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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 특집 ① 특별강연 - 심리학자 데이비드 브레이저 박사 불교심리 치료, 그리고 상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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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지난 11월 25일(목) 오후 2시, 서울 다보빌딩 3층 법당에서 (재)대한불교진흥원(이사장 민병천) 대원불교문화대학과 ‘불교와 사회 포럼’ 주최로 영국의 심리학자 데이비드 브레이저 박사를 초청하여 실시한 특별 강좌의 내용으로, 특강 전에 원고를 받아 편집부에서 요약한 것이다.
1. 사상의 역사적 배경
불교는 그 탄생부터 심리학적 전통이 있었다. 한 예로 『법구경』 제 1게에서는 “마음은 모든 것(마음부수)에 앞서며, 그것들은 마음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불교는 내면 성찰 방법을 이용해 아비달마에 있는 심리 상태에 대한 분류 체계가 발달해 내면의 삶에 대한 ‘주기표’를 만들려는 시도를 통해 “특수한 객관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또한 불교는 무아(無我)의 세계관(패러다임)에 입각해서, 논리의 해체를 위한 도구로 사용함과 동시에 수행법을 건설적으로 사용하는 논리와 수행 사이의 변증법적인 방법을 제안했다. 인도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논사인 용수와 세친의 사상을 바탕으로 중국 정토종의 대표적 인물인 담란(曇鸞: 467~542)은 연기설(緣起說)에서 나온 타력(他力) 사상을 제안한다.
20세기 전반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 1939), 알프레드 아들러(1870~1937) 그리고 칼 구스타브 융(1875~1961)은 개인의 정신 분석을 위한 정교한 이론과 방법을 개발했다. 그리고 제이컵 모레노(1889~1974), 윌프레드 비온(1897~1979) 그리고 커트 류윈(1890~1947)은 각각 집단에서의 인간 행동 이론을 개발했다.
이들의 이론들은 모두 어떻게, 왜, 사람들이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한 전적인 의식적 자각 없이 그 일을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추구한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로의 진입하면서 좀 더 합리주의적인 접근으로 일정 정도 회귀해, 최근 서구 국가에서 인지행동치료가 상대적으로 지배적인 위치에 등장하게 되었다. 심리치료의 직업화와 국가 통제가 이루어졌고, ‘증거에 근거한’ 접근들이 유행하고 있다.
불교심리학
불교심리학은 의식적·무의식적 과정의 이론을 둘 다 포함하면서도 같은 용어를 쓰지 않는다. 초기 불교 문헌의 중요성에 대한 다양한 현대의 해석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정상적인 사람은 미혹에 빠져 있으며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한 전적인 통찰이 없다고 초기 불교는 가정하면서, 연기의 원리에 의해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망념의 순환적 유형을 설명하고 있다. 아비담마에서 발달한 조건화(conditioning)의 원리는 존재의 조건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2. 불교 상위-심리학 Buddhist Meta-Psychology
불교 이론은 거의 모든 치료 방법에 정보를 줄 수 있으며, 치료 과정에서 특정한 개입을 제안한다. 치료에서 불교적 사고방식은 특징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포함한다. 먼저 무아의 세계관인데 이는 자아라는 명칭(self entitlement)에 기반을 두지 않은 접근을 의미하며, 타자 중심, 참회와 감사, 독단보다는 조화를 중시하는 세계관을 말한다.
그리고 모든 것[諸行]은 무상하다, 모든 것[諸行]은 괴롭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그리고 고통(dukkha)을 대면하고 다시 평가하고, 실재(reality)를 지탱하는 궁극적 힘에 대해 믿는다. 조건(pratyaya, 緣)에 근거한 분석을 통해서 조건을 바꿈으로써 상태를 바꿀 수 있음을 제안한다. 따라서 실제 삶에서 정신적 성장에 기여하는 조건을 만드는 것을 통해서 영적인 성숙을 지향한다.
