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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불교의 우주관(宇宙觀)

무한대자유 2012. 8. 6. 12:23
 

불교의 우주관(宇宙觀)

 

 1. 四劫 (成, 住, 壞, 空)

 2. 三千大千世界 (삼천대천세계)

 3. 三界二十八天(삼계이십팔천)

 4. 진화론은 연기론에 포함

 5. 이시우 박사가 쓰는 불교와 우주

 (1) 탄생과 양식

 (2) 별의 세대순환

 (3) 혼돈과 축퇴

 6. 4大와 原子 - 물질의 생성과 불변성

 7. 관반야심경의 내용에서

 8. 불교와 시간

 9. 불교의 우주관을 통해 본 하느님

 10. 불생불멸 부증불감을 입증 

 11. 뉴턴, 불확정성 원리, 그리고 카오스

 12. 빛도 흡입되는 초밀도 공간 

 13.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

 14. 우주는 움직이는 하나의 그물 

 15. 불교 초기 경전에 나타난 자연관 

 16. 유전자 조작과 불교

 17. 최초인간의 유래와 사회의 형성 

 18. 동양 속의 우주

  (1) 동양 속의 우주

  (2) 불교에서 본 세계 ·자연 ·우주

  (3) 극락과 지옥

 19. 프랙탈 구조

 20. 우주의 탄생

 21. 호킹 '브레인 이론'인드라망으로 푼다

 22. 세계의 기원 외...

  (1) 세계의 기원

  (2) 유정(有情)의 출현

  (3) 삼계(三界)

  (4) 극락세계

  (5) 우주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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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의 우주관(宇宙觀) 

 불교의 우주관으로는 하나의 세계가 성립되고(成) 지속되고(住) 파괴되고(壞) 사라진(空) 후, 또 다른 하나의 세계가 성립되고, 지속되고, 파괴되고, 사라지는 과정을 成(성), 住(주), 壞(괴), 空(공) 이라는 네시기(4時期)를 나누어 4겁(劫)으로써 우주의 생멸 변화를 시간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고, 또한 우주가 얼마나 큰가 하는 공간적인 측면에서 설명할 때는 三千大千世界(삼천대천세계)를 들어 설명하며, 유정 중생이 생사 윤회하는 측면으로 설명할 때는 三界二十八天(삼계이십팔천)으로 설명한다.


 1.  四劫 (成, 住, 壞, 空)


 즉 成劫(성겁), 住劫(주겁), 壞劫(괴겁), 空劫(공겁)을 말하는데 이것은 불교에서 세계의 生滅(생멸) 변화에 시간적으로 설명하는 기본적인 관점이다.


① 成劫(성겁)

器世間(기세간)인 山河(산하), 大地(대지), 草木(초목)등과 衆生世間(중생 세간) 즉 一切有情衆生(일체유정중생)의 성립 시기를 말한다.

空劫을 지나면서 弟四禪天(제4선천) 이상 중생들의 수명이 다하고 복이 다해 더 낮은 수준으로 떨어짐에 따라 業 增上力(업 증상력)으로 말미암아 공간에 미세한 바람이 일어나서 차례로 風輪(풍륜), 水輪(수륜), 金輪(금륜)이 성립되고 金輪(금륜)위에 산과 바다, 洲(주) 즉, 須彌山(수미산), 七金山(칠금산), 四大洲(4대주)등이 성립되고, 그 위에 사천왕 도리천이 성립되어 인류및 放生(방생: 축생을 말함) 등의 거주처가 되는데 이는 지거천에 속하고 그 다음 차례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 즉 空居天(공거천)이 성립되어 중생들의 업력에 따라 차례로 유정 중생이 下生(하생)하여 마지막 무간 지옥에 한 명의 지옥 중생이 생길 때까지 20劫이 걸리는데 이 시기를 成劫(성겁)이라고 한다.


② 住劫(주겁)

범어 Vivarta --- Sthayin --- Kalpa , 器世間(기세간)과 衆生世間(중생세간)이 지속되는 二十劫(20겁)의 시기를 말한다.


③ 壞劫(괴겁)

범어 Samvarta --- Kalpa , 세계가 파괴되어 가는 기간으로, 住劫(주겁)에서 空劫(공겁)에 이르는 二十中劫(20중겁)의 시기를 말한다.

유정 중생은 처음 十九劫(19겁) 동안에 지옥 중생부터 점차로 무너져 초선천(初禪天) 이상의 중생 세계로 올라가고 오직 器世間(기세간:국토 환경)만이 텅 빈 채로 남아 있게 된다. 마지막 一劫(1겁)동안에도 三災(삼재)가 일어나 이 器世間(기세간)도 파괴되는데 처음 火災(화재)에는 태양이 일곱 개가 출현하여 큰 불을 일으켜 먼저 지옥에서부터 色界(색계) 초선천까지를 다 태워 버리고 다음 水災(수재)에는 큰 장마 비가 일어나 第二禪天(제2선천) 이하가 다 침몰되고, 다음에 風災(풍재)에는 큰 바람이 일어 서로 치고 받으면서 第三禪天(제3선천) 이하를 불어 버린다. 이 때 중생들은 四禪道(사선도)를 닦아 모두 弟四禪天(제사선천) 이상으로 올라가서 二十劫(20겁)의 空劫(공겁)에 들어가게 된다. 이 壞劫(괴겁)에서는 다만 色界(색계) 第三禪天(제3선천) 邊淨天(변정천) 이하만 파괴되고 弟四禪天(제4선천) 이상은 파괴를 받지 않는다.


④ 空劫(공겁)

범어 Samvarta --- Sthayin --- Kalpa , 세계가 완전히 壞滅(괴멸)하고 다시 다음 삼계 가운데 오직 色界(색계) 弟四禪天(제4선천) 이상의 중생들이 남아서 세계가 二十劫(20겁)이라는 오랜 기간동안 空虛(공허) 가운데 다시 다음의 세계가 성립하는 成劫(성겁)에 이르기 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 劫說(겁설)

범어 Kalpa를 간단하게 음역한 것으로써 劫波(겁파)라 음역하며 오랜 기간 즉 長時(장시)라 번역한다. 劫(겁)을 번역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다.

⒜ 년, 월, 일이나 어떠한 시간의 단위로도 계산할 수 없는 무한히 긴 시간을 말한다.

⒝ 芥子劫(개자겁) ; 四方(사방) 40리의 성안에 芥子(개자)를 가득 채우고 백년마다 한 알씩 집어내어 그 개자가 다 없어질 때까지의 시간을 一劫(1겁)에 비유한 것이다.

⒞ 磐石劫(반석겁) ; 四方(사방) 40리 되는 바위를 백년마다 한 번씩 엷은 옷으로 스쳐서 마침내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의 시간을 一劫(1겁)에 비유한 것이다.

⒟ 塵墨劫(진묵겁) ;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먹으로 삼아 그 먹이 다 닳도록 갈 아서 만든 먹물로 일천국토(一千國土)를 지난 때마다 한 방울씩 떨어뜨려, 그 먹물이 없어질 때까지 지나온 세계를 부수어 만든 수없는 먼지 하나 하나를 一劫(1겁)으로 한 그 모든 劫(겁)을 三千塵墨劫(삼천진묵겁)이라고 한다.

⒠ 일반적으로 인간의 수명이 8만 4천살로부터 백년마다 한살씩 줄어서 열살이 되는 동안을 減劫(감겁)이라고 하고, 인간의 수명이 열살로부터 백년마다 한살씩 늘어나 서 8만 4천살이 되는 기간을 增劫(증겁)이라 하며 이렇게 한번 줄었다가 늘어나는 기 간을 一增減劫(일증감겁) 즉, 一劫(1겁)이라고 한다.

增劫(증겁) 중에는 壽命(수명), 衆生(중생), 生活道具(생활도구), 善品(선품:심성이 선량하고 총명한 것)의 4종이 증가한다고 하여 이것을 四增盛(4증성)이라하고, 減劫 (감겁) 중에는 이 네 가지가 衰退(쇠퇴)한다고 한다.


2.  三千大千世界 ( 삼천대천세계 ) 


 불교에서는 하나의 태양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세계를 一小世界(일소세계)라 하는데 여기는 수미산을 중심으로 七山八海(칠산팔해)를 交互(교호)로 번갈아 두르고 鐵圍山(철위산)을 가장 밖에 있는 외곽으로 한 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九山八海(구산팔해) 즉, 아홉 산과 여덟 바다인데 그 이름이 다 있다.

현대 천문학에서도 太陽系(태양계) 밖에 銀河系(은하계)가 또 끝없이 많이 전개된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의 태양계를 중심으로 여러 유성이 도는 한 단위의 세계 즉 一小世界(일소세계)를 천개 합한 것이 小千世界(소천세계)요, 이 小千世界(소천세계)를 다시 천개 합해서 中千世界(중천세계)가 되고, 이 중천세계가 다시 천개 합해져서 大千世界(대천세계)가 된다.

그래서 大千世界(대천세계)는 수치로 보면 십억소세계(十億小世界)인데 小千(소천), 中千(중천), 大千(대천)으로 합해서 말하면 천이 세 번 있으므로 삼천대천세계라고 한다.


 ※ 三千 大千 世界 ( 삼천 대천 세계 ) ※

 ★一小世界 : 須彌山(수미산)을 中心으로 七山八海를 交互(교호)로 두르고 鐵圍山(철위산)을 外廓(외곽)으로 한 世界를 말함 ( 하나의 태양 중심으로 한 세계)

★小千世界 : 一小世界를 천개 합한 수의 세계

★中千世界 : 一小千世界를 천개 합한 수의 세계

★大千世界 : 一中千世界를 천개 합한 수의 세계

(모두 합하여 대천세계의 수량은 十億小世界 )

▶一小世界 X 1000 = 一小千世界= 千小世界

▶一小千世界 X 1000 = 一中千世界= 百萬小世界

▶一中千世界 X 1000 = 一大千世界= 十億小世界

3.  三界二十八天(삼계이십팔천)

 중생이 생사에 流轉(유전)하는 迷惑(미혹)의 세계, 곧 有情(유정)의 경계를 欲界(욕계), 色界(색계), 無色界(무색계)의 셋으로 나누고, 이 삼계는 二十八天(이십팔천)으로 세분되는데 欲界(욕계)는 사대왕천,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 등이 있고 色界(색계)에는 범중천, 범보천, 대범천, 소광천, 무량광천, 광음천, 소정천, 무량정천, 변정천, 무운천, 복생천, 광과천, 무상천, 무번천, 무열천, 선현천, 선견천, 아가니타천 등이 있고, 無色界(무색계)에는 공무변천, 식무변천, 무소유천 등으로 세분된다.

우리 인간세계는 삼계 가운데 欲界에 해당되고 욕계 중에서도 사대왕천에 속하며 사대왕천에는 동지국천, 남증장천, 서광목천, 북다문천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남증장천에 속하며 남증장천에는 동승신주, 남섬부주, 서우화주, 북구로주 등의 4대주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남섬부주에 속하며 남섬부주 지구촌 내의 동양 대한민국 ○○시(도) ○○○(이름), 번지가 현재 우리의 주소가 된다.

여기서 삼계28천의 도표를 보자.


 三界二十八天 (삼계이십팔천)


(1) 사대주 ( 四大洲 )


 범어 Catvaro Dvipah, 또는 四大部洲(사대부주), 四洲(사주), 四天下(사천하), 須彌四洲(수미사주)라고도 한다. 四大洲(사대주)는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으로써 須彌山(수미산) 사방의 七金山(칠금산)과 대 鐵圍山(철위산) 사이의 鹹海(함해) 가운데 있는 네개의 대주(大洲)를 말한다.

♥ 東勝身洲 (동승신주) :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의 몸매가 殊勝(수승)한 까닭에 勝身(승신)이라 일컬었고, 地形(지형)은 半月(반달)모양이며 사람의 얼굴 또한 반달형이다. 그 국토는 지극히 넓고 크며 묘함이 諸天(제천)에 비해 특별한 점이다.

♥ 南贍部洲 (남섬부주) : 원래는 포도나무의 音譯(음역)인데 本洲(본주)는 이 나무로써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지형은 네모상자 같으며, 사람의 얼굴 또한 그러하다. 이곳의 특별한 점은 주민이 용맹스럽고 훌륭한 기억력으로 능히 좋은 業을 지으며 능히 청정 법행을 닦으며, 부처님이 이 땅에도 출현하심 등이 다른 諸天(제천)에 비해 뛰어난 점 이다.

♥ 西牛貨洲 (서우화주) : 소(牛)로써 貿易(무역)하는 것으로 인해 이러한 이름을 짓게 되었고, 地形(지형)은 滿月(만월)같고, 사람의 얼굴 모양 또한 그러하다. 다른 諸天(제천)에 비해 특별한 점은 소가 많고, 양이 많고 주옥(珠玉)이 많다는 점이다.

♥ 北俱盧洲 (북구로주) : 이 지역은 위 三洲(3주)에 비해 殊勝(수승)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얻게 되었고, 地形(지형)은 正方形(정방형)이며 사람의 얼굴 모양 또한 그러하다. 다른 諸天(제천)에 비해 특별한 점은 걸림이 없고 내것이라는 게 없고, 수명이 千歲(천세)라는 제일 수승한 과보를 받아서 즐거움이 많고 고통은 적지만 오직 부처님이 이 국토에는 출세(出世)하지 않은 점이 있다. 그러므로 이 곳에 태어남을 八難(팔난)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2) 八難 (팔난)


♠ 地獄 (지옥) -+

♠ 餓鬼 (아귀) -+--三惡道(삼악도)는 고통이

♠ 畜生 (축생) -+ 심하여 팔난에 속한다.

♠ 長壽天 (장수천) : 색계 제4선천 가운데 無想天(무상천)으로서 여기는 수명이 五百劫 (오백겁)이나 된다. 외도의 수행자들 중 많은 분들이 여기에 태어나서 오랜 시간 동안 불법을 보고 듣지 못하므로 八難중의 하나가 된다.

♠ 邊地 (변지) : 변지의 북구로주로서 이 곳에 태어나면 사람의 수명이 千歲(천세)이며 살아가는 동안에 요절하는 사람이 없으며, 향락을 탐착하여 敎化(교화)를 받지 아니하며, 이곳에는 부처님이 出世(출세)하지 않아 불법을 들을 수가 없으므로 팔난의 하나가 된다.

♠ 盲聾 (맹농음아) : 감각 기관 결함 때문.

♠ 世智辯聰 (세지변총) : 세속의 지혜, 말 잘함, 총명으로 인하여 진리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므로 팔난의 하나가 된다.

♠ 佛前佛後 (불전불후) : 부처님이 세상에 나시기 전이나 후에 태어남으로 인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얻지 못하므로 八難중의 하나가 된다.


 4. 진화론은 연기론에 포함


- 美 캔자스주 과학교과서 진화론삭제 -

- 국내 기독교계 창조과학교사련 창립 - 


진화인가 창조인가. 지난 11일 미국 캔자스주 교육위원회가 과학교과 과정에서 진화론을 제외시키는 지침을 확정하면서 진화론과 창조론의 해묵은 논란이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해 국내 기독교계도 세계 각국의 진화론 교육이 큰 위기를 맞을 것으로 내다보면서 지난 9일 창립된 창조과학전국교사연합회를 중심으로 학생들에게 창조론을 소개해 나가겠다는 방침을 밝히고 나섰다.


영국 과학자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나온지 140여년이 지났지만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립은 계속돼 왔다. 특히 보수적 기독교 전통이 강한 미국에서는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창조론 그룹과 진화론 그룹간의 첨예한 대립이 끊이지 않고 있다. 미국의 극우보수파 기독교계는 끊임없이 정치와 교육에 영향력 확대를 꾀해왔고, 이번 캔자스의 결정도 한 보수적 기독교 단체가 맹렬한 로비를 펼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전미국생물교사협회와 미국의 종교감시단체인 '정교분리를 위한 미국인들'은 위원회의 결정에 대해 법적인 기소를 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이같은 논란이 국내에서 재연될지는 미지수다. 특히 진화론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상당부분 과학적으로 입증된 상태에서 창조론이 옳다는 주장은 학문의 보편성 차원에서 위험하다는 지적이다. 진화론이 하나의 가설이듯이 창조론도 가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초기에 태양과 달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했고, 그후 갈릴레오도 다시 지동설을 주장해 종교재판에 회부돼 파문당했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파문당한지 340여년만인 1992년에 복권됐다. 지구가 돈다는 진리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또한 교황 바오로 2세는 96년에 진화론을 '진지한 가설'이라고 인정하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불교는 우주와 인간의 태동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불교는 역사 이래로 진화론이나 창조론 어느 쪽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아왔다. 어떻게 생겨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더욱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해 불교는 연기론을 내세우고 있다.

호진스님(동국대 불교학과 교수)은 "불교는 창조주와 같은 존재를 생각하지 않았으며, 생명의 기원에 대한 문제를 '업력'이라는 에너지의 작용에 따른 연기법으로 보았다"는 견해를 밝혔다. 


<과학사상> 편집장인 김용정 명예교수(동국대 철학)는 "우주전체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고 그 구조 속에서 각기의 생명속에 또다른 생명이 발생한다는 연기론적 관점에서 볼 때 진화론은 연기론에 포함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생명태동의 근원을 연기에 의해 스스로를 조직한 '자기조직론'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김성규교수(영남대 의대)는 "진화론이나 창조론은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며, 생명태동의 근원은 연기론으로 보는 것이 옳다"면서 '연기론=존재론+진화론+창조론'이라는 공식을 제시했다. 


이와 함께 세 학자는 "확실한 입증이 있기까지는 어떤 가설도 배제돼서는 안되며, 특히 초과학을 지향하는 종교가 비과학적이 된다면 종교와 과학의 선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5. 이시우 박사가 쓰는 불교와 우주


 (1) 탄생과 양식


별의 일생은 무심·무념·무욕

삶이 곧 苦라지만

취함이 과하지 않으면

빛나는 삶의 길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보면 항상 경이로움을 느낀다. "저 별도 나와 같이 살아있을까?" "저 별도 지구와 같은 행성을 가지며 또 우리와 같은 지적 생명체가 있을까?" 한 번쯤 던져보는 질문들이다. 만약 별들도 우리처럼 살아간다면 그들도 탄생의 시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하늘에서는 끊임없이 별이 탄생하고, 또 늙고 죽어간다.


별들과 별들 사이에 흩어져 있는 물질을 성간 물질이라 하고 이것의 큰 집단을 성운이라 한다. 성간 물질은 90%의 가스와 10%의 티끌로 이루어져 있다. 티끌의 크기는 10만분의 1cm로 아주 작지만 전기적 성질을 띈다. 그것은 주위의 가스 분자들을 흡착시켜 티끌을 키우는 촉매역할을 한다. 티끌들은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서로 끌어당기고 결합하며 성장해 간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성운은 점차 중심 쪽으로 수축하는데 이를 '중력 수축'이라 한다.


성운의 중력 수축이 초기에는 천천히 진행하지만 성운 중심부의 밀도가 높아지면, 바깥쪽에 있는 물질에 미치는 인력이 거리 제곱에 반비례해서 커지기 때문에 중력 수축의 속도가 점차 빨라지면서 대부분의 성운물질이 중앙으로 모여들게 된다. 이러한 수축과정이 어느 시기에 이르면 마치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듯 매우 빠른 속도로 수축하는 중력 붕괴가 일어난다. 이때 성운의 중심부 온도는 천만도 이상으로 급격히 상승되면서 4개의 수소가 하나의 헬륨으로 만들어지는 수소 핵 융합반응이 일어나고, 이때 핵 에너지가 빛으로 나오면서 별의 탄생을 알린다.


별은 태어날 때 일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을 가지고 나온다. 질량이 큰 별일수록 양식이 더 많으며 또 살아가면서 먹는 메뉴(핵 반응의 종류)도 더 많다. 때문에 별은 더 많은 양식을 얻기 위해 다른 별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 따위는 저지르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것만을 먹으면서(빛을 내면서) 일생을 무심, 무념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어떠한가? 기원전 8~3세기에 쓰여진 우파니샤드에 이런 구절들이 있다. "음식에서 생물이 생겨났다. 땅에서 사는 생물은 어떤 것이든 음식에 의지해서 살아가니 생이 끝날 때 다시 음식으로 돌아가 잠기노라." "숨(息)은 음식에서 나온 즙(핵심)이요, 마음은 숨에서 나온 즙이며, 지혜는 마음에서 나온 즙이요, 환희는 지혜에서 나온 즙이로다." 이 얼마나 감탄할 만한 표현인가!

빈손으로 세상에 나오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먹을 것을 찾는다. 인간뿐이랴! 동물 또한 인간처럼 빈손으로 태어나 외부로부터 양식을 구하고 또 이에 의존하며 일생을 보낸다. 그러니 "음식을 구하는 행위 그 자체가 고(苦)이다"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특히 인간의 경우는 다른 동물과 달리 남보다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가지려는 탐욕에 눈이 어두워 무명에 허덕이게 된다. 그래서 혹(惑:무명, 취, 애), 업(業:행, 유), 고(苦:식, 명색, 6처, 촉, 수, 생, 로, 사)의 삼도(三道)를 통해 생사유전의 인과를 나타내는 12연기가 나오게 된다. 별은 자신의 양식으로 홀로 살아갈 수 있지만,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직접 얻거나 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통해 양식을 얻는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살림살이는 남에게 직접, 간접으로 피해를 끼치는 일이 자주 생기게 된다. 이것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고(苦)의 과정이 복잡하고 미묘하기 때문이다.

자식을 두고, 부모를 봉양하는 인연줄을 가진 입장에서는 양식의 획득에 따른 고(苦)의 과정이 홀로 사는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니 취함이 알맞고 과하지 않으며 가능한 적게 가질수록 남에게 돌아가는 양식의 몫이 많아지니, 지나친 집착과 탐욕을 버리는 것이이야말로 참으로 빛나는 삶의 길일 것이다.


별과 마찬가지로 결국 지수화풍 4대로 돌아갈 인간이지만 삶의 과정은 별과 달리 복잡하고 별나 보인다. 이것을 인간은 발달된 문명과 문화의 혜택이라고 부른다.


짐승들은 먹을 만큼의 양식을 취하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들은 필요 이상으로 더 많이 가지려는 아귀다툼을 벌이며 남을 해치고 적을 만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별'을 닮을 수 있을까. 나와 남 사이에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주고받음의 원리만이라도 지키는 것, 그것이 참 삶의 도리가 아닐까.


