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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我의 淵源 硏究
東國大學校 佛敎大學院 佛敎學科
張 銀 化
2005
目次
Ⅰ.緖言···················································································································1
1.연구의 목적 ·······································································································1
2.연구의 방법 및 범위 ·······················································································2
Ⅱ.古代印度의 思想························································································4
1.印度原住民의 종교 ·························································································4
2.우파니샤드 哲學·······························································································?
1) 우파니샤드의 아트만論··························································································· 6
① 우파니샤드의 형성 ····················································································6
② 우파니샤드의 아트만 ················································································7
2)우파니샤드 철학자들의 사상 ····································································13
① 웃다라카의 有論······················································································13
② 야쥬나 발키야의 아트만論····································································15
3)상캬와 요가학파 ··························································································16
4)바이세시카와 니야야 학파 ········································································17
3.자유 사상가들 ·······························································································19
1)轉變說과 積聚說························································································19
2)六師外道······································································································20
3)業報否定說··································································································23
① 自在化作因說····························································································24
② 宿作因說····································································································24
③ 無因無緣說································································································24
Ⅲ.初期佛敎의 無我論·······················································································26
1.初轉法輪의 無我사상 ·····················································································26
1)中道··············································································································26
2)四聖諦와 八正道························································································29
2.『阿含經』의 無我說·····················································································33
3.숫타니파타와 法句經의 無我說···································································39
4.『밀린다 왕문경』의 無我理論···································································43
5.아비달마 불교의 我空法有···········································································46
Ⅳ.『中論』에서 보는 ‘無我’와 ‘緣起’···············································54
1.『中論』의 성립 배경 ···················································································54
2.緣起의 無我·····································································································55
V. 結語················································································································61
참고 문헌 ·············································································································64
ABSTRACT············································································································68
Ⅰ.緖言
1.연구의 목적
불교에서 三法印이라 일컬어지는 ‘諸行無常’,‘一切皆苦’,‘諸法無我’는 四法印이 되기도 하는 ‘涅槃寂靜’과 더불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라 할 것이다.無常·苦·無我의 敎說을 따라가면 불교의 중심이 되는 ‘緣起’의 法則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 난다’라는 ‘연기법’은 ‘形象이 있거나 形象이 없거나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緣起로써 存在한다는 것이다.연기로써 존재하기 때문에 實體가 없는 ‘無我’이다.
즉,연기를 통해서 無我를 깨닫게 된다.
이 ‘無我’의 뜻과 내용을 時代별로,經典에 따라,그리고 現代의 해석을 통해 깊게 探究해 보고자 한다.
불교에서의 자아에 대한 考察은 고대 인도의 종교나 우파니샤드 철학사상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석가모니 부처님 탄생 전후의 인도 사상들과 불교는 부단하게 思想的·時代的으로 연결되어 있다.또한 부처님 入滅 이후의 部派佛敎 敎壇의 이론은 다음 初期 大乘 思想으로 그 脈을 이어간다.
불교의 大 命題로서 석존에 의해 설해진 無我의 가르침이 이어져 내려온 淵源을 追求하고 無我이론이 사상사적으로,교학적으로 위치하는 곳들을 살펴 보려 한다.
이렇듯 無我의 淵源을 探究함에는 두 가지의 意味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無我說이 생겨난 背景과 根源이고,두 번째로 ‘無我란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한 부단한 考察로써 無我의 理論을 體系的으로 세세하게 定立해 보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2.연구의 방법 및 범위
‘무아’의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 탄생 전 후의 인도 사상들을 살펴보고,어떠한 문화적·시대적·종교적 배경에 따라 석존의 出家가 이루어졌는지,또 어떤 깨달음과 가르침의 傳授가 있었는지를 敍述하려고 한다.
또한,인도사상의 根柢에 자리잡고 있던 우파니샤드 철학의 ‘아트만론’을 그 시대의 주요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각각의 觀點을 論하려 한다.인도의 우파니샤드 사상이 興起하던 무렵인 기원전 8세기에서 3세기 사이의 오백여 년간은 철학과 사상의 探究가 至大했던 시기로서 그리스,중국,인도 등 주요 文明圈에서 宇宙의 原理에 대한 탐구나 哲學的 思索이 큰 관심거리였다. 다음으로 초기불교경전의 無我論을 살펴보려는데,阿含經을 중심으로 숫타 니파타,밀린다 왕문경,法句經의 내용을 언급할 것이다.이 경전들은 석존의 초기 설법들의 資料로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무엇보다도 석존의 直接的 敎說에 가장 가깝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入滅 이후,분열된 부파불교의 하나로서 ‘我空法有’를 주장했던 說一切有部의 法有論과 有部의 입장에서 본 無我사상,그리고 ‘我空法空’을 주장하며 법유론을 철저히 반격한 龍樹의 ‘中論’도 깊이 考察해 보고자 한다.
초기 대승불교로 넘어가는 분기점이 되었던 ‘중론’에서는 부처님께서 설 하신 十二緣起說의 相依性에 중점을 두고,無我,空을 논증할 것이다.
본 考에서는 초기 불교에서 석존의 직접적인 言說로써 비롯된 無我의 淵源을 그 배경이 되는 인도 사상으로부터 龍樹의 ‘中論’까지로 限定하고자 한다.
Ⅱ.古代 印度의 思想
1.印度 原住民의 宗敎
고대 인도에는 드라비다 족이라는 원주민이 수준 높은 文化를 가지고 있었다.인더스 강 유역의 모헨조다로,하라파 등의 유적들에서 고대 인더스 문명의 번영을 찾을 수 있다.이 도시들은 근대 도시와 다를 바 없는 도로망,상하수도 시설,높은 건물과 대목욕장을 갖추고 있었는데 기원전 2500년에서 1500년경까지 번영을 누리다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高度의 문명을 가졌던 이 시대 인도인들이 남긴 문자는 아직도 해독이 불가능하다.
아리아인들은 시베리아의 남북과 투르케스탄(Turkestan)등지에 살던 유목민이었으며 오늘날 서양인의 원조이다.그들은 유목민으로서 목초지를 따라 서부 아시아와 중앙 아시아 일대를 계속 이동하며 살았는데 기원전 1300년 경 일부는 이란지방으로,다른 일부는 인도 서북부의 인더스강 유역을 거쳐 펀잡 지방에 정착하게 되었다1).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침입한 것은 기원전 1500년경으로,인도의 원주민인 드라비다인들은 침략자들에 의해 노예계급으로 전락하였고,아리아인들이 지배하게 된 인도사회는 농경·목축과 더불어 상공업도 발달하였다.
또한 정복 민족으로서 원주민을 노예화시키기 위한 사성 계급 제도가 이때에 확립되었다.4階級은 職能에 의한 분류로 확정되고,여기에 권리와 의무가 따르게 되면서 고정화된 것이 카스트 제도이다2).신을 제사지내는 바라문 계급(Brahman),군대의 통솔과 정치를 담당하는 크샤트리아(Kshatriya),농경·목축·상업에 종사하는 바이샤(Vaisya),그리고 위의 세 계급에 봉사하는 노예계급인 수드라(Sudra)이다.브라만은 카스트의 제일 위의 계급으로서 신에게 제사 지내는 의식을 담당한 사제들이다.이들이 신을 찬양하고 경건하게 예배 드리는 법식을 집대성한 경전이 바로 리그베다(RigVeda)이다.
1)정태혁,『인도철학』(학연사,2003),p.17.
2)위의 책,p.22.
인도 원주민을 정복한 아리아 인들이 전쟁의 승리와 자연의 신비경에 대한 경외를 노래한 찬가를 한데 모은 것을 베다(Veda)라고 한다.자연을 조화롭게 하는 어떠한 인격자를 상정하고 점차 신격화하여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이 믿음은 그대로 종교 현상이 되었는데,아리아인들의 전통적인 사상과 종교는 바로 베다(Veda)에 근거하고 있다.
‘리그베다’란 총 1,028개의 찬가로 구성된 종교문헌인데,주로 암송에 의해 전해졌다.그 내용은 신에게 찬가를 바치고 찬사를 보내며,그로 인해 현실에서의 행복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3).‘리그베다’의 종교는 다신교인데,자연계의 배후에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상징적인 지배력을 신격화해서 숭배의 대상으로 한 것이다. 대표적인 신들로는 자비로운 하늘의 신 바루나(Varuna),천둥과 전쟁의 신 인드라(Indra),태양의 신 미트라(Mithra),불의 신 아그니(Aguni),영원한 믿음의 신 아디티(Aditi),풍요한 지상의 신 프리트비(Prithvi),새벽의 신 우샤스(Usas)등이다4).‘리그베다’는 신의 찬가뿐 아니라 인간성의 자유,세계의 근원과 천지 창조 등에 관한 철학적 사유를 망라한 인류 최초의 문학적 성전이다.
‘리그베다’의 신들은 대부분 자연계의 절대적 힘을 상징하며,명백히 다신교적이다.즉,신은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지하는 절대적 존재이고 인간은 경건하게 예배하고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런데,‘리그베다’의 후기에 이르면 이러한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가 시작된다.
3)나카무라 하지메,김용박재권 공역,『인도사상사』(서광사),p.18.
4)앞의 책,p.19.
2.우파니샤드 철학
1)우파니샤드의 아트만論
① 우파니샤드의 형성
석가모니 부처님 탄생 전후의 인도 사회는 우파니샤드라는 거대한 철학적 사조 하에 있었다.
‘우파니샤드’의 뜻은 ‘제자가 스승 바로 아래 아주 가까이 앉아 전수받는 지식’이라는 의미였다.그런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깨달은 스승들의 가르침을 집대성시킨 문헌’을 우파니샤드라 지칭하기에 이르렀다5).
고대 인도인들은 인간과 자연,그리고 우주의 진리 등을 추구하고 깊이 성찰하였다.
자연 현상에 대한 경외심으로 숭배하고 제사 지냈던 사람들은 형식적인 의식 중심의 종교 행위에 점차 의심을 하게 되고,우주와 인생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神觀이 필요하게 되었다.자연적 관심에서 인간의 문제로,신에 대한 논쟁에서 인간의 문제로 탐구의 주제가 바뀌었다.
새로운 철학 사상을 담고 있는 ‘우파니샤드(Upanişad)’가 이 때에 편찬되었다.이 시기는 기원전 1000년에서 기원전 800년경으로,‘우파니샤드’에서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종속적이기 보다는 수평적으로 해석하였다.‘우파니샤드’에 나타나는 철학적 특색은 梵我一如의 사상이다.초기 베다 문헌에서 시작된 우주 생성의 원리에 대한 추구가 정점을 이룬 것으로,우주의 근원인 브라흐만이 개인에 내재한 아트만과 동일하다고 하는 사상이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인간의 행위를 선악이라는 도덕적 기준을 적용시킨다.
그리하여 전생의 업에 의해 현생의 과보를 만들고,현생의 업에 의해 미래가 결정되는 輪廻轉生의 사상을 발전시킨다.이 윤회설의 성립은 불교보다 2‐ 3백 년 앞선 것이다.
초기의 주요 우파니샤드가 형성된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 사이는 세계 철학계와 사상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이 시기에 그리스,중국,인도 등 당시 세계의 주요 문명권에 살고 있던 철학자와 사상가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 우주의 원리에 관해 깊이 사고했던 것이다.6)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한 시기의 이러한 사회적·시대적 배경은 불교의 기본적 토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불교용어라고 생각하는 涅槃,三苦,輪廻와 業 등도 알고 보면 불교 고유의 것이 아니다.우파니샤드 사상과 불교 사상은 그 뿌리를 共有하고 있는 셈이다7).
또한 불교의 無我說도 우파니샤드의 아트만론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그 特性을 把握하기가 어렵다.
인도철학과 불교는 다 같이 인도라는 동일한 풍토와 思惟構造 속에서 발생하였으며,동일한 가치를 追求하면서 傳統과 反 傳統으로서 절대적으로 관계하며 발전하였기 때문이다8).
5)석지현 옮김,『우파니샤드』(일지사,2004),p.11.
6)이재숙 옮김,『우파니샤드 I』(한길사,2005),p.32.
7)앞의 책,p.24.
8)권오민,『인도 철학과 불교』(민족사,2004),p.5.
② 우파니샤드의 아트만
우파니샤드의 주된 관심사는 世界와 自我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온갖 다양한 세계의 궁극적 본질은 무엇이며,‘나’란 어떠한 존재인가?