조건관계 (Conditional Relations, Pratyaya) 측면에서의 분석
조건에 대한 불교 사상은 만일 x가 y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면, x는 y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y가 반드시 x를 야기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하라. 많은 조건들이 유사한 결과에 이른다고 해도 그것들은 여전히 결과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들은 가능성을 증가시킨다. 그러나 필수적인 조건이 제거되었을 때 그것에 의존하는 상태는 반드시 멈추거나 사라진다. 특히 불교적 분석은 어떻게 개인의 무의식이 미혹한 방식으로 외양에 집착하지 않고는 작용할 수 없는지를 보여준다.
여기 그리고 지금?
‘현재중심주의(presentism)’의 문제: 불교의 영향을 받은 많은 수행자들은 “지금 그리고 여기”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는 개념에 근거한 접근을 대단히 선호한다. 그러나 이로써 역사를 간과해 지혜를 잃을 수 있고, 미래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한 무책임에 빠질 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행하고 가르친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지지할 만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종종 이생 혹은 이전 생에서의 과거를 언급하시면서 상황을 설명하셨다. 깨달음을 통해 부처님께서 성취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자신들의 행위에 따라 생하고 멸하는” 존재들을 볼 수 있는 능력[死生智, 또는 天眼通]이었다.
불교적 깨달음은 이 순간에 대한 것만이 아니고 영원성의 이해에 관한 것이다. 불교적 태도는 현재와 미래 속에서 과거를 보고, 과거와 미래 속에서 현재를 보며, 과거와 현재 속에서 미래를 보고, 그 모든 것에서 영원을 보는 것이다.
심층 심리학
부처님은 알고 계셨고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태어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고, 만들어지지 않고, 형성되지 않은 것[열반의 경지]”(우다나 8.3)1)에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아는 부처님은 (그것을) 날아가는 왜가리에 비교하셨다.
마치 날아가는 새가 땅 위에서 걸어 다니는 것으로 한정되지 않는 것처럼. 불교도들은 태어나지 않은 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특성화했다.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좀 더 구체화되어 있다. 구체화는 태어남과 태어나지 않음을 너무 가깝게 관련시키는 함정에 빠진다. 치료에서, 우리는 지지를 받는 과정이라는 느낌을 만들어낸다. “상담자에 대한 신뢰” (폴 할모스, 1965)는 그것이 어떤 언어로 표현되든, 치료 과정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불교는 말로 된 어떤 정의도 정확한 것일 수 없음을 인식하면서, 태어나지 않은 것의 본성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표현을 아우르는 형이상학적인 신념이다. 일본의 정토진종 카운슬링의 설립자 기쇼 사이코(西光, 義敞 1925~2004)는 지지의 느낌을 설명한다. 그의 개념에서 치유를 제공하는 것은 자각의 외부에서 오는 지지다. 정토진종(淨土眞宗) 불교도로서 그는 이것을 아미타불의 힘과 동일시한다. 이런 사고방식을 융 스타일의 분석과 통합하는 것은 다음과 같이 가능하다.
마음의 구조
불교와 서양의 분석적 사상 사이의 이 비교는 수많은 의식의 계층이 배치될 수 있음을 제안한다. 표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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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으로서의 식
나는 여기서 비즈나나를 개인적 무의식과 동일시했다. 불교 서적 대부분에서 비즈나나를 의식이라는 영어로 번역된다. 하지만 ‘vi’는 종종 ‘-없이’를 의미한다. 그리고 의식은 제거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석가모니가 식을 버리는 것을 지지하고 그것을 마라(Mara:죽음 또는 죽음의 신)의 활동과 동일시한 예가 많이 있다.
