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여래장(如來藏, 산스크리트어 타타가타가르바/tath?gata-garbha)>

무한대자유 2017. 10. 9. 14:51

         <여래장(如來藏, 산스크리트어 타타가타가르바/tathāgata-garbha)>

              

 

   여래장(如來藏)이란 비록 중생이 번뇌 객진에 속박돼 있으나 여래가 될 가능성(可能性)을 본래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즉, 중생에게는 본래 여래가 될 태(胎), 종자(種子), 성(性)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생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명제를 가지고 출발하는 것이 여래장사상이다.

   그리하여 여래장이란 모든 중생의 탐심과 분노심 등의 번뇌 안에 은밀히 감추어져 있는 자성청정(自性淸淨)한 여래법신(如來法身), 중생 안에 감추어진 여래의 인(因)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번뇌로 말미암아 나타나지 않고 있는 자성청정심이 여래장이다. 여래장은 본질적으로 불성(佛性) 또는 진여(眞如)와 동일한 개념이고, 모든 중생은 여래의 씨앗(種子), 즉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여래장사상의 핵심이다.

   여래장사상은 우선 우리 중생들에게 성불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줌과 동시에 중생세간(衆生世間)의 존재 양상을 설명하고 실천 수행의 근거를 마련해 주는 매우 중요한 대승철학이다. 즉, 일체중생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여래장(如來藏)을 증득해야 바르게 산다(解脫, 涅槃)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여래장의 선언은 우리 중생에게 해탈과 열반의 희망과 확신을 주는 가르침이다.

   여래장사상은 부파불교 아비달마의 심성론(心性論) 중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을 이어 받은 것이다. 심성본정설은 인간 마음의 본성(本性)은 본래 청정하다는 것으로서 부파불교 대중부(大衆部)에 의해서 주장된 사상이다. 마음이 때로는 번뇌에 뒤덮이고 타락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 번뇌는 객진번뇌(客塵煩惱)로서 외래(外來)의 2차적 존재에 불과하고, 마음의 본성 자체는 어디까지나 청정무구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함을 자각해 수행을 통해 청정한 심성을 현현(顯現)시키면 거기에서 깨달음을 얻고 이상의 인격자인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 대중부의 심성본정설이 후일 대승불교에서 여래장(如來藏) 혹은 불성(佛性)이라는 사상으로 발전했다.

   또한 여래장사상은 대승불교의 초기사상인 반야 공관설(般若空觀說)을 사상적 배경으로 해서 ‘공이 즉 자성청정’이라는 학설을 새롭게 전개시켰다. 이론적인 탐구로 떨어지기 쉬운 반야 공관의 오류를 보완하고 자비의 측면을 새로이 부각시키기 위해 대두된 여래장사상은,

    ① 원시불교의 근본사상인 연기설(緣起說)을 이어받아,

    ② 연기이기 때문에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는 반야 공관설이 생겨났고,

    ③ 그 반야의 공성(空性)을 일체유정(一切有情)에게 체득시키고자 하는 대승적 구경일승(究竟一乘)의 입장에서 성립됐다.

   마음의 본성은 청정하고 번뇌는 객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데서 발단된 여래장사상은 인도에선 유식설(唯識說)보다 먼저 성립돼 대승불교의 이대 조류인 중관학(中觀學)이나 유식학(唯識學) 사상과는 다른 계통을 이루어졌으며, <능가경(楞伽經)> · <밀엄경(密嚴經)> ·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대성됐다.

   특히 <여래장경>에서 ‘일체중생실유여래장(一切衆生悉有如來藏)’이라고 천명한 뒤부터 확립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는 어려운 반야의 지혜보다는 자비가 보다 깊이 있게 전개됐으며, 나아가 중생 모두에게도 성불(成佛)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종교적 실천으로서 자비의 측면을 새롭게 부각시킨 여래장사상은 중생의 신행(信行)을 새로운 차원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초기 여래장사상을 대표하는 경전에는 <여래장경>ㆍ<부증불감경(不增不减經)>ㆍ<승만경(勝鬘經)> 등이 있다. 이것을 여래장사상 제1기 경전이라고 한다.

   그 뒤 4, 5세기경에 <보성론(寶性論)>이 저술돼, 그 사상적 체계가 정립됨으로써 대승불교의 한 학파의 성격을 띠고 조직화됐다. <보성론>을 둘러싼 이 시기의 논장으로는 <대승장엄경론(大乘莊儼經論)>ㆍ<불성론(佛性論)> 등이 있으며, 이를 여래장사상 제2기 경전이라고 한다. <보성론(寶性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여래장을 해석하고 있다.

    ① 여래의 법신(法身)이 중생에 널리 차 있다.

    ② 중생은 여래와 마찬가지로 진여(眞如)를 본성으로 한다.