그리고 나와 그 같은 궁극적 본질과의 관계는 무엇인가?9)
우리는 어디에서 생겨났는가
누구로 인해 우리는 살아있는가
최종의 순간에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 설 것인가10)
우파니샤드 철학에서는 범아일여에 입각한 ‘아트만론’,즉 ’我論’을 가지고 있었다.우파니샤드에서 최고의 실재는 ‘브라흐만’(또는 ‘아트만’)인데 나,즉 아트만은 宇宙의 根本 原理이자 實在인 브라흐만과 一體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주의 나를 브라흐만이라 하고 個體로서의 나는 아트만이라는 것이다.즉,梵我一如의 철학이다.‘아트만’이라는 것은 원래 ‘호흡’을 의미하는 말이었지만 후에는 ‘생기’,‘신체’,‘자신’의 의미가 되었다.그리고 아트만의 철학적 개념은 ‘생명원리’,‘자아’,‘자기’,‘영혼’,‘본체’,‘만물에 내재하는 영묘한 힘’을 나타내는 술어가 되었다.그래서 아트만에 의하여 世界 創造가 이루어졌고 동시에 아트만을 認識해야 한다고 하는 사실이 반복하여 强調되고 있다.
우파니샤드의 중심사상은 아트만과 브라흐만의 同一說,즉 범아일여이다.根本原理를 브라흐만이라고 하거나,아트만이라고 하거나,혹은 푸루샤라고 하거나 프라나,사트,아크샤라(akśara)라고 하거나 간에,명칭의 다름이 있을 뿐으로 모두가 우주의 절대자로서 근본 원리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 중에서 오직 브라흐만과 아트만이라는 명칭만이 가장 유력하게 되었는데,명칭의 선택이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명칭으로 불리어지는 원리가 중요한 것이다.우파니샤드의 학자들이 證得하려고 노력한 것이 바로 이 原理이다.이것은 마치 흙의 本質을 알면 흙으로 만들어진 모든 그릇을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이면서 一切,相對를 떠나고 있으면서 근본 원리로서 움직이고 있는 그 힘은 이미 경험세계에서는 알 수
없는 것으로,이것을 말로 표현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것으로 여겼다11)
브라흐만은 이 모든 존재들을 창조한 다음,그 자신의 분화력을 통해서 스스로를 무수히 분화시켜 다시 그 피조물들 하나하나 속으로 들어가 그 피조물들의 영혼(아트만)이 된 것이다12).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브라흐만이며
아트만은 곧 브라흐만이다13)
그것은 볼 수도 없고,들을 수도,생각 할 수도 없는 궁극적 실재 바로 그것이다.브라흐만 혹은 아트만으로 일컬어지는 ‘세계 근원에 관한 지식’은 결코 언어로 드러날 수 없으며,다만 瞑想을 통해 직관·통찰 될 뿐이다14).
중국 宋代에 나타난 看話禪法에서 말하는 話頭의 원형은 인도의 리그베다에서 말하는 一者 혹은 唯一者로서 무엇인가 신비로운 것으로서 존재도 비존재도 아니며 死도 不死도 아닌 것이었다.우파니샤드에서는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말로 설명할 수도 없으며 마음으로 思惟할 수도 없는 그 무엇이라고 하였는데,훗날 아트만이나 브라흐만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불리우면서 여러 가지로 설명되기도 하였으나 이는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이해되는 것이라는 主張이 나오게 되었다15).
궁극적 실재는 우리의 불완전한 이해의 次元으로는 바르게 認識할 수 없다는 것이 우파니샤드 저자들의 信念이다.인간의 마음이란 단지 실재가 비추어지는 거울에 지나지 않으므로,우리가 실재를 아는 정도는 우리 마음의 狀態에 달려 있는 것이다.새로이 창조하는 것이 아닌 원래 있는 것을 발견하여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16). 우파니샤드 에서는 ‘진짜 나’에 대한 탐구가 사색의 중심주체가 되는데,‘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 물그릇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진짜 나라고 생각하는 수행자의 탐구 과정이 나온다.그 수행자는 물그릇이 깨어지면서 함께 사라지는 것은 진정한 자기가 아닐 것으로 생각하고 ‘나’에 대한 탐구를 계속한다17).
인드라가 말했다.
“존경하는 조물주 아버지,이들을 보기 좋게 꾸미면 그 아트만도 보기 좋게 꾸며지고,이 몸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으면 그 아트만도 아름다운 옷을 입게 되고,이 몸을 깨끗이 하면 그 아트만의 몸도 깨끗해진다면,이
몸이 장님이 되면 아트만도 또한 장님이 되고,이 몸이 절름발이면 그 아트만도 절름발이가 되고,이 육신이 없어지면 아트만도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까.저는 그런 아트만을 아는 것으로 흡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쁘리자빠띠가 말했다.
“인드라여 네가 옳게 생각했구나.내가 너에게 다시 그 아트만에 대해서 설명하리라.”18)
또 <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에서는 그 自覺力에 따라 아트만을 네 단계로 구분한다19)
첫째는 잠 깬 상태인데,감각의 세계로서 日常生活을 통해 자신의 감각기관으로 객관적 사물들을 자각하는 차원이다.
둘째는 꿈꾸는 상태이다.이것은 이미지의 세계로서 잠 깬 상태에서 사물들을 지각했던 그 기억들을 根據로 자신의 주관이 섞인 꿈을 통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9)앞의 책,p.85.
10)이재숙 옮김,『우파니샤드I』(한길,2005),<슈베따슈바따라 우파니샤드>I.1,p.423.
11)정태혁,『印度哲學』(학연사,2003)pp.125-126.
12)석지현 옮김,『우파니샤드』(일지사,2004),p.18
13)이재숙 옮김,『우파니샤드I』한길,2005),<만두까야 우파니샤드[2]>,p.214.
14)권오민,『인도철학과 불교』(민족사,2004),p.84.
15)최현각,『깨달음에 대한 禪的一考』(불교학보 36,1999).
16)라다크리슈난 /이거룡 옮김『인도철학사I』(한길사,2005)pp.354-355.
17)정승석,『상식에서 유식으로』(정우서적,2005),p.42.
18)이재숙,『우파니샤드I』한길,2005),찬도기야 우파니샤드>제 9편 [2]
19)석지현 옮김,『우파니샤드』(일지사,2004),p.20.
"그곳(꿈의 세계)에는 마차가 없고,마차에 끈을 맨 짐승도 없고,그 마차가 가는 길도 없지요.그러나 그는 마차와 짐승과 길을 만들어냅니다.거기에는 희열도,기쁨도,즐거움도 없지만 그가 희열과 기쁨과 즐거움을 만들어냅니다.거기에는 물웅덩이도 없고,연못도 없고,강도 없지만,그가 물웅덩이와 연못과 강을 만들어냅니다.그러니 그는 ‘만들어내는 자’이지요20)."
이렇듯 꿈이 꿈 속에서는 현실이 되기도 하는 상황,현실조차도 꿈인지 아닌지 감히 確信할 수 없는 이러한 經驗은 『장자』제 2편 <齊物論>의 ‘나비의 꿈’에서도 나타난다.
"어느 날 莊周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문득 깨어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 수가 없다21)."
우파니샤드의 꿈꾸는 상태란 장자의 ‘나비의 꿈’,그리고 ‘삼국유사’에 나오는 ‘調信의 꿈22)’이야기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꿈속에서 만들어낸 幻像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셋째,깊은 잠의 상태는 무의식 세계로서 자신의 本性과 하나가 되어 깊이 休息하는 것이다.
"깊은 잠의 상태에 있을 때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그는 다만 생각하는 것을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그치지 않는 存在이기 때문입니다.이 상태에서는 그 이외의 다른 자가 없습니다.
그는 생각할 대상,그와 분리된 다른 존재가 있지를 않기 때문입니다23)."
이 단계의 상태를 다음과 같은 도표로 그려볼 수 있다.
<표 1>아트만의 네 단계24)
이 아트만의 탐구는 우파니샤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과제였으며,브라만과 아트만의 동질성에 대한 문제는 우파니샤드의 중심주제라 할 것이다.
이 전통은 후대의 원시불교에도 그대로 계승되었고 대부분의 인도철학학파들이 이 아트만설을 인정한 데 비해,불교는 이 아트만의 實體性이나 不滅性을 否定하였다25).
20)이재숙,『우파니샤드I』한길,2005),<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제 4장 3편[10].
21)오강남 풀이,『장자』(현암사,2005),p.134.
22)調信의 꿈;고려 때 승려 일연이 쓴 三國遺事제 3권,塔狀제4에 나오는 신라의 승려 調信의 하룻밤 꿈이야기.
23)앞의 책,<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제 4장 3편 [28]
24)석지현 옮김,『우파니샤드』(일지사,2004),p.23.
25)앞의 책,p.2.
2)우파니샤드 철학자들의 사상
① 웃다라카의 有論
萬有가 바로 절대자 브라흐만이며 다름아닌 우리들의 본체인 아트만이다.
그리고 이 아트만은 아주 크면서도 아주 작다는 사상은 웃다라카 아루니의 思想的 根本이다.“이 만유는 미세한 것을 본성으로 하고 있다.그것은 진실이다.그것은 아트만이다.너는 그것이다”라는 구절은 그의 아들과의 대화 중에 수 차례 반복된다.특히 “너는 그것이다”,“그대는 브라흐만이다”라는 구절은 우파니샤드의 사상을 가장 正確히 나타내는 3대 문장으로 유명하다.
웃다라카에 의하면,우주는 태초에 있어서는 有(존재,sat)뿐이고 唯一하며, 이것에 대립하는 제 2의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그는 無에서 有가 생기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有는 有에서부터만 生起한다고 主張했다.
그는 유론을 神話的으로 설명하는데,이 有가 우선 ‘나 많게 돼야지,번식해야지’라는 意慾을 일으켜 불을 처음으로 만들어내고,이어서 그 불이 같은 의욕을 일으켜 물을,그 물 또한 같은 의욕을 일으켜서 땅을 만들었다고 한다.
웃다라카는 진실한 자기는 아트만이며 有라고 하였고,우주의 진리인 有를 깨달으면 사후에 완전히 有와 合一한다고 하였다.『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는 웃다라카 아루니와 그의 아들 슈베따께뚜의 대화가 나온다.‘제 2 편’에서는
[1]총명한 아들아,처음에는 이 존재(sat)밖에 없었다.바로 이 하나 이외에 다른 것은 없었다…
[3]그 존재가 ‘내가 여럿이 될까,내가 태어나볼까’라고 원했으니,불로 태어 난 것이었다.그 불이 또 ‘내가 여럿이 될까,내가 태어나 볼까’하고 원했으니 거기에서 물이 생겨났다…
[4]그 물들이 ‘우리가 여럿이 될까,우리가 크게 태어나 볼까’하고 원했으니, 그들에게서 음식이 생겨났다.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든 비가 오면 음식이 많아진다.먹는 음식은 그 물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또 제 3편에서는,
[2]그 유일한 존재는 ‘내가 이들 존재가 될까’하고 원하였으니 그가 각각의 생물들 안으로 들어가 하나하나의 아트만이 되었다.그리고 그는 ‘내가 각각의 이름과 형태로서 밖으로 드러나야겠다’라고 생각했다.
[3]그리고 ‘내가 삼태(三胎)에서 태어나는 생물들 속에 세 겹으로 하나하나 존재해야겠다’하고는 그 유일한 존재가 각각의 생물체 안으로 들어가 각각의 아트만이 되었으며 각기 다른 이름과 형태로 밖으로 드러났다.26)
웃다라카는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한줌의 흙덩어리를 알면 그 흙으로 만든 모든 것을 알게 되며 모든 흙의 변형으로 만들어진 것들은 그것을 소리로 부르기 위해 다를 이름들을 붙인 것뿐,오직 흙만이 참 존재라고 하였다.또 한 조각의 금을 알면 그 금으로 만든 모든 것을 알게 된다 하였다.비록 명칭과 모양은 다르지만 그 중에 오직 금만이 참 존재이기 때문이다27)."
웃다라카는 그가 우주의 근본으로 주장하는 有(sat)나 아트만이 결국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을 말하려 하였다.
26)이재숙 역,『우파니샤드 I』찬도기 우파니샤드>(한길사,2005),pp.356-359.
27)앞의 책,<찬도기야 우파니샤드>제6장 1편 [4],[5].
② 야쥬나 발키야의 아트만論
야쥬나 발키야(Yãjňavalkya)는 ‘유론(有論)’을 주장한 웃다라카의 제자로서 부유한 바라문 출신이다.그는 마이뜨레이와 까뜨야야니 라는 두 아내에게, 출가하여 숲 속 수행자가 되겠다는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그러자 두 명의 부인 중 마이뜨레이는 그의 출가를 만류하며,자신에게도 永生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알려달라고 한다.야쥬나 발키야는 스스로 ‘偉大한 實在’라고 여기는 아트만의 존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편이 사랑스러운 것은 남편의 사랑스러움 때문이 아니라,그 사람 안의 아트만의 사랑스러움 때문에 사랑스러운 것이오,아내가 사랑스러운 것은 아내의 사랑스러움 때문이 아니라,그 사람의 아트만의 사랑스러움 때문에 사랑스러운 것이오.
아들이 사랑스러운 것은 아들의 사랑스러움 때문이 아니라,그 아들의 아트만의 사랑스러움 때문에 사랑스러운 것이오.
