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없이 의심해서 진실 꿰뚫는 믿음의 눈 떠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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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그때부터 ‘내가 가야할 길이 어디인가’ 고심했다. 스님은 부처님이 깨달은 행복한 삶의 대안과 가치를 가장 빨리 사무치게 체험하는 방편을 ‘선(禪)’이라고 결론내렸다. 4년 뒤인 1989년, 부산 범어사 내원암에서 은사 능가스님을 시봉하던 스님은 산에서 내려왔다.
큰스님 허락하에 ‘독립’을 한 셈이다. 부산 금정포교당에 선방을 차리고 화두를 의심하는 간화선을 시작했다. ‘이 때 아니면 언제 하나’하는 일념으로 오로지 간화선을 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지만 1년 반만에 몇 명 되지도 않는 신도들마저 다 떠나버렸다. 수불스님은 포교당 문을 걸어 잠그고 칩거에 들어갔다.
“허물은 신도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잘 가르치지 못한 내가 허물이더라. 그 당시엔 절집에서 내가 배웠던 대로 화두만 달달 외는 식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문제를 외는 게 아니라 답을 찾는 것이더라.”
스님은 신도들을 다시 불러모았다. “문제만 외우는 건 어리석다. 우리가 문제를 몰라서 괴로운 게 아니다. 답을 몰라서 괴로운 거다. 그러니 화두를 들었으면 답을 찾는 데만 집중하라.”
1985년 日 츠쿠바박람회서 문화적 ‘충격’
22년간 250여차례 2만명에 간화선 지도
동국대 55억 등 불교계 곳곳 보시행 실천
1990년대부터 수불스님호 간화선 수행은 닻을 올렸다. 올해로 22년간 250여 차례에 걸쳐 약 2만명에게 간화선 수행을 지도하고 점검해줬다. 지금도 부산과 서울에서 각각 100여명의 지원자가 모이면 7박8일간 시간을 잡아서 집중적으로 화두를 잡게 한다. 1년에 두 도시에서 14회~16회 진행하면 동참자는 무려 3000여명에 달한다. 수행 기간 동안 스님은 이들 곁에 머물면서 숙식을 함께 한다. 수행 도중에 발생하는 여러가지 심리적 명현 반응을 감지해주고 재빠르게 다독여 주기 위해서다.
“부처님이 깨달음의 문을 열어놓았으니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면 되는거고, 나아가 또다른 사람에게 깨달음의 문을 열게 해준다면 그 이상 좋은 게 어디 있겠습니까? 누구라도 자유를 맛보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해줘야 하는 거지요, 자기만 눈뜨는게 아니라, 더불어 눈뜨게 하는 데 의의가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좋은데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소승적 공부지요. 이제는 우리 수행자들도 자기가 눈뜬 수행방법을 남한테도 정확하게 제시하여 눈뜨게 해줘야 합니다.”
좀 더 진실에 가까운 삶 위해
어리석음을 지혜로 눈 뜨는
참선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종교란 어떤 의미입니까.
“종교를 위해서 종교생활을 한다면 광신도 맹신자가 되기 십상입니다. 종교는 세가지가 구비돼야 합니다. 첫째는 경전과 같은 문서, 둘째는 이치에 맞아야 하고 마지막으로 문서와 이치가 사실로 증명돼야 합니다. 이를 통해 종교는 어리석음을 지혜로움으로 전환하는 방법을 전해주지요. 그것이 자비입니다.
염불하고 불공드리고 기도하고 제사하는 것, 이것들은 전부 종교를 믿게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종교가 가장 바르고 빠르고 쉽게 진리에 눈뜨게 해줄 수 있는 가치근거를 가진 가르침인지 스스로 밝혀내고 과연 그런 가르침을 가까이서 믿고 의지함으로써 어떤 이익이 있는지 점검돼야 종교를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당 가서 절하고 불상에 매달리는 우상행위는 불교가 아닙니다. (불상과 법당 등은)진리의 세계로 끌고 올라가는 수단을 장치해놓은 것일 뿐입니다.”
-왜 간화선 수행을 중시합니까.
“대한불교조계종의 전통은 간화선입니다. 화두를 의심하는 수행법입니다. 그런데 간화선으로는 더 이상 지혜를 눈뜰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간화선이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동남아시아 티베트 일본 등지의 수행법이 우리나라 불교계에 빠르게 파급되는 반면 한국불교의 전통수행방법인 간화선은 전세계의 불교계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조차 너무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좀더 진실에 가까운 삶을 살기 위해서, 헤매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어리석음을 지혜로움으로 눈뜰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참선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간화선은 어렵다는 인식이 많습니다. 화두의심이란 무엇인가요.
