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이렇게 뜻 깊은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러한 너무 뜻이 깊은 자리에 청화(淸華) 큰스님께서 생존해 계신다면은 얼마나 좋았겠는가,얼마나 큰 스님께서 기뻐하셨겠는가 하는 생각이 막 듭니다.
이제 큰 스님 가신 지가 오래됐습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재가불자께서 훌륭한 일을 하신 것에 대해서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보통 사바세계(娑婆世界)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바세계라는 그 용어는 인도말인데, 그것은 인토忍土라, 또는 감인토堪忍土라.
이것은 우리 인간이 사는 세계는 끊임없이 우리가 괴로움, 질병과 고통, 가난과 불안, 공포, 전쟁, 그리고 죽음이라고 하는 이런 것을 우리는 끊임없이 감내하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세계라고 해서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사바세계 그랬지 않습니까?
그러면 부처님께서, 어땠습니까. 설산에서 가셔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그 방법을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가서 부단히 활동을 하면서 돈을 벌고 이러면서 우리가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것은뭡니까. 전부 다 복 받고 행복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단히 일평생을 노력을 하지요.
그러나 그것이 어떻습니까.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해결을 보신 가르침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고통으로 충만되어져 있는 이러한 사바세계에서 그것을 영원히 해결한 그러한 저쪽의 극락의 세계, 해탈의 세계로 가는 그 방법론을 부처님께서 제시를 하셨습니다.
이쪽에서 고통 받는 이 생에서 저쪽의 행복의 세계로 간다는 뜻이 바라밀 아닙니까.
우리가 상식적으로 불자라 하면은 누구나 다 아는 바로 육바라밀, 그 바라밀이 바로 그러한 방법론이지요. 바라밀의 뜻은 이 쪽 언덕에서 저 쪽 언덕에 이른다, 고통에서 벗어나서 영생의 행복으로 간다는데 그런 뜻 아닙니까.
그런데 그러한 방법론에다 여섯가지의 그러한 방법론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이 소위 육바라밀이지요. 그 바라밀 여섯개를 행하게 되면은 우리는 영생의 행복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인생 고난에 우리가 추구하는 그 모든 고난을 영구하게 해결할 수 있는 길이지요.
그것의 첫번째가 뭡니까. 우리가 너무 잘 알지 않습니까.
보시, 인욕, 지계, 그 다음에 정진, 선정, 반야바라밀 여섯가지지요.
그런데 그 중에 첫번째가 보시입니다. 그런데 보시 뒤에다 바라밀이 붙었습니다.
인욕도 그냥 인욕이 아니고 인욕바라밀입니다.
우리가,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나를 해꼬지를 한다, 어떠한 고난이 나한테 닥치면 우리는 그것을 참지요.
그냥 참는 것은 그냥 인욕입니다. 그냥 참을 뿐이다. 억지로 참는 거지요.
그러나 그것이 여기에서 말하는 부처님께서 그냥 단순하게 참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근본적인 그 인욕을 해결할 수가 없지요.
그것을 바라밀이 되게 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육바라밀의 맨 끝에 있는 것이 반야바라밀인데 앞에 있는 것이 그 오바라밀은, 반드시 반야바라밀에 입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이 뭔 말이냐 하면은, 만약에 우리에게 어떠한 어려운 일이 닥치게 된다고 하면은,
만약에 바라밀로써 인욕바라밀이 될 때는 어떻습니까. 바라밀이 뭡니까. 반야바라밀이 뭡니까.
반야라는 것은 제법공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것은 하나의 허망상이다.
그것은 우리가 배율을 이긴 세계, 우리의 감각기관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배율 열 배, 스무 배 되는 돋보기를 가지고 우리 피부를 보면 이렇게 안 보이지요.
아무리 미인도 한 백 배 되는 돋보기를 얼굴에 대면 어떻습니까. 모공이 아마 구멍이 뽕 뽕 뚫어진 것 같이 보일 겁니다. 그것은 뭐죠. 우리의 감각기관은 굉장히 무딥니다. 그러니까 과학에서도 그러지 않습니까. 과학이 발전하는 것은 우리 감각기관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전자현미경을 만들어서 수백만 배를 확대해서 미시의 세계를 보고 허블 망원경(Hubble 望遠鏡)같은 것으로 확대해서 우주를 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이런 감각기관에 한계를 극복해서 보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세계는 배율을 이긴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산이 있고 네가 있고 내가 있는 것이지마는 배율이 예를 들어 백만 배, 천만 배 정도 된다면은, 전자현미경 정도의 수준을 우리가 갖는다면은, 우주에는 나라는 존재가 있을 수가 없지요. 모든 것이 원자 아니면 전자의 수준으로만 보이겠지요.
배율을 이긴 우리 육안이 옳습니까. 전자현미경 정도의 수준이 옳습니까. 당연히 전자현미경이 옳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뭐냐면 착각을 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배율이 무한대가 된다고 한다면은 어떻습니까.
원자, 전자도 뭐요, 현대물리학이 밝혔듯이 다 에너지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배율을 이긴 감각기관만 갖고 있기 때문에 네가 있고 내가 있고 이러한 우주에 있는 산이 있고 모든 물질적인 존재가 있지요.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거는 뭐냐, 배율을 이길 때 우리 감각기관이 착각을 하고 있다는 거에요.
