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양산문(曦陽山門) 봉암사(鳳巖寺)의 빗장이 열리던 날(4)
- 동방장(東方丈)과 태고선원(太古禪院) -
동방장(왼쪽)은 올 2월에 낙성식을 가진 새 건물로서 극락전의 남쪽, 보림당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동방장(東方丈)
동방장은 조실스님이나 노장.대덕스님들이 머무는 처소인 염화실이다.
이곳에는 봉암사 수좌이신 적명 스님(71.영천 은해사 기기암)이 주석하고 있다.
적명 스님은 출가한 지 50여 년이 되어가는 선풍높은 구참수좌다. 봉암사 조실 스님의 직책을 한사코 사양하고
수좌로만 남아 있겠다고했다 한다. 스님은 50여 년의 출가생활 중 한 번도 주지 소임을 맡지 않았을 만큼
선수행에만 전념하고 계신 분이다.
적명스님을 직접 뵌 적이 없어 마당을 거니는 저 분이 적명 스님이란 것을 짐작만 할 뿐이다.
한국불교의 선풍을 드날리며 정신적 지주임을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제일의 선원, 그 선원의 최고 어른이
계시는 처소에는 어떤 글이 걸려있을까 궁금했다.
봉암사의 일부 전각에 걸린 주련은 안동민속박물관에 계시는 권영한선생이 해석하신 자료가 있으나, 동방장은
오늘에야 일반인들에게 처음으로 공개된 까닭에 그 궁금함은 더 했다.
동방장의 주련은 측면에 3개 정면에 5개가 걸려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종조(宗祖)로 모시는 태고(太古) 보우(普愚) 스님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吾 住 此 庵 吾 寞 識 (오주차암오막식) 내가 사는 이 암자 나도 몰라라
深 深 密 密 無 壅 塞 (심심밀밀무옹색) 깊고 은밀하나 옹색하지 않구나
函 盖 坤 乾 沒 向 背 (함개곤건몰향배) 천지를 모두 가두어 앞뒤가 없이
不 住 東 西 與 南 北 (불주동서여남북) 동서남북 어디에도 머물지 않네
동방장과 극락전
태고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는 고려 말의 고승으로 석가세존 제57대손이며 임제정맥(臨濟正脈) 제19대
적손이다.
중국 원나라때 임제정맥의 18대 적손이었던 호주 하무산(湖州 霞霧山) 석옥(石屋)청공선사(淸珙禪師)는
고려국 제자 태고 보우가 이별할 때, 이 시(詩)를 내놓자 한치의 망설임 없이 인가하고, 임제의 법맥을
부촉(咐囑)하였다.
석옥 청공의 종풍은 멀리 고려국에서 꽃을 피웠으며, 태고 보우는 평산 처림(平山處林) 선사에게서 인가를
받고 돌아온 나옹(懶翁) 혜근(彗勤) 선사와 함께 임제의 19대 적손이 되었다. 그리고, 나옹의 법맥과는 달리
태고 보우의 법맥은 지금까지 면면히 전해지고 있다.
이 암자의 주인께 문안인사를 드리러 온 스님
석옥은 제자가 내민 태고암가(太古庵歌)에 다음 같이 답글을 남겼다.
고려 남경(南京) 중흥 만수선사(中興 萬壽禪師) 장로의 휘(諱)는 보우(普愚)이며 호는 태고(太古)
이다.그는 일찍이 큰 일에 뜻을 세우고 고생해서 공부하여 안목이 뛰어났다.마음의 움직임이
끊어지고 생각을 벗어난 그 경계는 말로 표현할 수도 없었다.그리고는 숨어살기 위해 삼각산에
암자를 짓고 자기의 호를 따서 그 현판을 "태고"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스스로 도를 즐기고 산수의 경치에 마음을 놓아 태고가(太古歌) 한 편을 지었다.
병술년 봄에 고국을 떠나 이곳 大都에 이르러 먼 길의 고생도 꺼리지 않고 자취를 찾아오다가
정해년 7월에 나의 돌 많은 암자에 이르러서는 고요히 서로를 잊은 듯 반 달동안 이야기 하였다.