이시우 박사는 1938년 생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과 호주 국립대학교를 졸업(천문학 박사)했다. 경북대와 서울대 천문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별과 인간의 일생> <태양계 천문학> <은하계의 형성과 진화> <천문관측 및 분석> <똥막대기>(禪시집)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 별의 세대순환


한 티끌 속에 우주가 있다

5세대가 공존하는 은하계

인간처럼 가족 집착않고

인연따라 세대 순환


만물은 태어나 사라지고 또 태어나는 생주이멸을 이어간다. 그렇다면 별의 세계는 어떨까?

별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중심부의 핵융합 반응의 종류가 바뀌거나 에너지 전달과정이 불안정해지면 물질을 밖으로 방출함으로써 안정을 찾아간다. 물질 방출은 별이 노년기에 접어들수록 심해지고 쇠퇴기에 들게 되면 더욱 극심해진다. 이렇게 방출된 물질은 초속 수천 킬로미터의 속도로 흩어지면서 별들 사이를 떠돌아다니게 되는데, 여러 별들에서 나와 떠돌아다니는 이러한 방출물질이 서로 모여 성간물질을 이룬다.


인간은 부모 밑에서 자식이 생겨 부모의 핏줄을 이어가지만 별들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즉 한 별에서 방출된 물질이 다시 모여 다음 세대의 별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른 별에서 나온 물질이 돌아다니다가 어느 곳에서 모여 새로운 별을 잉태시킨다. 당연히 특정한 조상이란 있을 수 없다. 다만 위 세대와 아래 세대라는 세대 차이가 있을 뿐이다.


대폭발 우주론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150억년 전에 우주가 탄생되어 3억년이 지난 후 원시 은하물질에서 첫번째 세대의 별들이 형성되었다. 질량이 다른 여러 별들 중에서 태양의 10배 이상 되는 무거운 별들은 수백만년 내지 수천만년의 짧은 기간만 살다 가지만 일생을 마치며 많은 물질을 방출한다. 이렇게 무거운 별들에서 흩뿌려진 물질이 모여서 두번째 세대의 별들을 탄생시킨다. 첫번째 세대의 별들은 초기 원시 은하물질이 차지한 공간 전체에 걸쳐 회전하며 돌아다닌다. 그러나 원시 은하가 수축하면서 점차 회전 속도가 빨라지고 이에 따라 물질은 점차 은하회전축에 수직한 원반 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따라서 두 번째 세대의 별들은 첫 번째 세대의 조상 별들보다 원반 쪽으로 모여들어 운동공간이 좁아지게 된다. 두번째 세대의 별들 중에서 질량이 큰 별들은 빨리 생을 마치며 많은 물질을 방출하고 이로부터 세번째 세대의 별들이 탄생되고, 이들의 공간 운동은 더욱 더 원반 쪽으로 집중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은하계 내에는 5종류 세대의 별들이 함께 살고 있다. 태양은 4번째 세대의 별에 해당하며 밤하늘에서 푸르게 보이는 별들은 태양보다 한 세대 낮은 5번째 세대의 젊은 별들이다. 태양보다 윗세대 별들은 나이가 100억년 이상이고 또 태양보다 질량이 적다.


인간은 세대를 거치면서 관습이 전수되고 또 지식과 지혜가 쌓이면서 삶의 질이 바뀌어진다. 그러나 한 가족이 지니는 생물학적 유전 특성은 계속 이어진다. 별의 경우는 어떠한가? 첫번째 세대의 별이 핵반응을 통해 헬륨보다 더 무거운 중원소를 만들어 내고, 이것이 함유된 물질을 밖으로 방출하기 때문에 다음 세대의 별을 이루는 물질성분에는 앞선 세대의 별보다 더 많은 중원소를 포함하게 된다. 세대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중원소 함량은 더욱 증가한다.


의상 대사의 법성게에서 "한 개의 티끌 중에 우주가 포함되니 일체의 티끌 중에서도 그와 같다(一微塵中含十方 一體塵中亦如是)"라고 했다. 첫번째 세대의 티끌과 5번째 세대의 티끌은 같은 것이 아니라 구성성분에 큰 차이가 있다. 즉 세대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티끌 속에 들어 있는 중원소의 함량이 점차 많아진다. 이처럼 한 개의 티끌 속에도 긴 우주의 역사를 간직한 우주 정보가 들어있는 것이다.

인간은 태양처럼 4번째 세대의 물질에서 생겨났기에 윗 세대들의 정보가 우리 몸 속에 들어있다. 이러한 우주적 정보는 유식종의 8식 중에서 아뢰야식인 종자식으로 우리 몸 속에 저장되어 있으며, 이러한 정보의 일부는 칼 융의 집단무의식으로 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철학자 프롬은 무의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무의식이란 우주에 근원을 둔 보편적 인간 즉 전인(全人)을 의미한다. 무의식은 자기 속에 있는 식물, 동물, 자기자신을 나타낸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여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 과거를 표현하고 있으며, 또 인간이 온전한 인간으로 되는 그의 미래를 나타내며, 또한 인간이 자연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이 인간화되는 그날을 나내고 있다." 이것은 유의적(有意的) 행(行)이나 사고가 따르지 않은 원초적 본성이 무의식으로써 사회적 규범이나 질서 등의 특성에 제약받지 않은 우주의 종자의식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문명화된 사회 속에서 심한 제도적 여과작용에 의해 무의식적 잠재력과 활동이 억제되면서 소위 기계화된 인간으로 전락되고 있다. 불법은 인위적인 어떠한 여과도 거치지 않은 무위적 자연질서를 나타내는 아뢰야식에 따라 자연과 합일하는 것이 올바른 세대의 순환임을 보여준다.

 

(3) 혼돈과 축퇴


깨달음도 혼돈 거쳐야 온다

5세대가 공존하는 은하계

인간처럼 가족 집착않고

인연따라 세대 순환

별이 태어나고 죽어갈 때

혁명이 사회 변화시키듯

불안정 폭발현상 경험


별들은 임종을 맞는 순간 중력붕괴라는 극심한 혼돈상태에 빠져들면서 폭발하거나, 다량의 물질을 방출하면서 중심부에 초고밀도의 천체를 탄생시킨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밀도는 사각설탕 크기의 질량이 1그램(물)에서 21그램(백금) 정도이다. 그러나 태양과 같이 질량이 적은 별이 죽으면서 남기는 백색 왜성(矮星)의 밀도는 수십 톤 정도이고, 태양질량의 8~20배 되는 무거운 별이 초신성으로 폭발하면서 남기는 잔해인 중성자별의 밀도는 수백~수천 톤이다. 태양질량의 20배 이상 되는 아주 무거운 별의 잔해인 블랙홀은 수십억 톤 이상의 초고밀도를 가진다. 이러한 초고밀도의 세계는 지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다.


고무풍선을 덥게 하거나 공기를 더 주입하면 풍선 내부의 공기압력이 커져 풍선이 팽창하고, 반대로 풍선을 차게 하거나 공기를 빼내면 풍선이 줄어드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세계에서는 기체의 압력이 올라갈수록 온도는 증가하고, 온도가 내려가면 압력이 떨어진다. 즉 경험세계에서는 기체의 압력이 온도와 밀도에 비례한다. 만약 영하 273도(절대온도 영도)로 낮추면 기체 분자의 운동은 정지되므로 압력은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초고밀도의 세계에서는 기체 압력이 온도에 무관하며 오직 밀도에만 관련된다. 그래서 절대온도 영도에서도 기체 입자는 큰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특성을 지닌다. 이와 같은 초고밀도의 상태를 축퇴(縮退) 상태라 부르며 백색 왜성, 중성자별 블랙홀 등은 축퇴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축퇴 상태란 마치 큰그릇에 담은 달걀들을 완전히 깨버리면 그릇바닥에 모여 달걀이 차지하는 부피가 푹 줄어드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그러면 우주에는 이러한 축퇴 물질이 얼마나 많은가? 우주가 150억 년이란 긴 세월을 지내는 동안 수많은 별들이 태어나고 죽고 하는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백색 왜성, 중성자별, 블랙홀 등이 생겨났다. 그러므로 축퇴 물질은 우주에서는 매우 흔한 물질이다. 지상에서 이러한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축퇴 물질을 특별한 것으로 생각할 것까지는 없다. 하지만 지구라는 극히 제한적인 공간과 시간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경험세계는 우주 전체에 비하면 찰나적이고 티끌과 같은 시공간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경험에 기초한 폐쇄적인 인식 세계를 벗어나 열린 마음으로 자연과 우주를 바라보고 사고해야 한다. 우주적 세계는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우주적 세계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상태가 점차 불안정해지면 그 정도가 증폭되면서 물리량이 급격히 변화하는 혼돈상태에 이른다. 이런 상태에서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정보가 비약적으로 단절되기 때문에 앞선 정보로 다음 상태를 기술할 수 없게 된다. 혼돈은 그 규모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혼돈의 규모가 적은 상태로 기존의 질서를 가능한 유지하면서 새로운 질서에 적응해 가는 경우이고, 둘째는 새로운 체계를 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적응해 가는 경우, 셋째는 급속한 불안정성 성장으로 양에 의한 질의 변화가 유발되는, 가장 심한 혼돈상태이다. 별의 탄생이나 사회체제의 급격한 변화를 부르는 혁명이 후자에 해당한다.


불교에서 깨침의 경지에 이르는 방법으로 크게 점수와 돈수를 든다. 점수는 경험과 인식의 반복과 연속적 재생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높은 인식과 지혜의 경지에 이름이다. 반면에 돈수는 이러한 점진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어느 순간 단박에 깨침을 통해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즉 돈수는 일종의 불연속적 변화인 비약을 통한 극심한 혼돈과정을 거치는 것이고, 점수는 그렇지 않은 경우로 볼 수 있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은 항상 과거의 축적된 정보와 이들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움을 인식하고 사유하며 적응해 간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한 연속적이고 유기적인 상호관계에서 얻어지는 것이지 결코 불연속적인 특이한 단절과정을 거치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록 불연속적 비약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실제로 그것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한 것은 축적된 과거의 경험과 지식 및 사유의 얼개를 바탕으로 한 순간적인 통일적 영감에서 이루어지는 깨침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점수와 돈수는 수행과정의 차이일 뿐이지 근본적인 질의 차이는 아닌 것 같다. 점수가 돈수를 낳고 돈수가 점수로 이어지면서 깨침은 새로운 깨침을 이끌어 낼 것이다. 점수와 돈수 중 어느 한쪽에 집착함은 쌍차쌍조의 참뜻을 그르치는 것이 아닐까? 


6. 4大와 原子 - 물질의 생성과 불변성


기원전 4세기경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사물을 질료와 형상으로 보았다. 즉 사물은 가능성에 있는 질료가 형상에 의해 현실태로 움직인 것이지 무에서 유로 변한 것과는 다르다고 하였다. 예로 도토리가 참나무가 되는 것은 도토리가 질료이고 참나무가 형상이다. 생명은 질료로서의 육체, 형상으로서의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고 만물은 형상이 되지 않는 제1질료로부터 질료를 갖지 않는 순수형상인 신 사이 여러단계로 구분하였다. 실체(實體)라는 것은 영원불변이 아니라 4개의 원인에 의해 생성소멸하는 것이라고 했다. 네가지 원인이란 질료인(質料因), 운동인(運動因), 목적인(目的因), 형상인(形相因)이다. 인공물이 아닌 자연물은 운동인과 목적인과 형상인이 같다고 하였다.


현대 자연과학의 물질생성론은 빅뱅(big bang)이론인데 1929년 허블은 대폭발로 우주가 생겼다는 이 설을 제시하였다. 지금의 광대무변한 우주에 있는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옛날에는 한 점으로 응축되어 있었는데 100-200억년전에 어떤 원인에 의해 폭발되어 지금도 그 폭발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증거는 여러 가지로 발견되고 있다. 대폭발설에 의하면 폭발후 0.01초후에는 천억도가 되고 전자, 양전자, 광자, 중성미자등이 생성되고 0.11초가 되면 3백억도로 식고 중성자, 양성자가 생성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우주에는 점점 소립자로 채워지다가 10만년이 지나면 4000도로 식어 수소가 생기면서 물질이 생기기 시작하고 드디어 빛도 생겨나게 되었다.

우파니샤트철학에서 우주발생은 태초에 유일한 유(有)가 있어 그것이 욕심을 일어켜 지수화풍의 4대를 만들고 여기서 더 복잡한 복합물을 만들고 이 속에 그 유가 명아(命我)의 상태로 들어가 명색(名色)이 되고 일체가 형성된다고 설명한다. 하나(一)가 변하여 많은 것(多)이 되고 그 하나가 많은 것 속에 들어 가 본질이 된다는 입장이다. 이것을 전변설이라고 하며 또한 원인(一) 속에 결과(多)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뜻에서 인중유과(因中有果)론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인간의 자아(아트만)와 우주의 범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부파불교시대에 오면 물질은 우주 공간에 중생들의 업력이 동하여 생기게 된다고 설명한다. 물질의 기본은 지수화풍 4大이고 이 4大가 모든 물체를 성립시키는데는 열가지 인연이 있다는 십인론(十因論)을 발전시킨다. 10인은 6인(因)과 4연(緣)인데 6因에는 장애 없이 법을 생성하는 원인인 능작인(能作因), 함께 작용하여 산출하는 인자인 구유인(俱有因), 비슷한 다른 종류의 원인을 돕는 원인인 동류인(同類因), 서로 조화하여 동일 목적으로 향하는 원인인 상응인(相應因), 잘못을 일으키는 편견등에 관련되어있는 원인인 편행인(遍行因), 원인과 다른 결과를 나타내는 원인인 이숙인(異熟因)이다. 4緣은 결과를 산출하는 근본적인 원인인 인연(因緣), 능작인과 같은 적극적인 원인인 증상연(增上緣), 무엇이 일나날 때의 객관적인 조건인 소연연(所緣緣), 서로서로 일어나게 하는 원인인 등무간연(等無間緣)이다. 인연에는 6인중 5가지원인 즉, 구유인, 동류인, 상응인, 편행인, 이숙인을 연결시키고 있다. 그리고 물체란 성(成), 주(住), 괴(壞), 공(空)의 4상(四相)을 되풀이 한다. 이 물질생성론은 그리스시대 물질생성론과 유사하다. 현대 자연과학의 빅뱅이론은 우파니샤트철학에서 어느정도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자연과학에서는 1774년 라보아제가 질량불변의 법칙을 제시한다. 그는 밀폐된 용기에 115그램의 수은과 1.4리터의 공기를 넣고 가열하였다. 그랬더니 수은 표면은 붉게 변하고 용기안의 공기는 줄었다. 다시 붉은 이 물질을 가열하여 종전의 기체만큼 다시 만들 수 있었다. 이같이 하여 얻은 기체를 처음 수은을 가열하였을 때 남아 있던 공기와 섞어 보았더니 종전의 공기와 같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렇게 하여 물질은 그 형태가 변하더라도 구성원자는 변하지 않으며 전체 무게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이 질량불변의 법칙도 어떤 일정한 공간에서만 적용되는 것이지 우주 전체가 그런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편 불교에서는 유위법(有爲法)의 입장에서는 물체에 생멸이 있다고 설명하지만 무위법(無爲法)은 생멸이 없는 것이며 증감도 없다고 한다. 이러한 물질을 여여색(如如色)이라 하고 또 진여색(眞如色)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물불천론(物不遷論)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 진여색, 물불천론을 자연과학이 설명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7. 관반야심경의 내용에서

 

是故 空中 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까지 34자는 五蘊 十二處 十八界등 주관과 객관의 세계를 부정하였으나 실로 生滅去來가 空한 제법실상의 당체위에 인연화합의 오온,12처,16계가 본래 공한 것이다. 有라해도 假有이며 實有가 아니다. 이것을 확실히 공한 것이라고 보는 곳에 般若空觀의 특이성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주관,객관의 세계는 다만 주관망식(主觀妄識)의 변환인줄로 알아 통달한 것이 불교의 우주관이다.

五蘊 十二處 十八界는 실로 우주만법의 통합체이니 이것을 불교학에서는 蘊處界 三科의 중요한 綱目인데 그 내용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三科分立 : 五蘊.十二處.十八界>

五蘊    = 形體의 色法--地.受.火.風. -- 四大色蘊 - (有形) = 因緣和合의 假我  

        = 思廬의 心法--受.想.行.식. -- 四心蘊  - (無形)            
           

 

 

眼根

 ----  宇宙 ----   

色境

 

 

 

耳根

 

聲境

 

十二處

六根 =

鼻根

-色法一物   六境 =

香境

-色法

   

 

舌根

 (人生) (六塵)  

味境

(自然)

 

 

身根

 

觸境

 

 

 

意根

-心法一心

法境

-心所一心

(에는 浮塵根과 勝義根이 있으니 부진근은 안,이,비등의 신체기관이요 승의근은 육근기관내의 세밀한 부분, 예를들면 眼에는 眼求,視神經등과 같다.)
(는 根이 境을 받아들여 意識을 생장시키므로 十二處라하며 塵은 境이 淨心을 染하므로 塵이라한다.

 

六根

 

六境

 

六識

 

 

眼根

色境

眼識

= 眼의 界

 

耳根

聲境

耳識

= 耳의 界

十八界

鼻根

香境

鼻識

= 鼻의 界

 

舌根

味境

舌識

= 舌의 界

 

身根

觸境

身識

= 身의 界

 

意根

法境

意識

= 意의 界



8. 불교와 시간


 인간사회에서는 동일한 시간일지라도 사람의 감정상태에 따라 느끼는 시간의 크기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가령 꼭 봐야할 사람을 기다리거나 정말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경우 그 1분은 한 시간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반면에 좋은 사람과 함께 있거나 재미있는 일에 몰두할 경우 그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은 빠른 법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상황이 아니고 실제로 고속으로 움직이는 물질계에서의 시간이 느리게 관측된다는 소위 '시간지연'은 막연한 느낌도 단순한 이론적 모델에 불과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 많은 실험적 사실들에 의해 확고히 밝혀졌다.


  '시간 지연' 현상

1958년에 뫼스비우에가 보여준 실험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는 방사성 원자핵의 감마선을 이용해 10-11초까지의 미세한 시간변화도 감지할 수 있는 동일한 원자시계 두개를 회전원반의 중심과 가장자리에 고정시켜 놓고 고속으로 원반을 회전시켰다. 만일 상대성이론이 맞다면 정지상태에 있는 중심의 시계보다 대단히 빠르게 돌고 있는 가장자리의 시계가 느리게 갈 것이다. 실제 실험결과 바깥쪽의 시계가 중신의 것보다 느린 것으로 관측되었다. 그러나 혹시 우연일까 하여 그 두 시계의 위치를 바꾸어 실험한 결과 역시 빠르게 움직이는 가장자리의 시계가 느리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지구에 대해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계에 살고 있는 하루살이는 적어도 내 시계로 관측할 때 몇달 또는 몇년을 살 수도 있다. 물론 상대방의 시계도 그 만큼 느리게 갈 것이므로 그 계에서는 역시 하루살이에 불과하겠지만, 불교경전 여러군데에서 이와 유사한 시간개념, 즉 다른 세계에서는 시간단위가 다르다는 언급이 보이는 것은 흥미롭다.


이제 우리는 시간개념의 절대성은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원래 상대성원리는 아인슈타인이 두 장소에서 일어나는 두 사건의 동시성(同時性)과 같은 기본적 개념까지 비판함으로써 완성할 수 있었다. 동시성에 대한 우리의 상식이 얼마나 단순한지 알아보기 위해 별의 관측에 대한 예를 들어보자.


빛이 태양으로부터 지구까지 오는 데 8분 정도 걸리고, 태양계 밖의 가장 가까운 항성인 알파별에서는 4년, 은하계 중심으로부터는 3만년, 그리고 우리의 은하계 밖에 있는 다른 별무리인 안드로메다에서는 2백만년이나 걸린다. 우리가 지금 관측하고 있는 안드로메다의 빛은 실제로 2백만년 전에 그 별을 떠난 빛이므로 현재의 그 별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되어 있는가에 대해서는 알아낼 방법이 없다. 즉 우리가 동시에 측정하는 별빛에 대한 지식은 실제로 시간적 '깊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존재의 '시초'에 관한 논란에 대해서도 우리는 냉철하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천체물리학에서는 이 우주가 언젠가 순간적으로 대폭발(big bang)을 일으켰고 그 후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으며 이 팽창속도로 부터 역으로 계산하면 우주의 나이가 2백억년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창조론자들은 이것을 근거로 해서 우주는 누군가에 의해서 창조되어 시작되었고 따라서 바로 그 누군가에 의해 종말도 올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시작도 끝도 없다'

그러나 과연 그와 같은 전형적인 시간개념으로 우주의 시작과 끝을 설명할 수 있을까? 시간을 역으로 흐르게 해서 우주가 점점 축소될 경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온,고압의 고에너지 상태가 되는데, 이러한 특수상황에서 시간경과가 비선형식으로 무한정으로 느려진다면 절대로 우주의 시초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중력장내에서 힘을 받고 있는 경우의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시공간은 극도로 휘어질 수 있고, 만일 4차원의 시공간이 시간축쪽을 향해 닫혀져 있다면 우주는 수백억 년의 주기로 현재와 같은 시간이 반복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폭발 이전의 과거에는 지금과 같은 우주팽창의 역으로 커다란 우주가 수축되어 왔고 마침내 대폭발 직전의 대수축된 불덩어리가 된다는 순환식 '흔들이 우주론(oscillating universe)'도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이런 가능성은 동양적 성주괴공(成住塊空)의 반복 또는 불교의 윤회전생설(輪廻轉生說)을 뒤받침하고 있어서 창조론자들의 아전인수격 주장보다 '시작도 끝도 없다(無始無終)'는 우주의 운명에 대한 불교적 해석에 오히려 무리가 없다고 보여진다.