존재하지도 않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통해서 우리 감각기관이 무한대로 확장이 되게 된다 그러면은 그럴 때는 우리 안에 새로운 감각기관이 생긴답니다.
새로운 의미, 업장이 녹게 되면은, 그러면 모든 존재는 하나의 불성, 부처로 보인다는 겁니다. 순수한 에너지 빛이지요.
그래서 반야(般若)라는 것은 뭣이냐. 반야라는 것은 곧 공(空)입니다. 왜 공이냐. 그것은 있지가 않다. 착각을 해서 우리가 산이 있고 네가 있고 내가 있는 것이지, 그 착각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밤중에 새끼줄이 이렇게 꾸불꾸불 있으면 멀리서 보면 뱀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멀리서 봐서 우리가 착각해서 뱀이지, 오해하는 것이지 그것은 뱀은 아닌 거지. 우리가 있다고 보여도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야바라밀은 뭐냐면은, 그러면 존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느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그 자리는 바로 보게 되니까, 정확하게 보면은 산이 산이 아니라 뭐죠?
순수한 불성 에너지인 빛이라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도 지금 나라는 개체가 이렇게 있지마는, 바로 보면 어떻습니까. 순수한 에너지의 빛이라.
그러한 고배율, 무한대의 배율에서는 내가 존재할 수가 없고 여러분들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공이라는 말이지요. 다만 공이 아니고 잘 못 본 그것이 없는 것이지 바로 본 그것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성의 빛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인욕을 해도 반야바라밀에 입각을 하게 되면은 나한테 해꼬지를 하는 그 대상도 없고, 꼬지를 당하는 나도 없고, 해꼬지를 하는 그것도 없다 말예요, 그것도 공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천지우주가 하나로 통일된 부처님일 뿐이지요. 불성 뿐이지요.
이렇게 될 때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습니까. 우리는 진여불성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인욕이 아니라 인욕바라밀을 하라 이렇게 되겠습니다.
이 묘금륜원(渺金輪園)을 설립을 하는 데도 수많은 분들이 동참을 하고 많은 분들이 여기에 응원을 하고 참으로 많은 귀한 인연들이 모였습니다. 이런 것도 무엇입니까.
단순히 이런 것들이 여기 모인 여러분들이 그냥 보시만 했다 하면, 그것은 공덕보만 될 것입니다.
이 금강정진회 이 묘금륜원에 동참하신 분들은 전부 다 보시바라밀을 했다고 믿습니다.
보시하는 것이 단순히 보시가 아니라 바라밀이 될 때는 보시하는 자와, 보시를 받는 자와, 그리고 보시 자체도 뭡니까,
바로 보게 되면은 공입니다. 다만 공이 아니고 뭐죠. 바로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공을, 부처는 뭡니까, 반야바라밀을 깨달은 분입니다.
그래서 보시 하나도, 부처님께서는 뭐지요. 그것이 반야바라밀이 되게 했습니다. 단순한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오늘 이러한 묘금륜원의 개원식에서 여기에 묘금륜원에 동참해 주신 모든 분들은 보시바라밀을 행하셨고 그래서 그 인연으로 앞으로 많은 복도 받으시겠지만 기필코 다 성불하실 거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배광식 경주 이사장님을 비롯해서 참으로 귀한 일을 해주신, 여기에 동참하시고, 여기에 오시고, 모든 분들께 참으로 감사한 합장을 올립니다.
그리고 이 분들이 기필코 다 성불하기를 기원드리면서 우리 다 함께 이 뜻 깊은 불사에 동참해주신 분들을 위해서 우리 크게 박수 한 번 쳐주시기 바랍니다. (박수)
이 묘금륜원(渺金輪園)은 금방 말씀드린 대로 작은 인연이 아닙니다.
바라밀이 되게 되는, 하나의 보시도 반야바라밀이 되게 되는 그러한 참으로 뜻 깊은 그러한 법法의 장입니다. 그렇다면은 앞으로, 경주 이사장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마는, 이 자리는 바로 금타 대화상님, 그리고 청화 큰스님의 가르침을 펴는 자리이고 그렇게 해서 공부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좀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금타 대화상(金陀大和尙)님이라든지, 청화(淸華)큰스님의 가르침- 이렇게 하면 조금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큰스님의 가르침은 가르침인데 큰스님의 법일 수도 없고 금타 스님의 법일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우주의 도리인 것이고, 모든 부처님이 밝히신 도리인 것이고, 그리고 역대 조사님이 밝히신 도리를, 그것을 현대에 와서 금타대화상(金陀大和尙)께서 다시 가장 소중한 정통적인 가르침을 뽑아서 바로 지금 우리한테 일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계승하셔서 청화(淸華) 큰스님이 다시 그 뜻을 펴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큰스님의 법도 아니고 누가 창조한 법도 아닙니다.
본래 있었던 것을, 소중한 부분을, 우리가 알지 못하고 왜곡되어져 있는 부분, 그리고 모든 인류가 앞으로 미래에 나아가야 될 방향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인류는 어떻습니까. 종교적으로도 너무 험악한 시대입니다.