현대의 불교인들은 불교가 의식을 제거하는 것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가?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다. 나는 만일 우리가 식을 개인적 무의식을 지칭하는 말로 받아들인다면, 그렇지 않을 경우 곤혹스러울 많은 구절들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제안하고 싶다 - 콤플렉스, 강박, 억제 그리고 신경증의 영역.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식(識)이 어떻게 고(苦)로 제시되어 있는가, 각각의 감각 기관과 관련되어 있는 식이 어떻게 그것들을 ‘통제할 수 없는(ayatana)’ 것이 되게 하며, 위와 아래에 있는 것처럼 깨달음의 과정이 어떻게 우리의 식을 밀어내는지 알 수 있다.
연연 품(Nidana Vagga) 59.92)에서 ‘식의 하강(vinnanassa avakkhanti)’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주석가들에 의해서, 재생(再生)의 과정에서 자궁으로 의식이 하강하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채택되었다. 전체 문장은 “족쇄들의 달콤함을 깊이 생각하고 있을 때, 거기에 식의 하강이 있다.
조건으로서의 식과 함께…[이 모든 고통의 무더기가 일어난다]…족쇄들의 위험을 깊이 생각하고 있을 때, 거기에는 식의 하강이 없다. 식의 소멸과 함께 [이 모든 고통의 무더기의 소멸 혹은 억제]가 온다.” 이와 같은 구절에서 그는 ‘식의 하강’을, 뿌리를 내리는 나무에 비교하고, 해탈을 그 재가 흩어질 때까지 나무를 자르고 불태우는 것에 비교했다.
이 구절과 수많은 유사한 구절들은 재생 그리고 그것의 방지에 관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개인적인 강박에 사로잡힌 콤플렉스가 일어나게 하는 기반의 파괴에 관한 것으로 보는 것이 실제적 표현과 일반적 느낌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와 같은 콤플렉스는 서양의 분석 심리학에 의해 정신적인 삶에서 “메커니즘”, 말하자면 자동적인 것, 또는 “생명이 없는 것(dead)”으로 작용하는 요소로 인식된다. 이 관점에 의하면 부처님이 그것들을 마라와 연결시키고 그것들의 소멸을 주장했던 것은 불가해한 것이 아니다.
오온과 감각
오온에 할애된 『상윳따 니까야』의 한 부분에서, 오온은 식의 ‘집’이라고 했다. 반면 색, 성, 향, 미, 촉, 법은 식의 ‘거처’나 일시적으로 쉬는 곳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오온을 대개 정신적, 육체적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목록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다시 단지 식(識)뿐만 아니라 모든 오온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버리라고 했던 것들이다. 만약 전통적인 해석이 옳다면 이것은 불교를 전적으로 세상을 부정하는 철학으로 남겨둔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부처님께서 모든 것을 버리라고 주장하신 것이 아니라 해로운 작용을 그치라고 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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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호하는 해석은 오온이 단순히 살아 있는 존재를 구성하는 잡다한 목록이 아닌 포괄적인 목록이라는 것, 하지만 그것에 의해 정신이 죽게 되는(mara-na) 개인적 무의식의 형성 과정에 대한 어느 정도 정교한 분석을 드러낸다. 선호되는 해석에서 오온의 순서는 중요하다.
색은 느낌의, 느낌은 지각의, 지각은 형성 작용의 그리고 형성 작용은 식의 조건이다. 그리고 식은 우리가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네 가지를 없애는 것이 자연히 식을 없애게 할 것이다.