“간화선 수행은 의심을 거는 게 핵심입니다. 억지로 의심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의심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의심이 점점 커져야 합니다. 이 때는 의심을 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들려지고, 의심을 하지 않으려 해도 내려놓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야 간화선 수행을 제대로 하는 겁니다. 이런 의심이 활구(活句)죠. 의심을 거는 단계가 일단 성공하면 그 다음에는 지도하는 사람이 공부하는 사람의 의심을 깨트려줄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간화선은 공안 상에서 의심된 화두와 한 덩어리가 되도록 관문을 시설하고 깨닫도록 한 수행법입니다.”
스님은 잉어가 안간힘을 쓰면서 3단폭포수를 거슬러 올라가 마침내 용이 되려면 바로 화두가 그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유일한 길이자 대안이라고 빗대 설명했다. 스님은 또 “믿음과 용맹심으로 화두를 들면, 한생각이 무량겁이어서 10년이나 1초나 같다”며 “팽이가 완벽하게 돌면 돌지 않는 것처럼 착각되듯이, 태엽이 계속 돌아가서 탁 끊어지는 순간까지 화두를 밀어붙이라”고 했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시비를 잠재우고 졸기도 하지만, 불굴의 용기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주시하다 쥐도 모르게 쥐를 잡는 경지다. 이해되는 듯 하다 들을수록 어려워질 무렵, 수불스님은 “기자도 체험해야 한다”고 꼬집듯 말했다.
이치만 배워서 이해한 것으로
다 아는 것처럼 착각하면 안돼
-간화선에서 믿음은 어떤 경지입니까.
“신심으로 꽉 찼을 때 끝까지 온몸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신심은 자기에게 주어진 활구화두를 믿어야 형성됩니다. 화두를 들었을 때는 누구의 말도 믿지도 듣지도 말고, 화두 하나만 믿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즉 대신심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근원적인 믿음입니다. 눈 앞에 당면한 그 문제를 믿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어서 공부하게 하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일부 간화선에 문제도 많습니다.
“부처도 의심해라, 마음도 의심해라, 진실을 외면하지 말라고 늘 강조합니다.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해도, 이치만 배워서 이해한 것을 가지고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착각하면 안됩니다. 사실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이치와 딱 맞아 떨어지는 확고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종교가 생명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스스로 묶어놓은 것을 풀어줌으로써 속박을 해탈시키는 데 진정한 자유와 종교의 본래 뜻이 있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자꾸 굴려서 알음알이를 쌓으면 어느사이 깨달음과 등을 지고 말 것입니다.”
수불스님은 우상과 맹신, 기복불교 현실을 우려하면서 “참선을 통해 자기 눈을 뜨라”고 재차 삼차 강조한다. 스님은 “내가 나를 알고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절에 오는 것”이라며 “그런 궁금증이 없다면 그냥 사회에서 윤리도덕적으로 사고.행동하고 남에게 해코지 안하고 질서 잘 지키면서 살면 그만”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종교를 통해서 종교가 이야기하려는 알맹이가 뭔지 그것을 추구하려는 믿음으로 거듭날 때 제대로된 종교인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온통 허망한 짓이요, 시간낭비에 불과합니다.”
서울과 부산의 안국선원. 3000여명의 신도들이 참선수행과 정진에 매진하는 도량이다. 인류의 마음에 진리의 외침이 울리게 하고, 세계만방에 지혜의 눈을 밝히는 선의 범세계화로 만민평등의 세계일화를 우주법계에 꽃피우는데 일조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부산 안국선원이 한국선불교의 요람이라면, 서울 안국선원은 현대식 선원의 시발점이다. 1년에 두 번 동안거와 하안거에 신도들이 가행정진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된다.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달으신
행복한 삶의 대안과 가치를
사무치게 체험하는 방편이 禪
안국선원은 일반 사찰과 다르다. 스님과 신도라는 교단의 강고한 질서안에서 믿음이 유지되는 틀이 아니다. 스승과 제자가 행복하게 간화선을 체험하며 전등(傳燈)의 관계양식을 보여준다. 한국불교의 미래를 밝게 하는 도도한 흐름이다. 수불스님은 ‘멘토’라는 표현을 썼다. “날마다 법문을 하면서 조사어록을 공부하고 신도들의 화두수행을 점검해줍니다. 서로간 존경심과 믿음이 전제돼야 가능한 일입니다. 종교와 직업, 재력 따위는 분별하지 않고 공부를 합니다. 오직 좋은 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나눠야 한다는 생각에서 매일 안거하는 마음으로 신도들의 ‘멘토’가 되려고 노력합니다. 믿음과 화합을 밑거름으로 본말(本末)과 선후(先後), 경중(輕重)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수행자로 가는 겁니다. 시기.질투할 것이 아니라 베풀 수 있는 가치를 갖고 불교계가 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불스님이 강조하는 ‘사회를 향한 보탬’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다. 얼마 전 동국대 국제선센터 건립기금과 종학연구소,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기금 일환으로 무려 55억2000만원을 내놨다. 일일이 거론할 순 없지만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조계종 스님들이 수불스님의 격려와 지원 속에서 한국불교학계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지난 2006년에는 미국 하버드대학에 ‘불교학 연구를 위한 안국장학회’를 설립, 5년간 1억원씩 기금을 전달한 바 있다. 스님은 당시 “장학금이 한국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도움을 줘 한국불교가 세계 불교학계서 자리를 잡는 시금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밝혔다.
