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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양병집 `잃어버린 전설`

무한대자유 2015. 10. 12. 19:03

넋두리, 1974년..

양병집 '잃어버린 전설'

 

 

 

악보..읎으요...못찾았어요.

 

 

 

 

     

    잃어버린 전설 양병집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 연약한 몸을 가누면서

    참다 참다 쓰려져간

    아름다웠던 못송이야

    누구 위해 태어난 꽃송이던가

    누구 위해 자라온 꽃송이던가

     

    검은하늘 바라보면

    쓰려가는 향기 안고 웃다 웃다 지쳐버린

    아름다웠던 모성이야

    누구 위해 태어난 꽃송이 던가

    누구 위해 자라온 꽃송이 던가

     

    잃어버린 전설 속에 사라져간 꿈을 안고

    그늘에서 피다지친 못송이야

    누구 위해 태어난 꽃송이던가'

    누구 위해 자라온 꽃송이

     

     

     

 

잃어버린전설 - 양병집[넋두리]1974

 

 

양병집의 데뷔 앨범 [넋두리]는 유신정권이 한창 기세를 높이던 1974년 3월에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앨범은 발표 3개월만에 금지처분을 받고 전량 수거되었다.

양병집은 흔히 한대수, 김민기와 함께 한국의 3대 저항가수 중 한 명으로 불린다.

김민기가 지사적 풍모의 서정시인이고 한대수가 이상주의적 히피라면 양병집은 신랄한 언어의 풍자가다.

김민기가 토착적 정서에 기반한 한국적 포크를 추구했고 한대수가 현대적이고 자유분방한 미국식 포크를

연주했다면 양병집은 아메리칸 포크의 원곡에 한국 현실을 빗댄 가사를 붙이는 절충적 작품활동에

주력했다. 양병집의 언어에는 시퍼런 날이 서있다.

 

밥 딜런의 1963년 "Don't Think Twice, It's Alright" 에 한글 가사를 붙인 그의 대표작 "역(逆)"은 날카롭게

벼려진 그의 언어가 가장 섬뜩하게 드러나는 걸작 중의 걸작이다.

이 곡은 20년이 흐른 뒤 포크의 마지막 수호자 김광석에 의해 포크록 버전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로 다시

리메이크 되었다.

 

외국곡에 가사를 달아 번안곡을 만든 양병집(51.본명 양준집)은 "그때나 지금이나 바뀐 게 별로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한대수.김민기와 더불어 저항가수로 불리는 그는 대중보다는 음악평론가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인물이다. '잃어버린 전설' '서울하늘', 독립군의 노래를 정리한 '부활가' 등 그가 부른 노래들과

이연실의 '소낙비', 서유석의 '타박네' 등 그가 만든 노래들이 나름대로의 색깔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음악 평론가 강헌씨는 85년 '양병집 넋두리Ⅱ'에 담긴 '오늘 같은 날' '우리의 김씨' 등을 예로 들며

"양병집은 사라져가는 모던 포크의 마지막 불꽃을 묵묵히 태웠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양병집에게 음악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한대수였다. 국산품 애용운동이 한창인데도 사회지도층

자녀들은 외제 쓰기에 바빴던 시절. 그도 외제 화장품만 쓰던 누나들과 한바탕 싸우고 “두바퀴로∼'의

노랫말을 완성했다. 시대적인 감상이 음악으로 파고들기 전까지 노래는 그저 취미정도였다. 실제로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서울 종로의 우미관 옆 음악감상실 '디쉐네', 명동에 자리한 미도파백화점 5층의 '미도파

싸롱'을 드나들었다. 68.69년 당시에는 이인성 악단과 이길봉 악단이 활동했고 현미.위키리.유주영이 노래

하던 곳이다.

 

"70년대에는 외국곡의 악보가 흔하지 않았어요. 귀로 듣고 스스로 악보를 만들어 연주해야했죠". 양병집은

낯선 음악을 악보로 옮기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번안곡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정태춘과 전인권을 세상에 알린 공로자이기도 하다. 무명의 정태춘이 75년 그를 불쑥 찾아왔다.

