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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칸트와 불교에 있어 존재와 인식 그리고 실천 / 최인숙 2. 인식의 대상 1)

무한대자유 2012. 9. 9. 09:53
 

칸트와 불교에 있어 존재와 인식 그리고 실천 / 최인숙 2. 인식의 대상 이 논문에서 칸트와 불교를 하나의 주제로 묶어 글을 씀에 있어서, 동양과 서양 각 영역에서 양자의 사상이 중요한 비중을 지니고 있다는 점과 더불어, 이 양자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좋은 세계관 및 인간관을 제시해 주고 있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칸트와 불교의 세계관 및 인간관은 많은 점에서 상이하지만, 또 어떤 점에서는 유사한 사고 기반을 지니고 있다. 우선 존재, 대상 개념을 통해서 양자의 사상의 유사점 및 차이점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칸트에서 현상으로서의 대상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철학이라는 말은 엄밀하게는 서양철학에서 유래한다. 철학(哲學)이라는 용어 자체는 한자어이지만, 이것은 서양의 말, philosophy, Philosophie를 번역한 용어로서, 고대 그리스어 philia(우정, 사랑)와 sophia(이해, 지식, 통찰, 지혜)를 합성함으로써 생겨난 말이다. 이렇게 볼 때 철학이라는 말은 ‘지식 및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식 및 지혜에 대한 사랑’은 ‘진리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서 순수하게 앎 자체에 대한 사랑이라고 이해해야 한다(실천적인 행위 문제라기보다). 서양철학의 시초인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은 자연의 보편적인 법칙 및 자연을 이루고 있는 궁극적인 요소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한다. 그 이후 서양철학의 중심적인 문제는 존재론적인 문제였다. 그리고 근세 이후에는 존재에 대해 탐구하고자 하는 우리 인간의 인식 구조 및 본성에 대한 문제에로 그 중심이 옮겨졌다. 그러한 방향 전환은 칸트에서 정점을 이룬다. 그러나 존재론적 탐구에서 인식론적 탐구로의 방향 전환에도 불구하고 존재 문제는 칸트 철학에서도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의 인식 구조의 성질을 밝힘으로써, 나아가 우리가 무엇을 어디까지 알 수 있는가 하는 존재론적 문제를 해명하는 것이 칸트 자신의 탐구 목표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인식론적 관심을 체계화한 책으로서 그의 주저인 《순수이성비판》도 종국에는 미래에 도래해야 할 진정한 형이상학(존재론)을 위한 예비학인 것이다. 칸트는 이 책의 서언(초판과 재판)에서 그러한 견해를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우리의 인식 구조는 어떠한 것이며, 우리의 인식 구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존재의 세계는 어떠한 성질을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논하고 있다. 《순수이성비판》이 처음 출판되어 나오기(1781년) 이전부터 칸트는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러한 문제를 이미 1770년 교수취임논문에서도 서술하고 있다. 이 교수취임논문과 《순수이성비판》을 통해서 확립되는 존재 개념이 바로 현상 개념으로서, 현상은 우리 인간의 인식 구조와의 관계에서 논의되는 대상 개념이다. 물론 이 두 권의 책에서 모든 생각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상 개념은 이미 1770년의 교수취임논문에서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존재, 대상 개념으로서의 현상 개념이 칸트 철학에서 어떤 위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 이전의 철학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중요성을 지니며, 나아가 서양철학 전반,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개념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논하고자 한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철학사에서 칸트의 가장 커다란 공적은 현상과 물자체를 구별한 점이라고 말하고 있다.1) 1) A. Schopenhauer,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I. 2권, Diogenes Verlag, Zu촵ich, 1977, 514쪽 참조. 서양철학의 역사는 실체 개념에 대한 해석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참으로 존재하는 것(실체)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고대 자연철학으로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중세철학과 근세의 합리론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심지어는 칸트 이후의 헤겔에서도 철학적으로 근본적인 관심사였다. 영원히 참으로 존재하는 실체는 오로지 정신적인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고, 오로지 물질적인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고, 혹은 물질과 정신 양자로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한 견해들은 유심론, 유물론, 이원론이라는 존재론(형이상학)의 명칭으로 불린다. 여기에서 서로 다른 명칭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이한 이론들에는 기본적으로 공통된 생각이 들어 있었다. 이 세계는 궁극적으로 변하지 않는 근본적인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이 바로 그러하다. 