이외 종교자유정책연구원, 불교사회연구소, 보리방송모니터회 등 자금난에 시달리는 크고작은 불교단체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수불스님 덕분이다. 함양 벽송사 선원과 문경 봉암사 국제선센터도 안국선원과 수불스님의 원력과 보시로 10억, 20억 불사가 원만하게 진행됐다. 열악한 군법당도 20억원에 달하는 지원으로 빛을 보게 됐다.
-외부지원에 대한 신도들 반응은 어떠합니까.
“내부 외부의 개념은 없습니다. 광대무변한 허공에서 떨어지는 한 개의 빗방울이 수많은 골짜기의 물줄기와 어울려서 강과 바다의 인연을 이룹니다.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보물들을 밝은 눈으로 찾아내 후세에 전하는 데 누가 이를 가로막겠습니까.”
안국선원의 무주상 보시에 관해서도 “우리 신도들은 수십년 쌓아온 스님의 향기가 이제 세상 곳곳에 퍼지는 것 같아 너무나 행복하고 감사하다”고 답했다. 수불스님의 상좌 16명 중 11명이 안국선원 신도의 아들임을 보면, 스님을 향한 신도들의 생각을 들어볼 필요가 따로 없었다.
-보시의 참의미는 무엇입니까.
“보시는 법왕자(法王子)라고 합니다. 그만큼 중요하면서 여러 차원이 있습니다. 차원마다 보시의 개념이 다르죠. 따뜻한 말 한마디가 보시입니다. 상대방에서 상처를 주지 않아도 보시입니다. 때로는 뺏는 것도 보시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쁜 습관으로 남을 해치는 일을 반복할 때는 그 나쁜 일을 못하게 그 사람의 무기를 뺏는 것도 보시입니다. 혼내주어도 보시라는 말이죠. 선지식이 후학을 이끌어주는 일도 보시입니다. 지혜를 열어주는 것도 보시입니다. 존재 자체가 보시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이 우주는 지금 이 상태로 완벽한 보시의 상태입니다.”
수불스님은 지난해 11월 불교신문 제43대 사장으로 부임했다. 선지식이 후학을 이끌어주듯이, 스님은 불교신문 창간 51주년만에 처음으로 ‘100만부 독자 확장’을 기치로 내걸었다. 종도들의 눈을 밝히는 선의 세계화, 불교의 세계화로 세계일화를 꽃피우기 위해선 불교신문을 통해 올곧은 불법을 널리 홍포하는 일이 우선돼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불스님이 30여년 전 일본 츠쿠바박람회에서 예감했던 변화된 세상에서 종교가 해야할 몫이자, 22년간 안국선원을 한국불교 간화선의 요람으로 키워온 이유다.
‘의심의 칼을 물고 풀 속에 뛰어든 지 얼마만이던가. 갑자기 달려드는 마구니 형상을 보고 놀라 일어나니 부질없어라 헛된 그림자여. 왜 진작 망념이 정념의 원인이 됨을 몰랐던가. 한 생각 놓아버리니 이렇게 편한 것을. 푸른 숲속 새들의 맑은 노래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가까운 것이 더욱 정겹고 활기차도다. 이렇게 좋은 시절을 멀리하고 헛것에 속아 지낸지 몇 해 이던가. 억겁의 그물에서 벗어나니 눈앞의 경계가 새롭구나. 동서남북 상중하여! 낱낱의 모습을 벗어나지 않았도다. “훔”…(수불스님의 詩 ‘헛된 그림자여’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