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기독교를 접할 기회가 참 많았었습니다.
중학교를 미션스쿨인 경신중학교를 나왔는데
중1에는 구약을, 중2에는 신약을, 중3에는 교회의 역사를 성경시간에 배웠습니다. - 강제로 ㅠㅠ
수업시간이었으니 당연히 시험도 봤구요...
또한 대학도 기독교 계통의 대학을 나왔고
유학 기간에는 주변 분들의 90% 이상이 기독교인이셨습니다.
(유학 생활을 하다 보면 타국에서 어려운 일을 겪게 마련이고 그래서 의지할 곳이 필요해서 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교회를 다녔습니다. 또한 교회는 총각들에게는 점심 한끼를 해결하고 한국 분들을 만날 기회도 되었구요.)
덕분에 저는 그래도 제법 교회를 많이 가 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때 당시 이해가 안 되었고 물론 지금도 이해가 안되는 기독교의 주장은 한둘이 아닙니다. ^^
한번 대표적인 몇 가지만 정리해 볼까요?
1.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있는가?
기독교에서는 신이 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 신은 시간과 공간도 창조를 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신은 시간의 처음과 끝을 다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미 내가 어떤 행동을 할 지가 다 결정되어 있다는 것인가요???
상황이 이렇다면 내게는 자유의지가 존재할까요?
만약 아니라면 (다시 말해 기독교의 신이 제가 어떤 행동을 할 지 모른다면)
신은 전지한 존재가 아닙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 들어 있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시간을 창조한 더 큰 신이 필요합니다.
사실 기독교의 신은 전지진능한 존재가 아닌 것으로 성경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4장 24절에는 '질투의 신'이란 표현도 등장합니다.
만약 기독교의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질투란 말도 안되는 일이겠지요.
어쨌든 기독교에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래야 말이 되니까요... 그게 자신들의 논리와 상충되더라도 '믿음'으로 극복합니다.
불교에서는 이 부분을 어떻게 처리할까요?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누가 시간과 공간을 '창조'했다고 할까요?
부처님께서는 우주의 시작을 정확히 짚어주시지 않습니다.
(무기하십니다. 물어도 대답을 하시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세존께서는 그런 '흥미로운' 생각에 빠져서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을 '희론(papañca)'이라고 하며
희론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제가 이해한 대승불교에서는 우리가 이 세상을 만든 주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우리'라는 개념이 일반적인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잊고 있으며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진리' 자리 혹은 불성입니다.)
부처님께서 진리를 찾아 수행하신 이유는 인생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서 논리를 세워 논쟁을 하는 것을 삼가하라 하셨습니다.
또한 세존께서 깊은 선정에서 아신 것을 중생에게 가르쳐 준들
그걸 스스로 확인하지 못한 중생은 결국 상상하고 논쟁을 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처음을 안다고 해서 내 인생의 괴로움이 풀려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우리에게 내 존재의 괴로움 문제에 집중하라고 알려주셨습니다.
2. 원죄
중학교에서 성경을 배우면서 제 마음속에 가장 반발을 불러 일으킨 개념이 '원죄'란 개념입니다.
저는 아담이 누군지 이브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기독교의 논리대로라면 제 조상이겠지요.)
그들의 잘못이 내 핏속에 흐른다는 논리는 받아들이기 어렵더군요.
이 문제는 결국 나란 존재는 누구이고 언제 만들어진 피조물인가하는 문제에 직결됩니다.
기독교의 피조물인 인간은 한번 태어나면 영원히 사는 존재입니다.
인간이란 하나님이 창조했고 단 한번의 세상 살이가 있으며
그 인생에서의 믿음이란 행위를 통해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고 주장하십니다.
마치 수능같은 것이죠! ^^ 그런데 잔인하게 재수는 허용이 안됩니다!^^
이런 기독교의 주장은 한마디로 논리가 없습니다.
'나는 왜 이런 주변환경을 가진 가정에서 태어났을까?'하고 묻는다면
그저 신의 뜻일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존재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원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에는 윤회란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윤회를 인정했었다고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시대에 기독교 교리 정리를 하면서
'이번 생에 안하면 다음 생에 한다!'라는 게으름 혹은 나태함이 발생할까봐
그 내용을 삭제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그러한 구체적인 내용을 이 글 말미에 붙여 놓았습니다.)
불교에서는 전생의 업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서로 역할을 달리하며 육도를 윤회하며 계속 살아오는 존재입니다.
각 생에서는 마치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듯이 삶의 드라마가 펼쳐지고
그 내용이 다음 생을 결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현재의 내 모습이란 과거 전생에 영향(과보)을 받은 모습입니다.
아마도 기독교의 원죄는 이러한 전생의 업이란 개념이 '거친 모습'으로 기독교화된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렇다면 불교는 오직 업 밖에는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는 조건지워 발생하는 (연기하는) 업을 극복하는 것이 그 목표입니다.
연기하는 업의 삶이란 괴로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여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 방법을 현생 인류에게 최초로 알려주신 분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신 것입니다.
업장 소멸에 대해서는 이미 앞 글 '참회란 무엇인가?'에서 설명드렸습니다.
나라는 생각에서 풀려나는 것, 그것이 업장 소멸이고 참회입니다.
앙굴리마라와 같이 끔찍한 살인자 조차도 생각에서 풀려남(無念)으로서 열반에 도달합니다.
