나 라고 답답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 밖에서 보는 일상적인 개념의 무아란 단어는
'내가 없다'는 말인 것도 사실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한국불교에 생각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즉, 무아란 말을 앞으로는
'공아'空我
로 대체하자는 것입니다.
다행히 무아와 윤회가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결국 상대에게 무아에 대해 설명하길
'그것은 없다는 무가 아니라 있고 없고를 넘어선 공의 개념이다'
라고 한결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무'無 자를 '공'空
자로 바꿔쓰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윤회에 대해
'무'無 만 들먹이며 깐죽대는 사람이 있다면 대꾸해 주길 '당신은 없다 라는 일상적 언어인 무無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윤회와 불교를 제대로 알고 싶으면 공空을 공부해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금강경에서 '공'空이란 말을 한 마디도 못 쓰고, 300여년을 고민한 후 공을 쓰기 시작한 중국불교의 역사가 한국불교에 시사하는 점이 크다고 한 것입니다.

 

 

 

도일체고액 사리자 度一切苦厄 舍利子

= <현장의 번역에 대한 아쉬움>원전에는 없는 사족인 '도일체고액' =

오온개공五蘊皆空에 대한 설명은 어차피 뒤에서 해야 하니 그때 상세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지금까지의 설명드린 부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관자재보살이 오묘한 반야바라밀행을 하시며, 오온이 모두 공함을 느끼시고 일체의 고통과 액난을 극복하셨다[도일체고액]'입니다. 반야심경의 나머지 부분은 관자재보살이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한분인 사리자에게 법을 설하는 형식으로 이 몇 마디를 구체적으로 나열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

저의 아쉬움(솔직히 말씀드리면 불만)은 경,율,론에 통달한 삼장법사 현장이 '관자재보살이 최고의 지혜인 반야바라밀을 얻었고, 그 지혜란 오온이 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경지를 말한다. 그런데 관자재보살이 얻은 지혜의 결과 '고통과 액난[고액苦厄]을 넘어섰다'는 표현을 선택한 것입니다.
범어본梵語本에 따르면 사실 이 부분은 '조견오온개공'
에서 그쳐야 바른 번역입니다.
백번 양보하여 관자재보살과 같은 보살지위에서 얻는 수행의 결과라면 적어도
'득열반'[得涅槃:일체의 번뇌에서 벗어남] 이나 도피안[度彼岸:깨달음의 언덕에 도달함] 이상의 표현이 뒤따라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물론 피안은 그 당시 중국에 없던 단어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서 현장이 '고액'苦厄이라는 세속적 냄새가 물씬 나는 단어를 선택한 데 비해 후반부에서 '구경열반究竟涅槃(궁극적인 번뇌를 모두 제압한 경지)' 이나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阿辱多羅三邈三菩提(최고의 깨달음을 얻음)로 표현한 것을 보면 앞의 '고액苦厄(고통과 액난)은 아무래도 그 격이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에 대단히 아쉽다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건 너 혼자의 생각이고, 경전의 한 대목으로 천 몇백 년을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왠 난데없는 시비냐" , "너 현장스님에 대적하여 네 실력 과시하려는 소영웅주의자 아니냐"고 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부처 이루려고 출가한 것이지 영웅 되려고 중 된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현장스님이 부처님 제자인 것처럼, 저도 당당하고 동등한 부처님 제자입니다.

그러니 째째하게 소영웅주의를 꿈꾸는 말 장난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불법의 도리 그 자체를 가지고 냉정히 되짚어 보자는 말입니다. 그저 말로만 '집착에서 벗어나라' 하지 말고 말입니다
그런 마음의 준비를 해두시지 않으면 앞으로 계속 감당해야 될지도 모르는 저의 당돌함에 기가 막혀 혹시라도 냉정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色不異空 空不異色

= 물질과 문화 =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우리 모두의 희망입니다. 여기서 그 '잘'이 개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냐 하는 문제는 논외로 합니다.
지구는 약 46억년 전에 서서히 탄생했습니다. 최초의 인류는 적어도 250만 년 이전에 출현했고, 현생 인류의 조상은 약 3~4만 년 전에 출현하였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하지만 '의미 있는' 역사는 불과 약 8천년 전인 기원전6000년 경에 시작된 신석기 시대라고 하는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여기서 '의미 있다'라는 말은 인간의 문화가 구체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는 뜻입니다. 신석기시대에 접어들면서 인류가 비로소 그럴듯한 도구를 사용하여 농경과 목축을 할 수 있었고, 그 결과 한 곳에 정착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는 것이지요.(다만 그레이엄 핸콕 같은 사람은 '신의 지문', '신의 암호', '우주의 암호' 같은 저서에서 일관되게 적어도 1만2천년 전에 초고대문명이 존재 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은 현재 발견된 유물과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만만치 않은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기원전 수 천년 전에 제작된 것이 확실한 유물들 중에는 현대의 과학으로도 만들기 쉽지 않은 유물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제가 하고 싶은 말의 요점은 문화나 문명도 결국은 물질을 다루는 법에서 비롯되고 발전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자체가 인류의 역사로 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를 만들고 개량하려한다'는 인간만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의 진화론적 발전은 인류의 힘의 원동력이고,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하게 하는 강한 동기부여이기도 합니다. 이 물질을 다루는 기술을 과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또 한번 물질에 대한 배타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한국불교에 진지하게 문제제기를 해봅니다.

 

= 한국불교와 물질관 =

한국불교는 이상하리만큼 물질을 '배척의 대상'이나 '극복해야 할 욕심의 제공자'라고 생각하는 , 심지어 물질의 풍요는 곧 정신적 타락과 오염이라는 지극히 배타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듯 합니다. 그것은 스님들의 법문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듯 편협한 된 관점이 물질의 본성과 실상實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한 물질적 성과는 이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계의 절대 법칙인 엔트로피(entropy.무질서)증가 법칙의 한 가지 범주인 것입니다. 설사 그것이 인위적일지라도 물질이 하나라도 더 생기는 사실 자체가 이미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모두의 소망인 '잘 먹고, 잘 살자'도 물질의 풍요, 즉 무질서의 증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국 불가능 합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설하시며 한국의 스님들처럼 일방적으로 물질을 '책망'한 적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물질을 무조건 멀리해야 하는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물질을 제대로 보고 제대로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즉, 물질을 '공'空으로 보라 하신 것입니다.

뒤에 공에 대해 따로 설명하겠지만, 물질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 '물질 본연의 성품' 이상의 욕심을 일으키는 내 '마음'이 문제라는 가르침이 불교의 바른 물질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만족할 줄 모르는 나의 욕심을 탓해야지 자꾸 물질을 원인 제공자로 매도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아직도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아이들이 셀 수 없이 많은 현실에서 내가 굶지 않는다고, 수행에 장애가 되는 물질을 배척하자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자재를 설명하며 언급한 원효와 여인의 얘기에서도 알 수 있듯 원효의 마음이 장애였지 여인이 수행을 방해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불교를 믿는 국가는 다 가난하다, 불교는 현실적이지 못 하다라는 기독교인들의 말에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왜 그런 말이 나오게 되었는지 반성하자는 뜻이 담겨있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깨달음이란 물질을 떠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물질의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공으로 받아드리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더 적극적인 표현으로는 '물질을 충분히 활용하여 쓰되, 집착하여 마음에 두거나 욕심을 일으켜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주 거칠게 표현하면, 법문을 통해 물질을 책망하려거든 차를 타지도, 신문이나 방송에 출연하지도, 책을 출간하지도, 마이크를 사용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전기누전으로 불이 나면, 부주의를 탓하지 말고 전기를 발명한 에디슨을 경멸해야 합니다. 나아가 신도에게 재물을 보시 받기보다, 오히려 인간이 물질을 거듭 만들어내기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도 부처님이 수행하듯이 숲 속의 큰 나무 밑에서 말입니다.

무소유란 말 자체도 물질의 양적인 소유에 대한 상대적 표현이니 때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시와 공덕을 말하면서, 무소유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무소유를 실천하는 사람이 어찌 보시를 할 능력이 있겠습니까?  정신적 무소유라고요?  그렇다면 더더욱 소유, 무소유의 문제로 설명할 부분이 아니라 물질이 공이라는 반야심경의 정신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 아닐까요?

제가 이렇듯 한국불교에서 그냥 넘어가고 있는, 별 것 아닌듯한 부분을 현미경을 들이대듯 분석하며 성토하는 데는 또 다른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 이 시대의 수행방법들은 적절한가? =

한국불교의 수행법은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주류主流입니다. 간화선법이 아니면 죄다 사도邪道라고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스님도 있습니다.

이제부터 선사禪師들이 생각하기에는 천박하기 그지없는 '물질'이 수행에 어떤 직접적이고 깊은 영향을 주었는지를 밝혀 보겠습니다. 간화선看話禪묵조선默照禪의 이해를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하려 합니다.

묵조선은 지극한 마음으로 본성을 관찰하면 밝은 본성이 저절로 묘한 작용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중국 송나라 때
조동종曹洞宗굉지(宏智1091~1157)선사가 주창하였습니다.

묵조선법은 본래 '자성청정'自性淸淨의 신념을 기본 전제로 한 수행법으로, 자기 속에 내재하는 본래의 청정한 자성에 의지하는 선禪 수행법입니다. 즉, 묵좌默坐하는 것만이 지혜의 작용을 활발히 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바른 길이라는 것입니다. 굉지선사는 이 묵조법의 원천이 달마대사에 있다고 분명하게 피력하였습니다.

반면 간화선은 같은 시대의 대혜(大慧 1089~1163)선사가 주창한 수행법인데, 큰 의문을 일으키는 곳에 큰 깨달음이 있다고 하여, 화두話頭를 수단으로 '자기'를 규명하려 하는 선법禪法 입니다. 그리고 이 큰 의문을 일으키기 위해 이른바 화두란 것을 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어느 선사에게 "불법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답 하길 '뜰 앞의 잣나무', 혹은 '마른 똥 막대기'하여 버립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일체의 생각의 논리에서 벗어나 오직'왜?'라는 의심만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도 가장 애용되는 화두로는 조주趙州 선사의 '무'無 자 화두를 들 수 있습니다. 어느날 한 스님이 조주에게 '일체의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 했으니, 개 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라고 묻자
조주가 없다 즉
'무' 라고 답한 데서 온 화두입니다.

그런데 이에 화두를 받은 수행자가 만약 '왜 유독 개에게만 없다는 말씀입니까?' 라고 반문한다면 그는 간화선을 하기에는 기본자질 미달감 입니다. '분명히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데 어찌 없다고 답하였을까? 도대체 '왜?' 라는 큰 의문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 큰 의문인 '왜'가 , 화두가 되는 것입니다.

이 화두는 공안公案 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에서도 중국인의 사고를 엿볼 수 있습니다. '공안' 즉, 공기관인 관청의 결의안은 백성이 무조건 따라야 하듯이 공안 즉, 화두도 무조건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는 공고인 것입니다. 이 공안은 1700가지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 한 스님이 공안과 화두를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의 설명이면 두 선수행법을 비교하기에 충분할 것 같습니다. 당시에도 두
선법禪法의 대립은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대혜가 굉지를 맹렬히 비난하여 묵조선을 사선邪禪이라고까지 몰아 붙였을 정도이니까요. 어찌되었건 그 후 묵조선은 거의 사라지고 간화선이 활짝 꽃을 피웠으니 간화선이 승리한 듯 합니다.

논쟁이 시작된 지 천 년이 지난 지금 이제 제가 감히 개입해 보겠습니다. 제가 터득한 묵조선과 간화선의 차이입니다. 번뇌를 '번뇌'로 다스릴 수('다스리면' 이라고 하지 않은 것에 유념하셔야 합니다) 있으면 묵조선, 번뇌를 '화두'로 다스리면 간화선. 간단합니다.

이제 이 논쟁의 핵심이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아니, 그냥 평범한 '물질'과 어떤 인과가 있는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묵조선을 부정하는 이도 중국에 불교를 전하고 이후 한국불교에 절대적 영향력을 주고 있는 분이 중국 선불교의 초조初祖인 달마대사 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또, 왠 만큼 불교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달마가 소림사에서 9년 간 면벽좌선面壁坐禪 했음을 다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입니다. 초조 달마에서 육조 혜능까지 선불교의 법맥을 전수받은 분들은 간화선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분들은 묵조와 간화의 논쟁 이전 즉, 굉기와 대혜 보다 적어도 500년 전의 분들입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간화선 아니면 사도라 했던 대혜의 한 마디에, 초조 달마에서 육조 혜능(638~713)까지 여섯 분은 졸지에 불법이 아닌 외도 수행을 한 분들이 되어 버리는 심각한 모순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묵조선의 창시자인 굉지선사는 500여 년간 이어져온 전통적 수행법을 이어받았다고 '확신'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이 전적으로 오류였다는 결정적 증거도 없습니다.

같은 시기에 간화선을 주창한 대혜가 간과한 점은 묵조선을 공박할 것이 아니라, 묵조선으로는 깨달음을 추구하기 힘들어진 물질주의에 물든'세상'을 탓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굉지의 묵조법은 달마시대의 수행법을 원형原形으로 삼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 달마는 대혜보다 500년이나 앞선 시대에 수행한 분이었고 당시는 물질적으로 아주 부족했던 시절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달마시대에는 선수행을 할 때 일어나는 번뇌도 본능적 욕구와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해결하는 이외에는 다른 물질적, 사회적 장애가 별로 없었을 것이라 짐작해도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마음만 잘 다스리면
(묵조)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을 테지요.

반면에 대혜는 달마보다 문명이 발달한 시대, 다시 말해 물질적으로 상당히 번잡해진 시대를 맞게 되었습니다 . (아무리 옛 일이라 해도 500년의 물질적 변화는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단순히 먹고, 입는 것을 걱정하는 것 외에 다소 풍족해진 물질에 대한 상대적 욕심과 정치적, 사회적 변화에 대한 걸리적거림이 비교할 수 없이 많아졌을 것입니다. 자연히 번뇌가 더 많고 복잡해져,
'마음대로' 안 되니 번뇌를 조복해줄 강력한 '무기'가 필요했던 것이고. 대혜는 그 무기로 '화두'를 선택한 것입니다.

번뇌를 다스려 궁극적 깨달음을 얻기 위한 무기인 화두가 창, 칼 시대에서 수소폭탄 중성자란 시대로 접어든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접근이 필요하므로 판단을 접어두겠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 , 이번에는 제가 겪고 있는 경험으로 비유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처음 출가한 70년대 후반에는 스님들끼리 모여도 외적으로는 차이날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아무리 풍족한 절에 사는 스님이라도 컴퓨터도 없고, 휴대폰도 없고, 자가용은 더욱 없다보니, 서로를 비교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세대인 30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스님들이 모이면, 누구는 차를 바꿨느니, 누구는 몇 층 빌딩을 포교당으로 쓰고 있느니, 누구는 매스컴 탔느니, 누구는 몇 억 불사를 했느니 하며 사회적 물질적 조건으로 서로를 비교하는 게 현실입니다.

이 말은 수행자가 다스려야 할 '번뇌'가 30년 만에 갑자기 많아졌다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정도는 출가자에게는 번뇌의 증가라고 말할 가치도 없다고 하실지 모르지만 적어도 저는 번뇌의 폭주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

이제 제가 앞서 말한 묵조선과 간화선의 차이를 다시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번뇌를 '번뇌'로 다스릴 수('다스리면' 이라고 하지 않은 것에 유념하셔야 합니다) 있으면 묵조선, 번뇌를 '화두'로 다스리면 간화선. 이제는 아주 그럴 듯하게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세상이 바뀌어도 묵조해서 가능한 사람도 있다는 말이고, 화두로도 안 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견해이기도 한 것입니다.

마무리하면 불법을 논하면서 물질을 과소평가하거나, 마치 악의 원천인 듯이 몰아 붙이거나, 그 영향력을 애써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물질을,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色'공'空으로 이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머리가 복잡하니 좀 쉬어 가겠습니다.

역사상 가장 바보 같은 발언 10가지(간화선이 이런 처지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먼지의 철학 =

반야심경의 결론은 실제로는 앞 부분인'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에서 이미 내려진 것이고,'사리자, 색불이공'이후는 이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반야심경의 이해의 핵심은 오온五蘊 즉, 색수상행식을 인식의 전환을 통해-이것을 전도몽상에서 벗어나서 것이라 설명하지만-공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느냐에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색, 곧 물질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그 관건이 있습니다. 그러니 반야심경은 물질의 올바른 이해를 기본으로 하여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는 것이 목적인 셈입니다. 제가 물질에 대해 다각도로 분석을 해 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팝송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지금은 오페라에 매료되어 있는데 특히 모짜르트의 마술피리를 좋아합니다. 물론 팝송도 즐겨 듣습니다. 팝송의 가사 중에는 상당히 철학적 메시지를 전하는 것들이 있는데,'캔사스'라는 그룹이 30년 전에 히트시킨 Dust in the wind(바람속의 먼지)라는 곡이 바로 그렇습니다

l close my eyes
Only for a moment 잠시동안 눈을 감으면
And the moment`s gone 그 순간은 영원히 지나가 버립니다

All my dreams 나의 모든 꿈이
Poss before my eyes a curiosity 눈 앞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Dust in the wind 바람 속의 먼지와도 같이
All they are is dust in the wind 참 이상한 일입니다 바람 속의 먼지와도 같이

Same old song 같은 옛 노래
Just a drop of water in on endless sea 끝없는 바다에 그저 하나의 물 방울처럼
All we do
Crumbles to the ground though we refuse the see 우리의 모든 것이 부서지고 흩어져 땅바닥에 뒹굽니다
Dust in the wind 바람 속의 먼지와도 같이
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우리 모두가 바람 속의 먼지와도 같습니다

Don`t hang on 매달리지 맙시다
Nothing lasts forever but the earth and sky 영원한 것은 하늘과 땅밖에 없습니다
lt slips away 모두가 가버리고 맙니다
All your money won`t another minute buy 당신의 재산을 다 주어도 단1분도 사지 못합니다

Dust in the wind 바람 속의 먼지
All we are is dust in the wind 우리 모두가 바람 속의 먼지인 것입니다

Dust in the wind 바람 속의 먼지
Everthing is dust in the wind 그 모든 것은 바람 속의 먼지인 것입니다

저와 같은 감성을 가진 분이라면 이 노래의 가사에서 '
바람속의 먼지'에서 반야심경의 '색즉시공'色卽是空의 도리를 느끼셨을 것입니다 또 '어, 중이 제법이네'라고 감탄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제가 졸저인 '이판사판 화엄경'에서 물리학 등 전문이론을 티끌만큼 인용했다고 해박하다는 소리를 좀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기분이 좋아 우쭐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게 좋아할 일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제가 대학교수라면 굳이 해박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 테니까요. 즉, 중 치고는 의외로 무식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한데, 이건 스님들은 바깥 학문에 문외한이다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이 책을 보시는 분은 그런 선입관이 깨지길 기대해 봅니다.

 

 

= 물질관의 변화 =

(물질관의 변화를 들어가기 전에 늘 걸리는 점이 있어 한마디 하려고 합니다,자료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시대나 인물의 연대 표시를 할 때마다 불편한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기원전(B.C)이란 용어의 기원은 그리스도 탄생전(before Christ)의 약자略字 입니다. 기원후(A.D)는 라틴어로 그리스도의 해(Anno Domini)의 약자인데, 예수의 탄생연도에 대한 고고학적 진위는 접어두고라도 이것이 유일한 표기방법인 것처럼 되어버린 사실이 서구의 문화적 침탈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철학자로 불리는 그리스의 탈레스(기원전7세기)는 만물의 근본을 물로 보았다고 합니다.
역시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384~322)는 지구를 이루는 물질을 흙,물,공기,불의 4원소로 규정하였는데, 이는 초기불교에서 지수화풍을 4대 구성요소로 본 것과 외형상으로는 같습니다.

인간의 물질에 대한 기본 관념은 무려 1,700여년 간 진전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영국의 과학자인 로버트 보일이 1,660년을 전후해 물질의 구성요소를 분석하여 원소론元素論을 정립하게 됩니다.
또 프랑스의 라부아지에(1743~1794)는 원소를
'화학 분석이 도달한 현실적 한계'라고 정의하고 33가지의 원소가 있다고 하였고. 이탈리아의 과학자 아보가드로(1776~1856)는 기체가 원자가 아닌 분자로 되어있다고 주장 하였습니다. 그 후 러시아의 멘델리이프가 1869년 고등학교 때 배우는 주기율표를 처음 만들어 원소들을 그 성질에 따라 100여개로 구별하였습니다.

근대의 물질관은 프랑스의 데카르트가 주도하였습니다. 데카르트(1596~1650)는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이분화하여, 물질을 철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최초의 철학자였습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정신과 육체는 분리되어 있어 죽으면 영혼은 육체와 분리된다, 그리고 죽음이란 오래된 기계가 부서지듯이, 몸의 기능이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 것 일뿐이다.'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현대 서양의 거의 모든 과학적 성과는 이 데카르트의 이론을 바탕에 두고 전개된 것입니다.

현대의학의 총아인 생명공학과 장기이식 같은 분야도 실은 생명을 분자단위까지 쪼개고, 각 분자를 분석하여 그 결과를 종합하는 다시 말해'부분의 합이 전체'라는'요소환원주의'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엄밀히 연구를 하여보면 데카르트와 뉴턴으로 대변되는 이 이원론적 세계관의 근저에는 당시 유럽의 기독교적 신의 관념에 절대적 영향을 받고 있다는 증거들이 가득합니다.

다음은 데카르트의 독백입니다.
나는 한번은 이런 상상을 해 보았다. 우리의 몸은, 가능하면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게 할 의도로 신이 지상에 만든 조각품이나 기계와 다를 바 없다는 상상이었다 . 신은 그 기계에 우리의 사지와 닮은 형상과 색깔을 부여했을 뿐 아니라, 달리고, 먹고, 숨쉬는 등,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모방할 수 있는 내적인 측면도 불어넣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런 기계들은 물질로부터 나왔으며 기관들의 배열에만 종속되어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현대의 물질에 대한 인식은 데카르트 이후 다시 거의 300년이 지난 다음에야 독일태생의 아인슈타인(1879~1955)에 의해 도전받습니다. 하지만 그도 아직은 '만물은 조물주 신의 작품'이라는 미련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획기적일지도 모르는 '상대성 이론''특수상대성 이론'에서 물질에 시간을 더한 4차원이란 세계를 설명합니다. 이 이론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시간과 공간이 둘이 아닐 수도 있다는 '입체적' 물질관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런 아인슈타인도 말년에 물질의 양자론적 성질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않는다.'라는 유명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잘못된 결론에서 벗어나질 못하는데, 그것은 '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운영한다'라는 기독교 교리가 그의 실험실에서의 결과를 압도했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 이후의 인간의 물질관은 괄목할 만큼 시야가 넓어지기 시작합니다. 아마 20세기는 인간의 문명이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한 100년이 될 것입니다. 당연히 그 공로는 과학자들의 몫인데, 그 중에서도'양자역학'의 발견이 가장 주목받을 것입니다.

 

 

= 양자론과 반야심경 =

양자역학으로 보는 물질의 세계는 정말로'이상한 세계'입니다.

양자역학은 독일의 물리학자인 플랑크(플랑크 상수로 유명,191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 1858.4.23 ~ 1947.10.3), 오스트리아의 이론 물리학자 슈뢰딩거(슈뢰딩거의 파동 방정식으로 유명,193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 1887.8.12 ~ 1961.1.4), 또한 독일의 이론 물리학자 하이젠베르그(불확정성의 원리로 유명,193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 1901.12.5 ~ 1976.2.1)등이 정립한 전혀 새로운 개념의 물질관입니다.

이들의 이론은'양자론'量子論이라는 이름으로 총칭되는데, 간단히 말하면 물질의 최소 단위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규명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기존 물리학은 물론 공학과 우주론, 의료 생명공학과  철학 등을 근본적 재조명을 하게하는 아주 강력한 이론체계입니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1960년대 미국과 유럽에 불어온 새로운 문화운동)이란 것도 그 사상적 기반은 양자론에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여러분도 양자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과서에서 배운 모든 과학적 지식이 몇 십 년 안에 이 양자론에 의해 전부 과거의 이론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양자론에 대한 응용이 앞으로의 과학기술을 선도할 것이 거의 분명합니다.

반야심경에서 언급하는 물질에 대한 개념의 이해는 여러분이 양자론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소화해 내느냐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양자론은 정말 우연이긴 하지만 '마음이 물질과 다르지 않고, 내 마음이 물질에 영향을 준다'는 불교의 믿음과 아주 일치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계속될 양자론에서 보는 물질의 성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과서적 지식보다는 종교적인 믿음을 내는듯한 마음으로 이해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양자론으로 이해하는 빛의 실체 =

현대과학의 큰 쟁점 중 하나가 빛의 성질에 관한 것입니다 즉, 빛이 입자냐 파동이냐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설명 드리면 입자란 빛이 아주 작은 알갱이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과 빛이 마치 호수에 돌을 던지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파동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의 대결입니다. 아인슈타인은 1922년 '양광자 이론'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습니다. 그전까지는 빛은 회절현상을 갖는 파장이라 생각했었는데, 아인슈타인이 빛에 파동의 성질과 입자의 성질이 동시에 있다는 것을 실험으로 증명해 보인 것입니다.

빛이 입자의 성질만 갖고 있다면 여러분이 손전등을 비추었을 때 그 비춰진 부분만 동그랗게 원으로 밝고, 밝은 쪽 경계 부분부터는 '완전한 어둠'이어야 합니다. 마치 레이저 포인트의 점처럼 말입니다. 반면에 빛의 파장의 성질만 가지고 있다면 어두운 방안에서 검은 종이(빛의 반사를 막기 위해)에 손전등을 비출 경우 검은 종이 뒤에도 빛이 하나도 도달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파도가 방파제를 넘지 못하는 빛이 '입자'로만 이루어진 것이어야 한다고 가정할 때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빛의 실제의 현상은 그렇지 않습니다.어두운 방안의 한 곳에 빛을 쪼이면 빛은 직접 쬐이는 부분 말고도 방안 희미하지만 방파제(검은종이)를 '휘돌아' 방의 모든 곳에 영향을 줍니다. 이 이치는 호수에 큰 돌을 던지면 그 호수 중간에 큰 바위가 몇 개 있어도, 그것이 내가 던진 돌의 파장이 호수의 모든 가장자리에 도착하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 못하는 현상과 같습니다. 즉, 빛은 파동의 성질과 아인슈타인이 말한 데로 입자의 성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도 이렇게 간단히 설명하는 빛의 물리적 성질을 아인슈타인 이전까지는 아무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어이없이 하나의 성질만을 고집한 과학들이 어리석다고 비난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빛의 이 이중적 성질은 그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중세의 과학자들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지동설地動說을 처음에는 제 정신으로는 받아드릴 수 없었던 것과도 비교할 수 있을 성싶습니다.

이렇듯 양자론量子論은 그 이전의 과학적 성과를 대부분 손 보아야 할 이론들로 전락시킬 수도 있는 즉, 물질관을 기조에서부터 흔들고 있는 그러나 의심할 수 없는 '증거'들로 점점 확고해지고 있는 미래의 과학 중 하나인 것입니다.

 

= 양자론으로 이해하는 전자 =

화학적 방법으로는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물질의 기본 단위입자를 원자原子라고 하는데 '우주소년 아톰''아톰(atom)'이 바로 이 원자를 말합니다. 이 원자는 물질의 화학적 성질의 최소 단위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어떤 물질의 기본단위인 원자를 더 쪼갤 수 있다면 그 물질의 성질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이 원자에 구별하기 쉽도록 가장 단위가 작은 순서대로(입자의 갯수가 적은 순으로) 1부터 번호를 매겨놓았습니다.  1번은 수소, 92번은 우라늄 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지구상에 천연으로 존재하는 이 원자는 92번까지이고, 그 이후의 원자는 실험실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들 입니다. 한편 최근에 북한의 우라늄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는 단순한 광석에 불과한 이 물질에 원자핵 수준의 기술이 더해지면 핵발전소나 핵 무기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좀더 광범위하게 제가 여러분에게 반야심경색(물질)에 대해 설명해 드리기 위해 공부한 실력을 본격적으로 발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92개의 천연 원자는 표기하는 숫자가 클수록 상대적으로 나중에 만들어진 물질이라는 설명도 가능합니다. (이 원칙은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데, 행성의 경우 그 원자의 종류가 많을수록 생긴지 오래 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원동력인 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구성되는데 이 아미노산은 탄소와 수소라는 원자가 '주 재료' 입니다. 몸이 극도로 허약할 때 맞는 링거주사의 성분도 대부분 이 아미노산으로 몸에서 단백질로 합성되어 몸에 활기를 주라는 처방입니다)

수소는 원자핵 중에 양자가 하나뿐인 물질입니다. 가장 간단한 구조를 이루고 있어 1번을 차지했습니다.이 말은 우주가 만들어질 때 가장 처음 만들어지고, 또 지금까지 전 우주에 걸쳐 가장 흔한 물질임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태양이 빛을 내는 것은 수소원자 두 개가 결합하여 헬륨이란 원자가 되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즉, 태양은 수소폭탄이 한없이 계속하여 터지는 것과 물리적으로는 똑같습니다. 물은 수소원자 두 개가 산소원자 하나와 결합하여 생긴 '인과因果'의 부산물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누구든 탐내는(저는 양자론을 알기에 그렇지 않지만) 다이아몬드도 실은 연필심이나 양초와 같은 재료인 탄소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다만 탄소 원자가 결합하는 '방식'이 다른 것일 뿐입니다. 탄소원자가 지표 아래 몇 십 미터의 상태에서도 결합하면 흑연이 되고, 아주 강한 온도와 압력에서 결합할 때는 다이아몬드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표면의 탄광에서는 탄소의 합성물인 석탄을 캘 수 있지만, 지표 아래로 수십 킬로미터를 파 내려갈 수 있는 기술만 있으면, 같은 탄소지만 높은 온도와 압력으로 생성된 다이아몬드를 무진장 캘 수 있다는 말입니다.
( 지구 핵을 탐사하는 이야기를 그린 SF영화 코어에 실제로 이 멋진 장면이 있더군요)


이제 원자를 이루는 전자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원자는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존재하는
소립자素粒子 입니다. 학교 물리시간에 본 그림을 연상해 보시면, 원자핵을 돌고 있는 전자의 모습이 마치 태양(원자핵)지구(전자)가 돌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설명법은 양자론 이전의 고전물리학의 전형입니다.

그런데 원자를 관찰해보면 원자핵을 중심으로'일정한'궤도를 도는 전자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전자로 실재한다는 겁니다. 그림으로 표현하려면 원자핵을 둥글게 둘러싼 구름모양으로 전자를 표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수박씨(원자핵) 하나에 수박껍질(전자)을 입체적으로 그리듯이 말입니다.

더욱 믿을 수 없는 사실은 실험자가 전자의 위치를 측정하려다 보면 그 전자의 질량을 측정할 수 없고, 반대로 전자의 질량을 측정하기 위해 관찰하면 그 전자의 위치를 측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10의 10000000000000분의 1㎝인 원자핵 단위의 미시적 세계에서 벌어지는 기이한'관찰자 효과'는 하이젠베르그(1901~1976독일의 물리학자,1932년 노벨 물리학상)가 발견한 것으로 '불확정성의 원리'라 하는데, 아인슈타인조차 전자라는 물질이 갖는 기본적 행태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결정론을 포기하지 못하고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해 버렸는데, 이 말은 결과적으로 최고 과학자의 합리적 판단이 자신의 종교관에 지고 말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찰자가'마음먹기'에 따라 관측의 결과가 달라지는 전자의 행태 즉, 양자론은 불교적으로 해석하면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가르침이나 말 그대로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라는 불법과 딱 맞지 않습니까? 물론 화엄경에서는'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한 마디로 멋지게 끝내 버리지만 말입니다.

이쯤 되면 반야심경'색'色 이 물질이란 것쯤은 알고 있었는데 이 놈이 뭘 그리 군더더기를 붙이고 있냐고 생각하셨던 분도'어, 그렇게 깊은 뜻이'하고 생각해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그런데 실은 이 물질의 본질에 대해 좀 더 넓은 이해를 촉구하기 위해 아직은 좀 더 지루한 설명을 계속해야 할 것 같은데 그전에 먼저 저의 당돌한 속내부터 털어 놓겠습니다

 

아이고(我離苦) 이래도 모르시겠습니까? =

감히 말씀드리면 제 인생의 목표는 우리나라 국민의 정신적 수준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래야 국민 중에서 스님도 되고, 목사님도 되고, 신부님도 되는 것이니 종교적 수준도 높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출가한 중이므로 우선 불교집안의 수준부터 높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마음가짐일 겁니다. 제가 속한 불교집안의 속내부터 터놓고 말씀드리겠습니다. 2004년 10월 6일 벌어진 일입니다. (아래 글은 현대불교신문의 10월7일자 기사 중 발췌했습니다.)

10월 6일 오후5시 해인사 대웅전에서 법전 스님은 해인사 주지 세민 스님을 비롯해 현응, 원택, 선각 스님 등 해인사 산내 대중스님과 심우조 합천군수 등 군내 주요 기관장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수성 전前 국무총리를 범국민 추진위원장에 위촉하는 위촉패를, 해인사 주지 세민 스님을 총도감에 임명하는 임명장을 수여했다. 또 스님은 이수성 전前 총리를 “남북통일, 국운융창 세계평화를 발원한 원력의 화신”이라며 치하하고, “동판대장경 불사의 회향을 위해 해인사 사부대중과 동판 대장경 추진위원회는 새의 양날개가 되어 불사의 원만회향을 위해 힘을 모아 정진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어 이수성 前 국무총리는 인사말을 통해 “불자가 아닌 가톨릭 신자이며 큰 자리를 맡기에 부족한 점이 있어 사양의 뜻을 밝혔으나 종교를 초월한 불사이며, 열심히만 해달라는 세민 스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맡게 됐다”며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종교간 대화합 국민의 대단결로 무서운 경쟁의 세계에서 우리나라를 우뚝 세우는 기폭제의 역할을 다시 한번 해 줄 수 있을 것이라 간절히 기원하면서, 조용한 가운데 겸손하게 그러나 참으로 성심을 다해 일하겠다”고 말했다.

요점은 팔만대장경을 동판으로 만드는데 그 추진위원장을 가톨릭 신자에게 맡겼는데, 그 이유는 국내
'마당발'로 소문난 전 국무총리를 자금조달의 적임자로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보도를 접한 직후인 2004년10월 일요 법회 때 법문하며 공개적으로 제 생각을 말했습니다.
'종정 때문에 자존심 상해서 중 노릇 못하겠다(실은 '쪽 팔려서'라고 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평상심이 도道라는 말은 중 노릇 몇 년 만하면 다 이해하는 말입니다. 더욱이 백수의 왕 사자는 다른 짐승에 먹혀 죽는게 아니라 뱃속의 벌레 때문에 죽는다는 말은 햇중이라도 골백번 듣는 말입니다.
저는 사자는 못 되더라도 사자와 벌레는 가릴 정도의 안목은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이런
'해괴한' 결정을 종정이 아닌 다른 사람이 내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아마 불교의 미래가 가톨릭에 달렸다고 아우성일 것입니다.

제가 좌절하는 이유는 이런 종정의 상식 이하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불교집안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불교 내 몇 몇 단체들의 경우 자신들의 이익이 걸린 불교 내부의 문제나 사회적, 정치적 사안에는 걸핏하면 즉각 '성명서'를 내고 행동에 돌입하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스님이나 신도단체에서도 불교 망신이라거나 혹은 잘못된 결정이니 시정을 요구한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제가 시력은 무척 나빠도 귀는 2.0으로 아주 상태가 좋은데도 말입니다.

결국 2005년 6월 27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가톨릭 신자 이수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해인사 팔만대장경 동판 간행 범국민추진위원회'의 공식 출범식을 마쳤습니다.

그 후 몇 개월간 공청회도 열고 해인사 주지도 바뀌는 등 진통이 있었지만 사실상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경제적으로 이 어려운 시대에 81,258명을 선착순으로, 최소 동참금이 100만원인 거의 1천 억에 달하는 ‘불사’不事(해서는 안 되는 일)를 일간지에 억대의 전면 광고까지 내대며 ‘불사’佛事(부처님의 일)란 이름으로 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 돈이면 우리나라에 전깃세 못 내고, 밥 굶는 결식 아동은 없게 할 수 있는 규모입니다. 과연 어느 쪽이 고달픈 중생을 위한 자비를 행하는 진정한 불사일까요 따라서 해인사 불사不事는 당연히 쓴 맛을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가톨릭? 오십보 백보입니다.
이번의 발췌는 해인사 팔만대장경 동판 추진위원장 건에 관한 발표가 있은 지 불과 한 달도 못 된 2004년10월25일자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김 추기경은 마지막으로 “신앙이란 하느님이 자신을 언제나 사랑하고 계시다는 믿음”이라며 “하느님은 애국가에도 나오듯 대한민국을 보우하고 계시지만 인간은 미련해서 시련을 겪지 않으면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한국의 상황이 하느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시기인 것 같다”며 “가톨릭 신자로 세례를 받았지만 성당은 다니지 않는다는 노 대통령이나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게 특별히 하느님께 의탁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아이고(我離苦), 애국가의 하느님과 기독교의 하느님이 같답니다. 저는 우리나라 종교를 대표함은 물론, 그 언행에 불교적 수행과 기독교적 영성과 축복이 가득하여 어린 백성을 이끄셔야 할 두'대장님'이 헛발질 하신 것에 아직도 가슴이 아픕니다.(2006년 3월초 또 한 분의 대장인 다른 추기경님이 추가 임명되셨습니다.) 외교적인 언사로 표현하면'앞날이 걱정된다'고, 제 성질대로 표현하면'아, 속았다'라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를 보고'그 중 정말 속 좁네'하신다면 차라리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그 중 하나만 보고 둘은 못 보네'하신다면, 제가 못 보는 그 나머지 하나는 도대체 무엇인지 겸허하게 배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그 중 말이 맞네'라는 분이 행여라도 계신다면 혼자만 알고 계셔야 할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종교계와, 문화계, 학계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분야에서 입바른 소리 했다가는 정치판을 닮아'저 놈이 무슨 꿍꿍이가 있어'혹은'영웅주의' 운운하며 매도당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실추될 명예도 없고, 더더욱 영웅되고 싶은 생각은 아예 없으니까요. 앞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부처가 되어야 하거든요.

 

= 양자론과 형태장으로 보는 물질 =

반야심경색色 즉, 물질을 현대과학의 부정할 수 없는 이론인 양자론을 중심으로 이해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저의 물리학적 설명이 공空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반야심경에서 물질이 곧 공空이다[색즉시공色卽是空] 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양자론의 전자가 확률적으로 '어떤 위치'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불교의 정신적 직관이 현상세계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깨달음의 세계가 오로지 형이상학적이고 무상한 세계가 아니란 말입니다) 모든 물질이 최소한의 단위에서 이런 '확률적 존재의 성질'을 갖는다는 것은, 물질의 앞날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결정론이나 숙명론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관찰자의 의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실은 '결정된다'가 더 정확합니다)는 사실은 인간의 마음이 물질에 '관여'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인슈타인이 그랬듯이 여러분도 당연히 이 두 가지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에 익숙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서 제가 양자론을 받아들이려면 종교적인 '믿음' 같은 것이 요구될지 모른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양자론에 '형태장'形態場의 개념을 붙이면 더욱 불교적이긴 하지만 그만큼 믿기도 더 어려워집니다. 이쯤 되면 여러분 사정이 딱하더라도 양자론에서 물질이 마음과 관련이 있다는 확고한 실험결과를 부정할 수는 없으니, '색즉시공'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신과학의 대표주자격인 영국출신의 루퍼트 쉘드레이크(Rupert Sheldrake,생물학자 1942~)박사의 또 다른 이론인 형태장이 어떤 것인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주인이 사무실에서 집으로 가려는 의도를 갖는 순간 멀리 떨어진 집에서는 갑자기 애완견이 하던 모든 놀이를 멈추고 문을 향해 달려가 주인을 기다린다. 이것은 텔레파시가 뛰어난 미래의 어느 개가 행하는 행동이 아니다. 주인과 교감이 잘되는 애완견이라면 누구나 그것이 가능하며 그것을 애완견과 주인을 동시에 촬영하는 실험을 통하여 증명했다고 쉘드레이크 박사는 말한다. 쉘드레이크 박사는 생물 집단 사이에 지금까지 과학이 인식하지 못한 어떤 연결 수단이 존재할 가능성을 검토하고, 실험하였으며 거기서 얻은 긍정적이고 놀라운 결과를 발표한다. 특히 애완견이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주인의 의도를 알아채는 실험은 그들의 텔레파시 능력을 놀라울 정도로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서로 다른 종끼리 상호 소통이 일어난다면 같은 종 내부에서 일어나는 미지의 연결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비둘기들이 집을 찾아오는 능력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연결 수단에 의한 것이라면 집 찾아오기 능력을 지닌 많은 다른 종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새, 물고기, 포유동물, 곤충, 그리고 그 밖의 동물들의 이주에 유사한 힘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또한 사람의 경우에도 사냥꾼들과 유목민들에게 잘 발달되어 있는 방향감각이 그와 유사한 특성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발견되지 않은 서로 다른 종류의 장(場)들이 많이 존재할 수도 있다. 애완동물과 주인 간의, 비둘기와 둥지 간의, 흰개미 집단 구성원들 간의 연결 방식은 완전히 서로 다른 현상이며 공통점이 전혀 없을는지도 모른다. 각각의 현상은 새로운 종류의 장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거나 원격 감응을 일으키는 물리적 연결에 의한 것일 수도 있으며, 전반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일 가능성도 있다.나는 이런 현상들이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하는 가설이 더 경제적이라고 생각한다. 각각의 현상들 모두는 유기적인 조직의 각 부분들을 아우르는 한 가지 종류의 새로운 장을 나타내는 다양한 표현 양태들일 것이다(그림 참조). 나는 그것을 형태장(形態場)이라고 생각한다. 이 장을 '생물학적 장(biological field)' 또는 '생명장(life field)' 등 다른 이름으로 명명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앞으로, 통합된 장 이론이 확립되기 전까지 모든 새로운 종류의 장(場)은 어쨌든 물리학의 알려져 있는 장과 연계될 수밖에 없다.
근본적으로 지금까지 물리학계는 생명계에서 새로운 장을 입증해주는 현상들이 존재할 가능성을 무시해왔기 때문에 통합된 이론이 완성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실험 결과들이 속출하는 한, 그 가능성은 활짝 열려있다.<루퍼트 쉘드레이크 저 'Seven experiments that could change the world'(국내 번역본 - 양문출판사 간)' 중에서>

이 미완성이지만 현실적인 현상들을 설명하는 형태장을 저는 양자론과 접목시켜 보았습니다.
그 결과가 물질은 전자단위에서 물질은 정보를
'교환'하고 '습득'하고 '공유'한다는 것인데, 이 논제는 매우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데에만 적어도 다른 책 한 권이 필요할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부족하겠지만 말입니다.

다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점은 불교적인 해석을 하면 '모든 존재하는 것은 서로 상의상관相依相關인 연기론緣起論적 존재다' 다시 말해 화엄경'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를 과학적으로 푼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여러분들이 당장의 반야심경의 이해보다, 불교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갖는 것이 미래불교를 위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돌한 예를 들겠습니다.