재산이 귀하게 느껴지는 것은 재산의 귀함 때문이 아니라,그 안에 든 재산의 아 트만의 귀함 때문에 귀한 것이오.
세상이 사랑스러운 것은 세상의 사랑스 러움 때문에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라,아트만의 사랑스러움 때문에 사랑스 러운 것이오.
아트만을 보고,듣고,熟考하고 또한 瞑想해야 하오,마이뜨레 이여,아트만을 보고,듣고,생각하고,앎으로써 모든 것을 알게 된다오28)."
야쥬나 발키야는 또다시 아트만의 존재를 說明함에 있어,그것은 소금이 물 속에 녹아 든 것과 같은 것이며 비록 우리가 물 속에서 소금을 잡을 수 는 없지만 물의 어느 부분을 맛보든 소금 맛이 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위대한 ‘아트만’이라는 존재는 끝이 없고 境界가 없이 意識으로 세상에 溶解돼 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그 아트만은 우리가 북을 칠 때,밖으로 나는 다양한 소리를 구별해 들을 수는 없지만 북이나 북채의 다양한 두들김으로 구별하여 들을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모든 다양성이 통일되어 하나가 되는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에 비유한 것이다29).
28)이재숙 옮김,『우파니샤드 II』(한길사,2005),<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4.1, pp.591-592.
29)앞의 책,p.594.
3)상캬와 요가학파
상캬 ‐요가(Samkhya‐yoga)는 당시의 諸學波가 결합된 형태로서,상캬 哲學을 根據로 하는 요가의 뜻으로 해석된다.우파니샤드의 梵我一元的인 우주론으로 이 세상을 설명하려고 하면 그 一元의 근원의 문제에 부딪치게 되어 결국 二元論的 實在論으로 되지 않을 수 없다.
一元論을 관철하려면 현상세계를 梵我의 幻影이라고 하거나,아니면 현상 세계의 실상은 브라흐만이나 아트만과는 다른 것이라는 二元論的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된다.오랜 시간의 思索 끝에 상캬 철학자들은 웃다라카의 思想을 비판적으로 개혁하여,웃다라카의 唯一한 實在인 有(sat)를 대신하여 物質과 精神의 두 실재적 원리를 만들어내게 되었다30).
이 학파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프라크리티31)를 비롯한 世界展開의 원리인 25諦를 명확하게 앎으로써 진실의 자아인 푸루샤32)만이 존재함을 확인하는 것이다.곧 日常 에서 經驗하는 自我가 진실의 자아가 아님을 洞察하는 것이다.지성이라든지 자아라고 하는,우리가 現實에서 경험하는 일체의 세계는 프라크리티가 展開한 것으로 관조자인 푸루샤의 빛을 받는다.고통과 속박의 근원인 프라 크리티를 벗어나,영원히 자유로운 푸루샤인 진실의 자아를 實現하는 것이다.상캬의 학파에서는 그 길을 찾기 위해 知識을 强調하였고,요가 학파는 <요가수트라>를 펴내게 되었다33).
일부 학자들은 불교가 단지 상캬의 원리들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라는 근거로서,상캬 철학에서 표방하는 네 가지 진리와 불교의 사성제가 서로 相應 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34)
30)정태혁,『印度哲學』(하연사,2003),pp.208-209.
31)프라크리티(prakrti,根本物質);모든 존재의 원질.
32)푸루샤(purusa,純粹精神);프라크리티의 전개를 바라보는 부동의 관조자.
33)권오민,『인도철학과 불교』(민족사,2004),pp.109-111.
34)라다크리슈난 /이거룡 옮김『인도철학사II』(한길사,2005),pp.293-294.
4)바이세시카와 니야야 학파
바이세시카 학파는 인도의 고전 六派철학 중에서 자연철학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학파의 대표가 되며,니야야 (Nyāya)학파와 깊은 관련이 있다.학파 성립 당시의 인도의 학풍이 形而下學에 주목하기 시작하였으므로,이 학파는 상캬 학파와 대립하여 일어났다.이 학파는 당시의 思潮에 따라서 베다주의를 排斥하고 일어난 順世派 등 육사외도나 불교의 설일체 유부의 사상도 일부 이어받았다35).
바이세시카 학자들은 세계 생성의 필연적인 원인으로서,실체·속성·운동이라는 구체적 존재와 普遍·特殊·內屬이라는 抽象的觀念的 존재를 말하고 있다.그러한 존재 가운데 첫 번째인 실체는 그 밖의 존재가 의탁하는 基體로 地,水,火,風,空間,時間,方位,自我,마음이 포함 된다.
속성은 색깔,맛,냄새,감촉,수,크기,인식,괴로움,즐거움 등 실체 에 內屬하는 一切의 性質,容量,狀態로 24가지가 있다.세계는 생겨나기 전에도 파괴된 후에도 언제나 브라흐만 혹은 프라크리티의 可能態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상캬의 因中有果說과 正面으로 對立한다.
바이세시카의 실재 은 전체로서 파악되는 개별적인 실체는 인정하지만 그것은 그 실체의 파악을 가능하게 하는 주관의 造作에 의한 개념이라는 것이다.그러나 불교에서는,일상적인 관행을 위해 만들어진 기준일 뿐인 언어로 표현된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바이세시카의 세계란 다양한 원인들의 결합이며,원인과는 다른 새로운 것인데,이 사상을 적취설,因中無果論이라고 한다.
바이세시카와 같은 계열인 니야야 학파에서는 참된 인식에 대한 論議를 위주로 한다.니야야(Nyāya)라는 말은 본래 理論,正理라고 하는 뜻이 있다. 그들은 올바른 인식방법에 의해 인식대상을 고찰하고 앎을 통해 해탈을 추구한다.인생은 無明 煩惱,業,生,苦의 순서로 이루어지는데, 고를 떠나 해탈을 얻기 위해 무명을 없애야 한다고 하였다는 설은 불교의 12연기설의 영 이다36).
니야야 학파 또한 바이세시카 학파처럼 자아란 個別的 實體로서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인식도 갖지 않는다고 하였다.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물론,그 인식으로부터도 벗어나야 解脫을 이룬다는 것이다37).
35)정태혁,『印度哲學』(학연사,2003),pp.256-257.
36)앞의 책,pp.273-275.
37)권오민,『인도철학과 불교』(민족사,2004),p.117.
3.자유 사상가들
1)轉變說과 積聚說
갠지스강 상류에 定着한 아리아인들은 점차 동쪽으로 移住하였다.땅이 肥沃하여 많은 농산물이 생산되고 물질적으로 풍부하고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物資가 풍부해지자 점차로 商工業이 발달하였고,그에 따라 소도시 중심의 群小國家들이 생겨났다.
都市가 발달함에 따라 社會構成의 變革도 일어났는데,사성 계급 중 크샤트리아의 현실적 지위가 格上되었다.또한 공업이나 무역이 繁昌함에 따라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된 바이샤 계급도 浮上하게 되는데,바로 불교 경전에서 長者로 불리는 이들이다.
한편 기존 바라문의 身分制度에 懷疑를 느끼고 우파니샤드 사상에 반발하는 革新 思想家들이 나타났는데,새로운 형태의 수행자인 沙門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베다 성전을 중심으로 한 바라문교에 대한 경외심을 잃고 시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갈망하고 있었다.바라문들의 타락과 위선적인 설법에 대항하여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는 自由 思想家들이 出現하였다.특히 경제적 변화에 따른 사상적,종교적 혼란의 시기였기에 이러한 도덕 파괴의 虛無論이 대중들에게 잘 받아 들여졌던 것으로 보인다.이 도덕부정론 등의 새로운 사상들은 그 시대의 문헌상으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지만 상당한 기간 동안 많은 追從者들을 거느렸다는 점에서 재해석 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三界와 六道를 윤회한다는 윤회설은 이미 불교보다 2‐3백년 앞선 우파니샤드 시대의 이론이다38).이 이론에 따른다면,‘윤회의 주체가 무엇인가’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바라문 교에서는 우주 만물이 근본 원리인 브라흐만으로부터 전개된다는 轉變說을 주장하였다.이러한 일원론적인 바라문교와 달리,이들 신흥 사문들은 積聚說을 주장하는데,바로 세계나 인간은 다수의 요소로 구성되고 이 요소는 不變의 實在라는 主張이다39).
그러나 적취설과 극단적 단견,그리고 업보·윤회부정설 등은 高等한 人間의 理想인 해탈과 열반,不死에 대한 보편적 이상을 합리적으로 이해시키지 못하였다40).
沙門들에 의하면,우주의 본체는 창조주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본래 몇 개의 요소들의 모임과 헤어짐에 의하여 세계가 生成·消滅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요소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苦가 있을 수 밖에 없는데,이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극단의 苦行을 통한 修行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38)미즈노 코오겐/동봉 옮김,『원시불교』(진영사,1988),p.56.
39)히라카와 아키라/이호근 옮김,『인도불교의 역사』上,p.35.
40)김미숙,『초기불교 무아설의 敎義연구』(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석사학위논문),p.16.
2)六師外道
당시의 사문으로서 六師外道가 있는데,각 교단의 통솔자로서 존경을 받고 있었다.다음은 그 여섯 사람으로
① 푸라나 카사파 (PũranaKassapa)
② 마칼리 고살라 (MakkhaliGosãla)
③ 아지타 케사캄바린 (AjitaKesakambalin)
④ 파쿠다 카차야나 (PakudhaKaccayãna)
⑤ 산자야 벨라티풋타 (SãnjayaBelaţţiputta)
⑥ 니간타 나타풋타 (NiganthaNãtaputta)이다.
이들 여섯 명의 사상가들은 자이나 교의 니간타 나타풋타 외에는 따로 기록된 文獻이 없기 때문에,초기불교의 『장아함경』권 제 17의 <沙門果經>을 근거로 알려져 있다.
첫 번째 푸라나 카사파는 선악의 果報를 否定하는 도덕 부정론자였다.다른 사람을 괴롭히거나 죽이거나 도둑질하는 등의 과보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마칼리 고살라는 세계는 어떠한 원인이나 근거 없이 다만 그 自體로서 존재할 뿐이라고 하였다.그는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영혼·지·수·화·풍·허공을 설정하였고,획득과 상실,괴로움과 즐거움,탄생과 죽음 또한 이미
정해져 있다는 運命論의 입장을 취한다.마칼리는 인간의 自由意志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선인선과·악인악과라는 것도 없다고 하였다.후에 ‘아지비카(Ajivika)파’로 불리며 아쇼카왕 이후로도 오래 維持되 었다는 소위 順世파에 대해 석존은 ‘세상에 미혹과 해악만을 가져다 주는 자’라고 하였다.
세 번째의 아지타 케사캄바린 또한 업보윤회를 부정하였다.그는 唯物論者로서 ‘선악업이라 하는 것도,그 과보라는 것도 없다.今世도 없거니와 來世도 없고,어머니와 아버지도 없다.바른 수행과 바른 노력으로써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도 없거니와 해탈하였다고 하는 경지도 있을 수 없다.세상에는 오직 흙(地),물(水),불(火),바람(風)의 물질적 네 가지 원소만이 존재할 뿐으로,이 네 가지 원소의 集合 如何에 따라 인간이나 동물이 태어나고 생육하며 운동하고 변천하는 것이다.인간이나 동물이 죽으면 네 가지 원소는 흩어지는 것이다.
흙의 원소는 대지에,물의 원소는 액체의 세계에,불의 원소는 불의 세계에,바람의 원소는 바람의 세계에,감각기관은 공간으로 환원해 버린다.그러므로 인간이나 동물의 사후에는 흩어져 본래의 원소로 돌아 간 네 가지 원소 이외에는 어떤 존재도 존재하지 않는다.선악업의 과보가 없는 것처럼 내세도 없고 윤회전생이라고 하는 것도 없다.업보윤회설은 妄說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파쿠다 카차야나도 역시 유물론자였다.그는 선악업도 그 과보까지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그는 ‘흙·물·불·바람·즐거움·괴로움·영혼의 일곱 가지 요소는 영원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에,다른 것으로부터 만들어져 형성된 것도 아니요,다른 것을 생산하고 창조하는 것도 아니다.다른 사람을 죽이는 자도,죽게 하는 자도 없다.칼로 다른 사람의 목을 자르더라도 그것은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단지 칼이 身體의 要素 사이에 들어가 움직이는데 지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다음의 산자야 벨라티풋다는 회의론자로서,적극적으로 업보를 否定하지도 肯定하지도 않았다.그는 ‘누구나 자기 자신이 내세운 주장만이 진리이고 다른 사람의 설은 잘못되었다고 하지만,개인에 따라서 각자가 주장하는 진리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그러므로 선악 시비의 판단을 중지하여 진정으로 실천하는 편이 현명한 것이다’라는 不可知論的인 회의설을 주장하였다.부처님의 2대 제자인 사리불(Sariputta)와 목건련(Moggallana)도 처음에는 산자야의 제자였다.