그것이 정신적인 존재이든, 물질적인 존재이든 또는 정신과 물질 두 가지의 서로 상이한 존재이든 간에 고전적인 서양철학은 이 변치 않는 참 존재를 찾아내 그것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철학 체계를 세우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특히 근세 이전까지는 이러한 철학 방향, 즉 존재론적인 철학 방향이 우세했다. 그러한 사고에 반기를 들고나선 것이 근세의 경험론 철학이다. 존 로크(J. Locke, 1632∼1704)는 《인간오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서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원래 사변적인(이론적인)2) 지식을 갖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실천적인(도덕적인) 지식을 갖고 태어나는 존재도 아니라는 점을 이 책 맨 앞에서부터 논함으로써, 로크 자신이 이 책을 씀에 있어서 무슨 문제를 가장 중시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로크가 생각하기에 우리의 지식은 오로지 경험을 통해서 생기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정신)은 살아가면서 증가하는 경험적 지식으로 채워지는 것일 뿐, 처음부터 본유 관념, 생득적 지식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다. 2 ) 여기에서 사변적인(speculative), 이론적인(theoretical)이라는 말은 존재, 대상에 대해 논하는 사고 태도를 뜻한다. 우리의 마음은 태어날 때에는 완전히 비어 있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칠판(tabula rasa)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조지 버클리(G. Berkeley, 1685?∼1753)는 “존재는 지각된 것이다(Esse est percipi).”라는 철학을 자신의 《인간 지식의 원리에 대한 이론(A 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에서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로크와 버클리에는, 전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로크에서 제1성질3)이나 실체 개념, 그리고 버클리에서 우리의 모든 관념들의 담지자로 인정되고 있는 신의 존재 개념 등이 특히 그러하다. 3) 로크는, 사물의 제2성질은 우리의 주관적인 지각(맛, 소리, 빛깔, 냄새 등)이지만, 제1성질(형태, 크기, 운동, 정지, 수 등)은 사물 자체와 연관되어 있다고 말함 고전철학의 실체 개념에서 처음으로 완전히 벗어난 이는 흄(D. Hume, 1711∼1776)이다. 흄의 생각에 지식이란 것은 감각적인 인상과,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남아 있는 관념(생각)뿐이다. 종래의 필연적인 자연법칙(인과법칙)이라고 하는 것도 경험에 의해서 축적된 관습적인 지식일 뿐이다. 자연의 필연적인 인과법칙 위에 성립하는 종래의 형이상학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흄에게는 자연의 대상도 우리의 마음도 그때 그때의 지각에 의해 쌓인 관념들의 다발일 뿐이다. 관념들의 ‘다발’은 상황에 따라 풀어지고 묶일 수 있는 임의적인 것이다. 칸트(I. Kant, 1724∼1804)는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다른 한편으로는 뉴튼의 자연과학의 필연성을 신봉하고 있었다. 그런데 형이상학 및 자연과학에 대한 흄의 주관주의적, 심리주의적 입장을 접하고 나서, 형이상학과 자연과학의 학문성 문제를 완전히 새로운 토대 위에서 숙고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10여 년 동안 연구한 성과를 칸트는 1781년에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칸트는 이 책에서 미래에 도래해야 할 형이상학을 위한 정초작업을 하고자 했다.4) 4) 그렇다고 해서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단지 미래의 형이상학을 위한 준비단계로만 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순수이성비판》은 미래의 형이상학을 위한 기본적인 구도를 이미 다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A 11/B 24 - A 16/B 30 참조. 여기서 A는 초판, B는 재판을 가리키며, A, B 다음의 숫자는 각기의 쪽수를 표시함. 흄의 사고 혁명에 의해서 종래의 형이상학의 토대는 무너졌지만, 칸트는 어떤 사고 방식을 통해서 새로운 형이상학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했으며, 그러한 확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새로운 이론을 수립했다.. 그것은 현상으로서의 대상 개념과, 그리고 현상을 인식하는 주관 개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우리들은 감성형식(공간형식과 시간형식5))과 사고형식(오성의 범주)을 통해서만 대상을 인식한다. 우리들은 대상 그 자체, 즉 물자체(실체)는 인식할 수 없다. 사물 자체는 우리의 인식 대상일 수 없다. 우리는 우리들의 인식 구조를 통해서만 사물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인식 구조가 바로 감성형식과 사고형식이다. 우리들의 인식 구조에 의해 인식되는 대상은 사물 자체가 아니고 우리들의 표상, 즉 현상일 뿐이다. 현상은 우리의 주관에 대한 상이다. 5) 칸트는 시간과 공간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적 실체가 아니고, 우리 인간의 주관적 구조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시공 개념에 형식이라는 표현을 덧붙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상(현상)이 있으면, 그것을 있게끔 한 원인으로서의 물자체 또한 있지 않느냐고. 물론 그러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현상을 아무리 정확하게 인식하려고 해도 물자체는 절대 인식할 수 없다. 