불교 공부하는 이가 스님께 물었습니다.
'반야가 무엇입니까'
답, '공'
'공은 무엇입니까?
답, '반야'
이는 무슨 뜻입니까?
답, '할!'

이런 식의 불교로는 중생의 의문을 해소할 수도 없고, 반야나 공을 이해시킬 수도 없고, 더더욱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뒤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이런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다룰 것입니다) 하기야 아직도 '영험설화''기도빨' 운운 하는 법문에 중생들이 더 솔깃하니 굳이 저처럼 골치 아프게 파고들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앞의 문답은 그래도 기복불교는 벗어난 수준이기는 합니다.

 

= 물질의 또다른 성질인 동종요법 =

이번에는 생명과학 쪽으로 가보겠습니다.

동종요법의 대 원칙은 “비슷한 것으로 비슷한 것을 치료한다”이고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 “희석의 법칙”이 필요하다고 언급하였습니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희석의 법칙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한마디로 식물, 동물, 광물질을 찧거나 빻아서 증류수나 알코올에 녹여 희석하여 동종요법 약물을 만듭니다. 연속되는 정-배수 희석과 ‘진탕’이라는 섞는 과정을 잘 지켜야 동종요법적 약효가 발생 합니다. 정해진 룰과 방법을 따르지 않는 희석의 경우 약효가 전혀 없음은 통계적으로 잘 입증되어 왔습니다. 여러 번 희석하여 원물질의 분자가 전혀 없을 때에도 약효가 있고, 희석을 거듭할수록 약효가 높아진다는 사실은 물질 과학적 사유를 바탕에 깔고 현대를 동류하는 많은 사람이 처음 동종요법을 접하고 실망 하는 대목입니다.
물론 지금까지 알려진 과학의 도구와 방법으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명확하게 밝혀내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러한 희석이 치료효과를 크게 증대시킬 뿐 아니라 부작용도 전혀 없다는 사실이 임상경험과 완벽한 통계 수준급 논문들(SCI급, Science Citation Index)의 정식 보고로 입증되어 왔습니다.
-중략-
희석의 법칙은 희석이 거듭될수록 상식과는 반하여 약물의 효능이 커지며 부분적인 증상들보다는 전체(통합)적인 증상에 작용하는 경향이 커지며, 그 결과 부분의 육체적 증상보다는 전체성의 발로인 정신적, 심리적 증상에 크게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도로 희석된 약물은 개체의 전체성인 정신적, 심리적 측면과 전신적 육체증상에 강한 치료효과를 주게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원리로서의 동종요법(p44~p46)/지 은 이: 임종호/전파과학사


요약하여 설명하면 우리가 병이 나면 먹는 약은 아주 강한 화학물질인데 그 화학물질의 분자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수 천배 수 만배 희석시켜 사용해도 그 본래의 약과 같은 치료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약의 성질을 결정하는 분자가 전혀 없는데도, 단지 잠시 같이 있었다는
(희석과정) 인연만으로도 약의 효과가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뻥'이라구요? 공부도 안 해보고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의심부터 하는 것이 '뻥' 아닌가요?

 

 

= 구사론의 물질관과 색즉시공 =

구사론俱舍論'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을 줄여서 부르는 부파불교部派佛敎(소승불교)의 대표적 논서로 인도의 세친(世親:4~5세기)이라는 인물이 썼습니다. 이 세친은 거의 보살의 지위에 이르렀다고 할 정도로 불교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마음의 세계를 심층적으로 분석한 유식학唯識學도 이 분의 걸작입니다.

이 구사론과 유식학은 난해하기로 악명 높습니다. 한국불교 역시 세친의 사상을 절대적으로 신봉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위대한 세친이 이제부터 성법이란 중의 당돌한 논리에 망가지는 모습을 보시게 될 겁니다.

유식학은 반야심경의'의식'意識에 대해 설명을 할 때 거론할 예정이고, 지금은 물질을 논한 구사론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세친은 구사론에서 물질을
'색법'色法에 속한다 설명하며 그 성질은'질애'質碍
라고 하였습니다.
질애란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고
(質), 공간을 점유하고 있어 서로 장애(碍)
가 된다는 말입니다.
부연하면 한 공간을 점유하는 물체는 상호 포개어 존재할 수 없다고, 서로의 자리를 침범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책장을 들여놓은 자리에 텔레비전을 동시에 설치할 수 없다는 아주 당연해 보이는 이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반야심경에서 물질은 공하다(색즉시공)고 한 진정한 의미는 물질의 실체에 장애를 일으킬 만한 요소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럼 왜 물질을 포개놓을 수 없느냐?
물질이 스스로 자성이 공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란 것이 저의 대견한 이론입니다.
인간이 만약 물질의
공성空性을 깨달으면 걸림이 없게 되어 물질인 내 몸이 역시 물질인 벽도 그대로 거침없이'그냥'지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는 깨달음의 단계에 이르면 아주 하찮은'재주'
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세친의 생각이 저보다 부족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제가 우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세친은 1,500여 년 전의 인물로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후 200년쯤 지난 시기의 대 학자입니다. 그 시대에는 반야심경은커녕 대승불교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입니다.

저는 수 십 년간 반야심경을 아마 수천 번은 독송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은커녕 그 뜻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반야심경을 설명한답시고 책을 내며 주절대는 것은 사실 '내 생각은 이런데 동의를 구해본다'는 표현이 정확합니다. 그러나 만약 세친이 이 반야심경을 한 번만이라도 들었다면 그는 틀림없이'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큰 깨달음을 즉시 얻었을 것입니다

 

= 물질, 우주, 그리고 나 =

물질에 대한 설명을 마치기 전에 아주 근사한 예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탄소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전형적인 원소인데, 우리에게 가까운 이 탄소의 일생이 인연에 따라 어떤
과果가 이루어지는지 한번 보십시오. 이것은 불교의 인과법因果法, 즉 연기론緣起論
을 과학적으로 설명해 주는 예이기도 합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화학자 프리모 레비(1919~1987)의 글 중에서 입니다.

-중략-
그것은 탄소원자 셋 그리고 칼슘원자 하나와 결합하여 석회암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런데 절단되어 석회로를 통과하면서 날개를 얻게 되었다.
(이 표현은 안타깝게도 레비가 유태인 집단수용소에 있었을 때를 묘사한 것입니다. 석회로란 그 악명 높은 '소각로'입니다)
그 원자는 바람에 포획되어 땅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하고 10km 높이로 상승하기도 한다. 하늘을 날고 있는 매에 흡입되기도 하고 바닷물에 세 번 용해되었다가 다시 공중으로 방출되기도 한다. 그리고 나서 우연히 유기화학적 모험을 하게 되었다. 운 좋게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다 그 안으로 침투해서 태양광선에 의해 고정되었다. 눈 깜빡 할 사이에 거미에 포획된 곤충처럼 탄소원자는 산소들로부터 분리되고 수소와 결합하여 결국 생명의 사슬에 편입되었다. 그것은 피의 흐름에 진입하여 신경세포의 문을 두드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탄소와 교체된다. 그 세포는 뇌에 속하고 그것은 나의 뇌이다.
(마틴 리스저 / 태초 그 이전 / 해나무)

제가 여러분이 가능하면 물질에 대해 폭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도록 공을 들이는 목적은 이와 같이 결국
물질=우주=나 라는 등식이 성립된다는 사실을 인식시켜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공'空 이란 개념도 이 등식의 성립과정을 '조견'照見하는 것이고, 그 성립과정은 다시 반야심경의 '오온'五蘊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물질을 단순히 욕심을 일으키는 대상쯤으로 간주한다면, 공의 이해는커녕 '불도佛道를 이루겠다'
는 수행자로서의 서원은 무량 겁 동안 접어두어야 할 겁니다.
제가 갖는 기우는 만약 이런 식으로 연구와 사고를 축적해가고 있는 서양의 문화와 철학이 불교에 그 과학적 성과들을 접목시킨다면, 우리는 백 년 후쯤 미국이나 유럽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구하기 위한 구도의 길에 올라야 할지도 모릅니다. 백 년 후에도 불공과 제사가 우리나라 절의 주
'임무'가 된다고 가정할 때 말입니다.

 

 

= 공의 이해를 위해 =

적성검사나 간단한 설문조사지를 받고 어떤 항목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해 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그럴 경우 항목 중에
'기타'란이 있으면 무조건 선택하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저도 그렇게 빠져나가는 사람 쪽에 속합니다.

그러나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 난감한 경우 중 하나는, 무엇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하는데 상대가 그 무엇 비슷한 것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사람일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적도지방에 사는 사람에게 얼음이나 눈의 느낌을 설명해야 할 경우입니다.
더 심하게는 미적분을 유치원 다니는 아이에게 설명을 해야 할 경우가 생겼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이러한 설명상의 문제가 불교를 어렵다고 느껴지게 만드는 주범입니다.
물론 불교 자체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쉬울 수도 없고, 쉬워서도 안됩니다. 그 흔한 세속의 자격증 하나 얻으려고 해도 얼마나 어려운 공부를 해야 합니까? 하물며
'나를 부처로 만드는' 불교가 쉽다는 것은 도리어 말이 되질 않습니다. 당연히 불교가 한 없이 어렵게 느껴지고, 더욱 관심을 갖고 공부를 좀 하면 할수록 더 깊은 의문의 수렁에 빠지는 느낌이라는 것이 많은 이들의 하소연입니다.

저는 이것은 일차적으로 불법佛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스님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말 그대로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는데, 스님들의 의식은 일반인의 불교에 대한 관심과 지적 욕구를 전혀 따라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절에서는 신도가 법회에 몇 명 모일까에 대한 걱정이 어떻게 불교를 이해시킬까에 대한 고민을 압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나아가 각 분야의 첨단 지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불교의 교리에 대해 '따지듯' 물어 왔을 때, 그 사고방식 속에 들어가 그 사람을 불교적으로 이해가 되게끔 납득시킬 수 있는 스님들이 과연 몇 분이나 될까요? 여기서 스님들이 만약 '어찌 불법을 세속적 지식에 대해 이해시켜 주어야 하느냐? 모든 것이 마음 법이란 이치만 알면 되는데'라고 말씀 하신다면 정말 불법을 모르는 말인 것입니다.

'진제眞諦와 속제俗諦가 불이不二다. 세간법世間法과 출세간법世間法이 같다.  이理와 사事가 다르지 않다. 번뇌煩惱가 곧 보리菩提다.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다.' 라는 큰 말씀은 하시면서 어찌 그 하찮은 세속적 지식을 굴복시킬 방법은 생각해 보지 않는지요. 신도를 많이 모이게 하고 수 십억 절 짓는 불사를 잘 하시는 것도 능력이고 방편이지만, 이 골치 아픈 지식인을 조복시키고 납득시키는 것도 출가자가 해야 할 방편바라밀의 수행이 아닌가요?

이러한 각고의 노력 없이 그들에게 '알아서' 선적禪的인 불교를 느끼고 그 안에 답이 있다라고 부동지不動地의 마음을 내는 것이 진심으로 불법의 진수를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 부동지에 경의를 표합니다.

제 말씀이 어거지라고만 보시지 말고 그 속에 있는 교훈을 찾으셨으면 합니다. 이 의미에서 교훈을 찾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선禪
수행 운운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지선사(당나라 850년 경)는 어느 누가 법을 묻던 손가락을 하나 세워 보이셨다. 어느 날 선사가 없는 사이에 손님이 찾아왔다. "스님께선 주로 어떤 법을 가르치는가?"그러자 선사를 시봉하는 동자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보였다.
제딴에는 스승의 흉내를 내 본 것이다.
나중에 구지선사가 돌아오자 동자는 손님이 왔다 갔다고 이야기 했다. 구지 선사가 물었다. "그래, 무슨 말씀이 없으시더냐?" "예, 스님께선 주로 어떤 법을 가르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사가 물었다."그래, 뭐라고 대답했느냐?" 동자는 얼른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이며 말했다. "이렇게 했지요."그러자 선사는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더니 동자의 손가락을 싹둑 잘라버렸다."아얏!" 동자는 잘린 손가락을 움켜쥐고 엉엉 울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때 갑자기 선사가 동자를 불렸다. 동자가 고개를 돌려 돌아보자 선사는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그러자 동자도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세웠다. 앗! 그러나 이미 손가락은 잘려 나가고 없지 않은가! 동자는 비로소 퍼뜩 깨쳤다.

 

 

= 있다, 없다, 그리고 공하다 =

한 젊고 예쁜 처녀 선생님께서 초등학교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저 벽시계에도 있고 선생님에게도 있는 것이 뭐가 있죠?”
한 아이가 대답했다.
“두 손이요”
다른 아이도 대답했다.
“얼굴이요.”
“좋아요, 그럼 벽시계에는 있는데 선생님에게는 없는 것은 뭐지요?”
한참 침묵이 흐르다가 한 꼬마가 소리쳤다.
“불알이요!”

물어 본 선생님 잘못도 아니고, 대답한 아이의 잘못도 아닙니다. 선생님과 아이에게 '시계 추'를 '시계 불알'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적 통상' 이였으니까요. 다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을 뿐입니다. 여기서 '불알'이라고 한 것을 선정적이라고 몰아붙이면 정말 바보가 되겠지요.

제가 이 예를 드는 것은 언어적 인식은 한번 고정되면 좀처럼 바뀌기 어렵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불교에서는 '없다'는 말을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단어로 사용합니다. '무상'無常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상하면 인생은 무상한 것, 즉 덧없는 것을 먼저 연상합니다. 스님들도 법문할 때 돈도, 명예도, 쾌락도 다 무상한 것이니 집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백 번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저는 법문 할 때 즐거움보다는 괴로운 일이 많은 요즘의 중생들이기에, 괴로움과 고통, 번뇌도 무상한 것이니 좌절하지 말고 열심히 살다보면 그 끝이 있게 마련이라고 용기를 주는데 무상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없다'는 말은 '있는 것'에 대한 상대적 표현입니다.  물건이 있다, 없다를 생각해 보시면 간단합니다. 여기에 인간인 '나'를 더해 '내가 없다', '내가 있다''난 죽었다''난 살아있다'를 의미한다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불법을 논하는 자리라면 아주 기본적인 전제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언어적 모순이 발생합니다.

"불법은 있다, 없다의 유有 무無를 떠난 중도中道의 자리에 그 진리가 있다. 깨달음이란 이러한 양 극단을 여읜 자리이다" 제가 만든 말이지만, 그 어려운 중론中論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불교 공부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도리는 실은 반야심경에서 딱 한 글자로 표현해 버린 '공'空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는 공의 심오한 이치를 설명하는 선법문禪法門에서도 '나는 없다'고 해버립니다. 나는 공하니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인 것은 분명한데, 사람들은 그 '없다'라는 단어에서 자꾸만 있다는 것에 상대적인 개념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앞의 '시계불알' 같이 말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불교를 설명할 때 좀 더 명확하고 정교한 언어를 사용하자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국어의 표준말과 맞춤법도 몇 십 년 지나면 표준화 작업을 하는데, 불교의 용어는 천 년 이상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니 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아가씨' 하면 천박함을 연상하기도 하지만, 조선시대의 '아가씨'는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지 않았습니까? 미래의 불교와 지금의 한글세대를 위해서라도 곡해의 소지가 있는 불교용어는 속히 개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지금 반야심경의 공空을 설명하고 있지만 털어 놓자면 여러분을 속 시원히 납득시킬 능력이 없습니다. 설령 제가 이러저러한 노력을 통해 이해시켜 드리려고 시도한다고 해도, 이 공에 대해서만큼은 아무도 납득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의 어떠한 언어적 설명과 해설도 결국 도움이 되질 못했습니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 더구나 돈 주고 산 책인데 뭐라 한마디는 해줘야 할 것 아니냐고 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물론입니다. 이 페이지의 앞뒤로 있는 공空이란 단어가 들어간 제 이야기는 모조리 공을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아니, 공에 대한 저의 설명법이니 놓치지 마시기를 오히려 당부드립니다.

 

 

☆ 1+0=1과 0+1=1 은 같은가?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화두와 같은 불교의 깨달음의 키워드와도 같습니다.
현장스님의
반야심경 역은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역부여시'이하동문以下同文이라는 말입니다. 졸업식 때 학생회장이 대표로 나가서 졸업장을 받을 때 교장 선생님이 '위 학생은 소정의 과정을...' 하며 끝에 아무개 이름을 말하고, 그 다음은 이하동문이라는 것과 같습니다. 풀어보면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즉시공 상즉시공 행즉시공 식즉시공(이러면 역부여시는 필요없게 됩니다)이 정상적인 표현 방법입니다.

이제 현장역에 대한 또 다른 문제 제기입니다.

첫째, 현장의 이하동문 격인 생략법 때문에 색色공空 하다는 것만 강조되어 설명하지 수受도 공하고 상想도 공하고, 행行도 공하고, 식識도 공하다는 본뜻의 전달이 미약해진다는 것입니다.

뒤의 ‘수상행식'도 앞의 색과 같이 동등하게 대우 받아야 하는 이유는 색色부터 식識까지 모두 한솥밥을 먹는 '오온五蘊'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현장 자신도 이 오온을 모두 공한 것으로 인식하여야[조견 오온개공] 반야란 지혜를 얻는 것이라고 반야심경 초장부터 밝혀 놓지 않았습니까?

두 번째는 '색즉시공 수상행식 역부여시'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 왜 굳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했느냐 이겁니다. '물질은 곧 공한 것이다'라고 해놓고 '공한 것은 물질이다'라고 뒤집어서 반복하여 말한 것과 같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중에 이제는 이런 저의 소심함에 질려 '이 중이 이젠 말꼬리까지 잡네'라고 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사정이 그리 간단치만은 않으니 제 해명을 들어보십시오. 저로서는 30년 이상을 고민하다 겨우 답을 얻은 것이니 말씀드릴 기회는 주셔야 합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원본에는 없는 '고액苦厄'이란 단어를 임의로 더해버린 현장스님에게 불평을 하긴 했지만, 이 부분의 한역에 대한 현장의 안목은 찬탄하고 싶습니다.  과연 1+0=1과 0+1=1은 같은 것일까요?.

☆ 현장스님의 반야심경 한역의 문제

앞에서 현장스님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를 이하동문으로 생략한 것을 항의하며 나 같으면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즉시공 상즉시공 행즉시공 식즉시공'이라고 풀어, 수受도 공하고 상想도 공하고, 행行도 공하고, 식識도 공하다는 반야심경의 본뜻이 명확하도록 하겠다 했습니다.

범어梵語로 된 원본 반야심경을 한문으로 번역한 반야심경이 현장역 말고 몇 가지가 더 있는데 아래는 '동천축국 법월法月삼장'(삼장은 경,율,논을 통달한 스님이라 설명드렸습니다)의 것입니다. 그대로 소개할테니 놀라지 마십시오. {}안의 것이 현장역에는 없는 부분입니다.

觀自在普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自性}皆空 度一切苦厄 舍利子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
{자성}
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諸菩薩摩訶薩應如是覺 色性是空 空性是色}
{제보살마하살응여시각색성시공 공성시색}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識性是空 空性是識 識不異空 空不異識 識卽是空 空卽是識}
{식성시공 공성시식 식불이공 공불이식 식즉시공 공즉시식}

舍利子 是諸法空相  ~
사리자 시제법공상  ~

놀라지 말라고 했어도 실은 놀라셔야 반야심경을 제대로 이해하신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부분은 저도 이 책의 원고를 마치기 전 중간 교정을 보다가 추가로 보충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반야심경을 해설하며 현장역에 대해 제기한 불만이 정확한 것임을 확인한 것에 더욱이 이 법월스님의 역을 발견해 낸 것에 '환희'했습니다. 물론 이미 알고 계신 분들에게는 도리어 싱거운 놈이 되어버리겠지만 말입니다.

 

 

☆ 물질은 공에서 나온다

색이 물질을 뜻한다는 것과 물질이 어떤 성질의 것인가는 이미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공에 대한 설명도 제딴에는 교묘히 넘어 왔습니다. 이제 다시 지루한 과학공부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장 최근의 천체물리학(천문학은 말 그대로 별들을 관찰하는 '별 볼일 있는'학문이고 천체물리학은 우주의 물리적 원리를 수학적으로 규명하고 증명하려는 학문입니다)에 따르면 '최초의 물질'공空에서 나온 것이 됩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설명은 스티븐 호킹 등 아인슈타인 이상 가는 최고의 전문가들이 수십 년을 검증하고 확인한 결과이니 믿으셔야 합니다. 그 사람들도 다 틀릴 수 있지 않느냐고 한다면(아마 모든 것을 신의 뜻이라고 믿는 분은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것은 다윈의 진화론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황청에서도 그토록 부정하려고만 하던 진화론을 다윈 사후 거의 150년이 지난 근래에 마지못해 공인하지 않았습니까.

인간의 과학으로 밝혀진 다시 말해 이론적으로 충분히 설명 가능하고 유추 가능한 최초의 우주에 대해 묘사해 보겠습니다. 이 우주론을 현대우주론에서는 '표준 우주론'으로 널리 받아드려지고 있습니다.

약 150억 년 전 '어느 때' 10-34승cm밖에 안 되는 소립자보다도 작은 '무엇'에서 어떤 에너지의 '작용'에 의해 인플레이션(대 폭발)이 있었습니다. 이 폭발 전의 '무엇'을 천체물리학에서는 진공眞空이라고 표현합니다. 진공에서 우주가 시작되었고 밤하늘을 빛내는 별들과 여러분 그리고 저도 존재하게 됩니다.
대폭발 전의 크기가 0이고
(숫자로 표현한 가장 작은 개념입니다. 마이너스가 작음을 표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밀도와 온도가 '무한대'인 최초의 상태를 특이점特異點이라고 합니다. 정말 중요하니 집중해서 읽으셔야 합니다.

'크기가 0이고, 밀도와 온도는 무한대'에서 우주와 내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현재의 인류의 총합적 지성의 결론입니다. 이것을 무無에서 유有가 만들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도리어 우주가 한 원자보다 작은 입자에 모두 들어가 있었는데
(시간과 공간 모두입니다) 그것이 물질이 아닌 에너지의 형태로 요동치고 있다가 어느 순간 그 요동의 힘이 '한계'를 넘어 물질로 전환되는 대 폭발이 일어나게 된다는, 너무 엄청난 유有(물질)가 있어 그것을 0 또는 진공이라 부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설명이면 공空의 개념은 없다거나 비어있다는 것이 아니라 '무한대의 가득차 있음'을 말하는 것이라는 게 명확해졌으리라 봅니다. 그러니 '공즉시색'空卽是色이 단순한 '색즉시공'의 반복이 아니라 또 다른 불법의 도리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절묘하게 불교에서도 '진공묘유'眞空妙有란 표현을 쓰거든요.

상황이 이러니 공을 무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안 되고, 무를 공의 개념으로 풀이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불교를 설명할 때 '무'無 자를 '공'空 자로 대체하여 '무아'無我를 '공아'空我로 쓰자는 것입니다. 공을 무로 오해하는 것을 방비하고자, 수행 중 낙공落空(의식이 공에 집착하여 모든 것을 허망하게 느끼는데, 그래서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도 합니다)이 가장 큰 장애다, 심지어 공공空空 이니 적멸공寂滅空 공성공空性空(공도 또한 공하다) 이니 점점 헷갈리는 말을 만들지 말고 말입니다.

다시 반야심경의 해설로 돌아오면 '색즉시공' 해놓고, 다시 '공즉시색'이라고 한 것은 단순히 공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마 현장스님도 이 생각은 못했을 겁니다. 저의 이 해설법은 한국불교에서 처음 시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대목에서 문자에 집착하지 말라는 불립문자不立文字선禪 불교만의 독점적 가르침이 아니라는 제 생각을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교학을 공부하는데도 불립문자가 유효하다는 말입니다..

 

받아들이는 정신작용

수受는 눈, 귀, 코, 혀, 피부, 생각을 통해 받아드리는 정신작용을 말합니다. 바깥 환경에 대한 것을 내가 감수感受한다는 뜻인데, 여러분이 이 책을 읽으며 어떤 느낌을 받는 것도 수의 작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좋다, 나쁘다, 모르겠다라는 그 감정의 시작이 바로 이 수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업業과보果報의 시작도 이 수受가 원인이 됩니다.

다시 확인시켜 드리지만 색色 즉, 물질과 환경에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여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내'가 문제이지 무슨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겁니다.

반야심경에서 '수상행식도 역시 그러하다(受想行識 亦復如是)'라고 한 것은 색이 즉 공하듯이 수도 공하고, 상도 공하고, 행도 공하고, 식도 공하다 라는 표현을 줄여서 말한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색이 공한 것처럼 수受도 공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나의 느낌을 있게 하는 그 무엇이 실은 내가 생각하듯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 느낌의 실체가 공하다는 것이고, 예를 들어 기온이 섭씨 0도이긴 하지만(바깥 환경) 한 겨울에는 따뜻하고 초가을이라면 춥게 느껴지니, 그 느낌도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공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느낌의 실체가 공함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는 것 등 모두에 해당합니다. 아무리 좋은 음악도 듣기 싫을 때가 있고 화장실의 악취도 시간이 좀 지나면 참을 만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설명에 익숙하지 않는 분이라면 공空 이라는 개념을 물질에만 국한시켜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이것 또한 전적으로 스님들 책임인데'색즉시공'의 설명에만 열심이고-실은 이것의 설명방법에도 문제가 있음을 누누이 말씀드렸지만-'수즉시공'에 대한 설명은 좀처럼 듣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 찾아와 이야기할 때 놀라운 말을 하면'보통이 아니시네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거의 모두 자기 말에 내가 놀라 칭찬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수受의 작용에 의해).
그러나 저는 속으로 혼자 말합니다.
'음, 역시 보통이 아니야, 당신은 보통 이하야!'라고 말입니다. 상대편은 내가 놀랐다는 것과 보통이 아니라고 한 표현에 집착하여, 저의 받아들임의 공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 그 말을 정반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상대는'수즉시공'의 이치를 모르는 쑥맥인 것입니다.

 

☆ 심리작용의 시작

여러분은 이 책을 사실 때 책 제목이나 겉표지에서 어떤 이미지를 연상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에서 다시 책의 내용을 짐작해 보거나, 호기심을 느껴(지적 충동) 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무엇을 연상시키는 작용을 반야심경에서는'상'想이라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수受가 물질이나 환경에 대한 심리작용의 근본이라면, 이 상想은 우리를 생각에 빠뜨리게 하는 지적인 작용의 근본이 됩니다.

그런데 지적知的이란 말을 썼다고 행여라도 고상하고 우월하다는 생각이 먼저 드신다면 역시'상즉시공想卽是空'을 놓치신 겁니다. 아니면 제가 공연히 지적이란 말을 써서 혼란을 일으킨 것인지도 모릅니다.

선가禪家의 멋진 말 중 하나에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이라는 세계의 문지방을 넘으려면 알고 있는 것 다 버리라는 뜻입니다. 이정도 수준은 아니더라도 제 횡설수설을 잘 이해하시려면 모든 선입관을 버리시고 '저 중이 말하려는 게 뭔가 들어나 보자, 결론은 다 듣고 나서 내가 내리면 된다'고 생각하시라는 말입니다.

원효가 자재암에서 한 소식 얻었듯이 여러분도 한 소식 얻기 전의 모든 생각의 지적 작용은 나의 일방적 오해나 그릇된 판단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 하는 것이 상도 역시 공하다는 반야심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폭행 당한 여자를 보고 '밤늦게 미니스커트 입고 다니니 당하지'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상想이 얼마나 근거가 없는 집착인지 알라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아는 사람이 당했다면 어찌하겠습니까? 그러니 상도 공하다 한 것입니다.

 

☆ 오해가 오해를 만들어 감

어떤 사내가 있었다.
이 사내는 매일 아침 조깅을 하는데 동네를 돌다 어떤 오래된 나무 쪽문에 한문으로
“多不有時” 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많고 아니고 있고 시간....”“시간은 있지만 많지 않다는 뜻인가?”
“누가 이렇게 심오한 뜻을 문에 적어놨을까?”“이 글을 적은 분은 분명 학식이 풍부하고 인격이 고매하신 분 일거야. 오늘은 꼭 그 분을 만나봐야지.”
매일같이 그 앞을 지나던 사내는 그 글을 쓴 분이 궁금해서 작심을 하고 문을 두드려 보았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나오는 이도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니 옆집 대문에서 웬 런닝셔츠 차림의 할아버지가 나오셨다.
“어이, 거기서 뭐하는 거야!”
“아, 예, 여기 사시는 분을 좀 만나뵈려고요.”
“엥, 거긴 아무도 안 살아.”
“네? 이런, 사실은 이 한자성어를 적으신 분을 뵈려했는데.”
“그거?, 그건 내가 적은 거야.”
“네? 그러세요.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할아버님, 여기가 대체 무슨 문입니까?”
“여기? 별거 없어. 화장실이야.”
“네? 화장실이요? 여기가 화장실이라고요. 그럼 이 글의 뜻은 뭡니까?”
“아, 이거? 참내, 다불유시(W.C)야. 多不有時.”

이 사내가 처음'多不有時'를 보고 궁금한 마음을 일으킨 것까지가 반야심경'수, 상'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그 궁금증이 며칠 동안 계속되게 되는 과정을 겪습니다.
이 계속되는 생각의 연속을'
행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이성을 보고 첫 눈에 마음에 들어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것이 바로 행의 작용입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찜해두고 돈이 마련되길 기다리는 것도 행의 작용입니다. 반야심경의 가르침은 행의 작용도 공하다 했으니 이 이치를 알면 마음의 조급함이나 집착이 지속되는 것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다시 차분히 생각해 보십시오, 공空이란 단순히 '있다','없다'의 차원을 훨씬 넘어선 말 아닙니까? 그래서 반복하여 주장하지만 우주의 법칙이기도 한 불법의 이치를 설명하며 벼룩의 간만한 '무'無자를 선택하여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책잡힐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受想行識 亦復如是

☆ 안다는 것

 '식'識이란 말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무식하다, 유식하다로 쓰이는 것을 보면 대체적으로 '안다'는, 앎의 범주를 말하는 것 같기는 합니다.

'색'色을 설명하기 위해 지금까지 지루한 물리학을 늘어놓았는데, '식'識 의 설명을 위해 이번에는 뇌신경학을 거론해 보겠습니다. 제가 '유식'하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절대 아니고, 다 여러분이 반야심경을 가능하면 다각도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는 저의 '식識의 작용'과 출가자로서의 '프로정신' '중생에 대한 자비의 발로''방편바라밀'의 하나로 생각하시고 불교 공부하며 덤으로 과학적 지식을 얻게 되었다 여기시면 일석이조요, 고랑치고 가재잡고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처삼촌 묘 벌초하듯 책을 쓰거나, 세계적인 스님이나 명상가의 글을 번역해서 옮기는 재주를 가지고 마치 자신이 그 경지에 이른 듯 거드름 피우는 속물들에 비하면, 저는 이 몇 줄을 위해 수십권 의 관련 서적을 읽어야 했으니 그래도 좀 나은 편 아닙니까? 그 대신 짧게 핵심만 거론 하겠습니다. 읽으시며 반드시 염두에 두실 부분은 '물질이 인식에 절대적으로 관여한다' 입니다.

다음은 우리가 인식작용을 일으키기까지의 뇌의 메커니즘입니다.

인간의 뇌는 약 1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뇌세포는 뉴런이라는 복잡하게 연결된 신경세포의 네트워크를 구성해 뇌의 특정 부위를 형성합니다. 좌뇌 우뇌 등으로 말입니다.

약 1조개의 뇌세포는 약 1천억 개의 뉴런(neuron신경세포) 을 구성하는데, 이 뉴런간의 간격은 1밀리미터의 20만분의 1 정도이고 각 뉴런의 끝은 시냅스synapse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이 시냅스의 전기, 화학작용의 연쇄적 교차 현상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뉴런에 입력창구와 출력창구가 따로 있다는 점입니다.
뉴런의 신호 입력은 수상돌기
(dendrite)를 통해 이루어지고, 출구는 축색(axon)을 통해 이루어 집니다. 축색은 뇌에서 척수까지 거의 1미터에 이르는 것도 있는데, 뉴런에서 수상돌기는 여러 개지만 축색은 오직1개씩 밖에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뇌의 구성을 설명한 것이고, 이제부터가 식識을 일으키는 과정입니다.
지금 보고 있는 이 책의 글자가 여러분의 뇌에서 어떠한 과정을 거쳐 하얀 건 종이, 검은 건 글씨라는 수준을 넘어 뜻으로 이해되는가를 생각하시면 지루하지 않습니다.

신경세포에서 다른 신경세포로의 신호 전달은 뉴런간의 '전압차'를 이용합니다.
그래서 이 전압차가 클수록 정보전달이 활발하게 이루어집니다.
전압차가 클수록
'열 받았다','뚜껑 열린다'
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의미합니다.
이 전압차에 의한 뉴런간의 신호전달은 1000분의1초 정도 걸리는데, 오실로스코프
(oscilloscope)란 장비로 정확한 측정이 가능하다고 하니 '나 열 받은 것 아니야'
라고 오리발 못 내민답니다.
이렇게 뉴런의 시냅스에서 받은 정보는 시속 400킬로미터의 속도로 뉴런 맨 끝의 축색
(신호출구입니다)에 도달합니다. 축색 너머로는 강과 같은 액체의 시냅스 틈이 있고, 여기를 넘어야 다른 뉴런으로 전달이 가능한데, 이 메신저는 화학적 심부름꾼으로 축색의 말단에서 벽, 즉 세포막(시냅스 전막)과 융합하게 된답니다.

이렇게 뉴런과 뉴런 사이의 좁은 틈으로 신경전달 물질이 방출되는데 시냅스 하나에는 10개까지의 시냅스 소포가 방출되고, 각각의 시냅스 소포에는 다시 신경전달 물질 분자가 약 1만개 들어 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시냅스 전달'이라고 합니다. 결국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이런 전기, 화학작용의 연쇄적 교차 현상으로 인한 것입니다.

대표적 신경전달 물질로는 아세틸콜린, 도파민, 노나드레날린, 세로토닌 등 1950년대 발견된 것들과 1960년대 발견된 아미노산으로 구성된 펩티드, 1998년 노벨 생리학상을 수상하게 한 발견인 일산화질소가 있습니다.

반야심경의'식'識의을 설명하는데 왜 이런 전문적인 분야를 거론했는지 이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경전달 물질인 도파민이 부족하면 파킨슨병에 걸리고, 너무 과다해지면 정신분열증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 무서운 알츠하이머 병 역시 신경전달 물질 중 하나인 아세틸콜린 전달체계의 이상으로 뇌 세포가 죽어가는 병입니다. 현재의 뇌 관련 기술수준은 전해전량계電解電量計로 뇌세포 한 개에서 방출되는 신경전달 물질의 감지가 가능하다고 하니 무시할 수만은 없는 대목입니다.

반야심경의 오온을 축약하면 색=식=공 이 됩니다. 그러니 누군가 식識을 설명하며 식즉공識卽空 이라 해놓고,'없는 것'이라고 해버린다면 그 사람이 스님이건 불교학자건 마음 놓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세요.

“그럼, 지금 말씀하시는 식識의 작용이'없다'는 말은'나는 죽었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까?”라고. 즉, 식이 공하다는 반야심경의 가르침은 '식이 없다' 더 나아가 '마음이 없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의하실 점은 이 식識은 말 그대로 인식의 작용을 말하는 것이지 내 마음의 본래 성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필로폰'중독이 의식의 즐거움의 극한까지 가는지는 몰라도, 마음까지 모두 극락에 가는 것은 아닌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본래의 내 성품이란 불성佛性이자 식識 이전의 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식과 마음의 문제는 앞으로 구체적으로 설명할 기회가 올 겁니다. 이 단순한 식識의 멋진 활용의 예를 보여드리지요.

跆勸扶理(태권부이)
권력을 멀리하고 서로 도움으로써 다스림
 
達勵邏撻旅 勞補鬪也
(달려라달려 로보투야)
-사람들이 훈련되어 힘이 좋고 순리를 따라 더욱 힘내어 싸우니

捏餓裸捺鴉跆 勸扶理
(날아라날아 태권부이)
-굶주림과 헐벗음을 이겨내어 검은 빛을 누르며 노력하지 말길 권하는 자는 짓밟도다.

正意路 朦親周穆 勞寶套太勸
(정의로 몽친주목 로보투태권)
-올바른 길에 있고, 또한 친함이 많아 두루 화목하니 이러한 노력의 보배로움을 큰 권력이 시새움하여

傭減賀苦 識蝕悍 憂離義親舊
(용감하고 식식한 우리의친구)
-임금을 깎고 경사스러운 일에 고통을 주며 사나운 자들과 세상을 좀먹는 자들을 내버려두어 오랜 의와 친함이 멀어짐을 걱정케 하도다.

頭捌蔚 梏揭 壓愚擄 潽頭御
(두팔울 곡게 압우로 보두어)
-이에 우두머리 된 자가 많은 자들에게 묶여 있던 강인한 족쇄를 부수고 어리석은 자들의 노략질을 제압하고, 그들의 우두머리 된 자의 무릎을 꿇리고 다스렸으며

笛珍蔚 響海 翰乙捏遇綿
(적진을 향해 한을날우면)
-진정 아름다운 피리를 바다에 울리니 날개 달린 새들이 하늘에서 만나 끝이 없는 듯이 이어지고

慕智多 愼難多
(모지다 신난다)
-뒤를 따르는 지혜로운 자가 많아, 어려운 일을 이룩함 또한 많았다.

殆勸部罹 萬巒塞
(태권부이 만만새)
-위해로운 권력은 근심을 불러오니 만개의 산을 넘어 떠나가매

懋笛意 優理親舊
(무적의 우리친구)
-아름다운 피리의 뜻만이 근심을 다스리고 친함을 오래케 하였으며

跆勸扶理
(태권부이)
-권력을 멀리하고 서로 도움으로써 다스리더라.

 

舍利子 是諸法空想

☆ 현장의 불교, 의상의 불교

여기서 반야심경은 눈높이를 한 단계 높입니다. 사리자에게 다시 관자재보살이 말씀합니다.
(현장 역은 관자재보살이 반야심경을 설한 주체로 되어 있지만 범어본 원전에는 ‘부처님의 위신력을 빌어’ 관자재보살이 대신 설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리자여,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하다'

뜻풀이가 아닌 우리말로 바꾸면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습은(空相을 모습이라고 하면 실은 안 되죠, 저라면 아예 空性이라 했을 겁니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어 날 것도 줄어들 것도 없다'입니다.

반야심경'제법공상'諸法空相은 불법이 공하다는 측면을 말한 것일까요? 다시 말해 불법의 설명법 중 하나로 '공'을 설명하는 것인지, 아니면 불법 그 자체가 공空해, 공空 그 자체가 불법 설명의 전체라고 인정한 것인지 참 저를 고민하게 만듭니다.(이 차이는 의외로 중요하니 다시 한번 새겨보십시오)

그런데 뒤의 '삼세제불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三世諸佛依般若波羅密多 故得阿辱多羅三邈三菩提'(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해 더없는 깨달음에 이른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공'을 얻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른다' 라는 뜻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궁극의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다시 공식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즉, 법성法性 : 반야=공=아뇩다라삼먁삼보리=성불이 성립하는가 입니다. 이 공식은 반야부에서 유도된 공식이고 화엄경에서는 어떤 공식이 나올 수 있는지 보겠습니다.

화엄경을 다 읽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법성게'法性偈를 통해서 만들어 보겠습니다.
반야심경이 반야부의 경전을 압축한 것이고, 법성게화엄경을 압축한 것이니 이 방법에 무리는 없을 겁니다.

한국불교의 자랑인 의상스님(625~702:2005년 봄에 불타버린 낙산사를 창건한 스님이기도 합니다)의 법성게 시작부분을 보면 법의 성품을 단박에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법의 성품은 둥글고 둘이 아니네)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모든 법은 고요하고 움직임이 없어)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이름과 모양이 모두 끊어진 자리네)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이 경계 지혜로도 매우 알기 어렵네)

괄호 안의 우리말은 제가 쓴 졸저 '이판사판 화엄경'에서 이미 풀어 놓은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법의 성품인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어 날 것도 줄어들 것도 없는 것'과는 그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지 않습니까?

이제 법성게의 나머지 부분을 조합해 화엄경의 공식을 만들었습니다.

법성法性 : 무이상無二相 = 해인삼매海印三昧 = 중도상中道床 = 불佛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분이 많을 것 같은데, 법성게를 외우시는 분들은 그나마 좀 이해가 쉬울 겁니다. 물론 장황하게 설명을 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반야심경을 해설하는 처지이니 후에 법성게를 해설하는 책을 쓸 때 다시 비교하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익숙한
반야심경의 법의 성품에 대한 접근과 생소한 법성게의 법의 성품에 대한 접근이 다른 것 같다는 사실만 느끼셔도 저로서는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의 절반은 전달한 셈입니다.

이처럼 반야부의 경전과 화엄경에서 불교의 궁극적 경지에 대한 외형적으로는 다른 듯한 공식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같은 시대의 중국의 현장스님과 우리나라의 의상스님의 사상적 차이이기도 한 것입니다. 다만 제가 몹시 아쉬워하는 점은 아무리 불교가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래되었고 그 법맥도 중국불교에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한국불교가 너무 일방적으로 중국의 불교사상에 매달리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경전이 같은 한문으로 표현되었다 하더라도 중국인인 현장의 것과 한국인인 의상의 것이 사상적으로 상당히 다를 수 있는데, 한국불교의 현실은 현장 것은 설명과 해석에 상당한 공인을 해주고 의상의 것은 연구조차 해 볼 생각을 잘 안하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육조 혜능과 원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혜능의 불교는 절대적이고 표준이라는 생각이 깔려있고, 정작 원효는 말로만 한국불교 최고봉 이자 토종으로 불교사상을 중국에 역수출한 유일한 인물이라고 인정 할 정도일 뿐입니다.
우리가 원효와 의상의 불교를 중국의 혜능이나 현장의 불교의 십분의 일 만큼이라도 연구했다면 한국불교는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아니 지금부터라도 적어도 공평하게는 연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베토벤의 숨은 연인의 이야기를 담은 '불멸의 여인'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여기서 베토벤이 자신의 음악관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내 음악을 이해하고 나의 음악 세계를 상상하며, 즐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왜냐하면 장송곡을 들으며 왈츠를 출 마음을 일으킬 사람이 있겠는가? 그들은 내가 작곡한 음악의 광대일 뿐이다.'

한국불교는 말로는 통불교通佛敎를 지향하면서 실제로는 사상적 편식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점검해야 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베토벤의 표현대로라면 몇몇 작곡가의 명곡 몇 개에 모든 사람이 빠져버려 다른 훌륭한 곡들을 거들떠볼 기회조차 갖지 않은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자는 말입니다.

 

 

不生不滅

나지도 멸하지도 않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생불멸不生不滅 ,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그 무엇? 세상에 이런 것이 있을까요?

그 무엇을 생명체로 생각한다면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이어야 하고, 무생물체라고 가정하면 만들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 있느냐? 라는 질문과도 같습니다. 당연히 없다고 생각하시겠지요. 맞습니다. 그러나 또한 틀리기도 합니다.