법보신문 (1994.10.3일자) '불교와 현대과학 : 서강대 교수-물리학'


 9. 불교의 우주관을 통해 본 하느님

 

우리는 불교의 우주관인 空의 세계를 통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의 속성을 찾을 수 있다. 이를 위해 먼저 불교의 우주관을 도식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서 각 그림의 사각형을 무한 영역으로 표시하도록 하겠다. 물론, 무한 영역을 그림으로 한정지어 표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리의 사유형식이 무한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한정된 우리의 사유형식으로 무한영역을 표시하도록 한다. 또한, 영역이란 말도 공간적인 개념에 한정되지만, 도식적인 설명을 위해 영역이라는 말을 사용하겠다. 결론적으로 이와 같은 무한 영역을 불교에서 언급하고 있는 空의 세계, 절대무(絶對無) 그리고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먼저 [그림 1]을 보도록 하자. 이것은 신(神)을 대상으로 파악하는 신관(神觀)을 나타낸 그림이다. 일반적으로 서구(西歐) 전통에서는 이처럼 무한하고 절대적인 존재를 '나'라는 주관의 입장에서 대상화하여 신(神)으로 설명하였다. 따라서 신(神)은 나에게 있어 언제나 타자(他者)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과연 신(神)이 우리와 타자(他者)로 성립할 수 있는가? 만일 인간이 신(神)에 대해 타자(他者)라면, 신(神)은 자신 외의 타(他)에 의해 제한되어지고 한정되어지는 존재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무한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에 빠지게 된다. 무한 영역에서 스스로를 벗어난 영역으로의 유출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무한 영역은 유출된 타자(他者)도 그 영역 안으로 포함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신(神)은 이처럼 대상화된 타자(他者)일 수 없다. 신(神)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단절된 '나'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교에서는 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근원적 실체 개념을 부여하지 않는다. 현상계의 모든 우연유(偶然有)에 대해 근원적 실체 개념을 부여한다면, 그것은 신 (神)과는 대립하는 타자(他者)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상계가 [그림 2]와 같이 자기 분열적인 존재라고도 볼 수 없다. 이는 각 요소들이 무한 영역의 각 부분들을 점유하여, 각 요소들 스스로 신(神)이라는 범신론과 각 요소에 실체성이 부여되는 다원론의 오류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 다음 그림들을 살펴보자. 이 두 그림은 불교에서 空과 色을 전통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바다와 파도의 관계이다. [그림 3]을 보자.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본질적인 실체는 바다와 같이 고요히 머물고, 그 현상인 파도가 바다를 현현(顯現)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오류가 있다. 무한 영역인 空은 자신을 현현(顯現)하는 色을 무한 영역 밖으로 현현(顯現)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한 영역 외에 다른 어떤 영역이 있게 되고, 따라서 무한 영역이라는 말은 스스로 모순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참된 空의 현현(顯現)은 [그림 4]와 같이 무한 영역 안에서의 '내재적 현현(內在的 顯現)'이라고 해야 보다 정확할 것이다. 이처럼 무한 영역 안에서의 내재적 현현(顯現)이기 때문에 色은 그대로 무한 영역에 포섭되게 되어, 무한 영역 그 자체에는 아무런 질적·양적 변화도 없으며, 생멸(生滅) 또한 있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이 무한 영역에서는 이 세계의 시작도 끝도 또한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시간 역시 무한영역 안에 포섭되어 의미를 잃기 때문이다. [그림 2]와 [그림 4]의 다른 점은, [그림 2]는 각 요소들이 자신의 영역을 점유하여, 고유한 자성(自性)을 갖고 있는데 반해, [그림 4]에서는 a, b, c, d의 각 요소들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가유(假有)에 불과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인(世人)들은 그림의 a, b, c, d와 같은 것들이 자성(自性)이 없는 空한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각각 실체가 있다는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되어, 아집(我執)에 빠지고 苦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도식 또한 우리의 사유 형식에 따른 표현에 불과하다. 우리의 사유형식으로는 결코 그와 같은 무한 영역의 체험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사유형식이 상대무(相對無)가 아닌 절대무(絶對無)를 사유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절대적이고 무한한 신(神)의 존재는 결코 우리의 주관이 대상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신(神)은 대상화된 타자(他者)가 아니라 대상이 없는 '절대타자(絶對他者)'라는 용어가 보다 적합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인간은 하느님과 다르면서도 또한 다르지 않은 그러한 존재이다. 전체와 단절된 나는 있을 수 없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전체'의 개념은 공간적 개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인간은 전체이면서 또한 전체이지 않은 그러한 존재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비유를 하곤 한다. 우리 인간은 성령의 바다 속에 있는 기포와 같은 존재라고, 고유한 모습을 갖고 있으면서도 또한 바다 그 자체인 그러한 존재라고... 

우리는 또한 [그림 4]에 나타난 불교의 우주관을 통해 현상과 본질이 다르지 않다는, 즉 "色이 곧 空이여, 空이 곧 色이다"라는 결론을 얻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의 일상 삶이 그대로 곧 진리의 세계이며, 진리의 세계가 곧 우리의 일상 삶임을 뜻하는 것이다(자료실 6번 "일상의 삶이 곧 진리의 삶(色卽是空 空卽是色)" 참조). 이는 곧 우리의 역사 안에 하느님께서는 구체적으로 현존하시고, 하느님의 역사가 곧 우리의 역사임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의 일상사가 바로 하느님의 역사라는 것은, 하느님을 현상계를 벗어난 우리와 전혀 이질적인 그래서 대상적일 수 밖에 없는 그런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 그대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는 매우 실천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10. 불생불멸 부증불감을 입증 


  질량-에너지는 하나

  모습 바뀔뿐 총합 일정

아인슈타인의 E = mc2 이라는 자연법칙의 공식이 있음을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물리 공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계의 물질과 에너지가 물리적으로 등가여서 질량을 갖는 모든 물질이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는, 인간이 찾아낸 최고의 자연법칙 중의 하나이다. 예를 들어 활자로 찍혀 있는 마침표 하나에만 은하계에 있는 별들보다 더 많은 수의 양성자가 들어 있는데, E = mc2 아인슈타인 공식에 의하면 그런 양성자 하나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질량이 200 MeV 에너지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론적으로는 이 현대불교신문 한 장의 질량은 어림잡아 전 세계 인구가 쓸 수 있는 에너지를 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게 된다. 물론 모든 물질이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다. 고도로 불안정한 상태의 우라늄이나 플로토니움 같이 질량값이 큰 원자만이 아인슈타인 공식을 현실에서 응용하는데 쓰일 수 있다.


그런데 이 공식이 나오게 된 이론적 배경이 흥미롭다. E = mc2 아인슈타인 공식은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된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뜻도 포함한다. 그래서 이를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법칙이라고 말한다. 질량과 에너지는 하나이고 가시적인 물질과 비가시적인 에너지가 하나라는 뜻이다. 이러한 생각은 사실 아인슈타인이 등장하기 200년 전에 이미 화학자인 라부아지에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에너지 보존법칙이라는 것이다.


라부아지에는 20년 동안 하루 6시간 이상을 금속의 녹이 나는 실험 관찰에 몰두하면서 에너지가 보존된다는 생각을 확고히 했다. 그는 폐쇄된 공간 안에서 녹이 슬기 이전의 금속과 녹이 난 후의 금속의 질량을 정밀한 저울을 통해서 비교하였다. 녹이 스는 현상은 금속 산화현상으로서 일종의 화학반응이다. 금속이 녹이 슬면 슬수록 그 원래의 금속의 질량은 당연히 줄어 들 것이다. 그러나 녹이 슬면서 나오는 산화열을 고려하고, 녹의 질량 그리고 남아 있는 금속의 질량을 합하면 원래의 금속 질량과 같다는 실험값을 얻어내었다. 결국 화학반응 이전과 반응과정 이후의 전체 질량의 값은 같다는 결론을 라부아지에는 내렸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라부아지에의 생각을 이어 받았고, 에너지가 보존되는 체계를 실험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폐쇄된 체계가 아니라 광대한 우주 영역에 펼쳐 놓았다.


에너지 보존법칙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 에너지가 없어지거나 새로이 생성되는 것이 없이, 그 전체 총량이 일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아는 물질 체계에서 물질이 없어졌다는 것은 실제로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물질 체계로 옮겨진 것일 뿐이며, 새로이 생겼다는 것은 다른 체계에서 전이해 온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 전이과정에서 물질이 전이되어지는 그러한 물질 형태는 가시적이고 부피를 지닌 질량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 형태를 띄게 된다. 그래서 에너지 보존법칙이라고 말한다.


그때 에너지 총량이 보존되는 체계는 국지적인 체계가 아니라 우주 총합적인 전체계를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 총합적인 전체계가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얼마나 큰지를 알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우주의 크기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작은 지구 체계 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말하고 있지만 전체 우주계의 차원에서 본다면 생성되는 것도 없고 소멸되는 것도 없다.


장작이 타고 없어진다고 말하지만 원래의 장작과 장작이 타면서 발생하는 열과 재 그리고 남은 숯의 에너지를 합하면 원래 장작의 잠재 에너지 값과 같은 것이다. 그 화려하던 황제의 몸도 죽지 않는 것이 없으며, 죽으면 썩을 뿐이다. 사람이 죽어 썩고 나면 그 사람은 없어졌다고 말하지만 그 사람의 원래 에너지의 값과 썩으면서 생긴 산화열, 그리고 그 살을 파먹은 벌레와 곰팡이의 신진대사 에너지 등을 모두 합하면 원래의 사람 에너지와 같은 것이다. 썩고, (요구르트가) 발효하고, (식혜가) 삭고, (메주가) 뜨고, 곰팡이 나고, 녹슬고, 불에 타며, 화학적인 산화반응에, E = mc2 의 과정을 통해 핵분열 하는 등등은 모두 같은 자연의 현상이며 단지 산화하는 속도의 차이일 뿐이다.(물론 핵분열 과정은 좁은 의미의 산화과정이 아니다) 이런 현상이 폐쇄계에서 일어날 때 물질이 전환되거나 소멸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런 전환과 소멸은 단지 에너지의 전이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에너지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든 물질 세계는 생성되는 것도 없고 소멸되는 것도 없다. 단지 다양한 물질의 옷을 갈아입고 나타나는 우주 연극의 배우들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주라는 극장 객석에 앉아 있을 수 있다면, 생성과 소멸에서 오는 인간의 집착이라는 색안경을 벗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11. 뉴턴, 불확정성 원리, 그리고 카오스


   1. 들어가는 말

불교의 우주관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공(空)이다. 우주는 성주괴공을 반복하며, 무시(無始) 이래로 흐르고 있다. 이 우주의 그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는 없으며, 무상이고 무아이고, 흐름의 과정일 뿐이다. 데이비드 봄이라는 과학자는 '우주의 총체는 흐름의 총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흐름이야말로 모든 만물의 근거이다. 하나의 위치에 고정된 음은 음악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 고정된 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전달해주지 않는다. 고정된 음들이 흐름을 타야, 비로소 음악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음악은 선율의 흐름이다. 우리의 존재도 인연따라 흐르고 있다. 예정되고 고정된 행로가 없으므로

우리는 삶을 무한히 창조할 수 있는 여백을 지니고 있고 또 악업을 지우고 선업을 새길 수 있는 가능성도 이러한 무상(無常)에서 나온다. 흐름상에서 영원불변하고 독자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현대 과학이 이루어낸 성과들은 이러한 불교의 공(空)을 닮아가고 있다. 이러한 과학의 성과들은 아마도 인간의 지성이 추구하는 궁극은 결국 공(空)으로 낙착된다는 반증이 아닐는지... ...


불확정성 원리와 카오스 이론도 그 예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불확정성 원리나 카오스이론을 이야기하기 전에 불교의 '흐르는 우주'와는 걸맞지 않는 뉴턴의 기계론적 우주관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이해하기가 쉬울 것 같아, 뉴턴부터 언급하기로 한다.


  2. 뉴턴의 기계론적 우주관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17세기), 위대한 과학자이자 수학자인 뉴턴은 모든 자연현상을 수학적 법칙으로 환원하고, 이 법칙에 의하여 우주체계를 설명하는 '기계적 우주관'을 확립했다. 뉴턴 이후로 그를 답습한 과학자들은 우주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우주는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므로, 예측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어졌다. 뉴턴의 만유 인력 방정식과 수학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모든 물체의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고 또 예견할 수 있다고 과학자들은 믿었으며, 뉴턴 이후의 철학자들은 이러한 우주를 시계에 비유했다. 시계바늘 뒷면에서 작동하는 톱니바퀴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들의 이면(裏面)에는 자연법칙이 엄격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태양계 안에서의 행성들은 만유인력의 법칙과 운동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며, 그것도 재깍 거리는 시계바늘처럼 정확히 자신의 궤도 위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달린다는 것이다.


뉴턴 학파의 사람들이 우주가 시계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또 한가지 있다. 즉 일단 신이 시동을 걸어놓은 이상 우주는 정해진 길을 가도록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은 우연에는 개입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믿었으며, 그래서 미래는 완전히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다.

뉴턴의 이 멋진 아이디어는 그와 동시대인(同時代人)인 에드먼드 핼리가 핼리 혜성의 궤도를 뉴턴의 법칙을 이용하여 계산해내고 그 핼리혜성이 언제 돌아올지 예측하는데 성공함으로써 확고히 뒷받침된 듯이 보였다.


17세기에 뉴턴이 제창한 고전역학은 물리학 교과서의 앞 부분을 차지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주의 규칙성으로 말미암은 우주행로의 '예측가능성'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장밋빛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우주는 무심하게 재깍 거리며 영원토록 하염없이 돌아가는 기계로 된 시계!

이제 이 톱니바퀴와 같은 우주는 우리의 손바닥 안에 있으며, 인간들은 창조주인 신에게마저도 큰 소리칠만 했다. 아니, 큰소리를 넘어서서, 이젠 창조주인 신을 부정하는 유물론적 세계관도 스스럼없이 진리의 한면으로 신봉되며 역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물리적인 인과법칙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양자역학(Quantum Physics)이 등장할 때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성(理性)을 구가했으며, 인간의 이성은 우주의 비밀을 해독할 수 있으리라 여겨졌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3. 불확정성 원리

뉴턴이래 기계적 우주에 대한 예측가능성이라는 이 장밋빛 환상은 현대의 양자역학과 혼돈(chaos)에 대한 연구로 깨어지게 된다.

우주의 저변에는 만유인력 같은 단순한 법칙들이 흐르고는 있으나, 이 법칙들로도 뉴턴 시대의 사람들이 믿었던 환상처럼 미래에 대해 항상 완전히 예측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아, 우리의 이성과 지성은 너무나 미미한 것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사람들은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말을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면에서 스스럼없이 사용하고 있다. 인간이 자연 앞에서 더 겸손해졌는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양자역학에는 불확정성 원리라는 것이 있다.

불확정성 원리란 어떤 소립자에 대해서 아주 정밀하게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즉,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글자를 읽기 위해서는 빛을 이용한다. 광원(형광등이나 태양)에서 나온 빛이 모니터에서 반사되어 우리 눈에 도달하면 이 빛에너지는 우리의 망막을 거쳐 신경신호로 변환되어 뇌로 전달된다.(유식학적으로 보면 안근인 눈에 의지해 활동하는 '안식'이 색(色)을 인식하고, 제6 의식이 안식의 내용을 분별하게 됨)


우리가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에도 수없이 많은 광자(빛)가 화면을 때리고 튀어나온다.

그러나 광자(빛)에 얻어맞은 화면이 움찔하며 뒤쪽으로 물러나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 이것이 뉴턴식 측정방법이다. 야구 경기 도중에 사람들이 플래시를 터뜨려 사진을 찍는다고 하여 공이 공중에서 춤추지는 않으며, 방에 불을 켠다고 해서 가구들이 펄쩍 뛰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영역에서는 뉴턴의 방정식이 '대체적으로' 들어맞는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곧 뉴턴식의 사고방식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빛과 같은 무한히 작은 에너지가 공이나 가구들을 움직이는데 필요한 에너지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다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글을 읽을 때 이 글자들에 부딪혀 반사되어 나오는 빛으로 글을 읽지만, 이 빛이 모니터에 미치는 영향력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미미하다. 이 '미미한 것 (그러나 있음)'을 뉴턴은 아예 '없는 것'으로 가정해버렸던 것이다. 공(空)은 "비어- 없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것"이다.  세상은 비어 "있다".

이렇게 무한히 작은 빛도 그와 같은 크기이거나 그보다 작은 소립자에 부딪힌다면 막강한 파워를 지니게 된다.


예컨대, 두 개의 당구공이 부딪히면 '두 개의 당구공 모두' 튀어나간다.  굴러간 당구공'만' 부딪혀 나오는 것이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소립자를 관찰하기 위해 광자(빛)를 부딪히면 관찰대상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소립자도 빛에 부딪혀 다른 방향으로 튀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확정성 원리는 이렇게 선언한다. 소립자의 위치와 속도 두 가지를 모두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소립자의 위치를 정밀히 알아내기 위해 신경을 쓰면 쓸수록, 속도의 불확정성은 그만큼 커진다. 반대로 속도에 신경 쓰면, 위치에 대해서는 점점 모르게 되어버린다. 양자역학에서는 정확한 수치를 파악할 수 없으므로, 확률을 사용한다.


뉴턴을 극복한 아인슈타인마저도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이러한 영역이 우주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끝내 납득하지 못했다.

모든 과학자들이 그렇듯이 아인슈타인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전자로부터 저 거대한 별에 이르기까지 우주 삼라만상의 활동법칙이 분명히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소립자의 개개의 정밀한 움직임은 예측할 수 없다는 양자론의 중심개념때문에 그가 꿈꾸던 통일장 이론을 완성치 못하여, 이렇게 닐즈 보어에게 말했다고 한다.

"신이 비록 불가사의하지만, 결코 우리가 그 세계를 이해 못하게 할 정도로 악의적이진 않을거라 믿네. 신이 주사위를 가지고 놀리는 없쟎는가" 그러자 닐즈 보어는 "신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씀하지 마시죠."라고 대꾸했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소립자세계)에서는 뉴턴의 방정식이 전혀 쓸모 없어져 버린다.

이러한 불확정성 원리는 불교의 연기와 공사상에 빛을 던져줄 수 있는 현대과학의 성과이다. 모든 소립자의 상호작용은 기존 소립자의 소멸과 새 소립자의 생성으로 이루어진다. 소립자의 세계에는 끊임없는 生成과 消滅의 춤판, 질량이 에너지로 변하고 에너지가 질량으로 변하는 끊임없는 춤판이 벌어진다. 존재의 안팎에서 순간적인 형태들이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되었다가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공(空)의 세계가 아니고 무엇인가 말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불교의 인과법칙(연기법)은 모든 진리의 기본전제라고 하는데, 양자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인과법칙이 쓸모없는 것이 아니냐고.....

그러나 양자의 세계에서도, 정확한 수치는 사용할 수 없지만 '확률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인과율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덧붙여 위의 물음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연기법칙을 다른 말로 인과법칙이라고 말하지만, 불교의 인과법칙은 과학에서 사용하는 "물리적인 인과법칙"을 '포함'하고, 나아가서 그것을 '뛰어넘는' 개념이다.


과학상의 인과법칙이 정작 중요한 것을 간과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 우주만물의 근본을 형성시키는 에너지의 원천, 즉 마음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음은 시간을 초월하여 시간밖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시간의 흐름에 상즉상입(相卽相入)하면서 인과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마음을 제외한 인과법칙'을 우주에 적용시키려니까, 눈에 보이는 거대한 뉴턴식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립자의 세계가 이원론적 세계로 분리되어 버린다.


  4. 카오스 이론

우리들 지식의 불완전성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이론으로 혼돈(chaos)이론이 있다. 공을 높은 탑에서 떨어뜨려 순간 순간의 위치와 속도를 측정하고, 지면에 떨어지는 시간가지도 계산해 낼 수 있는 것은 전형적인 뉴턴의 시스템이다.

그러나 심장이나 날씨처럼 복잡한 시스템은 예측을 불허한다. 이처럼 규칙적이지 않은 무질서(혼돈)한 시스템이 우리 주위에는 많이 있다.


예컨대, 수도꼭지를 조금만 틀면, 작고 느린 물줄기가 흘러나오지만, 좀 더 열면 물이 무질서(chaos)하게 쏟아져 나오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것을 물리학에서는 "초기 조건에 민감하다"고 표현한다고 한다. 이렇게 초기조건에 민감한 특성을 지닌 현상으로는 물줄기, 커지는 눈송이, 심장의 박동 등이 있다. 혼돈시스템이 초기 조건에 극도로 민감하다는 사실은 이들 혼돈 시스템의 미래행동을 예측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초기 조건이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정의되어 있으면 완벽한 예측이 가능하지만, 불행하게도 혼돈시스템의 미래행동을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한 초기조건은 결코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 카오스 이론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예측과 실제가 한동안 '비슷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이는 커지기 마련이다. 혼돈시스템을 설명하는 데 과학자들이 예시하는 대표적인 예가 날씨이다.


일기를 측정하기 위해 기상학자들은 풍속, 풍압, 기압 등을 수천 번씩 측정하여, 24시간이나 48시간 단위의 예측은 상당히 정확할 수 있고, 일주일 전의 예보가 들어맞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특정장치가 정밀하고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뛰어나도 1년 후의 날씨를 예측한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대기의 움직임이 갖는 이러한 혼돈의 특성은 '나비효과'라는 개념으로 표현된다. 혼돈시스템 안에서는 영국 스코틀랜드 산악지방에서 한 마리의 나비가 날개를 퍼덕이는 것처럼 조그만 일이, 우리 나라에 비를 내리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표현이다.


혼돈이론은 아직 미개척 분야이다. 그러나 혼돈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것은 과학자들 사이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혼돈시스템의 예로 들고 있는 '나비효과'가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낯설지가 않다는 것이다. 물리적 인과법칙의 특성인 필연성과 반대되는 개념은 우연성이다. 물리적 인과관계에 사고방식이 물든 사람은 인과적 필연성과 반대되는 우연을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그들은 말한다. "우연에는 의미가 있을 수 없으며, 우연은 어디까지나 맹목적인 것이다"라고.


그러나 "맹목적 우연"이라는 것도 기계론적인 우주관(뉴턴식 사고방식)이 지배하던 시대의 한 유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우연의 의미를 보지 못하니까, 오히려 우리의 무지를 우연에게 뒤집어 씌워서 "눈 먼 (맹목적인) 우연"이라고 하는 것은 아닐는지....


부처님의 제3의 눈은 모든 것을 본다.

다인(多因)과 다과(多果)를 동시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부처님의 혜안으로 보면 이 우주에 '맹목적'인 것은 없다. 부처님이 이 자리에 계시다면 카오스이론을 여전히 연기법으로 설명하실 것이다.


  5. 맺는 말

부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일체는 상호관계 속에 있으며, 홀로 독립해 있는 존재는 없다는 것을... 그런데 현대 과학은 이러한 사실을 그대로 확증해주고 있다.  (아래 글은 소걀 린포체 著, 오진탁 譯, 티베트의 지혜에서 인용, 민음사)


생태학자들은 알고 있다.

아마존 강의 열대 우림에서 불타고 있던 나무가 프랑스 파리의 시민들이 숨쉬는 공기로 바뀌고, 멕시코 유카탄 반도를 날아다니는 나비의 날갯짓이 스코틀랜드의 헤브리디스 열대에 있는 양치류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생물학자들도 개체와 그 정체성을 창조하는 유전자의 환상적이면서도 복잡한 춤을 밝혀내기 시작했다., 즉 먼 과거로부터 비롯한 개개의 정체성이 다양한 영향력들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춤을 밝혀내기 시작했다.