내 종교가 아니면은, 지금 보십시오, 무참히 살해하는 그런 시대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진리는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런데 지금 자유롭지가 않습니다.
종교 간에 그 갈등은 너무 심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에 바로 큰스님의 이러한 가르침에는, 금타대화상(金陀大和尙)님의 가르침에는 바로 인류의 모든 종교를 하나로 통합을 하고 그리고 과학이 앞으로 나가야 될 그 길을 제시하고, 그리고 불교 내에서도 종파 간에 내 것만 옳고 다른 것은 다 틀리다고 하는 것을 명확하게 해결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하시는 이 공부는 단순히 청화(淸華) 큰스님의 염불선,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 인류가 나아가야 될 모든 종교와 철학이, 과학이 앞으로 가야 될 그 방향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말씀을 하셨겠는가? 이 청화큰스님의 이러한 법문집하고 아까 말씀한 금강심론(金剛心論)에 의거해서 몇 대목만 소개해서 올리겠습니다.
큰스님께서 팔십이 넘으셔서 그 때 와병 중이셨습니다
그때 뭐를 번역하셨냐면은,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번역하셨습니다.
그 때 강원도에서 한 철 동안 참으로 오직 한 번도 방 밖에도 안 나오시고서 그것을 번역하시고서 그 때 하시는 말씀이
“내가 육조(六祖) 스님의 그러한 마음, 그 마음으로 번역을 했네.” 그러시대요..
그런데 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그 노후에 번역을 하셨겠는가.
그것은 육조단경 해제(解題)의 말미에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가 보통 선종(禪宗)하면은, 대승의 선종(禪宗)은 달마(達磨)에서 육조까지가 정통적인 조사입니다.
제1조가 달마(達摩)대사, 2조가 혜가(慧可), 3조가 승찬(僧璨), 4조 도신(道信), 5조 홍인(弘忍), 6조 혜능(慧能)이지요.
이 분들이 도인이 아니라고 하는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분들이 정통조사들이지요.
그러면 6조단경도 의심이 없는, 권위 있는 경전입니다.
그래서 말미에 어떻게 표현하시냐면은, 달마대사에서부터 육조 혜능까지 그 수행론에 대한 언급을 하셨습니다.
그 수행론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반야바라밀에 입각한 일상삼매, 일행삼매를 수학하는 것이 정통적인 초기 순선시대의 수행론이었다, 이것을 밝히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달마(達磨)스님의 친찬이라고 하는 이입사행론(理入四行論),
그리고 제일 법문을 많이 하신 4조 도신(道信)대사의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 거기에도 보면은 똑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예를 들자면 그렇습니다.
육조단경에 보면은 이런 표현이 나오지요.
외리상즉선(外離相卽禪)이라, 내불란즉정(內不亂卽定)이라. 선정(禪定)에 대한 정의입니다.
외이상(外離相), 밖으로 상을 떠난다, 상을 떠난다는 게 뭡니까? 그것이 바로 공입니다.
상을 떠난다, 상이 없어야 되는데, 상이 없을라면 어떻습니까. 그것이 공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이란 뜻이 뭐냐면 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반야바라밀에 입각을 해야 선(禪)이다. 육조단경에서도 분명히 밝힌 부분입니다.
그리고 내불란즉정(內不亂卽定)이라, 안으로 어지럽지 않아야 된다.
어지럽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망념입니다. 이 생각 저 생각,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일어났다가 꺼지지 않습니까.
우리의 가장 큰 적은 무엇입니까, 원수는? 그 마음입니다. 그것이 어지럽지 않다. 다시 말해서 무념에 이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념에 이르는 것이 정(定)입니다. 밖으로 상을 떠난다는 말이나 무념에 이른다는 말은 사실은 같은 말입니다.
상을 떠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제법공, 부처님의 몸을 다른 말로 하면은 허공신(虛空身) 그렇습니다.
허공을 몸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제법이 공할라면은 어떻습니까. 우리 망념이 사라져야 합니다.
망념이 사라지게 되면, 무념이 되게 되면 제법이 공한 것입니다. 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뭐지요? 밖으로 상을 여읜 제법공을 다른 말로 하면 일상삼매(一相三昧) 그렇습니다. 왜 일상인 것인가. 아까도 말씀드렸지요?
고배율로 무한대 배율로 본다면 천지우주가 뭘로 보인다? 오직 빛 뿐이다, 하나의 불성광명이다.
요즘 과학에서도 그러지 않습니까? 과학의 결론이 뭡니까. 물이 얼으면 얼음이 되듯이 빛이 얼어붙은 것이 물질라고 했습니다.
현대과학에서도. 현대과학도 분명히 물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근본은 빛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과 같습니다.
그 말이 뭔 말이냐면은 우리의 망념이 사라지게 되면은 우리한테 무한대로 볼 수 있는 우주를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게 되면은
그 때는 뭘로 보인다? 이러한 차별상이 사라지고, 차별상이 사라진다는 것은 뭐지요? 우리의 망념 때문에 그렇게 보이고, 잘 못 보고,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자리는 바로 보면 뭐가 있어요? 순수한 불성인 그런 부처님의 빛만 있다는 것입니다. 차별상이 사라졌으니까 뭐지요?