이 중이 또 수작 부린다고 생각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이 불생불멸의 이치를 잘 말씀드려야 반야심경의 해설이 제대로 되는 걸 어찌합니까? 도대체 이런 논리가 어떻게 성립될 수 있겠느냐는 의심을 내어 해결해야 불법에 한 걸음이라도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접근해 봅시다. 죽음과 없어짐은 왜 있는 것일까?
답은 태어나고 만들어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아예 태어나지도 만들어지지도 않으면 죽음을 맞이하는 일도 없어질 일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죽기 싫으면 애초에 태어나지 않으면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불교에서 업業에 의한 과보로 태어남과 죽음을 돌아가며 겪는 일을 윤회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윤회는 고통이니, 마음 잘 닦아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실제로 싯타르타 태자로 출가하여 부처를 이룬 석가모니는
'죽지 않는 법'을 찾기 위해서 수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답을 아예 ‘태어나지 않으면 되는구나'
에서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골치 아프게 '제법공상'諸法空相(불법의 공한 성품) 중의 하나가 불생불멸이라 했으니, 그렇다면 석가모니는 분명히 인간으로 태어났고 태어나서 깨달은 법은 도대체 어찌되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 책을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제가 수습하지도 못할 문제를 뜬금없이 제기할 정도의 무모한 중은 아니라고 믿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과연 부처님이 깨달은 '법'이 무엇인지 아함경을 통해 들어보시겠습니다.

부처님은 아함경에서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남(生)에 저것이 일어나고, 저것이 일어남에 이것이 일어난다. 이 진리는 내(석가모니)가 나기 이전에도 존재하였고, 내가 멸한 후에도 존재할 것이다.'라고 불생불멸의 법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 법法이 바로 다 알고 계신 연기법緣起法입니다.

그런데 이 간단한 연기법 속에서 반야심경공空을 보아야 깨달은 것이 됩니다. 공은 다시 물질의 실상을 여실히 보는 것이라고 색의 설명에서 말씀드렸고, 그 물질의 실상은 우리의 상식이나 습득한 지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주의 모습이고 나의 실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나지도 멸하지도 않는 법'을 설명하는, 반야심경에서의 불생불멸不生不滅을 뜻하는 것입니다.

 

不垢不淨

☆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법 불구부정不垢不淨

어린이를 대상으로 참 심술궂은 실험을 한 것을 보고 웃었는데 그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똥' 같이 만든 아이스크림과 '요강'에다 맛있는 주스를 먹도록 해보았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대부분의 아이들이 먹기를 거부하거나, 강제로 먹게 하면 얼굴을 찡그리며 마지못해 먹었다고 합니다. 맛을 보곤 물론 구겨졌던 얼굴이 풀렸겠지요. 여러분이라면 어땠을 것 같습니까?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아도, 더럽고 깨끗함과 생김새의 구별은 인간의 본능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한 단계 높여 설명합니다. 우리는 '똥' 하면 더러움과 치욕의 대명사로 단정합니다.
하지만 구더기는 똥 없으면 살지를 못합니다. 더러운 똥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입니다.

결국 반야심경'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은 법(不垢不淨)'이라는 의미는 상대적인 좋고 나쁨을 구별하려는 분별심을 떠나야 불법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不增不減

☆ 늘어 날 것도 줄어들 것도 없는법 부증불감不增不減

모든 동물이 본능적으로 갖는 유전자에 각인되어 수백만 년 이상을 전달해 온 정보 중 가장 강력한 정보는 종족보존을 목적으로 한 자기보호와 집단영역 확대일 것 같습니다. 인간도 예외는 아닙니다 .

그러나 안타까운 점은 인간이 믿는 종교도 자기보호 본능과 집단영역 확대로 진화되어버린 것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도 자신을 사이비라고 표방하는 일은 없지만, 인간의 최고 가치를 추구하는 종교들도 역사적인 사례들을 보면, 긍정적인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중세의 암흑기도 사실은 기독교에 의한
신神의 맹신과 성직자의 부패에서 시작되었고, 그 암흑기에서 인간을 탈출시킨 것은 불행하게도 교회의 반성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과학의 발전이었습니다.

게다가 지금의 종교적 현실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화되었다고 확신할 수도 없습니다. 불교 경우만 보더라도 교단은 그 자체로 영양과잉 상태의 비만환자입니다.
중생들은 영양실조에 빠져 신음해도 그 소리조차 듣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출가자는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니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해결 정도가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수십억, 수백억 정도는 간단히 만들 수 있는 능력도 있으니 앞날 걱정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절과 스님이 다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중생을 위해 애쓰고 정법正法을 구현하려는 절이나 스님들은 오히려 신도들이 그 뜻을 알아주질 않고, 그러다보니 가난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체 불교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본사급 절이나 교단은 분명 무사안일의 태평성대에 빠져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관광객의 입장 수입이 있고, 명찰名刹이라 소문났으니 시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차츰 그 맛에 익숙해져 종교 본연의 자세보다는 '기능적 존재'로서의 본능적 욕구에 더 충실해져 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나마 단지 외형만이 세속화되어 간다면 체질개선이 쉬운데, 본질까지도 세속의 가치관을 닮아가고 있어 그 병이 심각합니다. 만약 이 심각한 병에 걸려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한시라도 망각한다면, 당연히 출가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받는 모든 상대적 이익을 포기할 줄 알아야 최소한의 양식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심한 말이 아닙니다. 세상에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인과법因果法불가佛家에서 만이라도 이루어야 한다는 아주 상식적이고 당연한 주장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랄 일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불법佛法에도 없는 '법'을 만들어 신도들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늘어 날 것도 줄어들 것도 없는 법(不增不減)'이 아니라 교묘히 위장된 '늘어난 법'이 있습니다.

음력 7월 보름은 스님들이 여름 안거(산문 밖을 나가지 않고 수행하는 기간)를 끝내는 해제일이기도 한데 이 날은 세속에서는 백중百中, 불가佛家에서는 우란분절이라 하여 아주 뜻 깊은 날입니다. 다름 아니라 조상을 천도하는, 경전에 공인된 날입니다.'목련경''우란분경'에 수록된 유래에 따르면, 부처님의10대 제자 중 신통제일 목련존자가 돌아가신 자신의 어머니가 악도惡道에 떨어져 고통당하고 있는 것을 알고 부처님의 방편력으로 악도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방편方便 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 하면 7월 보름 하안거를 마친 스님들께 '대중공양'을 올리는 공덕입니다. 대중공양이란 음식과 의복, 약 등 수행하는데 꼭 필요한 물건들을 스님들께 보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보시공덕으로 조상이 천도된다는 것이 경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절들에서는 백중날 대중공양을 받는 대신 '조상 천도재'를 지내는 것으로 대신해 왔습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갑니다. 조상에 대한 천도방법이 꼭 '우란분절식'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장경은 경 자체가 천도와 그 공덕에 관한 내용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고, 원효스님은 광명진언으로 죽은 이를 천도할 수 있는 방편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뜻의 백중, 즉 우란분절이 변질되어 잘못 '늘어난 법'은 우란분절에 하루 지내던 천도재를 이제는 사람이 죽으면 일주일마다 77재를 지내고 마지막 7번째 되는 날 49재를 우란분절에 마치도록 하는 절묘한 방편 아니, 방법입니다. 이것을 하필 왜 우란분절에 하여 신도를 혼란시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습게도 그 결과로 인해 그렇게 하지 않고 부처님 말씀 그대로 행하려는 스님이나 절들은 마치 정성이 부족한 것으로 인식이 되어버리니 이게 심각하다는 말입니다.

반야심경'부증불감'不增不減은 물론 이런 차원을 훨씬 넘어선 표현이긴 하지만 '신 기복주의'를 양산해가는 불교의 현실이 마치 '담배로 망친 건강 인삼으로 되찾자'라는 한국담배인삼공사의 얄팍한 표어를 연상케 하기 때문에 말씀드렸습니다.

 

是故 空中無色

눈높이 교육의 귀재 부처님

아무리 불교계가 엉망이라고는 하더라도 적어도 인터넷에서 만큼은 스님들의 활약이 독보적인 것 같습니다. 직접 컴퓨터 화면으로 확인해 보십시오.

검색 '중', 이동'중', 복사'중', 다운로드'중', 파일 읽는'중', 휴지통 비우는'중', 디스크 압축'중...'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저도 그 '중' 한 명입니다.

저는 불교경전 총론(www.sejon.or.kr)이라는 홈페이지를 몇 년 전부터 운영하고 있는데, 회원들의 다양하고 예측 불허하는 질문에 대답하느라 애를 먹고 있습니다.
물론 제 수행의 부족한 탓으로 돌려야 하지만, 변명하자면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을 때도 있다는 말입니다. 가령
'불교적으로 인간의 존재의 의미를 어찌 이해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 연기緣起의 결과라고 답해주면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 답변은 또 다른 의문을 제기시킬 가능성이 충분히 예상되는 답변입니다.
연기란 무엇입니까? 라든가, 존재와 연기가 어떤 연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등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질문들이 예상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럴 경우를 생각해 그 질문에 대답하는 제 나름의 노하우가 있습니다.
답을 하기 전에 질문을 한 회원에게 질문의 의도를 확실하게 하기 위한 근원적인 질문을 먼저 해버립니다. 즉,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며, 회원님은
'존재'란 단어를 어떤 개념으로 사용하고 물으신 겁니까? 라고 오히려 되물어 버리는 겁니다.

처음에는 이런 저의 방식에 당황하는 기색들이 역력합니다만, 익숙해지면 아주 심도 있는 질문과 답변이 하루 몇 차례씩 이뤄집니다. 심지어는 바둑 다면기 두듯이 저 혼자서 회원 십여 명의 답글에 대해 부족한 점을 하나하나 지적해주길 몇 차례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회원들은 대개 자신이 무엇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 스스로 알게 됩니다. 이런 방식은 저로서는 질문자를 한 분 한 분 세심하게 관찰하는 등 품이 많이 들기는 해도 학습효과 만큼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이 방식은 실은 부처님의 특허나 다름없는 가장 불교적인 설명법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금강경만 하더라도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인 수보리 존자의 대화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어보면 부처님은 답을 한번에 말씀하시지 않고
'수보리야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라고 질문자의 생각을 먼저 물어봅니다. 그리고 질문자인 수보리의 생각의 수준을 들으시고 다시 결론을 내려줍니다. 이렇게 질문자의 수준에 맞추어 법을 설하는 것을 '횡설수설'橫說竪說이라 합니다. 세간에서는 '헛소리 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변질되어 있지만, 실은 이처럼 깊은 뜻이 있는 말입니다.

진리의 설명 방법에는 또 다른 방식이 있습니다. 스무고개 식으로 '그건 아니다', '그것 역시 아니다'라며 질문자의 생각을 계속 묻고 답을 구해 오면 연신 부정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질문자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라'
고 자꾸 주문을 하는 것입니다.
이 버리라는 주문이 계속되면 어느 순간 질문자 스스로
'감을 잡는'
타이밍이 오게 됩니다.
불법은
서구식西歐式으로 '이것이다'라는 답변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반야심경의 지금까지의 설명법이 '이것이다'라는 방법이었다면, 지금부터의 반야심경'이것'만 정답이라는 그릇된 마음을 낼까 우려하여 '그것은 아니다'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불법에 대해 설명합니다

 

 

是故 空中無色

☆ 텅 비어 있으면서 가득 찬 공

혹시 반물질(反物質, antimatter)이라고 들어 보셨는지요?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의 모든 물질은 전자 양성자 중성자를 구성요소로 하여 만들어졌는데, 반물질은 이에 대응되는 말입니다.

반물질은 일반 소립자와 같은데 전하電荷만 반대인 입자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전하가 +인 전자, 전하가 -인 양성자 등을 말하는 것 이지요. 이 반물질이 존재한다면 그 물성物性은 물질의 물성과 같으며, 물질과 반물질이 만나면 함께 소멸하여 에너지로 전환됩니다.
즉, 물질을 이루고 있는 두 개가 만나 눈앞에서 사라지는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반야심경'그러므로 공한 것이란 물질도 없는 것이고(是故空中無色)'라는 말이 물리적으로도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주가 탄생될 때 물질과 같은 양의 반물질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이고, 또 우리가 볼 수 없는 어디엔가 반물질로만 이루어진 전혀 다른 우주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주와 우리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반물질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설령 우리가 반물질의 우주를 발견했다 해도 그곳을 탐사하려고 발을 디디는 순간 물질로 이루어진 우리의 몸은 즉시 반물질과 쌍소멸 되어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SF소설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
(CERN)의 과학자들은 1998년부터 반물질인 반수소(antihydrogen) 원자를 극히 제한적이긴 해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반야심경'공중무색'空中無色을 물질과 반물질이 만나 쌍소멸한 후 에너지로 전환(空)--물리학에서는 신통하게도 이 쌍소멸을 양자론 적 진공眞空이라합니다-- 이런 식으로 설명드릴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유력한 방법이 있습니다. 즉, 블랙 홀(black hole)의 개념을 도입하는 방법입니다. 블랙홀은 이론 물리학에서 도출된 개념을 천체 물리학에서 증명한, 물질의 성질과 변화에 대한 거시적 관찰의 개가입니다.

태양 질량의 13배가 넘는 항성恒星적색거성赤色巨星단계를 거쳐 그 일생을 다하고 최후를 맞이하기 직전 대폭발을 일으켜 표층을 우주공간에 날려버린 다음에는 남은 중심부가 급속히 수축합니다. 계속 수축을 하여 지름이 3㎞정도가 되면 그 자체의 압력이 가로 세로 1센티미터당 무려 수십억 톤 이상에 이르게 됩니다.

이 상태에 이르면 엄청난 중력으로 그 별은 주변의 모든 것을 흡수해 버리는데, 빛도 빨려 들어가기만 했지 빠져나오질 못합니다. 빛이 빠져나오질 못하니 당연히 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블랙홀
(Black hole)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인데, 이 블랙 홀 안은 시공간時空間이 혼재하게 됩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원리에서 주장했듯이 이 블랙홀 주변은 빛이 휘는 중력렌즈 효과가 일어나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데, 우리의 은하계 중심 등 우주에 아주 큰 블랙홀이 생각보다 많이 존재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물질과 시간에 대한 인식과는 달리 전혀 볼 수도 감지하기도 어려운 이 블랙홀의 실체를 공空이라 생각하고 반야심경'공중무색'空中無色으로 돌아오면 이해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공이 결코 없음(無)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너무나 넘치고 넘쳐 모든 것이 그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불교의
공空인 것입니다.

 

無受想行識

마음의 작용

이어지는 반야심경의 '무수상 행식無受想行識'은 '공중空中무수상행식'과 같습니다.
공한 이치로 보면 수 · 상 · 행 · 식 역시 집착할 것 이 없다는 말인데, 이 수 · 상 · 행 · 식에다 물질 을 뜻하는
색色을 더하면 반야심경의 초반에 오온개공에서 말하는 오온五蘊이 됩니다. 물질에 대해서는 이미 나름대로 말씀을 드렸으니 수 · 상 · 행 · 식을 설명하면 곧 오온을 다 설명 하는 것이 됩니다.

앞에 오온을 설명할 차례에 뒤로 미룬다 한 이유가 바로 여기서 설명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수 · 상 · 행 · 식은 뒤에 12연기를 설명할 때 중복 등장합니다. 또 한가지 반야심경의 핵심은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 밀다시 조견오온개공”에 이미 다 들어가 있고 , 그 다음은 이 내용을 자세 히 풀어 놓은 것이라는 초반 해설의 제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드리며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수受 는 우리가 바깥의 색色 즉, 물질을 대한 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작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상想은 받아들인 것을 기초로 주관적으로 마음으로 그리며 연상聯想하는 작용을 말하는데, 이 작용은 그야말로 사람마다 달라 잠 못들고 고민하며 혼자 만리장성을 쌓다가 허물고를 반복하는 것이 이 상의 작용이라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행行은 이런 상의 작용이 지속되어 인식되는 단계까지를 말하는데 행을 거쳐 인식의 단계에 이르면 식識이 되는 것이고, 식의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마음의 작용을 행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수 · 상 · 행 · 식에 각각 쌓인다는 뜻의 온蘊을 붙여 수온 · 상온 · 행온 · 식온 이라 이름하고 이 네 가지에 물질인 색온色蘊을 합쳐 오온이라 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해 드립니다. 또 뒤에 12연기의 설명에서도 약간 다른 방법으로 다시 거론된다는 것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국 무수상행식이란 오온이 공함을 조견하는 관자재보살의 수행의 도리처럼 마음작용의 부분인 수상행식에 집착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당연히 수상행식이 공하다는 말이지 없다는 말하고는 다릅니다.

 

無眼耳鼻舌身意

☆ 집착할 것 없는 눈의 작용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공중空中무안이비설신의'와 같습니다. 눈의 작용, 귀의 작용, 코의 작용, 혀의 작용, 뜻의 작용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말인데 이 부분은 지금부터 하나씩 차례로 짚어보겠습니다.

무게7g, 부피 6.5㎤, 지름2.4㎝ 정도로 탁구공만한 눈은 우리가 인식하는 정보의 80%이상을 담당합니다 눈이 뇌에 본 것을 전달하는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습니다.

외부의 광선이 눈에 들어오면 각막-수정체-유리체-망막 순으로 전달되는데, 망막에 전달된 시각물질이 화학적 변화를 거쳐 시신경이 흥분시키면 이것이 전도로를 통해 대뇌의 감각피질에 전달되어 시각을 느낍니다. 이 전달 과정 중 하나라도 고장이 나면 볼 수 없게 됩니다.

한편 각막이나 수정체는 문제가 생길 경우 대체하면 시력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백내장은 수정체가 탁해지는 병인데 인공수정체로 간단히 대체하면 됩니다. 사실 저도 한쪽 눈에 이 인공수정체가 들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녹내장과 같은 병으로 안압이 증가해 시신경을 압박하거나 당뇨병의 합병증 등으로 시신경이 손상되면 사실상 시력의 회복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대 의학은 시신경만 살아있으면 인조 눈으로 볼 수 있게 할 수있게 하는 데까지 발전했습니다. 다음은 2005년 4월1일자 조선일보 기사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시각장애인들이 점으로 이뤄진 형태로 사물을 볼 수 있는 생체공학적 인조 눈(眼)이 개발됐다고 영국의 BBC 인터넷판이 5일 보도했다.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의 기슬린 대그넬리 박사가 개발한 이 인조 눈은 안경에 내장된 미니 비디오카메라와 연결된 컴퓨터 칩을 눈 뒤쪽의 망막에 삽입한 것으로 비디오카메라에 잡힌 영상이 이 컴퓨터 칩에 전달되면 컴퓨터 칩이 이를 뇌가 해석할 수 있는 파동으로 바꾸어 뇌에 전달하는 것이라고 BBC는 전했다.
 대그넬리 박사는 이날 영국 런던에서 열린 영국왕립실명회복연구소 학술회의에서 이 같은 인조 눈 개발을 발표하고 앞으로 1년 안에 임상시험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대그넬리 박사는 망막에 심어지는 칩에는 미니 전극들이 들어있어서 전극 하나가 자극을 받으면 살아 남아있는 시신경을 자극해 시각장애인은 하나의 점을 보게 된다고 설명했다.

눈이 두개인 이유는 거리감을 느끼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한쪽 눈을 감고 볼펜을 적당한 거리에 놓은 뒤 손으로 볼펜을 집으려 시도해 보십시오. '일목요연'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헛손질을 하실 겁니다.

눈은 사물을 보고 인식하게 만드는 감각기관 중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기능이 제한적이라 확신하지 말라는 것이 반야심경의 가르침인데, 그 제한적 기능이 무엇인지까지는 굳이 설명드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일상생활을 통해서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사실 별로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정작 문제는 신도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종교가 그들의 눈을 만족시키는데 점점 '혈안'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일이라는 불사佛事라는 명목으로 하는 대부분의 일이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집착하지 말아야 할 대상인 눈을 만족시키기 위한 '투자'로 보입니다. 불교신도들 또한 '눈에 띄는 일'이 아니면 보시를 하려하지 않으니 불교의 발전이 어렵다는 게 제가 '보는' 한국불교입니다.

 

無眼耳鼻舌身意

☆ 집착할 것 없는 귀의 작용

한 선생님이 늦은 시간에 교문을 나서고 있는데 마침 퇴근하던 교장 선생님이 여 선생님을 보고 차를 세웠습니다. 같은 방향임을 확인한 교장 선생님은 여 선생님에게 타라고 했고, 여 선생님은 정중히 거절했지만 거듭된 권유에 차에 타게 되었습니다.
몇 분이 지나고 나서 교장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마징가?”
여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이 너무 어려워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조금 후 다시 교장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마징가?”
여 선생님은 이번에도 말을 하지 않으면 실례가 될 것 같아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습니다.
“제트(Z)”
이에 잠시 생각하던 교장 선생님이 혼자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럼, 막낸가?”

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코드'가 안 맞은 결과 같긴 합니다. 이 귀를 잘 통제하는 것이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멀쩡한 귀를 갖고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갈수록 충고나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적어지고, 설령 뼈아픈 충고를 해 주어도 그것을 고맙게 받아드리는 사람도 적어지는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종교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절과 교회가 마음의 '정비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역할을 하려면 신도들의 딱한 사정을 들어주고 용기를 주는 일도 중요하지만, 엄하게 신도들을 교육시키고 자신의 처지를 잘 알도록 하여 귀가 열리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제가 하는 법회에는 '축원'이란게 없습니다. '어디사는 아무개 잘되게 해주십시요'라고 부처님 전에 축원을 안 한다는 말입니다. 말이 축원이지 중생들 귀 즐겁게 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신도가 몇 십 명만 되어도 줄줄이 주소부터 손자까지 읽어대는데 걸리는 몇 십분 동안 염불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더 불교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디 사는 아무개라고 꼭 밝혀야
'말 귀'를 알아듣는 부처라면, 그깟 부처를 무슨 대수라고 믿을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 대신 저는 큰 법회 때는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불자와 가족 등....'이런 식으로 우리말로 다 알아듣게 축원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근 30년 가까이 중 노릇을 해왔지만, 제가 법문하는 법회에 30명을 넘는 신도가 참석한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아쉬워하거나 불평하는 마음을 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애초에 저는 중 노릇하면서 또 인터넷 홈페이지 운영하면서 나로 인해 1년에 한 명만이라도 제대로 '말귀'를 알아듣는 불자가 나로 인해 생긴다면 그것으로 중 된 밥값은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지난 1년간에 말 귀 알아듣는 불자를 한 명 건졌는데, 기특하여 불이화不二華란 법명을 주었습니다.

 

집착할 것 없는 코의 작용

저는 약골인지라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약골이었는지 단골 병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지금도 항상 골골대는데, 출가하지 않았으면 아마 세상사 고단함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을 거란 생각이 들곤 합니다. 다행히 19살에 절에 들어가 부처님 덕분에 잘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내과, 치과, 안과 등은 알겠는데 이비인후과는 도대체 어디가 아플 때 가는 병원인지를 중학교 때까지도 몰랐습니다. 알고 보니 이비인후耳鼻咽喉 즉, 귀 코 목 식도 등의 병을 진찰하고 치료하는 병원이었습니다. 참 어려운 말로 지었다는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중空中)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비鼻 가 바로 코를 가리키는 말이니, 코에서 맡는 냄새에도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말라는 것이 반야심경의 가르침입니다.

아로마 요법 같이 향기로 질병도 치료하고 마음도 다스린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물론 음악 요법도 있지요. 아마 무슨 무슨 요법 같은 이름의 유행에 우리나라처럼 민감한 곳도 드물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반신욕이 효과가 있다고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든 병과 모든 사람에게 다 만병통치인 것처럼 떠들어대고, 또 그것을 사실로 믿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정작 큰일은 한 국가의 지식층인 학자라는 사람들도 그러한 경향이 더러 있습니다. 한 가지 방법이 모든 곳에 다 통할 수 있는 듯이 말하며, 본인은 그것이 도리어 국민을 계몽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야말로 착각의 자유입니다. 때론 상업적으로 이용당하는지를 본인도 모르는 것 같아 참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코와 냄새 얘기하다 옆길로 샌 감이 있지만 그런 학자들에게는 대개 '구린내'가 나기 때문에 해 본 소리입니다.

사람의 코는 약 60만 개의 후세포로 이루어져있고 약 1만 가지의 냄새를 구별할 수 있다고 하는데, 개의 코는 사람 코 보다 성능이 1,500배 이상 좋다고 합니다.

남자분들에게만 물어보는데 이 코가 크면 '그것'도 크다는 속설이 사실인가요?

 

無眼耳鼻舌身意

☆ 집착할 것 없는 혀의 작용

저는 어려서 먹어본 것 중 몇 가지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부자 친구 집에서 처음 먹어본 치즈의 맛, A B C가 새겨진 새알 초콜릿의 맛, 요구르트의 희한한 맛, 라면을 처음 먹었을 때의 맛 등인데 다른 것은 지금도 먹을 수 있지만 라면만큼은 그러지 못해 아쉽습니다.

40대 이상의 분들은 아시겠지만 처음 삼양라면에서 팔던 라면은 닭기름으로 튀겨서 만들었습니다. 라면을 끓이면 뽀얀 닭기름이 뜰 정도였는데 지금의 짜고 매운 스프의 맛과는 비교가 되질 않았습니다. 제가 도봉산에 한 3년쯤 있었는데, 근처에 삼양라면 공장을 지날 때면 닭 끓이는 듯한 냄새가 싫지 않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러고 보면 미각味覺도 참 오래가는 것 같습니다.

라면 얘기가 나와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제가 아는 한 분은 라면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거의 매일 밤 라면을 먹지 않으면 허전해 잠을 못 잘 정도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라면을 먹고 잠들기 전에 꼭 라면을 발견한 사람의 '명복'을 빌어준다고 하여 웃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맛이란 게 온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와인 같은 경우는 마실 때의 온도에 따라 그 품격까지도 달라지지만 우리가 단순히 '달다', '쓰다'고 느끼는 정도도 온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짠맛은 실온 정도에서는 온도가 높아질수록 짜게 느껴지고, 쓴맛은 섭씨 37도가 넘으면 강하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러니 국은 미지근하면 더 짜게 느껴지고, 쓴 약은 찬 물에 먹는 게 덜 쓰게 느껴진다는 말이 됩니다.

과일의 단맛은 온도가 낮을수록 강하게 느껴진다니 과일은 냉장고에 넣었다가 먹는게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과학적인 방법입니다.

쓴 맛은 혀의 뿌리 쪽에서 강하게 감지되고, 단맛과 짠맛은 혀의 끝 부분에서 강하게 느껴진다니 알사탕이나 아이스크림을 혀 끝에 대고 녹여 먹는 것은 현명한 방법입니다.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에 벼룩도 안남아난다'는 속담이 있지만, 저는 솔직히 고기가 맛있는 줄은 모르겠습니다.

반야심경의 이런 '입맛'도 공한 것이니 집착하지 말라는 설명을 드린다는 것이 그만 맛의 분별심을 돋우는 엉뚱한 쪽으로 흐르고 말았습니다. 옛날 맛 얘기하다 저도 모르게 '맛'이 간 모양입니다.

 

無眼耳鼻舌身意

☆ 집착할 것 없는 몸의 작용

반야심경에서는 '신身'이라고 했습니다만, 이 말은 몸 그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접촉(觸)으로 느끼는 신체의 작용이라는 의미입니다. 몸은 한 겨울의 삼베처럼 거친 것 보다는 비단처럼 부드러운 느낌에 집착한다는 것이고, 반야심경(공중空中) '무신無身'이란 그런 촉감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이 촉감에 집착할 정도의 느낌을 갖는 사람은 필경, 보는 즐거움과 듣는 즐거움, 먹는 즐거움을 얻은 사람일 것 같습니다. 당장 먹는 것을 해결해야 할 사람이 좋은 옷 사려는 마음을 낼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까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제게도 평생 잊혀지지 않는 가슴쓰린 과거의 '스냅 사진'들이 몇 장 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바로 전 해 겪은 일이니까 6살 때의 일입니다.

서울역 부근 중림동에 살 때의 일인데 추석을 며칠 앞두고 잠결에 '불이야' 소리에 반사적으로 일어나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보니 커다란 불길이 집을 삼킬 듯 눈앞에 가득했습니다.
새벽이라 속 옷 차림 그대로 신발도 못 신고 그냥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리곤 멀찌감치에서 우리 집이 불타는 것을 쪼그리고 앉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한 어른이 팬티차림으로 오돌 오돌 떨고 있는 어린 저에게 '얼마나 놀라고 춥겠니'하시며 담요를 한 장 덮어주셨습니다. 그때의 그 '포근함'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불에 타 재가 되고만 우리 집에는 말 그대로 숟가락 하나 건질게 없었습니다. 다음 날 적십자사에서 냄비 몇 개와 이불을 구호품으로 보내주었습니다. 그때 구호품으로 온 이불이 바로 '나이론(당시에는 나이롱이라 했지요)'이라는 비싼 제품이었는데, 매끌매끌한 촉감이 어찌나 신기하고 좋았던지, 제 형하고 둘이 뒹굴며 마치 큰 상이라도 받은 것처럼 즐거워하더라는 겁니다.

제가 다 큰 후에 어머님이 눈물을 글썽이며 그 말씀을 하실 때 철없던 어린 자식들의 '촉감에 현혹된 즐거움'이 얼마나 부모님의 가슴을 멍이 들게 했을까 싶어 참으로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당시 불을 낸 장본인은 지금은 굴지의 제과회사인 K제과 공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K제과로부터는 변변한 보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인연이란 것이 참 묘해서 지금은 돌아가신 이 K제과의 회장 부인이 제가 주지로 있는 절에 거의 10년 넘게 다니셨습니다. 당신네 조상제사를 다 제가 지내드렸습니다.

처음 그 분이 절에 오셨을 때, 저는 ‘과거에 당신의 공장이 불이나 우리가 보상도 제대로 못 받았는데 그 업으로 부처님이 이제라도 그 과보를 일깨워 주시느라 내게 인연을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순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부인에게는 과거의 '인연'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말로 이해시켜서 이루어지는 행위는 업을 상쇄시킬 정도의 공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분에게 따로 보시를 받은 적도 없습니다.
제사비용도 10만원이었습니다. 그 정도는 다른 신도들도 내놓는 것이고, 제사비용을 보시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것이 다였습니다. 주위의 스님들은 저보고 '바보'라 하고 나 역시 그 '바보'의 의미를 충분히 알지만 그때 제가 중으로서 세운 원願이 있습니다. '공덕을 지으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내게 보시를 못한다, 아니 내가 안 받는다. 나에게는 이미 공덕을 성취한 사람만이 보시할 수 있다'고 발원하였습니다. 과연 그때의 제 발원이 실현된 셈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중 노릇을 거의 30년을 해도 아직도 절 생활비도 채우지 못하고 천막으로 겹겹이 빗물을 막아놓은 요사채에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릴 때 나일론 이불 촉감에 빠졌던 저처럼 '촉감'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 반야심경의 '무신'無身이라는 설명을 하다가 뜬금없는 신세타령이 되어버렸습니다.

 

無眼耳鼻舌身意

☆ 집착할 것 없는 뜻의 작용

현장역 반야심경에서는 '의意'의 작용이라 했습니다.

는 마음, 알 자 와는 그 범주가 다릅니다. 식은 앞서 말씀드렸고, 심은 앞으로 설명 드려야하고, 지금은 '의'를 설명하겠습니다.

'의'意는 생각하다, 뜻하다, 이해하다라는 개념의 말입니다.
눈 귀 코 혀 촉감 등으로 느낀 바를 종합하여 받아들이거나, 그러한 대상이 없어도 상상하여 스스로 생각을 일으키는 작용을 말합니다. 신념이라는 것도 여기서 나옵니다.

여자가 공주병에 걸리는 것은 바로 이 의작용이 분수를 모르고 '오버'한 것입니다.
남자들의 경우
'내가 누군데'하며 호언장담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도 이 의작용이 직권을 '남용'하는 것입니다.

거룩해 보이는 종교적 믿음의 시발도 실은 대부분의 경우 이 의작용에 의지합니다.
종교적 믿음의 근거를 처음부터 100% 확실하게 인지하여
'믿음'
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분 다 어떤 계기와 실천, 그리고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 다만 두 분이 우리와 다른 점은 그 분들이 1%에서 시작한 것을 직접 확인하고 체험하면서 100%로 완성해 내신 분이라면, 우리는 100%를 갖고 있다고 착각하며 시작해서 1%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두 분은 오히려 당시로서는
종교성宗敎性과 같은 동기 유발의 요인보다는 기존 사상에 대한 '안티' 정신으로 세상을 바꿔놓으신 분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념과 믿음(꼭 종교적 믿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이 얼마나 공허한지 말해보겠습니다.

우리는 많은 종류의 '믿음'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믿음들이 전제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엉망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일어나자마자 화장실에서 읽는 조간신문이 배달되어 있지 않으면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매일 아침에 출근하며 이용하는 지하철 1호선이 예고 없이 운행되지 않고, 점심시간에 음식을 주문했는데 이유 없이 배달이 되지 않는다면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이 정도의 믿음에 대한 사소한 배반쯤이야 화를 참으며 하루를 넘기면 잊어버릴 수 있는 일들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토록 믿고 또 그렇게 믿기를 종용 당해왔던 역사적
'믿음'과 종교적 '믿음'의 일부가 허구로 가득 찬 조작된 진실임을 알았을 때는 어떤 기분이 들겠습니까?

저는 고등학교 때의 일이라 아직도 그 당시 의심할 수 없는 '믿음'으로 가득 찼었던 몇 몇 역사적 일들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영화 실미도로 알려진 1971년 사건도 분명 국민들은 무장공비의 난동이라 믿었습니다. 중앙정부부장이었던 이후락 씨가 1972년 박정희대통령의 특사로(실은 밀사지만)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고, 곧이어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을 때 어린 나이였지만 앞으로 전쟁걱정은 안해도 되겠구나라는 믿음이 확고했습니다. 1979년 박대통령이 김재규에게 총을 맞고 난 후에는 이제 독재 정권이 끝났으니 더 이상의 학생 데모는 구경할 수 없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선출될 줄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고, 더욱이 친구 덕에 노태우 대통령이 탄생됐다는 사실도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 후 김영삼, 김대중 두 분이 차례로 대통령이 될 줄도 믿을 수 없었던 일이고, 더더욱 그들이 자신들 일생의 정적政敵이였으며, 역설적으로 그래서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단초를 준 박정희보다는 독재 빼놓고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잘한 것이 거의 없다는 것도 믿기 힘든 일입니다.

국가단위를 넘어 세계적 차원에서도 '믿음'의 허망함은 여실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위안부는 없었다'라든지, '독도는 일본 땅이다'라는 그들의 믿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미국의 이라크 침공시 분명히 했던 세계를 대상으로 한 부시의 미국적 '믿음' 즉, 대량살상 무기 운운과 인류 평화의 중대한 위협 운운을 지금 우리는 얼마나 믿어야 할까요?

이러한 것이야 역사적 사실이고, 또 기록되는 문서가 있으니 그 당시의 믿음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사실이 언젠가는 아니 몇 십 년 많아야 몇 백 년 후면 밝혀질 수도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정치, 경제에 대한 문제는 객관적 잣대가 통할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듯 들통날 날만 기다리는 역사적인 '믿음'이 종교적 '믿음'에도 적용된다면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종교도 인간이 하는 행위 중 하나인 까닭에 그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중세의 교회의 불미스럽고 반인륜적인 행위를 그 당시 교회의 수장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행했을까요? 교황의 성서 속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평신도의 믿음보다 더 영적靈的이라고 믿어야 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달라이라마의 언행에 정치적 무엇인가가 내재되어 있다고 의심하면 불순한 생각일까요? 그의 말이면 무엇이든 불교의 큰 가르침이라는 '믿음'의 근거는 과연 있기나 한 걸까요? 교황청이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가 아니라고 공식 인정한 것이 불과 30여 년 전인1969년인데, 그렇다고 교황청에서 거의2000년 동안 거짓말을 해왔다고 믿는 사람이 대체 몇 명이나 될까요? 절에서 행하는 불사 중 '천불' , '만불' 봉안 불사佛事는 예배 대상으로서의 불상을 모시기 위함이 아니라, 단순히 법당을 짓는다고 공고하면 시주가 잘 안되고, 부처님을 봉안하며 이름을 새겨주어야 시주가 잘되기 때문에 법당을 짓고 절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준비한 방법임을 말하면 이 또한 불교에 대한 '믿음'을 손상시키는 것일까요?

신도들에게 솔직히 입장을 설명하고 순수하고 진정한 '믿음'에 의지하면 왜 불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는지, 앞으로 언제까지 이런 편법을 써야만 하는지 승속을 막론하고 깊게 반성해야 할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임을 굳이 숨기지 않겠습니다.

가장 쉽고 확실한 복음福音의 전파, 다시 말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기독교를 가장 확실하게 인식시키는 방법은 일단 '믿음'을 갖고 기도하는 모든 이에게 당신의 모습이나 예수의 모습, 혹은 천사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불교의 관세음보살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십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의 기도에는 관세음보살이 현현顯現한 적이 왜 한 번도 없을까요? 어이쿠, 너무 거창해졌습니다.

그러나 말이 나온 김에 한번 냉정히 의'意'해 봅시다. 이렇듯 사소한 일상에서 종교적 믿음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믿음'이 실은 인간 자신의 뜻일 수도 있고 또 인간 자신만의 헛된 망상일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종교적 탈을 쓴 위선보다 믿음을 져버린 '양심'이 더 종교적일 수 있습니다. 져버린다는 것은 초월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이 순간 의意의 작용으로 마음속으로 확신하고 있는 신념과 '믿음'은 과연 믿을 만한 것인가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에서 공중(空中) 무의'無意'라 한 것입니다.

UN에서 전세계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질문은 딱 한가지였다.
‘지금 다른 나라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식량부족에 대한 해결책이 있다면 정직한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설문은 ‘엄청나게’ 실패했다. 아프리카에서는 ‘식량’이 뭔지 몰랐고, 서유럽에서는 ‘부족’이란 단어를 몰랐다. 동유럽에서는 ‘의견’의 뜻을 몰랐고, 중동에서는 ‘해결책’이 뭔지 몰랐다. 남미에서는 ‘부탁’이라는 걸 몰랐고, 아시아에서는 ‘정직한’이라는 뜻을 몰랐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다른 나라들’이라는게 뭔지 몰랐다.

<여섯가지 감각의 뿌리와 대상>

지금까지 설명드린 ‘안,이,비,설,신,의’를 6근六根이라고 합니다.

뿌리 근자를 쓰는게 재미있는데, 감각의 제 1전선이고 각 기관의 뿌리라 생각하면 수긍이 갑니다.
도표를 하나 만들겠습니다.

6근(6根) + 6경(6境)=12처(12處)
안 - 색 →눈으로 대상인 물질을 인식
이 - 성 →귀로 대상인 소리를 인식
비 - 향 →코로 대상인 냄새를 인식
설 - 미 →혀로 대상인 맛을 인식
신 - 촉 →몸으로 대상인 감촉을 인식
의 - 법 →생각으로 무형, 유형의 대상을 인식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색,성,향,미,촉,법’을 6경六境이라 하며 경계 경자를 쓰는 의미는 ‘나’와 ‘생각의 대상인 바깥의 무엇’과의 부딪치는 경계지점이라고 편하게 새기십시요.

그러나 선적인 언어로 ‘지금의 경계가 어떠냐?’는 ‘지금 네 마음의 상태가 어떠하냐?’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당면한 문제는 마지막의 의意의 작용을 일으키는 대상을 법法이라 한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야심경에서는 공중(空中)‘無法’이라 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생각을 잘 가다듬으며 들으셔야 하는데, 왜냐하면 지금 말하고자하는 ‘법’은 진리의 법 즉, 불법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각의 대상이 사물이고, 청각의 대상이 소리이듯이, 그냥 생각을 일으키는 대상을 ‘법’이라한 것입니다.

그러한 개념으로 이해하면 번뇌도 망상도 그 대상이 법이요, 진리라 생각을 일으키는 대상도 법입니다.
다만 ‘진리라 생각하는 것을 법이라 한다’는 말과, 그 ‘법이 곧 진리다’ 하고는 전혀 별개의 문제란 말씀인데 좀, 헷갈리실 겁니다.

이렇땐 적절한 비유를 들어 설명하라고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말하셨습니다.

저도 어떤 이는 속으로는 인정 안 해줄지 몰라도 겉으로는 출가를 했고, 주민등록에도 ‘중’으로 되어있으니 부처님 제자라 우길수 있으니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보겠습니다.

2~3년 전인가 휴전선가까이 집단생활 하는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사람이 죽어도 교주말대로 생수인지 무슨 물인지를 뿌리면 썩었던 사람도 부활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 적이 있었습니다.

반야심경과 대비시켜 설명드리면, 그 사람들의 생각(意)의 대상인 ‘물 뿌리면 부활’(法) 이렇게 되는겁니다.

그러니 여기서의 법은 불법이니 진리니 이런 차원의 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意)의 대상으로서의 정신적으로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유형,무형의 ‘그 무엇’을 법이라 한 것입니다.

이 부분을 확실히 이해하셔야 뒤에 설명될 불법의 깊이와 깨달음의 단계등에서 지금의 ‘법’이라는 말과 혼돈이 되질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더욱 경전에서 법이란 용어를 쓰니 당연히 불법과 진리의 법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이런 선입관을 버리시란 말씀입니다.

반야심경에서의 공중(空中)‘무법無法’은 이렇듯이 법에도 다시말해, 생각을 일으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과 관념에도 집착하지 말아라 하는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이란?>

몇 년전부터 위빠사나 수행법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이 위빠사나 수행이 마침 반야심경의 이 대목과 관련이 있어 언급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의 전체적 의도와 위빠사나 수행과는 오히려 무관함을 분명히 해두겠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미얀마, 스리랑카등 남방불교권(소승불교라는 말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능하면 쓰지 말아야 합니다)의 주된 수행방법입니다.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하여 그 전파가 인도-중국-한국-일본으로 이어지는데 이를 북방불교라 하고,
인도-스리랑카-미얀마,태국등의 경로의 불교를 남방불교라 부름니다.

흔히 북방불교를 대승불교라하고, 남방불교를 소승불교라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말 그대로 큰 오해입니다.

불법을 실천하는 정신에는 대승과 소승을 편의상 구별하여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남방불교를 모두 소승불교라 말하는 것은 아주 큰 병폐입니다.

내면을 보면 한국불교야 말로 도리어 소승불교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소승은 혼자 깨달음을 추구하고 다른 이는 구제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승쪽의 비판인데, 한국불교가 어디 제대로 혼자라도 ‘깨달음’을 강렬히 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더욱 소승의 깨달은 자인 독각獨覺을 모신 독성전이 있고, 스님들과 신도들도 그 독각에 예배하고 기도하는데 한국불교가 무슨 대승불교운운하며 그들을 소승이라고 폄하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가 말입니다.

이것은 겉으로 들어난 사정이고, 잘 드러나진 않지만 수행의 측면에서 한국불교의 간화선 최고주의와 남방의 위빠사나를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것입니다.

이 문제는 위빠사나 수행법을 이해하셔야 설명이 가능하니, 지금부터 간단히 위빠사나 수행법을 설명드립니다. 위빠사나는 아함부 경전 중 대념처경大念處經이란 경에 의지합니다.