당시 양병집은 자신의 노래들이 금지곡이 되는 바람에 가수활동을 접고 금융회사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평택에서 곡을 준비해온 '단꼬바지' 차림의 정태춘. "김민기씨가 시골로 내려가 농사짓고 있어 대신 저를

찾아왔더군요. 얼굴이 순박해 보였는데 당시 불러 보였던 '보리고개' '겨울나무'가 마음에 와닿았어요"

 

양병집은 81년 서울 신촌의 라이브업소 '뮤직모노'를 열었다. 전인권.정태춘을 비롯해 '동서남북' 등

노래꾼들이 이곳에서 기타를 치며 그와 어울렸다. 그러나 연일 계속되는 데모, 걸핏하면 휴교하는 대학의

악순환. 가게 앞에 경찰차가 진을 쳐 1년만에 문을 닫았다.

 

그는 86년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 끈질기게 음악인생을 반대하신 어머니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자장가로 불러주셨던 구전을 정리한 노래 '타박네'는 그의 대표곡이 되기도 했다. 99년 13년만에 다시

돌아온 양병집은 지난해 호주 영주권을 반납했다.

그는 최근 노래 '16년차이'로 유명한 김하용덕의 새앨범을 내놓는 등 음반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말로는

포크가 죽었다, 들을 음악이 없다고 하지만 애써 음악을 내놓으면 아무도 듣지 않아 결국 망하게 돼요.

그러나 미련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음반기획자로 활동은 계속할 생각입니다"

그는 '포크'가 단지 통기타를 치며 부르는 70년대 음악쯤으로 단순화한 것에 불만이 크다. 포크의 강한

저항정신은 사라지고 발라드에 통기타를 입힌 것이 마치 포크음악인양 인식돼왔기 때문이다.세월이 흘렀어도

청바지 차림으로 특유의 포크가수 분위기를 풍기는 양병집. "변한 것 없다"는 요즘 세상에 그는 또 어떤

노래들을 선보일까. (글 김희연 기자)

 

 

어두운시대 참인간 찾아나선 한국 모던포크의 마지막 불꽃

 

양병집은 김민기, 한대수, 서유석과 함께 초창기 한국 모던 포크의 4인방으로 꼽히는 인물이지만 이 음악

언어가 요구하는 세계관의 독자적인 형상화 역량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탓에 마땅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것은 60년대말부터 시작된 그의 작업이 주로 밥 딜런이나 우디 거스리 같은 서구 모던포크 거장들의

음악을 번안하거나 우리의 전통적인 구전음악을 되살리는 데 치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이 작업만으로도 그는 자신이 할 일을 다했다고 볼 수도 있다. 우디 거스리의 노래를 번안한

〈서울 하늘〉이나 최근 김광석이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한 〈역(逆)〉은

우리의 현실이 스며든 최고의 번안으로 꼽힐 만하다. 그리고 그가 채보한 〈타복네〉나 광복군의 노래

〈엄마 엄마 아 엄마〉의 ’다시 부르기’는 민중들의 옛 유산에서 오늘의 의미를 읽어내는 모던 포크 고유의

강령을 충실하게 수행한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는 단지 그것만으로 자신의 이력을 마무리하지 않았다.

대학가의 전투적인 저항가들도 웅장한 키보드 사운드를 채택하기 시작하면서 70년대의 통기타 소리를

무장해제시키고 있던 80년대 중반에 양병집은 사라져 가는 모던 포크의 마지막 불꽃을 묵묵히 태운다.

별 반응 없이 끝났던 1980년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 앨범의 흥행은 참혹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노래집의

속살은, 전작은 물론이고 어떤 한국 모던 포크의 걸작에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는 놀라운 통찰력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한마디로 이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의 제2차 혁명의 포문이 불당겨지던 1985년의 숨은 보석이다.

 

포크 록의 전형적인 담담함으로 앨범은 문을 연다. 〈오늘 같은 날〉은 ‘비나 왔으면’ 좋을 답답한 일상에서

‘어리석은 위로’라도 받기 위해 ‘십원짜리 동전을 깨끗이 닦아’ 전화하지만 ‘결국’ 집으로밖에 갈 수 없는,

도시의 중심에서 떠밀린 자신을 소개한다.