물리학자들은 부처님이 우주 전체에 펼쳐진 반짝반짝 빛나는 그물 비유를 통해 제시한 것과 놀랄 정도로 유사한 양자의 세계를 우리에게 소개했다. 그물 안에 있는 보석과 마찬가지로, 모든 입자는 잠재적으로 다른 입자들과 다양하게 결합할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상호의존적 관계를 알고 있는 참된 영성(靈性)은 아무리 사소한 행동(身業), 말(口業), 생각(意業)일지라도 우주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알고 있다. 조약돌 하나가 연못 전체에 파문을 일으키듯이.


 12. 빛도 흡입되는 초밀도 공간 


  태양 10배 초신성 폭발때 탄생

  삼천대천세계도 하나의 우주

진공청소기는 압력차를 이용해 인위적으로 강한 흡입력을 만들어 쓰레기를 청소기 안으로 빨아들인다. 비슷한 원리로, 중력에 의한 압력차가 있어서 지구상의 모든 물체는 땅을 향해 떨어지기도 한다. 달은 지구보다 중력이 1/6 밖에 안 되어 달 표면의 물체들은 지구에 비해 1/6 정도밖에 안 되는 중력 가속도로 떨어진다. 그리고 달은 물체를 표면으로 떨어뜨리게 하는 중력권의 범위도 그 지름에 비례하여 지구의 1/6밖에 안 될 것이다. 만약 지구보다 10배의 중력이 작용하는 행성이 있다면 지름에 비례하여 그 행성의 중력권의 범위는 10배 더 높고, 떨어지는 가속도도 10배 더 빠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우주에는 초신성이라는 것이 있다. 초신성은 적어도 태양 질량의 10배 이상 되는 별이 그 수명을 다해 죽어 가면서 일으키는 일종의 대폭발이다. 대폭발을 하면서 그 별은 중성자 별과 블랙홀이라는 잔해로 변한다. 중성자 별은 반지름이 10km 정도지만, 그 표면의 중력은 지구의 1000억 배나 된다. 중력이 1000억 배라는 말은 그 크기에 비례하여 지구보다 1000억 배 더 높은 중력권의 범위를 가지며, 동시에 물체는 1000억 배 빠른 가속도를 갖고 중성자 별 표면으로 물체를 흡입하게 될 것이다. 1000억 배의 중력이라는 것은 말이 그렇지 상상을 초월하는 흡입력이다. 아마도 그 중성자 별 근처를 지나는 작은 별똥이나 아주 작은 우주 먼지까지도 남김 없이 빨아들이는 어마어마한, 그런 강력한 중력의 진공청소기가 될 것이다.


블랙홀은 중성자 별보다 훨씬 강한 중력을 갖고 있어서 빛조차도 빨아들이고 마는 일종의 초고밀도의 작은 별이다. 고무 풍선이 바람을 자꾸 받아들이기만 하고 내뿜지 않는다면 그 고무 풍선은 두 가지 형태로 자기 자신을 유지해 나갈 것이다. 하나는 고무 풍선이 늘어나 점점 더 커지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고무 풍선 표면이 단단하여 늘어나지는 않지만, 그 안의 공기 밀도가 엄청나게 커지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블랙홀은 그 중에서 후자의 경우와 유사하다. 그래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은하계 범위 안의 우주 블랙홀은 빛까지도 흡입하는 강력한 중력으로 질량을 갖는 모든 물질을 흡입함으로써 크기는 작아도 점점 더 밀도가 높은 방향으로, 어쩌면 무한의 밀도까지 진화하게 된다.


이탈리아와 네덜란드가 함께 쏘아 올린 벳포삭스 위성에서 1997년 12월 일회적으로 관측한 우주 감마선은 블랙홀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중요한 계기였다. 지구표면에서는 관측할 수 없고 우주 공간에서만 관측가능한 그 우주 감마선이 지니는 의미는 초신성의 대폭발에서 생기는 에너지 방출량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블랙홀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게 한다는 데 있다. 이 블랙홀은 중성자 별과 달리 폭발하여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자기의 별 안으로 급속히 빨아들여 거대한 중력을 만들어 낸다. 그 수축이 너무도 급속하여 빨려 들어가지 못한 많은 고온 가스가 확산되면서 주변의 우주 가스와 일으키는 충돌로 막대한 충격파가 광속의 속도로 형성되기도 한다. 관찰된 일회성의 감마선은 그때 나오는 에너지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렇게 초신성이 폭발하면서 물질들이 한 점으로 수축하여 블랙홀이 되는데, 우주에는 이와 같은 블랙홀이 수없이 형성되고 있다고 천체물리학자들은 생각하고 있다. 블랙홀의 존재는 비록 완전하게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인간에게 우주의 범위가 단순히 인간이 관측 가능한 공간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최근 들어 영국의 '휠체어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은 질량을 빨아들이기만 하고 내뱉지 않는 우주적 기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열역학 제1법칙과 제2법칙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는 웜홀의 존재를 상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웜홀로 이어지는 또 다른 우주는 이 우주와 전혀 다른 물리법칙이 적용되는 우주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제대로 판명된 것은 하나도 없지만, 우주의 존재 양상이 지구가 위치한 한 모퉁이의 우주의 모습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는 대부분의 천체물리학자들이 공감하고 있다.


시방세계에서 역시 우주는 모든 이에게 다 같은 우주가 아니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의 수 없는 겁(劫)의 시간을 소요하는 우주 각각은 색법에 갇힌 중생들에게는 단견(斷見)의 잘려진 우주이지만, 부처의 눈에는 하나의 우주이기도 하다. 반산 스님이 이야기했듯이, 중생의 우주는 처마 지붕이 다일 수 있지만, 부처의 청정 광명한 우주의 크기는 천 개의 태양과도 같다. 천년의 어둠을 한 순간에 밝게 해주는 것이 하나의 촛불이거늘, 천 개 태양의 우주의 크기를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까? 그러나 달리 관심을 둔다면 천 개의 태양이 비추인 길이지만 밤이 되면 어두워지고, 밤이 되어도 그 같은 길을 촛불 하나만 갖고 걸어가기도 한다.


최종덕/상지대 교수 jdchoi@chiak.sangji.ac.kr


13.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


과 학…최초 우주 대폭발과 함께 시간존재

불 교…사물 발생·소멸 따라 시간도 생멸


우주는 무한하다고 한다.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 같은 것이 4000억 개 이상이 모여 우리 은하계를 구성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은하계가 우주 지평선 내에서만 1조(1012) 이상 있다고 한다. 그렇게 헤아리기 어려운 숫자 이상으로 우주는 무한하다. 그런데 우주는 원래 그렇게 무한한 것이었는지 질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우주의 시작은 100억 년에서 200억 년 정도 된다고 말한다. 중간쯤 잡아서 150억 년이라고 말해도 좋다. 150억 년 전에 우주의 대폭발이 일어나, 초기 10-12 초 동안은 원자핵이 형성되기 이전인 스프 상태의 우주의 모습이었다. 그 후 100초 동안 현재 우주의 많은 규모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머지 150억 년 동안 생명이 존재하는 오늘에 우주에까지 진화하였다.


오늘의 우리는 '진화의 처음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진화가 아니라 최초의 창조라면 그 창조의 처음은 무엇인가 그리고 창조 이전에는 무엇이었을까 라는 질문이 머리를 맴돌고 있다. 얼마 전에 한국에 들른 영국의 휠체어 물리학자인 호킹은 이미 60년대 말에 특이점의 정리를 내놓아, 특이점이 작동하는 대폭발의 시간과 함께 우주의 시간이 시작된다고 했다. 그러면 특이점 이전의 시간은 무엇일까? 그 답으로서 시작 이전의 시간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보면 신의 창조 이전에 시간이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때 아우구스티누스는 질문 자체가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를 자르면 그 나무의 나이테가 있는지 혹은 아담은 배꼽을 가지고 있는지를 묻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그러나 펜로즈-호킹의 특이점 이전의 시간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 이전의 시간의 개념은 전혀 다르다. 호킹의 대폭발 이전 시간은 지금과 같이 앞으로만 가는 화살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창조론에서 말하는 창조 이전의 시간은 아예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시간은 현상 속의 시간이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은 사물과 함께 한다. 사물의 흐름이 무상이듯이 시간도 역시 상대적이다. 그런 의미의 시간이라면 불교에서는 시간의 시작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시간의 끝도 없다. 우주가 무한하다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우주의 중심이 없다는 뜻과 같다. 그 반대로 그 어디라도 우주의 중심이 된다고 말해도 된다. 중심이 없으면서 동시에 그 어디라도 중심이 될 수 있는 우주가 곧 화엄경이 말하는 우주와 같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도 우주의 한 티끌에 지나지 않지만, 동시에 그 작은 티끌 속에도 모든 우주가 포함되어 있듯이 내 안에 중심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에도 중심이 없다. 그래서 그 끝과 시작이란 없다. 언제부터인지 언제까지인지 원래부터 모를 일이다. 단지 그 무엇이 옷을 바꿔 입고 나타날 뿐이다. 윤회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윤회는 윤회의 멈춤을 희망하고 있으며, 윤회의 시간사슬이 끊어지기를 희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윤회의 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윤회의 끝은 다시 열반의 시작일 뿐이다. 그래서 열반에는 시간의 시작이 있었다. 우리는 무심(無心)의 초발심 속에서 아니면 부처 세계의 일상성 속에서 우리가 아직 그 시간의 시작도 해보지 못한 그런 열반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윤회에는 시간의 끝이 있었고 열반에는 시간의 시작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스스로에게 되물어 본다. 윤회와 열반이 나뉘어져 있는 것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윤회의 그늘 속에서도 열반을 보는 사람은 시간의 시작 이전의 무상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열반의 연꽃 위에 앉아 있는 사람도 윤회의 사슬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시간의 끝 이후의 무상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팽창우주의 시간의 끝이 축소우주의 시간의 처음이 되듯이 원래는 하나의 우주적 진화이거늘 그것을 둘로 보는 사람의 두 가지 시간일 뿐이다. 하나의 우주를 찾는 마음이 부처의 마음속에는 하나의 진여(眞如)일 뿐이다. 윤회의 끝과 열반의 시작이 맺어지는 곳이 바로 진여의 우주이다. 그래서 진여의 우주 속에는 시간의 시작도 그 끝도 없다. 그 안에서 시간은 무시이래(無始以來;anadikalam)와 무종(無終)이지만, 시간의 얽매임이 없다면 시간의 처음과 끝이 한 찰나 속에서 되살아 날 수 있다. 작은 꽃잎 끝에 맺혀 있는 작은 이슬 방울방울마다 비추어진 반짝이는 태양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하늘의 태양을 모두 머금고 있듯이 말이다.


최종덕/상지대 교수(jdchoi@chiak.sangji.ac.kr)



14. 우주는 움직이는 하나의 그물 


 고대 희랍의 철학자인 플라톤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플라톤의 철학을 이야기하려면 너무 복잡해서, 간단히 그의 우주관이 2000년 가까이 서구 근대과학에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컸었는지, 그것만을 이야기하려 한다. 플라톤이 알아낸 사실 중에는 엄청난 기하학적 발견이 있다. 그것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정다면체의 수는 오로지 다섯 개뿐이라는 사실이다. 4, 6, 8, 12, 20 정다면체가 그것이다. 일일이 그려보지도 않고, 정244면체가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나아가 정12828면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이러한 플라톤의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단지 기하학의 진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존재의 진리 그리고 천체 즉 행성들이 운행하는 진리에까지 천착되었다. 이러한 기하학적 진리가 경험세계에도 해당된다고 하는 것이 플라톤의 강한 신념이었으며, 실제로 이러한 신념은 근대 초기인 갈릴레오의 경험론적 천문학에서도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보자.


정4면체 안에 내접하는 원1이 있다. 그리고 정4면체에 외접하고 동시에 정6면체에 내접하는 원2가 있으며, 정6면체에 외접하는 원3이 있고 그에 외접하는 정8면체가 있어 다시 그에 외접하는 원4가 있다. 다시 그에 외접하는 정12면체 밖에 외접하는 원5가 있으며, 그 밖에 외접하는 마지막 정다면체인 정20면체가 있어서 그것에 최종 외접하는 원6이 있다. 이렇게 사유 속에 추상적으로 구성된 6개의 원이 바로 행성의 궤도가 된다고 서구 근대인은 보았다. 왜냐하면 기하학적 진리가 곧 경험적인 천체의 진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철저한 합리주의 전통의 결과로써 천문학을 재구성한 결과이며, 이러한 재구성에 대하여 그 당시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신이 부여해준 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망원경을 통해서 본 당시의 행성의 수는 정확히 여섯 개였다. 결국 기하학의 진리는 곧 경험세계의 진리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서구의 기하학을 배운 이선재라는 천문학자가 있었다. 그는 우주의 별들 사이에 내재하는 기하학적 구조가 있다고 믿었다. 이선재의 연구과제는 고대 희랍의 철학자인 피타고라스처럼 우주의 조화를 탐구하는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우주의 기하학적 구조의 조화 속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을 인간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음악이라고 보았다. 이선재는 음악대신 수학을 동원하여 그것을 표현하려고 했으며, 그래서 우리는 그를 과학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선재는 로렌츠 변환식을 이용하여 우주 공간에서 시간의 변환에 따른 물체의 변화를 확인하였으며, 특수 상대성이론과 도플러 효과를 통해서 쌍둥이 별의 기하학적 구조를 밝혀 냈다. 그리고 일반 상대성이론을 동원하여 우주 공간의 휨 현상을 찾아내어 별들 사이의 여행을 할 수 있는 최단거리의 비밀을 밝혀 냈다. 그는 우주 공간이 편평한 것이 아니라 휘어 있음을 인지하였다. 그러나 그 휘어 있는 공간의 의미는 공간 스스로 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 속에 던져진 물체가 운동할 경우에만 그 휘어 있음이 실현된다는 뜻이다. 물체가 운동한다는 것은 물체가 갖는 질량과 속도에 따라 그 휨의 정도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내포한다. 그래서 그는 운동의 속도와 질량에 따른 휨의 정도를 파악하기 위하여 우주 공간을 그물 망 구조로 가정하였다. 그리고 편평한 그물 망 위에 물체를 던질 때 그 그물 망이 휘어지는 정도는 물체의 질량과 속도에 어느 정도 비례할 것이라는 과학적 예측을 시도하였다.


예를 들어 사각형 모양의 그물 망을 네 모서리에서 손으로 잡고 있다고 치자. 그런 그물 망 위에 갑자기 아주 무거운 물건을 던진다면 두 모서리 혹은 아주 더 무거운 물체라면 네 모서리 모두가 한 곳으로 모아 질 것이다. 이런 우주의 공간을 비쥬얼하게 상상을 한다면 먼 거리로 떨어져 있는 공간이 순간적인 시간차원에서 하나로 모아질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이선재의 우주 천문학의 꿈이었다. 이런 꿈이 실현된다면 얼마 전에 한국에도 다녀갔던 스티븐 호킹의 엔트로피 감소가 일어나는 도발적인 우주공간의 꿈이 실현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선재는 연구실에서 나와 도서관에 들렀다가 우연히 화엄경이라는 번역본을 쥐게 되었다. 그 책 안에는 인드라 망이라는 우주의 구조가 간단히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이야기들을 하나의 종교적인 환타지로만 여겼다. 그날 밤 이선재는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인드라 망의 이야기가 하나의 소설로만 그치기에는 아쉽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15. 불교 초기 경전에 나타난 자연관 


 불교에서는 우주의 생성, 환경 그리고 인간에 대하여 어떻게 밝히고 있는가.

불교경전은 이에 대하여 상세한 답변을 하고 있다. 초기경전을 중심으로 이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1) 대루탄경(大樓彈經)

『대루탄경』은「기세경(起世經)」이라고도 번역된 경으로 불교의 우주관 즉, 세계가 이루어지고 괴멸하는 것에 대하여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들었다'로 시작하는 경전은 품별마다 이에 대한 문제를 밝히고 있다.


  (1) 염부리품(閻浮利品)

하늘과 땅을 파괴하는 것은 무엇이며,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비구들이 강당에 모여서 토의하는 것을 서술한다. 이러한 비구들의 토론을 들은 부처님께서는 강당에 이르러 비구들에게 설한다. 그것은 하늘과 땅 그리고 모든 삼천대천 세계까지도 괴멸하고, 이루어져서 하나의 부처님 국토를 이룬다는 요지이다.

그리고 그러한 부처님 국토 가운데는 수미산의 남쪽에 염부리라고 이름하는 천하가 있는데 너비와 길이가 2만 리(里)이며 북쪽은 넓고 남쪽은 좁다는 염부리의 세계에 관해서 설한다.

이 염부리에는 큰 나무와 꽃, 못과 큰 코끼리와 용왕이 있다. 또 선주왕수(善住王樹)라고 하는 큰 나무 밑에는 선주라고 하는 코끼리의 왕이 8천의 코끼리를 거느리고 있으며 나무의 북쪽에는 마나마(摩那摩)라고 하는 욕지가 있다.

물은 맑고 시원하며 깨끗하여 온갖 빛깔의 연꽃을 피운다. 코끼리 왕 선주는 그가 거느리는 코끼리들과 함께 이 연못에서 논다. 앞의 이러한 도입부에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다시 설한다. 수미산 북쪽에는 울단월이라고 하는 천하가 있는데 너비와 길이가 각각 40만 리로 그 북쪽에는 많은 산이 있다. 강이 흐르고 못이 있으며 꽃이 피는 나무들이 있다.

또 이곳은 세 개의 천하 가운데 가장 뛰어난 곳으로 사람은 쌀을 먹고, 도둑이 없으며 죽어서는 좋은 곳에 태어난다.


  (2) 천지성품(天地成品)

천지가 괴멸한 다음 다시 천지가 이루어진 뒤에 사람들은 모두가 제15의 아위화라천상에 있으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저마다 광명을 나투는 신통을 지니며, 만족할 만큼 긴 수명을 누린다.

그때 물은 대지에 충족하고 해와 달과 별도 없고, 낮과 밤도 없다. 거기에 복이 적고 수명이 다하려하는 천인이 와서 함께 즐긴다.

또 남녀의 성별도 없고, 귀족과 서민의 구별도 없다. 땅에서 수명이 다하여 자신의 광명을 잃게 되면 다시 하늘로 돌아온다. 이때 검은 바람이 크게 불어 깊은 바다로부터 해와 달과 별을 수미산 근처로 불어 올린다.

이렇게 하여 다시 해와 달이 있게 되고 낮과 밤은 갈리고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이 생긴다. 또 염부리의 칠중산에는 바라문의 선인들이 사는 얼굴 장사가 있다.

사람들은 지상에서 자란 음식을 먹고 생활하며 이윽고 쌀을 먹기에 이르면 남녀의 성별에 눈뜨게 되고 부정을 행한다. 이때, 제15의 아위화라천의 천상에 있는 복이 다한 자가 어머니의 태를 빌어 남녀의 성별을 지니고 지상에 태어난다.

이럴 무렵에 사람들은 하루의 양식만을 구하지만 뒤에는 2일 분을, 또 얼마가 지난 다음에는 5일 분을 이렇게 차츰 많은 것을 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장차 양식이 다하게 되면 토지를 나누어 각각 씨앗을 뿌리고 경작하게 되고 소유가 생기고, 남의 것을 훔치는 자가 나오게 된다.

이에 사람들은 상의하여 용모가 단정한 존자를 가려 지도자로 삼으며 비법을 행한 자에게 벌을 주게 된다. 따라서 지도자는 모든 일에 대해서 명령하고 규율을 제정하여 질서를 유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그를 대왕이라 부르며 법에 의하여 세금을 걷기 때문에 찰리라고 부르게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이 찰리종이 계보를 따라 내려오는 동안에 모든 것을 버리고 한적한 곳에서 살며 명상에 잠기고자 하면서 악과 불선을 행하는 무리가 생기게 되고 이들을 바라문종이라고 부른다. 이밖에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하는 백성들이 있게 되어 공사종을 이루고, 살생을 업으로 삼는 자는 살생종이라 한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사문종이 생기고 『삼십칠품경』을 봉행한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경을 설할 때, 8만천의 천인에게 법안이 생기고 무수한 비구는 무루의 경지에 들어 생사를 받지 않게 된다.


  2) 착사경(着使經)

『착사경』에서는 이러한 우주 즉, 자연과 인간이 서로 의지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라자그라하 카란다카 대나무 동산에 계시었다. 그때 존자 라훌라(Rahula)는 세존이 계신 곳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발에 예배한 뒤 한쪽에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아야 나의 몸과 마음[身識]과 바깥 경계의 일체 모양에서 '나'와 '내 것'이라는 견해, '나'라는 교만, 매이어 집착함, 번뇌에 부림이 없게 되겠습니까." 부처님은 라훌라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너를 위하여 설명하겠다.

라훌라여, 만일 비구로서 모든 땅의 경계에 대하여 과거이거나 미래이거나 현재, 안이나 밖, 굵거나 가늚, 좋거나 기쁨, 깨끗하거나 더러움, 멀거나 가까움 그 일체는 '나'가 아니요, '다른 나[非我]'도 아니라고 참다히 알고, 물, 불, 바람, 허공, 식의 영역에 대하여도 또한 그와 같아서, 라훌라여, 비구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 나의 몸과 바깥 경계의 일체 모양에서 내 것이라는 견해, 나라는 교만에 매이어 집착함, 번뇌에 부림이 없게 될 것이다.

라훌라여, 만일 비구로서 이 몸과 마음과 바깥 경계의 일체 모양에서 '나'와 '내 것'이라는 견해, 나라는 교만, 매이어 집착함, 번뇌에 부림이 없으면, 이것을 애욕의 얽매임과 모든 맺음을 끊고 밝게 알아서, 괴로움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라 한다."


  3) 불설태자쇄호경

"보살은 마땅히 자비심으로 시방의 인민 및 날벌레 길벌레의 무리에 이루기까지도 어여삐 생각하여 갓난아기와 같이 보고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야한다"라고 한다.

또한 "성읍, 촌락과 산림, 강과 동산, 궁전, 누각 그리고 일체의 행로 및 교량, 자연적인 굴택, 일체의 농작물과 화초와, 초목의 총림 등을 태우거나 파괴하지 말고 물을 유실시키거나 대지 말아야한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에는 다같이 생명을 가진 짐승과 벌레들이 있으므로 그 죄 없는 중생들을 다치게 하거나 목숨을 괴롭혀선 안되기 때문이다."