    ③ 중생은 장래 여래의 자격을 가질 수 있는 인(因)을 가지고 있다는 3가지 뜻을 세웠다.

   그리고 여래장사상은 아뢰야식(阿賴耶識 alaya-vijñana)의 체계에 의해 괴로움의 원인을 고찰하는 유식설과 교섭하게 됨에 따라 해결이 어려운 인간의 현실적 마음의 문제로 폭을 넓혀갔다.

   “요컨대 미혹의 세계가 벌어지는 이유와 과정을 설명한 것이 유식사상이라면 미혹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갈 수 있는 가능성과 그 근거를 설명한 것이 여래장사상이고, 바로 그것을 설한 경전이 <능가경(楞伽經)>이다.”- 계환 스님.

   그리고 이에 속하는 경론에 <능가경> 외에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이 있다. 이것을 여래장사상 제3기 경전이라고 한다.

   그리고 7세기 중엽 이후는 밀교(密敎)와의 결합으로 여래장사상이 밀교화 된 시기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여래장계 경론을 그 성립연대 및 사상의 흐름을 통해 3기로 구분하는 것은 여래장사상 연구에 있어서의 일반적인 입장이다.

   여래장은 초기불교의 무아(無我)와 부파불교에서 윤회의 주체[개아(個我)]가 있다는 두 주장 사이의 싸움을 종식시키고, 중관학파와 유식학파를 재통합한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이다. 대승불교에서 이루어지는 수행, 즉 참선이든 염불이든 주력이든 간경이든 모든 수행은 여래장사상의 기초 위에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수행을 하면 모두가 성불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했다. 이러한 여래장사상의 특징은,

    ① 일체중생에게는 여래장이 있으며 중생이 아무리 윤회를 되풀이하고 번뇌에 오염되더라도 여래장은 오염되지 않고 소실되지도 않는다.

    ② 일체중생의 탐 ․ 진 ․ 치 등 갖가지 번뇌 중에는 여래장, 즉 여래의 지혜, 여래의 눈, 여래의 몸이 있다.

    ③ 여래장에는 생사가 없다. 여래장은 유위의 상을 떠나 있으며, 상주불변한다.

   여래장식(如來藏識)과 불성(佛性)은 유식학에서는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준유식사상이라 할 수 있다. 여래장은 본질적으로 불성(佛性) 또는 진여(眞如)와 동일한 개념이고, 여래장(如來藏)사상과 불성(佛性)이 유식학에서 채택됨으로써 힘을 얻었다. 다시 말하면 여래장식은 아뢰야식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심성설로서 우리 인간의 마음에 부처님과 같은 여래의 심성을 부장(覆藏)하고 있다는 사상을 펴나가는 심성의 이름이다.

 

   <대방등여래장경>에 의하면,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불안(佛眼)으로 일체의 중생을 관찰해 보니 중생의 탐욕과 성냄과 우치한 마음 가운데에 여래의 혜(慧)와 여래의 안(眼)과 여래의 몸이 있으며, 이 여래는 부동자세로 결가부좌하고 있더라. 선남자야, 일체의 중생은 어느 세계에 있더라도 번뇌로 가득 찬 몸 가운데 여래장이 항상 번뇌에 오염되지 않고 진리다운 덕상(德相)을 구비하고 있는 것이 나와 같아서 하나도 다름이 없더라.”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성은 여래장과 같은 것으로서 부처님과 다름없는 지혜로움과 지혜의 눈과 몸을 구족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우리 중생심을 크게 진여문과 생멸문으로 나누어 진여문의 진여심(眞如心)을 여래장이라 하고, 생멸문의 생멸심(生滅心)을 아뢰야식이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 여래장을 의지해 생멸심이 있으니, 불생불멸의 진여가 생멸과 화합한 것이 아뢰야식이다. 그러므로 여래장과 동일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다른 것도 아닌 것이(非一非異) 아뢰야식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생멸의 세계는 진여, 여래장이 연을 따라(隨緣) 생겨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연기현상을 진여연기(眞如緣起) 또는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라고 한다. 마치 잔잔한 바다에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는 것처럼 진여에 무명풍이 불어서 현상세계가 벌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삼계는 허위요 마음이 만든 것(唯心作)이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파도가 바닷물과 다르지 않듯이, 현실세계가 진여와 다른 것이 아니다. 허위의 삼계(三界)를 만들어 낸 것은 무명만이 아니고 진여도 그것에 참예돼 있다.