여섯 번째의 니간타 나타풋타는 자이나 교의 교조이며 마하비라(Mahavira)라고도 불렸다.자이나 교는 인과업보설을 내세우며 불교의 교리와 일치하는 점이 많았다.불살생·무소유의 계율에 무척 엄격했으며,고행의 진정한 실천을 강조하여,지금도 많은 신자가 남아있다41).당시의 바라문 세력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은 이러한 극단적인 자유 사상들이 得勢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형식적인 제례 의식이나 권위를 내세워 사람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나 있었다.거기에는 도시의 생성으로 인한 상공업 등의 발달로 생겨난 경제력도 큰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41)미즈노 코오겐 /동봉 옮김,『원시불교』(진영사,1988),pp.57-68.
3)業報否定設
이러한 신흥 사상가들의 생각과 행동은 우파니샤드 이래 처음으로 브라흐만 중심의 일원론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상을 전개하였다는 데에서 큰 意味가 있다.석가모니 부처님도 동시대를 거친 당시의 사문으로서,후에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수행과 사유에 있어서 이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것이다.당시에는 특히 자아에 대해서,‘我’의 常住說로서는,‘我’로서의 영혼은 육체가 죽은 뒤에도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도 항상 존속하는 것이라 주장하는 常見에 대해 육체가 멸하면 영혼도 동시에 멸한다는 斷見이 서로 맞서고 있었다42).
아지타 케사캄바린은 우파니샤드 철학자 웃다라카의 사상을 계승하여 유물론적 입장을 철저히 했다.아지타는 인간이 죽으면 인간을 구성하고 있던 地,水,火,風은 각각의 집합으로 돌아가고,모든 機官의 능력은 허공으로 되돌아간다.인간은 죽음과 더불어 無가 되는 것이며 신체 이외에 사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영혼은 없다고 한다.이를 斷見 혹은 斷滅이라고 하며43)영원의 실체를 주장하는 常見과 대립된다.
인도 사상사에서 처음으로 회의론자라 불리운 산자야의 경우,‘내세가 존재하는가?’,‘선·악업에 대한 과보는 존재하는 것인가?’,‘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하는가?’라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판단중지의 不可知論을 주장했다44).
42)앞의 책,p.28.
43)나카무라 하지메/양정규 옮김,『불교의 본질』(경서원,1987),pp.26-27.
44)앞의 책,p.28.
이들의 세계관은 당시의 다른 자유 사상가들과 함께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自在化作因說’과 둘째는 ‘宿命論’,또는 ‘宿作因說’, 그리고 ‘偶然論’혹은 ‘無因無緣論’이 세 번째이다.
① 自在化作因說
이것은 神意說로서 정통 바라문이 주장하는 것이다.이 세계도 인간의 운명도 梵天이나 自在天 등의 최고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모든 것은 신의 意志대로 좌우된다는 것이다.그러나 이렇듯 신의 의지만 존재한다면 인간은 스스로 정진노력할 근거가 없어진다.
② 宿作因說
현세에서 얻는 모든 행·불행은 모두의 전생의 선악업의 結果일 뿐으로 인간의 운명은 태어날 때 이미 정해져 있다는 숙명론이다.우리들이 현세에서 아무리 선을 행하고 노력하더라도 내세의 운명은 결정할 수 있을지언정 현세의 운명은 절대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육사외도 가운데,아지타 케사캄바린이나 파쿠다 카차야나의 유물론도 여기에 해당된다 하겠다.계급설로서 후천적 인간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 階級人說 또한 여기에 속한다.
③ 無因無緣說
因도 없고 緣도 없다는 것으로,인생의 운명은 인과응보의 법칙에 지배되는 것도 아니며 신의 은총이나 징벌에 의한 것도 아니다.착한 일만 하고 살아도 불행해지기만 하는 사람이 있으며,악한 일만 하는데도 잘 사는 사람이 있으므로 因도 없고 緣도 없다고 한다.육사외도 중 마칼리 고살라가 이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신흥사문들의 독자적인 주장들은 훗날,부처님의 中道와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한 無記의 설법에 사상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Ⅲ.初期佛敎의 無我論
1.初轉法輪의 無我사상
석존은 깨달음을 얻은 후,7일 동안 보리수 밑에서 삼매(마음의 통일)에 들고,해탈의 기쁨을 맛보았다.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법은 매우 심오하고 난해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않을 것을 우려,설법하지 않기로 하였다.그러나 범천의 간청을 받아들여 옛날 같이 고행했던 다섯 비구들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게 된다.
1)中道
6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을 하였지만 심신만 황폐해졌을 뿐,어떤 깨달음의 경지에도 이르지 못하자 부처님은 고행을 포기,수자타 처녀의 우유죽을 供養 받으며 몸을 회복한다.그리고 스스로 각을 이루지 못하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으리라 맹세하고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깊은 명상에 잠긴다.
깨달음을 證得한 부처님은 최초로 설법하게 된 다섯 비구들에게 가장 먼저 ‘중도’의 가르침을 펴게 된다.
석가모니 부처님 자신이 깨달은 바로서,쾌락과 고행의 양 극단을 떠난 中道를 바른 견해라 하였다.‘중도’의 내용으로는 ‘유·무’의 두 가지 견해를 버리기,단절과 상극의 양 극단을 떠나기 등을 들었는데 즉,執着을 떠나 정도를 실천하라는 의미이다.『잡아함경』제 34권 961,「有我經」에서 ‘中道’의 설법이 나타난다.
"내가 만일 <나>가 있다고 대답한다면 그가 가진 삿된 소견을 더하게 할 것이요,만일 내가 <나>는 없다고 대답한다면 그가 가진 의혹을 더욱 더하지 않겠느냐.
본래부터 <나>가 있었는데 지금부터 끊어졌다고 말하여야 하는가.만일 본래부터 <나>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常見이요,지금부터 끊어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斷見인 것이다.
여래는 이 두 극단을 떠나 中道에 서서 설법한다.이른바 ‘이 일이 있기 때문에 저 일이 있고,이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 일이 생기는 것이다’라고.즉 無明을 인연하여 지어감이 있고 태어남,늙음,병,죽음과 근심,슬픔,고통,번민이 멸하느니라45)."
불교적 관점은 ‘누구’에 의해 사유되지 않는다.존재라는 것은 순간적으로 생성되었다 사라지는 요소들의 결합과 작용만이 있기 때문이다.‘누구’라는 주체를 물을 것이 아니라 ‘무엇에 의해’라는 原因과 條件에 대한 물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오직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연기법만이 존재한다.연기법 속에는 어떠한 실체적 존재도 없고 다만 있다고 하는 환상과 관습적 사고에 따라 그렇게 이름 붙여진 假立된 세계만이 있을 뿐이다46).<구사론>의 권제 30.「파집아품」편에서는 파구나 비구가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묻는다.
“세존이시여,누가 사랑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면 너는 응당 그렇게 물을 것이다.
즉 ‘누가 사랑하느냐’고 너는 응당 물어야 할 것이다.즉 ‘무엇을 인연하기 때문에 사랑이 있느냐’고.
그러면 나는 응당 느낌(受)을 조건으로 하여 사랑이 있으며,사랑을 조건으로 하여 집착(取)이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47)
내가 있어 생각과 사랑을 일으키는 것인가?一切法은 諸行無常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아비달마에 의하면 사랑한다는 생각 또한 諸法의 하나이다.
사랑이나 생각에는 실체성도 없고,나의 사랑이라거나 나의 생각인 것이 아니다.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사랑하기 때문에 그러한 조건으로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45)『잡아함경』제34권,961,有我經
46)김성옥,『초기 경전과「구사론」「파집아품」의 무아설』(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석사논문,2004
또 수행에 힘들어하는 소나에게 내려준 거문고의 비유 이야기는 중도의 좋은 예이다.거문고가 좋은 음색을 내려면 현을 너무 당겨서도 안되고 느슨하게 해서도 안되며 알맞게 조절해야 하는 것처럼 수행도 ‘중도’를 지키라는 것이다.또 다음과 같은 예도 들 수 있다.어떤 의사가 있어 위중한 환자에게 가망이 없다고 말하거나,또 다른 의사가 대단치 않은 병이니 치료도 필요 없다고 환자를 거짓으로 안심시킨다고 한다면,전자는 비관주의자이고 후자는 낙관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둘 다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제 3의 의사는 증상을 정확히 진단하고 판단하여 적절한 치료로 환자를 구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48)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벗들이여,나는 이 세계에 관한 두 극단적인 견해를 피하여 제대로 세계를 眺望할 수 있는 中道를 발견했다.나는 이것을 일러 ‘依存的 發生’이라고 부른다.이 의존적 발생의 원리야말로 곧 세계의 본질이다.심오하여 보기 어려우며 이해하기 어렵고,절묘하게 이성적 사고를 초월하며 탁월하여 오직 지혜로운 자만이 알 수 있다.”이것이 의존적 발생의 원리,곧 연기의 법칙이다.즉,‘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라는 것이다.
47)「구사론⌟권 제30.372.파구나 경.
48)월폴라 라훌라/진철승 옮김,『붓다의 가르침』(대원정사,2001),p.35.
2)四聖諦와 八正道
사성제는 ‘고·집·멸·도’로서 괴로움의 원인인 ‘집제’로 인한 괴로움인 ‘고 제’,그리고 괴로움을 없애려는 ‘멸제’,그 소멸의 실천인 ‘도제’이며 다음과 같다.
• 고 (苦,dukkha)
• 집 (集,samudaya):고의 발생,혹은 원인.
• 멸 (滅,nirodha):고의 소멸
• 도 (道,magga):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
행복한 삶이라든지 그러한 조건같은 것은 결코 항상하는 것이 아니다.그 것들은 계속해서 변화해 간다.불교에서 말하는 존재,개체,나라고 불리우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적·정신적인 힘이나 에너지의 결합일 뿐이다.간단히 말해서 五蘊 자체가 苦이다.
<존재>를 구성하는 오온,그 자체가 苦라는 것인데 그러면 오온이란 무엇인가?
오온은 色蘊,受蘊,想蘊,行蘊,識蘊의 다섯 가지이다.
첫째는 色蘊이며 <物質領域>이다.다섯 가지의 물질적 감각기관인 眼,耳,鼻,舌,身의 기능과 그에 상응하는 외부적 대상인 色,聲,香,味,觸,그리고 마음의 대상영역인 法處에서 일어나는 관념·개념·생각이 포함된다.
둘째는 受蘊이며,<感覺領域>이다.모두 여섯 가지 종류가 있는데
눈이 형상과
귀가 소리와
코가 냄새와
혀가 맛과
몸이 닿음과
마음이 마음의 대상·생각·관념과 접촉하여 경험되는 감각이 그것이다.모든 물질적·정신적 감각이 여기에 포함된다.불교에서는 다른 종교나 철학체계와는 달리 정신을 물질의 반대개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즉,마음은 눈이나 귀처럼 단지 하나의 감각기관일 뿐이다.그것은 다른 기관과 마찬가지로 통제·개발할 수 있다.
색깔을 들을 수는 없지만 볼 수는 있다
소리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이처럼 눈·귀·코·혀·몸의 다섯 가지 물질적 감각기관은 각각의 형상·소리·냄새·맛·닿음의 세계만을 경험한다.
그러면 관념이나 생각은 어떠한가?그것 역시 세계의 일부이다.그러나 그것들은 느껴질 수 없으며,눈·귀·코·혀·몸의 기능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있다.예를 들어,타고난 장님은 색깔의 관념을 가질 수 없는데,그는 소리
에 대한 분석이나 다른 감각기관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관념만을 지닐 뿐이다.
세계의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관념이나 생각은 육체적 경험에서 비롯되고 조건 지어지며,마음에 의해 인식된다.그래서 마음은 눈이나 귀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감각기관으로 간주된다.
셋째는 想蘊이며 <認識領域>이다. 이 인식 또한 여섯 가지의 내적 기능과 그에 상응하는 여섯 가지의 외적 대상과 관련된 여섯 가지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감각과 마찬가지로,인식도 여러 가지 기관이 외부세계와 접촉하여 발생한다.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이 想이다.
넷째는 行蘊이며,<意圖領域>이다.선이나 악을 행하는 의도적 행위로 인하여 業이라는 것이 생겨난다.감각이나 인식과 마찬가지로 의도도 여섯 가지의 내적 기관과 그에 상응을 하는 외부세계의 여섯 가지 대상과 관련하여 여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다섯 번째는 識蘊이며,<意識領域>이다.여섯가지 의식 기관인 눈·귀·코·혀·몸·마음,즉 六根 중의 하나를 근거로,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여섯 가지의 외적 현상인 형상·소리·냄새·맛·닿음 ·관념,즉 六境 중 하나를 대상으로
하는 반작용이다. 眼識은 눈을 근거로 하고 형상을 대상으로 하는 의식이다.