이 부처님도 하셨다는 위빠사나 수행법은 한 마디로 ‘마음 챙김’입니다. 순간 순간 일어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 채는’ 수행법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확대 해석하는 어떤 이는 “육조단경 좌선품의 생각생각 중에 청정한 자성을 보라(念念中 自見淸淨心)고 하였듯이 의식의 흐름을 관하는 돈오적 수행이다”라고 까지 주장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같다붙임’입니다.

위빠사나의 ‘마음 챙김’의 대상은 몸, 느낌, 마음, 법(身受心法)의 네 가지입니다.
이를 사념처라 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신념처身念處
자신의 몸을 부정不淨하다고 관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욕망을 제어하는데 제일입니다.
즉, 이성을 보고 성욕이 일어나면 그 이성을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의 신체는, 나의 신체도
똥,오줌,고름,가래등 으로 가득하다고 마음을 ‘챙기는 것’입니다.

둘째, 수념처受念處
바로 앞에 도표로 정리해드린 안,이,비,설,신,의(육근)의 감각의 느낌들이 ‘고苦다’라고 관하는 것입니다.

제가 ‘수受’에서 업이 시작된다, 색色이 내 업을 일으킨다고 색을 탓하지 말라고 한 말을 기억해 내셔야합니다. 즉, 어떤 비싼 옷이 좋아 입고 싶은 욕심이 나면 그 옷을 생각하는 마음을 돌려 입고 싶어하는 마음 ‘그 자체를 알아채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옷을 꼭 입어야하는 이유가 사실은 ‘허망한 마음’이라고 마음을 챙길 수 있습니다.

셋째, 심념처心念處
마음을 무상無常 하다고 관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상은 ‘항상한 것은 없으니 지금 순간에 집착하지 말라’라는 의미이지 허망하다, 덧 없다,가치가 없다는 절대 아닙니다. 한국불교의 신도들에 대한 근시안적 설명법의 문제중 하나이지만 무상을 말할 때 대부분 그런 식으로 해놓으니 불교를 모르는 이들이 불교는 허무주의 종교다 라고 말할 빌미를 주는 것입니다.

심념처의 핵심은 지금 이순간 내가 확신하고 있는 마음도 사실은 영원히 그런 마음을 갖을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고, 이것은 다시말해 나의 지금의 확신이 언젠간 바뀔수도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챙기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넷째, 법념처法念處
제법諸法이 무아無我라고 관하는 겁니다.
이 ‘제법무아’야 말로 불교의 기본전제인 삼법인三法印이란 진리 중 가장 핵심적인 말입니다. 즉, 우리가 이것이 진리다, 저것이 진리다 라고 생각하는 그 법이 사실은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관하라는 뜻인데 너무 어렵고 설명하려면 또 책 한 권이 나와야하니 이쯤만 해두겠습니다.

다만 이 제법무아가 반야심경의 공空과 둘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기억해 두십시요. 위빠사나 식으로 설명하면 ‘진리에 집착하지 말고 진리를 추구하는 현재의 그 마음을 챙겨라’입니다.

이젠 제가 곤혹스러울 차례인 것을 저는 감지하는데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위의 위빠사나의 수행의 핵심인 사념처의 저의 설명을 보시고 간화선을 수행하시는 분들은 ‘위빠사나를 너무 광범위하게 해석했다’고 하실 것 같고, 위빠사나를 수행하시는 분은 ‘설명이 추상적이고 세밀하지 못하다, 그게 다가 아니다’라고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습니다.
솔직히 저는 간화선만 하는 수행자도 아니고, 또 위빠사나 수행만을 하는 수행자도 아니니 당연히 그런 말을 들어도 변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한국불교에 이 점만은 꼭 밝혀두고자 합니다.

간화선의 몰록 깨닫는 돈오법이 아니면 수행의 가치가 없다는 쪽에 대해서는, 간화선법으로 온존한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 1,000 여 년 동안 몇 명이며 간화선의 병폐로 무늬만 선禪을 추구하는 무리가 양산되고 있는 현실, 그리고 깨달음의100점짜리 간화선을 수행해도 10점 밖에 이룰 수 없다면 위빠사나가 설령 50점짜리 수행법이라도 20점을 받을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라면, 엄밀히 말해 오히려 부분적으로 사람에 따라 ‘권장’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더욱 위빠사나를 오히려 간화선법에 대항하는 더나가 간화선법을 가로막는 열등한 수행법이라고 매도해야 할 근거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주장은 간화선 아니면 궁극적 깨달음이 없다는데까지 이르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엔 위빠사나의 입장에서 간화선은 실제 경전에 있는 부처님의 수행법이 아니고 방편으로 나온 수행법이고, 위빠사나는 대념처경등에 분명히 있으니 이것이 성불成佛의 수행법이다 라고 확대해서도 곤란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일반불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방법이 최고의 수행법이란 생각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쉽고 편리한 것이 우리에게 항상 최선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더 이상 거론하면 공연히 ‘저 놈이 양비론으로 지 공부 자랑한다’라는 소리들을까 두려워 그만하렵니다.‘양비론’은 제가 아주 싫어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한정된 지면에 고작 몇 줄의 견해 표명에 핏대 올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빌미를 줄 필요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반야심경의 본래 해설로 돌아 오겠습니다.
지금까지 설명드린 반야심경의 ‘안,이,비,설,신,의’(육근)와, 색,성,향,미,촉,법(육경)이 모두가 공空 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이 육근과 육근을 더한 12처를 관하여 각각의 ‘마음 챙김’을 하는 것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법이라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 길어진 것입니다.

골치 아프니 제 마음에 쏙 드는 비틀즈의 노래 가사를 소개해 드립니다. 그냥 소개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 챙김’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곡이라 아마 아실겁니다.

렛 잇 비 let it be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내가 번민에 헤메고 있을 때)
Mother Mary comes to me(어머니가 내게 다가와 말 합니다)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그 지혜의 말씀은 그냥 놔둬라…..)

And in my hour of darkness(또 내가 암흑의 시간 속에 헤멜때도)
She is standing right in front of me(어머니가 내 앞에서 지혜로운 말씀을 하시죠)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그 지혜의 말씀은 내버려 둬….)

Let it be, let it be.( 놓아버려라, 집착하지마라.)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그 지혜로운 말씀인 순리에 맡겨라…)

And when the broken hearted people(세상의 마음의 상처받은 사람들)
Living in the world agree,(살아가며 통하는 말)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답은 고통에도 마음두지 마세요)

For though they may be parted there is (사람은 혹시나 헤어져도)
Still a chance that they will see (다시 만날 기회는 아직 있는 거예요)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그래서 답은 그대로 두는 거예요)

Let it be, let it be. Yeah(그래 놔 둬봐요, 놔 둬바…)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분명히 해결은 그냥 지켜보는 거예요)

And when the night is cloudy, (밤이 와 세상도 나도 어두워져도)
There is still a light that shines on me,(그래도 나를 비추어주는 등불은 있습니다)
Shine on until tomorrow, let it be.(내일이 올때까지 비출 수 있는 말, 마음을 잃지 말아라…).

I wake up to the sound of music(내가 음악 소리에 잠을 깨면)
Mother Mary comes to me(어머니는 내게 다가와)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그 지혜의 속삭임을 들려주시죠. 집착하지 말아라…)

Let it be, let it be.(자 나둬 봅시다, 집착하지 맙시다)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진실한 해답은 그냥 순리에 맡기는 거예요)
Let it be, let it be,(그래요 맡깁시다, 순리 그 자체에)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그 지혜의 한 단어는 오직 집착하지 말아라예요)

송구스럽게 제가 번역을 해보았는데, 약간 의역을 했습니다. 원래 Mother Mary 는 영어의 고유명사화 된 기독교의 ‘성모 마리아’를 뜻합니다. 하지만 ‘어머니’ 또는 이 반야심경을 설하는 ‘관자재보살’이라 생각해도 잘못될 것은 없다고 여겨집니다.

더욱 반복되는 Let it be 를 해석함에 불교적 분위기를 위해 전부 다르게 표현해 보았습니다.
그래도 중이 이 정도면 그렇듯하지 않습니까?

 

39. <식과 의식의 차이>

이제 설명드려야 할 부분은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無眼界 乃至 無意識界’입니다.
저는 참으로 곤혹스러운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앞에서 열심히 도표까지 만들어가며 안,이,비,설,신,의(육근)와 색,성,향,미,촉,법(육경)을 하나하나 설명드렸고, 이 육근과 육경을 합해 12처處 라고 부르며 다시, 이 12처를 관하는 ‘마음 챙김’이 위빠사나 수행법이라고 까지 나름대로는 애를써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또 ‘안계眼界 내지 의식계意識界’가 무無 하다고 반야심경에서 되풀이해 버리니, 제가 얼마나 고달픈 처지가 되었는지를 한번쯤 생각해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내지는 ~ 란 뜻이니, 풀어쓰면 ‘무안계 무이계 무비계 무설계 무신계 무의식계’가 됩니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십시요.

앞의 안,이,비,설,신,의(육근)와 색,성,향,미,촉,법(육경)의 단순한 반복이 아닌 것을 발견하셔야 합니다.

한 눈에도 구별되는 ‘계界’ 란 한 글자의 추가는 그렇다치고, 저의 관심은 앞에서는 (공중무)식識과 (공중무)의識 라고 의와 식을 구별해서 사용하고 지금은 합쳐서 ‘의식意識’이라고 쓰는 의미있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현장역이 아닌 제가 소개한 법월삼장스님 역에서도 역시 ‘의식’으로 번역했다는 말입니다. 우선 ‘계’ 부터 해결하고 왜 ‘의식’이라 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럴땐 역시 시각적 효과가 있는 도표가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6근(6根) + 6경(6境) + 6식(6識)= 18계(18界)
안 - 색 - 안 →안근이 색경에 부딪쳐 안식을 일으킴
이 - 성 - 이 →이근이 성경에 부딪쳐 이식을 일으킴
비 - 향 - 비 →비근이 향경에 부딪쳐 비식을 일으킴
설 - 미 - 설 →설근이 미경에 부딪쳐 설식을 일으킴
신 - 촉 - 신 →신근이 촉경에 부딪쳐 신식을 일으킴
의 - 법 - ‘의식’ →의근이 법경에 부딪쳐 <의식>을 일으킴

이 <의식>이 실은 앞의 방법대로 대입시켜 표현하자면 ‘의식식’을 일으킴이라고 해야 합니다.

단순히 6근에 6경을 더해 12처 거기에 또 6식을 더하면 18계가 된다는 것은 그렇다치고, 반야심경에서는 ‘무안계 내지 무<식계>’해야 당연할 것 같은데,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즉, 반야심경에서 이 경우에는 식識과 의식意識 을 혼용해 쓴다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길에 양념 설명입니다.
6근ⅹ6경ⅹ3세(과거,현재,미래)=108번뇌

다시와서, ‘식계’와 ‘의식계’ 즉 ‘식’과 ‘의식’을 같은 의미로 썼는가 아니면 다른 의미로 썼는가, 이것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실은 제가 어설프게 반야심경을 설명하고 있긴 하지만, 준비 과정에서 이미 우리나라에 출간된 거의 모든 반야심경 해설서를 훝어 보았습니다. 그 중에는 경봉스님, 달라이라마, 라즈니쉬의 해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제기하는 문제와 앞서 제기한 문제(고액이란 단어의 문제 등) 또 ,앞으로 제기할 문제에 대해 도무지 언급을 해 놓은 책이 없습니다.

경전을 보다가 보면 이런 사소한 것 같지만 한 글자의 해석의 차이로 전혀 다른 내용이 될 수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제가 제시하는 문제가 한국불교가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중국불교의 관점에서 ‘왜’ 또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에 대한 심각한 사례임을 느끼셔야 합니다.

책의 서두에 중국의 혜능에는 절대적이지만, 원효와 의상의 불교는 거들떠 보지도 않는 한국불교의 사상적 편식을 지적했었습니다.

이번에는 유마경의 첫 품의 시작에 대한 한역의 차이를 직접보십시요. 무비스님의 우리말 역을 먼저 소개하는데, 구라마집의 한문본을 한글로 옮기신 것입니다.(두 한문 본을 비교하실 때 뜻을 새기시라는 것이 아니라, ‘한자’가 얼마나 다른지를 확인하자는게제 의도입니다)

<이렇게 법문하시는 것을 내가 들었다.
어느 때에 부처님께서 비야리성안 암나나무동산절에서 큰 비구 대중 8천사람과 함께 계셨는데 보살은 3만2천 이었으니 여러 사람이 잘 아는 이들이다.

뭇사람이 아는 바로다. 큰 철(智)과 근본 행을 다 남김없이 이룩함은 모든 부처님의 위신으로 세워지는 바라 법을 옹호하는 성이 되어서 바른 법을 받아 지님에는 능히 사자의 외침인 듯 이름이 시방에 들리니 뭇사람이 청하지 않더라도 벗이 되어 이에 편안케 하며 삼보를 이어 받들되 능히 끊이지 않게 하며 마구니를 항복시키고 모든 외도를 제거할새 남김없이 몸이 깨끗하니 다섯 가지 덮임과 열 가지 막힘을 기리 여의시다.>

이 번역의 한역인 구마라집의 것입니다.(후진後秦 406년의 역으로 알려 짐)
如是我聞。一時,佛在毗耶離菴羅樹園,與大比丘衆八千人俱。菩薩三萬二千,衆所知識,大智本行皆悉成就。諸佛威神之所建立,爲護法城受持正法,能師子吼名聞十方,衆人不請友而安之,紹隆三寶能使不絕,降伏魔怨制諸外道,悉已清淨永離蓋纏,心常安住無閡解脫,

아래는 유마경의 같은 부분이지만 지겸의 것입니다.(오吳 223년의 역으로 알려 짐)
聞如是。一時,佛遊於維耶離柰氏樹園,與大比丘衆俱,比丘八千。菩薩三萬二千,皆神通菩薩,一切大聖能隨俗化,佛所作者皆已得作,爲法城壍護持正法,爲師子吼十方聞聲,衆人不請友而安之,興隆三寳能使不絕,皆以降棄魔行讎怨,一切所化莫不信解,皆度死地脫無罣礙,

구마라집鳩摩羅什은 현장과 함께 한국불교가 의지하는 한역漢譯 불전佛典의 상당부분을 번역한 중국의 승려입니다.그리고 그로 인해 삼론종三論宗이 탄생됩니다.

지겸支謙은 구마라집보다는 앞선 삼국시대의 번역가인데, 삼국지에 등장인물인 오나라 왕인 손권이 바로 지겸을 등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반야般若와 정토淨土 사상의 유행을 주도한 분입니다.

두 분의 약 200년의 시대적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심하게 표현하면 전혀 다른 경을 보는듯 하지 않습니까?

이런 차이가 날 수도 있는 한역漢譯 중, 특정인의 번역을 마치 부처님의 뜻을 퍼펙트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처럼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한국불교의 실정이니, 어디 선가禪家에만 불립문자不立文字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제가 현장역과 모든 반야심경 해설서에 ‘식’과 ‘의식’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부처님이 살아 계시며 직접 설하신 것을 ‘녹음’했다가 재생하듯 이루어진 경전은 사실 하나도 없습니다. 설사 녹음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말은 지금의 인도 사람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 뻔합니다.

마치 우리 선조들이 사용하였던 이두 문자나 옛 훈민정음의 문자는 고사하고 지금 사용하고 있는 제주도 방언도 전혀 모르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문자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은 기막힌 정답입니다.

다만 제 주장은 그 말이 선가禪家의 전문용어가 아니라 선禪과 교敎를 망라한 불법 이해의 기본 정신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야심경의 ‘식’과 ‘의식’의 차이를 이번에는 구별해야 겠습니다. 그 구별의 이유는 ‘식’과 ‘의식’을 혼돈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자, 이제부터는 식, 의식, 마음을 본격적으로 탐구해봅니다.

<불법의 마음 중생의 마음>

인도에는 지금 우리가 대하는 불교의 틀을 잡은 손꼽히는 위대한 사상가가 있습니다. 실은 사상가라는 말로는 부족하고 거의 보살의 경지에 이른 분들입니다.
용수龍樹(150~250년 경), 무착無着(310~390년 경) 과 세친世親이 대표적입니다.

용수는 부파불교에 속해있다 당시의 모든 경전을 통달하고 대승불교의 교의敎義를 확립한, 제2의 석가란 칭송까지 받는 분인데 그 저술은 대지도론,십주비바사론,중론등 엄청난 내용의 것들로 가득합니다.

무착은 인도 대승불교의 유식설唯識說을 체계화 시켰고, 대승공관大乘空觀을 깨우치고 대표적 저서 섭대승론攝大乘論은 후에 법상종法相宗이 생기게 되는 기반이 됩니다.

무착은 대승이 진정한 부처님의 교설敎說이라고 10가지를 들어 조목조목 논증하였습니다. 세친(320~400년 경)은 무착의 동생으로 대승불교의 꽃을 피운 분이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친도 처음에는 부파불교를 연구하다 후에 대승경전을 주도한 분으로 구사론俱舍論, 백론百論, 유식삼십송唯識三識頌 등 수 많은 논서가 있습니다.

이 무착과 세친이라는 인류사에 더 없는 형제가 확립한 유식설唯識說이 지금 우리가 대하는 불교의 큰축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유식설은 한 마디로 ‘마음 밖에 법이 없다’라는 한 마디로 귀결됩니다. 선禪 적인 가르침을 말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예가 있습니다.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한 스님이 말하길, "깃발이 움직이고 있군."
그러자 다른 스님이 반박했다.
"아니야,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움직이는 거야."
이렇게 스님들이 논의가 붙었습니다.
"그렇다." "아니다." "바람이다." "깃발이다." 하며 다투기 시작했다.
그때 한 객스님이 말했다.
"그것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대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 객 스님이 바로 육조 혜능선사입니다.
여기서 혜능의 말은 화엄경의 그 유명한 유심게唯心揭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라는 의미와 일치합니다.
불법은 한 마디로 ‘마음을 정확히 알아라’ 라는 가르침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마음’이라는 단어가 설명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나 또 이해하려는 사람의 입장에서나 양자에게 모두 간단치가 않다는데 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혜능이 말하는 마음과 여러분이 생각하는 마음이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누구든 가장 많이 하고 또 듣는 소리인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준다’라고 할때의 마음이 ‘모든 것이 만들어지는 마음’은 아닌 것입니다.

마음에도 깊이가 있다는 뜻인데 그 깊이를 양파껍질 벗기듯 설명해 나가는 것이 바로 유식학唯識學입니다. 이제 유식학에 의지해 마음을 하나씩 벗겨 나가겠습니다.

그 전에 긴장을 풀기위해 각자가 염두에 두는 ‘마음’이란 것이 얼마나 작위적인지를 보여주는 우스개소리를 두가지 소개합니다.

학생:선생님, 앞문이 열렸는데요.(지퍼)
선생님:그래?
학생:정말 열렸는데요.
선생님:주번 나와! 앞문 닫아.


--정신분석의에게 고용되어 있던 비서가 사표를 냈다.봉급도 많고 일도 편한데 왜 그만두느냐는 친구들의 물음에 그녀는 이렇게 설명했다.

만일 조금만 지각하면 적의를 갖고 있다고 취급당하고,시간 전에 출근하면 불안증에 걸려 있다고 진단하고,꼭 제 시간에 맞추어 나가면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가장 겉의 마음 전5식前五識>

유식학에서는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을 전5식前五識이라 합니다. 유식학에서의 제6식은 ‘의식’意識만을 독립된 식으로 구별하여 부르고 그 이전의 식이라는 의미로 전오식이라 합니다.

몇 번 언급되었듯이 눈,귀,코,혀,몸으로 받아드리고 느끼는 감각의 식을 전5식이라 한다는 말씀인데,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이 감각기관은 외부손상에 의해 고장날 수 있는 오류투성이의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또, 아주 제한적인 정보로 우리를 현혹시키기에 깨달음을 추구하는데는, 더욱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식識이라는 말입니다.

좋아하는 색깔이 다르고 입맛이 다르고 취향이 다른 것도, 더욱 그러한 차이로 부질없는 시비를 일으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냥’ 느끼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주 심하게 표현하면 이 전5식은 ‘마음’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의식을 일으키기 위한 전단계 생각(前念)으로서의, 즉 생각을 일으키기 이전의 육체적 감각의 발동이라고 생각하시면 정확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뒤의 제6식인 ‘의식’과 앞 뒤 연관없이 그대로 존재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식意識을 위해 예비적 식識을 잠시 감지하는 것이 이 전5식의 하는 일입니다.

예를들어 TV를 보며 ‘웃었다’는 것은 전5식 중 눈과 귀의 작용인 안식 眼識과 이식耳識이 주로작용하여 그 결과 웃은 것인데, 실상 ‘웃은 마음’은 전오식이 아니라 제 6식이나 그 다음의 제7식에 속한다는 말입니다.

앞에 제 몇 식이라고 ‘제’자를 붙인 것은 6근의 6식과 혼돈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제6식은 전5식보다 한단계 더 깊은 마음을 뜻하고 제7식은 다시 제6식보다 한단계 더 깊은 마음을 뜻하고 이런 식(이번의 식式은 방식의 식입니다)으로 설명이 될겁니다.

<제6식인 의식>

반야심경의 ‘무의식계’를 설명드리려다, 더 구체적으로는 현장이 반야심경에서 ‘식識’이란 용어를 사용하다 하필 이때 ‘의식’이란 단어로 바꾸어 번역을 한 내면의 세계를 탐구해보자는 제 의도가 이 어려운 유식학의 설명에까지 와버렸지만 이것 역시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현장 이전의 한역에서는 심,의,식을 혼용해 쓴 경우가 많았습니다.

인도에서도 무착과 세친의 두 형제에 의해 유식학이 정립되기 시작한게 300~400년 경입니다. 현장은 당唐나라 스님으로 생몰연대가 622~664입니다.

그러니 불과 200년 만에 현장이 중국 최초로 심,의,식을 구별하고 또, 반야심경에서 제가 지루하게 끌고있는 ‘식’, ‘의식’의 차이를 구별짓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실은 대단한 ‘시도’였음이 분명합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교과서에 나오는 공식적인 시기는 고구려때인 372년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그 훨씬 이전에 중국이 아닌 다른 경로로 이미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강력한 증거들이 있긴합니다. 그 주장을 배제하더라도 한국불교는 1,700년의 긴 역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에 한문으로 전래된 불교와 지금 우리가 대하는 불교의 한문의 언어적(한글의)사용에 큰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마땅한 우리말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는게 사실입니다.

우리말 ‘깨달음’이 한문으로는 성불,견성,돈오,열반,해탈,시각,본각,구경각…. 셀수가 없습니다.

한문으로는 그 뉘앙스만 다른 것이 아니라 함축하고 있는 내면의 의미도 사실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깨달음,깨침 이외의 설득력 있는 언어가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나라가 한문을 병용하는 중국과 같은 한자 문화권이라 해도 솔직히 이 대목에 이르면중국의 불교에 기가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현장이 식과 의식을 구별하는 ‘안목’을 가진 것은 중국불교에서도 큰 사상적 도약이라 할 수 있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심,의,식을 유식학에 대입시키면 다음과 같습니다.
심-제8식 이숙식異熟識 (아뢰야식)
의-제7식 사량식思量識 (말라식)
식-제6식 요별식了別識 (의식)

조금 거친 대비이긴 하지만 여러분은 오히려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 제6식을 요별식了別識이라고도 하는데, 전5식을 통괄하여 분별 시비하는 마음이라는 의미로 부르는 말입니다. 세친의 유식삼십론을 번역한 현장은 이 제6식은 ‘대상을 인식하는 모습(相)이 거칠다(麤)’고 말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다음의 제7식을 이 제6식과 혼동하여 요별식이라고 소개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이 제6식은 불교의 수행의 관점에서보면 문제투성이의 ‘의식’인 것입니다.

더욱 제6식은 인간에게만 있는 의식이 아닙니다.
동물도 이 식이 분명히 있습니다.
먹을 것만 보면 침을 흘리는 개의 마음이 단순한 신경 반사작용이 아니라, 설명그대로 ‘거칠지만 판단할 줄 아는 마음’ 다시말해 제6식의 결과라는 말씀입니다.

주인의 마음을 읽어 그 변화에 눈치보는 애완견, 제인 구달 여사와 같이 침팬치와 대화할 수 있는 것도 그 동물에게 ‘의식’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들입니다.

그러니 동물들은 그저 지능이 낮다는 것이지 의식이 없다는 말은 성립이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또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개나 돌고래, 침팬치등은 인간과 교감이 가능할 정도의 의식을 가지고 있음이 확실하고 지능지수도 측정이 가능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개미나 벌등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개미나 벌은 거의 본능에 의지하고 의식은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렇지만 벌들이 벌집을 짓는 과정을 보십시요, 수 많은 벌들이 오직 각자 자신의 맡은 일만 하는 것 같습니다. 벌들 각자는 설계도도 없고 지시하는 감독 벌도 없고 더욱 완성된 벌집을 조감도를 보듯이 예상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개미의 경우는 더욱 놀라운 능력을 보여줍니다.
우리나라에는 없지만 열대지방이나 사막등에 사람 키 만한 두개의 휘어진 굴뚝 모양의 것이 끝에서 절묘하게 서로 연결된 개미의 집을 기억해 내실 수 있을겁니다.

도대체 수 백의 벌이나 수 백만의 개미가 ‘어떻게’ 그런 완벽한 조화를 이룬 하나의 집을 만들 수 있을까? 신기한 노릇입니다. 그 정도의 집은 인간도 만들기 어려운 정도로 정교합니다.

아마 그 많은 인원의 인간이 집을 만든다면 서로 다른 ‘의식’때문에 영원히 세웠다 헐고 다시 짓는 일만 반복할 것 같습니다. 아쉽게도 지금은 이것까지 자세히 설명해드릴 여유가 없습니다.

다만 간략히 말씀드리면 이 벌과 개미의 집짓기는 셀드레이크의 형태장形態場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형태장은 ‘과거 오랜 시간동안(적어도 수 백만년 이상) 축적된 생각의 저장’을 뜻하는데, 어떤 과학자는 몇 백년 후에는 이 형태장을 측정할 수 있는 기계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마치 지금의 자기장 측정기처럼 말입니다.

터무니 없다고 생각하실지 몰라도 불과 100년 전인 1900년 대에 원자가 존재한다고 믿는 물리학자가 없었다는 사실과 별이 빛나는 이유를 추측하는 과학자가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이 주장을 웃어 넘길 수 만은 없는 것입니다.

물론 불교적으로는 함께 지어 온 업業 인 ‘공업’共業 해 버리면 한 마디로 끝나지만 말입니다.

 

<헤아리는 마음인 제7식>

제6식보다 한단계 깊은 마음의 세계를 제7식이라고 합니다. 제7식은 말나식末那識이라고 하는데 사량思量 즉, 헤아려 인식하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킵니다.
이 제7식부터 불교의 ‘마음’이란 한 단어의 분석이 얼마나 섬세한가를 맛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이 잠을 자며 꿈을 꿀 때의 마음, 대상이 없는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 깊이 사유하는 마음, 정신착란이 일어나 제 정신이 아닐때의 마음등은 어느 깊이의 마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서양의 심리학 개념으로는 무의식, 잠재의식 정도인데 그것은 표현이 모호합니다. 더욱 각각의 마음의 상태에 대한 경계가 불분명합니다. (유식학과 서양 심리학의 비교는 뒤에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 책을 읽으시며 생각하는 바로 그 마음은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의 어느 깊이까지 ‘침투’해 들어갈까요? 대개의 경우 바로 이 제7식까지 입니다. 제7식을 ‘생각하고 헤아려 인식한다’는 사량思量識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거의 모든 판단의 근거를 삼는 최종적 마음이 제7식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중요한 제7식이 항상 옳은 결정만 내리지는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오히려 불교에서는 ‘옳다’, ‘그르다’ 라는 마음 자체를 일으키는 것을 아주 위험스럽게 여깁니다.
무슨 말씀이냐하면 어떤 경로나 어떤 이유로든 작위적으로 ‘판단하고 확신’하는 것을 번뇌의 주범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야겠습니다.

첫번째 예입니다.
내 집에 도둑이 들어서 물건을 도둑 맞았는데, 그 도둑이 잡혔습니다. 경찰서에 가서 도둑에게 이 천하의 나쁜 도둑놈 하고 말했습니다.

이 경우 인류 전체가 그 사람에게 도둑놈이라고 해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사람은 내 물건만 훔쳤으니 피해를 본 내게만 도둑 놈에 해당되는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요.

나에겐 분명한 도둑인데, 그 사람에게 되레 도움을 받은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도둑이라는 나의 ‘확신’은 주관적 사건의 결과로 인식된 것이지, 모든 살아있는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인식된 사항은 아니란 말입니다.

아주 알기쉽게 말해 내가 도둑 맡은 물건을 그것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기증했다면 그 사람은 한편으로는 은인이라 인정받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두번째 예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냉장고에서 찬 물을 꺼내 먹으려다 컵을 깨뜨렸다고 가정합니다. 십중팔구 여러분은 ‘넌 애가 그렇게 조심성이 없니’하실 겁니다.
아이의 행동에 비해 그건 결코 심한 책망이 아닐겁니다.

그럼 이 말이 전적으로 성립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아이는 아주 잠깐의 순간적 실수에 ‘조심성 없다’는 경고를 받습니다.

그렇다고 이 아이가 신호등이 빨간 불인데도 횡단보도를 건널 정도로, 또 가스렌지에 라면 물을 올려 놓고 몇 시간을 깜빡할 정도로 조심성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의 경우에도 그 ‘조심성이 없다’는 말에 문제가 전혀 없지 않습니다.

마지막 세번째 예입니다.
이번엔 좀 까다로운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도 좋아하는 축구의 경우입니다.
한국 축구의 골 결정력 부족은 생각만 해도 사실 짜증납니다. 더욱 유리하던 게임을 한 선수가 백 패스를 잘못하여 어이없는 골을 먹고 패하면 그 백 패스 한 선수는 한마디로 ‘죽일 놈’이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한 선수의 한 번의 잘못된 패스로 게임에 지게 된 것일까요? 이제부터는 상상을 해 보셔야겠습니다.

그 선수가 백 패스를 잘못한 순간을 정지 화면의 상태로 놓고 생각을 경기의 시작점까지 되감아 보는 겁니다. 마치 필름을 되감아 역으로 보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결국 중앙 서클에서 ‘첫 패스’의 경기 시작 장면이 됩니다.

여기서 만약 경기의 시작의 첫 패스가 ‘다르게’ 되었어도 과연 그 ‘죽일 놈’의 선수가 통한의 백 패스를 하게 됐을까요?
분명히 그렇지 않을겁니다.
이번에도 여러분의 축구 전문가적 판단은 필경 틀린 것이 되고 맙니다.

제7식은 이와 같이 얼핏 당연하거나 혹, 수준이 있는 것 같이 보이는 우리의 ‘의식’이 사실은 번뇌의 주범이라는 것이 유식학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유식학의 입장에서 보면 고집과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일수록 제7식의 작용이 활발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유식학에서 말하고자하는 것은 제7식의 시비분별 작용 그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현상과 때론 진리라 믿는 것 조차도 실은 제7식의 분별상分別相이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불교의 수행이란 곧 이 제7식을 어찌 제어하는가에 그 시작이 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그래서 수행과 깨달음을 위해서는 더 정화된 마음이 필요하게 되는데 그것이 제8식입니다.

제8식에 들어가기 전에 제7식의 이해를 도와줄만한 말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스님들 앞에서 ‘도로 아미타불’이란 말을 하면 야단 맞습니다.

도로 아미타불이란 뜻이 일이 거의다 잘 되다가 막판에 어긋나 허망하게 틀어진 것이라고, 아미타불을 부정적인 의미로 여긴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짜 ‘도로 아미타불’의 어원을 아시면 스님들이 자신있게 야단 칠 것이 아니라, 자신있게 권장해야 할 말이 이 말임을 저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파수록罷睡綠이라는 고전 해학집에 실려있는 내용입니다.

어떤 선비가 친구를 만나려고 한겨울에 말을 타고 강을 건너갔다. 그가 친구집에서 며칠 쉬어 돌아올 때는 날씨가 푹해져 강의 얼음이 엷은지라 말을 타고 건너기에는 위험성을 느꼈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어 말에서 내려 말에 실은 부담롱負擔籠(부담롱의 준말이 부담負擔으로 남에게 부탁받은 것을 일컽는 말.부담금,공동부담등의 어원입니다)을 끈으로 매어 말 뒤에 끌려오도록 끈을 길게 하여 안장에 매달아 중량을 분산해놓고, 자기도 고삐를 길게 하여 말 앞에서 끌며 강을 건너는데, 그래도 위험한 생각이 들어 “나무아미타불”을 연거푸 염하며 건너왔다.

강기슭 가까이 와서 이제는 빠진다 해도 죽을 위험성은 없다고 느껴지자 유교를 닦은 선비로서 염불을 했다는 것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지랄이나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러고 나서 말을 돌아보니 말에 매단 부담롱의 끈이 풀어져 부담롱이 강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 자신이 다시 가서 그것을 끌어 올 수밖에 없겠는데 아까 “지랄이나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한 죄책감에 아까보다도 더욱 위험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어 또다시 “나무아미타불”을 연속하며 다시 가 부담롱을 끌어왔다.

 

<머금고 저장하는 마음인 제8식과 제9식>

제8식은 아뢰야식阿賴耶識 이라고 하는데, 함장含藏 혹은 이숙異熟이라는 뜻이 있는 마음을 일컽습니다.

어려워지니 제가 여러분을 위해 만든 표를 먼저 보십시요.


제8식을 함장식含藏識 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의식은 물론 무의식까지 저장 기억하는 창고와 같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이숙식異熟識 이라고 부르는 것은 제8식에서 비로서 근본적으로 생각이 바뀌거나 성숙하여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앞의 제7식까지는 반연攀緣(생각을 일으키는데 유형 무형의 대상이 있어 그것으로 자아를 인식하게 되는 마음.선가에서 즐겨 씀)이 있지만 제8식은 반연이 없이도 스스로 생성하고 생각의 씨를 일으킨다는 의미로 종자식種子識 이라고도 합니다.

즉, 일체의 마음의 종착지라는 개념으로 유식학에서는 제8식을 설합니다. 가장 깊은 의식, 무의식이 잠재된 큰 바다와 같습니다.

여기에는 선악과 시비도 끊어진 자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제8식이 윤회의 근본 마음이 된다는 주장이 ‘아뢰야식연기론’입니다.

제8식은 너무나도 중요해 원효도 대승기신론에서 이 아뢰야식을 분석해 놓고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제6식 제7식 제8식의 유식론은 세친의 유식삼식론을 중심으로 설명해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유식론은 이 제8식에서 그치지 않고 제9식까지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제8식을 미망迷妄에서 벗어나지 못한 마음이고 윤회의 주체가 되는 마음이라 하기에, 그야말로 오염되지 않은 더 깊은 내면의 ‘순수한’ 마음을 찾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척 중요한 이유는 깨달음을 이룬 마음은 말 그대로 인연과 업을 곧 윤회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무명無明에서 완전히 이탈된 마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무명에서 해탈된 마음을 제9식이라 하게 됩니다. 제9식은 아마라식阿摩羅識, 진식眞識, 무구식無垢識 등으로 불리우는데 결국은 청정무구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 제9식을 진제가 주장하여 아예 세친의 유식이 아니라 ‘진제유식眞諦唯識’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해심밀경解深密經 같은 유식계통의 경전에서는 이 제9식을 사실상 반야般若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쯤되면 참 어려우실 겁니다.
그래서 유식사상의 견지에서 보는 마음에 대한 설명은 여기서 그치겠습니다.

마음을 좀더 깊이 있게 설명드리기 유식사상을 말씀드렸는데 저는 이 유식사상보다 중관사상을 지지합니다. 반야심경의 ‘정신’도 유식사상이 아니라 중관사상에 있습니다.

 

<용수의 중관사상>

인도에 불교 사상적으로 가장 역사적인 인물로 용수와 무착,세친을 꼽아드린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데 용수龍樹는 실존의 인물임이 분명함에도 용수보살이라고 부르는 불교에서는 특별한 분입니다.

화엄경약찬게의 시작이 ‘대방광불화엄경 용수보살약찬게’인데, 여기서 용수보살도 바로 같은 분입니다. 화엄경도 용수보살이 용궁에서 구해왔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용수는 중론中論이란 길지 않은 저서로 그 사상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의 (공중)‘무의식계’를 설명하다 세친의 유식론으로 빠진 것도 어려운데, 한술더 떠 중론까지 거론하다니 너무하지 않느냐? 하며 불평하실 분도 있으시겠지만 반야심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알아야하니 어찌합니까? 오히려 쉽지않은 설명을 해야하는 제 처지를 딱하게 여기시는 심정으로 들어 주십시요.

불교의 사상은 크게 두 줄기로 유식파唯識派와 중관파中觀派가 있습니다. 유식파는 바로 전까지 6,7,8식을 거론하며 말씀드렸던 세친의 사상을 바탕으로 불교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유식학, 유식설,유식론,유식사상 다 같은 부류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로 이제 말씀드리려 하는 중관파中觀派인데, 용수의 중론을 바탕으로 불교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중관사상이라고 하는데 놀랍게도 ‘연기緣起는 공성空性이고 중도中道’다 라는 언어는 모두 용수의 중론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다시말해 연기, 공, 중도는 본래 유식의 용어가 아니란 말입니다. 용수는 중론의 삼제게三諦偈로 일컬어지는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설파합니다..

因緣所生法 我說卽是空 (因緣이 생기는 진리는 空이라 하며)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또한 假라고도 하며 이를 中道라 한다)
이는 空,假,中의 三諦思想으로 발전하여 후에 천태교학의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하는데 그 문제는 접어둡니다. 하지만 꼭 기억해 두십시요.

공과 중도란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게송이기 때문입니다. 제 의도는 반야심경의 핵심 단어인 또 불교의 키 워드인 ‘공’이 바로 중관사상의 핵심이며, 용수의 작품이니 유식사상을 알고 중관사상도 이해해야 반야심경을 이해하는 순서가 바르다는 것입니다.

자세히 비교를 해드리는데 단 유의하실 전제가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유식사상과 중관사상은 대립된 사상입니다. 그러니 수행자는 유식과 중관 두 사상중 ‘하나’를 취해야 합니다.

문제는 한국불교가 중관의 공과 중도를 취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유식을 설명하며 공과 중도를 인식시키려 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원효의 화쟁和諍사상과 회통會通으로는 그러한 시도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한국불교는 중관사상을 귀착지로 하는 듯한데, 그 과정은 유식사상으로 설명하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 저의 개인적 판단입니다.
저는 중관쪽입니다.
그렇다고 유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저의 불교를 총체적으로 보는 관점이 중관사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일 뿐입니다.

<반야심경과 용수의 중론>

용수의 중론의 핵심은 법法으로서 ‘자성自性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용수는 자성을 연기緣起 혹은 공空의 상대 개념이라 말하는데, 이 사상의 근저에는 소위 법은 실재한다는 ‘법유法有’ 사상을 강도높게 비판한 것입니다.

다시말해 연기와 공의 근본이치로 사물이 존재하니, 사물의 존재의 자성自性이 당연히 없다는 말입니다.
나아가 그렇기에 법 자체가 공하다는 인식을 확실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반야심경의 이해에 왜 중론의 공사상이 필수적인지, 또 한국불교가 공이란 용어를 제대로 받아드리고 있는지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상의 연장에서 공을 의미하는 무아無我란 용어는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아니면 많은 부연 설명이 필요하니) ‘공아空我’로 대체하자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다시 차분히 이 책의 목적과 중간 정리를 하겠습니다.

반야심경을 이해하는 핵심은 공의 이해에 달려있는데, 저는 처음 공이란 단어가 나왔을 때 설명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길 ‘공은 설명도 이해도 간단치 않다, 이 책의 전체에서 공이란 글자를 쓸때마다 공을 설명하는 것이니 그 사실을 잊지말라’고 오히려 당부드렸습니다.

이제 어느정도 그 이유를 짐작은 하셔야 됩니다.
용수가 중론에서 말하는 공을 요약해드리면,
“모든 존재는 상의상관相依相關의 관계(緣起)에 있으므로, ‘이것이다’라는 스스로의 성품을 갖지 못하며(無自性), 공이란 이같이 고정된 자성을 갖지 못하는 것(空)이다. 이때 모든 존재의 실재實在는 다만 연에 의한 잠깐의 이름(假名)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존재가 있게되고 없어지는 것은 이름뿐이지 그 ‘있고’, ‘없음’ 자체가 자성이 될수는 없다. 결국 일체의 존재는 ‘있고’,’없고’의 존재를 떠난 것(中道)이다.”

이렇게 되는데 여기서 또 한가지 주의하셔야할 점은 중도란 말이 ‘중용中庸’ 혹은 ‘가운데 길’이 절대 아니란 사실입니다. 유,무의 양 극단을 초월한 언어임을 유념하셔야 합니다.

용수의 저서 중에는 ‘반야바라밀다찬般若波羅蜜多讚’이 전해지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용수의 중론의 기반은 반야와 공사상에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더 이상은 너무 깊어지니 이쯤해두고 서양철학의 마음의 접근이 어느 정도인지 보겠습니다.

 

46. 서양에서의 심리학

<소크라테스에서 프로이드까지>

불교의 유식사상과 중관사상이 인간의 마음과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아주 섬세한 철학을 담고 있음을 확인하셨을 겁니다.

이러한 사상은 곧 우리의 ‘인식’ 혹은 ‘의식’ 둘을 다 포함하는 그렇지만 막연한 ‘마음’이란 것을 파헤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논의들은 2,000년 전, 아주 짧게 잡아도 1,500년 전 이전에 이미 확립된 것입니다.

서양철학은 소크라테스(기원 전470-399)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정설인데, 알고 계시다시피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로 대변됩니다.

소크라테스의 ‘의식’은 불교적으로 보면 실재에 대한 가치의 단순한 문제 제기에 불과합니다.

불교사상에 비하면 근세라 할 수 있는 스피노자(1632∼1677), 칸트(1724∼1804)등의 서양의형이상학적인 철학의 대표주자들도 불교의 체계만큼 인식의 세계와 마음을 정리하질 못했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신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다시말해 인간은 신에 종속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말은 다시 인간의 ‘마음’조차 신의 것이라는 해석을 가능케합니다.

실제로 정통 신학에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으면 ‘이단’이라 몰아부칩니다. 물론 칸트가 ‘신은 죽었다’ 했지만, 그것은 기독교란 신의 억압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인간 이성 理性의 외침이었지 인간의 마음의 심층을 완성한 것은 아닙니다.

불교에 대응하는 참다운 의미의 서양 심리학은 그야말로 최근이란 표현이 오히려 맞을 프로이드(1856∼1939)가 창시자입니다.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였던 프로이드는 최면술을 사용하여 환자를 치료할 수 있음을 알고 ‘의식’, ‘무의식’의 개념을 체계화시켜 정신분석학이란 분야를 독립시킨 장본인입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실망스럽게도 프로이드는 자아(Ego:불교에서는 무아)가 본능(Id:불교에서는 탐,진,치)에 종속된다고 주장했고, 더욱 자아를 움직이는 본능을 모두 리비도(libido:불교에서는 애욕)로 몰았으니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드리면 우리의 말과 행동 즉 ‘인식’에는 모두 성욕性慾 이 개입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됩니다.