이론상, 심리치료는 다음과 같이 오온의 다발의 어떤 것과도 맞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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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다양한 서양의 치료 방법이 어떻게 불교의 틀에 통합될 수 있는지를 바로 보여준다. 많은 현대 ‘불교심리치료’는 서양의 상위심리학적 패러다임 안에 마음챙김과 같은 불교적 방법을 통합시킨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불교심리치료는 불교 상위심리학의 패러다임 안에서, 그 기원이 무엇이든 다양한 테크닉의 통합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서 시도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불교 이론이 서양 심리학 안에서 계속되어온 의식의 심리학과 무의식의 심리학, 인본주의와 정신분석, 인지심리학과 자아초월 심리학 등과 관련된 유파들 사이의 논쟁들을 하나의 통합된 시스템으로 적절히 연결하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제 부처님이 왜 형상에 대한 우리의 습관적 숭배를 포기하는 것에 대해 그렇게 종종 말씀하셨는지 분명히 안다. 우리는 오온이 어떻게 식의 ‘집’이고, 감각이 그것의 일시적인 거처, 즉 여기서 쉬었다 저기서 쉬었다 하는 곳인지도 안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대상을 보는 방법을 바꾸는 것이 어떻게 우리의 개인적 무의식에 변화를 가져오는지,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죽은 상태’를 완화하고, 우리를 깨달음으로 데려가는지를 볼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이 부분이 기술된 방식으로부터 부처님이 말씀하신 “집 없는 삶”이 단지 문자 그대로의 삶의 방식, 즉 비구의 삶 같은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식이 사라지도록 잘 닦은 마음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떻게 집을 가진 사람이 집 없이 돌아다니는가? 욕망, 열망, 기쁨 그리고 갈망, 움켜쥐고 집착하는 것, 정신적 경직, 장애, 그리고 오온 각각과 관련해 저변에 깔린 경향은 여래에 의해 소멸되었다…그래서 여래는 집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이라고 불린다. 집 없이 돌아다닌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방식이다.” (『상윳따 니까야』, 온(蘊) 품, Khandhavagga) 이것은 집 없음이 식(識) 없음의 영적 상태라는 것을 분명하게 만든다.
유사한 진술이 거처 없음에 대해서 이루어졌다. “‘감각 대상 각각의 특징(相)’의 거처에 확산되고 갇힘이 버려졌다.” 우리는 이 점을 다시 짚어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식(識)이 오고 사라질 수 있는 방식이다. 식은 가장 즉각적으로 그것은 우리의 의도(cetana)를 통제한다. 그다음에 이것은 우리의 주의(manaskara)를 통제한다.
일단 식이 집중을 통제하면 하나의 순환은 끝이 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의에 대한 무의식의 효과는, 우리가 형상에 대한 “숭배”라고 불러온, 매력적인 후광을 도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숭배는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 하나는, 우리가 흔히 종교를 구성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작용들은 모든 생명 활동에 공통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 숭배나 타부의 대상은 일상적이거나 신성하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오온이 그림 4에 있는 마음의 중층적인 구조와 관련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볼 수 있다. 그것을 종교적인 언어로 표현한다면 모든 정신병리학은 우상 숭배다. 어떤 사람이 실제로 그의 삶을 물질적인 관심에만 바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정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물질적 관심이 매우 해로운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조금은 해롭다. 부처님께서 연기에 대한 그의 근본적인 통찰을 적용하신 수많은 다른 경우들과 마찬가지로 이것이 하나의 공식임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이 순환에서 각각의 단계는 오직 앞에 온 것을 조건으로 해서 일어날 수 있다.
정확히 똑같은 배열이 연기의 공식적 이론인, 12 조건의 순환(the cycle of twelve nidanas, 12지연기)에 더 상세히 설정되어 있다. 오온은 단지 그 12가지 조건이 축약된 형태이다. 이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이해에 있어 우아한 절제(parsimony)를 얻는다. 왜냐하면 이 둘(오온과 12연기)은 두 개의 분리된 가르침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가르침이 다른 정도의 복잡성으로 표현된 것이다.
우리는 ‘죽어 있는(deadening)’ 개인 무의식이 어떻게 오는지, 그리고 영적 관점에서 사람들이 왜 살기보다는 기능하는지 등에 대한 분석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본다. 윤회의 순환은 단지 재생(再生)의 형이상학에 대한 것이 아니고 해탈을 위한 처방으로서의 분석적 심리학이다.