心識은 마음을 근거로 하고 관념을 대상으로 하는 의식으로 다른 기관들과 연관되어 있다.감각·인식·의도와 마찬가지로 의식도 여섯 가지의 내적 기관인 六根과 그에 상응하는 여섯 가지의 외적 대상 六境과 관련된 여섯가지 종류의 六識으로 구성된다.그러나 의식이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의식은 대상의 존재만을 깨달을 뿐이다. 눈이 푸른 색과 접촉할 때 하나의 색깔이 눈 앞에 있음을 깨닫는 안식은 <의식영역>이고,푸른색을 분별해 내는 것은 <인식 영역>이다.
위와 같은 상호의존적인 오온이 하나의 육체적·정신적 기관으로서 서로 결합하여 함께 움직인다면 <나>라는 관념이 얻어진다.그러나 이것은 그릇된 관념이나 정신적 행위에 불과하다49).생각을 없앤다면 생각의 주체는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나,즉 존재란 이 오온의 화합으로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명칭에 불과하다.즉,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색·수·상·행·식(오온)’의 조합으로서 허상일 뿐인 것이다.
49)월폴라 라훌라/진철승 옮김,『붓다의 가르침』(대원정사,2001),p.35.
첫 번째 괴로움인 苦諦는 生,老,病,死의 네 가지 고통이다.여기에 다시 네 가지 괴로움이 더해져 四苦八苦가 된다.이것들은 미워하는 이와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괴로움인 怨憎會苦,사랑하는 이와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괴로움인 愛別離苦,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인 求不得苦,괴로움의 요소를 쌓아 모은 인간 존재로서의 괴로움인 五陰盛苦이다.이로써 본 괴로움이라는 것들은 인간의 뜻이나 노력으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괴로움의 원인은 그릇된 집착,혹은 渴愛이다.목이 마를 때 본능적으로 물을 구하는 것과 같은,멈출래야 멈출 수 없는 욕구를 말한다.
이런 집착과 갈애를 없애는 실천 수행법인 ‘도제’는 ‘八正道’를 제시한다.
팔정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正見 – 올바른 견해
正思惟 – 올바른 사유
正語 – 올바른 말
正業 – 올바른 행동
正命 – 올바른 생활
正精進 – 올바른 노력
正念 – 올바른 기억
正定 – 올바른 명상
道聖諦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하는 까닭에 中道라고 알려져 있다.한 극단은 감각의 쾌락으로써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고행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고통스럽고 가치 없는 극단적 행위일 뿐이다.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양극단을 스스로 체험한 후,그것들이 모두 쓸모 없는 것임을 깨닫고 중도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중도의 깨달음이란 팔정도를 실천해 나갈 때에 가능한 것으로서,사성제의 도제란 결국 팔정도의 수행을 말하는 것이다.
2.『阿含經』의 無我說
『阿含經』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초기불교 유일의 경전이라고 볼 수 있다.석존의 가르침은 그 대부분이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그 질문이나 응답은 주로 散文이었는데,후에 전승되는 과정에서 시의 형식으로 변형되어 유포되었으리라 추측된다.무엇보다도 석존의 가르침이나 초창기의 불교사상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경전이 바로 아함경이다.
부처님의 열반 이후,제자 마하가섭이 주도하여 마가다국 왕사성 칠엽굴에서 오백 명의 비구가 참가.제 1차 結集이 이루어진다.부처님이 설하셨던 가르침과 불제자들과의 대화 등은 암송에 의해 계속 맥을 이어왔는데,이 최초의 결집 이후 비로소 경장과 율장이 성립되었다.
『阿含經』은 불교학의 기초로써 다른 경전들보다 우선해서 알아야만 한다.아함경을 小乘경전이라 하며 경시하는 측면도 있는데,아함경이야말로 부처님의 언설 그 자체로서 지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부파불교 시대에는 아함만이 절대적 권위를 가진 유일무이의 本體였으며,용수의 ‘중론’도 그 사상의 근간이 아함에서 비롯되었다.아함경은 대승의 모든 경전들,‘반야경’,‘법화경’,’화엄경’,’열반경’등의 기초가 되는 경전으로 여겨진다고 볼 수 있다.특히 五蘊,12處,18界,12緣起,四諦 등의 용어는 아함에서만 설해지는 기본 개념이다50).
阿含經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長阿含 22券 30經
2)中阿含 60券 222經
3)雜阿含 50券 1362經
4)增一阿含 51券 471經
‘불교는 無我다’라고 한 마디로 단정지을 수 있을 만큼 無我는 불교 전체를 망라하는 대전제이다.이것은 아함경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無我’는 ‘我’의 부정이며,한역에서는 ‘非我’라고도 한다.
아함경에서는 자아를 ‘나의 것’,‘나’,‘나의 자아’등 세 가지로 나누고, 무아에 대해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이것은 내가 아니다,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우파니샤드에서 유래한 ‘아트만’이라는 것은 본래 ‘호흡’이라는 뜻에서부터 신체·자신·생명원리·자아·자기·영혼·본체 등을 나타내는 말이다.우파니샤드의 영원불멸의 자아론은 이러한 영원한 행복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갈구를 충족시키려 한 것이다.그러나 일체가 무상함을 깨달은 석존에게 그러한 이론은 충분히 납득될만한 것이 아니었다51)
‘無我(anattan,anãtman)’란 고정적인 실체로서의 我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인간은 고정적인 자아를 상정하여 집착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괴로움이 따르게 된다.아함경전들은 일관되게 無常이며 苦이고 無我임을 교설하고 있다.
50)칼루파하나/조용길 편역,『원시근본 불교철학의 현대적 이해』(불광출판부, 1997),pp.282-284.
51)앞의 책,p.6.
월폴라 라훌라는 잡아함경 18권 ‘苦’에 대해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첫째는 苦苦(dukkha‐dukkha)性으로서 일상적 괴로움이다.
보편적으로 괴로움이나 고통으로 인정되는 모든 종류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말한다.탄생·늙음·병고·죽음·싫어하는 사람 이나 상황과의 만남·좋아하는 사람이나 상황과의 이별·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것·슬픔·비탄·근심 등의 괴로움 들이 고고성이다.
두 번째 壞苦(viparināma‐dukka)性은 행복한 느낌이나 조건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며 변화한다는 것이다.그에 따라 고통·고난·불행이 뒤따른다.
세 번째 行苦(samkhāra‐dukka)性은 철학적 측면에서 苦를 바라본 것인데, <존재>,<개체>,<나>라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한 분석적 설명이 필요하다.
불교철학에 따르면 존재·개체·나라고 불리우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적·정신적 힘이나 에너지의 결합일 뿐이다.부처님은 ‘간단히 말해서 이 五蘊이 苦다’라고 말했다52).
52)월폴라 라훌라/진철승 옮김,『불교의 가르침』(대원정사,2001),p.38.
경전에서는 이러한 苦를 단절하기 위한 8정도가 다음과 같이 설해진다.
“비구들이여,세 가지의 苦가 있다.그 세 가지는 무엇인가,苦苦,行苦,壞苦다.
비구들이여,이것들을 세 가지의 苦라 한다.비구들이여,이 세 가지의 고를 잘 알고 바르게 이해하고 점차로 극복하여 완전히 단절하기 위해서는 성스러운 八正道를 修習하는 것이 좋다.
그럼 성스러운 팔정도는 무엇인가.
비구들이여,여기에 있어 비구는 욕망의 대상을 멀리하고 탐욕을 떠나 멸하여 없애고 마음은 점차로 평정하여 正見을 수습한다.
또… 正思를 수습한다.또… 正命을 수습한다.또 正精進을 수습한다.또… 正念을 수습한다.또 욕망의 대상을 멀리하고 탐냄을 떠나 멸하여 없애고 마음은 점차로 평정하여 正定을 수습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이 세 가지의 苦를 잘 알고 바르게 이해하고 점차로 극복하여 완전히 버리려면 이 성스러운 팔정도를 수습하는 것이 좋다.”53)
원시 불교에서는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분석하는데,오온이란 色蘊,受蘊,想蘊,行蘊,識蘊이며,蘊이란 ‘모임’의 의미이다.
‘色’이란 빛깔이나 모양이 있는 것,즉 육체를 말하며,‘受’란 苦受,樂受,不苦不樂受로 설명되고,
想은 表象,行은 형성하는 힘이라는 뜻으로 마음의 의미작용을 말한다.
識은 인식이나 판단작용이다.
이렇게 자기라는 것은 이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모든 것은 항상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 無常한 것에 항상 집착하기에 무상에는 반드시 苦가 따른다.괴로움 속에는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온’의 어느 곳에도 ‘나’라고 할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雜阿含經』에는 오온에 관한 부처님과 슈로오나 비구의 문답식 대화가 다음과 같이 씌어있다.
“슈로오나여 너의 뜻에는 어떠하냐.
물질은 항상 되지 않은 것인가.”
“항상되지 않나이다.”
“슈로오나여,만일 항상되지 않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변하고 바뀌는 법이다.슈로오나여 너의 뜻에는 어떠하냐.성인의 제자로서 그 물질을 ‘이것은 나다’,‘이것은 나와 다르다’,‘이것은 둘의 합한 것이다’라고 보겠는가.”
“아닙니다.”54)
이와 같은 문답식은 감각에 대해서도,표상에 대해서도,그리고 의지와 의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어진다.그러므로 ‘이것은,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무아의 표현은 아함경에서 일정하게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이다.그러나 무아에 집착하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我’도 없고 ‘非我’도 없음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55)
53)남전 『상응부경전』45,165.
54)『잡아함경』제 1권,30.수루나경 (동국역경원,2002)
55)히라카와 아키라/이호근 옮김,『인도 불교의 역사』上(깨달음 총서,1994), pp.64-65.
『잡아함경』 ‘五比丘經’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설하셨다.
“물질에는 ‘나’가 없다.
만일 물질에 ‘나’가 있다면 물질에는 응당 병이나 괴로움이 생기지 않을 것이며,
또한 물질을 이렇게 되었으면 한다든가,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수 없을 것이다.
물질에는 ‘나’가 없기 때문에 물질에는 병이 있고 괴로움이 있어 생기는 것이요,
또한 물질을 이렇게 되었으면 한다든가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이니
느낌,생각,지어감,의식도 또한 그와 같느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모든 물질로서 과거가나 미래거나 현재거나 안이거나 밖이거나 굵거나 가늘거나 좋거나 더럽거나
멀거나 가깝거나 그 일체를 ‘나’도 아니요,‘내 것’도 아니라고 참다이 관찰하라.
느낌,생각,지어감,의식도 또한 그와 같느니라.”56)
56)『잡아함경제1권,34.오비구경 (동국역경원,2002).
부처님께서는 또 이와 같이 설하셨다.
“물질은 항상됨이 없다.
항상됨이 없는 것은 곧 괴로움이요,괴로움은 곧 ‘나’가 아니며,
‘나’가 아니면 또한 ‘내 것’도 아니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진실한 바른 관찰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이 느낌,생각,지어감, 의식도 항상됨이 없다.
항상됨이 없는 것은 곧 괴로움이요,
괴로움은 곧 ‘나’가 아니며,‘나’가 아니면 또한 ‘내 것’도 아니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진실한 바른 관찰이라 하느니라57)”
57)『잡아함경제 1권,10.해탈경 (동국역경원,2002).
아함경에서 말하는 ‘무아’는 단지 이론으로써만이 아닌 실천과 수행으로써 강조되고 있다.‘사물은 모두 무아다’라고 하는 지혜로써 진정 고를 벗어나 청정을 이룬다는 것이다.
잡아함경 ‘重擔經’에서도 五蘊을 낱낱이 분석하여 無我임을 밝히는 내용이 나온다.
“이미 무거운 짐 버리었거든
다시는 그것을 취하지 말라.
무거운 짐은 큰 괴로움이요
짐을 버림은 큰 즐거움이네.
마땅히 모든 애욕 끊어버려라.
일체의 지어감(行)은 이내 끝나리.
존재(有)의 남은 경계를 환히 알면
다시는 굴러 존재로 돌아오지 않으리.”58)
58)『잡아함경제 3권,73.중담경.
여기에서 무거운 화물이란 생을 구성하는 요소,五取蘊을 말한다.그 다섯 가지는 육체적인 요소(色),감각적인 요소(受),표상적인 요소(想),의지적인 요소(行),의식적인 요소(識)이다.이는 그 무거운 화물을 메고 있는 자가 바로 인간임을 일깨우고 있다.
3.숫타니파타와 法句經의 無我說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간이란 존재가 어떤 모습인가를 밝히고, 인간의 괴로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진 존재론이다.
『숫타니파타』는 가장 오래된 불교경전으로 『법구경』과 더불어 부처님의 시 모음집이다.『숫타니파타』가 먼저 成立된 것으로 보인다.