어찌되었던 프로이드의 공로는 불교의 유식에서 마음을 전5식,6식,7식,8식으로 분석했듯이, 마음을 무의식이 존재하고 그 역할과 ‘인식’의 관계를 어설프게나마 설정했다는데 있습니다.

 

<융의 정신 분석세계>

칼 구스타프 융(1875~1961)은 분석심리학의 창시자라고 인정받는데, 그 역시 정신과 의사였습니다. (이렇듯 서양의 심리체계는 출발부터가 정신과 의사들의 분석으로-치료를 목적으로 한-시작되어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인 불교와 그 차원이 다름은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융은 마음을 ‘의식’, ‘개인 무의식’, ‘집단 무의식’으로 구별했습니다. 융의 ‘의식’은 자아를 이루는 심리적인 문지방과도 같은 개념으로 이해됩니다.

인식의 연속성이 자아를 형성하게 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프로이드가 유아적 경향이 무의식의 본질이고 이 무의식이 자아를 형성한다는 주장에 대치됩니다.

융의 논리로 말하면 자아의 형성은 축적된 경험을 어느 쪽으로 의식화 하느냐가 그 사람의 자아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자신의 경험에 정서적 의식을 많이 허용하면 이 사람은 ‘감성적 타입’이 되고, 감정보다 사고思考에 치중하면 ‘사고 타입’의 자아가 형성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 ‘개인 무의식’은 자아를 형성하게 하는 경험 중 어떤 타입으로 편입되지 못한 사고라도 없었던 생각으로 사라지는게 아니라 어느 곳에 저장되는데, 이 저장고를 개인 무의식이라 합니다.

쉽게 설명드리면, 내가 받은 인식이 아주 미세해 내 판단과 자아의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해도 그 생각 자체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이라는 곳에 남아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저나 여러분의 돌출적 말이나 행동이 이 개인 무의식 때문이라는 것이 융의 지적입니다. 융의 개인 무의식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것은 ‘콤플렉스(complex)’라는 단어 입니다. 국어사전에는 ‘억압된 의식 아래 잠재해 있는 관념. 열등감’ 이라고 설명 되어 있는데, 이것으로는 부족하니 조금 더 풀어드리겠습니다.

융의 덕택으로 우리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콤플렉스란 말은 사실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설명드리면 개인의 의식의 단편들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집단’을 형성한다는 개념인데, 쉬운 예를들면 몇 개의 단어를 연속적으로 말할 때 얼핏 떠오르는 단어가 바로 이 콤플렉스라 한 것입니다. 왜 TV 게임에 한 사람은 무언가를 열심히 이리저리 설명해 나가면 상대가 그 단어를 맞추는 게임이 있지 않습니까? 그 답을 찾아내는 마음의 작용을 콤플렉스라고 이해하셔도 별 무리는 없습니다.

그러니 ‘너 참 콤플렉스가 많다’ 하면 실은 ‘너 개인 무의식을 이루는 생각의 단편들이 풍부하다’는 칭찬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융이 살아 있어 이 말을 한다면 말이겠지만 말입니다.

농담이 아니라 분명히 융은 이 콤플렉스란 단어를 부정적인 용어로만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융은 이 콤플렉스가 개인의 창의력과 희생을 가능하게하는 원동력이라 생각했습니다.

다시 예를들면, 어려서 엄마가 죽어 엄마의 사랑을 덜 받은 아이가 성장해서 그 콤플렉스로 여자를 증오하는 무의식이 형성되어 독신으로 살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자기의 처지를 생각해 고아원의 원장이 될 수도 있듯이 긍정,부정의 양면성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 콤플렉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누가 ‘너 무슨 콤플렉스 있지?’ 하면 웃으며 ‘그래, 많다’하십시요. 여기까지가 ‘개인 무의식’의 범주이고 다음은 ‘집단 무의식’입니다.

이 집단 무의식의 개념이 융의 정신 분석의 특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집단 무의식은 내용이 참 흥미로운 점은 진화론의 논리를 인간의 집단 무의식의 형성에 결정적 요인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진화론은 그 증거로(중학교 생물시간의 기억을 되살려 보면) 인간이 물고기가 점차 육지의 생물로 적응하여 포유류를 거쳐 오늘의 인간으로 순차적으로 진화한 모습이 엄마의 뱃 속의 태아 형성의 과정에, 진화의 과정이 다 함축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필 물고기에서 시작하느냐는 지구 생명체의 탄생 자체가 바다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고, 진화과정의 함축이란 뜻은 태아의 10달의 발달 과정이 처음에는 물고기의 발생 모습과 거의 같은 형태로 시작하여 포유류의 그것을 거쳐 최종적으로 인간의 모습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융은 인간의 집단 무의식도 이러한 과정을 통한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뱀을 돈 벌이의 수단으로 보는 사람말고, 뱀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드물 것입니다.

즉, 뱀을 보면 거의 대부분의 인간은 무섭다거나 혐오스러움을 ‘무의식적’으로 느낍니다. 융의 관점은 이 인간이 집단적으로 뱀에 대해 갖는 ‘인식’은 인간의 먼 조상때 뱀에게 물려 혼이 난 경험이 대대로 ‘진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공통된 무의식을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전되듯이 형성되어 온 의식을 ‘집단 무의식’이라 합니다. 쉽게말해 ‘나도 모르게 뇌에 각인된 의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집단 무의식에 대해선 조금더 부연 설명이 필요하긴 합니다만, 지금은 불교의 그중에서도 반야심경의 공중무空中無‘의식계’를 풀이하려다 유식과 중론을 거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여기서 수습을 해야 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융의 무의식의 세계는 불교의 유식의 제7식의 깊은 곳과 제8식의 입구 쯤에 도달한 것같습니다. 그리고 서양 심리학의 장점은 수직적으로는 그 깊이가 동양의 사상에 이르지 못했어도 수평적으로는 다각도에서 아주 분석적인 성과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참고로, 융은 ‘심리학과 종교’란 저서도 쓸 정도로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불교적이지는 않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과 윤회에 대한 불교사상을 담은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書’의 영역본을 보고,
“서구 철학과 종교가 따라갈 수 없는 가장 높은 차원의 정신의 과학”이라고 했다 합니다.

 

 

 

<12연기, 인과법>

반야심경의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무노사 역무노사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은 12연기가 다 공한 것 임을 설하는 내용입니다.

12연기를 하나씩 풀어가겠는데, 12연기란 결국 불교의 기본인 ‘인과법因果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인과법은 알고 계시다시피 ‘콩 심은데 콩나고,팥 심은데 팥난다’, ‘아니땐 굴뚝에 연기날까?’ 라는 쉬운 말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또한편으론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 있다’, ‘안방에서는 시어미 말이 옳고, 부엌에서는 며느리 말이 옳다’도 되는 것입니다.

결과를 낳은 과정에 보이지 않는 다른 속사정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원인이 곧 바로 다른 요인없이 결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다른 결과를 보인다는 뜻입니다.

요즘 유행어로 ‘그때 그때 달라요’란 말입니다.
원인(因)+과정(緣)=결과(果)
결과(새로운 因)+과정(다른 과정緣)=결과(또다른 결과果)
이렇게 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벼 농사를 지을때 볍씨를 파종하고(因), 모내기와 농약주기(緣)를 해야 좋은 쌀을 수확하고(果) 그 수확한 좋은 볍씨로 다음해 다시 뿌려(이때의 果=因), 또 수확을 하는 과정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만 여기서 농약을 뿌릴 것을 실수로 제초제를 뿌리면 농사를 망칠 경우도 생기는데, 이럴 경우 과정(緣)이 원인(因)이 되어 엉뚱한 결과(果)가 되버릴 수도 있음을 아셔야합니다.

그러니 과정을 생략한 인과법은 차짓 원인에 이미 결과가 결정되어 있다는 숙명론宿命論에 빠질 수가 있는데, 이는 불교에서 무척 경계하는 그릇된 생각입니다.

이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의 연관성을 구체적으로 풀이한 것이 12연기 입니다.

 

잡아함경에서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12연기를 들어 보시겠습니다.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계시면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깨달음을 이루지 못했을 때, 혼자 고요한 곳에 앉아 선정을 닦다가 이렇게 생각했었다. '세상에는 들어가기 어렵다. 생,노,병,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생,노,병,사와 그것이 의지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있다.

나는 또 이렇게 생각했었다. '무엇이 있어 생生이 있고 무엇을 인연하여 생이 있는가? 그러다가 마침내 참다운 지혜로써 알게 되었다. 즉, 존재가 있기 때문에 생이 있고, 존재를 인연하여 생이 있다.

그러면 무엇이 있어 존재가 있고, 무엇을 인연하여 존재가 있는가? 그렇다, 취(取)가 있기 때문에 존재가 있으며, 취를 인연하여 존재가 있다. 취는 사물에 맛들이고 집착하여 돌아보고 생각하여 마음이 거기 묶이면, 애욕이 더하고 자라나게 된다.

그 욕망이 있기 때문에 취가 있고, 또 욕망을 인연하므로 취가 있다. 취를 인연하여 존재가 있고 존재를 인연하여 생이 있으며, 생을 인연하여 노,병,사와 근심과 괴로움이 있다.

이렇게 해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모인다. 등불은 기름과 심지를 인연하여 켜지고 기름과 심지를 더하면 오래가게 된다. 그와 같이 사물을 취하고 맛들이고 집착하며 돌아보고 생각하면 욕망이 무더기는 더하고 자라난다.

그때 나는 또 이렇게 생각했다. '무엇이 없어야 노,병,사가 없어질까?'

그렇다, 생이 없으면 노,병,사도 없을 것이다. 존재가 없으면 생도 없다.

취가 없으면 존재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욕망을 떠나 마음을 돌아보거나 생각하지 아니하고 마음이 묶이지 않으면 욕망도 곧 멸할 것이다.

그 욕망이 멸하면 취가 멸하고, 취가 멸하면 존재가 멸하고, 존재가 멸하면 생이 멸하고, 노,병,사와 걱정 근심과 괴로움도 멸한다. 이렇게 해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멸하는 것이다.

기름과 심지로 등불을 켜는 것이므로 기름을 더하거나 심지를 돋우지 않으면 등불은 얼마 가지않아 꺼지고 말 것이다. 그와 같이 모든 것은 덧없이 생멸하는 것이라고 관찰하여, 욕망을 끊어 버리고 마음이 돌아보거나 생각하지 않고 묶이어 집착하지 않으면 마침내는 괴로움의 무더기도 멸해 없어질 것이다."

 

 

<어리석다는 것과 무명>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 이것이 바로 12연기인데 하나씩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 첫 번째가 무명입니다.
이 무명의 개념을 잘 이해하셔야 불교의 전반을 이해하는데는 물론이고, 공의 개념의 이해에도 도움이 됩니다.

무명은 바른 법(正法)을 모른다, 지혜롭지 못하다 라는 뜻의 용어이지 단순히 어리석음을 지칭하는 말은 아닙니다.

불교의 세 가지 수행의 방해꾼인 탐욕,진에,우치를 삼독三毒이라 부르며 그 중 가장 심각한 장애인 우치 愚癡를 ‘어리석음’이라고 흔히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단순히 모른다거나 실수를 하는 원인으로서의 어리석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란 것입니다.

세상에는 ‘아는게 병’이 되고, 또한 ‘모르는게 약’이 되고’, ‘선 무당이 사람잡는’ 경우도 있고, 더욱 순간의 실수가 큰 성공을 부르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페니실린의 경우 발명자인 플레밍이 실험실에서 포도상구균을 살균처리하는 것을 잠깐 잊어버렸는데 밖에 방치해 둔 그 포도상구균에 페니실린 곰팡이가 발생했고, 그 곰팡이 근처에는 미생물이 얼씬도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연구 끝에 최초의 다량 항생제인 페니실린이 발명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페니실린등 항생제의 남용에 따른 내성이 다시 큰 골치거리로 등장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저도 애용하는 ‘포스트 잇’의 경우도 좋은 예입니다.

종합 문구회사였던 3M에서는 접착용 풀도 만들어내고 있었는데, 직원의 실수로 풀의 원료를 잘못 섞어 버려서 접착력이 없어지는 바람에 붙여놓으면 자꾸 떨어져버리게 됐습니다.

풀이란게 한 번 붙여 놓으면 떨어지지 않아야 상품의 가치가 있는데 자꾸 떨어져버리니 그 많은 풀은 다 회사의 손실이 될 판이었습니다.

그 때 한 젊은 사원이 아이디어를 내어 혹시 임시로 붙여 놓았다가 흔적없이 떼어버리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메모지에 지금의 실패한 풀을 붙여 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게되었고 그래서 ‘포스트 잇’이 지금은 3M을 대표하는 상품이 되었습니다.

발기부전에 효과가 있다는 비아그라 역시 협심증의 혈류의 개선에 대한 연구를하다 얻어진 전혀 엉뚱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말하는 어리석음의 상대 개념인 유식하고 전문적이다 라는 말에도 허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쓰레기 분리수거가 불편하지만 환경을 위해 감수해야할 가치있는 불편이라는데 동의하실 수 밖에 없을겁니다.

그러나 종이의 경우는 진짜 전문과학자의 말을 빌리면 재활용이야말로 환경오염은 물론이고 경제적으로도 오히여 손해라는 겁니다.

그 주장인즉 종리를 분리 수거하는데 드는 비용, 종이 재활용 공장에 집하시키기까지 특럭의 운송비는 물론 운송차량이 발생시키는 매연등 각종 유해물질과 종이의 재활용을 위해 신문지나 서적의 인쇄된 잉크를 뺄 때 쓰게 되는 화학물질과 그 오염, 또 종이로 재활용하기 위한 투자비용등을 감안하면 종이의 재활용은 환경론자의 잘못된 인식의 대표라는 주장입니다.

더욱 종이의 재활용이 펄프를 사용하기 때문에 삼림훼손을 줄일 수 있다는 환경론자의 주장은 벌목되는 나무 중 펄프로 사용하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많게 잡아도 7%를 넘지 않는다는 면밀한 주장입니다.

그러니 종이는 가까운 소각장에 모아 그냥 태워서 그 소각열을 활용하는 것이 가장 친환경적이고 경제적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그렇듯하고 매우 유식해 보이는 명분이 사실은 어리석음의 극치라는 겁니다.

이런 잘못된 확신이 어리석음을 초래한다는 것은 앞서 반야심경 ‘식’識, ‘의식’意識에서도 언급한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나오는 반야심경의 ‘무명’이란 어리석음은 앞의 그것들과는 개념이 다릅니다.

 

<무명이 뜻하고자 하는 것>

‘어리석음이란 자신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 것이다’ 철학자의 일갈이 아니라 제가 만들어 본 말입니다. 아마 이 말이 무명에 비교적 접근된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최근에 본 신간 중 ‘어리석음에 대한 백과사전’이란 흥미로운 제목의 책에 있는 기발한 어리석음을 소개합니다.

입대를 앞두고 신체검사를 받는 동안 예비 병사는 한시도 쉬지 않고 눈에 보이는 종이들을 집어들 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군의관은 청년의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 생각하고 징집 면제 확인서에 서명을 했다. 그 확인서를 받아본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 “바로 이거야!”
(어리석음에 대한 백과사전/ 저자 : 마티아스반복셀 / 출판사 : 휴먼앤북스 p.21 "발견" 중에서)

이런 유머는 어떻습니까?

어느 날 일본 과학자들이 땅속으로 50m를 파고들어가 작은 구리조각을 발견했다.

이 구리조각을 오랜 시간 연구한 끝에 일본은 고대 일본인들이 이미 2,500년 전에 전국적인 전화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발표했다.

당연히 중국정부가 발끈했다.
중국 정부에서는 과학자들에게 그보다 더 깊이 파볼 것을 종용했다. 100m 깊이에서 중국 과학자들은 조그만 유리조각을 발견했고,곧 고대 중국인들은 3,500년 전에 이미 전국적인 광통신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발표했다.

이 보도에 한국 과학자들은 격노했다.
한국 과학자들은 200m 깊이까지 땅을 파고 들어갔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자 한국 과학자들은 고대 한국인들이 5,500년 전에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두 경우의 공통점은 어리석음을 ‘커버’하려다 결정적 어리석음을 범하는 경우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어리석음도 미학美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도 있더군요.
일단 보시지요.

-해마다 인터넷에서 다윈상이 수여된다. 수상 대상은 인간 종의 재생산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게 결점이 많은 유전자를 스스로 제거함으로써 인간 종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이다.

수상자는 늘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직접 상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최근에는 어리석은 행위를 한 결과 거세되어 생식 능력을 잃은 사람들까지 수상자 후보에 올리기로 규정을 바꾸었다고 한다.

후보자들은 다음 범주로 구분해서 수상자를 선정한다. 게임과 오락 부문, 노동과 산업 부문, 무기와 폭발 부문, 연애와 사랑 부분, 자살 부문, 사냥 부문, 범죄와 징벌 부문, 교통사고 부문, 종교 부문, 그리고 의료 수술 부문이다.

64세의 후두암 환자 에이브러힘 모슬리. 플로리다 병원에 입원중이던 그는 담뱃불을 붙이려다가 목에 두른 붕대와 잠옷에 불이 붙고 말았다. 성대 제거 수술을 받았던 터라 살려달라고 고함을 지를 수가 없어서 결국 침대에서 불에 타 숨졌다.

번지 점프를 잘못한 사람. 번지 점프대에서 수면까지 높이를 정확하게 계산하고 줄 길이를 여기에 맞추었지만, 그 줄이 고무줄이었다.

로스앤젤레스의 기독교 지도자. 그는 예수가 걸었던 길을 걸어가려고 무척 애를 쓰던 사람이었다. 심지어 물 위를 걷는 연습도 했다. 이랬던 그가 1999년 11월 24일 뜻밖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욕조에서 물 위를 걷는 연습을 하다가 비누를 밟고 미끄러지는 사고였다.

세 명의 팔레스타인 테러범. 이들은 시한폭탄을 몸에 지닌 채 이스라엘로 향했다. 한데 이스라엘에서는 아침 기도 시간을 배려해서 주변의 다른 나라보다 한 시간 늦게 시간을 적용했다. 하지만 시한폭탄의 시계는 이스라엘 시간에 맞춰져 있지 않았다. 점령지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시온주의자들의 시간’을 거부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결국 폭탄은 처음 의도했던 것보다 한 시간 먼저 터졌고, 테러범들만 즉사했다.

미국 린든에 살던 앨버트 B.프래트. 리볼버 권총이 장착된 헬멧을 발명했던 그는 지금까지도 역대 수상자들 가운데 최고로 꼽히고 있다. 그가 발명한 헬멧 권총은 치아를 이용해서 권총이 발사되도록 고안되었다. 이 헬멧 권총이 미국과 영국에서 특허를 받았다는 사실은 지금도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권총의 반발력이 그 어떤 실험 대상의 목이라도 부러뜨려놓았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 헬멧은 자살 도구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모든 수상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어리석음이 어떻게 우리 인류의 문명을 일구어가는지 그 불가사의하고 놀라운 방식을 생생하게 증명해주는 사례들이 아닐 수 없다.
- 어리석음에 대한 백과사전/마티어스 반 북셀 저/휴먼 앤 북스-

이 이야기는 저자가 만들어 낸 것들이 아니라 진지하게 소개하고 있는 사실들 입니다.

제가 무명無明을 설명한답시고 고작 앞에 몇 줄 해놓고 변죽만 울리는데는 속사정이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무명을 ‘안다’는 것은 ‘깨달음’을 안다 라는 말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저는 깨달음을 얻기는 커녕 헷갈리는 소리만 해대고 있으니 무명을 딱뿌러지게 설명해드릴 길이 막막하다는 말씀입니다.

더욱 제가 이 책의 저자가 아니라 아닌 다른 사람의 저서들을 보는 독자의 입장에서 말하면, 행여 저자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다고 항변할지는 몰라도 ‘내 머리 속에 있는 것을 너희들은 잘 모르겠지만…’이런 태도의 글을 보면 도리어 그 내용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거든요.

내침김에 한꺼풀 더 깊이 고백하자면 저는 3,000여 권의 책이 있는데, 이 반야심경 해설서의 지금까지를 쓰기위해 100여 권의 책을 검토해야 했고, 완독한 책만도 30여 권에 이릅니다. 또한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책을 읽어야할지 저도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제가 새삼 느끼는 것은 책은 ‘읽혀지기 위해’ 만들어진다는 아주 평범한 사실입니다.

그 근저에는 내용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책이나 나의 생각과 너무 동떨어진 내용의 책은 ‘적당히’ 보다마는 것이 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엄연한 현실이자 독자의 권리라는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저의 고민은 저자로서의 책임과 체면도 생각해야 하지만 읽어주는 분들의 형편도 충분히고려해야 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니 가능하면 저의 고충도 염두에 두시며 이제부터는 인내를 필요로할지 모르는 설명에도 책을 놓지는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제 변명만은 아닙니다.

세상사가 재미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님도 분명하고 더욱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돈 벌기에도 어려운데 하물며 마음의 안락과 깨달음을 논하는 경전과 그 해설이 쉬울수는 없다는 말씀도 해두고싶습니다.

 

<어리석음에 이어지는 작용 중 행>

무명無明은 불법을 잘 모르는 것, 자신의 마음에 본래 존재하고 있는 부처님과 같은 성품(중생의 마음 그 자체의 성품이 더 정확합니다)을 망각하는 것이라고 해두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이 무명이 원인이 되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떠한’결과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다시 확인하면 반야심경의 ‘무명진 내지 무노사’를 설명하는 것이 12연기를 순차적으로 설명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12연기에서 무명 다음은 행行입니다.
행은 다음 단계인 식識을 일으키게 하는 중간 전달의 어떤 ‘작용’을 뜻합니다.

식에 대해서는 골치아플 정도로 언급을 했으니 문제거리가 아닙니다만 행은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아 조금 생각을 하셔야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행을 업業이라고 단정적으로 해설해 논 책들이 있어 걱정이 됩니다.

행은 그 스스로 업이 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업이란 개념은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로 쓰는 것인데, 행은 ‘깨닫지 못한데서 갖게되는 생각(識)’을 들게하는 과정 혹은 그 흐름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예를들면 아무리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앞을 못보는 사람이 대화면의 PDP TV를 구입할리 없고, 귀가 먹은 사람이 고급 오디오나 CD를 구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가 든 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 그런 사람 봤어’ 한다면 그 사람이 바보이거나 아니면 봤다는 사람이 제 정신이 아닐겁니다.

그러니 제가 든 예가 타당하다고 가정하고 설명드리면 욕심도 비교할 대상과 상대가 있어야 일어나는 것이 틀림이 없는데, 그러자면 무엇인가 ‘인식’이 되는 매개체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 매개체가 행이라는 말씀인데요, 다른 쪽으로 설명을 시도하면 우리의 상식과 생활 규범이니 규칙 또는 가치, 더나아가 우리의 생각을 한정시키는 ‘무엇’이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아주 간단한 예를 다시들면 무인도에 남자들만 혹은 여자들만 떨어져있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면 남자들은 정력자랑하고 군대 얘기에 침 튀기며 한술더떠 군대에서 축구한 말이나 해대지는 못할것이고, 여자들은 시어머니 흉보거나 군것질은 무엇이 좋은가를 ‘알아야 할(識)’동기 자체가 형성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경우’에 따라 소멸될 수도 있는 동기를 행이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세상살이에 그 ‘경우’란 것이 거의 없을지는 몰라도 또, 내가 마음을 닦으면 식을 일으키는 동기자체가 점차 사라지기는 하겠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고 현재의 내가 ‘안다’는 것은 그 ‘경우’와 ‘과정’ ‘동기’가 분명한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12연기에서는 행行이라 하는 것입니다.

 

<행에 이어지는 작용인 식>

무명에서 어렵게 행을 거쳐 식識에 이르렀습니다.

식은 이미 진력나게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할 말이 있습니다.

‘모르는 것’도 식의 작용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모른다는 생각을 갖는게 바로 식의 작용이란 말씀입니다. 더군다나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고 착각하면 불교 공부는 그 자리에서 끝입니다.

무명은 내가 성욕이 왜 일어나며 화는 왜 내는지 그 본 마음을 모르는게 무명이지 ‘성욕이 무엇인지를 모르는게’ 무명이 아닌 것입니다.

어릴때는 성욕이 무엇인지 몰라도 남자의 경우라면 사춘기때 자고 일어나 보니 축축해진 팬티를 보고는 아, 이게 성욕이구나 하고 알게 되는데 이걸 무명이라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모른다는 것은 안다의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지 ‘인식’의 작용 중 하나이기 때문에 바로 지금 설명하는 12연기의 식에 속한다는 말씀입니다.

종교는 종교를 이해시키려는 나름대로의 용어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경우‘세례’, ‘안식’,‘휴거’등 사전을 찾아보아야 하는 단어들은 오히려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오히려 일상 용어와 같이 쓰는 ‘축복’,’은혜’같은 간단해 보이는 용어들이 실은 깊은 의미들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교는 유교와 더불어 한국민의 역사 속에 너무나 밀착되고 녹아 있어서(이런 자만심이 한국불교를 망치고 있지만)도리어 그 용어의 진의가 곡해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입니다.

무학無學이라는 말도 불교에서는 ‘배운 적이 없다’가 아니라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가 맞습니다.

12연기의 식識 역시 단순히 ‘안다’의 개념 아니라 ‘안다, 모른다는 생각 그 자체’즉, 인식의 작용을 일컫는 용어로 쓰는 것입니다.

 

52. 명색

 

<식에 의해 이어지는 명색>

명색名色은 식識이라는 분별과 인식작용에 의해 비로서 나타나는 형이상학적 혹은 물질적 존재를 말합니다. 아주 철저한 유식파唯識派의 주장대로라면 내가 인식하지 않는 한 어떤 것도 외부에 실존하는 것은 없습니다.

탁자의 예쁜 꽃도 내가 ‘볼 때’만 존재하고, 밤 하늘의 달도 내가 바라보고 ‘아, 달이구나’라는 식을 일으킬때만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 내 시야 이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다가 내가 고개를 돌려 인식할때만 존재 한다는 것인데, 그 내 생각 때문에 ‘있게되는’ 존재를 명색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명색은 인식의 작용이 가져다 주는 허상이지 존재의 실체는 아니란 말입니다.

그거 말도 안 된다. 아니, 눈 앞에 보이는데도 실체가 없다니 모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죠, 바로 그래서 공空이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유형 무형의 것들은 무명과 행을 거쳐 식에 이르러 ‘착각’과 그릇된 ‘인식’을 한다는 것입니다. 실체는 없는데 실체가 있는 것으로 단정한다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상으로 집착하게 되는 것 말고, 실재 눈 앞에 있는 것도 실체를 모르고 집착하게 된다는 뜻이고 그 실체를 바로 보는게 공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백화점에 가니 아주 마음에 들어 꼭 사고싶은 옷이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 옷은 특정한 색깔과 질감,모양등이 총체적으로 조화되어 우리를 사고싶은 ‘인식’이 들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옷은 실 한가닥 한가닥으로 천을 이루고 그 천은 어떤 패턴으로 잘리고 이어져 멋진 옷이라는 형태를 갖춘 것입니다. 그 시작과 과정과 결과 어디에도 ‘실체가 멋있는 옷’이란 것이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사람에 따라 멋지다는 느낌을 가질뿐입니다.

그러니 그 멋진 옷은 실체가 없다는 것이고, 이러한 사고의 ‘해체적 방법’을 추론해 들어가면 옷이란 존재 자체의 실재가 허황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실재’의 문제는 철학적으로도 많은 논제를 불러일으키지만 불교란 종교의 사상적 이해는 물론 깨달음을 추구하는데 있어서도 절대적인 문젯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키 워드인 공空이 바로 이 연기緣起 와 같은 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였고, 이 연기란 것은 결국 실재實在에 관한 바른 인식(정견正見)을 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불법은 실재에 대한 바른 인식을 하는 마음의 훈련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 기회에 서양적 실존의 개념에 물들어버린 우리에게 안성맞춤인 경전의 한 대목을 소개해드립니다. 반야심경의 명색을 설명하고 있다고 여기셔도 됩니다.

--왕은 나가세나 존자가 있는 곳으로 갔다. 가까이 가서 공손히 예배드린 다음 다정하고 정중하게 인삿말을 나누고 예의 바르게 한 편에 비켜 앉았다. 나가세나 존자도 답례로서 왕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밀린다 왕은 나아가세나 존자를 향하여 질문을 시작했다.

존자는 어떻게 하여 세상에 알려졌습니까. 그대의 이름은 무어라고 합니까. 대왕이여. 나는 나가세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나의 동료 수행자들은 나가세나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모는 나에게 나가세나(龍軍),또는 수라세나(勇軍), 또는 비라세나(雄軍), 또는 시하세나(獅子軍)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대왕이시여 이 나가세나라는 이름은 명칭 호칭, 가명, 통칭(通稱)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에 인격적 개체가 포함되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 밀린다 왕은 5백명 대중과 8만명 비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가세나 존자는 ‘이름 속에 내포된 인격적 개체는 인정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만, 지금 그 말을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다시 왕은 나가세나 존자를 향하여 질문했다.

나가세나 존자여. 만일 인격적 개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대에게 의복과 음식과 방석과 질병에 쓰는 약물 등의 필수품을 제공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또 그것을 받아서 사용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계행戒行을 지키는 자는 누구입니까.

수행修行에 힘쓰는 자는 누구입니까. 수행의 결과 열반에 이르는 자는 누구입니까. 살생殺生을 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남의 것을 훔치는 자는 누구입니까. 세속적인 욕망 때문에 바르지 못한 행위를 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거짓말을 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술을 마시는 자는 누구입니까.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질 5역죄를 짓는 자는 누구입니까. 만일 인격적 개체가 없다고 한다면, 공功도 죄罪도 없으며, 선행 악행의 과보果報도 없을 것입니다. 나가세나 존자여, 설령 그대를 죽이는 자가 있더라도 거기에 살생의 죄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대 승단에는 스승(和尙)도 수계사受戒師 도 구족계具足戒도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대는 나에게 말하기를 `승단의 수행 비구들은 그대를 나가세나라 부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나가세나라고 불리우는 것은 ‘실체’가 무엇입니까. 나가세나 존자여, 머리카락이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대왕이여,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의 몸에 붙은 털이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손톱,살갗,살,힘줄,뼈,뼛골,콩팥, 염통,간장,늑막,지라,폐,창자, 창자막, 위, 똥,담즙,담,고름, 피,땀,굳기름(脂肪),눈물,기름(膏), 침,콧물, 관절액(關節滑液), 오줌,뇌 들 중 어느 것이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이들 전부가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나가세나 존자는 그 어느 것도, 그것들 전부도 모두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가세나 존자여, 물질적인 형태(色)나 감수작용(受)이나 표상작용(想)이나 형성작용(行)이나 식별작용(識)이 나아가세나입니까.

나가세나 존자는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들 색,수,상,행,식을 모두 합친 것(五蘊)이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대왕이여.
그러면, 5온(五蘊) 밖에 어떤 것이 나가세나입니까.
나가세나 존자는 여전히 `아니'라고 또 대답했다.

존자여, 나는 그대에게 물을 수 있는 데까지 물어 보았으나 나가세나를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나가세나란 빈 소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있는 나가세나는 어떤 자입니까. 존자여, 그대는 `나가세나는 없다'고 진실이 아닌 거짓을 말씀하였습니다.

그때 나가세나 존자는 밀린다 왕에게 이렇게 반문했다.

대왕이여, 그대는 귀족 출신으로 호화롭게 자랐습니다. 만일, 그대가 한 낮 더위에 뜨거운 땅이나 모랫벌을 밟고 또 울퉁불퉁한 자갈 위를 걸어 왔다면 발을 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몸은 피곤하고 마음은 산란하여 온 몸에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도대체 그대는 걸어서 왔습니까 아니면 탈것으로 왔습니까.

존자여, 나는 걸어서 오지 않았습니다. 수레를 타고 왔습니다.

대왕이여, 그대가 수레를 타고 왔다면 무엇이 수레인가를 설명해 주십시오. 수레채(轅)가 수레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굴대(軸)가 수레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퀴(輪)나 차체(車體)나 차틀(車棒)이나 멍에나 밧줄이나 바큇살(輻)이나 채찍(鞭)이 수레입니까.
왕은 이들 모두를 계속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것들을 합한 전체가 수레입니까.
아닙니다.
존자여. 그렇다면, 이것들 밖에 ‘수레’라는 것이 따로 있습니까.

왕은 여전히 ‘아니’라고 대답했다.

대왕이여, 나는 그대에게 물을 수 있는 데까지 물어 보았으나 수레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수레란 단지 빈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타고 왔다는 수레는 대체 무엇입니까. 대왕이여, 그대는 ‘수레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진실이 아닌 거짓을 말씀하신 것이 됩니다. 대왕이여, 그대는 전 인도에서 제일 가는 대왕이십니다. 무엇이 두려워서 거짓을 말씀했습니까.

이렇게 물은 다음 나가세나 존자는 5백명 대중들과 8만명 비구들에게 말했다.

밀린다 왕은 여기까지 수레로 왔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수레인가 설명해 달라는 질문을 했을 때 어느 것이 수레라고 단정적인 주장을 내세울 수 없었습니다. 그대들은 대왕의 말씀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5백 명 대중들은 환성을 지르며, 왕에게 말했다.

대왕이여, 말씀을 해 보십시오.
그래서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 존자에게 다시 말했다.

존자여, 나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수레는 이들 모든 것, 즉 수레채, 굴대, 바퀴, 차체, 차틀, 밧줄, 멍에, 바큇살, 채찍 따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에 반연(攀緣)하여 ‘수레’라는 명칭이나 이름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대왕께서는 ‘수레’라는 이름을 바로 파악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대가 나에게 질문한 모든 것, 즉 인체의 33가지 유기물과 존재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를 반연하여 ‘나가세나’라는 명칭이나 이름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기막힌 문답식의 대화는 밀린다 왕문경에 있는 것 중 하나입니다.

경의 성립 배경을 살펴보면, 그리스가 알렉산더 대왕때 인도를 침략하여 점령한 후 그리스로 대표되던 서양의 철학과 문화가 인도의 불교 사상과 문화와 접촉하게 됩니다.

그 당시의 세계 역사에는 뒤의 로마의 기독교 박해와 공인등의 갈등이나 힌두교와의 갈등, 이슬람교와의 투쟁등과 같은 심각한 ‘충돌’은 전혀 없었습니다.

불상佛像을 조성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침공한 그리스 식의 신을 조각해 놓는 문화에서 영향을 받아 간다라 지방에서 불교 미술이 시발되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실제 초기의 불상들을 보면 완전히 얼굴이 서양인의 모습이라 아주 거북하게 느껴집니다.

이 밀린다 왕문경의 두 주인공인 밀린다 왕은 기원 전 2세기 서양 철학으로 무장된 뛰어난 사상가이자 총명한 논쟁자이며 서북부 인도의 펀잡 지역을 통치했던 메난드로스로 추정되고 있고, 나가세나 비구도 실존의 인물로 여겨지기에 흥미롭습니다.

이 침략자 밀린다 왕과 피지배자인 나가세나 비구는 3일 동안 약 236개의 주제에 대해 논쟁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 주제들은 서양식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에도 아주 잘 대처해 설명해지고 있는 보기드문 경전이니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12연기의 명색은 이쯤해 두겠습니다.

 

<명색에 의해 이어지는 육입>

육입六入은 육처六處라고도 부르는데, 명색을 안,이,비,설,신,의(육근)를 통하여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여섯가지 받아들임의 작용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앞서 색,성,향,미,촉,법(육경)을 설명할 때 여기서의 법은 불법이나 진리의 법이 아니라 생각을 일으키는 대상으로서의 무형의 것을 법이라 한다고 말했었습니다. 앞 페이지로가서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명색名色을 수용하는 단계인 육입의 名이 바로 실체는 없지만 생각을 일으키는 대상이 되는 것이고, 色은 생각을 일으키는 대상으로서의 물질적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설명하는 육입은 무형, 무형의 자성自性이 없는 대상을 내가 임의로 가치를 부여해 마음으로 도입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중요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누누이 그 자성없는 실체를 공이라고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받아드릴 것(자성)이 없음에도 우리는 무명에서 행을 통해 식을 일으키고 다시 식에의한명색에 집착하여 육입에 이르는 것이 됩니다.

만약 내 마음 바깥의 자성없는 실체들을 애초부터 공空하다고 인식하거나 행, 식, 명색 중 어느단계에서라도 그 중 한가지만 공함을 확고히 한다면 육입은 사실 없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12연기는 존재와 존재에 대한 인식과, 그 인식으로 일어나는 욕심과 집착 때문에 노사老死에 이른다는 과정의 설명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시말해 12연기의 ‘실체’ 역시 공하다는 점을 확실히 인식하고 계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가 공에 대한 말하면서, 이 책 내내 공空 자가 쓰여지면 그것이 다 공에 대한 설명이다라고 했던 말씀도 기억하셔야 반야심경을 ‘놓치지’ 않은것이 됩니다.

이 육입 중 하나만 잘못되어도 다음과 같은 얘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날도 곤드레 만드레 되서 돌아온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간 줄 알았더니 마루에서 마당에 대고 소변을 누는게 아닌가….

10여 분이 지났는데도 그냥 서 있었고, 20분이 지나도 서 있길래 부인이 소리쳤다.

아니, 뭐하고 서 있는 거예요?

술을 많이 먹었더니 소변이 끊어지질 않아.

그 소리는 빗물 내려가는 소리예요!

 

<육입에서 이어지는 욕망들>

촉觸은 육입이라는 받아들임을 통해 바깥의 느낌이 내 안에 확고히 인식되어, 그냥 있던 마음과 드디어 접촉을 갖게되는 단계를 말합니다.

촉이란 글자에 현혹당해 신체적 접촉을 연상하시면 안 됩니다.

내 마음 바깥의 대상이 육입을 통해 내 마음과 교감작용을 불러일으켜 생각을 계속 이끌어내고 그 결과 행동에 이르게되는 것인데, 이 촉은 대상이 생각에 침투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촉에 이은 수受는 촉으로 침투된 감각을 완전히 받아들여 그 감각을 기준으로 즐겁다(樂) 혹은 괴롭다(苦)라는 인식의 결정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즐거운 것이라 생각하면 추구하려고 시도하고 괴로운 것이라 생각이 들면 피하려는 것이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이구나 하는 ‘별 볼일 없는 결정’도 포함됩니다. 실질적인 욕망을 실현하려는 아주 위험한 단계인 것입니다.

이때라도 ‘수受는 공空한 것인데’라고 느껴야 조금이나마 마음의 수행이 된 것입니다.

수에서 다음 단계인 애愛까지 넘어가면 돌이키기 힘들기 때문에 가능하면 여기에서 마음을 멈추어야합니다.

12연기의 무명-행-식-명색-육입-촉, 다음은 애愛입니다.

재미없는 설명을 하려니 저도 지루한데 다행히 ‘건수’를 만났습니다.

불교에서는 이 애愛를 골치덩어리로 간주하는데, 고대 인도의 성전聖典인 ‘리그베다’나 후 대 힌두교에서는 애를 우주의 성립과 존재의 원동력으로 여깁니다.

인도의 힌두사원이나 아잔타 석굴의 적나라한 ‘섹스 신’의 부조나 ‘카마수트라’란 섹스의 지침서등도 사실은 신과 인간을 교감시키는 정서적인 愛와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저는 그 흔한 인도 성지순례를 갈 생각이 없어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섹스 하면 또 밀교密敎를 연상하시는 분이 있는데, 밀교 중에서도 한 부파인 좌도밀교에서 성적 결합을 통한 해탈의 실현을 부분적으로 염두에 두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힌두교나 밀교나 여러분이 생각하는 외설적인 행위를 그대로 종교에서 수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데 어느 정도의 차이인지를 절묘한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도 해외 여행시 공항에서 적는 신고서가 한글과 영어로 되어 있는줄은 아실겁니다.
이름(Name), 이렇게 말입니다.
그 중에 남,녀를 구분하는 성별란이 있습니다.
성별(Sex),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면 그 아래 ‘남’ 혹은 ‘여’ 라고 쓰면 됩니다.

그런데 한 젊은 미모의 여자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부끄러운듯이 모퉁이로가서 조그만 글씨로 적더라는 것입니다.

‘가끔씩’이라고, Sex 바로 밑에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공연히 애愛 자에 신바람이 나서 그 여자와 같은 자가당착에 빠지지 마시라는 겁니다.

12연기에서의 애는 성욕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탐닉하여 집착하는 마음을 모두 지칭하는 말입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어 사게 되는 것(바로 이어질 취取)도 바로 애에 의한 행동이라는 뜻입니다.

더 넓게 해석하면 싫어하는 마음은 애의 작용의 상대적 개념이긴 하지만 그 근원에는 애 즉, 탐착하는 마음이 있지만 그 마음에 거스르니 싫어진다고 볼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하니 애증愛憎 둘 다 12연기에 의하면 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욕망을 실현시키려는 작용들과 그 결과>

애愛 다음은 취取인데 애의 대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집착하여 소유하고 싶다거나 혹은 그 욕망을 지속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취가 12연기 중에서도 심각한 것은 바로 업業을 만드는 주범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짝 사랑의 추억으로 간직하면 괜찮은데, 결혼해 버린 사람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액션’(取)에 들어가면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번뇌’를 대량 생산해 내는 공장도 이 취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세상에 취하고 싶은 것이 많으면 가난한 사람이고, 가난해도 취할 마음이 별로 없으면 부자입니다.

그렇다고 게으르고 무능력하여 가난한게 자랑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단지 저의 의도는 취할 줄만 아는 세상에 이미 취한 것을 남에게 베푸는 마음도 내자는 것이고, 취하다라도 분수에 맞게 하자는 말입니다.

무소유의 정신은 물질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 집착하여 소유하지 못해 안달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라는 말인 것입니다.

12연기의 10번 째는 유有 입니다.
유란 취에 의해 구체적으로 형성된 결과인 업을 말하는데 유형, 무형의 모든 것이 해당됩니다.

‘결과물’인 업을 형태있는 것에 한정지으면 안 된다는 말씀인데, 보통 ‘유有’ 하면 눈에 보이는 사물이라고는 생각이 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어떤 계기로 원한이 사무쳐 마음 속으로 앙갚음을 다짐한다면 그 다짐이 유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유란 업의 형성작용의 구체화, 혹은 확정되어 버린 업 그 자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유 다음은 생生 입니다.
생은 유에 의해 펼쳐지게 되는 실제적 과보의 세계입니다.

내가 태어나게 된 것도 유의 과보이고, 원한에 사무치는 마음으로 밤 잠을 못자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生)하는 것이 다 생의 작용이 일으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2연기의 마지막은 노사老死입니다.
내가 태어나는 과보로 늙어 죽는다는 간단한 말로는 이해가 부족합니다. 오히려 무상無常이라는 말이 더 접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상이란 말은 항상하는 것은 즉, 영원히 그 상태로 그대로 존재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던 정신적인 것이던 없다는 말이니, 육신은 물론이고 아무리 뼈에 사무친 각오와 다짐도 시간이 흐르면 그 작용이 약해지고 결국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 12연기의 노사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12연기의 마지막인 노사란 ‘완전한 사라짐’이 아니라 12연기의 처음인 무명을 또다시 낳는 하나의 결과인 것일 뿐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12연기법은 부처님이 처음 깨달은 법이라는 중요한 상징과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12연기법에 대해 총체적인 시각으로 정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12연기의 정리>




부처님의 깨달으신 실체이기도 한(실은 12연기를 통해 오히려 실체가 없음을 다시말해 공의 이치를 얻은 것이지만) 이 12연기의 핵심은 위의 그림같이 12연기 자체가 서로 맞물리어 ‘앞의 것이 없으면 뒤의 것도 없다’는 진리를 간파하라는 것입니다.

