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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존 케이지의 <4분 33초>와 라우센버그

무한대자유 2017. 8. 14. 20:57


존 케이지의 <4분 33초>와 라우센버그

노인영 논설위원  |  nohproble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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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3.31  08:35:26  |  조회수 : 13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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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8월 29일, 뉴욕 우드스탁의 매버릭 홀에서는 이제 막 명성을 얻은 존 케이지의 신곡이 연주될 예정입니다. 피아니스트 데이빗 튜더가 무대 위로 걸어 나와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지요. 4분 33초간. 그가 한 일이라고는 마지막에 의자에서 일어나 무대 밖으로 나간 것뿐이었죠.

3악장으로 되어 있는 악보에는 ‘TACIT(조용히)’이라는 글만 쓰여 있고, 오선지에는 음표가 하나도 없었지요. 곡이 연주되는 동안 케이지는 빨간색 안락의자에서 꼼짝 않고 앉아 있었습니다.

당시 <4분 33초>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히피조차 분노케 했습니다. 물론 음악계에서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고요.

그러나 거기엔 아무 소리도 없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밖에서 부는 바람 소리,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 객석에서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건기침 소리, 안내 책자를 만지는 소리....

자연과 관객들이 바로 연주자였습니다. 이렇게 <4분 33초>는 세상의 모든 소리가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지요.

1972년에는 보스턴 하버드 광장에서 존 케이지가 직접 <4분 33초>를 공연하였고, 점차 사람들의 생각도 변하면서 지금도 종종 공연장에서 연주되고 있습니다. 곡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 변주(變奏)를 선사하죠.

뜬금없이 웬 음악이냐고요? 1950년대 초 노스캐롤라이나 블랙마운틴 대학에는 ‘해프닝’이라는 행위예술 집단이 생겨났습니다. 개념미술, 즉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개념을 퍼포먼스 형태로 표출하는 예술 집단이지요.

그 중심에는 로버트 라우센버그, 그의 친구이자 작곡가인 존 케이지, 안무가 머스 커닝햄이 함께 했습니다.

   
 

이 그림은 지난번 말레비치를 소개할 때 포함하려 했던 또 하나의 흰색, 라우센버그의 <백색 그림(1951)>입니다. 그는 예술의 각 장르를 넘나들며 가능한 모든 상상력을 발휘했던 인물이지요.

여기서도 백색은 역시 극단적 순수입니다. 스승이던 요제프 알베르스의 엄격한 ‘색채론’에 도전하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는 역시 블랙마운틴 대학 교수였던 데 쿠닝으로부터 드로잉 한 점을 얻어냅니다. 당시 데 쿠닝은 전 세계가 존경하는 추상표현주의 작가였죠. 한 달 내내 고생해가며 그 드로잉을 지우더니 새로운 작품이라며 <지워진 데 쿠닝의 드로잉(1953)>을 발표합니다.

객기처럼 보이지만, 그는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에게 저항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는 당시 대세 추상표현주의가 예술을 지나치게 거창한 것으로 포장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불필요하게 어려워지고.

그는 우리 현실이라는 게 다 고만고만하며, 그렇다고 그것이 흉하거나 볼품없는 것은 아니라고 강변합니다. 그래서 작품 소재도 박제 염소, 신문, 라디오, 시계와 같은 일상적인 오브제를 결합하죠. 그러면서 캔버스를 초월하여 회화의 공간을 확장하지요.

   
 

<모노그램(1955~1956)>입니다. 회화의 범주는 벗어났지만, 조각으로 분류될 수 없는 형태죠. ‘콤바인 페인팅 Combine Painting’입니다. 그는 이런 연작을 계속 발표합니다.

캔버스에 시선이 머물러 있는 관람자에게는 낯설지만, 예술은 다시 대중의 곁으로 다가옵니다. 장르 간 경계가 허물면서, 쉽게.

소위 하위문화를 재료로 삼아 예술과 일상 간의 틈 사이에서 활동하는 그는 네오 다다(Neo Dada)를 거쳐, 팝아트를 이끌게 됩니다. 당연히 다음에 소개할 앤디 워홀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지요.

원시에는 회화, 조각, 음악, 언어, 뭐 이런 경계가 없었을 겁니다. 이런 분류는 복잡해진 현대인들의 머리에서 나오는 부질없는 문화적·지적 유희인지도 몰라요.

어렵게 생각되던 예술에 저항해 단순하고 대중적인 문화적 경향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합니다. 거기에 라우센버그와 존 케이지도 함께 있었죠. 여기까지가 작품 <4분 33초>의 배경입니다.

케이지는 훗날 백남준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비디오 아트’가 탄생하죠. 예술가들도 우리네와 별반 다르지 않아요. 얽히고설켜 서로 등 비비며 그냥 그렇게 사는 겁니다.

   
 

자, 편안하게 사진 한 장을 감상해 보시죠. 안면도 해변에 설치된 현악기 조형물입니다. 몸이 몹시 아픈 기창이 형이 보내줬어요. 파도, 바람, 태고의 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나 봅니다. <4분 33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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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노인행복신문
글쓴이 : 만청 주장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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