부처님은 스스로 특정 종교의 교조라거나 교단을 세우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그는 자신이 깨달은 법을 오직 45년 동안 만나게 된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열반의 길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초기의 불교 경전은 암송에 의해 구전되었으므로 부처님 열반 후 편찬된 이 경전도 운문시 형식을 띠게 되었다.이러한 운문시 형식으로서,같은 구절을 일정하게 반복함으로써 중요한 내용을 강조하였다.
『숫타니파타』는 5장 72묶음,1,149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고,그때 그때 묻는 상대와 상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읊어진 시들이다59).
『숫타니파타』의 여러 게송들에서 인간 존재의 모습이 보인다.
보라,친척들이 지켜보며
슬퍼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 가고 있다.60)
인간의 목숨은 예측할 수 없고
언제까지 살지 알 수도 없다.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에도
괴로움은 언제나 그림자처럼 뒤따른다.61)
제 아무리 잘 구워낸 도자기라도
마침내는 모두 깨어져 버리고 말 듯
인간의 목숨 또한 이와 같은 것.62)
보라,신들과 인간들은
거짓을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명칭과 형태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것이야말로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다.63)
59)석지현 옮김,『숫타니파타』(민족사 2002),pp.313-315.
60)앞의 책『숫타니파타』580,p.15.
61)앞의 책『숫타니파타』574,p.15.
62)석지현 옮김『숫타니파타』57,p.15.
63)앞의 책『숫타니파타』75,p.19.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몸에 깊이 집착하고 있다.자기 몸에 대한 집착을 떨치기 위한 실천 수행법 가운데 不淨觀이 있다.깨끗하지 않음을 관찰하는 수행법이다.
『숫타니파타』에서는 몸을 이렇게 관찰하고 있다.
우리의 몸은 뼈와 근육으로 형성되었으며
그 위에 얇은 막과 살이 달라붙어 있다.
그리고 겉은 살가죽에 싸여 있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몸 속에는 창자와 위가 차 있으며,
간장·방광·심장·폐장·비장·췌장이 있고,
콧물·점액·땀·지방
피·관절액·침·비계가 있다.
또 저 아홉 개의 구멍에서는
언제나 더러운 오물이 나오고 있다.
눈에는 눈물,귀에는 귓밥,
코에서는 콧물이,입으로는 침이나 가래를 뱉어낸다.
온몸에서는 땀이 흐르고
더러운 때가 떨어져 나온다.
또 머릿속은 컴컴한 동굴과 같은데
그 속에는 골수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무지에 뒤덮여서
이 육체는 참 깨끗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머지않아 이 몸은 시체가 되어 눕게 된다.
시체는 썩어 부풀어 오르고
차츰 검푸르게 변하며
마침내는 공동묘지에 버려지나니
가장 사랑하던 사람마저도 이젠 뒤돌아보지 않는다.64)
우리의 이 육체는 결코 깨끗하지 않다.
심한 악취를 풍기는데도 꽃이나 향으로 꾸미고 있다
갖가지 오물이 가득차 있다가
이곳저곳에서 흘러 나온다.
이런 육체를 가진 인간이
자신을 위대하다고 생각하고,
또다른 사람을 경멸한다면
그는 눈 먼 소경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느니.65)
64)석지현 옮김,『숫타니파타』194-200(민족사,2002),pp.54-55.
65)앞의 책『숫타니파타』205-206,pp.55-56.
『法句經』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초기 경전들 중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이다.이 경전은 팔리어로 『담마파다 (Dhammapada)』라고 하는데,‘담마(Dhamma)’는 法이라고 하며 ‘진리,가르침’의 뜻이다.그리고 ‘파다’ 는 발자취,길을 가리킨다.그러므로『법구경,담마파다』는 ‘진리의 말씀, 깨달음의 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법구경』은 운문시 형식으로 장장 423개의 시구로 되어 있는데,부처님의 제자 아난다가 편집했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이 경에는 부처님 당시의 승단 분위기와 진실성,그리고 소중한 가르침이 잘 나타나 있다.불교의 三法印이 되는 諸行無常,一切皆苦,諸法無我는 다음과 같은 법구경의 게송에 여실하게 드러난다.
모든 조건 지어진 현상은 무상하다 라고
내적 관찰의 지혜로써 이렇게 보는 사람은
괴로움에서 멀리 떠나게 된다.
이것만이 사람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66)
모든 조건 지어진 현상은 괴로움이라고
내적 관찰의 지혜로써 이렇게 보는 사람은
괴로움에서 멀리 떠나게 된다.
이것만이 사람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67)
모든 法에는 自我가 없다고
내적 관찰의 지혜로써 이렇게 보는 사람은
괴로움에서 멀리 떠나게 된다.
이것만이 사람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68)
66)거해스님 편역,『법구경』277,(샘이깊은물,2003),p.202.
67)앞의 책,『법구경』278.p.203.
68)앞의 책,『법구경』279.p.204.
‘이 세상의 사물은 오직 변하여 멸해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든지 ‘나의 것’이라는 집착하는 마음이 ‘苦’를 만든다.인간의 내면에는 이런 그릇된 집착과 갈애가 잠재해 있음이 『법구경』에서도 보여 진다.
사람에게 마음 집중이 없으면
욕망이 자라기가 등나무 같아
그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방황하는 것
마치 열매를 찾아 헤매는 숲 속의 원숭이와 같다.69)
누구든간에 하찮은 감각적 쾌락에 욕망이 지나치면
그에게는 반드시 슬픔의 독이 자라난다.
마치 비를 흠뻑 맞는 비라나 풀이
무성하게 자라나듯이70)
육체나 마음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여 집착하면 늙음이 실체화되고,죽음이 존재하게 된다.‘나’가 없어지고 ‘나의 것’이라는 생각도 없어지면 내가 없기 때문에 늙거나 죽는 일도 없다.
69)거해스님 편역,『법구경』334.p.347.
70)앞의 책,『법구경』335.p.348.
4.『밀린다 왕문경』의 無我理論
『밀린다 왕문경』은 기원전 2세기 후반 서북인도를 지배했던 그리스왕인 밀린다 왕과 불교의 아라한과를 증득한 나가세나 존자와의 對論으로 이루어진 경전이다.붓다론·아라한론·해탈열반론·수도론·윤회론·재가자론 등의 불교이론을 문답형식으로 차근 차근하게 설명해 줌으로써 불교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현대인들에게 불교가 지닌 보편성과 합리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밀린다 왕으로 등장하는 그리스 왕은 박트리아 왕조의 메난드로스 왕이라고 한다.박트리아 왕조는 기원전 326년경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 시작된 굽타 왕조부터 서북인도 침입 이후 그리스인들이 세운 두 개의 그리스계 왕조 중의 하나이다.나가세나 존자는 본래 천궁에 살던 마하세나라는 천자였는데 밀린다 왕과 대론할 논객이 되어달라는 비구대중의 간청에 따라 인간계에 태어났다고 한다.
『밀린다 왕문경』이 성립된 기원전 2세기 무렵은 『아함경』의 시대에서『아비달마 불교』로 넘어가는 시기로서,부처님의 가르침이 성문 제자들에 의해 아비달마라는 논장으로 성립되었다.이를 아비달마 불교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주로 교리문답과 백과 사전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밀린다 왕문경』은 이러한 체계적이고 정교한 아비달마 불교를 배경으로 성립된 경전으로서 자아,번뇌,업,교단 등의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이것은 한역 대장경 안에서도 <那先比丘經>이란 이름으로 전하고 있으며,그 원형은 기원 전후 무렵에 성립된 것으로 추측된다.이 논서는 經藏이나 論藏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위치에 있지만 전통적으로 남방 상좌부에서 상당히 중요시 하는 것이다71).
71)후지타 코타츠 외 /권오민 옮김,『초기 부파불교의 역사』(민족사,1992).
‘이름에 관한 문답’이라는 대화편에는 존재의 명칭에 대한 對論이 펼쳐진다.
먼저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라는 밀린다 왕 의 물음에 나가세나 존자가 답한다.
“나는 나가세나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모두가 나를 나가세나라고 부른다.그러나 그 이름은 명칭에 지나지 않고,거기에는 어떤 인격적 개체도 인정되지 않는다.”
이어서 그는 차례차례 이름을 부정한다.
계속되는 밀린다 왕의 물음은 다음과 같다.
“머리털이 나가세나인가?”
“손톱,살갗,살,힘줄,뼈,뼛골,콩팥,염통,간장,늑막,지라,폐,창자,창자막,위,똥,담즙,담,고름,피,땀,지방,눈물,기름,침,콧물,관절액,오줌,뇌,이것들 중 어떤 것이 나가세나인가?아니면 이들 전부가 나가세나인가?”
“색·수·상·행·식 중 하나가,혹은 합친 것 모두가 나가세나인가?”
“오온 밖의 무언가가 나가세나인가?”
왕은 다음과 같이 질문을 마친다.
“존자여,나는 당신에게 물을 수 있는데 까지 물어 보았으나 나가세나는 찾아볼 수 없었다.그러므로 나가세나는 빈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우리 앞에 있는 나가세나는 어떤 사람인가?”나가세나는 빈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왕은 대중 앞에서 선언한다.
그러나 나가세나는 수레의 비유를 들어 밀린다 왕을 반박한다.
나가세나존자가 밀린다 왕에게 묻는다.
“대왕이여,당신은 걸어서 왔는가,수레를 타고 왔는가?”
“만약 수레를 타고 왔다면 수레가 무엇인가를 설명해달라,수레 채가 수레인가?”
이어서 수레를 낱낱이 분해하여 존재의 설명을 구한다.
“수레 굴대가 수레인가?”
“바퀴,차체,차틀이나 멍에,밧줄,바퀴살,채찍이 수레인가?”
“이것들을 합한 전부가 수레인가?”
“이것들 밖에 ‘수레’라는 것이 따로 있는가?”
나가세나는 밀린다에게 다시 묻는다.
“나는 대왕에게 수레에 대해 물을 수 있는 것은 다 물어보았습니다만 수레는 볼 수가 없다.수레란 무엇인가?수레란 단지 빈 소리에 지나지 않는가?그렇다면 당신이 타고 온 수레는 대체 무엇인가?”
나가세나 존자의 유도에 따라,비로소 밀린다 왕은 깨닫게 된다.
‘수레’는 이들 모든 것,즉 수레채,굴대,바퀴,차체,차틀,밧줄,멍에,바퀴살,채찍 등이 모여 ‘수레’라는 명칭이 생긴다는 것이다.
나가세나 존자는 바지라 비구니가 읊었던 시구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72).
마치 여러 부분이 모이므로
‘수레’라는 말이 생기듯
다섯 가지 구성요소(오온)가 존재할 때
생명 있는 존재(유정)이라는 이름이 생기노라73).
72)정안 엮음,『밀린다 왕문경』(우리 출판사,1996),pp.50-53.
73)앞의 책,p.53.
5.아비달마 불교의 我空法有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45년 동안 팔만 사천의 法問을 펼치셨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그때그때 듣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그 근기와 상황에 맞는 법을 설하셨는데,이를 대기설법이라고 한다.석가모니 부처님 입멸 이후 여러 차례 이루어진 결집도 경전을 구전으로 암송하는 전통을 따랐다.
그런데 부처님의 성문 제자들 중에는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교법을 올바르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에 큰 관심을 기울이는 자들이 있었다.그들은 부처님의 언설로써 암송되는 법문 자체보다는,그 안에서 진실로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를 되새겨 整理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오랜 세월 동안 부처님의 법문은 대기설법의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속에 숨은 깨달음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한 것이다.
아비달마의 의미가 일차적으로는 ‘불타교법에 관한 연구’라고 하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각 부파가 추구하였던 ‘세계 존재에 관한’연구를 의미하게 되었다.대표적인 논서로 세친에 의해 씌어진 『아비달마 구사론』이 있다.이는 아비달마의 정요를 간추린 논이라는 뜻이다.
부파 중의 하나인 說一切有部에서는,‘三世實有 法體恒有’를 들고 나왔다.
일체 제법이 실유라고 주장하는 네 가지 근거가 있다74).
첫째,“과거의 색에 집착하지 말고,미래의 색을 즐겨 추구하지 말라”는 부처님 말씀 때문으로 그것은 즉 과거와 미래의 색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인식은 반드시 두 가지 조건(감관과 대상)에 의해 생겨난다” 는 말씀을 예로 든다.만약 과거나 미래의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인식의 필수 조건인 대상이 결여되어 그것에 대한 인식은 일어날 수 없다고 한다.
셋째,인식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대상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이것은 유부교학의 전제이다.세계란 경험된 것이고 앎의 근거가 법이므로,그것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선행된 행위는 반드시 그 결과를 산출하기 때문이다.과거·현재·미래의 행위 역시 바로 소멸할 것이므로 과거·현재·미래 중에서 어떠한 결과도 산출할 수 없다고 본다.