  4) 주혜경

"잡초와 더러움을 제거하지 않으면 벼와 곡식이 영글지 않는다." "먼저 가레로 잡초와 더러움을 제거하라. 그러면 많은 수확을 거둘 것이다." 초기의 많은 경전들은 이상과 같이 생성, 환경 그리고 인간에 대하여 밝히고 있다. 우주 즉 자연과 인간은 연기적 존재로 인간은 이에 대하여 자비심을 가져야 함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은 결코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하나의 파괴는 다른 존재에도 반드시 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구성하는 하나의 구성원일 뿐 그 이상의 어떠한 존재도 아닌 것이다. 구성원은 구성원 각자 조화의 역할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항상 자비심을 가지고 모든 존재를 대하는 마음의 요구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불교에서의 자비이다.

불교에서는 자비의 대상을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생명 더 나아가 모든 존재에까지 그 범주에 포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강·공기 등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또한 불교에서는 우주의 생성과 인간 관계는 선의식(善意識)이 상속되어야 함을 교설 하고 있다.

사실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사대(四大:地, 水, 火, 風)이다. 이 사대에 의식이 부합되어 생명체(sattva)가 되는 것이다. 의식 이외의 모든 것은 염부제 형성체이며 천지 그 자체다. 그러므로 우주의 체성인 사대와 인간의 생명성과는 불이의 관계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인간 자신이 선의식(善意識)으로 우주를 바르게 존속하게 한다하더라도 무상성의 세계이므로 공간은 시간에 의하여 괴멸되어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연 멸의 괴겁(壞劫)이 따라 오는데 여기에다 인간이 필요 이상의 과욕, 낭비로서 법계를 훼손코자하는 멸상(滅相)이 현저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사분율(四分律)』에서 "땅을 파지 말라. 살아있는 나무를 꺾지 말라. 노지에 불놓지 말라. 고의로 축생들의 목숨을 뺏지 말라. 벌레 있는 물은 마시지 말라."고 계목한 것이다.

『대승범망경』에서도 "그러므로 육도의 중생들이 모두 나의 부모이거늘 그들을 잡아 먹는 것은 곧 나의 부모를 죽이는 것이며, 또한 나의 먼저의 몸이요, 불, 바람이 나의 먼저의 모양이니 항상 산 목숨을 살려 주어야 하느니라."라고 하였다.


이러한 경전의 해설은 불교의 교리 체계는 이 우주와 인간이 동일 체성임을 극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법계 속에서 자연과 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연기적 인식을 바르게 인식하여야 한다.


16. 유전자 조작과 불교


  ① 유전자 조작, 인간존엄 파괴인가

  ② 불교적 관점에서 본 유전자 조작

  ③ 현재의 행위(業)가 중요하다 


  "생태계 질서 대변환 예고" 


    정호영 <충북대 철학과 교수>


  영원 좇는 인간욕망

  '칼날에 묻은 꿀'

   달지만 결국 위험 


전통적인 서구의 철학이 그러하듯이 전통과학의 문제는 사물을 분석적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지구를 이해하기 위하여 지구를 여러 가지 요소로 분해하고 이것들마저 다시 작은 단위들로 쪼개어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최소한의 단위를 찾는다. 그리고 이 최소한의 단위를 자립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결국 지구는 스스로 존재하는 개별적인 것들의 집합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이해한다. 지구를 독립적인 여러 부품들이 결합되어 있는 일종의 거대한 기계로 본 것이다. 


그러나 지구는 인체와 마찬가지로 여러 부분들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이 부분들은 자립적인 것이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여 지구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요동치는 유기체이며, 부분들은 상호간에 순환적 인과성(circular causality)을 갖는다. 자전거 타기를 예로 들어보자. 자전거가 왼쪽으로 기울 때 나는 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려 균형을 잡는다. 그러나 그 결과는 내가 왼쪽으로 가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제는 본래의 진행방향으로 가지 위해 나는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손잡이를 계속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으면 다시 본래의 진행방향을 벗어나 오른쪽으로 향하게 된다. 이제 나는 다시금 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려야 한다. 


이러한 현상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깨우쳐야 한다. 나와 자전거는 자전거 타기라는 하나의 운동에서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나는 자전거에 영향을 미치고 자전거는 나에게 다시 영향을 미친다. 결국 나와 자전거 사이에는 상호인과성이 개재해 있는 것이다. 


불교의 연기설 특히 화엄의 상즉(相卽) · 상입(相入)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우주가 거대한 관계의 그물임을 일깨워 준다. <화엄경>은 이러한 점을 단적으로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一卽一切 一切卽一)라고 한다. 또한 <화엄경>은 우리에게 '한 작은 티끌 가운데에 온 우주가 담겨있다(一微塵中含十方)'는 통찰을 제시한다. 이와 같이 화엄사상에서는 어떠한 사물들 사이에도 계층구조가 존재하지 않으며, 중심과 주변이 따로 없다. 세계의 구성요소 사이에 존재론적 단계나 가치론적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갓 미물이라도 세계의 형성과 유지에 필수불가결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한 개체의 태어남은 새로운 우주가 출현하는 것이며, 한 개체의 죽음은 이제까지의 우주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됨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 나아가서는 무기물에 이르는 일체의 존재가 도저히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숭고한 우주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불교의 깊은 통찰과 마주치게 된다. 


몇 해전 체세포 복제 기술을 통해 복제양 '돌리'가 태어났을 때 과학의 성과에 대해 경탄해 마지 않으면서도 그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 또한 매우 컸다. 이제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라 불리는 인간의 유전체 분석 작업도 마무리 단계에 들어왔음이 속속 보고되고 있다. 게놈 프로젝트 즉 유전자 지도의 완성은 유전자 조작을 가능케 하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자연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기술의 긍정적 효과에 대해 무지하지는 않다. 전통과학과 마찬가지로 유전공학은 유전자 치료의 길을 터줌으로써 이제까지 숙명으로 여겨왔던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과학기술의 효용성 밑바닥에 짙게 배어있는 인간중심적(anthropocentric) 사고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또한 이른바 유전자 조작 기술이 무상(無常)의 시간을 한없이 연장코자 하는 인간의 뿌리 깊은 욕망과도 깊이 결합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부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초기불교의 <아함경>은 영원을 좇는 인간 욕망의 위험성을 '칼날에 묻은 꿀'로 표현한다. 꿀의 달콤함에 취하여 칼날이 입안 깊숙이 들어오는 것조차 모르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비유한 말씀이다. 


21세기는 생태중심적(ecocentric) 사고로 전환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불교적 사유가 새로운 과학의 세계관, 모든 생명들이 서로 깊이 의존해 있으며 나아가서는 서로가 서로를 새롭게 만들어간다는 새로운 세계관의 형성에 빛을 던져 줄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업과 윤회의 사상 또한 오래된 숙명론, 신화적 세계관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미래를 창조할 책임이 있고 모든 생명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는 영원한 가르침이다. 갖가지 생명으로 이 세상에 출현하시는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 <본생담>이 이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유전자 조작=인간성 상실" 


윤용택  <제주대 철학과 강사> 


  자기성찰 없이는

  생로병사의 문제

  궁극적 해결 불가능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유전자 조작은 신중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반면에 유전공학자들은 인간의 모든 것을 유전자의 탓으로 돌리지만, 불교에서는 그 모든 것이 業의 산물이라고 본다. 유전자와 업,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한마디로 유전자는 외적인 원인과 결과이지만, 업은 내적인 의지를 조건으로 한다. 따라서 바람직한 유전자를 가지고 바람직한 인간을 만들겠다는 발상은 인간의 주체성과 자유의지를 전면 부정하는 것이 된다. 


물론 유전자 치료법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환자의 질병들을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면 그 방법을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불가피한 유전자 치료를 넘어서 우수한 형질을 가진 인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 유전자 조작을 한다면, 우리는 무어라 할 것인가? 실제로 일부 학자들은 유전자 조작기술들을 人性 치료는 물론 인성 개조에까지 응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수한 형질로 전환하기 위한 유전자 조작은 자칫하면 인간의 자기 노력과 도덕적 책임의 의미를 삭감시킬 위험이 있다. 우수한 형질을 가진 인간으로 만들려는 유전자 조작은 인간을 그 자체의 인격적 가치보다는 도구적·기능적 가치로 보는 것이고, 그것은 곧 인간성 상실의 시작이기도 하다. 


유전자를 조작함으로써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유전자 치료법은 의약품과 수술을 통한 의료행위와 별반 차이가 없다. 따라서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그리고 육신의 고통을 현실적으로 체험하는 한, 그 고통을 덜기 위해 유전자 조작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일시적인 고통을 잠재울 수 있을지 몰라도 궁극적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생로병사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으며, 우리의 마음의 병까지 치유한다는 것은 더욱 기대하기 어렵다. 


인간에 대한 유전자 조작을 함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생명에 대한 신비성이 무너지는 것보다는 인간을 유전자의 종속 변수로 생각함으로써 인간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데 있다. 즉 인간은 자율성을 가진 존재이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사고야말로 인간이 인간다움을 포기하는 것이요, 그로 말미암아 자기모순을 범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유전자는 외적 원인에 불과하다. 내적인 자기 성찰과 자기 수련없이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완전한 즐거움을 얻겠다는 것은 마치 마약의 힘을 빌어 즐거움을 얻겠다는 것과 같다. 인간은 유전자나 환경 같은 외부적 조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조건을 넘어서 자신의 손으로 스스로를 만들어갈 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것도 마약을 사용하는 것과 같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육체에서의 엄청난 고통을 달래기 위해 마약을 최소한도로 사용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납이 되지만, 마약의 남용을 통해 즐거움을 얻겠다는 것은 용납되기 어렵듯이,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선천적인 질병이나 장애를 치료하는 것은 용납될지언정,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우수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도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의 자기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는 불교적 관점과도 어긋나는 것이다. 


하지만 유전자 조작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유전자 조작의 행위 보다는 어떤 정신으로 조작행위를 하느냐에 있다. 불교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하고 역할해야 한다. 불교는 생명의 가치를 밖으로부터가 아닌 스스로가 자신에게 부여해 가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유전자 조작행위 자체가 불교교리에 어긋나는 점을 말하기에 앞서 어떻게 태어나느냐 보다 태어난 개체가 어떤 업을 쌓느냐를 중요시 여기는 불교의 생명관으로 이 문제를 볼 필요가 있다. 복제된 인간이 나온다 하더라도 결국 복제된 그 자신의 현재와 미래도 업에 의해 그 가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현세의 육체적·물질적 행복을 보장해주는 기복에 바탕을 둔 종교는 점점 더 설득력이 없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기술로도 얼마든지 육체적·물질적 고통은 해결이 가능하고 행복 또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시대에서 종교의 역할은 과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즉 우주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왜·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등과 같은 물음에 답을 제시하는 것이고, 육체가 아닌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라야 한다. 

17. 최초인간의 유래와 사회의 형성 


 이 세상 최초의 사람은 색계 제2선천 光音天(광음천)의 중생이 福(복)이 다하고 壽命(수명) 다한 사람이 내려오게 되었다.

광음천 중생들은 말이 없이도 몸에서 발하는 광명으로 의사 소통을 했고 몸에서 스스로 광명도 내고 신통력이 있어 자유로이 날아 다녔다. 음식을 생각만 하면 배가 부르고 시장한 줄 모르고 살았다. 그런데 이 땅에 내려와 오랜 세월이 지나자 이 땅에서 샘이 솟았다. 이를 甘泉(감천)이라 했는데 우유

같기도 하고 꿀 같기도 하여 맛이 매우 달았다. 그 때 중생들은 이 감천이 매우 맛이 좋으므로 두 손으로 움켜쥐고 퍼마시곤 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로 인하여 중생들의 몸은 거칠어지고 몸이 굳어져 천상에서의 아름답고 미묘하던 형색을 점차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몸에서 나던 광명은 줄어

들고 감천을 조금만 먹은 사람은 아직도 날아다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너무 많이 먹은 사람은 날아다니는 능력을 잃게 되어 땅 위를 걷게 되었다.


그 후 이들이 서로 不睦(불목)하고 다투고 탐심을 내면서부터 저절로 감천은 사라지고 地肥(지비)가 생겨났다. 이 地肥(지비)도 역시 빛깔도 곱고 맛도 좋으며 향기로와 먹을 만하였다. 그리하여 중생들은 이 것을 먹고살았다. 지비를 먹고사는 동안 중생들은 또 다투게 되었다. 이들의 마음이 거칠어지

자 지비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지비가 없어지자 새로운 식량이 생겨났는데 이를 婆螺(파라)라고 하는데 의역하여 粗厚地肥(추/조후지비)라고 하였다. 이것도 먹을 만 하고 향기로와 맛이 좋았다. 중생들은 이것을 먹으며 살다가, 서로 밀치며 다툼을 일으켰고 끝내는 파라마저도 나지 않게 되었다.


그 후 自然硬米(자연경미)가 생겨났는데 이는 겉 껍질이 없는 쌀로써 아침에 베어다 먹고나면 낮 동안 또 자라서 저녁에 또다시 베어다 먹었다. 이 자연경미를 먹으면서부터 사람의 모습이 달라지게 되었는데 어떤 중생은 남자 형상이 되고 어떤 중생은 여자 형상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惡衆生(악중생)이 생겨났다고 말하면서 서로 살피고 쳐다보는 사이에 마음이 물들고 번뇌를 일으켜 마침내는 애착심을 일으켜 性慾(성욕)이 생기게 되었다. 이윽고 부정행을 저지르니 다른 중생들이 그를 크게 꾸짖어 다른 지방으로 3개월 동안 귀향을 보냈다.


그리하여 부정행을 한 여인이 음식을 가져다주니 妻(처)라는 말이 생겨났다. 머지않아 부정행을 저지른 자가 많이 생겨남에 따라 어떤 사람이 집을 지어 남모르게 부정행을 함에 따라 집이 있게 되었다. 이윽고 부부가 생기고 수명과 복이 다한 중생이 전에 하던 습관으로 어머니의 태중에 들어 세간에 태어나게 되니 이것이 人間 胎生(인간 태생)의 시초가 된다. 그 때 사람들은 自然硬米(자연경미)가 아침에 거두어도 저녁에 익고, 저녁에 거두어도 아침에 익어 베는 대로 다시 났지만 어떤 사람이 생각하길 하루에 두번씩 꼬박꼬박 베어다 먹으려니 귀찮다는 생각이 들어 생각해 낸 것이 저장해 두고 먹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투어 이러하니 어떤 사람은 자기 몫을 차지하지 못하게 되었고 자연경미는 문득 겉껍질을 내게 되었고 나중에는 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생들은 서로 상의하여 井(정)자 모양으로 밭의 경계를 나누게 되었다. 그 뒤 그들은 자기 밭의 쌀을 놔두고 남의 밭 곡식을 훔쳐먹는 사람이 생겼다. 그러한 행위들은 날로 심해져서 나중에는 누구나 가릴 것없이 훔치게 되자 여러 사람들은 고뇌하고 슬피 울며 가슴을 치면서 말했다. " 세상은 자꾸 악해 가니 田宅(전택)의 경계를 달리하기 때문에 다툼이 생기고 원수를 만들지만 능히 이를 지켜 주고 판결할 사람이 없다. 우리들은 이제 평등한 주민을 세워 인민을 보호하면서, 선을 상주고 악을 벌하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들은 각각의 소유에서 조금씩 거둬 그분에게 공급하자 " 여기에서 비로소 "백성"과 "왕"이라는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 후로 백성의 주인인 왕에게 아들이 생겼는데 그를 '진보'라 하였다. 그 후 진보왕의 자손이 29대 선사왕에 이르렀고, 선사왕에 10족이 있었는데 수많은 대를 거쳐 사자협왕에 이르렀다. 사자협왕에게 4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이 淨飯(정반)이었다. 그의 아들이 바로 싣달다였다. 그 싯달다에게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라훌라이다.


<아함부 세기경 본연품>

18. 동양 속의 우주


(1) 동양 속의 우주


   1. 중국 신화(반고의 천지 창조)


우주의 기원에 관한 관심은 본질적으로 형이상학적의 범주에 속한다. 거친 자연 속에 내던져진 인간들에게 있어서 가장 원초적 의문은 자연과 우주의 근원에 대 한 의문이었다. 그것을 체계화하고 논리화해온 노력이 철학과 종교의 근본 과제 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에 관한 논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형태를 크 게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는 우주 전변설 宇宙轉變說 이다. 즉, 태초에 어떤 절대자 혹은 근원적 힘에 의하여 우주가 생성 · 유지된다는 생각이다. 기독교의 천지 창조론 같은 것 이 대표적 실례이지만, 중국 신화, 한국신화 등에서도 주류를 이루는 사고경향이다.


  둘째는 적취설 積聚說 이다. 이를테면 다 多 에서 다가 생성되었다는 입장이다. 본래부터 우주는 혼돈의 상태였고, 혼돈이 가라앉으면서 많은 존재들이 저절로 생겨났다는 주장이다.


  셋째는 인연설 因緣說 이다. 태초의 절대자에 대한 주장은 억지 논리에 불과하다는 반성에서부터 출발한다. 사물의 생성과 소멸에는 필연적인 인과 因果가 상 존하며, 그 인연의 실타래가 바로 우주의 비밀이라는 입장이다. 불교 같은 종교가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세가지 입장은 각자의 선명한 논리 구조와 함께, 치명적인 모 순성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해겔이 말한 대로 인간, 그 자체가 이미 모순이다. 이성 자체에도 모순이 깃들어 있으며, 생명의 기원 또한 논리적이지는 않은 것이다. 따라서 어느 쪽이 더 논리적이냐 하는 논쟁은 무의미하다. 다만 우주의 생성에 대한 인간 사색의 흔적을 더듬어 보는 일로 만족할 따름이다. 동양인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사색의 흔적은 이미 기원전 10여 세기로 부터 비롯된다. 이 글에서는 불교의 우주관을 중심으로 인도와 중국의 경우에 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중국의 천지 창조 신화는 다양한 장르를 갖고 전개된다. 전변설의 가장 대표격으로는 반고 盤古 신화가 꼽힐 수 있고, 주자학의 경우에는 역 易 의 세계관을 들 수 있다.


반고 신화에 의하면 천지가 개벽하기 이전의 우주는 달걀 속 같았다. 달걀 껍질에 꽉막힌 우주는 칠흙같은 어두움과 혼돈에 휩싸인 이른바 카오스의 상태였다. 반고는 이 달걀 같은 우주 속에서 무의식의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가 무의식의 상태에 있은지 1만 8000년, 드디어 그는 잠에서 깨어난다. 그는 곧 숨이 막히고 답답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고, 그 공포와 절망을 이기지 못해서 달걀 껍질을 깨버렸다. 온 우주가 진동하면서 굉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이 상황 속에서 우주의 청명한 정기는 하늘로 훨훨 날고 있었다. 한편 혼탁한 물체들은 아래로 처져내려 갔다. 하늘과 땅이 갈라졌지만, 반고는 이 둘이 서로 엉킬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반고는 머리로 하늘을 이고 땅을 두 발로 눌렀다. 반고는 우주가 다시 혼돈과 암흑에 휩싸이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였다. 위대한 천지 창조자인 반고는 그 거대한 몸을 눕혔다.


그는 죽은 것이다. 그의 육신은 죽어서도 썩지 않았다. 반고의 입김은 바람과 구름이 되었다. 그의 목소리는 뇌성으로 변했다. 왼쪽 눈은 태양으로, 오른쪽 눈은 달로 변하여 세상을 밝게 비추었다. 온 몸은 대지를 둘러싸고, 그의 손발은 대지의 네 극이며, 다섯 개의 명산이 되었다. 혈맥은 하천으로 변하여 흘렀고, 근육은 사방을 연결하는 도로가 되었다. 살은 기름진 옥토로 변하고, 머리털이나 수염은 하늘의 별이 되었다. 피부의 털은 화초와 수목으로 피어났고, 치아나 뼈는 오색 영롱한 금은 보석으로 바뀌었다. 땀방울은 비와 이슬이 되어 대지를 적신다. 반고는 죽어서도 온 세상을 풍요롭게 하였고, 아름답게 보살펴주었던 것이다.[ 중국 신화의 모티브는 Tien(天) 에 대한 외경 畏敬 이다. 이외에도 <<회남자>>, <<장자>> 등에 나타나는 천지 창조설도 같은 맥락이다. 김열규,<<동양의신들>>(한국능력개발사,1978),pp.208-210 ]


  2.인도의 신화(Tad Ekam의 변형)


태초에는 무 無 도 없고 유 有 도 없고, 공계 空界 도 없고, 또한 天界도 없었다. 무엇이 이를 뒤덮었던가? 그것은 어디에 있었던가? 누가 이를 옹호했던가? 저 물은 어떻게 있었으며, 밑없는 깊이는 어떻게 있었던가? 그때에는 죽음 도 없고 불사 不死/Amrta 도 없었으며, 낮과 밤의 구별도 없었다. 오직 타드 에캄 Tad Ekam/that Oneness/彼唯一者 만이 소리도 없이 스스로 호흡하고 있었으며, 그 밖에는 일찍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암흑뿐이었다. 이 모든 것은 암흑에 뒤덮힌 빛 없는 파동계 波動界 였다.


허공으로 둘러싸인 원자 原子 /Abhu는 그 자신의 열 熱 의 힘으로 태어났다. 그것이 전개되어 처음으로 애욕 愛慾/Kama 이 생겼고, 이것은 식 識의 최초의 종자였다. 실로 누가 이를 알리오. 누가 지금 여기서 이를 설명할 수 있으리오. 그는 어디로부터 생겨나왔으며, 어디로부터 이 조화가 나오는가? 여러 신들도 천지 창조 이후에 생겨났으며, 그렇다면 그 어디로부터 생겨났는지를 아는 자는 누구냐? 그는 알리라. 이 조화의 원천을 아는 사람은 최고천 最高天 에서 이 세계를 관장하고 있다. 그는 진실로 알리라. 그러나 아마 그도 또한 모르리라. [<<리그베다>>, Nasadasiya Sukha, X,129.pp.1-6;졸저,<<인도철학사상사>>(경서원,1980),pp.20-21. 이 신화의 패턴은 근원적 세계 원리의 모색이며 Tad Ekam->Kama->Manas라는 도식을 나타낸다.]


즉, 유일자에서 천지 창조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설명인데, 인도 신화에서 보이는 절대자는 이외에도 원인 原人/Puraush, 도 道/Rta, 시간 時間/Kala 등이 있다. 특히 제일 마지막 구절에 보이는 절대자에 대한 회의 懷疑 가 관심을 끈다. 불교학자들은 이를 유일신교에서 범신론 汎神論에 이르는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사상을 보다 세련되게 다듬은 것이 우달라카 Uddalaka의 존재론이다. 그는 우파니샤드 Upanisad에 등장하는 철인 哲人인데, 우주 창조의 근원을 사트 Sat라고 설명하였다.