그의 행동을 보면 침착하고 조용하며 말을 들으면 분명하고 진실하였다. 이별할 때가 되어서 전에
지었던 태고암가(太古庵歌)를 내 보였는데,나는 그것을 밝은 창 앞에서 펴 보고는 늙은 눈이
한층 밝아졌다.
그 노래를 읊어보면 순박하고 무거우며 그 글귀를 음미해 보면 한가하고 맑았다.
이는 참으로 공겁(空劫)이전의 소식을 얻은 것으로서 날카롭기만 하고 의미없는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요즘의
글에 비할 것이 아니었으니 태고라는 이름이 틀리지 않았다.
나는 오랬동안 화답하는 일을 끊고 지내왔는데 붓이 갑자기 날뛰어 모르는 결에 종이 끝에 쓰고 아울러
노래를 짓는다.
先 有 此 庵 方 有 世 界 (선유치암방유세계) 이 암자가 생긴 뒤에 비로소 세계가 생겼으니
世 界 壞 時 此 庵 不 壞 (세계괴시차암불괴) 세계가 무너질 때도 이 암자는 무너지지 않으리
庵 中 主 人 無 在 不 在 (암중주인무재부재) 암자 안의 주인이야 있고 없고 관계없이
月 照 長 空 風 生 萬 籟 (월조장공풍생만뢰) 달은 먼 허공을 비추고 바람은 온갖 소리를 내네.
이렇듯 동방장의 주련은 제자 태고와 스승 석옥이 주고 받은 글을 걸어 놓은 것이다.
동방장 뒷뜰에 핀 철쭉의 나비 한 마리
한국의 법맥(法脈)에 있어서 논쟁이 되는 것은 중국 임제종(臨濟宗)의 법맥을 누가 이었는가
하는 문제인데, 중국 임제종의 개조 의현(義玄)의 18대 법손인 석옥(石屋)은 고려의 보우(普愚)
에게 법맥을 전했고, 보우의 법맥은 혼수(混修)-각운(覺雲)-정심(正心)-지엄(智嚴)-영관(靈觀)
-휴정(休靜)의 순으로 이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학자들 중에는 혼수가 나옹(懶翁)의 법맥을
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태고선원의 정문. 진공문(眞空門)
온 산문이 사람들로 북적인다.
기대감과 호기심을 가득안고 찾아온 불자들에게는 이 절집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선수행도량의 이미지가
심겨져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유명한 봉암사의 선원을 기웃거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확고부동하게 자신들의 소신을 굽힘없이 끝까지 지키겠다는 묵적지수(墨翟之守)의 변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인
가. 선원의 출입문은 굳게 닫힌 채 출입을 금한다는 테이프를 둘러놓았다.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는 따로없다. 참다운 공(空)이 묘(妙)하게 존재한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진공(眞空)과 묘유(妙有)를 선원의 문패로 달아 놓았다.
그리고 문패 아래에 이곳의 주소를 이렇게 적어 놓았다.
入 此 門 內 (입차문내) 이 문 안에 들어오면
莫 存 知 解 (막존지해) 알음알이(知解)를 간직하지 말라
선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참선도량을 찾아가면 사찰의 일주문이나 해탈문 기둥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글귀다.
이 말은 『전등록』 제9권에 전하고 있는 중국 평전보안(平田普岸)선사의 설법인데, 선승들의 법문에 많이
인용되고 있는 유명한 말이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일주문이나 해탈문의 기둥에 이 말을 새겨서 걸어 두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이 문
(門)을 대개 사찰에 들어가는 출입문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선수행을 하는 사찰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알음알이를 일으키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해석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선수행의 도량은 각자의 청정한 본래심을 자각하여 깨달음의 경지에서
지혜로운 생활을 하는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로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보안선사의 설법은 그러한 현상적인 선원이나 사찰을 염두에 두고 한 설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보안선사가 말하는 이 문은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의 집으로 되돌아 가는 깨달음의 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각자 본래심의 깨달음 문으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알음알이나 사량 분별심이 없도록 하라는 법문이다.
한 마디로 망상을 일으키지 말라(莫妄想)는 말이다. - 성본 스님 말씀 중에서-
선원의 동문.묘유문(妙有門)
선원의 동쪽에 있는 묘유문(妙有門)은 극락전,대웅보전,조사전의 동선과 일치되어 있다.