물자체는 우리의 주관에 대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단지 ‘사고상의 존재(ens rationis)’일 뿐이다. ‘사고상의 존재’에는 감성(시공)의 재료가 대응하지 않고, 사고로 그칠 뿐이다. 우리에게 대상은 공간 및 시간상의 존재일 뿐이다. 시공을 초월하는, 시공과 ‘관계없는’ 존재는 우리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우리에게 존재는 공간상의 존재와 시간상의 존재이다. 공간상의 존재는 물체적인 형태를 지닌 존재이고,6) 시간상의 존재는 심리적인 존재(사태)이다. 시공간상의 존재에는 인과법칙이 적용된다. 시공간상의 존재로서 인과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원인과 결과간의 관계는 현상들간의 관계이다. 결코 물자체(실체)들간의 인과관계가 아니다. 칸트는 필연적인 인과법칙의 정당성을 인정하지만, 그것은 단지 현상들에 대해서이다. 6) 칸트에서 시간이 공간보다 더 포괄적인 직관 형식이기 때문에, 공간상의 존재는 동시에 시간 속에서 지각된다. 이렇게 해서, 흄이 자연의 대상에 대해 필연적인 인과법칙을 부정한 데 비해, 칸트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했다. 흄은 인과관계를 실체들간의 관계로 보았기 때문에, 실체들의 필연적인 인과법칙을 부정한 것이다. 우리의 주관적인 구조로는 실체들 자체의 관계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흄은 실체들의 인과법칙을 부정했다기보다, 우리의 인식 가능성을 부정한 것이다. 그에 비해, 칸트는 처음부터 자연의 대상에 실체 개념 대신 현상 개념을 적용함으로써, 현상들간의 필연적인 인과법칙을 인정한 것이다. 현상 외의 자연의 대상은 우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시공형식 외에 다른 지각 방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7) 7) 우리는 세상의 존재를 시공형식에 의해서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시공형식에 의해 지각된 현상들의 인과법칙의 필연성은 우리의 인식 구조의 필연성을 뜻한다. 우리 인식 구조의 필연성에 의해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이 성립한다. 그의 관념론이 선험적, 필연적인 이유는 우리의 인식 구조 외에 다른 인식 방식을 우리는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과율 문제는 자연과학의 근본법칙에 대한 문제일 뿐 아니라,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핵심문제이기도 하다. 자연과학이든 형이상학이든 이 세계의 존재에 관한 관심에서 비롯하는 학문으로서, 양자의 학문은 존재를 인과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자연과학과 형이상학은 넓은 의미의 존재론에 포함된다. 칸트는 이제 존재를 현상으로 봄으로써 새로운 형이상학, 새로운 존재론을 정초했다. 칸트의 새로운 형이상학은 우리가 시공형식에 의해 인식할 수 있는 자연의 대상에 관한 학문으로서, 현상의 존재론이다. 그리고 인식론적으로 볼 때는, 칸트 자신이 자주 언급하고 있듯이, 그것은 선험적 관념론이다. 칸트의 현상의 존재론에 따를 때, 물질적 현상과 심리적 현상 양자에 대해 필연적인 인과율8)이 인정된다. 우리에게 인식 가능한 자연 대상도 현상이며, 우리에게 인식 가능한 자아도 현상으로서, 이것들은 우리 주관(감성형식과 사고형식)의 구조와 ‘관계하는’ 대상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식 구조와 ‘관계없는’ 실체로서의 자연 대상도 실체로서의 자아도 인식할 수 없다. 8) 칸트에서 인과법칙은 12개의 범주 중 ‘관계’ 범주군에 속한다. 현상으로서의 존재 개념에 의해 칸트철학은 그 이전의 고전철학과 근본적으로 방향을 달리한다. 칸트 스스로 그러한 방향 선회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종래에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실체를 중심으로 하고, 우리의 이성9)에 의해 실체를 가능하면 존재하는 그대로 비춰내고자 했다면, 이제 칸트에서는 우리의 인식 주관이 중심이 되어 대상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현상이다. 9) 고전철학에서는 인식 주관인 이성 또한 실체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전제하고 있다. 물론 우리의 주관이 대상을 임의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지각 재료와의 ‘관계에서’ 우리의 직관형식(시공)과 사고형식이 합작으로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러한 말은 자칫 오해를 야기하기 쉽다. 예를 들어 나의 ‘인식’ 이전에 ‘밖에’ 존재가 있고, 또한 내 ‘안에는’ 이미 절대적인 인식 구조가 있다고 생각하고자 하는 경향의 경우가 그러하다. 칸트에서 대상(현상)과 주관은 서로의 ‘관계’ 속에서만 ‘있다. ’ 밖의 재료와의 ‘관계’에서만 나의 인식 구조(시공형식과 사고형식)가 ‘있고’, 인식 대상(현상)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에서의 대상 인식은 주객의 역동적인 과정 속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다. 칸트철학에서 물자체 개념이 ‘사고상의 존재’로나마 인정되고 있다는 이유에서, 칸트철학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볼 때, 선험적 시공형식에 기초한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 그것에 의한 현상의 존재론은 획기적인 방향전환이며,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도 칸트의 이러한 철학은 현대의 자연과학 및 동양의 존재론, 특히 불교의 존재론과의 연관에서도 매우 호소력을 지니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허름한 人生 노트
글쓴이 : 거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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