   그러므로 현실의 체는 진여이나 깨달아 있지 않을 뿐이다. 현실에서 보면 현실과 진여는 다르나 진여 쪽에서 보면 진여와 현실은 다르지 않다. 진여 외에 현실은 없다. 다시 말해서 중생의 입장에서는 중생과 부처가 다르나 부처의 입장에서는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다. 따라서 <화엄경>에서 설하고 있듯이, 부처와 중생이 차별이 없는 것이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그래서 불자들이 “성불합시다”라고 인사를 한다. 그러나 남방불교에서는 그런 말을 하면 아주 불경스럽게 생각한다. 성불은 오직 부처님에게만 해당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승권에서는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여래장 때문이다.

   헌데 연기의 가르침이 자아(自我)니 진아(眞我)니 주인공이니 하는 존재론적인 실체를 상정하고, 그것과 하나 되는 것쯤으로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여래장(如來藏)이나 진여(眞如)나 불성(佛性)을 존재론적인 실체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존재론적인 실체는 어떤 경우라도 부처님 법에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다. 존재론적인 입장이 아닌 수행과정에서 발현되는 여재장이라야 부처님 근본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여래장사상을 비판하는 분들도 있다.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에 대한 비판>

   「불교의 역사는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법을 중심한 체계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을 중심한 체계이다.

   법을 중심한 체계는 초기불교에서 남ㆍ북방의 아비담마를 거쳐 반야중관과 유식유가행으로 전승돼 오는데, 이것이 불교의 정통이요 직계이다.

   믿음을 중심한 체계는 정토 계열과 여래장 계열을 들 수 있다. 물론 믿음도 중요하지만 불교는 법을 중심한 체계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입멸하시면서 내가 입멸한 뒤에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라고 유훈을 하셨다.

   여래장은 우리도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에서 출발해 우리가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여래장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여래장은 믿음의 용어이지 법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법을 중심하는 초기불교-아비담마-반야중관-유식불교로 이어지는 주류의 흐름 그 어디에도 여래장(如來藏)이라는 법수는 언급되고 있지 않다.

   거듭 말하지만, 불교는 법(dhamma)을 중심한 체계이다.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을 체계화한 것이 아비담마(對法)이고, 이러한 법의 공성(空性) 혹은 무아(無我)를 직관할 것을 다그치는 것이 반야ㆍ중관이며, 이러한 법을 식(識, 알음알이) 중심으로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유식유가행이다. 그래서 인도불교의 주류는 초기불교-아비담마/아비달마-반야ㆍ중관-유식유가행이며 그 중심에는 법이 있다.

   일본인 불교학자 히라까와 아끼라(平川 彰, 1915~2002)의 설명처럼 여래장 계열의 불교는 법을 중심한 체계가 아니고 믿음을 중심한 체계이다. 그러므로 여래장 계열의 불교에 나타나는 일심ㆍ여래장ㆍ불성 등의 술어는 믿음을 토대로 한 용어이지 법의 용어는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장 계열에 속하는 <화엄경>, <법화경>, <대승열반경> 등과 특히 일심(一心)을 강조하는 <대승기신론> 등의 논서는 믿음을 토대로 한 가르침이다.

   여래장 계열의 경과 논서들은 인도불교에서는 결코 법을 중심하는 주류에는 속하지 못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중국불교학이 후대로 갈수록 화엄을 중심으로 통합되고 있기 때문에 중국불교의 아류에 속하는 우리 불교는 아무런 비판 없이 화엄의 교학을 최고로 놓고 있다. 그러나 한국불교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의 입장에서만 봐도 여래장 계열의 여래장ㆍ불성ㆍ일심은 산냐(sañña)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대승열반경>에서 설하고 있듯이 불성은 연기의 다른 이름이라고 봐야한다. 이렇게 본다면 일심이니 유심이니 하는 말들은 모두 연기로 혹은 연기의 장으로 이해해야할 것이다.」- 각묵 스님

   다음은 불교신문 내용을 정리하신 너럭바위님과 여래장사상에 대한 비판의 글을 발표하신 진흙속의연꽃님의 글을 재정리한 것이다.

   여래장(如來藏)사상은 인도에서 발생된 사상을 말하고, 불성(佛性)사상은 중국에서 발생된 사상을 말한다. 여래장사상은 부처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고, 불성사상은 이미 부처가 될 성품을 타고 났다고 하는 것이다. 불성사상에 따르면 이미 우리들은 부처라는 것이므로 그 성품을 보기만 하면[견성(見性)] 성불하는 것으로 본다. 이는 중국인들의 ‘현실주의’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인도에서 여래장사상은 단지 가능성만 있어서 성불하기까지 무량한 세월이 걸리는 것으로 보지만, 이 사상이 중국으로 건너 왔을 때 현실을 중요시 하는 중국인들이 유교문화의 ‘성품(性)’을 ‘부처(佛)’와 접목해 ‘불성(佛性)’을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처가 되는데 있어서 부처님이 보살로 수행한 것처럼 무량한 세월의 흐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생에서 성품만 보게 되면 성불이 가능한 것으로 본다.