들어오지 말라고 닫은 문을 어쩌겠는가. 까치발로 담장너머를 볼 수 있음도 다행이라 여겨야지...
보리달마를 제1조로 한 중국의 법맥은 제 2조 혜가(慧可), 제 3조 승찬(僧璨), 제 4조 도신(道信), 제 5조 홍인
(弘忍), 제 6조 혜능(慧能)에까지 이어진 뒤, 혜능으로부터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선종이 널리 전승되었다.
중국에서 들어온 한국 선종의 법맥 대부분이 제 6조 혜능의 법맥을 잇고 있다.
7세기에 최초로 신라에 禪을 전한 사람은 법랑(法朗)이다. 봉암사지증대사탑비(鳳岩寺智證大師塔碑)에 의하
면, 법랑은 중국으로 건너가 6조 중 제 4조 도신의 법맥을 이어왔다. 이후 또 北宗禪을 전래한 사람은 신행
(神行:704~779)이다.신행은 일찍이 경상도 호거산에 은거해 있던 법랑의 문하에서 수학해 법을 받았다.
법랑이 입적한 후, 그는 당나라로 가서 北宗 신수(神秀)의 제자인 보적(普寂:651~739)의 제자가 되는 지공
(志空)에게서 법을 받고 귀국했다.
희양산문태고선원 편액
이와 같이 신수(神秀)계의 북종선이 처음으로 전래되었으나 이후 선종의 대부분은 마조계의 남종선 계통이다.
중국 선종이 성립될 무렵의 四祖 道信의 법과 北宗禪이 법랑과 신행을 통해 전래되었지만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이후 신라의 북종선 전래는 끊어졌으나 신행의 문하에서 준범(遵範)이 나오고 준범은 혜은(惠隱)에게 법을 전
해, 이들을 거쳐 지증 도헌(智證 道憲)이 희양선문을 열었다.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던
산문은 10여 산문이 되나 대표적인 산문을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고 한다.
당시 9산선문 가운데 8산문의 개조가 모두 입당하여 법을 받아왔으나 지증(智證)만이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산문을 열었던 것이다.
지증은 한국적인 선을 구축하였으며 민간 토속신앙을 불교적으로 해석하고 유교․도교와 관계를 지으며 불교와
융합을 꾀하기도 하였다. 어느 나라나 불교는 그 나라의 민족성이나 전통과 결부지어 있어 희양산문의 지증은
한국적인 선을 지향했다고 할 수 있겠다
지증의 문하에 양부(楊孚) 등 여럿이 있으나 행적이 자세하지 않고, 양부의 제자에 금양(兢讓)이 있다. 兢讓은
고려 태조 때 희양산으로 들어가 폐사가 된 봉암사를 재건하여 선풍을 일으켰다. 이후에 지종(智宗)은 고려
광종 때 중국 延壽의 문하에 들어가 法眼宗을 받아 왔다.
따라서 이 희양산문에서는 법랑을 통해 최초의 선종, 신행을 통해서는 북종선, 지증으로부터 순수 한국 선풍,
지종으로부터 법안종이 전해졌으니, 희양산문은 융합적인 선풍이 어우러져 있다고 볼 수 있다.
희양산문의 법맥을 정리하면 이러하다.
法朗 → 神行 → 遵範 → 惠隱 → 智證 → 楊孚 → 兢讓 → 逈超 → 智宗
(희양산문 개산주)
이렇듯 봉암사 태고선원의 역사는 지증대사가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을 이곳에서 개창하므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후 태조 18년(935) 정진대사가 주지로 있을 때는 봉암사에 3천여 대중이 머물러 동방장과 서방장으로 나누어
정진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져 태고 국사(太古國師) 또한 이곳 봉암사에 와서 행화
(行化)하여 선풍을 크게 진작 시킨바 있으며, 그 외 고려 조선 시대의 유명무명의 수많은 수행자들이 이곳에서
정진하여 “동방의 출가승도는 절을 참배하고 도를 물을 때 반드시 이곳 봉암사를 찾았다.”고 한다.
이렇게 유서 깊은 선사 봉암사에 근대 선원이 다시금 부흥된 것은 1947년이다.
