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를 체득하면 윤회는 없다 / 방경일 5. 종교체험의 필요성 불교는 종교적인 면과 철학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따라서 철학적인 면으로만 접근할 경우 가르침들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무아와 윤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붓다는 무아와 윤회가 모순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는 제자나 14가지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하는 제자에게 직접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붓다가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무아를 직접 체험하면 스스로 해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런 종류의 질문은 스스로의 종교체험을 통해 해결될 문제이지 남이 주는 대답을 통해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김진이 무아와 윤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칸트의 요청이론을 적용한 것은 신선한 발상임에 틀림없지만 이는 무아에 대한 종교적인 체험, 즉 자내증이 없는 상태에서 관념론적인 방법을 동원한 것에 불과하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무아와 윤회는 모순 없이 양립할 수 있는 진리체계이므로 무아와 윤회가 모순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김진의 해결책은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지만, 붓다의 가르침에 굳이 칸트의 요청이론을 적용하자면 윤회 문제의 해결에 대한 요청으로 무아가 제시되었다는 정도가 될 것이다. 김진의 주장에 반대해 무아윤회를 주장하는 불교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만약 그들이 무아에 대한 종교체험을 했다면 무아윤회와 같은 궤변을 주창(主唱)하지는 못한다. 무아와 윤회는 양립할 수 없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붓다의 직설로 알려진 니까야의 내용을 절대시하는데 이런 교조주의적 태도는 붓다의 진의를 알아내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예를 들어 이들은 삼법인을 ‘제행이 무상하니 고이고, 고이니 무아이다.’라는 식으로 해석하는데 그렇다면 ‘고가 아닌 것은 무아가 아니다.’라는 말인가? 자체모순을 내포하게 되는 이런 해석을 니까야에 실려 있다고 해서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무아와 업보윤회가 모두 니까야에 실려 있다고 해서 무아윤회를 주장하거나 무아와 윤회는 양립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나서 ‘홀로 고요한 곳에서 깊이 생각해 보고 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것인지 결정하라.’는 붓다의 교수 원칙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폐쇄적인 교조주주의적 시각이 아니라 종교체험에 근거한 개방적인 시각으로 볼 때 사법인(四法印)은 붓다 교설의 핵심이다. 붓다는 자신을 포함한 세상이 선험적으로 연기하는 존재임을 통찰하고 제행무상을 깨달았으며 연기하는 존재인 나(我)에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경험함으로써 제법무아를 깨달았다. 시간의 경과를 전제하고 있는 제행무상을 시간 축으로 하고 존재의 무화(無化)를 전제하고 있는 제법무아를 공간 축으로 한다면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진리체계가 만드는 세계에서는 생로병사의 고통, 즉 윤회는 사라지고 열반만이 있을 뿐이다. 반대로 유상(有常)과 유아(有我)가 만드는 세계에서는 열반은 없고 생로병사의 고통, 즉 윤회만 있을 뿐이다. 제법무아 (공간축) 생로병사의 고통이 없는 열반의 세계 ----------------------------아(我)---------------------------------- 제행무상(시간축) 생로병사의 고통이 있는 윤회의 세계 <도표4. 사법인의 진리체계> 붓다의 가르침을 받고 원점에 서게 된 아(我)는 잘 생각해 보고 붓다가 제시하는 열반의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윤회의 세계에 머물 것인가를 선택하면 된다. 사법인의 경우만이 아니라 12연기 역시 마찬가지다. 12연기 체계를 잘못 이해하게 되면 업이 없으면 행(行)과 그 이후의 단계가 진행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하게 된다. 하지만 무명을 없애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행, 즉 업이 발생하고 결국은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받게 된다. 무명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무명은 ‘무아를 체험하지 못한 상태’이다. 개아가 자기해체를 통한 자기소멸, 즉 무아를 체험하게 되면 무명은 명이 되므로 다음 단계인 행(업)과 이후의 단계들은 발생하지 않게 되어 생로병사의 고통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처럼 종교체험은 붓다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지만 이를 논외로 하더라도 니까야의 내용을 신성시하는 교조주의적인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 니까야가 문자로 작성된 시점은 붓다가 열반하고 500년 정도 지났을 때인데 이 과정에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는 붓다의 말씀이 구두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삭제나 수정이 되었을 것이란 점이고 둘째는 전달자나 기록자의 의도에 의해서 변형이나 편집이 있었을 것이란 점이다. 위에서 살펴본 4법인과 12연기의 경우만 봐도 니까야의 내용은 순일 무잡한 붓다의 가르침이 아닐 것이라는 의구심이 든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필자는 니까야의 자구에 얽매인 교조주의적인 해석은 중지되고 나아가 폐기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정리하자면 불교학자들은 현재 전해지고 있는 니까야의 내용을 자구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종교체험에 근거한 재해석을 통해 붓다의 진의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출처 : 어부림 ( 魚付林 )글쓴이 : 거울 원글보기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