무명에서 노사를 거쳐 다시 본래의 자리인 무명에 이르는 윤회를 거듭하게 되는 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에 해당하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이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유정有情, 무정無情 즉 생명체나 단순한 물질이나 다 포함된다는 말인데 곧 우주의 법계가 다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과학철학의 창시자격인 20세기 최고의 철학자인 화이트 헤드의 유기체 철학이 바로 이런 연기론적 사고를 바탕으로 깊이 있게 전개되는데, 너무 곁가지를치는 것 같아 설명을 미루는 것이 애석하긴합니다. 관심있는 분은 화이트 헤드의 ‘유기체 철학’이나 ‘부분과 전체, ‘과정과 실재’등을 보시면 새로운 안목이 열리실 겁니다.

과연 이처럼 간단해 보이는 12연기를 우리는 어떻게 또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반야심경과 12연기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이 문제들을 마저 풀어야 반야심경 해설의 다음 진도를 나갈 수 있습니다.

12연기를 부처님은 순관順觀과 역관逆觀으로 깨달으셨다고 하는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초기불교의 많은 경전에서 한결같이 확인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용수등에 의해 공관空觀이 확고해지고 대승의 사상이 꽃을 피움으로 이 12연기도 공의 개념을 빠뜨리고는 설명할 수 없게 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공의 개념이 없던 초기의 불교에서는 12연기를 ‘한 세대’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접근해야하는 문제이긴 하지만 12연기를 화엄의 법계연기法界緣起와 직접적으로 대비시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12연기의 순관이란 무명에서 행,식….노사에 이르기까지를 순차적으로 관하는 방법으로 무명이 있음으로 행이 있고, 행이 있음으로 식이 있고, 식이 있으므로 명색이 있고… 이렇게해서 노사에 이른다고 관하는 것입니다.

역관이란 노사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노사가 멸하면 생이 멸하고 생이 멸하면 유가 멸하고… 이렇게해서 무명까지 멸한다고 관하는 것입니다.

순관이던 역관이던 관건은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생기고, 저것이 멸하면 이것도 멸한다’는 모든 존재와 그 가치는 서로 의지하고 상의상관相依相關 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지 스스로의 독립된 자성自性이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 말은 12연기의 순관, 역관을 순환의 고리로 표현한 위의 그림에서 어느 한 곳에서 만이라도 다음으로 넘어가는 고리의 ‘역할’을 해 주는 것을 멈춘다면 곧, 공空을 체증體證 한 것이므로 즉시 순환의 고리가 멈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말해 윤회의 연결의 고리를 공으로 파해버려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을 설명할때면 연기緣起를 먼저 설명하고, 연기의 본질은 바로 공에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12연기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이해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남은 문제는 반야심경과 12연기의 관계인데요, 앞의 설명을 이해하신다면 이건 쉽습니다.

반야심경에서는 ‘무무명내지무노사 역무노사진’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무명에서 노사(무명내지노사)에 이르는 과정도 없고, 역시 없음도 없다라는 이중부정을 한 것입니다.

이 이중부정을 쓰는 까닭은 긍정이 아니라 12연기의 낱낱의 실상은 공성空性이다 라는 말을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성품이 공하니 미련을 갖고 집착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관점에서 보면 현장의 시대에도 공이란 용어는 사용했지만 아직도 공이란 한 글자만으로는 미진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금강경의 무無나 비非만을 사용해 공의 의미를 표현해내려고 애를 썻던 것에 비하면 반야심경에서 적극적이고 명확한 의미로 공을 사용한 것은 분명 ‘사건’이긴 합니다.

저는 초반부에도 거론했지만 이 기회에 더 적극적인 주장을 한국불교사에 처음으로 제안해 봅니다. 삼법인의 첫 째인 ‘제법무아諸法無我’에서부터 지금까지 공을 염두에 둔 모든 무아란 용어를 공아空我로 대체하는 문제를 심각히 논의하자는 것입니다.

단 무아無我를 무조건 퇴출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없다’, ‘실체가 없다’,’자성이 없다’라는 ‘없다’의 개념에 한정시키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없다는 것이 마치 공을 대표하는 사상인 것처럼 오해받을 일도 없고, 가르치는 사람이나 공부하는 사람이나 헷갈리거나 전달의 오류가 발생할 여지가 없게된다는 말씀입니다.

공空이란 불교를 아는 사람이라면 ‘없다 있다’는 유무의 논리를 떠난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지금 한국불교처럼 무無 자만 가지고 공을 말하려면 반야심경처럼 ‘무무명’(무명도 없고) 해놓고 ‘역무무명진’(무명의 다함도 역시 없고) 해야하니 복잡하고 번잡해 아주 이해하기가 고약하다는 말씀입니다.

더 심한 공성空性으로 풀이하려면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고’ 여기다 더 계속하여 ‘무명이 다함의 없음도 역시 없고’, ‘그 무명이 다함의 없음의 없음도 역시 없고’ 이런 식의 설명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 주장의 확실한 근거는 제법무아 혹은 무아란 말을 중국에서 ‘만들 때’ 공이란 용어가 없었다는 것이고, 이제는 공이란 말이 불교이해의 ‘키 워드’가 되었으니 당연히 공아를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맞춤법도 몇 십년마다 바꾸고 북한의 말과 남한의 말도 불과 50여 년 만에 전혀 다르게 굳어져 버린 것이 허다한데, 무려 2,000년 이나 지난 용어를 한번의 ‘조정’없이 쓰는 것은 무리란 말입니다.

‘나’도 ‘깨달음’에도 실체가 없다는 아공법공我空法空이란 말을 가장 대승적 표현으로 쓰고 있는 것이 현실이란 말입니다.

그렇다해도 제법무아의 ‘무아’는 진리의 언어이기 때문에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구요?

아, 대한민국불교가 언제부터 그 ‘진리’를 그리도 철저히 실천하고 지켜왔습니까?

 

<苦集滅도 四聖제>

한 대학교수의 영결식장의 장면입니다.
수 십명의 제자들과 유가족등 수 백명의 애도객이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고인의 약력소개등이 끝나고 가장 엄숙함과 비통함을 실감할 수 있는 고인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고인의 가족 중 한 분이 ‘꼭 영결식장에서 틀어야 한다’는 부탁을 하셨다며 울먹였습니다.

그 가족도 고인의 자신의 영결식장을 위한 마지막 메시지를 미리 듣지 못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가슴을 졸이며 테이프를 틀었습니다.

영결식장의 스피커를 통해 고인의 생전 녹음 육성이 시작되었습니다.

‘아, 아, 마이크 시험 중…
공사다망하심에도 불구하고 오늘 저의 죽은 후 영결식에 참석해 주신 추모객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에또, 그리고 아무개는 참석했냐? 아무개란 놈은?
아마 아무개는 바빠서 못 왔을걸?’
등등 가까웠던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며 자신과의 일화며, 고마움등을 앞에 앉혀 놓고 말하듯 너스레를 늘어 놓았습니다.

영결식장은 졸지에 눈물과 폭소가 함께하는 ‘웃지 못할’ 장소가 되었다 합니다.

제가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라 참석했던 이에게 전해들은 오래된 실화입니다.

그 분은 세상을 참으로 낙천적으로 살았고, 항상 웃음과 유머로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도 삶의 즐거움을 주었다 합니다. 더욱 죽은 후에도 자신의 신념을 철저히 실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삶은 고통 투성이다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의 ‘고,집,멸,도’란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에서 사성제四聖諦라 합니다.

이 사성제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후 교진여등 비구에게 처음 설하신 법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사성제를 잘 이해하면 불교의 본 뜻에 상당히 접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성제의 첫번째는 고성제苦聖諦 즉, 삶은 고통이다라는 선언에서 시작됩니다.

두번째는 집성제集聖諦 즉, 고통의 발생 원인에 대한 고찰입니다.

세번째는 멸성제滅聖諦 즉, 고통이 사라진 것에 대한 진리입니다.

네번째는 도성제道聖諦 즉, 고통을 멸하는 방법에 대한 진리의 가르침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공의 도리를 불법의 이해의 키 워드로 삼고있기 때문에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란 말을 적어도 지금은 사성제가 모두 공한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여도 문제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반야심경은 사성제의 자성조차 공한 것으로 인식해 주기를 요구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최초의 설법인 사성제가 ‘헛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그렇지는 않겠지요.

또 사성제의 첫번째인 ‘삶은 고苦’다 라는 선언도 적어도 죽음을 미리 당당히 준비하여 자신의 장례식장까지도 자기식으로 반전시켜 죽음에서 삶 자체에 대한 교훈을 준 교수 앞에서는 그 의미가 무색해지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과연 이 역설을 어찌 풀어가야 할까요?
사성제를 하나씩 풀어가면 그 해답이 있습니다.

 

<불교와 기독교>

부처님의 출가 전의 싯타르타 태자로서의 기록들을 보면 세속적인 관점에서 상당히 총명하고 사색적이었던 것은 분명하고, 삶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도대체 사람은 왜 태어난단 말인가?
태어난 사람들은 왜 늙고 병들어야만 하는가?
이 늙고 병들은 후에 죽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들을 피해갈 수 있는 길이 진정 없는 것일까?

이런 의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29세에 왕자로서의 보장된 부귀영화를 한치의 미련없이 내 버리고 ‘한 인간’으로 수행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6년의 설산雪山 수도 끝에 깨달음을 이루시고 석가모니로 다시 세간에 나오신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후 교단이 성립되고 그 사상이 계승 발전되고 검증되어 역사상 가장 완벽한 철학과 사상을 갖춘 오늘날의 불교가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불교는 기독교에 비해 역사적으로 홀대를 받아온 것 같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문명이라해도 지나치지 않은 서구의 물질문명에 그 정신적인 측면까지도 빼았겨버린 듯한 느낌을 지울수 없습니다.

좀 지나치다 싶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줄 알지만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기독교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신앙심’이 없으면 존재가 불가능한 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여자 혼자 ‘잉태’ 하였고, 죽어서도 ‘부활’한 예수라는 인간의 아주 특별한 경우를 다 인정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신의 아들이라 가능하다는 믿음이 없거나,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이 개입되면 엄밀히 말해 그의 몸은 교회에 가도 진실한 기독교인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기독교의 신앙의 절대적 전제가 보통 사람에게는 믿을 수 없고, 더욱 상식에도 어긋나는 주장이 될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이런 종교의 ‘종’자도 모르는 썩어질 중놈이 있나 하실지 모르겠지만 그건 솔직히 ‘선택된’ 사람들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고, 그냥 상식적이고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단순한 사람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택 받는다 하는 것이지’라고 자꾸 말한다면 말 그대로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더군다나 그 선택은 엄밀히 분석하면 내가 믿는 마음을 일으킨 결과인지 아니면 신이 점지하신 것인지에 이르면 더욱 아리송해진다는 말입니다.

유럽에서는 거의 고사상태가 되어가는 기독교에 제가 억하심정으로 ‘태클’을 걸려는 것이 아니라 말이나온 김에 종교의 본질에 대해서 잠깐 거론한 것뿐입니다.

기독교에 대해 제가 이런 엉뚱한 소리나 해댈만큼 무식하듯이 불교를 모르는 사람들이 불교를 ‘우상숭배의 종교다’, ‘불교는 염세적이고 허무주의다’라는 거침없는 아는체도 역시 무식의 소치임을 확실히 해두고싶은 마음에서 해댄 소리입니다.

불교는 쉽게 말하면 앞에서 싯타르타 태자가 고민하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은 후 그 싯타르타 태자가 석가모니로 불리우게 된 사색적이고 더욱 난해한 철학과 사상을 지니긴 했지만 우리모두가 싯타르타 태자와 같은 처지이고 또 석가모니와 같이 부처를 이룰수 있다고 가르치는 종교인 것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란 말은 ‘하늘 위나 땅 아래에서 내가 가장 존귀하다’는 뜻인데 그 존귀한 이유가 나도 부처가 될 만큼 존귀하다는 의미인 것이고, 그 나(我)는 석가모니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 해당되는 말인 것입니다.

그것을 요즘은 쥐뿔도 모르며 혼자 잘났다고 하는 의미로 쓰고 있지만 말입니다.

<인생은 고통인가?>

고성제苦聖諦란 인생을 고해苦海의 바다에 비유한 설명법 입니다.

이 삶을 고통이라 하는 전제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기본적 명제가 인식이 된 상태에서 풀이되야 옳습니다.

그 기본 명제란 바로 깨달음을 추구해야하는 이유가 ‘깨달음 만이 영원한 고통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다시말해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인생의 희로애락은 한 낱 꿈과 같아 가치가 없다는 뜻이고 그러하기에 그건 진정한 락樂이 아닌 고苦라고 설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불교는 이 전제를 생략하고 ‘삶은 고통이다’ 해버리니 비관주의와 허무주의란 말을 듣게되는 것입니다.

평생 고생하여 키운 자식이 낳은 귀한 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기뻐하는 모습에까지도 중생의 욕망이나, 일체개고一切皆苦, 망념이란 불교의 언어를 들이댄다면 정말 ‘살 맛’ 안 나는 일입니다.

더욱 그것은 불법의 근본을 바로 알지 못하는 소견입니다. 부처님도 절대 그런 뜻에서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더욱 성불成佛은 반드시 인간의 몸으로 이룩되는 것이라 강조합니다.

그리고 번뇌즉 보리(깨달음)이라 하지 않습니까?
천상의 몸을 받아도 인간만 못하다는 이유도 천상에서는 즐거움에 취해 수행할 마음을 내질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초기불교에서 열거한 ‘고苦’의 종류를 소개해 드립니다.

먼저 가장 기본적인 네 가지 괴로움을 4고四苦라 하는데, 생노병사生老病死가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해 생노병사를 거듭하게되니 그 자체가 괴로움이란 뜻입니다.

여기에 4가지를 더해 8고八苦라 합니다.

더해지는 4가지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집착하는 물건과 헤어져야하는 괴로움(愛別離苦),

증오하는사람이나 혐오하는 물건과 만나는 괴로움(怨憎會苦),

얻으려고 애를써도 얻을 수 없는 괴로움(求不得苦),

반야심경에서 밝혔듯이 오온五蘊이 공한 줄 모르고 집착하여 받게되는 괴로움(五取蘊苦),

이렇게 네 가지를 더해 여덟가지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의 원인을 집착하는 마음 탓으로 돌려야지 삶 자체를 싸잡아 ‘고통뿐이다’한다면 분명히 잘못된 해석이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태어나자마자 병이나 사고로 죽는다면 큰 복이 되는 것이겠지요.

마무리를 하면 불교의 모든 법은 다시 말해 부처님이 중생을 성불로 이끌기 위해 하신 모든 말씀은 결국은 ‘방편설’입니다.

중생들이 고정 관념에 집착되어 있으니 그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여러 갈래와 방법으로 상황에 따라 말씀하신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삶은 고苦다’라고 대 전제를 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열반과 해탈에 비하면 중생들이 갖는 모든 가치는 허망하니 더 차원 높은 낙樂이 있다는 방편의 가르침이지 우리의 일체의 행위와 삶이 고통뿐이라는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고통의 원인과 소멸에 대해>
집성제集聖諦는 고통과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고찰을 한 진리라는 뜻입니다.

--무명이란 근본 어리석음으로 인해 중생들은 무상, 무아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중생들은 세상의 존재하는 것들이 자성이 있고 그 가치가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여 그것들을 즐기는데 열중한다.

그 착각과 집착으로 인해 거짓 존재에 대해 실체를 부여하고 갈애渴愛에 빠지게 된다. 갈애로 인하여 중생들은 얻으려는 욕망과 혐오하는 시비심을 일으킨다.

이런한 생각의 연속은 업을 이루어 태어나고 죽는 일을 반복되게 만들어 낸다. 더욱 중생들의 갈애와 집착은 육신이 사라져도 멈추지 않고 다음 생의 다른 몸으로 연장될 뿐이다.--

아함경의 귀절을 분위기에 맞게 번역해 보았습니다.
고통과 괴로움의 원인은 바깥 세상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보는 잘못된 인식과 진리에 미혹한 탓이라고 확고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반야심경에서는 ‘무유공포원리 전도몽상 구경열반’이라 뒤에 설하는 귀절이 바로 잘못된 인식(전도몽상)에서 벗어나면 삶과 존재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결국 열반의 경지에 이른다고 밝힌 귀절입니다.
이 모두가 단 한마디 즉, 공空의 체득體得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덧붙이면 12연기의 무명에서 피해간 설명이긴한데 근본 어리석음인 무명은 어디에서 온 것이냐? 다시말해 무명은 왜 존재하게 되었느냐? 라는 질문을 하신다면 사실 상당히 난처합니다.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답하면 넘어가질수도 있겠습니다만 재차 깨닫지 못한 이유로 무명이 생겨나면 무명의 ‘실체’가 있는 것이냐고 다구쳐 오면 논리상으로는 무명도 공한 것이라 본래 무명이라할 것도 없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결론은 역시 실체가 없는 무명의 원동력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대 폭발에 의해 우주가 생기기 이전의 것을 현대 물리학으로는 아직 설명할 수 없듯이 이렇게 무명과 깨달음을 가를 때 쓰는 ‘마음’이 불교에서 말하는 소위 ‘마음에 달렸다’는 참 의미인 것입니다.

‘내가 마음 먹으면 너 혼날 줄 알아’라고 허풍떠는 소갈머리없는 마음을 ‘마음’이라 착각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성제의 첫 설명에서 벌써 고통과 괴로움의 제1 원인은 마음을 잘못쓰는 것이란 결론이 나와버렸습니다만 사성제에 대한 나머지 부분도 이해해야하니 설명을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고를 여읜자리와 그 과정>

멸성제滅聖諦란 사성제의 첫번째 전제인 ‘고’가 사라진(滅) 진리란 뜻입니다.

여기서 고가 사라진 자리는 단순히 고통을 마음으로 이겨내는 참는 능력이 생겼다거나 고통이 사라져 더 이상 없다는 수동적인 정신의 경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고죽음(老死)에서 완전한 해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이겠지요.

이런 고통과 번뇌의 타오르는 불길이 다해 재가 되고 또 재가 흩어져서 그저 집착할 대상도 집착하는 마음도 없는 상태를 ‘열반’이라고 합니다.

이 열반이란 단어는 반야심경에도 곧 등장하니 그때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사성제의 마지막은 도성제道聖諦입니다.

이 도성제는 멸성제를 이루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 것인데 그 방법이 8정도八正道라는 것이 가장 교과서적인 해석입니다. 8정도는 불교신도들의 일상생활의 수행덕목이라고 여기셔도 무방합니다.

그렇다고해서 팔정도가 그리 간단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부처님은 본래 출가나 재가의 수행에 차별하여 따로 지침서를 내리셨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그 말은 깨달음에는 출가와 재가의 구별이 없다는 말이지, 출가에 ‘의미’가 없다는 말이라고까지 비약하시면 곤란합니다. 팔정도가 출가자나 재가자 모두에게 수행의 공통된 정답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부터는 8正道의 하나하나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른 견해인 정견正見>

정견=중도=공=깨달음 이 등식이 성립할까요?
갑자기 웬 거창한 소리냐고 깜짝 놀라실 분이 있겠지만, 제 홈 페이지(www.sejon.or.kr)에 회원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올렸던 질문입니다.

제 홈 페이지 회원이 2만 수 천명이고 그 ‘중’에는 ‘중’들(제가 중이니 스님들은 이해해 주시겠지요)만 회원이 1천 여 분에 달합니다.
타 종교 성직자도 2,3백 분에 이릅니다.

그렇게 막강한 회원들이 공부하는 곳이니, 이 정도 수준의 논제가 사이버 상이지만 토론 가능한 것입니다.

제 자랑이 되어버린감이 있긴 하지만 사실 정견은 깨달음과도 직결되는 8정도의 첫 관문이자 8정도 이해의 핵심인 것입니다.

아래의 글 들은 40대의 회원들이 정견=중도=공=깨달음 이 성립하냐는 저의 질문에 답하신 것 중 몇 개를 발췌한 것입니다.
같이 공부하는 입장에서 보시면 도움이 되실겁니다.

-회원 가-
중도: 사성제와 팔정도, 공과 연기를 다 터득하고, 보살 수행이 다 이루어진 후, 다시 세속으로 나왔을 때의 삶.

공: 12연기의 원리를 터득하는 것.
정견: 사성제와 12연기를 바르게 이해해서 바른 관觀을 정립하는 것(실천과는 좀 거리가 있음)
깨달음: 공의 터득.

위와 같은 견해가 틀리지 않은 것이라면 ‘공’의 터득이 바로 ‘중도’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즉 ‘공’을 터득한 뒤에 세속에서 실지로 활용(적용)되어지는 것이 ‘중도’라고 봅니다.

-회원 나-
정견=중도=공=깨달음을 식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성립할 수가 없죠?
같은 선상도 아니고...

정견이 이루어지면 공 도리를 알아서 중도를 이루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는다는 의미는 있었지만요. 깨달음이란 말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작게든 크게든 깨닫고 삽니다. 그것이 어떤 방면이든지요. 그래서 세상의 한 분야에서 전문가들은 모두 한소식(?)하신 분들입니다.

나름대로의 철학으로 일관되게 행하였으므로 한 분야에서 최고를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우주의 질서(법)를 특히 잘 밝힌 사람들이 과학자들이고, 사람의 마음을 잘 밝힌 사람들이 심리학자, 철학자들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그것들을 모두 포함하고 더 나아가 생사를 관觀하여 거기서 벗어나는 도리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공도리를 알았다고 깨달았다고 할수 없으며, 중도를 행한다고 깨달았다고 할 수 없으며, 견해가 아주 바르다고 해서 깨달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같습니다.

-회원 다-
중도=공=정견 < 정견=평상심=깨달음

사성제인 고.집.멸.도에서 벗어난 상태가 공을 체득한 중도中道 입니다만, 공의 체득이 깨달음에 이른 성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소승적인 자기 수행인 자리自利의 정견 단계이며 미혹의 중생을 모두 구제하리라는 원을 지닌 대승적 이타利他의 정견개념인 ‘평상심이 곧 부처다’라는 말이 깨달음에 이른 완성된 정견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회원 라-
중도와 공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소승의 깨달음은 사성제의 멸제인데, 멸제에 이르기 위한 수행방법으로 도제(팔정도)가 설해졌고 도제의 가장 근본이 정견입니다.

소승의 최고 자리는 아라한인데,금강경에서 부처님이 해공解空 수보리를 아라한이라고 하신 것 처럼 공을 체득한 것이 소승의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승의 깨달음은 보살을 거쳐 부처에 이르러야 될 것입니다.

소승의 깨달음으로 가기위해 팔정도를 닦아야 하는데, 정견은 공,중도의 견해를 견지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정견을 바탕으로 중도적으로 사유함이 정사, 중도적으로 생각함이 정념(사념처마다 알아차림), ....
이렇게 팔정도를 닦으면 번뇌는 점차 사라지고 멸제에 이르러 필경에는 공을 체득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공감하시는 부분도 있을테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 글들을 소개하는 이유는 ‘정견’이 흔히 단정짓는 ‘바른 견해’란 정도의 수준을 넘어서는 개념이라는 것을 인식시켜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 '정견'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가 않습니다.

2005년은 마침 아인슈타인 탄생 100주년이라고 해서 세계적인 행사가 있었습니다만 아인슈타인의 사후 그의 뇌는 수십년 간 연구의 대상이었습니다.

세계의 유수한 뇌 과학과 관련된 연구소에서는 거의 모든 곳에서 세계적 천재인 아인슈타인의 뇌가 보통사람의 뇌와 ‘무엇이’ 다른지를 연구했고, 또 자신들의 연구성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천재의 뇌의 구조는 ‘역시 다르다’라고 발표한 대부분의 학자들의 결정적 오류는 아인슈타인의 뇌는 ‘다르다’를 전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생각으로 달려들었기 때문에 그 연구의 성과들이 다른 뇌 전문가가 볼 때는 실은 ‘가치 없는’ 연구들로 결론지어진다는 말입니다.

다시말해 아인슈타인의 뇌라고 보통사람의 뇌와 다른 것이 없는데, 다르다는 확신을 갖고 어떻게해서든 다른 점을 찾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8정도의 정견을 들이대며 비판하면 정견을 갖지못한 아인슈타인 매니아의 착각이란 말입니다.

정견은 이렇듯 외형상으로는 8정도의 하나에 불과할지 몰라도 결국은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전제인 것입니다.

비록 초기불교의 언어이지만 금강경의 ‘상이 상 아님을 보라(見諸相非相)’나 법화경의 ‘있는 그대로 보는 것(如實知見)’과도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정사유正思惟에서 정정正定까지>

정사유正思惟는 대상對象을 정견으로 인식하여 그 바른 인식을 마음속에 그리며 생각함을 뜻합니다. 이 대상은 유,무형의 모든 것을 포함하니 정사유란 바른 인식에 의한 바른 생각의 지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칠지만 세속적인 표현으로는 고민을 하더라도 가치있는 고민을 하라는 말이라고 생각하셔도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정어正語는 바른 말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바른 말이란 반야심경과 더불어 절에서 불공할때면 빠지지 않는 천수경千手經에 나오는 앞 뒤 못가리는 망령된 말인 망어妄語, 사람에 따라 딴소리하는 양설兩舌, 해괴한 논리로 현혹하는 기어奇語, 사람에게 악담이나 험담을하는 악구惡口를 제외한 말이라고할 수 있습니다.

8정도의 다음은 정업正業인데 바른 업을 짓는 것, 악업을 짓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살생하지 않는 것, 도둑질 하지 않는 것, 음행淫行 하지 않는 것등입니다.

정명正命은 바른 생활을 뜻합니다.
이 정명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데도 악업을 짓지 않는 지혜로운 생활을 하여야한다는 말인데, 예를들면 가능하면 살생을 하는 직업이나 술을 파는 직업은 가려서하라는 말입니다.

정명 다음은 정정진正精進입니다.
정정진은 바른 노력을 말하는데 그 노력은 구체적으로 아직 생겨나지 않은 나쁜 마음은 억제하여 생겨나지 못하게 하고, 이미 생겨난 나쁜 마음은 버리려고 노력하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착한 마음은 일어나도록 노력하며, 이미 생긴 착한 마음은 더욱 증장시키는 마음의 노력함을 말합니다.

정정진 다음의 정념正念은 바른 마음 챙김을 뜻합니다. 앞서 설명드린 위빠사나 수행법 중 4념처四念處를 말하는 것이 교과서적 설명입니다.

8정도의 마지막은 정정正定인데, 정정은 바른 삼매에 드는 것을 뜻합니다.

정정인 바른 삼매에 대해서는 초기경전인 붓다고싸의 청정도론에서 40가지를 상세히 거론하는데 결국은 마음의 멈춤(止,samatha)과 대상의 관찰(觀,vipassana) 즉 올바른 집중에 있습니다.

쉽게말해 지하철 안의 앞자리에 앉은 미니스커트 여자에 빠져 내려야할 역을 지나쳐버리는 ‘삼매’는 정정正定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렇듯 8가지 수행의 덕목인 8정도를 구조적으로 삼학三學(계,정,혜)으로 분석하여 해석하기도 하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방법이 꼭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12연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삼세三世 인과로 분류하여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런 분류가 오히려 12연기나 8정도의 총체적 이해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8정도의 설명을 마무리하면, 바른 견해인 정견正見을 기본으로 바른 수행의 수행인 정정正定을 하라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공성空性으로 돌아감>

반야심경의 설명을 위해 12연기와 4성제, 8정도를 말씀드렸습니다.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가 여기까지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실컷 늘어놓은 불교의 핵심 교리에 대해 반야심경은 앞에 ‘무’자를 붙여 다 부질없으니 집착할 것이 못 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울러서 말하자면 12연기와 4성제와 8정도등을 통해서는 얻을 바가 없으며, 얻을 바가 없음 또한 없다는 뜻입니다.

역시 이중부정을 통해 결국은 제법諸法의 실상이 공하다는 공성空性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공성을 이렇게도 확인하고 재차 강조하는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이 공성을 이해하는데서 반야의 지혜가 나오고 다시 이 반야의 지혜에서 열반과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고 결론짓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공의 성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반야심경 공부는 그 자리에서 끝장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온이 공하다거나 무명이 공하다는 반야심경의 귀절은 우리의 욕심과 어리석음등이 실체가 없는 것이다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드린다 할지라도 수행의 요체인 4성제와 8정도까지도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귀절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른 견해인 정견에서 바른 선정인 정정에 이르기까지의 수행도 마찬가지로 실체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번뇌’의 마음이든 ‘정화된’ 마음이든 그 실체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만 여기서 세심한 주의가 요구됩니다.

평상심이 부처다.
깨칠 것도 이미 없다.
깨달아도 중생심과 다른 것이 없다.
이런 식의 표현은 사실 용수의 중관사상에 의지한 언어들입니다.
한국불교가 좋아하는 스타일입니다.

즉 어떠한 형태의 마음이든 그 실체는 ‘상대적’으로만 실재하는 것이지 실은 그 성품 자체에 의미를 붙일 수 없다(의미가 없다가 아니라)는 사상이 바로 반야심경에서 그토록 갈구하는 공성의 종착지인 것입니다.

즉 자아를 공아空我로 보는 것입니다.

반면에 유식사상은 자아의 실재는 부정하지만 마음은 어떤 ‘실체’가 있다고 하는데, 만약 마음에 실체 자체도 없으면 옳고 그름이나 방일과 수행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마음의 근거는 실재하는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마음을 자꾸 파헤쳐 7식,8식까지 거론하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저는 분명히 중관쪽이라고 말씀드렸고, 반야심경을 이해하려면 중관의 언어로 이해해야하지 유식의 언어로 이해하려하니 본질의 접근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한국불교의 해결해야 할 과제중 하나가 종착지는 중관사상의 공을 깨달음의 최대의 가치로 인정하며 그 마음의 과정 설명이 ‘아뢰야식’등 유식의 방법을 선택하는 오류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반야심경의 ‘얻을 바가 없으며, 얻을 바가 없음 또한 없다’(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는 이와 같이 유식의 관점에서는 바라볼 수 없는, 제법의 공성을 다시한번 확인해주고 마무리하는 대목인 것입니다.

지나가는 길에 또한가지 한국불교가 공에 대해 얼마나 헷갈리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한가지 예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www.sejon.or.kr의 문답 란에 한 분이 공空에 대해 설파해 주셨는데, 그 중 ‘태허가太虛 비었기에 만물 만상이 존재하듯…’라고 하더군요.

태허는 중국 북송 시대의 유학자 장재(張載, 張橫渠: 1020-1077)가 ‘태허에 기氣가 없을 수 없고, 기는 모여서 만물을 형성하지 않을 수 없다. 흘러 움직이는 기가 여러 가지로 변화하여 성질을 이루고 이것이 온갖 만물을 형성한다.’라는 논리를 제창하여, 이것이 후에 조선 유학儒學의 거봉인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이이의 이일원론理一元論의 대립인 이理,기氣의 논쟁의 큰 쟁점이 되기도 합니다.

간단히 말해 태허에서 음과 양이 시작된다는 것이 태허란 용어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유교의 태허란 용어를 태연히 불교의 공을 설명한답시고 들이미니 대책이 서질 않습니다.
개인적 사고에 무슨 ‘대책’ 운운하냐구요.

그 태연하게 설명하는 분이 자칭 두문불출 30년 이상을 수행을 했다는 ‘스님’이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설명법은 ‘공이 태허에 있다’는 말인데, 즉 불법이 유교에 편입될판이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차라리 유식으로 공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이에비하면 그래도 상당한 수준이긴 합니다.


<현장역의 누락분>

현장삼장의 한역은 범어의 원본 중 누락된 부분이 많다고 지적하였는데 바로 다음의 곳에서 가장 큰 누락이 있습니다.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是故 色中有空 有受想行識 有眼耳鼻身意 有色聲香味觸法 有眼界 乃至 有意識界 有無明 亦有無明盡 乃至 有老死 亦有老死盡 有苦集滅道 有智亦有得 以有所得故>
법월삼장의 한역에는 < >이 이어집니다.
살펴보면 현장역의 無의 자리에 有를 넣고 다시 반복합니다.

공이란 무와 유를 모두 초월한 자리라는 것이 명확해지는데, 현장은 이 부분을 즉 ‘색즉유공 유수상행식에서 이유소득고’까지를 왜 번역하지 않았는가를 추론해 봅니다.

현장은 아마 후대에 공의 이해에 有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 염려됐거나, ‘없다’는 의미의 無까지도 부정하는 것 만으로도 공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수 있습니다.

‘없다’는 것을 부정하는데 하물며 ‘있다’는 有를 거론하여 혼란을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으로 의도적으로 번역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모든 사물과 나의 존재의 실체에 대한 ‘유’와 ‘무’ 즉, ‘있다 ‘없다’의 이해의 문제는 부처님 당시와 초기불교, 부파불교에 이르기까지 그 개념들이 조금씩 변화되었던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다 용수에 이르러 존재의 연기론적 실재인 공사상을 확립하고 바로 대승사상이 펼쳐지며 비로소 공이 대승의 핵심 언어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현장이 용수의 공 사상을 잘못 이해하여 누락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유’로 재차 공성을 설명하는 이 부분을 전혀 거론하지 않은 것은 석연치가 않습니다.

 

 



더욱 현장역의 누락의 문제 중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은 경을 설한 주체와 그 연유를 밝힌 서분 序分과 경의 마무리 부분인 유통분流通分의 누락인데 범어본의 반야심경의 이 중요한 부분을 소개해 드립니다.

 

 

--일체지一切智에 귀의합니다.
이와같이 나에 의하여 들리어졌습니다. 어느 때 세존께서는 왕사성의 영취산에서 위대한 비구 승가와 함께, 또 위대한 보살승가와 함께 머무시었다.

실로, 그때에 세존께서는 깊고 원만한 깨달음이라 이름하는 삼매에로 들어 가셨다.

그리고 그때 성스러운 관자재보살마하살께서는 깊은 반야바라밀다의 경지에서 해야만 할 바 행을 행하면서 이와같이 관찰하셨다. 오온들과 그것들의 자성이 공함을 본다.

그때 장로 사리불이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하여 성스러운 관자재보살에게 이것을 말하였다.
깊은 반야바라밀다의 경지에서 행을 행하고자 원하는 선남자, 그는 어떻게 배워야만 합니까?

이와같이 말해지는 데에서[=이와같은 말을 듣자], 성스러운 관자재보살마하살이 장로 사리불에게 이와같이 말하였다.

사리자여, 선남자 내지 선여인 깊은 반야바라밀다의 경지에서 행을 행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라도 그에 의하여 이와같은 것은 관찰되어야 할 것이다.

(현장 역 본문)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사리자여, 그와 같이 깊은 반야바라밀다에 있어서 행해야 할 행을 보살에 의해서 배워져야 한다.

실로, 그때 세존께서는 삼매로부터 일어나서 관자재보살마하살에 대해서 찬탄을 주셨다.
옳다, 옳다, 선남자여! 그것은 그와 같도다, 선남자여! 그와같다, 그와같다.

마치 깊은 반야바라밀다의 경지에서 행을 행해야 하는 것처럼 당신에 의해서 설해진 것은 모든 여래 아라한들에 의해서 기뻐해지는 것이다.

세존께서 이를 설하셨다. 장로 사리불, 관자재보살 그리고 모임에 참여한 모든 인간, 아수라, 건달바, 그리고 세간 모두가 세존으로부터 설해진 바를 듣고 모두 기뻐하였다.--

결국 현장은 경의 구성요소 서론(서분) 본론(정종본) 결론(유통분) 중에서, 정종분正宗分에 해당하는 본론만 언급한 것이 됩니다.

그러니 더 이해가 어려워질 수 밖에 없고, 더욱 한국불교가 이 현장본을 그대로 유통을 해야 하는지에는 강한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참고로 신수대장경 제8권 반야부에 실려있는 반야심경의 한역본들을 일러둡니다.

소본(약본) 반야심경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현장 역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摩訶般若波羅蜜大明呪經) 구마라집 역
대본 반야심경
보변지장반야바라밀다심경(普遍智藏般若波羅蜜多心經)법월 역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반야・이언 공역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지혜륜 역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법성 역
불설성불모반야바라밀다심경(佛說聖佛母般若波羅蜜多心經) 시호 역

 

 

불교의 발전사

 

<근본불교 부파불교>
지금으로부터 2,600여 년에서 3,000여년 전(남방불기와 북방불기의 차이에 따라) 현재의 네팔, 당시의 인도의 작은 나라인 카필라국의 석가족釋迦族의 왕의 태자로 고타마 싯다르타가 탄생합니다.

그는 결혼하여 아들을 하나 낳고는 깨달음을 얻기위해 29세에 단신으로 히말라야 산 속 깊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6년 후인 35세에 깨달음을 이루고, 그 깨달은 법을 우리 모두에게 전해주기 위해 45년 간을 설법하다 80에 세상의 인연을 다하십니다.

우리는 그를 석가족의 대성자라는 의미의 석가모니라고 부름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에게는 10대 제자를 비롯한 많은 제자와 대중이 모여 교단을 형성하게 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에도 그의 말씀을 직접 전해들은 직계 제자들이 주축이 된 교단은 아무런 이견이 없었습니다. 석가모니와 그 직계제자의 말에 반론할 수는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때의 불교를 근본불교 혹은 초기불교라 합니다.
어떤 학자는 원시불교라고도 하는데 저는 근본불교란 표현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멸 후 약 100년이 지나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교리와 계율에 대한 조심스런 다른 견해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를 테면 ‘소금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 안 된다’는 계戒가 있었는데, 그 본래의 의도는 소금은 당시 사실상 부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소금을 저장한다는 것은 출가자로서는 재산의 축적과 같았던 것이라 금시했던 것입니다.

철저히 지켜지던 이 규칙이 불멸 후 100여 년이 되자, 먼 길을 떠날때는 최소한의 소금은 지니고 가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으니 조건부로 허용해야 한다는 교단내에 진보적 성향의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이런 이유로 교단의 분열이 처음으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전통의 계율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보수적인 쪽(상좌부上座部)과 진보적인 쪽(대중부大衆部)으로 양분되고 이것을 근본 분열이라고 합니다.

지금보면 사소한 문제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당시로서는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더욱 근본 분열이후 이번에는 교리의 해석의 문제로 분열을 거듭하게 되어 불멸 후 400여 년 후에는 20여개의 부파部派로 나누어지기에 이릅니다.
이때의 불교를 부파불교라 합니다.

이 부파들은 깨달음의 단계 중 하나인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관한 견해 차이라든가 불법의 마음과 현상과 실재에 대한 각기 다른 견해를 갖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렇게해서 설립이 된 불교를 아비달마阿毘達磨 불교라 합니다. 아비달마란 불법의 해석에 대한 각각 다른 논서들을 말하는데, 후대에는 너무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데다가 실천을 하는 수행보다 논쟁에만 치우친 불교라 거친 비판을 받습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교단이 중생 구제는 안하고 수 백 년 간 교리 논쟁만 벌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기사 현재 한국 불교는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 부파불교를 비판할 자격도 없지만 말입니다.

결국 이 부파불교에 대한 대중들의 반발이 소위 대승불교를 일으키는 밑거름이 됩니다.

 

 

<불교 최고의 신도 아쇼카 왕>

역사상 가장 큰 업적을 이룩한 불교 신도는 누구일까요? 우리나라는 오대산 월정사 문수동자에 얽힌 일화가 있는 세조世祖라고 해도 될 듯하고, 중국에는 달마대사와의 일화의 주인공인 양무제(양무제의 아들인 소명태자가 금강경을 32분으로 나눈 장본인입니다)와 천하의 여걸인 측천무후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인도에는 그에 못지않은 아쇼카 왕이 있습니다.
이 아쇼카 왕이 없었다면 지금의 불교가 성립이 되지 못 했을지도 모르기에 그에 대해 자세히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쇼카 왕은 인도 대륙을 통일한 왕으로 아륙왕阿育王이라고 한역되는 기원 전 250년 전 후의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적史的으로도 아쇼카 왕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그가 재위 기간 중 공포한 조칙詔勅이나 그가정복한 영토의 경계를 표시한 석주石柱가 현재에도 인도의 곳곳에서는 물론 아프카니스탄에서 확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더욱 결과론이지만 그의 최대의 업적은 대승불교를 싻 티우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는 그가 정복한 인도 대륙의 곳곳에 불탑佛塔을 세우는데, 그 불탑에는 부처님의 몸에서 나온 사리가 분배되어 조성되었던 것입니다.

불탑이란 말 자체가 부처님의 유골 즉 사리(舍利, sarira)를 봉안한 무덤으로 ‘포개어 쌓는다’는 뜻의 스투파(stupa)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그가 왜 부처님의 ‘유골’을 분배했는냐에 대한 상반되는 두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그 당시 막강한 그리스나 마케도니아와 대등한 사절을 교환할 정도의 정치력을 가졌었고, 더욱 내치內治에도 성공하여 불법을 국민들의 기본 윤리로 삼도록하고 국가의 기간 사업을 통해 경제적으로도 또 정신적으로도 이상적인 군주로서 불법을 숭상하고 번성하게하기 위함이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쇼카는 원래 포악하기 짝이 없어 인도 대륙을 통일하다시피 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많은 정적政敵이 생기게 되었고 민심이 흉흉하기 때문에 그 무마책으로 부처님을 내세워 그러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무마하고 강화하려 했다는 주장입니다.

마치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며 기존 세력을 몰아내고 새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도록 만든 것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조선은 그리 공포해 놓고 왕실에서는 궁궐내에 법당을 지어 공공연히 불교를 숭상했으니 아쇼카도 그와 비슷한 의도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을 듯 합니다.

당연히 불교내에서는 ‘순수한’ 그의 신앙심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 주류이지만, 그에게 다른 의도가 있을법 하다는 개연성은 충분합니다.

어쨌건 아쇼카 왕이 곳곳에 세운 불탑은 새로운 신앙의 형태를 태동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에 이릅니다.

불탑이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였으니 당연히 불탑 자체를 예배의 대상으로 여기고 성역시하는 재가 신도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재가 불자들은 불탑에 꽃등의 공양물을 올리기도 하고, 자원 봉사자식으로 주변을 정리하고 관리하는 사람이 등장하게 됩니다.

더욱 불탑의 관리에 필요한 재정적인 후원자도 등장하고, 그에따라 재가 불자들도 조직을 갖추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이 시기가 기원 전 100년 쯤의 일인데, 이 재가 불자의 새로운 신앙 형태는 마침내 부파불교의 철학적 논쟁에 가까운 불교를 비판하며 재가 불자도 부처를 이룰수 있다는 사상적 발전을 하게됩니다.