즉, 태초에 우주에는 사트만이 존재하였다. 이 사트는 스스로 생각하였다. 내가 많아지리라. 번식하리라고. 그는 불 Tapas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그 불은 물 Apas을 만들었다. 어디에서나 고열 苦熱을 느끼면 사람이 땀을 흘리는 것이 그 까닭이다. 그때에 불로 말미암아 물이 생긴다고 했다. 그 물은 곡식을 만들어냈다. 이때 사트는 다시 생각했다. 내가 아트만 Atman으로서 지 地, 수 水, 화 火, 풍 風 속에 들어가 명색 名色/Namarupa을 전개하리라. 결국 만유 萬有 는 지,수,화의 삼대 요소로 구성되었으며, 그 세가지 요소가 사물을 전개시킨다. 사트는 만물을 만들었지만, 다시 그 안에 용해됨으로써 사물은 신 자체가 된다.


이 신화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사트의 존재 변화 이유이다. 즉, 천지 창조의 절대자가 완전무결하다면, 왜 불완전한 세계를 만들었으냐하는 의문이 제기 될 수 밖에 없다. 언제나 그 해명은 궁색하기 마련인데, 이곳에서는 내가 많아 지리라. 번식하리라는 의지로 해석하고 있다. 또 그것이 애욕이 근본이라는 부연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불교는 이와 같은 가설 假說을 모두 부정한다. 즉, 절대자에 대한 천지 창조설과 본래 사물이 존재했다는 주장을 부정하면서 인연설이라는 새로운 우주론을 펼쳐 나가게 되는 것이다.

(2) 불교에서 본 세계 ·자연 ·우주


   1. 우주의 생성과 소멸


앞서 살핀 중국이나 인도 신화의 경우와 비교할 때, 불교의 우주론은 선명하게 설명되고 있지 않다. 팔만대장경의 방대한 가르침 속에서도 분명하게 불교적 우주론을 설명하는 경전은 많지 않다. 간혹 있다 하더라도 상당히 관념적이고 애매모호하다. 그 까닭은 불교가 이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관여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석가세존은 삶의 목표를 깨달음으로 선언하였다. 그리고 우주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그 깨달음의 완성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 경전들 속에 나타난 불교적 우주론을 정리하여 이해하는 도리밖에는 없다. 불교의 우주적 신화론을 나타내는 경전들로서는 <<세기 경 世紀經>>,<<대방광불화엄경 大方廣佛華嚴經>> 등을 꼽을 수 있다.


불교에서는 우주의 기원을 업 業으로 설명한다. 카르마 Karma라는 인도 말을 옮긴 것인데, 그것은 행위 자체, 또 행위로부터 빚어지는 갖가지 과보 果報 들을 의미하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생명 있는 것들을 총칭하여 중생이라고 하는데, 그 중생들의 생성 소멸은 업에 의하여 주도된다고 설명한다. 업 가운데 가장 근원적인 것은 무명업 無明業/Avidya 이다. 사물을 명료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늘 이기적으로 판단하게 하는 근본이다. 이 무명업으로부터 갖가지 번뇌가 생기고, 이 번뇌들의 집합이 또 다른 생존 형태를 결정짓는다. 이것을 윤회 Samsara라고 말한다.


업과 윤회는 전생 前生, 금생 今生, 후생 後生의 삼생 三 生을 관통하는 광폭한 힘이다. 이 경우 무명업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닭과 달걀의 관계와 마찬가지다. 만약 어떤 근본이 있어서 다른 것을 생성한다는 수직적 사고를 갖는 한, 이것은 결코 설명될 수 없다. 닭과 달걀은 어느 것이 먼저 생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닭이 있으려면 달걀이 있어야 하고, 달걀이 있으려면 닭이 있어야 한다. 그 둘은 서로의 필요성, 즉 인연에 의하여 생겨난 것일 따름이다. 따라서 무명업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느냐 하는 물음은 이미 인과론적 사고에서 벗어난 견해일 따름이다. [불교의 인과론을 생사의 윤회 유전 관계로 설명한 것을 십이연기 十二 緣起라 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무명업의 최초 생성에 관해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무명처럼 노사 老死까지 이르는 열두 단계는 다만 둥근 원의 순환 관계처럼 서로 얽혀 있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업보의 전개가 바로 우주요, 자연이며, 삼라만상이다. 불교에서는 이 업보의 전개로서 누릴 수 있는 생명 형태를 여섯 갈래라고 설명한다.

  지옥 : 가장 고통받는 삶의 형태.

  아귀 : 굶주림에 시달려야 하는 생존 형태.

  축생 : 짐승들의 세계, 난폭하고 이성적이지 못한 삶.

  수라 : 폭력만이 존재하는 생존 형태.

  인 : 인간들의 삶.

  천 : 하늘나라의 신적인 존재. 이별의 아픔이 남는 세계.

위의 셋을 삼악도 三惡道, 밑의 셋을 삼선도 三善道라 하며, 통틀어 육도윤회 六道輪廻라 말한다.

태초의 우주에는 중생들의 업력 業力이 있었다. 그에 따라 허공에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풍륜 風輪이 생긴다. 이 풍륜 위에 구름이 일어나며, 또 다시 수륜 水 輪이 생긴다. 이 수륜 위에 다시 바람이 일어나 금륜 金輪을 생기게 한다. 금륜 위에 수미산이 솟고, 이것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일곱 산이 생긴다. 이들 산과 산 사이에 물이 고여 여덟 바다가 생기는데 수미산 부근의 일곱 산 사이에 생긴 바다를 내해 內海라고 하며, 그들과 바깥 세계와의 사이에 생긴 바다를 外海라고 한다. 이 외해 속에 사대주 四大洲가 있어서 수미산의 동서남북에 위치 한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계(지구)는 수미산의 남쪽 섬부주 贍部洲이다. 우주의 중앙에 있는 수미산은 절반이 물에 잠겨 있고, 그 위가 지상으로 솟아 있는데, 해와 달, 별들이 수미산을 싸고 허공을 맴돈다.


중생들이 모여 사는 세계는 수미산의 남쪽 섬부주이지만, 그 중턱에서부터 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중생의 경계는 크게 욕계 欲界, 색계 色界, 무색계 無色界의 삼계 三界로 나뉜다. 욕계는 욕심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즉, 소유욕으로 파탄이 빚어지고, 희로애락이 상존하는 바, 그 정도에 따라 앞서 말한 육도 윤회가 있게 된다. 욕계 다음의 세계가 색계이다. 욕심은 멸하였지만 물질 은 남아 있다. 즉, 소멸에 따른 고통은 감수해야 하는 세계이다. 색계는 크게 나누면 사선천 四禪天이지만, 세분하면 십팔천 十八天이 된다. 마지막의 세계를 무색계라고 한다. 물질마저도 버렸지만, 관념만은 남아 있는 세계 이다. 즉, 관념적인 아픔, 사랑 등이 남아 있는 세계이다. 이도 세분하면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다음에 이들 세계가 생성 소멸하는 시간적 단위에 대해서 살펴본다. 우주는 성 成, 주 住, 괴 壞, 공 空 의 네 가지 단계를 반복한다. 그 네 기간의 단위는 겁 劫 이다. 이 겁은 칼파 Kalpa 라는 시간 단위로서 무한한 시간 개념이다. 앞서 말한 우주와 수미산의 생선 기간을 成劫 이라고 한다. 다음에 주겁 住劫 이라는 시대가 온다. 세계는 큰 변동이 없지만 중생들의 과보에는 많은 변화가 있다. 초기의 중생들은 형색이 아름답고 빛을 내며, 하늘을 날 수도 있고 수명도 장구한다. 그러나 좋은 음식, 맛에 탐착함으로써 차츰 몸이 더러워진다. 우선 남녀의 성별이 생겨나고, 갖가지 이기적 욕심 때문에 싸움이 벌어진다. 할 수 없이 그것을 다스리기 위해 국왕을 뽑게 되고 형벌이 제정된다.


그러나 중생의 악업은 더욱 무거워지고, 동시에 수명이 짧아져서 마침내 10세에 머물게 된다. 삼재 三災 의 괴로움이 닥칠 때, 드디어 중생들은 반성하기 시작하여 다시 선행을 행하게 된다. 동시에 수명도 증가하여 8만 세에 이르러 풍요로운 사회가 된다. 그러나 또다시 욕심과 악업이 성해지면서 수명이 10세로 감소된다. 인간 수명은 이와 같이 증감을 반복하는데, 그 횟수는 17번이나 된다. 그 다음에 오는 시기가 괴겁 壞劫 이다. 중생들의 파멸이 시작되는 시기인데, 그 순서는 지옥부터이다. 지하에서 차례로 파괴되어 끝내 천상이 무너진다. 그 이후 화,수,풍의 삼재가 발생하여 풍륜으로부터 색계 제 3천에 이르는 영역이 모조리 파괴된다. 이 괴겁이 지나면 공겁 空劫 이 온다. 이것은 오직 허공 만이 존재하는 시기이다. 공겁의 다음에는 또다시 중생들의 업력에 의하여 성, 주, 괴, 공이 반복적으로 된다는 것이다. 즉, 우주는 끝없는 생성,소멸이 반복되는 과정이며, 공간적으로 보면 그 중심은 수미산의 중턱이라는 것이다. 괴겁의 단게를 오탁 五濁/Panca-Kasaya 이라고도 한다. 즉, 수명뿐만이 아니고, 갖가지의 좋지 못한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① 명탁 命濁 : 중생들의 평균 수명이 줄어든다.

  ② 겁탁 劫濁 : 자연 파괴가 가속화된다.

  ③ 번뇌탁 煩惱濁 : 쾌락주의, 도덕적 문란이 팽배해진다.

  ④ 견탁 見濁 : 고행과 형식주의가 예찬되며, 종교 집회가 대형화한다.

  ⑤ 중생탁 衆生濁 : 중생들의 능력이 평균치보다 저하된다.


이것이 불교적 말세 의식을 이루게 되지만, 또 다른 생성의 희망을 갖는다는 면에서 여전히 낙천적 우주관이라고 볼 수 있다.


  2. 수미산

수미산은 인도어 수메루 Sumeru의 음역이다. 전체 높이를 16만 유순이라고 했는데, 1유순을 약 7킬로미터로 본다면 112만 킬로미터에 해당한다. 그 중 절반은 바다 속에 잠겨 있고, 8만 유순 정도가 지상으로 솟아 있다. 앞서 말한 중생 들의 경계를 수미산의 공간 배치대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즉, 먼저 범천 梵天(색계의 가장 아래에 위치)이 하생하고, 계속해서 욕계 육천에 해당하는 타화자재천 他化自在天, 화락천 化樂天, 도솔천, 야마천 夜摩天이 화생하는데, 여기까지가 수미산의 윗부분이며, 중생들의 입장에서는 하늘나라이다. 다음에 수미산의 중턱 부분인데, 이곳에는 도리천, 사왕천 四王天 등이 위치한다. 인간이 사는 곳은 그 제일 밑부분으로서 이른바 사대주 四大洲 이다.


축생의 경우에는 바다에 생겨나는데, 혹은 육지나 허공을 맴돌기도 한다. 악귀는 그 밑으로서 염마왕국이 그 본거지이나 역시 떠돌아다닌다. 그 밑이 지옥취로서, 지옥을 맴도는 중생들이다. 그 밖에도 아수라가 있는데, 이들은 일정한 거처가 없다. 그저 수미산 주변을 맴돌면서 천상의 도리천과 항상 싸움을 일으킨다. 이렇게 해서 육도의 중생들이 각기 수미산 기슭을 근거로 하여 태어나고 사라지는데, 그 전체의 기간은 20소겁 小劫쯤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은 이와 같은 세계를 초월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관념은 고대의 인도인들이나 불교인들에게 있어서는 고통스러운 생명의 연장일 뿐이라는 상념에 젓게 하는 것이다. 즉, 윤회의 가치관을 가진 불교인들에게 있어서는 태어남의 사실 자체가 고통으로 인식되는 독특한 내세관을 갖게 한다.


  3. 삼계

삼게 三界는 고뇌다. 성난 불과 같이, 골짜기의 메아리, 환각의 물거품과 같으니라. 여래는 삼계를 초월하는 열반의 법을 설하노라(<<방광장엄경 方廣莊嚴 經>> 중에서 필자 초역). 우주를 삼계로 인식하는 것은 고대 인도인들의 공통된 사고 방식이다. 즉, 우주를 하늘, 허공, 대지의 삼계로 구분하고, 그 각각의 세계에 신이 살고 있다고 믿은 것이다. 불교 또한 이와 같은 사고를 답습하지만, 그 개념은 판이하다. 우선 신에 대한 불교의 입장은 매우 비판적이다. 인도 신화에서의 신은 서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절대자이면서 동시에 인격적이다. 즉, 신성 神性과 인간성을 공유하는 신적 존재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예컨대 인도의 신은 불사 不死, 영원의 존재이다. 또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며, 인간들의 찬양에 귀기울인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신적인 존재 또한 육도 윤회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보다는 행복하지만, 그 역시 죽음의 고통을 피할길 없는 불 완전한 존재로 보고 있다. 따라서 하늘나라 또한 욕계 육천 欲界六天의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신이 거의 모두 인도 신화에 연원을 갖고 있음을 분명하다. 불교의 호법신인 제석천 帝釋天은 인드라 Indra의 변형이다.


인도 신화에서 뇌성벽력의 주재자인 인드라가 불교로 수용되면서 선신 善神이 된다. 또 관세음보살은 루드라 Rudra의 변형이다. 원래 태풍의 신이었으나 나중에 가축 증식의 신격으로 바뀌었다. 루드라가 불교에서는 자비의 화신으로 변형된 것이다. 심지어는 삼신불 三身佛의 주체인 법신불 法身佛/Vairocana 또한 우파 니샤드에 나오는 변자재신 /Virocana의 변형이다. 불교는 이와 같이 인도의 신격을 계승하면서도 독특한 자기화의 과정을 겪으면서도 모든 신을 수용하는 것 이다.


이 삼계에 대한 소박한 믿음도 불교 고유의 것이라기보다는 인도적 염원을 답습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이 삼계는 허공, 하늘,대지 따위의 즉물적 구분이 아니라 매우 섬세한 철학적 구분이다. 욕계 육천 가운데 가장 낮은 것이 사왕천이고, 가장 높은 것은 타화자재천이다. 그런데 이 욕심의 세계를 섹스와 관련하여 설명하면 인간 의식의 단계를 어느 정도 선명하게 짐작할 수 있다. 즉, 사왕천에서는 남녀가 서로를 소유해야만 만족한다. 성교라는 구체적 행위를 통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위의 하늘인 야마천계에서는 포옹 정도로 만족한다. 그 이상의 구체적 행위가 없이도 서로의 사랑이 확인된다. 그 위의 하늘은 도솔천인데, 이곳에서는 서로가 손을 잡는 행위로 만족한다. 그위의 하늘이 낙변화천인데, 멀리서 마주보면서 만족하는 세계이다. 마지막의 타화자재천에서는 영상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세계이다. 여기까지는 욕계의 사랑이지만, 색계,무색계로 올라갈 때 그 승화 昇華의 단계를 짐작 할 수 있다. 욕계가 소유의 사랑이었다면 색계는 소유하지 않는, 철저한 관념의 사랑이다. 반면 무색계는 관념마저 초월하는 사랑이다. 흔히 사랑의 단계를 에로스니, 아가페니 하는 구분으로 이해하지만, 이 삼계 속에 나타나는 불교적 사랑관은 퍽 흥미로운 대비라고 생각한다.


  4. 삼천대천 세계

성,주,괴,공을 되풀이하는 세계를 우리는 지구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주속에는 실로 무한한 세계가 상존한다. 서로 다른 1천 세계를 합해서 1소천 小千 세계라고 한다. 이 1소천 세계를 1000배 한 것을 1중천 中千 세계라고 한다. 이 1중천 세계를 다시 1000배 한 것을 1대천 大千 세계라고 한다. 이 소천,중천,대천세계를 통틀어서 삼천대천 三千大千 세계라고 한다. 이것을 한 부처님이 통솔하는 세계라고 보고, 또 다시 백천만억 부처님이라는 표현을 하기 때문에 실로 세계를 무량,무변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마치 허공의 먼지처럼,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처럼, 광대 무변한 세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의 세계관을 말할 때, 우리는 무한의 세계관 이라는 단서를 붙이지 않을 수 없다.


사다카타 아키라는 이 소천을 은하계에 비유했는데, 그것은 적절한 대비이다. 1000의 1000배를 중천 세계로 보고, 그 100만의 세게에 대한 1000배, 즉 10억의 세계를 대천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관념을 우주속에 있는 모든 생명들의 세계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60억 가까운 인간들이 모여 살지만, 서로 얼굴을 맞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은 생활의 터전, 언어의 장벽, 즉 서로의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또 짐승, 미생물의 세계로까지 생각을 확대시켜 나간다면, 가히 그 세계는 사량 思量할 수 없는 무한으로 치닫고 만다. 삼천대천 세계는 바로 그 점을 상징하고 있으며, 그 은유를 갖가지 방편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3) 극락과 지옥


   1. 팔열지옥 팔한지옥  


지옥은 나라카 Naraka의 의역이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구사론 俱舍論>>이라 는 논서에 이에 대한 설명이 있다. 지옥은 지하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며 극악한 죄를 저지른 이들이 고통을 받는 곳이라고 설명된다. 가장 고통받는 곳을 무간 지옥 Avici 이라고 하며, 그 위로 팔열지옥 八熱地獄이 있다.

① 등활 等活 지옥 (Samjiva)  ② 흑승 黑繩 지옥 (Kalasutra)  ③ 중합 衆合 지옥 (samghata)  ④ 호규 號叫 지옥 (Raurava)  ⑤ 대규 大叫 지옥 (Maharaurava)  ⑥ 염열 炎熱 지옥 (Tapans)  ⑦ 대열 大熱 지옥 (Pratapans)  ⑧ 무간 無間 지옥 (Avici) 


이들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의 질에 관해서는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주로 인간 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옥한 방법에 의해 고통을 받는다고 설명된다. 더욱 기막힌 점은 고통의 끝이 결코 죽음이리나는 안식 安息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이곳에서는 또다시 태어나고 고통을 받는 일이 무수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또 이들 지옥에 떨어지는 업을 짓는 이들에 대해서도 상세한 언급이 있으나 이 곳에서는 생략한다. [보다 상세한 논급으로는 E.Conze 編, 졸역, <<불교의 성 전>>(고려원,1985)및 대장경 가운데 <<정법념처경 正法念處經>>, 원신 源信의 <<왕생요집 往生要集>>등을 참조할 것.]

이들 지옥은 모두 여덟이지만, 한 지옥마다 네 개의 별도로 열려진 문을 갖고 있다. 이 하나의 문마다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부 副 지옥이 있기 때문에 결국 여덟 지옥은 128개의 부지옥을 가진다는 말이다.

① 당외 唐畏 부지옥  ② 시분 屍糞 부지옥  ③ 봉인 鋒刃 부지옥  ④ 열하 熱河 부지옥 


① 에서는 뜨거운 재 속을 걷게 되고, ② 에서는 시체와 똥의 수렁에 빠지며 구 더기에게 골수가 빨리게 된다. ③ 에서는 칼날이 무성한 길을 걸으면서 온몸이 찢기우고, ④ 는 끓어오르는 탕 속에 던져진다. 그 다음에 설명되는 지옥이 팔한지옥 八寒地獄 이다.

① 아부다 지옥 (Arbuda)  ② 니라부다 지옥 (Nirabuda)  ③ 아타타 지옥 (Atata)  ④ 하하바 지옥 (Hahava)  ⑤ 후후바 지옥 (Huhuva)  ⑥ 우팔라 지옥 (Utpala)  ⑦ 파드마 지옥 (Padma)  ⑧ 마하파드마 지옥 (Mahapadma) 


위의 팔한지옥은 팔열지옥과 달리 끝없는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지옥을 말한다. [Atata,Hahava,Huhuva 등은 모두 의성어이다. 즉, 인도어에서 고통받거나, 괴로움 때문에 내는 비명, 신음 소리를 지옥의 이름으로 설정한 것이다. 첫 번째의 Arbuda는 원래 천연두란 의미이고, 두번째의 Nirabuda는 부스럼이 생겨서 온 몸이 짓무리는 일종의 문둥병 같은 병을 가리킨다. 이 모든 고통들이 추위로서 생긴다는 의미에서, 이 팔한지옥은 그대로 병명이나 고통 소리를 명칭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 말하는 지오근 팔열지옥과 128개의 부지옥, 그리고 팔한지옥을 합쳐 도합 144지옥이 된다. 그러나 앞서 말한 <<구사론>>에서는 이것에 덧붙여서 외로운 지옥을 말하고 있다. 이 지옥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지만, 강,산,들,지하 등에 산재해 있다고 하였다. 짐작건데 다른 이와 함께 겪는 고통이 아니라, 혼자만이 당해야 하는 각종 압박이나 스트레스 등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듯하다. 이것을 합할 경우에는 모두 145개의 지옥이 되는 셈이다. 


  2. 정토의 세계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 세계는 극락 혹은 정토 淨土로 불린다. 가장 기쁜 곳이 라는 의미에서 수카바티 Sukhavati, 즉 극락이라고 한다. 이에 관한 언급으로 << 아미타경 >> 등이 있는데, 대체로 그 세계를 묘사하면 다음과 같다. 


극락에는 일곱 겹의 난간, 구슬로 장식된 그물, 일곱 겹의 가로수가 있다. 그 곳의 중앙에는 연못이 있는데, 금,은,유리,수정이 네 가지 보물로 장식되어 있다. 하늘에서는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하루 종일 만다라꽃 Mandarava 이 하늘 거리며 대지에 흩날릴 때면 황금빛 지면에 수북이 쌓인다. 이 정토의 중생들은 매일 아침 옷을 단정하게 입고, 꽃대바구니에 이 꽃들을 담아서 다른 세계의 10 만억 부처님이 계시는 곳으로 가서 공양한다. 