공이니까 모양으로 친다면 뭐지요? 한 일상(一相)이라, 굳이 모양으로 친다고 공을 표현다면, 일상이라. 한 일(一) 자, 서로 상(相) 그러지만 모양입니다, 모양 상(相)으로 씁니다.
또 달리 표현하면 어떻습니까? 모든 상이 없기 때문에 없을 무(無)자, 모양 상(相)자라, 무상(無相)이라 해도 됩니다.
그 자리는 또 어떻습니까. 우리의 망념이 사라졌기 때문에 무념(無念)이지요. 무념이라 해도 똑같은 말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아까 말씀드린 대로 그 자리가 바로 반야지요. 반야바라밀입니다.
반야시위불모(般若是爲佛母)라, 부처님은 어디에서 오는가. 반야를 깨달을 때 바로 부처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까 말한 대로 밖으로 상을 여의는 걸 선이다. 바로 여기서 이것은 달리 표현하면 일상삼매(一相三昧)입니다.
천지우주를 하나로 보는 지혜지요. 반야지혜(般若智慧)입니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입니다. 그리고 아까, 내불란즉정(內不亂卽定)이라, 안으로 어지럽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합니까.
염불을 하고 화두를 들고 주문을 외고 그러지요.
우리가 하나의 화두라든지 염불을 집중하게 되면은, 반복하게 되면은 어떻습니까.
그 반복하는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키지요. 그러면 무념(無念)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우리는 일행삼매(一行三昧) 그렇게도 부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까 말씀드린 4조 도신대사(四祖 道信大師)도 그렇습니다. 4조 도신대사는 그 부분에 대해서 아주 명확하게 밝히셨습니다.
“아차법요(我此法要)는”, 내 법의 요체는 무엇이냐?
“능가경(楞伽經)에서 말하는 제불심제일(諸佛心第一)과 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의 일행삼매(一行三昧)에 의거(依據)한다.”
아주 명확하게 표현을 하셨습니다.
제불심제일(諸佛心第一)이 뭡니까? 우주에서 가장 제일한 것은, 가장 소중한 것은 무어지요? 바로 부처인 내 마음입니다.
이 마음 깨달으면 바로 부처고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부처인 그 마음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주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어냐, 바로 부처인 그 마음이
그 마음을 깨닫는 그 방법은 무엇이냐. 바로 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에서 말하는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문수설반야경에서 인용하기를, "법계일상(法界一相)이니“,
아까 말씀대로 법계는 우주입니다. 우주는 일상(一相)이라. 하나라 했어요.
하나가 무엇입니까? 아까 반야바라밀이지요. 그것이 제법공입니다.
천지우주를 하나의 공으로 보는 것이지요. 그것이 법계일상(法界一相)이다. 법계가 하나 뿐이다 그러셨습니다.
그러면서 ’계연법계(繫緣法界) 일행삼매(一行三昧)라”,
그 하나의 반야바라밀, 공한 그 자리에 우리 마음을 나툰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딱 두는 그것을 갖다가 일행삼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표현에서는 일행삼매라는 말이나 일상삼매라는 말이나 같은 말입니다. 이때까지는 구분하지를 않았습니다.
일상인 그 자리-. 일상삼매죠, 그게 반야공이죠.
그 자리에 우리가 마음을 딱 두는 것, 그러고서 화두를 들든 염불을 하든 주문을 외워라.
그러니까 4조 도신대사는, 일본의 최증(最澄)스님의 말씀을 빌리면은,
그때 군푹을(? 27:55), 모든 사람들을 염불로써 제접을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에서는 염불에 대해서 아주 많이 강조를 해놨습니다.
그리고 달마(達磨)스님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입도다도(入道多道 )라”, 도를 우리가 닦아서 수행하는 방법, 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마는, 요약을 하면은 두가지라 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두가지가 무엇이냐. “리입행입(理入行入)이라”.
하나는 이치적으로 먼저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실천적으로 수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리입(理入)에 대해서는 어떤 표현입니까.
“범성동일진성(凡聖同一眞性)이라. 심신(深信)이라”.
깊이 믿어라, 범부와 성자가 동일한 진성(眞性)이다. 그 말이 뭔 말입니까. 내가 바로 부처란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닦아서 부처가 된다고 생각을 하지마는 그것은 틀렸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부처였어. 처음부터 부처였는데 부처임을 모르고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닦을 필요가 없이 부처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부처임을 모르고 있는가?
그것은 아까 말한 대로 우리의 망념입니다. 우리 의식활동이지요.
그것 때문에 우리가 우리속에 있는 정(正)다운 부처를 못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망념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 하나의 행동으로서, 실천덕목으로서 네가지를 제시를 했지요.
그 중에 간단히 설명하면, 보원행(報怨行), 어떠한 고난이 오면은 우리가 전생의 빚을 갚는 거다.
그리고 수연행(隨緣行)이라. 모든 것은, 아무리 좋은 일도 아무리 나쁜 일도 시간이 흘러가면 인연 따라 흘러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없고 네가 없고, 모든 것이 공하다는 말이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 해도 우리 인간적인 낮은 차원에서 있는 것이지제법공의 차원에서는 진리에서 본다면은, 무한 차원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 잠시 왔다 잠시 가는 것이다.