게다가 이들은 개인의 깨달음의 추구와 다른 사람을 위한 구제의 실천을 하나로 통합하기에 이릅니다.
즉,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대승불교의 기반이 구축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불전佛傳 문학의 형성이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데, 불전 문학이란 석가모니와 깨달음에 대한 전설과도 같은 문헌이 불탑 신앙을 이룩한 재가 불자들 사이에 상당한 정신적 귀의처를 제공하게 된, 문학이라기 보다는 석가모니에 대한 재 조명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본생담本生譚 즉 석가모니의 전생에 대한 기록 문헌의 등장입니다.

본생담에서는 석가모니가 부처를 이루기 전, 전생의 세세생생을 보시와 인욕등의 수행을 한 설화의 형식을 띄고 있는데, 그 내용이 불탑 숭배의 신앙자에게 새로운 희망의 불교를 확신하기에 충분해 널리 신봉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에 이릅니다.

이 모두가 아쇼카라는 재가 불자의 불탑 조성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아쇼까(Ashoka)왕

역사적으로 불교를 지원하거나 탄압함으로써 긍정적 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불교와 인연을 맺은 왕들이 수없이 많다. 그 가운데 아쇼까왕만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인물도 드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쇼까왕은 우리에게는 아육왕(阿育王)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아쇼까왕의 사자석주를 머리에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는 불교에서 뿐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최초로 남인도 일부를 제외한 인도의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삼고 실행한 왕이며, 불교의 해외 전파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왕이기도 하다.

여기서 한 가지 먼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아쇼까왕의 즉위연도가 부처님의 생존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생존연대에 관해서는 아직까지도 어느 것

이 정확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학자들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처님의 생존연대를 추정하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 아쇼까왕의 즉위연도를 기준으로 삼는 것만큼 설득력을 갖는 추정 방식도 드물다.

우리는 서기 2000년을 불기 2544년으로 계산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이것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불기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해를 첫 해로 삼아서 햇수를 세는데,

이 연대에 의하면 부처님께서는 서기 기원전 543년에 열반하셨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연대는 상좌부(현재 동남아를 중심으로 퍼져있는 부파)가 보드가야에 있는 비문을 토대로 산출한 것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서양학자들과 인도학자들이 이 연도에 동의 하지 않고 있다.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기원전 268년경인데, 이로부터 몇 년 전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100년 전이라고 하는 설과 218년 전이라고 한느 설이다. 아무튼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아쇼까왕이 즉위하기 218년 전에(즉 기원전 486년경) 부처님께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다고 하는 설을 지지하고 있다.

부처님의 생존연대이후 태어난 사람들에 대한 전생담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유일한 예외가 아쇼까왕의 전생담으로서, 그가 얼마나 많은 공헌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예로서 들 수 있다.

부처님께서 라자그라하(왕사성)에 머무실 당시 하루는 시좌인 아난다를 데리고 탁발을 나가셨다. 길을 걸어가시던 도중 모래 장난을 치고 있는 두 소년을 만나게 되었다.

그 어린 두 소년은 부처님을 뵙고서는 무엇인가를 공양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모래로 빚은 케익을 부처님께 올렸다. 그 중 한 소년이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부처님께 예배를 올리니 부처님께서도 미소로

화답하시고는 모래 케익을 고맙게 받으셨다. 그 자리에서 아난다가 부처님께서 어째서 미소를 지으셨는지 여쭈어 봤더니,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내가 미소 지은 것에는 그 이유가 있으니라. 너는 그것을 알아야 할지어다. 내가 열반에 들고나서 백 년 뒤에 이 소년은 인도의 모든 땅을 다스리는 전륜성왕이 될 것이다.

이 소년의 이름은 아쇼까라고 불릴것이며, 진실된 불법을 바탕으로 왕국을 다스릴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의 사리를 세계 곳곳으로 봉안하도록 하여 팔만사천 개의 탑을 세울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을 평안하게 해 줄 것이다.]

여러가지 점들로 미루어 볼 때- 특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 백 년에 그가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하는 부분 - 이 전생담은 부처님 생존 당시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후대에 하쇼까왕을 더욱 미화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듯하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내용 전체가 완전히 꾸며진 것만은 아니며, 아쇼까왕의 업적을 간락하게 살펴 볼 수도 있는 내용인 것이다.

그러나 아쇼까왕이 처음부터 자비로운 군주였던 것은 아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고 북인도를 평정하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 아쇼까왕은 마우리야 왕조를 세운 짠드라굽타의 손자이다.

그의 아버지 빈두사라 왕은 16명의 부인에게서 101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아쇼까는 왕위에 즉위하기 위하여 나머지 100명의 형제들을 죽였으며, 또한 왕위에 즉위한 뒤에도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500여 명의 신하들을 죽였다고 하는 설도 있다.

그 보다도 그가 불교에 진심으로 귀의하기 전까지는 얼마나 전제적인 군주였는지는 인도 역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그의 왕조는 겨우 삼대를 이어져 온 것에 불과했으므로 그의 대에서도 또한 영토 확장과 세력 확보,

그리고 확보된 영토의 유지에 힘을 써야 할 시기였다. 그가 즉위할 때까지 남아있던 세력가운데 가장 강력한 반발 세력은 쇠퇴해 가는 칼링가 왕조였는데 그들의 저항은 아직 끝나지 않았었다.

따라서 그는 칼링가 왕조의 저항을 평정하기 위해서도 전쟁을 피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잠시 되돌아 봐야 할 것은 그가 최초로 남인도 일부를 제외한 인도의 거의 전역을 지배한 왕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인데, 그 넓은 지역을 모두 아쇼까왕 혼자서 정복한 것은 아니다. 역사지도를 보면 사실 그가 평정한 땅의 넓이는 그렇게 넓지 않다. 대부분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에서 이미 평정이 끝났고 그는

남은 일부의 땅을 정복하는 일과 나머지 저항 세력에 대한 정리만을 맡았다고도 할 수 있다. 다시말해서 그 커다란 왕조가 아쇼까왕 혼자만의 힘에 의해서 세워진 것은 아니고,

그 이전에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의해서 이미 이루어진 부분이 있었기에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독립 이전에 인도의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한 것은 아쇼까왕이며,

또한 그로서는 즉위 후 초기 몇 년 동안은 전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만큼 사실인 듯하다. 다음 회에서는 그가 불교에 공헌한 업적들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대승사상과 보살>

드디어 혁신적인 불교가 등장합니다
아라한을 깨달음의 최고의 경지라 생각했고 현학적 논쟁을 즐겼으며 더욱 중생구제에 소홀했던 불교를 떨쳐버리고, 누구나 성불할 수 있으며 나의 수행 못지않게 중생의 구제도 소중하다는 대승불교의 등장입니다.

대승大乘이란 ‘큰 탈 것’을 말하는데 이들은 부파불교를 소승小乘 ‘작은 탈 것’이라 부르게 됩니다.
그러니 소승불교라는 말은 대승불교 쪽에서 그전의 불교에 대해 폄하해 부르는 말인 것입니다.

대승사상의 핵심은 ‘보살’菩薩이란 단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보살은 그 어원이 범어梵語 Bodhisattva인데 발음 나는데로 한역한 ‘보리살타’菩提薩埵를 줄여 부르는 말입니다.

중국 사람들의 외국어를 한문으로 표기하는 기술은 재미있습니다. 코카콜라를 ‘가구가락’可口可樂 이라 쓰는데 음도 비슷하지만 마시면 ‘입이 즐겁다’라는 뜻도 되지않습니까?

보리살타란 한역 역시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보리’菩提 란 깨달음을 뜻하는데 ‘提’ 자는 원래 ‘제’이지만 이 경우에 ‘리’로 발음하는 것입니다.

‘살타’薩埵는 존재란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보리살타’란 깨달은 존재를 뜻하는 말이고, 이 말을 줄여 보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흔히 깨달음을 얻은 중생이란 의미로 각유정覺有情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보살이 대승불교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석가모니도 전생에 보살이었고 우리 모두가 보살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살은 그 주된 수행이 이타행利他行이란 것입니다.

나의 수행이 곧 다른 중생들을 위한 것이라는, 이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은 그러한 의미에서 그전까지의 부파불교와는 확연히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보리살타의반야바라밀다’菩提薩埵依般若波羅蜜多 란 이렇게 대승사상에서 탄생하게 된 보살의 수행의 의지처가 바로 반야바라밀이란 뜻입니다.

한국 불교에서는 유독 여자 신도를 보살이라 칭하고 있습니다만, 책의 시작인 관자재보살의 설명에서 말씀드렸듯이 보살에는 남성, 여성의 격이 없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

반야심경 이해의 공과 함께 또하나의 키워드가 바로 ‘반야’般若입니다. 경 제목도 반야바라밀경이니 반야를 이해하면 반야심경을 이해한 것이 됩니다.
반야는 한마디로 ‘최상의 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라밀은 ‘행 한다’라는 뜻이니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바라밀다는 바라밀과 같은 말이라고 새겨두셔도 무방합니다. 곧, 반야바라밀은 ‘최상의 지혜를 행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 반야는 좀더 세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반야심경 초반에 나온 ‘관자재보살행심반야바리밀다시’에서는 반야를 6바라밀의 하나라는 간단한설명으로 넘어갔지만 이제는 좀더 깊이 들어가보겠습니다.

모든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보살)은 반야에 의지한다는 반야심경의 말씀에는 생각보다 큰 의미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반야심경의 반야바라밀이라는 단어의 사용의 의도를 분석해 보면 보살지위 뿐만 아니라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에 의지해 수행을 완성하고, 또 깨달음의 완성은 결국 반야의 완성에 있음이 분명합니다.

사실 반야심경은 팔만대장경의 반야와 공에 대해 설해진 경전의 분류상의 표현인 반야부般若部의 경전 중 한쪽에 불과합니다.

이 반야와 공에 대한 내용은 팔만대장경의 경전부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고, 그 해설서인 논論까지 포함한다면 엄청 방대합니다.

이를테면 대반야경 만 해도 600권에 이르는데 대정신수장경의 5권에서 8권까지이고 반야부의 경전 중 대반야경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4분의 3에 달합니다.

앞서 제가 중관사상을 역설할 때 말씀드린 용수龍樹가 대품반야경에 대한 해설서인 대지도론大智度論을 지었는데 이 역시 100권에 달하고 난해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국불교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는 금강경도 이 반야부에 속하는 경전 중 하나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일생의 대부분을 이 반야경을 설하셨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크게 정리를 해보면 대승사상의 수행의 목표는 반야바라밀의 성위에 있고,

반야바라밀의 성취란 공空의 체득에 있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수행하는 사람을 보살이라 하는 것입니다.

 

 

<대품반야경의 18가지 공>

이번에는 그토록 설명하기 어렵고 이해하기에는 더더욱 어려운 ‘공’이라는 한 단어를 반야부의 경전 중에서도 핵심에 해당되는 대품반야경에서는 어떻게 풀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공’에 대해서 이제는 확실히 해두고 다음 공을 체득한 반야를 설명하고, 이어서 깨달음의 단계와 그 경지를 거론하려는 것이 제 의도입니다.

대품반야경 중 문승품問乘品 제18에서 다음과 같이 18가지 공을 말하고 있습니다.

1)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공(內空)
안이란 것은 눈,귀,코,혀,몸,의식을 말한다. 눈을 눈이라고 함은 공이니, 항상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귀를 귀라고 함은 공이고, 코를 코라고 함은 공이며, 혀를 혀라고 함은 공이고, 몸을 몸이라고 함은 공이며, 의식을 의식이라고 함은 공이니, 항상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에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인 6근六根이 공하다고 한 것과 같은 설명입니다.

2)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대한 여섯 가지 대상의 공(外空)
밖이란 것은 모양,소리,냄새,맛,느낌,의식의 대상을 말한다.
모양을 모양이라고 함은 공이니, 항상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소리를 소리라고 함은 공이고, 냄새를 냄새라고 함은 공이며, 맛을 맛이라고 함은 공이고, 느낌을 느낌이라 함도 공이며, 의식의 대상을 의식의 대상이라고 함도 공이니, 항상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에서 육근을 일으키는 대상인 6경六境이 공하다는 것과 같은 설명입니다.

3)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여섯 가지 대상이 모두 공(內外空)
안과 밖이란 것은 안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밖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말한다.
안이란 것을 안이라 함은 공이니, 항상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밖이란 것을 밖이라 함은 공이니, 항상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의 육근과 육경이 다 공하다는 설명입니다.

4)공 그 자체가 공(空空)
모든 것은 공이며 이 공도 또한 공이니, 항상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공의 성품 자체도 공하다는 말입니다.
즉, 공이란 언어나 관념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으로 쓰인 것입니다.

5)시방세계가 공(大空)
동방을 동방이라고 하는 모양은 공이니, 항상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남,서,북방과 네 간방과 상,하를 남,서,북방과 네 간방과 상,하라고 함은 공이니, 항상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공간적 방향성의 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서울은 평양에서는 남쪽이지만 수원에서는 북쪽이 되니 서울은 북쪽, 남쪽이 아닌 공한 쪽이라는 것입니다.

6)실상의 진리의 공(第一義空)
실상의 진리(第一義)란 열반을 말한다. 열반을 열반이라고 함은 공이니, 항상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에서 ‘불생불멸’이라고 표현한 진리의 공성을 말한 것입니다.

7)함이 있는 공(有爲空)
함이 있는 것이란 애욕의 세계(欲界),물질의 세계(色界),정신만의 세계(無色界)를 말한다.

애욕의 세계를 애욕의 세계라고 함은 공이고, 물질의 세계를 물질의 세계라고 함은 공이며, 정신만의 세계를 정신만의 세계라고 함은 공이니, 항상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함이 있다’라는 의미를 유위의 세계라 보고, 그 유위의 인因으로 펼쳐지는 세계 즉, 욕계,색계,무색계가 다 공함을 말한 것입니다.

8)함이 없는 공(無爲空)
함이 없는 것이란 남이 없는 모양(無生相),머무름이 없는 모양(無住相),없어짐이 없는 모양(無滅相)을 말한다. 함이 없는 것을 함이 없는 것이라고 함은 공이니, 항상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함이 없다’라는 무위는 ‘함이 있다’는 유위를 제외한 세계를 말합니다.

무위공이란 유위공이 포함하지 않는 세계도 공하다는 것인데, 반야경의 논서인 ‘대지도론’ 권31에는 “만약 유위를 제하면 무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유위가 곧 무위의 실상이다. 유위가 공한 것처럼 무위 역시 공하다. 그 이유는 유위가 즉 무위이기 때문이다”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9)하나도 남김이 없는 공(畢竟空)
하나도 남김이 없음이란 모든 것은 마침내 붙잡을 수 없음을 말하니, 항상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 필경공은 일체의 존재와 진리가 공하다는 것을 강조하여 선언하는 의미의 공을 말하는 것입니다.

10)시작함이 없이 나고 죽는 모든 것은 공(無始空)
법은 그 시작된 곳을 잡을 수 없으니, 항상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흔히 법의 설명에 시작도 끝도 없다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공을 말한 것입니다.

11)모든 것을 분리하는 공(散空)
분리함이란 모든 것이 흩어짐이 없음을 말하니, 항상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리하고 흩어진다는 의미는 물질과 의식의 성,주,괴,멸 즉 생겨나서, 머물다, 소멸하여, 사라짐이 있다는 것을 말하며, 이 성질이 곧 물질과 의식의 공함을 뜻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12)모든 것의 본성인 공(性空)
일체 모든 것의 본성인, 혹은 함이 있는 것들의 성품, 혹은 함이 없는 것들의 성품은, 이것을 성문이나 벽지불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이 만든 것도 아니며, 더구나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것도 아니다.
이 본성을 본성이라 함은 공이니, 항상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대지도론’ 권31의 설명이 제격이라 대신합니다.
“비유하면 물의 성품은 차가운 것이지만 불로 덥히면 열이 나고, 다시 오래 두면 차가워지는 것처럼 일체의 본성도 이와 같아 모든 것은 온갖 인연이 모여서 존재하게 되는데, 이는 물이 불을 만나 열을 내는 것과 같다. 온갖 인연이 적거나 없으면 일체가 존재하지 못하는 것은 불이 꺼지면 끓던 물이 식는 것과 같다”

13)물질의 고유한 모습의 공(自相空)
물질의 고유한 모습이란 물질적 존재의 결국은 멸하는 성품,감각의 느끼는 성품,겉으로 나타나는 것의 집착하는 성품,의지의 작용하는 성품,인식의 인식하는 성품등을 말한다.

이와 같은 함이 있고 함이 없는 것들은 각각의 고유의 성품이 공하니, 항상 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물질의 고유한 모습이 공하다는 말은 모든 물질은 인연화합에 의해 잠시 그러한 모습으로 내게 비치고 느껴지고 인식되어지는 모습을 말하는데, 이것이 공하다는 것이 ‘자상공’의 뜻입니다.

14)모든 존재가 공(諸法空)
모든 존재란 물질적 존재,감각,표상,의지,인식, 눈,귀,코,혀,신체,마음, 형상,소리,냄새,맛,느낌,의식의 대상, 눈의 영역,형태의 영역,눈으로 인식하는 것, 내지 마음의 영역,의식의 대상이라는 것,의식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 모든 존재를 모든 존재라 함은 공이니, 항상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앞의 ‘자상공’이 물질의 바깥 모습이 공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라면 ‘제법공’은 그것을 파악하고 받아들이는 주체도 공하다는 의미입니다.

15)모든 것을 얻을 수 없는 공(不可得空)
모든 것을 구함에 얻을 수가 없다.
이 얻을 수 없음이 공이니, 항상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금강경 제25분의 귀절입니다.
“수보리야 어떠하냐, 너희들은 여래가 생각하되 ‘내가 마땅히 중생을 제도한다’고 말하지 마라. 무슨까닭이냐, 사실은 여래가 제도한 중생이 없기 때문이니, 만약 여래가 제도한 중생이 있다면 여래는 곧 아,인,중생,수자상이 있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나’가 있음을 말함은 곧 ‘나’가 있음이 아니건만, 범부들이 ‘나’가 있다고 하니 수보리야, 범부라함은 여래가 말한 범부가 아니라 그 이름이 범부이니라.”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시고 자비로 중생을 제도함도 실은 그 ‘깨달음의 구함’도 ‘중생의 제도’도 없다는 말씀인데, 즉 깨달음의 구함의 주主와 객客도, 제도하는 주主와 객客도 모두 없음을 강조하신 대목입니다.

이 말씀은 부처가 곧 중생이라는 주객일여主客一如의 공성空性을 설하신 것입니다.

16)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가 공(無法空)
사물이 없다는 이것은 또한 공이니, 항상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없다는 의미의 ‘무無’가 곧 공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17)사물이 존재한다는 견해가 공(有法空)
사물이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이 화합한 가운데 본래 성품의 모양이 있음을 말한다.
이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공이니, 항상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있다는 의미의 ‘유有’도 역시 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18)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와 존재한다는 견해가 같이 공(無法有法空)
모든 것 가운데는 어떤 것도 없다는 것과, 모든 것이 화합한 가운데는 본래 성품의 모양이 있다는 것의 이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와 존재한다는 견해는 공이니, 항상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왜냐하면 본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앞의 두가지 경우인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법공’도 또한 사물이 존재한다는 ‘유법공’도 모두 함께 공하다는 뜻입니다.

이 18가지의 공이 260자에 불과한 반야경심의 모체라할 수 있는 대품반야경의 한 품에서 밝혀놓은 ‘공갈’恐喝 같이 느껴지는 공에 대한 ‘공갈’空喝 입니다.

이쯤돼서 저의 ‘무아無我’를 한정적인 범위를 제외하고는 ‘공아空我’로 대체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자는 줄기찬 주장을 동조하시는 분이 늘어나길 노골적인 심정으로 기대해 봅니다

 

 

<반야심경과 흡사한 大品般若經 習應品>

“사리불아, 물질적 존재가 공일 때에 물질적 존재가 있을 수 없고, 감각,표상,의지,인식이 공일 때에 인식 등도 있을 수 없다.

사리불아, 물질적 존재가 공하기 때문에 변화하고 허물어짐이 없고, 감각이 공하기 때문에 받아들임도 없으며, 표상이 공이기 때문에 아는 것도 없고, 의지가 공이기 때문에 작용하는 것도 없으며, 인식이 공이기 때문에 깨달음도 없다.

왜냐하면 사리불아, 물질적 존재는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물질적 존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물질적 존재가 바로 공이고 공이 바로 물질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감각,표상,의지,인식도 또한 이와 같다.

사리불아, 이 모든 존재의 공한 모습(是諸法空相)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不生不滅),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不垢不淨),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不增不滅).

이 공인 모든 존재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다.
따라서 공 가운데는 물질적 존재도 없고 감각,표상,의지,인식도 없으며, 눈,귀,코,혀,몸,의식도 없고, 모습,소리,냄새,맛,촉각,의식의 대상도 없고, 눈의 영역도 없고 내지 의식의 영역도 없다.

또한 근본적인 무지(無明)도 없고 근본적인 무지가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역시 없다.

고통,고통의 원인,고통을 제거하는 것,고통의 제거하는 것에 이르는 길도 없고, 지혜도 없고 또한 얻을 것도 없다.

또한 수다원도 없고 수다원과도 없으며, 사다함도 없고 사다함과도 없으며, 아나함도 없고 아나함과도 없으며, 아라한도 없고 아라한과도 없으며, 벽지불도 없고 벽지불과도 없으며, 부처님도 없고 또한 깨달음도 없다”

-이 글은 반야심경의 다른 번역본이 아니라 대품반야경 습응품習應品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통해 범어본인 반야심경의 상당부분을 누락시킨 현장역에 대한 저의 비판적 시각을 거두려는 것은 아니지만, 현장은 아마 반야부의 경전들의 이런 부분을 보고 참고를 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게 합니다.


 

<수행을 처음 발심한 보살>

여러분은 지금 반야심경의 해설 중 ‘보리살타의반야바라밀다’의 설명 속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요.

설령 ‘깜빡’ 하셨다면 횡설수설한 저의 잘못이긴 합니다만, 제자리 걸음을 하는 듯한 해설이지만 모두 ‘공’과 ‘반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등의 이해를 위한 것임을 새삼 말씀드립니다.

이번에는 앞서 말씀드린 대승불교의 꽃인 ‘보살’에 대해 깊이있게 접근해 보겠습니다.

보살은 ‘보리살타’의 준말로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수행하는 자를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지만, 이런 해석은 대승불교에서 포괄적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초기 대승사상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보살사상이 전개되면서 법화경이나 화엄경등에서는 셀 수 없을 정도의 보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보살에 대한 개념도 많은 변화가 있게 됩니다.

이를 테면 화엄경에서는 보살의 수행의 계위 階位를 52단계로 구별합니다. 화엄경의 10지품에서는 보살의 계위階位를 아주 세밀히 묘사하고 있는데, 그 수행의 단계의 구별의 기준은 10바라밀이라고 단정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야경에서 구별하는 보살의 단계는 사상적으로 아직 그 정도로 세분화 되지는 못했습니다.

반야부의 경전에서 보살의 계위階位 표현에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화엄경의 52계위에는 미치지 못하고 대체로 4단계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대품반야경의 보살의 4계위를 중심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그 첫번째가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인데, 신학보살新學菩薩이라 하기도 합니다. 곧 처음 발심한 보살을 의미하는 초발의보살에 대해 대품반야경 문지품聞持品 제45의 설명을 보면,

“세존이시여, 이 반야바라밀은 심히 깊어서 심히 깊은 모양은 보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려우며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발심한 보살 앞에서는 설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처음으로 발심한 보살이 이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을 들으면, 반드시 놀라고 두려워하거나 마음에 의심을 품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믿지 않거나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보살의 물러나지 않는 경지에 있는 보살마하살 앞에서 설해야 합니다. 이 보살은 이 심히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마음에 의심을 품지도 않아 바로 능히 믿어 행합니다.”

석제환인이 사리불에게 물었다.
“만약 처음으로 발심한 보살마하살 앞에서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설한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습니다까?”

사리불이 석제환인에게 대답했다.

“교시가여, 만약 처음으로 발심한 보살 앞에서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설하면, 그 곳에 있는 이 처음으로 발심한 보살은 반드시 놀라고 두려워하거나 비방하고 헐뜯으며 믿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처음으로 발심한 보살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비방하며 헐뜯고 믿지 않으면 세 갈래 나쁜길(三惡道)의 업(業)을 짓게 되고, 이러한 업 인연의 까닭에 오래고 오래도록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어렵습니다.”

초발의보살도 이정도니 여러분이나 저나 반야심경을 평생 독송해도 얻는 것이 없다해도 실은 실망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반야경의 성립 당시의 ‘보살’의 개념으로 볼때는, 여기서의 초발의보살은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대승의 수행하는 마음을 낸 범부 중생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수행의 마음을 오래 전에 낸 보살>

대품반야경에서는 두번째 단계의 보살을 수행의 마음을 낸지 오래된 보살이란 뜻으로 ‘구발의보살’久發意菩薩이라 합니다.

이 두번째 지위의 보살에 대한 개념은 대품반야경 도공품度空品 제65에 잘 설명되어 있는데,

"수보리야, 어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일체 모든 것이 본래 생겨남이 없음을 믿어 이해하지만, 아직 진실한 이치를 깨달아 평온한 마음을 얻지 못했다.

일체 모든 것이 공임을 믿어 이해하지만, 아직 진실한 이치를 깨달아 평온한 마음을 얻지 못했다. 일체 모든 것이 허망하고 실답지 않으며, 있을 것이 없고 견고하지 않음을 믿어 이해하지만, 아직 진실한 이치를 깨달아 평온한 마음을 얻지 못했다.

수보리야, 이러한 많은 보살마하살을 많은 부처님께서는 법을 설하실 때에 환희하여 스스로 이름을 찬탄하고 칭찬하신다.

수보리야, 만약 많은 보살마하살을 여러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실 때에 환희하여 스스로 칭찬하신다면, 이 보살들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를 없애고,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야, 만약 보살마하살을 여러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실 때에 환희하시면, 이 보살은 마땅히 보살의 물러나지 않는 경지에 머물게 될 것이다. 이 경지에 머물고 나서 반드시 일체지를 얻을 것이다.

또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들을 때에 그 마음이 밝아져서 의심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으며 생각하기를, ‘이 일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고 한다면, 이 보살도 또한 마땅히 아촉불 및 많은 보살의 처소에서 널리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또한 믿어 이해할 것이다.

믿어 이해하고 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마땅히 보살의 물러나지 않는 경지에 머물 것이다."

-두번째 구발의보살久發意菩薩의 경지에서 말하는 오래 전에 수행의 마음을 내었다는 말은, 전생에 이미 반야바라밀을 믿어 의심치 않고 더욱 수행의 마음의 견고함을 더하는 보살의 경지를 이르는 것입니다.

 

 

<물러서지 않는 경지의 보살>

대품반야경의 보살의 세번째 지위는 ‘불퇴전보살’不退轉菩薩인데, 어떤 경우에도 반야바라밀의 수행의 마음에서 물러서지 않는 경지의 보살을 말합니다.

대품반야경의 견고품堅固品 제56에 있는 내용을 편의상 제가 구분하여 정리한 것이 아래의 것인데, 성문, 연각(벽지불)에 대한 언급과 사성제 팔정도는 물론 반야심경 본문에서 거론한 6근, 12처 18계등과 반야바라밀의 성격과 공에 대한 개념의 재확인등 중요한 대목이 거의 정리되어 있습니다.

특기할 점은 이 경지의 보살은 물러서지 않는 신심(구체적으로는 반야바라밀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물론이고, 중생구제를 위한 화현化現과 신통자재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 보살마하살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머무르지 않으니, 이 까닭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보살마하살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있어서 머무르니, 이 까닭에 또한 머무르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2) 첫째 선정(初禪),둘째 선정(二禪),셋째 선정(三禪),넷째 선정(四禪), 나아가 모든 의식이 사라진 적멸한 선정(滅定禪)에 들려고 하면 바로 들어갈 수 있다.

3) 네 가지 관찰법(四念處) 내지 여덟 가지 바른 깨달음에 이르는 길(八正道),모든 것은 공,정해진 모양이 없음(無相),일부러 이루는 일이 없음(無作)의 삼매, 내지 다섯 가지 신통(五神通)을 닦고자 하면 곧 능히 닦는다. 그러나 그 과보를 받지 않고 수다원과 내지 벽지불의 경계를 증득하지 않는다. 다만 중생들을 위하여 마음에서 몸을 받고, 그들의 부족함을 따라서 그들을 이롭게 한다.

4) 항상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생각하여 결코 일체지一切智의 마음을 멀리 떠나지 않는다.

5) 혹 집에 거주하면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한 방편의 힘으로 다섯가지 욕락(五慾樂)을 받아 도리어 중생에게 베푸니 먹을 것을 구하면 먹을 것을 주며, 마실 것을 구하면 마실 것을 주고, 의복,침구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용품들을 구하면 다 구해준다.

6) 스스로 보시바라밀을 행하고 다른 사람을 인도하여 보시를 행하게 하며, 그가 보시를 행하는 것을 보면 찬탄하고, 지계바라밀 내지 반야바라밀도 또한 이와 같이 스스로 행하며 다른이에게도 권한다.

7) 집에 있게 되면 능히 염부제閻浮提에 가득한 값진 보물들을 중생에게 나누어주고, 나아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진귀한 보물들도 중생들에게 나누어 준다.
또한 항상 청정한 행을 닦는데에 자신을 위한다는 마음이 없고, 다른 이를 멸시하거나 도둑질을하여 그들이 근심하거나 어지럽게 하지 않는다.

8) 집금강신왕執金剛神王이 항상 따라다니며 수호한다.

9) 항상 보살의 다섯 가지 뛰어난 힘(五根)인 믿음의 힘(信根),정진의 힘(精進根),사유의 힘(念根),선정의 힘(定根),지혜의 힘(慧根)을 원만히 갖춘다.

10) 늘 한결같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행하여 마음이 흩으러지지 않는 상근기上根機의 사람이 된다.

11) 한결같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생각하고 청정한 삶을 사는 이유로 주문을 외우거나 헛된 약을 만들지 않으며, 귀신을 부려 다른 사람을 홀려 길흉이나 사주팔자를 말하지 않는다.

12) 항상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멀리 떠나지 않는 까닭에 다섯 가지 모임(五陰)에 대해 말하지 않고, 열두 가지 작용(十二入)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열여덟 가지 경계(十八界)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 모두가 공함을 알기 때문이다.

13) 관공서에 관한 일,도둑에 관한 일,군대에 관한 일,싸움에 관한 일,,부녀자에 관한 일,동네에 관한 일,국가에 관한 일자신에 관한 일 등 세상의 일에 관련하여 말하기를 즐겨하지 않고, 오직 반야바라밀만을 말한다.

14) 행여라도 모든 것이 공함을 행한다고 해도 불법을 아끼고 즐기니, 곧 일체지一切智의 마음을 멀리 떠나지 않고 보시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아깝다거나 욕심내는 마음을 내지 않고, 지계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계를 어김없이 지키며, 인욕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화내고 싸우는 마음을 내지 않고, 정진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방일하지 않으며, 선정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마음의 어지러움을 여의고,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어리석은 마음을 내지 않는다.

15)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공함(內空),여섯 가지 감관기관에 대한 여섯 가지 대상이 공함(外空),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과 존재한다는 생각이 둘다 공함(無法有法空)에 머무르며, 네 가지 관찰법 내지 모든 것은 공(空),특정한 모양도 없음(無相),억지로 이루는 것이 없음(無作)의 해탈문解脫門에 머무르며, 스스로의 경지를 너무도 잘알아 ‘나는 물러서지 않는 경지에 있는 보살이다’라고 확신하여 의심하지 않는다.

16) 이 물러나지 않는 경지에 머물러 불국토佛國土를 밝히고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시키며, 온갖 악마의 장애가 일어나면 곧바로 알아차려서 악마의 장애를 파괴한다.

17) 혹시라도 악마가 부처님의 몸으로 유혹하더라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며 도리어 ‘나는 반드시 여러 부처님에게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수기受記를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많은 보살이 이 법에 의지함으로 수기를 받았고, 나 역시 이 법에 의지하고 있어 수기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스스로 말한다.

18)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모든 부처님 법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하여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는다.
큰 다라니多羅尼를 얻은 까닭에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도 의심하지 않고 모두 깊이 받아 지님은 물론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다.

 

부처를 이루기에 한 생만 남은 보살>

대품반야경에서는 보살의 네가지 계위階位 중 마지막 단계에 이른 보살을‘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이라 합니다.

대품반야경 왕생품往生品 제4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리불아, 어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몸을 부처님처럼 나투어서 널리 항하의 모래알같이 많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 국토에 가서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함과 동시에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그 국토를 정화하고 모든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 그리고 미묘하고 청정한 시방국토의 모양을 남김없이 보고 스스로 수승한 국토를 건립하니, 그 국토의 보살마하살은 전부가 한 생 동안만 번뇌에 얽매여 있는 보살들이다.”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을 비롯한 흔히 불교신도들이 부처님과 거의 동격으로 인식하며 신앙의 주체로 삼는‘보살’이 여기에 해당될 듯 합니다.

지금까지 반야심경의‘보리살타의반야바라밀다’菩提薩埵依般若波羅蜜多를 이리저리 돌며 설명하였는데, 보살의 본래말인 ‘보리살타’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충분한 것 같습니다.

보살을 설명하며 덤으로 ‘반야바라밀’이라는 말도 무척이나 많이 친숙해지긴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반야심경에서 최고의 지혜라 강조하는 반야바라밀을 이해하려면 조금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최고의 지혜인 반야바라밀>

여러분은 이 책 초반에 6바라밀을 보시+지혜=보시바라밀, 이런 식으로 제가 설명했던 것을 기억하시는지요?

즉, 단순히 주는 것만으로는 ‘바라밀’이 이루어지지 않고 지혜롭게 주어야 ‘보시바라밀’이 된다고 하며,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 이란 다섯 바라밀이 각각 지혜와 더불어 완성이 되었을 때 바로 마지막 반야바라밀이 성취된 것이란 제 말씀 말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대품반야경에서 이런 제 생각과 완전히 일치하는 반야바라밀에 대한 설명을 발견했습니다.

한번은 현장역의 반야심경이 공에 대한 언급이 ‘무… 무… 무…’에만 치우쳐 본래 공의 의도인 유무有無를 초월한 중도中道를 이해시키는데 장애가 있는듯 하다며, ‘공중무空中無…’ 와 더불어 ‘공중유空中有…’의 반복을 주장하다가 후에 법월삼장의 한역본에서 그것을 찾아내고는 ‘환희’했다고 호들갑을 떤 적도 있습니다.

그러니 저로서는 이러한 두번의 저의 ‘안목’을 확인한 셈이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저놈이 이젠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하네’라는 분도 계시겠지만 말입니다.

그 연유야 어찌되었건 법회에서나 다른 책에서 일상적으로 설명하는 6바라밀과는 다른 대품반야경의 섭오품攝五品 제68의 해당부분을 정리하여 우리말로 옮겨드립니다.

“수보리야, 무엇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가? 보살은 일체지一切智에 순응하므로 모든 존재에 집착하지 않고, 또한 모든 존재의 성품을 관觀하니 집착할 것이 없는 까닭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모든 존재에 집착하지 않게하고, 또한 모든 존재의 성품을 관觀하게 하니 집착할 것이 없는 까닭이다.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보살마하살은 보살을 귀히 여겨 부르는 동의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1) 지혜로운 보시바라밀
보살은 열네 가지 공(十四空)에 머물러 물질의 존재의 모습을 공이라 하거나 혹은 공이 아니라고 집착하지 않는다.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모두를 보시한다.
예를들어 음식과 의복등의 일용품을 보시하되, 이 보시가 공함을 관한다.
보시의 무엇이 공인가?
베푸는 이, 받는 이 재물이 모두 공이어서 아끼거나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처음 발심하여 깨달음에 이를때까지 망상과 분별심을 버리고,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때도 아끼거나 집착하는 마음이 없었듯이 보살마하살도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아끼거나 집착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 보살이 중히 여기는 것은 오직 반야바라밀이다.

2) 지혜로운 지계바라밀
보살마하살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마음을 내지 않는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처음 발심하여 깨달음에 이를때까지 스스로 살생하지 않고 다른 이를 시켜 살생하게 하지도 않으며, 살생하지 않는 법을 찬탄하고 살생하지 않는 이를 찬탄한다. 이러한 계戒를 지닌 인연으로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의 불법을 구하지 않는다.

3) 지혜로운 인욕바라밀
보살마하살은 불법의 진리에 따르는 마음(隨順法忍)을 일으켜 생각하되, 처음 발심하여 깨달음에 이를때까지 행여 온갖 중생이 자신을 비난하고 저주하며 칼이나 몽둥이, 돌등으로 상해傷害하더라도 동요하지 않고 이와 같이 생각한다.

‘진실로 이상하구나 불법 가운데는 진리로서 비난하고 저주하거나 신체를 상해傷害 당한 이가 없는데 중생들은 이러한 고통을 받는다’

4) 지혜로운 정진바라밀
보살마하살은 중생들을 위해 불법을 설하여 보시바라밀,지계바라밀,인욕바라밀,선정바라밀,반야바라밀을 행하게 하며. 네가지 관하는 법(四念處)과 여덟가지 깨달음에 이르는 길(八正道)를 행하게 하며, 수다원과,사다함과,아나함과,아라한과,벽지불과를 이루게 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고,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에도 무위법無爲法에도 집착하지 않게 한다.

5) 지혜로운 선정바라밀
보살마하살은 모든 부처님의 삼매를 제외하고는 다른 일체의 삼매인 성문,벽지불,보살의 삼매에 이른다.

‘반야바라밀’은 이렇듯 사고思考를 초월한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살펴 보았듯이 반야심경은 대품반야경을 축약한 경이라 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대품반야경을 검토하며 개인적으로 느낀, 그냥 지나치기에는 걸리는 점을 말씀드리면, 역시 대승불교의 초기 경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성문,연각(벽지불)에 대한 보살의 수승함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이나, 근본불교에서는 거의 없었던 다라니(진언)에 대한 신앙성의 강조와 석가모니 부처님도 선언한 ‘업에 의한 과보는 반드시 받는다’는 인과법을 기도로 상쇄할 수 있다는 견해의 조심스런 등장은 주목할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야로 얻게 되는 걸림 없음>

원효와 혜공이 하루는 술병을 차고 냇가로 나가 물고기를 잡아 안주삼아 한 잔 하고 있었다. 그 때 혜공스님이 느닷없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명색이 중인데 물고기를 잡아 먹고 있으니 누가 볼까 두렵소.”
그러자 원효스님의 대답.
“다 먹고 난 다음에 그런 소리를 하면 뭐합니까. 정 그렇다면 산 고기를 뱉어 내면 되지 않겠소.”
“스님께서 그런 신통력이 있소.”
“해봐야 알지.”
“원효스님이 한다면 나도 자신있소이다.”
“그러면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여기서 한번 시험해 봅시다.”

이렇게 해서 두 스님의 신통력 대결이 냇가에서 벌어졌는데 한 스님은 냇물 상류쪽에서, 또 한 스님은 하류쪽에서 바지춤을 풀고 ‘큰 것’을 보았다. 그러자 고기들이 산 채로 나오더니, 물안에서 떼지어 몰려 다니는 것이다. 한데 섞인 두 고기떼를 가리키며 두 스님은 서로 내 고기라고 우겼다, 그 후 냇가의 절은 ‘나 오’(吾)자에 ‘고기 어’(魚)자, 오어사가 되었다.

포항의 운제산에 있는 삼국유사에도 등장하는 오어사의 절 이름에 관한 전설 같은 얘기입니다.
신라의 네 분의 성인이라 일컫는 혜공惠空,원효元曉,자장慈藏,의상義湘이 모두 오어사에 머문적이 있다고 하니, 대단히 유서깊은 절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무애행無碍行의 원조이며 제 일인자라 해도 모두 동의할 원효와 혜공간의 일화인데, 이런 두 수행자의 ‘걸림 없음’을 바로 무애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생사의 자재自在에 이르러야 비로소 붙일 수 있는 ‘걸림 없음’을 반야심경에서는 ‘심무가애無佳碍’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작금의 한국불교는 자신의 막행막식莫行莫食을 정당화하기 위해 무애행이란 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경우까지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가는 일은 이런 스님에 신도란 사람들도 자리를 함께하고 때론 자랑삼아 떠벌리고 다니는 경우가 전혀 없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 ‘걸림 없음’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행하되 마음에 집착이 있어 그 과보를 남기는 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하지만 마음에 칩착하지 않아 과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업을 만들지 않는 집착없는 마음과 행위가 곧 걸림 없는 마음과 행위이고, 그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심무가애무가애’라 한 것입니다.

이 업業을 이루는 걸림이 있게 하는 이유는 겉으로 행해지는 행동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으로 남게되는 ‘마음의 흔적’인 것입니다.
이 문제는 수행과 관련되는 사안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어떤 행위을 하고 그 행위에 대해 마음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다면 업도 과보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선행이던 악행이던 행동으로 옮겨놓고 본인의 의식에 전혀 잠재되지 않는다는 것은 심한 말로 정신병자라 하더라도 불가능할 겁니다.

정치인들이 비리에 연루된 사실이 언론에 거론되면 다음과 같은 순서의 발언이 하나같이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정확히 예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무근이다.”
“언론은 악의적 보도에 책임을 져야한다.”로 시작하여
검찰의 조사가 시작되면,
“검찰에서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정의가 승리할 것이다.”
비리가 밝혀지면,
“정치적 음해다”
구치소로 가면서,
“국민에게 죄송할 뿐이다”
이렇듯 때론 여유까지 부리며 자신의 행위에 마음의 걸림이 없고, 집착을 안 한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마음 속으로는 계속 ‘갈등’ 속에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의 ‘걸림 없음’이란 상대가 내 마음의 의도를 아느냐 모르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내 마음을 상대에게 들켰는가 들키기 않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남겨지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유식唯識의 관점에서 표현하자면 제8식인 아뢰야식에 극도로 미세한 의식의 흔적이 남느냐 아니면 전혀 남지 않느냐의 차이가 마음의 ‘걸림 있음’과 ‘걸림 없음’을 결정하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이 ‘걸림 없음’의 절대 조건을 반야바라밀을 이루었는가로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합니다.

 

 

<형이하학적 두려움의 실체>

두렵다거나 혹은 무섭다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리고 인간이 두렵고 무섭다고 느끼는 대상은 과연 무엇일까요?

앞서 의식의 서양철학적인 분석을 설명하며 인간이 뱀을 혐오하고 두려워 하는 것은 과거 오랜기간 뱀에게 해를 당한 인간이 갖는 집단 무의식이라고 프로이드의 제자인 칼 융이 주장했다고 소개한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실제 곡예단에서 ‘뱀 쇼’를 하는 사람 말고 뱀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류의 두려움은 사실 불교적으로는 두려움 축에 전혀들지 못합니다.

뱀이 아니라 쥐나 바퀴벌레만 보아도 ‘악’ 소리를 내는 분들이야 의아해 하실지 모르지만 그런 실체가 있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이나 무서움은 피해갈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반야바라밀을 성취하면 공포가 없다(무유공포)라고 설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공포란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두려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근원적 두려움의 원인을 저는 ‘무지’無知와 ‘불확실성’이라고 풀이하고 싶습니다.