자아 콤플렉스
“감각의 대상 각각의 모습(相)의 거처에서의 확산과 갇힘이 버려졌다”라는 진술로 돌아가보자. 락샤나(Lakshana)는 모습(相, sign)을 의미한다. 그것은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짐을 뜻한다. 이 맥락에서, 그것은 일반적으로 어떤 것이 자아(self)나 에고(ego)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어떤 특정한 차를 사야겠다고 생각할 때, 어떻게 전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그 차들을 갑자기 도처에서 보기 시작하게 되는지를 알아차린 적이 있는가? 그것은 식이 눈을 통해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이 확산되기도 하고 갇히게 되기도 했음을 의미한다.
확산되는 경우, 거기서 마음은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이 모든 욕망의 대상들에 의해 산만해져 있다. 갇혀 있는 경우, 거기서 이 산만함은 다른 중요한 대상들이 빠지거나 잘못 해석되도록 주의(manaskara)를 충분히 매료시킨다(samjna). 그러므로 자아는 감옥이다. 불교의 핵심적인 교의는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다. 이 가르침에 대해 내가 선호하는 번역은 다음과 같다. 식(識)의 뿌리인 행(行, samskaras)은 모두 덧없다. 행(行)은 괴롭다. 모든 실재는 자아가 아니다. 달리 말하면 타자(othe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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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주치는 것이다. 그것은 그것 자체로부터 존재하며 우리 쪽에서 만든 것(samskara)이 아니다. 식을 만드는 콤플렉스는 그들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로서, 자아 콤플렉스(atma) 또는 자기기만(self-conceit, 我慢)적이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버리라고 하셨다. 심리치료의 과제는 이 과정을 더 진척시킬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다. 많은 서양의 치료와 불교심리학을 가장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은 바로 이 요소다.
경전에서 자아 또는 무아의 뚜렷한 선택이 우리에게 제시되는 반면, 거기에는 분명 단계가 있다. 그리고 완전한 깨달음을 낳게 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심리치료는 만약 그것이 불교심리치료라고 한다면, 자아라는 요인에 의해 삶이 덜 지배되는 위치로 개인들을 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은 다양한 자유의 단계로 구성된다. 거기에는 살아 있게 되거나 혹은 깨어 있게 되는 자유의 단계, 이미 프로그램화된 방식이 아닌 즉각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 자유의 단계가 있다.
3. 심리치료의 두 기본적 측면
우리는 앞서 식을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식(識, 비즈냐나)이 구축된 원천인 오온을 잘라낼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객관적 현실과 관련을 맺는지에 중점을 두는 작업을 요구한다. 이에 대해 끝없이 반복되는 부처님의 메시지는 “믿음을 가져라, 집착하지 말라”이다.
믿음이 있고 집착이 없을 때, 마음은 즈냐나(jnana, 智)의 상태에 있다. 그것은 깨달음의 빛으로 가득 차 있다. 심리적 성숙을 배우는 것은 수영을 배우는 것과 같다: 우리는 물이 우리를 지지해줄 것임을 신뢰해야 한다.
또한 우리의 팔이 더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게 자유로워지도록 수영장의 가장자리를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타자들’과 생산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자신에 대한 집착과 자기기만을 충분히 놓아버리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 두 측면은 타자 중심 접근(Other Centred Approach)을 구성한다. 즉 삶에 대해 더 실재적이고, 증거에 근거한 접근을 구축하는 작업과, 좀 더 너그럽고 덜 집착하는 태도가 결합될 때 오온은 줄어든다. 여기서 ‘타자’는 내담자의 역사와 현재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중요한 다른 사람들을 가리킨다.
식(識)은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구원의 은혜를 주는, 더 깊고 자애롭고 원형적인 힘에 대한 열림으로 대체된다. 여기서 ‘타자’는 우주의 구원의 힘(力) - ‘우주적 붓다’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심리치료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제공한다.