그러니 슬퍼하고 기뻐할 것이 없다. 무소구행(無所求行)이라,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가상현실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이 가상현실 속에서 우리가 특별하게 무엇을 많이 구하려고 하지 말아라. 이것을 깨닫는 그 방법론이 칭법행(稱法行)이라 그럽니다.
우주의 진리에 딱 부합되는 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까 서두에 말해드린 대로 법에 맞는 바로 육바라밀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이 전부 다 뭡니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일상삼매, 일행삼매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법계가, 아까는 범성동일진성(凡聖同一眞性)이 뭡니까. 범부가 성자가 하나의 진성이라는 말은 일상삼매입니다.
부처인 그 자리가 바로 반야의 자리입니다. 반야는 무어라 했지요? 하나의 공입니다. 그것은 일상이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입각을 해야 우리가 참선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큰스님 법문 말씀은, 어떠한 법문도 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큰스님께서 염불을 하라고 했다 해서 염불을 한다고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체, 금방 말한대로, 반야바라밀에 입각을 한 염불을 해야 참된 염불입니다.
그냥 하는 염불은 참다운 선이 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우리가 염불하면 염불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고 생각을 하지요?
염불(念佛)에는 칭명(稱名)염불이 있고 관상(觀像)염불이 있고, 또 관상(觀想)염불이 있고, 실상(實相)염불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네 가지 종류의 염불법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염불(念佛)은 한가지 뿐인 것입니다.
그러면 네가지가 뭣인가? 우리가 거짓은 가상이라 그러지요. 진짜는 실상이지요. 아 범죄의 실상이 알고 보니 실상은 이렇더라, 모를 때 속고 있을 땐 가짜였거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염불을 해도 결론적으로 우리가 염불을 할 땐 어떻게 합니까.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니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그러지요. 다 한 분이지요.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의 별명이고, 지장보살은 아미타불의 지옥중생을 제도하는 분이고, 그리고 문수보살, 대세지보살은 아미타불의 지혜를 표현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천불명호, 만불명호가 있지마는 다 한 부처의 다른 표현이다,
큰스님께서는 그렇게 표현하시지 않습니까? 이것은 능가경에도 이것이 뚜렷하게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처님을 부를 때는 무엇을 생각해야 됩니까? 부처님을 생각해야 하지요.
제가 항상 하는 얘기지만, 장미 하면 장미 이미지가 떠올라야 하지요? 장미 생각이 떠올라야 하지요? 박정희 박정희 하면 박정희 대통령을 우리가 떠올리지요. 수박하면 줄 그어진 수박이 떠오르지요? 이름이 있으면 그 이미지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부르면 뭡니까.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아미타불의 이미지를 떠올려야 되겠지요. 박대통령은 박정희 하면 떠오르듯이.
그러면은 아미타불의 그 모습, 그 정보가 뭡니까? 어떻게 생겼습니까.
그것을 모르니까, 우리는 아미타불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모르지 않아요?
그러니까 뭐요? 대따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염불만 합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모르니까. 그러면 뭐지요? 그것을 이름만 부른다 해서 칭명염불 그렇습니다. 아미타불의 정보를 모르니까. 그나마도 하다보면 싫증이 나. 도대체가 마음에 둘 데가 없어. 그러니까 법당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을 또 생각을 해 봐. 러면서 그 원만덕상한 부처님을 불상을 보면서 염불을 합니다.
그러면 부처의 모양을 보고 염불하는 관상염불(觀像念佛)이라 그럽니다.
왜 그런 일이 생깁니까? 아미타불의 정보가 없없다. 어떻게 생겼는가 사전에 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지요? 그것을 보면, 아미타불의 얼굴을 안다면 그냥 부르면 될 것인데 그걸 모르니까 냅다 이름만 불렀다가, 법당에 있는 (부처님) 모양을 생각해봤다 그러지요.
그러나 어떻습니까? 진짜 아미타불의 모양을 본다 그러면은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지요.
그 아미타불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뭡니까? 아까 우리가 외웠던 바로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입니다. 그 보리방편문이 무엇을 표현하는가 하니까 아미타불의 진짜의 모습을 표현하니까 뭐에요. 반야바라밀입니다. 반야공입니다.
그것을 인격적으로 표현한다면 뭐지요? 그것이 부처님이라는 겁니다.
그 반야공을 부처님 해도 되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해도 되고, 알라라 해도 되고, 도라 해도 됩니다. 표현을 어떻게 하더라도, 예를 들어 저 위에 하느님이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하느님을 믿는다 한다면 그것은 물상숭배입니다.
그러나 그 하느님이. 우리가 말하는, 보리방편문에서 말하는 반야공이다. 천지우주에 충만된 빛이다,
그 빛과 내가 하나다 이렇게 믿고서 하느님을 부른다면 어떻습니까.
바로 하느님 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선은, 화두가 선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염불이 선도 아닙니다.
아까 살펴봤듯이 우리의 마음이 본체인 그 자리, 반야바라밀을 떠나지 않아야 선이라는 것입니다.