내면적으로는 참된 진리에 무지 하기에 공포를 느끼고, 외형적으로는 모든 상황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 인간의 두려움과 무서움의 대상이자 원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이 책을 여기까지 읽어오신 분들이-상당한 인내심이 필요 하셨을지도 모르지만-여러분이 단순하게 생각해 오신 사안을 복잡하게 만들거나, 반대로 다른 책에서는 복잡하게 설명하여 엉켜버리는 부분은 간명하게 이해시켜 드리는 재주가 제게 있다고, 반야심경의 바로 이 ‘공포’란 대목의 설명에서도 발휘되고 있다고 염치없이 기대하며 말씀드립니다.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실은 모든 것은 항상하지 않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원리만 받아들여도 이 불확실성에 기인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불과 수 십년 전 만하더라도 비록 심각한 정치적 불안과 이념적 갈등을 겪어 왔지만, 지금과 같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험악한 세상이 될 줄을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삼팔선(38살이 명예퇴직 가이드라인이라는 말이랍니다.)
사오정(45살이면 정년퇴직 해야 한다는 말이랍니다.)
오륙도(56살이 되어서도 퇴직을 안 하면 도둑이라는 말이랍니다.)
육이오(62살이 되어서도 퇴직을 안 하면 오적 五賊이라는 말이랍니다.)
이런 말이 우리 각자에게 현실로 느껴지는 상황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산다는 것 자체에 대한 불안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 처럼 아예 ‘중’이 되면,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부처님 덕분에 홀몸 의식주 걱정은 덜어도 되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과 스트레스는 안타깝게도 그 강도가 앞으로 더하면 더했지 덜어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불과 몇 년 전 2,000년을 맞이할 때, 대망大望의 2,000년 이라고 모두들 말하고, 한 민족이 옛 고구려와 발해의 명성을 되찾아 만주를 지배할 것이란 희망이라기 보다는 예언에 가까운 말들이 난무했음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을 보면 만주 회복은 커녕, 경제적 독립국가를 이루기도 힘들 것 같고 국민의 의식 수준도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차짓 잘못하다간 대망大望이 아니라 대망大亡의 2,000년이 될지도 모를 지경에 이른 것 같습니다.
이러니 이러한 두려움을 어찌 쥐나 뱀의 두려움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도 반야심경에서는 이 불확실성에서 오는 두려움과 공포를 반야의 지혜로 극복하라고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두번째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에 대해서는 다소 현학적인 흉내를 내어 말씀드리면, 형이하학적 무지와 형이상학적 무지가 있습니다.

저는 선천적으로 심장이 좋지를 않아 몇 년 전에 심장병을 앓고, 현재 병원에서 심장 재활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루는 같이 운동을 하는 심장 환자 중 50대의 여자 한 분이 발목에 큰 반창고를 붙이고 왔습니다. 그것을 보고 걱정이 되어 담당 간호사가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 분의 대답이 기가막히게 듣기 힘든 답의 연속이어서 죽어라 웃은 적이 있습니다.

간호사: 왠 일로 다리에 반창고를 붙이셨어요, 불편하세요?
환자: 괜찮아요, 어제 옆 집 개가 물어서요.
간호사: 그럼 감염 검사하시고 만약을 위해 광견병 주사 맞으셔야죠.
환자: 됐어요, 물렸을때 얼른 개 털 짤라서 된장발라 물린 곳에 붙였으니까요.
간호사와 저까지 합세: 그러면 더 덧나요, 빨리 검사하고 주사 맞으세요.
환자: (좀 겁먹은 표정으로)그럼 가축병원에서 주사 맞아야 하나요?

설마 하시는 분이 계실지 몰라 부처님께 맹세하건데 말 그대로 였습니다.
이것보다는 훨씬 나은 경우가 있긴 합니다.
병원에서 운동하며 저는 오페라등 음악 DVD를 즐겨 가지고가 듣습니다.

하루는 모짜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를 가지고 갖습니다.
그 유명한 ‘밤의 여왕’이라는 아찔한 고음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아리아의 진수를 맞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옆에 앉아 있던 분이 제목을 보더니 제게 묻더군요.

“그거 틀면 마술부리는게 나오나요?”
제가 뭐라고 답 했냐구요?
“그럼요.”라고 했습니다.

형이하학적 무지를 이해시켜 드린답시고 남의 무식을 흉 본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전혀 그런 의도는 없습니다.

다만 단순한 무지의 예를 실감나게 든 것이라고 이해해 주십시요. 제가 무지와 무식을 깔볼 정도로 천박한 사람은 아니란 것쯤은 이제 잘 아시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이런 형이하학적 무지는 두려움과 무서움을 불러 일으킬 정도의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정작 난제는 형이상학적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인 것입니다.

 

 

형이상학적 두려움의 실체>

개에게 물려 광견병이 두려우면 잠깐의 아픔을 참고, 주사 한 방 맞으면 해결됩니다. 죄를 짓고 들통날까 아무리 두려워해도 차라리 벌을 받으면 시원스레 두려움도 해소됩니다.

형이하학적 두려움은 그 실체를 알 수 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두려움을 떨쳐버릴 방법을 찾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실체가 없는 것에서 오는 형이상학적 공포심은 그 두려움을 제압하기가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 형이상학적 무지의 두려움의 근원은 ‘죽음’에 있습니다.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나는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데’라는 분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외부의 상황에 따라 몸을 보호하기 위한 아주 사소한 반사적인 행동들도 따지고 보면 생명을 더 부지하기 위한 본능적 작용입니다.

공동 묘지에서 느끼는 무서움은 귀신이 나타나 내 목숨이 뺏길수도 있을 것 같다는 두려움의 다름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의 모두가 당분간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잠시 잊고 있을 뿐입니다.

말기 암으로 시한부 인생이 결정되어 버린 사람이나, 극도로 몹쓸 짓을 하여 비록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삶에 대한 그 절박함을 우리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삶에 대한 절박함은 다른 한편으로 보면 죽음에 대한 공포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법에 의하면 이 생사의 두려움은 죽었다고 해소되는 것이 아닌 심각한 공포인 것입니다.

절에서 죽은 이를 위해 지내는 49재나 천도재의 염불 중에는 일곱 부처님의 명호인 ‘칠 여래’라고 있습니다.

번幡(도량을 장엄하기 위해 불,보살의 명호를 써서 깃발 형태로 거는 것을 말합니다)에도 꼭 들어가는데 그 중의 한 분이 ‘이포외여래離怖畏如來’입니다.

뜻 그대로 무서움(怖)과 두려움(畏)을 떨쳐주는(離) 부처님(如來)입니다. 죽은 이를 위한 재를 지내며 죽음 뒤의 공포를 이포외여래에게 의지하라고 일러준다는 말과 같습니다.

실감이 안 나시겠지만 죽은 다음에도 두려움은 왜 계속되며, 그 두려움은 도대체 어떤 느낌의 두려움일까요?

죽음이 몇 분이나 몇 시간 후의 사실로 확신이 되면 실은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앞에 실컷 말씀드린 죽음에 대한 공포라는 말은, 실체를 인정하지 못하는 형이상학적 무지에서 기인하는 죽음의 ‘과정과 그 이후’에 대한 공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공포는 일단 죽는다고 ‘결정’이 나면 해소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죽는다고 공포가 해소되지 않는다는 말은, 곧 새로운 공포가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윤회에 의하면 이승에서의 죽음은 저승에서는 새로 태어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현생의 업은 죽는다고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즉, 살아서 갖고 있던 식識과 업을 죽는다는 몸만 버리는 행위로는 반전시키거나 소멸시킬 수 없다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업과 윤회의 본질인 것입니다.

이 사후의 세계에 관한 문제는 따로 설명할 것이 너무나 많아 이쯤해 두고, 죽음 이후의 공포의 실체와 대상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윤회의 주체이기도 하고, 나를 태어나게한 원인이기도 하며, 내가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며, 내가 죽는 이유이기도한 ‘무명無明’인 것입니다.

결국 무명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깨달음을 의미하고 반야심경에서는 그 깨달음을 ‘반야바라밀’이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니, 라고 말하며 그런 경지에 이르면, 마음이 걸림도 없고(心無佳碍) 걸림이 없음으로(無佳碍故) 공포심도 없게 된다(無有恐怖)고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遠離顚倒夢想<꿈과 같은 인생>

신라의 스님 조신調信은 태수 김흔金昕의 딸을 흠모했다. 낙산사 관세음보살님 앞에서 남몰래 그 여인과 살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여인에게는 이미 배필이 생겼다.

조신은 다시 부처님 전에 나아가, 관음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 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며 사모하는 마음에 지쳐 잠시 잠이 들었다.

그때 꿈 속에서 사모하는 여인이 활짝 웃는 얼굴로 찾아와 말하길,

"저는 일찍이 스님을 잠깐 뵙고, 그 후로는 마음 속으로 사랑하여 잠시도 잊지 못하였으나 부모의 뜻에 따라 억지로 딴 사람에게 시집을 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스님과 내외內外가 되기를 원해서 온 것입니다."

이에 조신은 매우 기뻐하며 그 여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살림을 하게 되었다.
그 여인과 사십여 년 간을 오손도손 살며 다섯의 자녀까지 얻었지만, 그 형편은 네 벽뿐인 집과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워 식솔들과 이리저리 다니며 구걸로 연명을 할 정도였다.

이렇게 십 여년 동안을 갖은 고초를 겪으며 헤메다가, 결국은 15세 되는 큰 아이까지 굶어 죽게되 제대로 된 장사는 커녕 길가에 묻을 수 밖에 없는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도 겪기에 이른다.

조신은 사랑하는 아내와 남은 네 식구를 데리고 우곡현羽曲懸이란 마을의 한 길가에 초목을 짓고 살았다.

어느덧 조신 내외는 늙고, 굶주림에 병들고 지쳐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게 되니 10살된 딸아이가 빌어다 주는 밥으로 연명을 하였다. 그런데 딱하게도 그 어리고 불쌍한 딸아이마저 마을에서 밥을 빌다 하루는 개에게 물렸다.

가엾은 딸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이픔과 고통을 호소하였지만 조신 내외는 한탄으로 목이 메일뿐이었다.

그때 부인이 눈물을 머금으며 조신에게 탄식하길,
"내가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었으며 입은 옷도 깨끗했었습니다. 한 가지 음식도 그대와 나누어 먹었고, 옷 한 가지라도 그대와 나누어 입어 집을 나온 지 오십 년 동안에 갖은 정情은 다 들었고 사랑도 더욱 굳어졌으니 가히 둘도 없는 인연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몸은 쇠약하고 병은 더해져 굶주림은 물론 날로 더해지는 추위에, 남의 집 곁방살이나 하찮은 음식조차도 빌어서 얻을 수가 없게 되었으며, 매일같이 문전門前에 걸식하는 부끄러움은 산더미보다 더 무겁습니다. 아이들이 추위에 떨며 허기에 배를 주려도 미처 돌봐주지 못하는데 어느 겨를에 사랑이 있어 부부간의 애정을 즐길 수가 있겠습니까?

젊었던 얼굴과 예쁜 웃음도 풀 위의 이슬이요, 지초芝草와 난초 같은 사랑의 언약도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 같을 뿐입니다. 이제 그대에게 나는 오히려 고통 덩어리가 되고, 나는 그대 때문에 더 근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옛날 기쁘던 일을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바로 근심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대와 내가 어찌해서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뭇 새가 다 함께 굶어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짝 잃은 난조鸞鳥가 거울을 향하여 짝을 부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일이 순조로울 때는 가까이하고 역경逆境에 이르렀다고 서로 버리는 것이 인정상 차마 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가고 머무는 것이 사람의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요, 헤어지고 만남에는 운명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여기서 서로 헤어지도록 하십시다."
조신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각각 아이 둘씩 나누어 데리고 떠나려 하니 여인이, "나는 고향으로 갈 테니 그대는 남쪽으로 가십시오."

조신은 이렇게 서로 작별하고 길을 떠나려 하는데서 꿈에서 깨었다.
타다 남은 등잔불은 깜박거리고 어느덧 밖은 환히 밝아 아침이 되었다.
하룻 밤 사이에 조신의 수염과 머리털은 모두 희어졌고 망연히 세상 일에 덧없음이 확연해졌다. 괴롭게 살아가는 것도 이미 싫어졌고 마치 한평생의 고생을 다 겪고 난 것과 같아 재물과 애욕을 탐하는 마음도 얼음 녹듯이 깨끗이 사라졌다.

이제는 관세음보살님을 대하기가 심히 부끄럽고, 잠시의 욕망을 뉘우치는 마음을 참을 길이 없었다. 조신은 꿈 속에서 굶어죽어 묻은 큰 아이의 자리를 파보니 그것에는 돌미륵이 묻혀 있었다. 조신은 돌미륵을 정성껏 씻어 근처에 있는 절에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가 살림을 정리하고, 정토사를 세워 정진하고 수행에 힘썼다.

--삼국유사 권3 탑상塔像에 수록된 조신의 꿈(調信夢) 얘기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후에 김만중의 ‘구운몽’, 이광수의 ‘꿈’의 모티브가 됩니다. 관련되는 자료를 살펴보니 1955년 신상옥 감독이 ‘꿈’이란 제목으로 영화로도 제작 되었더군요.

이 설화는 관세음보살이 수행자의 욕망을 하루 밤 사이의 꿈 속에서 모두 겪게 하는데, 그 잠깐의 욕망을 얻은 후의 대가로는 섬득할 정도로 고통스런 과보가 기다린다는 교훈을 실감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설화의 현실감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이 설화가 만들어지던 시대에는 가장 최악의 경우를 설정하여 표현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지금 당장 적용한다 하여도 너무 지나치다라고 하질 못할 것 같습니다.

굳이 현재의 예를 따로 들지 않더라도 지구촌에서 벌어지는 ‘믿거나 말거나’한 실제의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삼국유사의 설화의 주인공 조신調信은 이름대로 ‘믿음을 잘 조절’해서인지 천만 다행히 ‘꿈’으로 끝나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누구도 이렇게 해피 앤딩이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이런 꿈과 같이 헛되고(夢想) 뒤바뀐 착각(顚倒)에서 벗어나는 길(遠離)은 역시 반야바라밀에 의지하는 것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究竟涅槃 <가장 수승한 열반>

구기동은 제가 서울 시내를 나가는 길목에 있는데, 구기동 거리 한쪽에 ‘니르바나’란 상호가 눈에 들어오곤 했습니다. 차로 지나치며 간판의 이름만 보았지 직접 무엇을 파는 곳인지는 확인할 방법도 이유도 없었습니다.

다만 ‘니르바나(Nirvāna)’가 깨달음의 경지를 이르는 ‘열반’涅槃의 어원語源이기에 단순히 그 가게 주인이 참으로 신심깊은 불자인가보다,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법회때 열반에 대한 설명을 하며 지나가는 말로 이것을 거론했더니, 집이 그 근처라는 신도가 대뜸하는 말이 “거기 술집인데요”하더군요.

저는 내심 무척 실망했지만 웃으며 “그렇다면 정말 잘 지은 이름이네요, 술 한잔에 세상시름 잊고 잠시라도 열반에 머무를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실상 저는 계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질적으로 곡차 아니 술을 전혀 못합니다.

열반이라는 용어가 ‘보살’이 여자신도를 지칭하듯 한국불교에서만 특별한 경우로 쓰여질때가 있는데, 곧 스님들이 돌아가셨을때 ‘열반’에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열반의 어원인 ‘니르바나’는 ‘니르’Nir(끄다.消)와 ‘바나’vāna(불다.吹)의 합성어 입니다.

즉, 열반은 ‘불어 끄다’가 순수한 뜻인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불어 끄는 것이냐 하면, 타오르는 욕망과 집착의 불을 꺼버린다는 것입니다.

숫타니파타(가장 초기의 불경)에서는 이 열반을 ‘갈애渴愛 욕망의 멸滅, 집착의 멸滅’이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사고를 근본으로 후에는 해탈解脫 또는 적정寂靜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 초기 사상을 함축하고 있는 삼법인三法印의 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여기서도 저는 諸法空我가 더 합당하다고 생각하지만),열반적정涅槃寂靜이 성립하게 되는 것입니다.

화엄 사상에 이르면 의상스님이 법성게에서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相共和’라고까지 하기에 이르는데, 이 말은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주목해야할 점은 반야심경에서는 그냥 열반이 아니라 ‘구경열반’이란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열반 중에서도 ‘궁극적’ 열반이란 특별한 열반을 거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열반은 욕망이 소멸된 상태를 말하는 것은 논의의 대상이 아닌데, 후대의 논사論師들에게 고민거리가 생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석가모니가 육신을 갖추신 몸에서 오는 ‘배고픔’과 같은 본능적 욕구는 열반에 들지 못해서 오는 것이란 말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열반을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으로 구별하게 됩니다.

부처님이 육신을 버리기 전에 얻게 된 경지를 욕망은 제어 되었지만 아직 뭔가는 남아있다는 의미로 유여열반이라 하고, 부처님이 몸을 버리신 상태(죽은 다음)가 되어 아무것도 남아 있을 것이 없는 경우를 무여열반이라고 합니다.

무여열반을 진정한 의미의 열반이라 하며, ‘반열반般涅槃’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반야심경에서 굳이 ‘구경’을 붙여 구경열반이라 한 의도는 반야부의 경전들이 유통될 당시 이미 열반에 대한 여러 갈래의 해석이 존재했고, 그래서 오해의 여지가 없게 궁극적 열반이란 의미로 ‘구경열반’을 선택했다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이 구경열반까지도 반야바라밀을 성취한 후의 경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阿辱多羅三邈三菩提 - 無上正等正覺

<최고의 깨달음도 반야바라밀에 의지>

깨달음을 지칭하는 말은 아주 많습니다.
그리고 경전의 성격에 따라 그 어휘를 선택하고 때로는 만들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원각경圓覺經에서는 깨달음을 원각圓覺이라 합니다.
모든 반야부의 경전에서는 반야와 열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반야심경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열반과 같이, 궁극적 깨달음의 표현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辱多羅三邈三菩提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역시 범어梵語의 원래의 발음에 가깝게 한문으로 옮긴 것(이건 경우를 음사音寫 라고 합니다)을 다시 우리 말로 발음한 경우입니다.

이럴때 래의 발음과는 동떨어진 발음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게 되는데, 반야심경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마지막 다라니 부분인 ‘아제 아제 바라아제…’가 좋은 예입니다.

진작부터 이 문제를 원음에 가깝게 고쳐 표기하자는 논의가 있긴 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부분이 있지만 이 책에서는 편의상 기존의 방식으로 표기하겠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고 뜻을 새기는 것이 일반적 입니다.

위로 더 없는 최상의(無上) 차별 없는(正等) 바른 깨달음(正覺)이라는 말이데, 정각에 대해서 좀 더 명확하게 하자면, 반야부 경전의 문맥으로는 정각은 성문, 연각의 소위 소승의 깨달음인 불완전한 ‘편각’偏覺이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될 것 같습니다.

대승의 모든 사상을 회통會通한 한국불교의 최고봉인 원효는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경의 해설서를 論, 論에 대한 해설서를 疏라 합니다)에서 깨달음(覺)에 대한 분석을 공空을 주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박태원이란 학자가 ‘원효와 의상의 통합 사상’이란 제목의 책에서 잘 풀이하고 있어 인용합니다.

“원효에 의하면, 현실의 인간은 ‘깨닫지 못한 상태’이다. 생명계 진화에서 인간 사유 능력의 첫 출발 때부터 내재했을 근본적 이해 결핍(無明)을 대부분의 인간들은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해 결핍에서 생겨난 무지와 오해가 빚어내는 인식과 감정, 행위와 삶의 진리 이반離反 구조와 내용을 밝히는 것이 불각不覺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깊고 두터운 무지의 그늘에서 탈출할 수 있다. 근본 무지와 그 산물들이 원래 없는 생명의 본 바탕으로 귀환할 수 있다. 그 귀환의 여정을 시각(始覺, 깨닫기 시작함. 시초가 되는 깨달음)이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의 귀환 작업이 가능한 것은 근본 이해 결핍(무명)과 그로 인한 진리 왜곡과 이탈(분별.망념)및 그 산물들 (생멸의 동요와 불안. 苦)이 없는 ‘온전한 본래의 깨달음(本覺)’이 귀환의 잠재력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깨닫지 못한 상태(不覺)’를 반성하고 혐오하며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는 ‘본래의 깨달음(本覺)’에서 솟아오르는 불가사의한 계발적 자극과 계기에 의해 주어진다.

그 본각의 불가사의한 자극에 의하여 근본 무지가 초래한 삶의 동요와 불안(生滅)을 싫어하는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여 비로소 깨달음의 각성이 밝아지기 시작한다(始覺).

그리고 그렇게 드러나기 시작한 깨달음을 온전히 가꾸면 마침내 ‘본래의 깨달음의 상태’와 합일하게 된다. 시각이 곧 본각이라 말할 수 있는 경지이다.
그런데 현실의 불각이 이처럼 시각과 본각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불각. 시각. 본각이 불변의 실체적 자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이 각각 불변의 실체적 자성을 지닌 것이라면 이러한 본질적 변환은 불가능하다. 불각과 시각과 본각은 상호 의존적으로 성립하는 실체 없는 가설假設적 존재이다. 깨닫지 못함(不覺)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깨달음(本覺)이 전제되어야 하므로, 본각은 불각의 연기론적 조건이다.

마찬가지로 시각은 불각을 조건으로 한다. 비로소 깨달아 간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각과 시각과 본각은 상호 연기론적 조건으로 상호 의존적으로 성립하는 공성空性이기에, 현실의 불각 상태는 시각과 본각으로 바뀌어 극복될 수 있다. 통합의 원천인 일심으로 귀환할 수 있는 것은 세 종류의 각覺이 실체적 자성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불각. 시각. 본각에 실체적 자성이 없다는 것은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열반과 생사’.’진眞과 속俗’ 그 어느 것도 소유적 머뭄(住)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과도 통한다.

또한 불각의 근본 원인인 무명無明의 내용 역시 본래 존재하지 않는 실체적 자성을 존재한다고 하는 오해가 그 핵심이므로, 시각과 본각은 바로 ‘깨달음은 소유할 수 있는 실체적 자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깨달은 사람은 불각의 생멸(俗)에 머물지 않는 동시에 시각,본각의 열반(眞)도 머뭄의 대상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그 어떤 실체적 자성도 설정하지 않아 그 무엇도 소유와 머뭄의 대상으로 경험하지 않을 수 있을 때, 진실과 허위,성스러움과 속됨,선과 악 등의 대립과 갈등을 통합할 수 있는 상위 차원이 확보된다.

--논문식의 현학적衒學的 표현에 질려, 행여라도 대충 넘겨버린 분은 다시 한번 차분히 읽어보십시요.

비록 원효의 깨달음(覺)에 대한 관점을 논하고 있지만, 호들갑만 떨었지 실속은 없는 저의 풀이와는 달리 반야심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연기-공-깨달음, 다시말해 ‘석가모니가 깨달은 연기법은 곧 공이고, 공의 체득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룸이고, 다시 그 궁극적 깨달음(正覺)은 자성이 없는 공성空性이다’라는 반야심경의 핵심 논리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는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三世諸佛)도 오직 이 반야바라밀에 의지해(依般若波羅蜜多-바라밀다는 바라밀과 같습니다) 궁극적 깨달음에 이른다(故得阿辱多羅三邈三菩提)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大神呪, 大明呪, 주無上呪, 無等等呪

 

<주呪 란 무엇인가?>

‘주’呪란 단어는 ‘주문’呪文, ‘주술’呪術과 같이 재앙을 물리치는 신비한 ‘힘’이나 ‘방법’을 연상하게 합니다.

불교에서도 실제로 통상적으로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특히 밀교密敎에서는 수 많은 진언嗔言 혹은 다라니는 그 자체로 신비한 고유의 ‘힘’이 있다고 하여, 진언이나 다라니를 외우는 것 만으로도 수행을 성취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반야심경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것도 주呪, 즉 다라니입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주呪에 대해 특별한 서두를 붙이는데, 대신주大神呪,대명주大明呪,무상주無上呪,무등등주無等等呪라 한 것입니다.

크게 신비한 주문(대신주), 크게 밝은 주문(대명주), 위없는 주문(무상주), 부처와 차별없는 경지의주문(무등등주)라는 서두가 붙은 것인데, 이 서두가 붙은 의미와 과연 다라니는 어떤 신비한 능력과 힘을 우리에게 주는지를 설명하기가 생각만큼 간단치가 않습니다.

우선「유가사지론」권 45에서 말하고 있는 네 가지 다라니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 째는 법法다라니로, 불법의 요체를 포함하고 있는 경전이 수없이 많은데, 보살이 염혜력念慧力을 얻어 그 힘에 의하여 이것을 기억하고 잊어버리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의義다라니로, 법다라니와 비슷한 것으로 불법의 깊고 깊은 의미를 한량없는 세월이 지나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주呪다라니로, 보살이 수행을 이뤄 자재自在함을 획득해서 여기서 나오는 주문呪文으로 가피를 얻고, 그 주문이 중생들에게도 액란을 없애는 영험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네 번째는 능득보살인能得菩薩認다라니로, 보살이 능히 수행을 이루어 지혜를 구족하고 선정禪定에 들어 부처님께서 설한 보살의 도리을 구하며 사유하는 것인데, 이러한 언설言說로는 다 할 수 없는 자기 깨달음의 본성의 자리를 말합니다.

이상의 「유가사지론」의 논지에 의하면, 한국불교는 다라니의 뜻을 거의 세 번째인 주呪다라니로만 해석하고 받아드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자료가 있습니다.
반야심경보다 후대에 만들어진「금강삼매경」진성공품眞性空品에도, “마땅히 이 법이 곧 마하반야바라밀임을 알아야 하나니, 이는 대신주요,대명주요,무상주요,무등등주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원효는 금강삼매경의 해설서인「금강삼매론」에서 ‘아주 다행히’ 이에 대한 주석을 해 놓았습니다.

원효는 이 부분을 깨달음(覺)의 단계와 결부시켜 해석하고 있는데, 바로 앞에 제가 원효의 기신론소에서 밝힌 깨달음에 대한 분석을 언급한 것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원효에 의하면,
첫 번째의 대신주大神呪란, 대신력大神力이 있어 삼마三魔(번뇌마,오온마,천마)의 원願을 항복시킨다고 합니다.

즉, 큰 신력으로 세가지 큰 골치거리 장애를 잠재운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의 대명주大明呪란, 대명조大明照가 있어 사안四眼의 경계를 두루 관찰한다고 합니다.

즉, 큰 비추어 봄(반야심경 시작부분 ‘조견오온’의 照見을 생각하십시요)을 얻게 되어, 육안肉眼,천안天眼,혜안慧眼,법안法眼으로 두루 보게 된다는 말인데, 부처의 안목인 불안佛眼은 빠져 있습니다.

또한 원효는 이 두가지를 등각위等覺位의 경계에서 설하는 도리라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의 무상주無上呪는 무상명주無上明呪라고도 하며, 불과佛果의 사지四智가 구족하고 오안五眼이 원만하여 법계를 두루 남김없이 비친다고 합니다.

즉, 부처님의 네 가지 지혜인 대원경지大圓鏡智,평등성지平等性智,묘관찰지妙觀察智,성소작지 成所作智를 다 갖추고 대명주에서 빠진 불안佛眼까지 더한 오안五眼이 원만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안에는 없고 오안에 들어있는 불안佛眼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이유를 아셔야될 것 같습니다.
이 오안은 금강경에도 나오는데, 불안佛眼만이 중생들에게 속속들이 이익을 줄 수 있는 방편의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의 이익이란 세속의 이익이 아니라, 깨달은 자로서 그 이치를 설하는 단계까지인 법안法眼으로는 할 수 없는, 상대도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궁극적 이익을 말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의 무등등주無等等呪는 무등등명주無等等明呪라고도 하며, 삼신三身으로 나타나는 무상보리無上菩提라 합니다.

즉, 법신,보신,화신으로 나타나는 깨달음의 진수라는 말입니다. 원효는 이 두가지를 묘각위妙覺位의 경계에서 설하는 도리라 말하고 있습니다.

원효의 주석을 정리 해보면 반야심경의 ‘대신주 대명주’는 보살의 지위에서 벗어나 부처의 지위에 가까운 등각위라는 경계에 해당하는 말이고, ‘무상주 무등등주’는 부처의 지위와 다름없는 묘각위에 해당하는 말이란 것입니다.

이쯤되면 ‘주’呪란 것이 흔히 알고 있듯이, 더욱 일부 스님들이 설명하듯 무조건 외우기만 하면 ‘부적 같은 효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야 반야심경의 전체의 핵심과 반야심경의 다라니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蜜多呪

<모든 고통을 제거하는 반야바라밀>

주呪에 대해 이렇듯 심도있게 언급한 지금까지의 반야심경의 흐름으로 보아서는 뒤이어 바로 다라니를 말해 주어도 될 것 같은데, 또 뜸을 들이며 ‘능히 모든 고통을 제거하고(能除一切苦), 진실되고 헛됨이 없고(眞實不虛), 그러므로 설하는 반야바라밀의 다라니(故說般若波羅蜜多呪)’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니 저도 마지막의 다라니를 설명하지 못하고, 이 부분의 설명에 발이 묶이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경전에서 허튼소리 하는 것은 보질 못했고, 더욱 법성게나 반야심경 같이 수 십, 수 백권의 경전을 불과 2백 여자로 압축한 경에서는 한 글자마다 깊은 연유가 있으니 그 뜻을 따라야 합니다.

능히 모든 고통을 제거한다는 말은 기복적祈福的인 의미로 고통을 제거해 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이 중생들에게는 오해의 소지를 부를 수도 있어, 초장에 제가 현장역의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의 고액이란 단어의 선택에 불만을 토로한 것입니다.
이제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고통을 제거해 주는(能除一切苦) ‘주체’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반야심경의 주인공인 관자재보살이시고, 우리들의 ‘해결사’ 관세음보살이라구요?
아닙니다.
나의 모든 고통을 제거해 주는 것은 관세음보살의 가피가 아니라, 관세음보살은 물론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의지한다는(三世諸佛衣) 반야바라밀인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면, 자식이 일류 대학 못 가 고통스러워 하는 중생에게 가피로 ‘합격하게 해주는’것이 아니라, 꼭 일류 대학에 합격해야 행복하고 그렇지 못하면 고통이란 ‘전도몽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효도 주석했듯이 반야바라밀이란 것이 내가 증득해야 하는 것이지, 누가 주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반야심경에서는 목이 타게 그 반야바라밀은 오온五蘊도 공, 사성제와 팔정도도 공, 12연기緣起도 공, 일체가 공空, 제법諸法도 공 함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라고 외치는 것 아닙니까?

이 같이 명확한 사항을 시중의 반야심경 해설서의 상당수가 관세음보살이 고통을 해결해 주는 주체이니,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또 부지런히 다라니(아제 아제…..)를 염송하라 합니다.

혹,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의 해설이라면 눈 감아 줄 만해도, 행여 반야심경의 해설이라면 터무니 없는 무지無知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굳이 가피를 들먹여야 하더라도 그 역시 관세음보살이 아니라 ‘반야바라밀의 힘’으로 설명해야 옳습니다.

대품반야경 권지품勸持品 제34에 이에 대한 ‘증거’가 있습니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받아 지니고 더욱 바르게 사유하면 자신의 실수로 독약을 먹고 죽는 일도 없고, 칼에도 다치지 않으며, 물이나 불의 위험에 떨어지지도 않고, 온갖 질병도 침범하지 못한다. 그러나 전생에 이미 지은 과보果報는 어쩔수 없다.
또한 교시가여, 관공서의 일에 있어서도 이 반야바라밀을 염송하는 이는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의 위력 때문이니라.”

--보세요, 분명히 반야바라밀 그 자체의 공덕과 위신력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하나 그냥 지나치면 안될 것이 있는데 ‘전생에 이미 지은 과보果報는 어쩔수 없다’고 구태여 언급한 점입니다.

이 말은 업業에 의한 과보는 언제인가라는 시간을 정할 수는 없지만 반드시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반야바라밀도 업에 의한 과보는 소멸消滅 시키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부처님도 업에 관해 “물에 던져진 돌이 가라앉지 않기를 기원한다고 이루어 질 수 없듯이, 자신의 업에 대한 과보는 피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기도만 하면 남편은 ‘승진 보장’, 아들은 ‘대학 합격보장’, 부모님은 ‘무명 장수’, 이미 돌아가신 조상님은 ‘천도 보장’이라고, 마치 기도상품 판매하듯 동참을 권하고 현수막을 걸어, 일년 내내 기도에 동참하면 세상사 다 해결될 듯이 ‘선전’하고 ‘유혹’하고 있으니 잘못되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스님들이 이런식으로 신도들을 잘못 이끈 덕택에 이제는 신도들도 기도에 동참하지 않으면 이제는 ‘불안감’을 느끼고, 더더욱 그러한 기도를 하지 않고 부처님 법을 충실히 전하고자 하는 절들은 오히려 신도들이 멀리하니, 신도도 잘못 이끌고 더욱 다른 스님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는 잘못된 스님들의 업의 과보야말로 다음 생에는 ‘물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돌’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불교 신도라고 해서 그런 잘못된 스님들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부처님의 일인 불사佛事가 아닌, 겉으로는 번지르한 해서는 안 될 불사不事를 벌여도 기둥과 돌에 이름만 새겨준다하면 앞을 다투어 돈을 내놔도, 정작 부처님 뜻에 따라 수행하며 세상일에 물들지 않고 모든 중생을 위한 진정한 불사佛事에는 생색이 나지 않는다고 거들떠보려고 하질 않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니 참으로 고약한 불교가 되어버린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제 말씀을 신뢰하는 불교 신도라면, 또 적어도 반야심경을 조석으로 염송하는 분이라면 그런 비불교적이고 ‘비반야심경’적인 신앙에서는 벗어나셔야 합니다.

 

 

<진실되고 헛됨이 없는 반야바라밀>

“수보리야, 항하강에 있는 모래 수와 같은 그렇게 많은 수의 항하가 또 있다면 네 생각은 어떠하냐. 이 모든 항하에 있는 모래가 많겠느냐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말하길,
“매우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다만 저 모든 항하만 하더라도 수 없이 많사온데 하물며 그 모래이겠나이까.”
”수보리야, 내 이제 너에게 실다운 말로 이르노니,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저 모든 항하강의 모래처럼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채워서 다 보시했다면 그 복덕이 많겠느냐 많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 내지 사구게 등만 받아 지니고 남을 위해 일러 준다면 이 복덕이 앞에 말한 복덕보다 뛰어나리라.”

금강경 제11 무위복승분無爲福勝分의 부처님과 수보리의 대화입니다. 금강경이 반야심경과 함께 반야부의 경전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 대목을 인용한 것은 아닙니다.

진실되고 헛됨이 없는(眞實不虛) 반야바라밀을 설명드리기에 안성맞춤이라 인용한 것입니다.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채워서 다 보시’했다 하더라도 그 보시는 결국은 닳아 없어지고마는 보시 중에서는 초보단계인 재물을 보시하는 재보시財布施이고, ‘이 경 가운데 내지 사구게 등만 받아 지니고 남을 위해 일러 주는 것’은 불법을 일러주어 그 한마디가 인因이 되어 깨달음을 이룰 수도 있는 법보시法布施가 되니, 재보시 보다는 법보시 쪽이 더 복덕이 크다 하신 것은 당연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보시 가운데는 무외시無畏施란 것도 있는데, 불안한 마음을 없애주는 법보시를 말합니다.

앞서 반야심경의 ‘무유공포’를 설명하며 불안과 공포의 제거가 오직 반야바라밀에 의해 가능하다고 말씀드렸는데, 그것을 여러분이 진정으로 받아들이셨다면 제가 무외시란 보시를 베푼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제 말씀이 ‘진실’이나 ‘헛되지 않은 것’인지 아닌지는 여러분의 판단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반야심경에서 반야바라밀에 의지하라는 가르침은 ‘절대 진실되고 절대 헛되지 않은 것’(眞實不虛)임을 의심하지마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반야심경의 이 가르침이 바로 아뇩다라샴막삼보리를 증득한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의지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되다’의 또다른 중요한 의미로 깨달음은 ‘실재적 진실’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의 가르침대로 공空과 반야바라밀을 평생 닦았는데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이 없고, 마음이 달라지는 것도 전혀 감지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진실됨이 아닌 거짓이거나 삿된 것이 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이라는 깨달음의 한 형태는 분명 ‘실재’하기에 진실되다 한 것입니다.

여기서 혹 어떤 분이 ‘아니, 요즘 깨달음을 얻었다고 소문이 난 분을 내가 직접 만나서 말을 듣고보니 이치에 닿지 않는 소리도 하던데?’라는 의심이 들면 제 말씀을 의심하지 말고, 소문만 그렇게 난 분을 의심해야 합니다.

더욱 타종교를 믿는 분이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존재하지 않는데, 그저 도달할 수 없는 최고의 목표인 종교적 상징에 불과하다’ 라는 의심이 행여라도 들면 밖에서 ‘입질’만 하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 직접 평생 수행해 본 다음 명이 다해 죽기 직전에 ‘한마디’하면 그 말은 ‘진실’일지도 모릅니다.

그 다음 ‘헛되지 않은 것’(不虛)이라는 말은 어찌 이해하여야 할까요?

저는 절에서 부처님 공양 축낸지 올해로 28년 째인데도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내가 죽었는데 사후의 세계도, 윤회도 과보도 없다면 어찌할 것인가?
정말 그렇다면 죽은 후 ‘생각’ 자체도 없겠지요.
그러니 별로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 죽었는데 천당이고, 지옥 자체가 없다면 그 심정이 어떨까요? 죽은 후에도 신에 대한 배신을 느낄 수 있을까요?

반야심경의 해설법대로 말씀드리면, 그런 허황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종교는 모두 허황된 것이 아닌 진실만을 믿는 것일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불교나 기독교 마찬가지입니다.

석가모니나 예수는 진실되고 허황되지 않은 가르침을 주셨다해도, 그 분들을 등에 업고 그 분들의 제자라거나 뜻을 따른다는 명분 하나만으로, 선민選民 의식과 위선 속에서 자기 주제파악도 제대로 못하는 중들과 신부,목사들이 있는 한, 진실은 커녕 종교의 거룩함을 앞세운 ‘사기’를 당하지 않는 것을 다행히 여기게 될 날이 오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겁니다.

1997년 3월 마셜 애플화이트(Marshall Applewhite)란 인물이 이끌던 ‘천국의 문’ 이란 종교집단이 헤일밥 혜성이 지구에 다가왔을 때, 집단 죽음으로 그 혜성에게 구원을 청한 어처구니 없는 일이나, 1995년 3월 일본에서 일어난 ‘옴 진리교’에 의한 지하철 사린가스의 살포로 5천 여명의 무고한 시민이 사상死傷 당하는 상상하기조차 싫은 일들이 돌연변이 종교의 단 한번뿐인 과거의 사건일 뿐이라고 단언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믿음은 그것이 종교적 믿음이든, 사회적 믿음이든 허물어지는 일이 생기지 않을수록 행복한 것입니다.

반야심경에 말하는 ‘헛되지 않은 것’(不虛)의 의미는 그러한 면에서, 우리 모두에게 ‘세상의 가치’를 스스로 헛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물론 반야심경의 본래의 뜻은 반야바라밀은 절대 허황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반야바라밀의 다라니>
gate gate pāragate pārasamgate bodhi svāhā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

이것이 한역으로 소개되며,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이렇게 된 것입니다.
흔히 다라니 혹은 진언眞言은 ‘총지’總持(불법의 뜻과 신비한 힘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의미)라 하며, 그 본질적 개념은 만트라(mantra, 만다라)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대개 다라니나 진언은 풀이할 수 없는 것이거나, 풀이해서도 안 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잇습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의 다라니는 분명히 뜻을 새길 수 있습니다.

gate(가떼)는 ‘가신 분’이라는 말인데, 부처님을 지칭하는 다른 명호인 여래如來는 tathāgate(따따가따)에서 온 말로, tathā 여여如如하게 gate 가신 분이 됩니다.

그러니 gate gate(가떼 가떼)란 ‘가신 분이여, 가신 분이여’ 입니다.

pāragate(빠라까떼)의 pāra는 도度, 즉 ‘이르다’, ‘넘어가다’의 뜻입니다.

gate gate pāragate(가떼 가떼 빠라가떼)는 ‘가신 분이여, 가신 분이여, 넘어 가신 분이여’가 됩니다.
pārasamgate(빠라상가떼)란 ‘넘어서 완전히 가다’의 뜻입니다.

gate gate pāragate pārasamgate(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는 ‘가신 분이여, 가신 분이여, 넘어서 완전히 가신 분이여’가 됩니다.

bodhi(보디)는 ‘깨달음’이란 뜻이고, svāhā(스와하)는 ‘원하는데로 이루어지이다’라는 발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 bodhi svāhā(보디 스와하)는 ‘깨달음이 원대로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제 다라니를 합쳐보면,
gate gate pāragate pārasamgate bodhi svāhā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
‘가신 분이여, 가신 분이여, 넘어서 완전히 가신 분이여 깨달음이 원대로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대신주大神呪,대명주大明呪,무상주無上呪,무등등주無等等呪’의 뜻을 살려 서술적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가신 분이여, 가신 분이여, 대신력大神力과 대명력大明力으로 보살의 지위에 이르시고, 무상명無上明과 무등등無等等의 단계인 묘각위妙覺位와 부처의 경지와 대등한 등각위等覺位를 넘어서 완전히 피안의 저쪽으로 가신 분이여, 깨달음에 이른 분이여, 깨달음이 이루어지길 기원합니다’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자에 얶매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를 원음에 따라,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라고 하자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능히 모든 고통을 제거하고, 진실되고 헛 됨이 없는 반야바라밀의 주를 말하자면’(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蜜多呪卽說呪曰’이란 전제가 붙은 다라니로 막을 내리는 반야심경에서, ‘그렇기에’ 마지막 다라니만 염송해도 염송하는 사람이 다라니의 위신력으로 반야바라밀을 성취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대체적으로 탄트라 즉, 밀교적 영향을 강하게 받은 쪽에서는 다라니의 위신력으로 반야바라밀의 성취가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밀교적 성격이 강한 티베트 불교의 수장인 달라이 라마도 반야심경 해설에서 그렇게 주장했는데, 제 생각은 다릅니다.

반야심경의 다라니 부분은 말이 다라니지 사실은 앞서 밝혀 놓은 내용 전체에 대한 찬탄의 의미가 강하고 더욱 삼세의 모든 불,보살이 ‘반야바라밀’에 의지한 것을 강조 또 강조한 것이 반야심경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신 분이여, 가신 분이여…’ 라는 말을 되풀이해서 읽는 것보다, ‘반야바라밀’을 염송하며 반야바라밀의 참 뜻을 새기는 것이, 오히려 반야심경의 격에 맞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자력自力 신앙과 타력他力 신앙을 구분짓는 차이이기도 한 것입니다.

불교에서의 정토신앙 같은 타력신앙 자체를 매도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반야심경에서만은 타력신앙인 다라니 염송이 아닌 철저한 자력 신앙을 추구하고, 또 그렇게 실천하는 것이 반야심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자력 신앙의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이 반야심경이고, 자력이란 곧 ‘반야바라밀’의 성취에 있다는 것이 반야심경의 큰 가르침인 것입니다.

출처 : 놀이터
글쓴이 : xhsk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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