심리적 안전의 조건을 만드는 핵심적인 치료의 태도(비교: 로저스, 비교: 사이코 西行)와 내담자가 제시하는 중요한 타자들의 ‘캐스트(배역)’를 향한 주의 기울임 그리고 따뜻한 관심, 그리고 자아의 모습으로서의 작용 너머의, 그 타자들의 실체에 대한 내담자의 탐구 과정을 용이하게 해주며, 내담자가 그들의 중요한 타자들과 상상 속에서 조우함에 따라, 치료 회기에서 실시간으로 오온이 펼쳐질 때 오온 과정에 주목한다.
이런 틀 안에서 많은 임상적 결정을 내려야 하고 미세한 기법(micro-skill)을 발휘해야 한다. 왜냐하면 중요한 타자의 실체를 탐구하는 과정 자체는 조건화 과정(processes of conditioning)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술의 범주는 다양하지만 중요한 것들은 다음의 것들과 관련이 있다.
강도: 내담자는 관심의 대상으로부터 너무 거리를 두고 있거나 혹은 충분히 거리를 두지 않을 것이다. 심리치료사는 치료가 의미 있으면서도 정신적 외상이 다시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내담자가 최적의 거리를 유지하도록 돕는 다양한 기술이 필요하다.
연상과 비연속성: 치료사는 내담자의 마음이 어떻게 한 대상에서 그와 관련된 다른 대상으로 움직이는지, 그리고 때때로 대상이 어떻게 의식에서 갑자기 사라지는지를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서 나온 추가적인 진단 정보나 이 관계들도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공간의 이용: 내담자의 중요한 타자들의 세계, 그들의 사회적 상호작용의 영역(mitwelt)은 그들에 의해 삼차원적인 것, 그리고 환경으로 경험될 것이다. 내담자의 시선에(식이 어떻게 시각 기관을 통제하는지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심리치료사는 강력한 방식으로 내담자의 세계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강화 & ‘이차적 획득’: 심리치료사는 내담자가 어떻게, 자아를 유지시키는 유형으로 타자에 대한 미혹한 견해를 무의식중에 지속시키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치료자의 지지하는 믿음의 태도라는 틀 안에서, 일차적인 초점은 내담자가 중요한 타자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탐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기본 관계를 다음과 같이 상징화할 수 있다. S = ∫R.O 내담자의 상태[S]는 중요한 타자들[O]에 대한 관계[R]의 함수이다. 타자[O]의 실재에 대한 탐구와 관계[R]의 양식은 내담자의 상태[S]에 변화를 가져온다. 거기서는 자기기만 콤플렉스를 둘러싼 방어적인 [識의] 구조를 꿰뚫을 필요도 없고 그것에 매일 필요도 없다. 예를 들어 내담자가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서양의 심리치료사들은 “…그리고 당신에게 그것은 어떤가요?”와 같은 얘기를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기에 대한 관심의 정서를 끌어내려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타자 중심의 심리치료사는 상투적인 전형을 넘어 실재를 탐험한다는 희망 속에서 “어머니에 대해 더 말씀해보세요”와 같은 말을 할 것이다. 불교는 식(識)의 힘을 줄이고 그럼으로써 자아 콤플렉스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은 자아 요소를 해체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에서 그 또는 그녀에게 닥쳐오는 현실에 대한 내담자의 탐구를 용이하게 함으로써 더 효과적으로 성취될 수 있다. 그것은 자아의 모습에 의해 강요된 색깔이 제거된 중요한 타자에 대한 탐구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은 삼매와 에고의 소멸을 통해 정신적 차원에서, 그리고 더 큰 법의 실재(dharma reality, 태어나지 않은 깨달음의 세계)에 대한 자각 안에서 성취된다. 그것을 불자들은 아미타불의 영역으로 이해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특정한 방식으로 개념화할 것이다. 하지만 그 자체는 모든 특정한 개념화를 넘어서 있다.