식사는 하루 한 끼인데, 식사 후 에는 산책을 즐긴다. 또 극락에는 아름다운 새들이 무수한데, 그 가운데서도 가릉빈가 迦陵頻伽/Kalavinka가 가장 아름답다. 이 새들의 소리는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데, 중생들은 이 소리를 듣고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생각하게 된다. 또 산들바람이 불어오면, 네 가지 보배로 장식된 가로수나 구슬로 장식된 그물들이 기묘한 소리를 내는데, 그것은 아름다운 교향곡과도 같다. 이 나라에는 아미타 Amita 라고 부르는 부처님이 계신다. 그는 한량 없는 목숨 을 지닌 분으로서 언제나 이곳을 염원하는 이들의 지주 支柱가 된다. 또 그는 협시보살로서 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이 계신다. 만약 이 나라에 태어나고자 한다면 염불만이 첩경이다. 즉, 지심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염하게 되면 임종시에 아미타불이 그를 영접하여 이 정토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정토왕생의 염불비원 念佛悲願 이라고 한다. 정토사상은 대승불교의 중,후기에 생겨난 사상이다. 즉, 초기의 불교에서는 지옥에 대한 설명은 장황했지만 내세관은 괄목한 만한 것이 적었다. 대승불교로 넘어오면서 확고한 내세관이 나타나는 바 그것이 바로 정토사상이다. 정토 신앙은 민중적 보편성과 함께 왕생의 인연이 비교적 단순하다는 면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는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신라의 삼국통일 직후부터 유행하였고, 근자에 이르기까지 가장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는 사상 형태이다. 그러나 고려 말엽에 선종이 유행하면서 이 정토에 대한 관념은 조금씩 변형된다. 


<<유마경>>의 가름침대로 마음이 맑아야 정토가 맑아진다는 대승적 해석이 유행하게 된다. 선가에서는 이 정토를 어떤 실재적이고, 구상적인 세계로 파악하는 일을 거부한다. 심지어 속조혜능은 십 만 팔천리를 지나야 정토가 있다는 경전의 가르침을 우리 몸 안에 있는 십악팔사라고까지 설명한다. 즉, 정토에 왕생하려면 염불의 공덕 때문이 아니라 마음을 맑게 갖는 수련 생활이 필요함을 역설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정토사상은 고도의 철학성을 갖춘 자력과 타력의 조화로서 이해되기도 한다. 단순히 서방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타력 신앙의 자세가 아니라, 내 몸을 닦는 자력 의지가 선행해야 한다는 논리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 극락과 지옥에 대한 논의는 거의 대부분의 불교 사상가들에 의해서 상징과 은유로 이해되어 왔다. 즉, 민중들의 도덕성 제고를 위한 시청각적 의미가 강하다고 인식되었던 것이다. 


  IV. 남기는 말

신화의 세계는 상징 symbol'이다. 특히 종교의 우주관에서는 절제된 은유 속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불교는 지금부터 2600여 년 전의 가르침이다. 가학적 지식이나 인지의 발달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격세 지감이 든다. 따라서 불교적 우주관을 절대시하고 권위를 부여하는 일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속에 담긴 상징성에 천착하는 자세가 필요하리라고 본다. 불교의 우주관은 석가를 중심으로 한 고대 불교인들의 우주의 상상력 이다. 물론 그 가운데는 다소 황당무계한 내용도 있고, 놀랄 만큼 과학적 토대가 갖추어진 상황 설명도 있다. 그러나 전체를 흐르는 맥락은 업과 윤회라는 등식이다. 또 이 윤회가 영겁회귀로서 반복된다는 주장이다.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우주를 주재하는 힘의 근원을 결코 인격적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불교적 용어로는 다르마 Dharma 가 바로 그것이다. 섭리, 질서, 원리, 진리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다르마야말로 우주를 관통하는 근원적 힘이다. 그러나 다르마는 비인격적일뿐 아니라 초인격적이다. 이 궁극적 원천을 불교에서 는 일심, 진여, 법계, 여여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우주의 기원과 소멸에 대한 불교의 견해는 매우 낙관적이다. 불교에도 종말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법, 상법, 말법 등의 시대 구분이 불교적 종말론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종말을 영원한 파멸로 이해하지 않는다. 종말의 끝은 새로운 출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법 중생들에 대한 경종의 의미만이 부여될 뿐 위기 의식으로까지 발전할 개연성은 전혀 없는 것이다. 지면 관계상 대승불교의 법계론에 관해서 상세하게 언급하지 못했다. 또 불교 의 우주관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중국 신화, 특히 유가의 관점에 자세하게 서술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기회 있는대로 보정 발표할 예정이다. 


계간 과학사상 제 10호 1994년 가을호 Written by 정병조(동국대 교수,불교철학)

 

19. 프랙탈 구조


생물사 1억년 태아 8일에 해당

우주 150억년 인생 100년에 응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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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우주의 한 조각 이나

티끌속 우주 아는 고귀한 존재"


고사리 잎의 각 부분은 전체구조를 그대로 보이고 있는 자기닮음(프랙탈) 구조의 전형이다. 또 원자핵을 중심으로 그 주변을 맴도는 전자가 있다. 그것은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이 돌고 있는 우주구조와 같다. 이와같이 모든 현상에는 부분과 전체 또는 미크로와 마크로의 구조가 있다.


나무모양을 생각해 보자. Y자형이 되풀이되고 있으며 그것은 산맥이나 강줄기에도 볼 수 있다. 다만 나무종류, 또는 지리적 특성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지는데 한결같이 전체와 부분이 같은 프랙탈적인 구조는 공통적이다. 이 사실은 공간에서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우주 150억년의 시간과 인생 100년의 시간에도 프랙탈적인 구조의 일치가 예상된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 한다'는 말도 생각이 난다. 발생생물학에서는 수정후 32일이 된 인간의 태아에는 고대 난골어류의 것과도 같은 아가미가 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4억년전에 있던 물고기의 모습과 같다. 34일이 지나면 코가 입에 이어지는 양서류의 얼굴이 되고 36일에는 3억년전 원시파충류의 모습이 된다. 38일에는 폐로 호흡이 가능해지고 원시 포유류의 얼굴이 생기고 40일째에는 인간의 모습이 되어진다. 지구가 1억년에 걸쳐서 진행해온 생물진화의 역사를 겨우 8일 동안에 태아는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루의 삶이 평생의 무게와 같고 인류 백만년의 그것과도 필적한다. 생물사 1억년이 태아의 8일에 해당한다는 신비로움에 경외의 마음이 절로 생긴다.


의상대사의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라는 말씀은 이 사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적으로 있는 것은 그대로 공간적으로도 있다. 다시 의상대사의 말을 인용한다면 '일념즉시무량겁'이라는 말과 같이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임을 말하고 있다. 태양계의 구조와 원자구조가 같음은 앞에서 말한 대로이다. 이 사실은 프랙탈적인 현상에 대해서는 크기가 문제시되지 않음을 뜻한다. 모양새만을 본다면 그 크기에 대해 절대적인 척도가 없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의 대상은 그 모양과 같은 부분으로써 구성되어 있으며, 그 부분은 또 그것과 똑같은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그 모양을 부분적으로만 관찰할 때 실제의 크기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와같은 세계를 만다라에서 구체적으로 보이고 있다.


우주의 나이 150억년을 인간의 생명인 100년으로 응축시킬 때 겨우 1초 정도가 된다. 그러나 인간은 그 짧은 순간에 우주의 진화 전과정을 구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생애는 결코 미리 정해져 있는 궤도에 따라 마치는 것은 아니다. 흔들림 속에 온갖 선택의 가능성을 지닌다. 집단의 평균적, 또는 이에 대해서 벗어나는 일을 표준에서의 흔들림이라 한다. 인간의 귀함이 바로 스스로의 선택으로 야기된 흔들림에 있는 것이다. 이 흔들림은 남에 의해서 정해진 인생의 궤도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닌 스스로 생각하고 의지를 발동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기에 의미가 있다. 의상대사가 말한대로 "티끌 속에 전 우주를 넣고, 일순간에 전우주의 역사를 응축시킬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파스칼은 <팡세>에서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자연 속에서 가장 허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것을 짓누르는데는 전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사소한 한 방울의 증기가 인간을 죽일 수도 있다. 그러나 비록 우주가 그를 짓누르는 한이 있어도 인간은 우주보다 고귀한 존재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죽는 것과 우주가 인간을 초월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주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은 생각할 수 있다. 전우주가 티끌에 내포되고, 순간에 무량겁의 시간이 응축할 수 있는 것도 알 수 있다. 인간은 공에서 우주가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작은, 아주 작은 흔들림에서 태어났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우주는 150억년이라는 긴 시간을 거쳐 나를 이곳에 있게 했다. 우리 인간은 우주의 한조각이다. 그 한조각에 불과한 인간이 우주의 끝을 생각하고 그 시작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내 스스로 우주를 구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김용운<한양대 수학과 명예교수>

 

20. 우주의 탄생


 1929년 허블은 후퇴 속도가 알려진 은하들의 거리를 측정하여 은하의 속도와 거리를 비교한 결과, 이들은 서로 비례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우주가 팽창한다는 관측 결과는 우주 원리에 바탕을 둔 우주 진화이론에 의해서 설명된다. 대폭발설(big bang theory)이 가장 타당한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대인의 우주관 


고대 인도의 왕은 어느 날 우주가 얼마나 큰지 궁금해졌다. 한 번 궁금해지면 반드시 해결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왕은 세상의 진리를 모두 안다는 명망 있는 마법사를 왕궁으로 불렀다.

"현명한 마법사여! 나는 지구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잠을 잘 수가 없소. 지구를 받치고 있는 것은 무엇이오?"

"지구는 커다란 코끼리가 받치고 있습니다."

궁금증이 풀린 왕은 이날 밤 만족하며 잘 수 있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면서 다시 새로운 궁금증이 일었다. 그렇다면 그 코끼리를 받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마법사를 불러 물었다.  

"지구를 받치고 있는 코끼리는 무엇이 받치고 있오?"

"코끼리는 커다란 거북이, 그 거북은 더 커다란 거북이 받치고 있습니다. 또한 그 거북 밑에는 그보다 더 큰 거북이, 그 밑에는 그보다 더 큰 거북이 끊임없이 받치고 있습니다."

왕은 무릎을 치면서 기뻐했다.

"오늘은 내 기필코 우주의 크기를 알아내고 잠을 청하겠오."

왕은 우주의 크기를 재기 시작했다. "거북이 하나, 거북이 둘, 거북이 셋, 거북이 넷, 거북이 다섯...."

이것은 고대 인도인의 우주관을 약간 변형시켜서 재미있게 풀어낸 이야기이다. 원래 고대 인도인들이 생각한 우주의 모습은 이러하다. 우선 거대한 뱀 위에 거북이 올라앉아 있고, 그 거북이 등 위에 네 마리의 코끼리가 반구(半球)의 대지를 떠받들고 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수미산(불교의 우주관에 있어서 세계의 중앙에 솟아 있는 산)이 솟아 있으며, 해와 달은 그 위를 돌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고대인들은 자신들이 설명할 수 없는 자연 현상에 대해 여러 신화를 만들어 냈다. 우주에 대한 신비로움 역시 신화로 설명하려 한 것이 많은데 가장 오래된 우주관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수메르(Sumer)인들이 만든 것이다. 수메르인들은 하늘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들이 있으며, 이 신들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영향을 끼친다고 믿었다. 평평한 지구는 하늘이라는 둥근 천장이 덮고 있으며, 이 천장과 땅 사이에는 태양과 발, 별들이 가득 차 있는데 이 모두가 신들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이와 비슷하게 하늘을 신격화한 것으로는 비빌로니아의 아누(Anu), 이집트의 누트(Nut), 고대 인도 부라만교의 경전인 '베다(Veda)'에 나오는 바루나(Varuna), 그리스의 제우스(Zeus), 도가(道家)의 옥황상제(玉皇上帝)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이집트인의 우주관에는 수메르인의 경우보다 더욱 낭만적인 면이 엿보인다. 하늘의 여신 누트는 평평한 땅을 위에서 에워싸고 있는데 누트의 몸에는 별들이 아로새겨져 있는 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누트가 매일 저녁 태양을 삼켰다가 새벽에 다시 토해 내기 때문에 낮과 밤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우주의 팽창

우주 탄생의 실마리를 결정적으로 제공해 준 것은 우주는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팽창하고 있다는 현대의 관측 결과이다. 1924년 미국 천문학자 에드윈 하블(E. P. Hubble. 1889~1953)은 윌슨 산(山) 천문대에 있는 100인치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측하고 있었다. 허블은 우주에 우리 은하 이외에 다른 은하가 있는지, 그리고 다른 은하까지의 거리는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지 하는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당시까지는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성운(星雲, 구름 모양으로 퍼져 보이는 천체, 은하계 내 성운과 은하계 외 성운으로 크게 나뉘는데, 전자를 성운, 후자를 은하라고 하는 경우가 많음)을 모두 우리 은하계 내부의 천체로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 은하계가 우주의 전부였던 셈이다. 허블은 당시 세계 최대의 망원경을 이용하여 안드로메다 성운에 있는 매우 특이한 별을 관측하였다. 그것은 일정한 주기로 밝기가 변하는 세페이드(케페이드) 변광성(變光星)이었다. 허블은 이를 이용하여 성운까지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고, 그 결과 안드로메다 성운이 우리 은하계 안에 있는 천체가 아니라 외부에 있는 천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사실로 우주에는 우리 은하 이외에 수많은 은하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편 우주의 팽창은 스펙트럼(spectrum) 분석을 통해 이루어졌다. 스펙트럼은 빛을 분산켰을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색깔의 띠다. 스펙트럼은 빛의 종류에 따라 조금씩 다르며, 스펙트럼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색깔은 저마다 밝기가 다르다. 이런 차이점을 이용하면 별의 온도를 잴 수 있다. 또한 별에서 나온 빛을 분석했을 때 한 가지 색깔이 빠져 있다면, 그 별을 둘러싸고 있는 대기가 어떤 화학 원소로 되어 있는지 알아낼 수 있다. 화학 원소는 특정한 빛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스펙트럼에서 특정한 색깔의 빛이 빠져 있으면 별의 대기 중에 그 화학 원소가 있다는 의미이다.


허블은 이런 스펙트럼 연구를 통해 다른 은하에 있는 별들의 스펙트럼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사실을 발견했다. 외부 은하의 스펙트럼은 모두 흡수선이 붉은 색 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이와 같은 '적색 이동(적색 편)'은 어떤 물체에서 나온 빛이 원래의 파장보다 길어지는 현상인데, 이런 일은 어떤 물체가 관측자에게서 멀어질 때 나타난다. 반대로 물체가 관측자에게 가까워지면 원래의 파장보다 짧아져 청색 이동 현상이 일어난다. 이처럼 빛의 파장이 원래의 파장보다 짧아지거나 길어지는 현상을 빛의 '도플러 효과'라고 한다. 허블은 이 치우치는 정도를 연구하여, 은하의 후퇴 속도는 그 은하까지의 거리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즉 멀리 떨어져 있는 은하일수록 더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서 멀어져 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허블의 관측 결과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허블의 관측과 그 결과에 대한 해석은 너무도 명확했고, 따라서 우주가 정지해 있다고 완고하게 믿고 있던 많은 사람들도 우주 팽창의 개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때 곤혹스러워했던 한 사람이 아인슈타인(A. Einstein, 1879~1955)이었다. 일반 상대성 이론 방정식이 우주의 팽창이라는 개념을 함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은 우주는 정지해 있어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허블의 주장 이전에는 우주 팽창을 부정했기 때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이 일을 '자신이 일생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수'라고 인정했다.


  현대 우주론

우주론은 우주의 기원과 그 거대한 구조 및 진화를 다루는 천문학의 한 분야이다. 천문학자들은 수학을 이용해서 가상의 '우주 모델'을 만들고, 이 모델의 특성과 이미 알려져 있는 우주의 측성을 비교한다. 현대 우주론의 유명한 두개의 모델로는 정상 우주론(The Steady State Cosmology) 과 빅 뱅 우주론(The Big Bang Theory)이 있다. 


정상 우주론의 모델에서는 우주는 항상 현재와 같은 모양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우주가 팽창하여 우주의 밀도가 작아지면 이를 보충하기 위해 우주 공간에서 새로운 물질이 계속 생성되어 일정한 밀도를 우지한다. 이에 반해 빅 뱅 우주론 모델에서는 우주가 한 차례의 대폭발로부터 팽창해 나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빅 뱅 이론의 도입에 공헌한 벨기에의 신부 르메트르(E. Lemaitre, 1894~1966)는 1927년 뜨겁고 밀도가 높은 하나의 점이 폭발함으로써 우주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영국의 천문학자 프레드 호일(F. Hoyle, 1915~ )은 1948년에 우주에 출발점이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우주는 어떤 장소와 시점에 있든 똑같다는정상 우주론을 발전시켰다. 즉 우주는 한결같은 상태를 유지하는데, 그러기 위해 우주 공간에 새로운 물질이 일정하게 생성되어 우주의 팽창으로 빈 공간을 정확하게 메운다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의 생성은 1만 년 동안 1㎤당 수소 원자 1개 정도의 비율로 일어나기 때문에, 실험적으로 관측하기에는 매우 느리다고 했다. 또한 르메르트의 대폭발설을 조롱하는 의미에서 '빅 뱅'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어쨌든 정상 우주론은 우주의 시작과 끝이 없다는 주장이다.

한편 19세기 열역학에 따르면 폐쇄계(바깥 세계와 에너지 및 물질 교환을 하지 않는 계, 닫힌계)는 점차 무질서를 향해 가는데, 우주도 같은 과정을 겪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우주를 거대한 메카니즘(mechanism, 기계장치)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물리학자들은 밝게 빛나는 항성이 언젠가는 다 타고 말 듯이 우주도 언젠가는 생명을 다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상 우주론은 이러한 우울한 전망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으며, 우주의 출발점을 대폭발로 설정한 빅 뱅 이론에 비해 안정감을 주었다. 정상 우주론은 우주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는 낙관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1960년대에 발견한 퀘이사(quasa, 매우 먼 곳에 있고, 항성가 비슷하며 강한 전파를 내는 천체로서 모두 푸른 빛을 띠고 있다. 준항성 전파원)는 정상 우주론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퀘이사는 빅 백만큼이나 오래전에 형성된 천체로, 현대 우주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천체와도 다른 특성을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에 정산 우주론이 주장하는 결코 변하지 않는 우즈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정상 우주론에 대한 지지가 결정적으로 무너진 것은 1965년 아르노 펜지어스(A. Penzias, 1933~ )와 로버트 윌슨(R. Wilson, 1936~ )이 발견한 '우주 배경 복사(宇宙背景輻射)'에 의해서였다. 만약 빅 뱅에 의해 우주가 탄생했다면 이 때 엄청난 양의 열과 복사선이 나왔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도 우주 곳곳에 그 복사선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우주 배경 복사'이다.


사실 우주 배경 복사는 우크라이나 태생의 미국 천문학자 조지 가모(G. Garmow, 1904~1968)가 이미 예연햇던 것이다. 그는 우주의 시작이 있다면 우주의 가장 먼 부분에서 우리에게 도달하는 복사가 있고, 그것이 엄청난 속도로 우리로부터 멀어져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복사는 가장 심하게 적색 편이했을 것이므로 긴 파장으로만 되어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우주 배경 복사는 파장의 형태로 우주 공간을 통해 에너지를 전달하는 일종의 전자기파로, 우주의 모든 부분으로부터 오며 마이크로파(극초단파)라는 낮은 에너지의 파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주가 팽창하면서 점차 식어 우주 배경 복사의 온도는 약 5K(절대 온도 5K, K는 절대 온도 단위로서 0K = -273°C)라고 예언했다. 바로 우주 배경 복사를 펜지어스와 윌슨이 전파 망원경을 이용하여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우주의 모든 방향에서 거의 똑같은 세기 즉 파장이 0.3~100cm인 전파를 발견했는데, 이것은 온도가 약 3K인 흑체(黑體, 모든 파장의 전자기파를 완전하게 흡수하는 물체에서 나오는 전자기파를 흑체 복사라고 한다. 흑체 복사는 온도와 상관 관계가 있다.)에서 방출되는 복사와 같다. 즉 가모가 예언한 것보다 조금 낮지만 분명 우주 배경 복사의 온도인 것이다. 이로써 빅 뱅 이론은 분명한 증거를 얻게 되었다.


이제 천문학자들의 관심은 우리 우주가 영원히 팽창할 것인다 아니면 언젠가는 팽창을 멈추고 다시 응축하기 시작할 것인가 하는 데 쏠려 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우리는 아직 확실한 대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현재 인간의 지삭이나 능력으로는 우주의 운명을 궁극적으로 단정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운까지의 거리 측정

외부 은하의 거리는 너무 멀어서 태양 근처의 별과 같은 방법으로 구할 수 없다. 가장 많이 쓰이는 은하의 거리 측정 방법은 은하에서 발견되는 세페이드 변광성의 변광 주기와 밝기 관계를 이용하는 것이다.


세페이드 변광성의 변광 주기와 밝기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세페이드 변광성의 변광 주기를 측정하면 그 세페이드 변광성의 실제 밝기 즉 절대 등급을 알 수 있다. 별의 절대 등급을 알면 별의 겉보기 밝기 즉 실시 등급을 측정해서 그 별까지의 거리를 계산할 수 있다. 즉 'm-M=5logd-5'를 이용하면 된다. 여기서 m은 실시 등급, M은 절대 등급, d는 거리를 가리킨다.


  안드로메다 성운

우리 은하의 지름은 10만 광년인데, 안드로메다 성운까지의 거리는 220만 광년이다. 따라서 안드로메다 성운은 우리 은하계에 있는 천체가 아니라 외부 은하이다.


  허블의 법칙

이것을 허블의 법칙이라 하며, V=H·r이라는 관계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여기서 V는 은하의 후퇴 속도, r은 은하까지의 거리, H는 허블 상수이다. 허블 상수의 값은 아직 정확히 정해지지 않았으나, 50~100km/s·Mpc 정도라고 추측된다.


  퀘이사

퀘이사의 가장 특이한 점은 스펙트럼 선이 큰 적색 편이 현상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적색 편이를 도플러 효과로 해석하면 가장 먼 퀘이사의 거리는 150억 광년에 이른다. 따라서 우주 팽창설에 따르면 퀘이사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우리들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천체라고 생각된다. 


20. 우주의 탄생


 세계적인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가 최근 한국을 방문, 방한기간중 2차례의 대중강연에서 언급한 '브레인(brane) 이론'이 불교의 화엄사상과 맥을 같이하고 있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브레인 이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4차원(시간, 상하, 전후, 좌우)이 아닌 11차원(10차원+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론과 양자역학을 결합하는 많은 이론적 모델 가운데 현재 가장 각광받고 있는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에 따른 것이다. '초끈이론'이란 자연계를 구성하는 기본입자들이 사실은 미세한 끈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론이다. '초끈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11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 4차원만 우리 눈에 보이고 나머지 7차원은 아주 작게 접혀 있어 관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김용정 박사(과학사상 편집장)는 "초끈이론에서 말하는 '입자'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알갱이가 아닌 초속 30만Km 이상으로 달리는 것들', 즉 우주선(線)이며, 이렇게 볼 때 초끈이론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인드라망'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인드라망'이란 '제석천의 궁전을 장엄하는 그물망'을 뜻하는 말로 만물이 모두 상관관계를 갖고 연결돼 있다는 연기적 세계관을 의미한다.