그러나 이 누추한 자아는 그저 누추함으로 끝나지 않는다. 바로 이어지는 〈이런 사람을 찾습니다〉와

〈우리의 김씨〉를 보라. 본래 제목이 〈구인광고〉인 〈이런 사람을 찾습니다〉는 정태춘의 곡으로,

양병집 특유의 걸쭉하고 텁텁한 목청을 통해 이 어두운 세상을 소리 없이 밝히는 진정한 인간을 찾아 나서며

이에 대한 응답이 바로 ‘도매상이 모여 있는 시장길에서 물건을 싣고 있는 우리의 김씨’인 것이다.

‘옷차림은 남루하고 키는 작지만’, 그리고 ‘내년에는 큰 딸아이 시집 보내고 마누라의 속치마도 사다 줘야’하는

그의 김씨는 바로 어두운 시대를 끝까지 살아남는 자신의 초상인 것이다.

비록 자작곡 가수로서의 천부적인 재능이 결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앨범은 양병집이 단순히 서구

자유주의 문화의 ‘전달자’로 그치고 만 것이 아니라 그 문법을 기반으로 한국의,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소리를

창출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자신의 시대가 끝난 뒤에야 자신의 소리를 찾은

것이다. <강헌 대중음악 평론가>

 

 

 

 

 

문화적 '경계인'의 망향가

 

벌써 10년이 지나 버렸지만 양병집의 가장 최근의 정규 앨범이다. 잠시 배경 설명을 한다면,

1980년대 말 ~ 1990년대 초 본인의 두 장의 앨범인 [부르고 싶었던 노래들](1988), [긴 세월이 지나고](1989),

그리고 그가 발굴한 16년 차이(김용덕, 김용수)의 음반을 제작한 비즈니스가 다시 한번 좌초한 뒤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로 돌아 가서 제작한 음반이다. 앨범의 크레딧을 보면 알 수 있듯 앨범을 녹음한

장소나 녹음에 참여한 음악인들은 모두 오스트레일리아의 현지인들이다. 그래서 이 음반은 '제대로 된'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 앨범이 발표된 1993년의 국제적 트렌드('얼터너티브 록')의 지저분한 사운드와는

거리가 지만 무언가 미비해 보이는 국내 스튜디오에서의 사운드와는 딴판으로 매끄럽고 쫙 빠지게 프로듀싱

된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다. 한편 작곡가로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인물들은 조동익, 장인호, 최성원,

조영수. 이태열 등 '한국인'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당대 한국의 음악인들 가운데 가장 '팝'에 가까운 감성을

가졌다는 점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사족이지만 양병집의 자작곡은 하나도 없다.

 

작곡가 진영 가운데 조동익, 최성원, 이태열은 양병집과 오랜 연을 가진 사람들이고, 장인호와 조영수는

양병집이 1980년대 말 이후 발굴한 인물들이다. 그래서 전자에 비해 후자에 속하는 인물들의 참여가 더욱

두드러진다(조동익의 곡 "이 세상 사람이"는 [우리노래전시회](1984)와 [넋두리 II](1985)에 이미 실렸다).

장인호는 호주 유학생 시절 양병집을 만나 이미 양병집과 작업한 경험이 있고([부르고 싶었던 노래들](1988)

에서 기타를 연주했고 [긴 세월이 지나고](1989)에 수록된 "이대 앞길"을 작곡했다), 조영수는 홍대앞의 라이브 클럽 프리 버드(!)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양병집의 마수(^^)에 걸려든 인물이다. 조영수는 캠퍼스

그룹 사운드 로커스트 출신으로, 박지윤이 다시 불러 히트한 "하늘색 꿈"의 작곡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음반에 수록된 음악은 마치 영미 팝 음악을 한국어로 개사·번안한 음악처럼 들린다.