유부교학에 있어서 법이란 경험을 구성하는 조건으로서,개별적이고도 더 이상 환원 불가능한 독립된 실체이다.그것은 자기만의 고유한 특징과 작용을 지니며 그것으로 인식이 가능하고 행위가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존재인 勝義有이다.
아비달마에 있어 諸法으로 일컬어지는 모든 존재는,대승에서 말하는 의식 작용에 의해 구축된 사유의 산물이 아니다.사유가 그 같은 모든 존재에 의해 한정되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無自性의 존재가 아닌 것이다75).
그런데 일체의 제법이 실재한다는 ‘법유론’은 ‘제행무상’이라는 불교의 기본 명제와는 모순이 된다76).
說一切有部 자체에서는 바로 이 無常을 설명하기 위해 無常實有를 주장하였다고 한다.
說一切有部(sarvãstivãdin)라는 명칭은 ‘모든 것(一切)은 존재한다고 설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이 부파는 독특한 ‘법(dharma)의 이론’ 을 주장하는데,그 이론에 따라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사실을 자세하게 논
증하여 緣起‐有爲‐無常의 이치를 분명히 밝히고자 하였다77).
그러므로 설일체유부 에서는 왜 ‘法有’를 주장하는가의 문제가 생기게 된다.이에 대해 유부가 결코 자연적 존재로서의 ‘사물’의 실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본연의 상태’를 ‘사물’로 보고,즉 ‘사물’의 본질을 실체로 간주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法’이 과거·현재·미래의 三世의 어디에서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法은 三世에 實有한다’고 말한다.예를 들면,책상위에 있는 컵은 한 시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컵으로서 지속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나,‘法의 이론’에서 본다면 순간에 생겨나 소멸해 버리는 有爲諸法의 끊임없는 연속에 불과하다.이 컵의 둥글고 긴 형태도 하나의 ‘法’이고 단단하고 매끄러운 감촉도 또 다른 하나의 ‘法’이다.그 밖의 여러 가지
‘法’들이 그 순간,거기에 함께 모여 生起함으로써 컵의 존재라고 하는 현상을 구성하는 것이다.시간의 흐름 속에서 각각의 순간에 생기하는 ‘法’은 처음부터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그것들이 전·후 순간을 서로 달리 함으로써 경험적 세계는 시시각각으로 변화유동하는 것이다.
즉,이 세계 모든 것은 이처럼 無常한 것이다78).
74)권오민,『아비달마 불교』(민족사,2003),p.98.
75)앞의 책,pp.47-48
76)권오민,p.102.
77)후지타 코타츠 외/권오민 옮김,초기·부파불교 역사』(민족사,1992)p.259.
78)앞의 책,pp.259-260.
논서에서 ‘諸法’은 體·性·法·物·事·有가 이름은 다르지만 뜻은 같다.이렇게 ‘법유’는 법의 개념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자연스럽게 나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79).
유부는 개념뿐만 아니라 판단내용,즉 명제도 실재한다고 주장했다.만들어진 것들은 무상하다.그렇지만 ‘諸行無常’이라는 명제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만일 명제 자체가 변한다면,만들어진 것들은 무상이라고 할 수 없다.
아비달마에서는,자아란 我執의 대상일 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나’라고 하는 관념은 세계에 대한 이기적 욕구의 결과인 것이다.‘나’라고 하는 개체는 이기적 욕구에 의해 자기개체성을 고집하기 때문에,그것이 자아를 영속적인 실체로 간주한다.곧 불교에서 말하는 無智이다.무지란 단일한 자아가 실재한다는 그릇된 믿음이다.
無常한 것을 無常하게,無我인 것을 無我로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이 올바른 지혜이다.그런데 인간은 無智로 인해 無常한 것에 常住性을 기대함으로 ‘나’와 ‘나의 것’을 의식하고 번뇌하며 그 결과가 ‘苦’인 것이다.무지를 떠나 무상을 무상으로 알고,무아를 무아로 아는 올바른 지혜를 얻음으로써 인간은 번뇌의 구속에서 해방된다80)
설일체유부 아비달마의 경우는 ‘일체가 존재한다’라는 주장을 하나의 이론에 의해 정밀한 학설로 전개하고,이를 가지고 ‘일체는 無常하다,無我다’ 를 논증하고자 한 독특한 입장을 취하였다81).
설일체유부는 물질적인 존재 [色],마음 [心],마음의 작용 [心理作用,心所],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것 [心不相應行],제약을 받지 않는 것 [無爲]의 다섯 가지로 분류한 75종의 요소 (5位 75法)를 궁극적인 존재로 인정한다.
이것들은 다른 요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다른 요소에 의해서 변화되지도 않으며,이것 자체의 고유한 특질을 잃어버리지도 않는다82).
마음이나 물질은 주어진 요소로서 존재하는 한 實在性을 가지므로,과거·현재·미래를 통해서나 또는 무한한 延長 속에서 존재한다.이러한 유부의 法有論은 다른 여러 敎派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이렇듯 三世가 實有하며 모든 법은 實在한다고 하는 法有論 또한 석존의 敎說과 다른 것이 아니며 我는 空한 것이므로 我空法有說이라고도 한다83)
5온,12처,18계의 세 가지는 초기 불교 이래 불교의 일반적인 존재 분석 방식이었다.아비달마에 의하면,사람들의 어리석음과 근기와 즐기는 것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상근기의 사람들을 위해 5온을 설하였고,중근기의 사람들을 위해 12처를,그리고 하근기의 사람들을 위해 18계를 설하였다는 것이다84).
특히 설일체유부에서는 五位七十五法이라 하여 5온,12처,18계의 분류 중에서 행온과 법처·법계의 부분을 상세히 고찰하고 있다.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색온’에 11종의 다르마인 五根과 五境과 無表色을 배치하고 있다85)
79)나카무라 하지메/이재호 옮김,『용수의 삶과 사상』(불교시대사),pp.62-63.
80)사쿠라베 하지메 外/정호영 옮김,『아비달마의 철학』,(민족사,2004),p.46.
81)앞의 책,p.46.
82)핫토리 마사아키 外,『인식과 초월』(민족사,1993),p.71.
83)정태혁,『印度哲學』(학연사,2003)p.430.
84)권오민,『아비달마 불교』(민족사,2003),pp.54-56.
85)사쿠라베 하지메,『아비달마의 철학』(깨달음 총서,2004)pp.55-56.
五位七十五法과 五蘊,十二處,十八界를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표 2>86)
86)권오민,『아비달마 불교』(민족사,2003),p.96.
설일체유부에서는, 心所法이라고 불리는 마음의 작용을 마음과는 별개의 존재로 이해하고 있는데,마음의 온갖 작용을 각각의 개별적 실체로 보며 이 것들이 마음과 동시에 생기한다는 이론이다.유부에서는 찰나生滅을 주장하기 때문에 마음과 마음작용의 同時生起가 아니고서는 하나의 완전한 인식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이 마음의 작용은 75법 중에 46가지나 차지하고 있는데 아주 세세하게 분류해 놓고 있다.
첫째는 大地法으로 항상 마음과 함께 하는 마음작용이다.
受 (감수작용),想 (표상작용),思 (마음을 움직이는 작용),觸 (감관과 대상과 식별작용이 합하는 것),慾 (욕구),慧 (구별해서 아는 지혜),念 (기억작용),作意 (주의하는 작용),勝解 (확인),三摩地 (정신통일)의 열가지이다.
둘째 大善地法은 착한 마음과 함께 하는 마음작용이다.
信 (맑은 마음으로 가르침을 받아들임),勤 (부지런히 힘쓰는 것),捨 (마음의 평정),慚 (스스로 되돌아 보고 부끄러워 하는 것),愧 (타인에 대해 부끄러워 하는 것),無貪 (탐내지 않는 것),無瞋 (화내지 않는 것),不害 (해치지 않는 것),輕安 (몸과 마음이 가벼운 것),不放逸 (게으르지 않는 것)의 열가지 마음작용이다.
세 번째 大煩惱地法은,악한마음과 번뇌로 덮여 있지만 선이나 악으로 규정할 수 없는 마음과 함께 하는 마음작용 여섯가지이다.
癡 (어리석음),放逸 (게으름),懈怠 (나태),不信 (믿지 않고 마음이 맑지 않은 것),惛沈 (심신이 울적한 것),掉擧(마음이 술렁대는 것)이다.
네 번째는 大不善地法으로 악한 마음과 함께 하는 마음작용이다.
無慚 (부끄러움이 없는 것),無愧 (파렴치한 것)의 두가지이다.
다섯 번째의 小煩惱地法은 세 번째의 대번뇌지법 중의 癡 (어리석음)과 관계하여 일어나는 열가지의 마음작용이다.
忿 (분노),覆 (잘못을 숨기는 것),嫉 (질투),惱 (사리에 어두운것),害 (해치는 것),恨 (원망),諂 (아첨),誑 (사기),憍 (교만)이다.
여섯 번째의 不定地法 여덟가지는 어떠한 마음과도 관계할 수 있는 마음작용이다.
惡作 (후회),睡眠 (마음의 문을 닫는 것),尋 (거친 마음의 작용),伺(미세한 마음의 작용),貪 (탐착을 일으키는 작용),瞋 (싫어하는 것,성내는 것),慢 (교만한 마음),疑 (의심)이다.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이와 같이 마음의 작용인 相應法을 46종류로서 분별하고 있다.
5온,12처,18계의 세 가지는 초기 불교 이래 불교의 일반적인 존재 분석 방식이었다.아비달마에 의하면,사람들의 어리석음과 근기와 즐기는 것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근기의 사람들을 위해 오온을 설하였고,중근기의 사람들을 위해 12처를,그리고 하근기의 사람들을 위해
18계를 설하였다는 것이다.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유정의 존재 근거를 자아가 아닌 삼세에 걸친 오온의 인과상속으로 이해하였고,12연기 역시 이에 따른 분위연기설로 해석하였다.결국 12연기설은 無我說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87).
87)앞의 책,p.19.
Ⅳ.『中論』에서 보는 ‘무아’와 ‘연기’
1.『中論』의 성립 배경
『중론』의 저자는 인도의 龍樹(150‐250년경)로서 그에 의해 중관철학이 정립되었다.
용수는 초기 대승경전의 하나인 『반야경』을 발굴·유포 시켰으며,『반야경』에 담긴 空思想을 논리적·분석적으로 해명하였다.
『중론』은 총 27장에 걸친 450여수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본래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은,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나’라는 것이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터득한 것이다.
변치 않는 ‘나’라는 자기동일성은 결코 유지될 수가 없는 것이다.몸이나 감정·생각 등 ‘나’라고 여겨질 만한 것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며,마치 흐르는 강물과도 같이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는다.‘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無我를 자각하면 모든 악업의 근원이 되는 탐욕이나 분노·교만이 사라지고,인식의 정화가 이루어진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苦集滅道의 4성제로 요약되는데,이러한 가르침은 부처님 열반 후 500년 정도가 지나면서 근본 가르침에 대한 오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소위 아비달마 불교도로 불리는 이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암시적으로 담겨 있던 교의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형이상학적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실재론 적이고 독단적 경향을 띈 새로운 교리 체계가 출현한 것이다88).
아비달마에서는 불변의 아트만의 존재를 부정하기는 했지만 또한 사변적 형이상학적 체계도 구축하였다.그것은 法이 實在한다는 法有論으로 오온이나 18계,12처에 대한 부처님의 설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이론이다89).法有論의 대표적 학파는 ‘설일체유부’이다.
용수는 설일체유부의 我空法有의 이론을 철저하게 반격하기 위해 ‘中論’ 을 쓰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궤변에 가까운 『중론』의 논법은 관계 개념을 실체시하는 설일체유부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그 목적은 갖가지 사상이 서로 상호 의존하는 것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이다.즉,어떤 것과 다른 것은 서로 상관관계를 이루며 존재하므로,만일 그 상관관계를 없앤다면 절대적으로 독립된 실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으로 無自性,無我를 말함이다.
88)무르띠/김성철 옮김,『불교의 중심철학』(경서원,1999),p.142.
89)앞의 책,p.96.
2.緣起의 無我
용수가 『中論』의 첫 부분에서 말한 귀경서는 『中論』 전체를 나타내는 요지라고 볼 수 있다.
"소멸하지도 않고(不滅),발생하지도 않으며(不生),단멸하지도 않고(不斷),
상주하지도 않으며(不常),多義도 아니고(不二義),一義도 아니며(不一義),
오지도 않고(不來),가지도 않는(不去),
희론이 적멸한 상서로운 緣起를 설해주시고 설법자 가운데 최상이신 등각자(等覺者)그분께 경배드립니다90)."
90)나가르주나,박인성 옮김,『中論』p.3.