또한 '입자'가 매우 짧은 순간적인 상호작용으로 '입자'의 성격을 띠는 것을 물적인 대상이 아니더라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연속적인 현상으로 보는 화엄의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세계관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세계적 물리학자 프리초프 카프라의 이론으로 볼 때도 '초끈이론'은 천체물리학의 기본바탕이 불교사상에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호킹박사는 애초에 끈을 가지고 시작한 '초끈이론'을 연구하다보면 2차원뿐만 아니라 더 큰 차원을 가진 다양한 물체들이 존재함을 증명할 수 있는데, 이러한 물체들을 통틀어 브레인이라 부르며, 브레인에 관한 연구가 초끈이론에서 얻어낼 수 있는 우주론의 가능성을 한층 넓힐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불교적으로 해석하자면 브레인 역시 사사무애의 세계관에서 기능하는 '입자'로 볼 수 있다.


한편 호킹 박사는 방한 중 "우주는 영원히 팽창을 지속할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사트바(존재)-카르만(업)'이 원인이 되어 우주가 생성되고 그 위에 생명체가 다시 산다는 고대 인도불교의 우주관으로 설명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우주가 성주괴공(成住壞空), 즉 완성-유지-파괴-소멸의 과정을 반복한다고 보았는데, 이는 곧 우주의 존재근거가 생명체들이 작용하는 힘(사트바-카르만)에서 비롯됨을 의미한다. 이렇게 본다면 호킹 박사가 말한 '팽창'은 '사트바-카르만'의 작용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22. 세계의 기원 외...

(1)세계의기원

 

세계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함경 가운데 ,<세기경(世記經)>, <기세경(起世經)>, <기세인본경(起世因本經)> 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수미산 세계의 조감도>

모든 중생들의 업력(業力)에 의해 허공에 바람이 일어 풍륜(風輪)이 생기게 됩니다. 다시 중생들의 업력에 의해 풍륜 위에 구름이 일어나 수륜(水輪)이 생기고 또 다시 중생들의 업력에 의해 금륜(金輪)이 생깁니다. 금륜 위에 산(山)이 솟아 하나의 세계가 형성되는데 이를 기세간(器世間)이라 합니다. 여기까지 1소겁(小劫)의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2) 유정(有情)의 출현


 기세간이 형성되면 여기에 중생이 나타나는데 이를 유정세간(有情世間)이라 하며 각 중생은 자기의 업에 따라 태어나게 됩니다. 중생은 욕심의 정도에 따라서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로 나뉘어지는데 욕계는 욕심으로 꽉 차있는 세계이며, 색계는 욕심은 없어졌으나 형색이 남아있는 세계며, 무색계는 형색은 없어졌으나 미세한 분별심은 남아 있는 세계입니다.

그리고 태어나는 방법에 따라 사생(四生) 즉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火生)으로 나누어집니다.


(3) 삼계(三界)


   (1) 욕계(欲界)

욕계에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육욕천(사천왕,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이 있습니다. 욕계의 중생들은 삼독에 찌들려, 욕심이 꽉 차서 괴로워하고 있다고 합니다


  ① 지옥(地獄)

중생이 고통스럽게 사는 세계를 말하며, 8대지옥, 10대지옥 등으로 나누게 됩니다.


  ② 아귀(餓鬼)

아귀란 '배고픈 귀신' 이란 뜻입니다. 배는 태산처럼 큰데 목구멍은 바늘구멍처럼 작아 비록 음식이 있다해도 먹지를 못해 항상 배고픔을 면치 못하고 굶주리는 세계를 말합니다.


  ③ 축생(畜生)

벌레나 날짐승, 물고기 따위를 말하는 것인데, 무려 34억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공중, 물, 육지의 세 곳에 각기 나누어 살고 있다고 합니다.


  ④ 아수라(阿修羅)

줄여서 수라라고도 하는데, 싸우기를 좋아하는 귀신으로 인식되며 항상 증오와 질투심을 가지고 있어서 33천과 싸우는 것을 본업으로 한다고 합니다.

야단스러운 곳이나 처참하게 된 곳을 비유하여 아수라장 같다고 하는데 이는 곧 아수라로부터 나온 말입니다. 아수라장은 아수라들이 제석천왕과 싸우는 장소를 말합니다.


  ⑤ 인간(人間)

인간이란 바로 우리와 같은 사람을 뜻합니다. 최초의 인간에 관하여는 장아함경중 소연경(所緣經), 세기경 본연품, 중아함경 범지품 등에서 보이며 내용도 같습니다. 그 대강을 살피면 다음과 같습니다.


최초의 인간은 색계 제2선천중 제2천인 광음천(光音天=)에서 복이 다하고 수명이 다한 天人이 내려 왔다고 합니다. 즉 불교의 경전에 의하면 인간은 天人이 이세상에 化生한 것입니다. 이 天人은 몸이 스스로 광명을 발하고 말할 때 입으로부터 맑은 빛을 내어 그 빛이 말이 되어서 의사를 소통한다고 하며, 신통력이 있어서 자유로 날아 다녔다고 합니다. 또한 음식은 생각만으로 포만감을 느꼈다고 하며 서로들 중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 땅에서 샘이 솟아났는데 이를 감천(甘泉)이라 했는데, 天人들은 호기심에서 먹어보고 달고 맛이 있자 감천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몸이 거칠어지고 살이 찌게 되어 자연 天人의 아름답고 미묘한 형색을 잃었으며 몸에서 나는 광명도 줄어들고 날아 다니는 힘도 잃어서 땅을 걸어다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감천을 많이 먹은 사람은 적게 먹은 사람보다 몸이 더 거칠어지고 추해지기 시작하자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여 투쟁심을 일으키는 사이에 감천은 사라지고 지미(地味)가 자연 생기게 되었고, 천인들은 이 지미를 먹고 살다가 많이 먹은 사람은 또 몸이 거칠어지고 추해지기 시작했으며 덜한 천인들과 서로 시기, 질투, 투쟁하게 되자 지미는 자연 사라지고 지비(地肥)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지비를 주식으로 하다가 또 많이 먹은 사람은 적게 먹은 사람보다 더 추해지고 서로간에 반목, 투쟁하게 되자 지비는 사라지고 파라(婆羅)가 나오게 되었으며 파라도 같은 과정을 거쳐 없어지게 되자 자연경미(自然粳米)가 생겨났는데 이것은 쌀종류의 모양으로 아침에 베면 저녁에 나고 저녁에 베면 아침에 돋아났으며 간이 맞고 거칠은 겨도 없어서 먹을만 했다고 합니다.


중생들은 자연경미를 먹으면서부터 차차 형색이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어떤 중생은 남자의 형상이 되고 어떤 중생은 여자의 형상이 되어 서로가 호기심으로 쳐다보고 살피는 동안에 애착심을 갖게 되어 성욕이 생겨 더욱 친근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부부가 생기고 복과 수명이 다한 중생이 이 세간에 올 때 어머니의 태중에 드니 이것이 여러 경전에서 보이는 이 세상 최초의 인간에 관한 기록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불교의 경전에서는 인간은 색계 제2선천중 제2천인 광음천의 천인(天人)이 화생(化生)했다는 점인데 이는 중생의 본성은 원래 청정하고 동요가 없지만 미혹하여 번뇌를 일으키고 마음이 동요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중생들의 차별경계가 생기게 되는 것이고, 또한 광음천 중생이 번뇌를 일으키자 더 이상 광음천의 생활을 하지 못하고 이 땅에 화생하게 되었으며 이들도 번뇌를 일으키고 음식을 탐하게 되자 점점 거친 음식을 먹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자연경미를 먹게 되면서부터는 남녀상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중생들이 경계에 빠져들어 감각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또 대립을 일삼을 때 중생들의 생활상은 점차 타락의 길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최초의 인간설에 관한 경전의 말씀을 되새겨 보면 보다 강한 자극과 욕망을 추구하는 현대의 물질문명이 결코 인류에게 더 나은 삶의 상태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사는 곳은 다음과 같은 사주의 구별이 있다고 합니다.


 ㉮ 남염부주(南閻浮州); 염부주라 한 것은 수풀과 과일이 풍부한 염부나무가 번성한 나라라는 뜻입니다. 염부나무는 인도에 널리 분포된 나무이며, 불교의 발생지가 인도이기 때문에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염부나무를 들어 그 이름을 만들은 것 같습니다. 남섬부주(南贍部洲)라고도 합니다.


 ㉯ 동승신주(東勝身洲); 수미산이 동쪽에 있는 대주(大洲)로써 이곳의 사람들은 몸(身)의 형상이 매우 훌륭(勝)하므로 승신주라고 합니다.


 ㉰ 서우화주(西牛貨洲); 수미산의 서쪽에 있는 대주(大洲)입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 들은 소(牛)가 많으므로 시장에서 금전(貨)과 같이 쓰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 북구로주(北俱盧洲); 구로주는 번역하여 승처(勝處)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중생, 처소, 재물 등이 사주 중에서 제일 수승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상이 사주(四洲)인데 이중에서 제일 수승한 곳은 북구로주이고, 우리가 사는 곳은 남섬부주라고 합니다.


  ⑥ 육욕천(六欲天)

육도(六道)로 보면 천(天)에 속하나 아직까지 욕심을 떠나지 못한 세계이므로 삼계로 나눌 때는 욕계에 넣게 됩니다.


 ㉮ 사왕천(四王天)

사대천왕이 있어 사주를 수호하며 그 권속들과 살고 있다고 합니다. 사대천왕이란, 동주를 주로 수호하는 지국천왕, 남주를 주로 수호하는 증장천왕, 서주를 주로 수호하는 광목천왕, 북주를 주로 수호하는 다문천왕의 넷을 말합니다.

이곳에도 남녀의 구별은 있어 혼인하는 일이 있다고 하는데 몸과 몸을 가까이 하여 기운으로써 음양을 이루며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1-2세와 같고 키는 반유순이라고 합니다.

큰 절에 가면 입구에 천왕문(天王門)이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곳은 사대천왕을 모신 곳으로 불법을 수호하고 밖에서 오는 삿된 마귀를 방어하는 뜻에서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 도리천(利天)

33천이라고도 합니다. 이 도리천을 33천이라고도 하는 이유는 중앙에 도리천의 왕인 제석천왕이 있는 선견성(희견성이라고도 함)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에 각기 8성씩 32성이 있어 도합 33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2-3세 같으며 자연히 화현하여 천(天)에 앉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의 왕인 제석천왕은 사천왕과 삼십이천을 통솔하면서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이들을 보호하고 아수라의 군대를 정벌한다고 합니다. 일찍이 부처님께서 어머니인 마야부인을 위해 석달 동안 올라가 설법하고 내려오셨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기도 하는 하늘입니다.

육욕천 중에서 사왕천과 도리천의 둘은 수미산을 의지해 있기 때문에 지거천(地居天)이라고 하는데 사왕천은 중턱에, 도리천은 정상에 있다고 합니다.


 ㉰ 야마천(夜摩天)

사왕천과 도리천이 지거천(地居天)임에 반하여 야마천부터는 공중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공거천(空居天)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때에 따라 오욕락을 받는다고 합니다. 도리천 보다 수승한 하늘로, 남녀가 음양을 이룰 때에는 서로 가까이만 해도 되며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3-4세와 같다고 합니다.


 ㉱ 도솔천(兜率天)

지족천(知足天), 희족천(喜足天), 묘족천(妙足天)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곳에서는 자기가 받는 오욕락에 스스로 만족한 마음을 내어 안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선 남녀가 서로 손을 잡는 것으로도 음양을 이룬다고 하는데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4-5세와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엔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이 있는데 외원은 천인들의 욕락처가 되고, 내원은 미륵보살의 정토로서 미륵보살은 이곳에 있으면서 남염부주에 하강하여 성불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도솔천 내원궁에서 호명보살로서 천인들을 교화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 화락천(化樂天)

오욕의 경계를 스스로 변화하여 즐기기 때문에 화락천이라고 합니다. 남녀가 바라다 보고 있으면 음양을 이룬다고 하며 처음 태어났을 때는 인간의 5-6세와 같다고 합니다.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이 하늘은 남의 즐거운 일들을 자유롭게 자기의 락으로 삼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합니다. 이곳에선 잠시 바라만 보아도 음양을 이룬다고 하며 처음 태어났을 때에는 인간의 6-7세와 같다고 합니다. 욕계는 이 타화자재천에서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경에 의하면 남녀의 구별이 있는 것도 혼인하는 일이 있는 것도 여기까지라고 합니다. 이 이상의 하늘엔 남녀의 구별도 없다고 하니 혼인하는 일도 있을 수 없습니다.


  (2) 색계(色界)

색계란 모든 탐욕은 여의였으나, 아직 완전히 정신적인 것은 되지 못한 중간의 세계로 욕계의 상층이 있으며 욕계보다 수승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초선천, 이선천, 삼선천, 사선천의 사천이 있어 색계 사천이라 하며 이를 세분하여 색계 십팔천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색계의 사선천은 결국 사선정을 닦아서 나는 하늘로 선정의 차제의 의한 것이기 때문에 색계의 사천은 모두 이 사선정을 닦아서 나는 곳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① 초선천

범중천, 범보천, 대범천 


  ② 이선천

소광천, 무량광천, 극광정천 


  ③ 삼선천

소정천, 무량정천, 변정천


  ④ 사선천

무운천, 복생천, 광과천, 무상천, 무번천, 무열천, 선현천, 선견천, 색구경천


이상이 색계18천입니다. 이 색계는 일정한 지형이 없고 다만 중생이 그 세계에 태어나고 죽고 하는데 그 거주하는 천궁이 현멸하므로 어떤 고정적인 유형색을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3) 무색계(無色界)

완전히 정신적인 세계로 삼계 중 가장 수승한 곳입니다.


  ①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

욕계와 색계의 모든 색법을 싫어하고 무색정(無色定)을 닦되 색의 상을 버리고 허공관(虛空觀)을 닦는 이가 태어나는 하늘입니다.


  ② 식무변처천(識無邊處天)

공무변처가 오히려 바깥 허공이라는 대상이 있으므로 이를 싫어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주관인 식이 무변하다는 이치를 알고 수행하여 태어나는 하늘입니다.


  ③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

식무변처가 오히려 식이라는 소유감이 있으므로 이마저도 싫어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공도 식도 모두 소유가 없다는 무색정을 닦아 그 힘으로 태어나는 곳입니다.


  ④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

삼계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하늘이라는 뜻에서 유정천(有頂天)이라고도 합니다. 이 하늘을 비상비비상이라 하는 이유는 식무변처천은 무한한 식의 존재를 관상(觀想)하므로 유상(有想)이요, 무소유처천은 공도 식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관상하므로 비상(非想)인데, 이것은 유상을 버리므로 비상이요, 비상도 버리므로 비비상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정을 닦아 그 힘으로 태어나는 하늘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9산8해의 단면도>


(5) 우주의 변화


  (1) 변화의 형태

기세간인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생멸변화 하게 됩니다.


  ① 성겁(成劫)

기세간과 유정세간이 형성되는 시기를 성겁이라 합니다. 성겁은 20소겁이 소요되는데. 중생들의 공업(共業)에 의해 허공에 바람이 일기 시작하여 풍륜이 생기고, 그 위에 구름이 일어나 수륜이 생기고, 수륜위에 바람이 일어나 수면을 때리고 응결시켜 금륜이 발생합니다. 금륜위에 수미산이 생기고, 그 주위에 7산이 생긴 뒤, 그 가장자리에 철위산이 둘러 앉아 각산 사이에는 8海가 생기게 되고 수미산 부근의 7산 사이의 바다를 내해(內海)라 하며 그들과 맨 바깥쪽 철위산 사이에 나타난 바다를 외해(外海)라고 합니다. 이 외해속에 사대주(四大洲)가 있어 수미산의 사방에 위치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수미산 남쪽의 섬부주(贍部洲)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하늘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중생들이 몸담고 살아가게 될 우주(器世間)가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최초의 풍륜으로부터 이러한 세계가 형성되는에 1소겁(小劫)의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세간이 생긴 다음에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에 중생들이 생기게 되는데 이를 유정세간(有情世間)이라고 합니다.

욕계(欲界)는 애욕이 있는 경계로 애욕과 고통의 정도에 따라 천(天), 인간(人間), 아수라(阿修羅),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의 육도(六道)의 중생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색계(色界)는 애욕은 없어졌지만 물질에 대한 집착은 남아 있는 세계로 18천(天)으로 분류됩니다.

무색계(無色界)는 물질에 대한 집착마저 사라진 정신적인 세계로 4천(天)이 있습니다.

이러한 유정세간(有情世間)이 생기게 되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19소겁이 걸리게 됩니다. 이처럼 기세간(器世間)과 유정세간(有情世間)이 발생하게 되는 시기를 성겁(成劫)이라고 합니다.


  ② 주겁(住劫)

성겁 다음에 주겁의 시대가 옵니다. 주겁도 20소겁이 소요되며 기세간은 별 변동 없지만 유정(有情)의 과보에는 많은 변동이 있습니다.

인간들은 처음에는 빛을 내며 하늘을 날 수 있으며 수명도 장구합니다(8만세). 그러나 좋은 맛을 탐닉하고 나쁜 마음들로 악업은 심해져 수명은 짧아지며 사고, 질병등의 삼재(三災; 水, 火, 風)가 발생하여 많은 인간들이 죽어가며 수명이 줄어들게 됩니다(10세). 다시 인간은 죄업을 뉘우치고 선업을 행하여 그 수명이 8만세가 됩니다. 여기까지 시간을 1소겁이라고 하는데, 주겁의 기간동안 20번을 계속합니다.


  ③ 괴겁(壞劫)

그 후 세계는 서서히 파괴되어 갑니다, 이를 괴겁시대라 하는데 역시 20소겁이 소요됩니다. 먼저 유정세간이 파괴되는데 19소겁이 소요되고, 다음에 기세간이 파괴되는데 수(水), 화(火), 풍(風)의 삼재가 발생하여 풍륜으로부터 색계 제3천에 이르는 세계를 모조리 소멸시켜 버리게 되는데 1겁이 걸리게 됩니다.


  ④ 공겁(空劫)

괴겁의 시대가 지나면 허공만이 존재하는 공겁의 시대가 오는데 이 기간도 20소겁이 걸리게 됩니다. 공겁 다음에는 다시 중생들의 업력에 의해 성, 주, 괴, 공이 반복하여 이 세계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게 됩니다. 20소겁을 1중겁이라하고 4중겁을 1대겁(大劫)이라 하므로 결국 한 우주는 1대겁(大劫)을 시간단위로 하여 생성, 소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주괴공을 되풀이하는 세계는 하나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무한대의 세계 중 욕계, 색계, 무색계의 중생들이 모여 사는 가장 기본이 되는 단위의 세계를 1사천하(一四天下) 혹은 1세계라고 하는데 '1사천하'가 천(千) 개 모인 것을 '1소천세계(一小千世界)'라 하고, 그 '소천세계'를 천 개 합한 것이 '1중천세계(一中千世界)'가 되고, '중천세계'를 천 개 합한 것을 '1대천세계(一大千世界)'라 하는데, 이처럼 '1대천 세계'에 '소천, 중천, 대천' 3종(三種)의 천(千)이 있으므로 3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 하며, 한 부처님이 주재하는 세계라고 합니다. 이러한 삼천대천세계가 제 각각 끊임없이 성·주·괴·공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 있어서 이 우주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삼천대천세계가 미진수로 있어서 시방미진수세계(十方微塵數世界) 또는 항하의 모래수 만큼 많이 있어서 시방항하사수세계(十方恒河沙數世界)로 전개됩니다.


  (2) 겁

불교에서 시간을 나타내는 겁(劫)은 범어로는 Kalpa이며 범천의 하루가 1겁입니다. 곧 인간 세계의 4억3천2백만년을 말합니다. 불교에서 겁을 말할 때는 보통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을 말할 때 쓰는데, 겁에는 개자겁(芥子劫), 불석겁(拂石劫), 증갑겁(增感劫), 진묵겁(盡墨劫) 등이 있습니다.


  ① 개자겁(芥子劫); 사방 40리 안에 개자씨를 가득 넣고 장수하는 천인(天人)이 3년에 한 알씩 가져가 그 수가 다하는 기간을 말합니다.


  ② 불석겁(拂石劫); 반석겁(磐石劫)이라고도 하는데 사방 40리 되는 바위가 있다고 가정하고 장수하는 천인이 있어 3년에 한번씩 천의(天衣)로써 둘레를 한바퀴 스쳤을 때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기간을 말합니다.


  ③ 증감겁(增減劫); 인간의 수명에 따른 정의인데 인간의 수명은 10세에서 8만4천세까지, 8만4천세에서 10세까지 백년에 한 살씩 증(增) 또는 감(減)한다고 하였는데, 증하는 기간을 증겁(增劫), 감하는 기간을 갑겁(減劫)이라 하며 증감을 합해 증감겁이라고 합니다.


  ④ 진묵겁(盡墨劫); 한량없는 세월을 말합니다. 법화경의 화성유품에 나오는데 어떤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형상이 있는 모든 것들을 갈아서 먹(墨)을 만들어 동쪽으로 가며서 일천국토를 지날 때마다 티끌 만한 한 점을 내리쳐서 그 먹이 다하도록 가게되면 그 국토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게 됩니다. 이 사람이 지나가며 점을 친 국토나 점을 치지 않은 국토를 모두 모아 부수어 티끌을 만들어서 그 티끌 하나마다 한 겁씩 계산하여 그 티끌이 다하도록 계산한 것이 진묵겁이라 하였으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나긴 세월인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과 수량을 나타내는 말들로는 겁(劫; kalpa), 찰나(刹那; ksana. 75분의1초), 나유타(那由他; nayuta 천만 혹은 천억), 미진수(微塵數, parmanu 세세하게 부서진 것 같이 수 많음), 항하사수(恒河沙數), 항하에 모래처럼 많은 수량 또는 항하진수(恒河塵數)라고도 함. 모호(模湖, 확실하지 않은 모양 또는 애매한 상태), 순식(瞬息, 수유의1/10)., 탄지(彈指, 찰나의10배), 수유(須臾, 순식의10배 또는 준순(浚巡의 1/10), 준순(浚巡, 수유의 10배 또는 모호의 1/10 곧 10-14)등이 있습니다.


출처 : 불국정토 (경기도 안산 본오동 보광사)
글쓴이 : 불국정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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