장인호의 곡인 "그대 떠난 빈자리"와 "에고와 로고스", 조영수의 곡인 "혼자 걷는 거리"와 "알 수 없네" 등이

모두 그렇다. 장인호의 작곡이 록의 감성이 강한 장엄하고 진지한 스타일이고, 조영수의 작곡은 팝의 감성이

강해서 쾌활하고 명랑한 스타일이지만 그 차이가 그리 멀지는 않아서 영미권에서 '메인스트림 록'이라는

범주에 무난히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최성원이 작곡한"Down on the Highway"는 양병집이 직접 붙인

영어 가사로 되어 있다. 최성원 스타일의 곡이라기보다는 양병집의 읊조리는 보컬을 염두에 두고 만든 곡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었던 쌈빡한 사운드의 꿈을 외지에서 실현한 셈이다. 물론 그 결과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장인호와 조영수의 곡에서는 국산(國産) 곡조와외제(外製)

사운드의 조화가 성공적인 편이고, 최성원. 조동익, 이태열의 곡에서도 어색하지는 않다.그렇지만 "부활가",

"희망가", "타박네"같은 토속적인 곡에서는 된장찌개에 버터를 풀어 놓거나 샌드위치에 된장을 발라 놓은 것

처럼 이상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앨범을 '서양맹종주의'라거나 '국적불명'이라고 못박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서양의 것이라

면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따라해 보았더니 결국은 별 거 아니고 허전하기만 하더라'는 말이 적용될 대상은

한국 사회 전체이지 특정한 개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앨범을 듣는 기분은 경기도 교외에 미국산

소품들로 장식해 놓고 양주를 파는 조그만 바(bar)를 방문한 기분과 흡사하다. 가 보지는 않았지만 미국

어딘가에 한인들이 운영하는 업소도 비슷한 분위기일 것이다. 그것도 현대 한국인의 하나의 초상이니까.

 

이렇게 말하고 보니 '별 거 없다'고 평하는 것처럼 들릴 텐데 그렇지는 않다. "그대 떠난 빈자리"나 "혼자 걷는

거리"는 숨겨진 보석같은 곡이고, 현역으로 활동하는 가수(후보는 전인권, 강산에, 이은미 등등)가 리메이크

하면 히트하지 말라는 법이 없을 만큼 빼어난 곡이다. 그렇지만 이런 곡을 양병집이 불렀다는 사실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다. 하긴 본인이 '똥'이었다고 말하는(물론 정말 '똥'은 아니다. 결단코)

[넋두리](1974)의 중고 LP는 수십만원을 주고 구입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도 양병집의 새로운

앨범이나 새로운 사업에는 최소한의 관심조차 보내지 않는 게 한국의 우울한 현실이니 무슨 말을 더 하랴.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

유신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 중의 하나는 대한민국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병영이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5.16 쿠데타 이후 민간인 흉내를 내 보려던 군부정권은 이 시기에 이르러 '군부'의 본색으로

완전히 되돌아갔다. 즉 높은 사람 하나가 지나가는 말로 "나는 국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하면 하루 아침에

그 일대의 국화가 모조리 뽑혀버리고 마는 그런 본색으로 회귀한 것이다. 박정희는 음악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본인이 직접 만들었다고 하는 노래도 여러 곡이 있다. 그는 음악에

대한 취향과 주관이 뚜렷했고 좋아하는 노래와 싫어하는 노래의 구분도 명확했다고 한다. 이런 그가 자신의

충실한 심복들 앞에서 "저 노래는 왜 저 모양이야?"라고 한마디라도 했다면 그 결과는 보지 않아도 익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금지곡은 유신시대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다. 그러나 '창법미숙'이나 '허무감 조장'

같은 것이 금지곡의 사유가 될 수 있었던 때는 오직 유신시대 밖에는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박정희의 귀에 거슬리는 노래는 만들지도 못하고 부르지도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양병집의 데뷔 앨범 [넋두리]는 유신정권이 한창 기세를 높이던 1974년 3월에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앨범은

발표 3개월만에 금지처분을 받고 전량 수거되었다. 이 앨범의 무엇이 유신정권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는지를

밝히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일단 표지부터가 심상치 않다. 조소하는 듯한 눈초리에 담배를 꼬나 문 양병집

의 얼굴은 그들에게 분명 불손하고 반항적인 모습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의 거만한 듯 냉소적인 목소리도

그들의 귀에 곱게 들렸을 리 없다. 가사에 담긴 촌철살인의 풍자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양병집은 흔히