화두도 어떻습니까. 제일의제(第一義諦)를 들으라는 것이지 그냥 상대적인 의심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염불도 마찬가집니다. 그냥 냅다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한다고 큰스님이 그런거 하라는 소리는 안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마는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서 하라. 그러니까 뭐요.
진짜 정보를 가지고 아미타 염불을 하니까 실상이지요. 실상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염불이 세가지, 네가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고서 하니까 칭명염불, 관상염불이지 실상은 뭡니까
실상염불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가 무엇인가. 우리 신앙의 대상인 부처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입니다.
그것이 이제 우리가 지금 그 반야바라밀에 입각할 때 모든 인류가 종교의 갈등을 종식할 수가 있습니다.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알라나 하나님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반야바라밀 공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아미타불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알라를 해도 선이 되고, 하나님을 해도 되고, 그걸 도라고 해도 되고, 뭐라고 표현해도 어떻습니까.
다 동일한 선입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여기 모인 큰스님을 따르는 몇 사람만이 제도가 되고, 복 되고, 행복한 세계로 가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참다운 진리는 부처님 법을 믿지 않아도 작은 미물 하나까지도 영원한 행복의 세계로 가게끔 하기 위해서 제시된 가르침입니다.
아인슈타인 말씀대로 어떻습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 지구라고 하는 여기만 적용되는 가르침이 아니고 우주 어디에서도 다 적용되는 가르침이다, 그 원리를 부처님 법이다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인간이라는 우리는, 인간이라고 보이는 인간만이 다라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3계 28천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 존재는 3계중에 욕계 제일 밑에 있는 존잽니다.
기껏해야 백년만 살아도 참 장수한다고 희망하는 나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올라가도 인간수명보다도 수백만 년, 수천만 년, 수억만 년, 비상비비상처는 수억 겁을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껏해야 백년도 못 삽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잘났다고 생각한다면 참 곤란합니다.
먼저 이 생명이라는 존재, 고등생명체가 우주의 인간보다 우수한 무수히 많다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 법에서 믿어야 됩니다.
부처님 말씀이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우리의 존재는 참으로 미미한 존재들입니다.
바로 이것을 초승해서 바로 아까 무념에 이르러서 우리가 종교적인 갈등을 해소하고 내 종교 아닌 다른 종교까지도 다 제도해 그것에 본격적으로 행복된 길로 가기를 제시한 그 가르침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거기에 정통적인, 달마에서 육조까지 했던 가르침이 일상삼매, 일행삼매란 말입니다.
그것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은 뭡니까. 선오후수(先悟後修)입니다.
큰스님 표현을 들면은. 먼저 이론적으로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건물을 지을 때도 선행적으로, 먼저 틀림없이 설계도가 먼저 나왔을 것입니다.
100층짜리 건물을 지으면서 설계도 없이 지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성불을 하기 원하면서 설계도 없이, 성불이 무엇인가. 부처가 무엇인가 정확한 정보도 없이 우리가 성불할 수 있습니까.
그 설계도면이 뭡니까. 선오(先悟)입니다.
먼저 이론적으로 알아야 된다는 거에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그 선오의 내용이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입니다.
그런 연후에 후수(後修)라, 다음에 닦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닦으라는 것인가.
그것이 선오(先悟) 하면 돈오돈수(頓悟頓修), 돈오점수(頓悟漸修) 그러지요. 선오(先悟) , 우리가 깨달아서 안다 할 때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돈오(頓悟)입니다, 돈오. 이치적으로 천지우주가 텅 비었다. 다만 비지가 않고 나와 더불어서 하나인 빛으로 불성의 광명으로 하나의 통일된 세계다,
이렇게 이치적으로 아는 것을 우리가 이제 우리 큰스님 가르침이나 보면은 그것을 우리가 돈오, 다른 말은 선오지요.
이 돈오의 내용이 뭡니까. 다른 말로 일상삼매(一相三昧)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반야바라밀이지요. 여기에 대한 정보가 바로 보리방편문입니다.
그 다음에 돈오돈수할 때 그 수(修)가 뭡니까. 문득 닦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아까 말한대로 염불을 해도 아무 정보 없이, 아미타불이 뭣인지도 모르고
아미타불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는 것은 뭐지요? 그것은 참다운 염불법이 못 됩니다. 돈수가 되야 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반야바라밀에 입각한 염불이란 말입니다.
아미타불이 뭐여요? 아미타불의 얼굴을, 참다운 실상을 알고 설해야 한단 말이다.
천지우주에 충만된 공, 그 빛과 나와 더불어서 하나다.
지금 내 몸뚱이나 보이는 모든 존재는 뭐요.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있는 듯이 보이지만 가상이라.
그러면 참다운 나는 어디 갔느냐. 바로 그것이 우주를 몸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고서 우리가 염불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돈수입니다. 돈오돈수를 행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게 되면 어떻습니까. 점차로 우리 번뇌가 녹아져 가면서 우리의 깨달음이 밝아오게 트이겠지요.
그것이 점수라고 그럽니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를 너무 결연하게 구별하는 분도 있지마는 실질적으로는 그러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같은 내용이다. 그래서 돈오가 뭐죠? 돈오의 내용이 일상삼매요, 돈수가 일행삼매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부르는 것이 뭐죠?