해방 직후 사회적 혼란이 극심한 상황에서 봉암사는 한국불교의 현대사에서 새로운 흐름을 창출한 결사도량으
로 거듭난다. 이름하여 ‘봉암사 결사’(鳳巖寺結社)이다.
봉암사 결사는 1947년 성철 스님을 필두로 청담․자운․우봉 스님 등 4인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
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
만 살아보자.”는 원을 세우고 결사도량을 찾으니 그곳이 봉암사였다.
한 납승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문을 들어선다.
그 후 청담․향곡․월산․종수․보경․혜암․도우․성수․법전 등 20인이 결사에 참여하였다.
당시 결사대중은 공주규약(共住規約: 선원 청규)을 제정하여 추상같은 법도를 세워 오늘날
수행의 근간을 세웠던 것이다.
이와 같이 희양산 봉암사는 신라 구산선문 중 희양산문으로 110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선맥을 면면부절(綿綿不絶) 이어온 명찰로서 과거의 화려했던 선풍(禪風)을 진작(振作)하기 위해
지금도 백여 명 눈 푸른 선납(靑眼禪納) 대중이 상주하며 용맹정진하고 있는 동방제일의
수행 성지(修行聖地)이다.
鳳巖曦陽選佛場 (봉암희양선불장) 봉암사 희양선원 선불장에
靑衲何關作向上 (청납하관작향상) 청납은 어느 공안에 향상일구를 짓는가?
月峰寒泉飄梅香 (월봉한천표매향) 월봉의 시린 샘에 매화 향기 흩날릴 때
歸鄕當牛報劫恩 (귀향당우보겁은) 고향에 돌아가 소가 되어 시은에 보답하리.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도록 바람도 숨죽여 지나간다는 동방제일의 수행도량 태고선원
하루 4차례에 걸쳐 12시간 참선수행이 이뤄지는 서당(西堂:태고선원)의 결사(結社)는 새벽 1시 기상,
오후 11시 취침(2시간 수면)하는 일과로 이루어 진다.
새벽 2시 입선(入禪)을 시작해 오전 5시 방선(放禪), 오전 8시 입선, 11시 방선, 오후 2시 입선, 4시 방선 및
청소, 오후 6시 예불 입선, 10시 방선으로 진행되는 치열하고도 극한의 한계를 넘나드는 참선수행이다.
결제는 3개월을 정진기간으로 정하고 있으나 서당의 결사는 10개월을 특별정진기간으로 정하고 있다.
태고선원 합각면에 그려진 하얀 코끼리(白象)는 대행보현보살의 실천행을 상징으로 나타낸 것이다.
태고선원의 용마루
태고선원에서 발길을 돌리며 용맹정진하는 이곳의 수행자들이 반드시 깨달음을
얻어 그 열매를 뭇 중생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끝없이 초월하는 깨달음의 한마디(향상일구:向上一句)를 듣고 싶은 것이다.
海底泥牛含月走(해저니우함월주) 바다 밑 진흙소 달을 머금고 달리며
巖前石虎抱兒眠(암전석호포아면) 바위 앞 돌 호랑이 아기를 보듬고 졸도다.
鐵蛇鑽入金剛眼(철사찬입금강안) 무쇠뱀 금강의 눈을 뚫고 드니
崑崙騎象鷺鷥牽(곤륜기상로사견) 코끼리를 탄 곤륜산을 백로가 끌고 가네.
그리고 그들은 바다 밑 진흙소가 왜 달리며, 백로가 곤륜산을 어떻게 끌고 가는지
극한의 모순된 화두를 깬 조화로운 답을 우리들에게 알려줄 것이다...
나는 사념(思念)에서 해방된 명상자.
오직 마음뿐, 그밖엔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아
사자처럼 당당하게 거닐고
용장(勇將)처럼 두려움 없이 행하네.
내 몸은 붓다의 몸에 용해되고
내 말은 여래(如來)의 진실한 말씀 같고
내 마음은 대 광명에 녹아졌네.
육근(六根), 육경(六境)이 공(空)함을 분명히 보았나니
굶주린 귀신들이여! 그대들의 농간이 우습구나.
- 미라래빠의 십만송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