불교적 관점에서, 완전한 정신 건강의 궁극적인 상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수반한다. 집착의 유연화, 자아 정체감에 대한 경직성을 버리는 것, 의미의 초월적 차원에 대한 의존, 보편성을 의식하면서도 상황에 맞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것은 삶의 덧없는 세세한 것들이 그것의 적절한 관점 속에서 이해되는 조건이며, 원형적인 힘이 개인의 삶에서 강력한 부분을 담당할 수 있는 범위가 최적화되는 것이다.
결론과 요약
불교는 연기 개념이 특정한 불교적 의미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종합적인 심리학 모델을 제시한다. 이 모델은 서양 심리학에서 분리된 것, 심지어는 경쟁적인 학파로 여겨지던, 심리적 치유에 대한 다양한 접근들을 통합한다.
특히 그것은 대상과 관련된 그리고 삶에 대한 증거에 근거한 접근의 강조와 심층 심리학의 이해 및 자애로운 원형적 힘의 중요성을 하나로 모은 방법들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또한 서구적 사고에 있어 다른 중요한 분파 각각의 편에 존재하는 입장들, 세속적 사고방식과 종교적 사고방식 사이의 입장을 화해시킨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믿음은 정신 건강과 심리적 발달에서 핵심적인 요소로 인식된다. 하지만 그것은 종교적인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어떤 특성이라고 인식하지는 않는다. 종교적인 인간들은 믿음에 대한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용어와 전통을 갖고 있는 반면, 이 장점은 해석을 경직되게 하는 경향에 의해 너무 자주 중화되기도 한다.
불교는 믿음에 대한 더 일반적인 해석을 제공한다. 그것은 믿음을 일상적인 심리의 부분이자 개인적 성장의 기반으로 본다. 불교는 대개 순환적인 발생을 따르는 심적 현상들의 분석을 위한 체계도 제공한다. 이 분석은 순환성을 차단하고 탈출 혹은 해탈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개입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저변에 있는 하나의 도식, 즉 연기의 순환이 단계가 다른 세부 사항과 함께 제시된다. 불교의 역사에서 연기는 ‘타력(他力)’, 즉 우리 삶에서 작동하는 어떤 힘이지만 우리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있지 않은 어떤 것으로 인식되었다. 어떤 이론가들은 그것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 순환의 지적, 실제적 해체에 주력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해탈의 길에서 더 효과적인 방편으로서 자애로운 타력의 가능성을 보았다. 두 가지 방법-해체적인 그리고 헌신적인 방법-은 심리 치료에 대한 불교적 접근에서 그들 각각의 자리를 점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 사상은 진단을 위한, 그리고 다양한 방법과 기술을 이용한 개입을 위한 이론적 기초로 쓸 수 있다.
그것들은 주로 무아(無我)의 접근에 기초해서 심리치료 작업에 독특한 색깔을 부여한다. 이런 종류의 작업은 서양 심리학에서 더 일반적인 자아 긍정적 접근에 대비해서 ‘타자 중심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경우 ‘타자’는 다음과 같은 것을 포함한다. 일상의 온갖 상황의 형태로 내담자가 마주한 현실과 내담자의 사회적 상호작용의 영역(mitwelt)을 구성하는 중요한 타자들 그리고 궁극적 법계(法界, Dharma realm)의 광대함으로 가는 다리를 제공하는 원형적 타자들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서양 심리학의 많은 경쟁적 요소들을 화해시키는 심리학이다. 그러면서도 독특한 입장과 생각의 기반을 계속해서 제시하는데 그것들은 내담자가 자아의 감옥에서 탈출하도록 돕는 생산적인 생각과 방법을 낳는다.
번역_권선아, 교정·정리_김재성
● 참조 웹사이트 http://amidatrust.ning.com http://www.buddhistpsychology.info http://dld.bz/2uA http://www.amidatru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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