그것이 일행삼매. 그것이 아미타불의 실상, 그것을 이해하고 거기에 하는 것이 일상삼매입니다.
바로 일상삼매, 일행삼매를 닦는 그 법, 그것이 보리방편문입니다.
이것은 부처님과 그 이후에 달마에서 육조까지 해왔던 정통적인 그러한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아까 잠시 우리가 살펴본 것도, 그냥 큰스님이 하신 말씀, 금타 대화상께서 하신 말씀,
그래서 우리가 그 분들이 인격적으로 위대한 분이니까 믿는다 해서는 안됩니다.
이 가르침은,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하나의 우리 불교만을 위한 가르침도 아니고,
모든 우주에 인간보다 억만년을 더 오래 사는 생명체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부처까지 가게 하는 그러한 가르침입니다.
어차피 우리가 불자가 되었다는 건 참으로 행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주의 그러한 가장 행복하고 근원적으로 모든 불행에서 영원히 해탈하는 법입니까 이보다 더 귀한 가르침은 없지요.
우연히 왔거나 어찌 왔다 해도 이것은 참으로 하늘이 내린 복입니다, 부처님을 만났다는 것은. 그랬다 한다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부처님 말씀이 지금 큰스님이나 대화상께서 하신 이 말씀이 맞는가 틀린가를 우리는 이 맛을 봐야 합니다. 그냥 와서 왔다갔다 이리해서는 안됩니다. 스님들이나 공부해서 도를 깨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더 수승한 근기를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모든 사람이 반드시 성불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이 맞는가 틀린가를 여러분들이 하셔야 합니다.
만약에 맞다면은 여러분들이 금생에 꼭 삼매에 들어서, 삼매를 발득해서 꼭 생사를 떠나야 됩니다.
제법이 공이다 하면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자리가 부처의 자리고 무한한 행복으로 충만된 자립니다. 바로 그 자리가 행복의 자리고 극락세계지요. 생사를 떠난 청정무비한 자리 아닙니까.
그래서 이러한 뜻깊은 묘금륜원(渺金輪園). 이 금륜(金輪)이라는 것은 아까 우리 회장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마는, 이 금륜은 참으로 이 시대에 필요한 귀한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현대물리학의 물질과 정신이 하나임을 증명하는 용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금륜이라는 것은 우주 불성의 근본입니다. 순수한 우주 불성을 불교술어로 금륜(金輪) 그렇습니다.
그런데 금타대화상(金陀大和尙)께서 어떻게 해서 이 물질적인 세계가 나왔는가를 밝히셨습니다.
그 동안에 강독을 하시면서 다 배우셨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마는 오늘 복습하는 의미에서 다시 한 번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금륜(金輪)이라고 하는 순수한 불성 에너지가-,
우리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 긍정적인 마음, 사랑하고 긍정적인 마음은 금륜을 좌선(左旋)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좌선하게 되면 뭐지요? 양자(量子)라. 우리 물리학적으로 말한다면 원자핵(原子核) 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미워하는 마음, 부정적인 마음은 그 금륜을 우선(右旋)시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요. 전자(電子)정도로 된다는 것입니다.
소위 물질은 뭡니까. 모든 물질은 원소지요. 원소는 원자핵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가 돌고 있는 것으로 돼 있지요. 물질의 근본입니다.
좌선(左旋)하는 그 금륜은 같은 성질끼리 끌어당겨. 그리고 성질이 틀린 거는 밀어내.
그래서 하나는 수(水)가 되고, 지수화풍(地水火風)할 때의, 하나는 지(地)가 된다는 거에요. (그렇게) 땅기운, 물기운이 되고. 그리고 우선(右旋)하는 그 금륜은 같은 것끼리는 밀어내.
그것은 불 화(火)가 되고, 이성, 서로 다른 것끼리는 끌어당겨서 풍(風)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의 근본요소인 지수화풍(地水火風)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 지수화풍이 모여서 내 몸뚱이가 되고 저 산이 되고 우주가 생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표현하면 우리의 망념이지요.
사랑하고 미워하는 우리의 의식이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세계가 그 그림자로 탄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물질이 뭡니까. 순수한 그대로 뭐죠? 금륜이다. 빛이란 말이죠.
역으로 말하자면. 그렇지 않습니까? 내 의식이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물질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신심명(信心銘)에도 그랬지 않습니까.
“단막증애(但莫憎愛)하면 통연명백(洞然明白)이라”.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없다면은 투욱 틔여버린다는 것입니다.
제법이 공이다 말이죠.
왜냐면 아까 말한대로 미워하는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 금륜이 사대를 형성하고 그것이 모여서 물질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 마음 속에서 미워하고 사랑하는 그러한 망념이 사라진다면,
바로 그것을 우리가 체험을 하게 되면은 우주가 바로 공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여기 대해서는 고대 그리이스의 희랍인 철인 중에 보면은 엠페도클레스((Empedokles, B.C.E 490~430)도
기원전 한 5세기 때 분인데, 이 분도 너무 유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분의 표현을 보면은 지수화풍, 우주의 불생불멸하는 근원이 지수화풍인데,
그것에는 풍대(風大)를 공기(空氣)라고 그렇게 표현해놨대요. 공기란 뭐 비슷한 표현같애서 지수화풍이라 봅니다.