3. 예수님의 죽음과 구원
기독교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서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셨다고 합니다.
저도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
이런 논리에도 문제점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게 되는 이유는
제자 중에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내재된 문제는 '대체 누가 세상을 구원했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위 논리는 만약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았다면 세상은 구원되지 않았다는 말도 됩니다.
그렇다면 유다의 배반이 세상을 구원한 것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의 배반은 최소한 세상 구원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의적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길 원하지 않으신 것인가요?
예수님은 스스로 '인류' 구원의 길을 선택하지 않으셨고
가능하다면 피하려 했지만 피할 수 없었고 결국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대비가 되는 대승 불교의 인물은 지장보살님이십니다.
깨달음은 얻으셨지만
'지옥중생을 다 구할 때 까지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십니다.
또 하나의 질문은 왜 구원이란 꼭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까요?
예수님의 죽음은 마치 고대 희생제를 떠오르게 합니다.
양이나 소를 제물로 바쳐서 강력한 신의 호의를 얻으려는 모습이 연상되지 않나요?
그런데 이번에는 짐승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니 그 '제물'의 가치란 어마어마한 것이겠죠.
예수님은 제자의 배반에 의해서 죽음에 이르시게 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배반을 한 것입니다.
만약 유다가 예수님을 '진정한 독생자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다면 어떻게 배반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근 거리에서 보좌하던 수제자 중에 한 명이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거는 문제가 심각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또한 문제가 많습니다.
죽음을 경험하시고는 다시 살아납니다.
그런 연후에는 어디로 가실까요?
하늘 나라로 갑니까?
부활한 육신이 어디로 갔냐는 말입니다. 그 부활한 육신은 늙고 죽지도 않나요?
그리고 하늘나라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지구 말고 우주에 따로 존재하는 곳입니까?
아니면 영적인 곳입니까?
만약 영적인 곳이라면 대체 왜 육신의 부활이 필요할까요?
만약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면 육신의 부활이란 허망하기 그지 없는 것 아닐까요?
불교에서는 세상의 구원이란 '나라는 존재'에서 풀려남입니다. 해탈이고 열반입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남이기도 하지만 또한 세상에서 말하는 기쁨에서도 벗어남입니다.
그러한 벗어난 자리를 진리라고 합니다.
괴로움과 기쁨이란 모두 연기된 조건지워진 것임을 알고
그것이 있게 된 전생의 업장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부처님 제자중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저버린 제자들이 니까야에는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제자들은 대부분 감각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수제자들은 모두 아라한이시며
부처님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했습니다.
‘생겨나고 생성되고 형성되고 부서지고야 마는 것을 두고 부서지지 말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여래는 3개월 뒤에 완전한 열반에 들겠다. 여래가 목숨을 위해 다시 그것을 돌이키려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초기 기독교에 윤회가 있었다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인터넷에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날 기독교회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전생과 윤회를 부정하게된 것은 서기 400년경에 존재하던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전생이나 윤회에 대한 말씀들이 왕권을 약화시킨다는 이유로 모두 삭제해 버리고 전생이나 윤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기독교의 교리로 규정해놓은 것이다.
이때부터 성경에 기록된 전생과 윤회의 말씀들이 사라지게 되었고 기독교는 지금까지 전생과 윤회를 부정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전생과 윤회가 사라지게된 동기와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초기 기독교에서는 전생이나 윤회가 성경 여러 부분에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회 신학에서 당연시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최초(서기2세기경)에 기독교의 학교를 설립했던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us; Justin Martyr, 서력 100년~165년 경)는 환생을 가르쳤고, 그리스의 신학자 오리게네스(Origenes; Ὀριγενες, 185년 경 - 254년 경)와 히에로니무스(St. Hieronimus), 성 아우구스티누스 (St. Augustinus),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St. Clement of Alexandria: c.150 - c.215)도 환생설을 가르쳤다. 당시의 크고 강력했던 기독교 종파인 그노시스파(영지주의)와 마니교도들도 윤회설을 가르쳤다.
이처럼 초기 기독교 이후 약 400년동안은 환생이나 윤회설이 기독교의 보편적인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종교와 정권이 결탁하면서,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영혼의 구원이 가능하다면 교회와 황제의 권위가 없어진다는 정치적 우려 때문에, 윤회에 따른 영혼의 '선재론(先在論)'을 교회신학에서 모두 삭제해 버린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하나님과 왕의 권위만 생각했을 뿐,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진실이 왜곡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모두 무너진다는 것과 또한 그것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큰 범죄행위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280~337) 대제는 신약성경에 실려 있던 윤회에 대한 언급들을 모두 없애기로 결정하고, 서기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후에 모든 복음서에서 환생을 암시하는 구절들을 완전히 삭제해 버린 것이다.
그 후 6세기경 동로마제국의 폭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독단적으로 윤회설을 이단이라고 결정하고 서기 553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하여 환생사상을 가르쳤던 오리게네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한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그의 아내는 윤회사상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을 신격화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 서로마 제국에서는 오리게네스의 윤회설이 널리 퍼져 기독교들에게 인정받고 있었다. 이때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환생설을 신봉하던 교파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과 탄압을 시작하였고, 따라서 기독교가 지배하던 서양에는 환생설이 공식적으로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