한대수, 김민기와 함께 한국의 3대 저항가수 중 한 명으로 불린다. 그리 정확한 분류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밥 딜런(Bob Dylan)이나 피터 폴 & 매리(Peter Paul & Mary)가 저항가수로 분류되는 맥락이라면 굳이

부정할 이유도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분류법으로 인해 이들 간의 차이를 놓쳐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들 세 사람 사이에는 공통점 이상의 확연한 차이점들이 존재한다. 김민기가 지사적 풍모의 서정시인이고

한대수가 이상주의적 히피라면 양병집은 신랄한 언어의 풍자가다. 김민기가 토착적 정서에 기반한

한국적(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포크를 추구했고 한대수가 현대적이고 자유분방한 미국식 포크를 연주했다면

양병집은 아메리칸 포크의 원곡에 한국 현실을 빗댄 가사를 붙이는 절충적 작품활동에 주력했다.

양병집의 언어에는 시퍼런 날이 서있다. 밥 딜런의 "Don't Think Twice, It's Alright"에 한글 가사를 붙인 그의

대표작 "역(逆)"은 날카롭게 벼려진 그의 언어가 가장 섬뜩하게 드러나는 걸작 중의 걸작이다.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네 바퀴로 가는 자전거…' 도입부에서 이 곡은 단지 동화적 상상력으로 채색된 재미있는 노래일 뿐이

다. 그러나 이 곡의 말미에 도달하면서 그는 깊숙이 숨겨놓았던 비수를 예리하게 꺼내 든다. "백화점에서 쌀을

사는 사람/시장에서 구두 사는 사람…" 지금까지 초현실의 세계를 부유하던 이미지들은 이 한 줄의 가사에

의해 느닷없이 현실로 곤두박질치고 모든 것은 불현듯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무작정 상경한 시골 젊은이의

입을 빌어 도시 속에서의 인간 소외를 노래한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 원작의 "서울하늘(1)"도 그의

언어가 빛을 발하는 곡 중의 하나다. '나도 돈 좀 벌고싶어서/나도 출세 좀 하고싶어서/일자리를 찾아봤으나/

내 맘대로 되지 않습디다…' 양병집의 소박한 언어 표현은 청년의 순진한 소망을 짓밟아 버리는 도시의

비정을 더욱 사실적으로 드러내는데 효과를 발휘한다. '아! 두 번 다시 안올랍니다…' 청년의 도시 순례기는

이 짧은 탄식으로 끝을 맺는다. 비록 찰나에 불과한 탄식이지만 여기에 깃든 염증과 혐오의 밀도는 이 곡

전체에 대한 충실한 요약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금지곡 파동에 희생 당하면서 전설로 격상되기는 했지만 솔직히 이 앨범은 음악적인 면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다. 가장 큰 아쉬움은 양병집이 지닌 풍자가로서의 면모가 일관되게 추구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총 10개의 수록곡 중에서 그의 날카로운 풍자가 돋보이는 노래는 기껏해야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잃어버린 전설", "아가에게", "나는 보았지요" 등은 현경과 영애가 불렀으면 더 잘 어울렸을 법한 포크

발라드 곡들이고 우디 거스리의 "This Land Is Your Land"를 번안한 "너와 나의 땅"은 그의 노래치고는

지나치게 씩씩하고 '건전한' 곡이다. 양병집의 풍자가 빛을 발하는 곡들을 보면 주로 외국곡을 번안한 작품들,

그 중에서도 밥 딜런, 우디 거스리, 피트 시거(Pete Seeger) 등의 번안곡들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피터 폴 & 매리처럼 다소 성향이 다른 아티스트의 번안곡은 물론 그의 자작곡들에서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예리한 풍자는 좀처럼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그의 풍자가 지닌 근본적 한계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비록 풍자적인 가사로 이름을 날리기는 했지만 양병집은 자신의 풍자 정신에 적합한 자기만의 음악적 어법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따라서 그는 외국 대가들의 어법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이에 의존하지

않을 때는 당시 한국 포크의 통상적이고 습성화된 어법에 쉽사리 발목을 잡혔던 것이다.