그 지수화풍은 우주에 불생불멸하는 것인데 이것이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이것이 모여서 우주를 형성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가 발전을 하고 형성이 되는 것은 바로 그 발전 단계는 미워하는 마음이 우세한가 사랑하는 마음이 우세한가에 따라서 우주의 발전단계가 결정된다 이렇게 표현을 해놨어요. 너무 유사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제가 보통 성자들의 가르침은 비슷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현대인들한테는 물질이라는 것이 그냥 우리 마음과 무관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바로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것을 증명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떻습니까. 내 마음이 긍정적인 마음, 세상에서 가장 밝은 마음,
세상에서 가장 긍정적이고 밝고 행복된 마음이 무엇입니까.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절대 중의 절대고, 긍정 중의 긍정이고, 복 중의 복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부르고 부처님을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맨 먼저 내 생리의 변화가 올 수 밖에 없습니다.
금륜이 어떠지요? 금륜이 내 사대, 내 몸뚱이를 만들었다. 내 의식이.
그러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내 몸이 건강해지고 복된 그 호르몬이 분비가 된다는 것입니다. (박수)
노르아드레날린(noradrenaline)같은 그 독성 물질이 그 호르몬이 금방 분비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고 이렇게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되면은 우리 뇌에서 도파민(dopamine)같은 아주 보약보다도 더 보약의 물질이 형성이 된다고 합니다.
그 원리가 금방 말씀드린 대로 모든 물질은 바로 우리 마음이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내 몸뚱이 뿐만 아니라 주변환경도 내가 부처님을 생각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다면 어떻습니까.
100프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100프로 부처님을 생각하면 뭐요? 이대로가 뭐죠?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그 어디가 극락세계, 우리가 죽어서 극락세계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할 문제입니다.
극락세계를 미(彌)적으로 본체(本體)에서 말하면은 바로 이대로가 극락세계입니다.
천지우주가 본래부터 극락세계라, 그렇지마는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사(事)적으로, 리사(理事) 그러잖아요?
본체에서는 극락도 지옥도 없습니다. 이대로가 다 극락세계 뿐입니다.
그러나 현상적인 차원에서 내가 있고 네가 있을 때에는 지옥 극락세계가 가상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게 되면은 윤회를 하게되면은 염불을 많이 하고 극락세계를 발원하면은
우리가 가야하는 극락세계가 분명히 실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함부로 극락세계가 없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는 맹목적으로 무엇을 믿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우리가 명확적으로 과학적으로 우리가 부처님 법을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분명히 설명되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큰스님의 이 가르침, 이것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부처님의 정통적인 가르침입니다. 불조가 했던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끼리 아는, 염불선-하게 되면은, 하근기가 하는 거다 이렇게 폭언을 서슴치 않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너털웃음 지으심).
화두를 하면 상근기고 염불을 하면 하근기다. 아까 선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일상삼매, 일행삼매가 되야 됩니다.
아무리 염불을 한다 해도 반야바라밀을 놓치면은, 부처님의 정보가 없으면은, 참으로 그것은 올바로 염불이 될 수가 없지요.
아까도 말씀드린대로 내가 본래 부처다. 닦아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금광이 있다고 하십시다.
땅 속에 금이 묻혀 있어. 삽으로 파내라. 호미로 파내라. 포크레인으로 파내라. 파내면 나오는 금은 다 동일한 금입니다.
우리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 화두를 들고 염불을 하고 주문을 외고, 기도를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 부처는 뭡니까? 화두에 의해서 부처님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염불을 해서 부처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염불을 해서 깨닫는 세계가 따로 있고, 화두를 해서 깨닫는 세계가 따로 있다면은 그것은 뭐죠? 외도입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법이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닦아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부처란 말입니다.
본래부터 부처란 말은 무엇입니까? 내가 어떤 방법을 취해도 내가 부처인 것을 기억해내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참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화두를 하든 염불을 하던 주문을 외던, 그것이 법에 맞다면 그것은 다 옳은 것입니다.
어떤 것이 높고 어떤 것이 낮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원리하고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뭐요? 아무리 못된 일을 해도 하나님 믿으면 하늘나라 가고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하나님을 안 믿으면 뭐요? 지옥에 간다.
아무리 열심히 수행해도 한국불교는 뭡니까. 화두 아니면 외도라고, 하근기라고 그래버려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화두에 의해서 진리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염불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 있는 것을 우리가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하나로 통일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 주여!를 해도 맞을 수가 있는 것이고, 알라를 불러도 맞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뜻깊은 묘금륜원(渺金輪園)의 이 자리는 평수는 좁지마는 앞으로 모든 인류를 위한 자리고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은 이러한 가르침이 참으로 큰 가르침이고 우주적인 가르침이고 모든 부처님 법과 모든 종교, 철학, 과학까지도 나아가야 되는 부처님의 정성적인 올바른 가르침임을 우리가 깊이 믿어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 오신 모든 분들, 모든 생명들이 다함께 성불해서 영생의 복락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 청화큰스님 제자이신 지리산 수정사 장우스님 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