   「여래장(마음, 자아)이 상주 불변이라는 것은, 무상ㆍ고ㆍ무아ㆍ연기를 강조하신 석가모니의 주장과 다르다는 것이다. 마음(여래장)은 뇌의 기능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이는 석가모니의 생각과 일치되며 현대과학으로 증명됐다. 여래장사상이 나온 것은 죽음의 불안에 떠는 낮은 근기(根機, 과학이 덜 발달된 시기)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이다. ‘마음은 뇌의 기능 또는 활동이다’는 사실이 최근 20여년 사이에 뇌 과학의 발달로 인해 밝혀졌다. 우리 불교도 하루 속히 이 과학적인 사실을 받아들여 이것과 상치되는 교리는 수정해야 한다. 아니 석가모니가 말씀하신 초기불교의 교리로 돌아가면 이 과학적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 강병조

   「혹자는 여래장을 마음이라 강변한다. 그런데 불교 주류의 가르침은 마음(心)을 식(識)과 동의어라고 설한다. 그리고 불교 주류의 가르침은 오온 외에 절대로 ‘나’라는 실체가 없다고 강조한다. 식(識)은 오온의 하나의 구성요소이며, 오온은 무상이요, 고요, 무아요, 조건발생(緣起)이라는 것은 불교의 상식 중의 상식이다. 그러므로 만일 여래장이 마음이라 한다면 여래장은 무상이요, 고요, 무아다. 절대로 상주불변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만일 오온 외에(非卽非離蘊) 일심이나 여래장이 따로 있다 한다면 이것은 불교의 근본원리에 어긋나는 상식 이하의 유치한 외도적 발상이며 현양매구(懸羊賣狗)일 뿐이다.…

   분명 여래장 계열의 경론은 시대의 산물이다. 그 시대가 외도의 가르침이 성행하는 때였기에 외도적 성향을 가진 하근기 중생들을 불교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상주불변의 여래장이나 불성이 필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불교 2600년의 전개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이 시대에서까지 비불교적이요 외도적 사유를 마구 해대는 여래장 계열의 가르침에다 일승이니 최상승이니 하면서 목을 매달 필요가 있을까. 더군다나 무아를 역설하는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는 한국불교에서.」 - 불교신문 2345호/ 7월21일자(각묵).

   그러나 우리 한번 생각해보자. 부처님의 가징 큰 궁극의 가르침은 「무상(無常)ㆍ고(苦)ㆍ무아(無我)」도 아니고 연기법(緣起法)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부처님 궁극의 가르침은 여래장사상이 옳으니 틀렸느니 하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부처님 궁극의 가르침은 대자대비(大慈大悲)한 자비사상(慈悲思想)이다. 그 거룩한 자비사상의 대상은 왕후장상이나 재벌 혹은 식자층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하근기의 어리석은 중생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부처님이 걱정하고, 구제하고자 하신 무지몽매하고 가난하고 병약한 하근기의 중생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 부처님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것을 마음에 담고 생각해야 한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은, 하근기의 중생이 부처님 품안에 들어오는 일이라면 부처님이 이미 말씀하신 틀을 벗어나는 일이 있더라도 그 역시 부처님 뜻으로 확장해서 받아들인다고 봐야 한다.

   남에 대해 말하기 좋아하는 어떤 인사는 시골의 아낙네들이 부처님 앞에 기도 들이는 것을 두고 부처님 근본 가르침에 어긋나는 행태라고, 그것은 불교를 미신으로 타락시키는 것이라고 혹평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지나친 법상(法相)이고, 분별이다. 그런 비판을 하는 사람보다 부처님 앞에 꿇어 엎드린 아낙네가 몇 배 더 절실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법의 불교라고 말하지만 하근기 인생은 법을 잘 모른다. 그러니 그들에겐 믿음의 불교가 더 절실한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가 미신으로 타락해도 그냥 두고 보란 말인가 하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 부처님도 외도의 사상이라도 필요한 것은 받아들였다시피 큰 틀에서 생각하자. 식자층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지향하는 도사들은, 부처님 근본 가르침을 더욱 깊이 천착하는 상구보리를 지향하되 하근기의 중생들이 추구하는 불교, 하화중생을 살려나가자는 말이다. 외골수로 한 길만 생각하고, 내 뜻과 어긋나는 것은 무조건 배척하는 일방주의를 지양해야 한다. 외골수로 한 길만 생각해서 자신의 관심이라는 좁은 대롱(竹筒)을 통해서만 보려는 관견(管見) 같이 일방적인 주장만 하다가보니 언사가 과격해져서 시중잡배 같은 저속한 언사를 마구 쏟아내고 있으니 듣기 민망하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견해(見解)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자대비에 있다고 생각한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고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

 

출처 : amisan511
글쓴이 : 아미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