이 앨범이 지닌 또 하나의 문제는 노래와 연주의 심각한 부조화다. 세션을 맡은 동방의 빛이 수많은 앨범에서

탁월한 연주를 들려준 한국 최고의 스튜디오 밴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기서의 실망스러운 연주는 다소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양병집 자신도 "강근식의 기타는 내 노래와 잘 맞지 않았다"고 술회한 바 있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비단 기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 앨범에서 양병집과 동방의 빛의 호흡은 한마디로 물과

기름이다. 스튜디오에 들어가기 전 최소한의 의견 교환이라도 이루어졌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소낙비"에

서 강근식이 연주하는 기타 필인은 양병집의 보컬을 계속 차단하면서 거북한 장면을 연출하고, "너와 나의

땅"에 나오는 쳇 앳킨스(Chet Atkins) 풍의 기타는 단순하고 소박한 원곡에 지나칠 정도의 세련미를 부과한다.

이호준의 키보드가 만들어내는 현대적 사운드도 "타복네"의 토속적 정서와 끊임 없이 충돌을 일으키고,

"아가에게"에서는 급기야 노래방 수준의 싸구려 센티멘탈리즘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이 앨범의 '강요된' 실패 이후 양병집의 음악인생은 시련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두번째 앨범을 발표하기까지

6년을 기다려야 했고 세번째 앨범이 나오는 데는 그로부터 또 5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이 두 앨범은 모두

상업적 참패를 면치 못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의 팬들 조차 이 앨범들을 크게 반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넋두리] 이후 긴 세월을 경과하면서 양병집이 지닌 풍자의 칼날은 크게

무뎌져버린 것이다. 이는 [넋두리]로 야기된 고초를 감내하면서 도달한 삶의 깨달음 때문일 수도 있고 인생의

연륜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체득된 인생관의 변화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는 풍자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한국 대중문화의 성향 탓일지도 모른다. 양병집과 서유석 이래로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한국에는 아직도

이렇다 할 풍자가가 등장하지 않고 있다. 비판적이거나 저항적인 음악인들은 많지만 그들 대부분은 지루할

정도로 진지하거나 진지한 척 한다. 하긴 코메디언이 농담 삼아 한 얘기를 가지고도 명예훼손 운운하며

흥분하는 환경에서 어떻게 풍자가 발을 붙일 수 있겠는가?

어렵게 내놓은 앨범들이 잇달아 실패하면서 양병집은 이제 거창한 음악적 야심을 추구하기 보다는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만족하게 된 듯 하다. 1985년의 [넋두리 II] 앨범 이후 그는 그 동안 발표된

자신의 레퍼토리를 다시 부르는 것이로 음악활동의 여생을 보내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넋두리]의 

음악적 불만을 바로잡는다는 의미도 없지 않다. 실제로 그가 다시 녹음한 "타복네", "소낙비", "서울하늘(1)"

등은 [넋두리]에 실린 오리지널보다 훨씬 나은 음악적 결과에 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만시지탄에

불과한 것이다. 비록 후기의 버전들이 듣기에 더 좋다고 해도 한 시대의 표현으로서 [넋두리]가 지닌 특별함

은 다시는 재현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앨범으로서의 [넋두리]는 짧고 기구한 생을 살았다. 그러나 그

앨범에 수록된 노래들은 한소리, 노래얼, 메아리, 울림터 등 각 대학 노래패의 노래집에 악보의 형태로 살아

남아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았다. 포크가 음악이기 이전에 노래고, 듣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 부르기 위한 것이

라면, [넋두리]는 한국 포크 사상 이러한 포크의 본질을 가장 충실하게 체현한 작품의 하나임이 틀림없다.



수록곡


Side A
1.서울하늘(1)
2. 잃어버린 전설
3. 타복네
4. 아가에게
5. 나는 보았지요


Side B
1. 너와 나의 땅
2. 소낙비
3. 서울하늘(2)
4. 역
5. 그녀

 

 

글 가져온 곳 : http://blog.daum.net/thumb-q/14589404

 

 

 

 

출처 : `사울의칼`이 출판하는 인터넷 잡지
글쓴이 : 사울의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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