연기성이라는 것은 존재에 있어서 서로간의 관계성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相依性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이것은 곧 석존의 마음 속에 이미 깨달음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 내지는 깨달음에 대한 강렬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그러나 그 깨달음마저도 하나의 緣起性이기 때문에 이것이다 하는 실체로 드러내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그것은 空이기 때문이다.제법은 연기의 성품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공일 수 밖에 없다.그래서 연기의 空性은 연기설의 근본정신인 中道와 이를 깨우치는 中觀에 있다.바로 이러한 연기와 공의 관계를 용수는 八不中道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91)
중도의 가르침에는 ‘사상적 중도’와 ‘실천적 중도’의 두 가지가 있는데,사상적 중도는 무엇이 있다거나 없다고 보는 우리의 사고방식,또는 무엇과 무엇이 같다거나 다르다고 보는 등의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을 의미한다.
이것은 ‘모든 것이 얽혀서 일어난다’는 緣起의 법칙에 토대를 두고 있는 데,있다 혹은 없다라는 양 극단을 떠난 그 중간의 무엇이 아니라,양 극단 모두를 비판한다는 ‘중도’이다.『中論』의 ‘中’에는 이런 비판의 의미가 있다.
‘연기’란 ‘생명과 세계가 모두 얽혀 있다’는 진리인데,우리는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그러나 언어나 문자의 한계로서,각 단어들로 이루어진 문장은 각각의 단어에 해당하는 구성요소로 나누어지게 되는 모순이 생기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아비달마 불교도들이 잘못 이해한 부분은 『반야경』에서 비판되었고,용수는 『中論』에서 『반야경』의 空 사상을 논증하였다92).
『중론』이 주장하는 연기란 상호 의존한다는 上依性의 의미로 볼 수 있다
.제 8장 <행위와 행위자에 대한 분석>을 살펴 보면,行爲와 行爲 主體가 서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뒤에, ‘행위에 의해 행위 주체가 있다.그 행위 주체에 의해 행위가 작용한다.그 외에 성립의 원인을 우리들은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행위와 행위 주체는 서로 의존해서 성립하고 있다는 것으로 相依性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그러므로 ‘갑에 의해 을이 있고,을에 의해 갑이 있다’는 상의성이 성립하는 것이다.
91)최현각,『깨달음에 대한 禪的一考』(불교학보 36,1999),p.2.
92) 김성철,『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불교시대사, 2004), pp.31-33.
『장자』 제 2편 (齊物論)중에 나오는 <’이것’과 ‘저것’>편 에서도 같은 의미의 내용이 발견된다.
"사물은 모두 ‘저것’아닌 것이 없고,동시에 모두 ‘이것’아닌 것이 없다.
자기를 상대방이 보면 ‘저것’이 되는 줄을 모르고,자기가 자기에 대한 것만 알 뿐이다.
그러기에 이르기를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이것’은 ‘저것’때문에 생긴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것’과 ‘저것’이 서로를 생겨나게 한다는 ‘方生’이라는 것이다93)."
93)오강남 풀이,『장자』제 2편,10.(현암사,2005),p.81.
『노자』의 제 2장 또한 ‘相依性’의 논리가 그대로 드러난다.
"세상에서는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줄로만 알지만
이는 보기 흉할 뿐이요,
착한 것만이 착한 줄 알지만
이는 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유와 무는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며,
길고 짧음은 서로 비교되며,
높고 낮음은 서로 바뀌고,
소리와 울림은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를 따른다94)"
94)왕필,임채우 옮김『老子注』2.(한길그레이트 북스,2005),p.53
중론 제 9장 <주인공에 대한 분석>에서는 지각기관들을 소유한 자아,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는 자아가 있다는 생각을 비판하고 있다.
"만일 눈이나 귀 등을 떠나
주인공이 존재한다면,
주인공을 떠나서
눈이나 귀 등도 존재하리라
눈과 귀 등
그리고 괴로움이나 즐거움 등의 느낌이
소속된 주인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눈·귀 등도 존재하지 않으리라95)"
95)나가르주나,김성철 역주,『中論』제 18관법품 (경서원,2001),p.181.
여기서 ‘눈’이나 ‘귀’,‘코’등 그리고 ‘괴로움’이나 ‘즐거움’등의 느낌은 法들이다.이런 구성 요소들이 없으면 나라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으며,나라는 사람이 없으면 이런 구성요소들도 존재할 수 없다96).
바로 부처님의 연기의 깨달음을 용수가 세세하게 논리로써 펼쳐 보인 것이다.
96)김성철,『중론,논리로부터의 해탈,논리에 의한 해탈』(불교시대사,2004),p.123.
『중론』제 18장 <관법품>에서는 ‘그 어떤 법도 자아가 아니며,그 어디에도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만일 자아가 오온이라면
자아는 생멸하는 것이리라
만일 자아가 오온과 다르다면
자아는 오온의 모습이 아닐 것이다97)"
97)나가르주나,김성철 역주,『中論』(경서원,2001),p.301.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오온일 뿐인데,‘색·수·상·행·식’의 오온은 찰나 찰나 생멸한다.오온과 다른 자아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자아는 오온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나’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내가 없기 때문에 ‘나의 것’도 있을 수 없다.‘이것은 내 것이다’라든가 ‘이것은 나이다’라는 관념이 사라져서 無我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나의 소유물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다.
다음 게송은 무아와 무집착을 나타내고 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속한 것’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나’와 ‘나의 것’이 사라졌기 때문에
무아의 지혜를 얻은 자라고 부른다98)."
98)앞의 책,p.302.
‘자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집착이 사라져서 윤회하지 않는 열반을 성취한다.
"안에서건 밖에서건
‘나’라든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사라지면
取着이 사라진다.
取着이 사라지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일도 없게 된다99)."
99)나가르주나,p.303
取着이란 욕심이 구체화된 것인데,戒禁取란 올바르지 못한 外道의 계율을 열반으로 가는 훌륭한 계법이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하며 見取는 그릇된 견해 따위에 집착하여 그것들을 훌륭한 진실이라고 착각함으로써 전도된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그러므로 취착을 아예 제거하여 다시 태어나지 않는 열반을 성취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나’라든지 ‘나의 것’이라는 욕심이 사라지면 취착도 사라지고,다시는 윤회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성인들을 ‘아라한’이라 부른다.이렇듯 불교에서는 철저하게 ‘無我’를 가르친다.그러나 ‘무아’를 하나의 이념처럼 받아들이게 되면 또 다른 독단의 오류를 범하게 되는데,만약 누군가가 ‘무아’에 집착할 경우 부처님께서는 ‘무아’조차 부정하셨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때로는 ‘자아가 있다’고 가르치셨고
때로는 ‘자아가 없다’고 가르치셨으며,
때로는 ‘자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아가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가르치셨다100)"
100)앞의 책,p.304.
부처님은 설법하는 상대의 근기에 따라 알맞은 가르침을 설하셨는데 이를 ‘對機說法’이라고 한다101).
이러한 대기설법의 진정한 목적은 아트만을 찾아 안주하라는 것이 아니라,아트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윤회의 세계를 벗어난 열반을 성취하도록 인도하는 데에 있다.
용수는 ‘中論’에서八不中道를 나타내 보임으로써 緣起에 대한 이해를 확고하게 정립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中論의 논리로 해체해 나가다 보면 일체는 無自性·空이며 연기임을 깨닫게 되는데,결국 無我란 緣起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
101)對機說法:가르침을 받을 者의 素質에 適合한 가르침을 설하는 것.病에 따라서 藥을 주는 것에 종종 비유된다.
V. 結 語
불교 철학의 대 명제라 할 수 있는 ‘無我’를 추구하려면 필연적으로 ‘自我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我’,‘自我’,‘아트만’ 이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인간이 철학적 사고를 하게 된 이래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많은 철학자와 종교가들의 첫 번째 탐구 대상이었다.아무리 이 우주나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 한다고 해도,근본적으로 이 ‘我’라는 것을 꿰뚫지 않고서는 도저히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자아탐구의 문제’가 석가모니 부처님 탄생 전후의 인도사상을 바탕으로 시작되었다.부처님 이전부터 인도사회의 커다란 사상적 배경이었던 우파니샤드 철학은 수천 년 동안 인도는 물론 티벳,중국,한국,일본,동남아 지역을 넘어 서양에까지 전파된 신비주의 철학이다.
‘범아일여’ 를 내세우는 우파니샤드는,한 마디로 ‘아트만론’이라 할 수 있다.고대 인도인들은 인간의 영혼을 초월하여 우주와 합일할 수 있는 ‘아트만’의 존재를 굳게 믿었던 것이다.
이렇게 우파니샤드 학파가 주도해온 인도사회에 육사외도라 하여 업과 인과마저 부정하는 자유사상이 득세하는 혼란기에 등장한 석가모니 부처님은 혁신적 사고를 가진 사문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부처님 또한 이러한 자유사상가들과 같은 시대에 사유하고 고행함으로써,바라문 사상을 지양하는 새로운 사상 속에서 석존 자신만의 사유를 이어 나갔을 것이다.
부처님은 당시의 철학자들,성인이라 불리는 학자들로부터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려 하나 여의치 않자,스스로 보리수 아래에서 명상에 들어 결국 대각을 이룬다.이때 부처님께서 스스로 깨치신 진리는 ‘中道의 앎’과,‘緣起의 성찰’,그리고 ‘無我에 대한 투철한 깨달음’이었다.
앞서 살펴본 초기 불교 경전들은 ‘無我’를 근본 가르침으로 하는 부처님 말씀의 기록들로서,아함경,숫타니파타,법구경,사십이장경 등이 있다.이 경전들은 ‘나’라고 할 만한 根本 主體가 없음을 여러 가지 예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 이후,오랜 기간 암송으로 구전되던 경전들은 여러 차례의 결집과 아비달마 논서들의 발간 등을 통해 재정리 되는 과정에서 오히려 본래의 가르침과 멀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후 대승불교 시대로 넘어가면서 다시 한 번 초기 경전의 가르침에 대한 충실한 재해석이 이루어진다.특히 초기 대승경전인 『반야경』의 空 사상을 해석한 용수의 『중론』은 ‘무아’와 ‘연기’에 바탕을 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낱낱이 분석하여 해설하였다.
앞 부분에서는 이와 같이 無我의 淵源을 일관되게 추구해 보았다.
‘無我라는 이 붙잡기 힘든 개념은 무엇인가?
‘我’가 없다면 이 현실의 나는 과연 무엇인가?
‘我’라든지 ‘無我’의 개념은 업과 윤회를 빼 놓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의 둥그런 원을 가상하여 이 無始無終의 우주와 윤회를 설명해볼 수 있겠다.業力에 의해 실제로 생겨나는 존재의 문제는 바로 實存의 문제이다.
存在의 實存은 그것이 윤회에 의한 업력의 소산이든 유식에서 말하는 관념의 허상이든 간에 현실의 우리에게는 엄연한 실체인 것이다.눈 앞에 보이는 적나라한 실체를 어찌 신기루라거나 아지랑이와 같은 것,허깨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에 諸法은 無我이며 緣起라는 것에 대한 확실한 이해의 체득이 필요하다.모든 것은 항상하지 않으니 無常일 수 밖에 없고,이 無常이 다시 苦를 불러들인다.일체에 ‘我’가 없음을 깨달아 ‘無我’임을 여실하게 관찰해야한다.또한 ‘緣起’의 相依性을 이해하여 無我임을 납득해야 한다.
그러한 깨달음으로써 앞서 가상해본 둥그런 원과 같은 끝없는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결국 모든 ‘실체’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관념과 허상의 연결고리일 뿐인 것이다.
무아의 문제는 이렇듯 부단한 수행정진과 공부를 통해 투철하게 깨달아야 할 대상이다.무아의 연원을 추구해 가면 그 결과로 我도 無我도 말할 것이 없다는 데에 이르게 된다.중요한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강조하신 것처럼 實存하는 존재의 윤리적·실천적 삶에 의한 無我行이다.더 궁극적으로는 실존하는 윤회의 실상을 ‘無我’로서 觀想하여 해탈을 이루는 것이다.실제로 초기 경전의 경우,대승불교와는 달리 훨씬 단순하게 직접적으로 無常,無我,中道,緣起,輪廻를 통해 이 해탈의 문제를 뚜렷이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이 ‘諸法無我’가 불교전체를 아우르는 대전제이지만 초기불교에 치중해 무아의 연원을 추구하게 된 이유라고 생각된다.
無我란 내가 막연히 어딘가로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닌 여여한 상태로서,언어를 떠난 자리임을 추정해보게 된다.
이러한 추정에서 ‘無我’라는 대전제에 대한 탐구가 해탈의 문제와 함께 새롭게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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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onHistoryof‘Noo‐‐Self(無我)’
Chang,Eunn‐‐hwa
Department of Buddhism
Graduate School
Dongguk Universit
- 생략 -
碩士學位論文
無我의 淵源 硏究
張 銀 化
指導敎授 崔 玄 覺
이 論文을 碩士學位 論文으로 提出함
2005年 12月 日
張 銀 化 碩士學位 論文을 認准함
2005년 12月 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