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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이데거, 무 그리고 불교 / 박진영 교수 3. 하이데거의 무와 불교

무한대자유 2012. 6. 16. 13:26
 

하이데거, 무 그리고 불교 / 박진영 교수 3. 하이데거의 무와 불교 이전의 형이상학적 전통에서 무에 대한 담론과 논리학을 문제화한 하이데거의 논의는 동양철학 특히 불교에 대한 서구의 오해를 밝히는 길을 열고 있다. 서구에서 불교를 ‘철학’이라는 분류로 인정해 주기를 꺼려하고, 결국 동양사상을 철학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주요 이유로 다음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동양사상은 철학이 아니라 종교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불교와 관련해서는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둘째로 동양사상은 논리적 구조를 결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철학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논리적 구조란 물론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일률, 배반율, 모순율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 존재자의 정체성은 고정된 실체로 설명될 수 없다. 개체의 정체성은 관계성에 의해서 형성되며 그런 의미에서 불교사상이 아리스토텔레스 논리의 모형 안으로 깨끗이 맞아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불교적 사고의 구조에서 이원론적 대립은 속제(俗提)적인 상황에서 그리고 각 상황의 특수한 맥락이 결정될 때에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모순율은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양식 자체가 이미 모순율과 배제율의 논리를 거스르는 것이 된다. 무에 대한 진정한 논의는 전통 논리학의 논리를 위반하지 않을 수 없다는 하이데거의 논의, 그리고 무에 대한 사색은 단순한 허무주의가 아니라 형이상학의 근본을 다루는 문제라는 그의 주장은 동양과 서양의 사유양식의 차이에 다리를 놓고 있다. 이 다리의 보다 구체적인 모습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강연 ‘후기’에서 찾을 수 있다. 하이데거는 1929년 강연을 정리한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가 출판된 후 10여 년이 지난 1943년 판에 ‘후기’를 첨부했다. 이 ‘후기’에서 하이데거는 무를 존재의 근원으로 보는 자신의 해석이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켰음을 지적하고, 그 오해를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사람들은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다음과 같이 비난한다는 것이다. ① 이 강의는 ‘무’를 형이상학의 유일한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무란 없어지는 것 그 자체이므로 이러한 생각은 모든 것은 무이다. 따라서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의미가 없다는 생각으로 이끈다. ‘무의 철학’은 완벽한 ‘허무주의’다. ② 이 강의는 고립된 두려움의 감정, 즉 불안을 유일한 근본 기분이라고 부추긴다. 그러나 불안은 걱정이 많은 사람, 그리고 겁이 많은 사람들의 감정 상태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고는 용기라는 고양된 마음가짐을 제어한다. ‘불안의 철학’은 행동의 의지를 마비시킨다. ③ 이 강의는 논리학에 결정적으로 반대한다. 그러나 지성은 셈하고 정리하는 모든 기능의 기준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러한 사고는 진리에 관한 판단을 우연적인 기분에 떠맡긴다. ‘단지 감정에 의지한 철학’은 정밀한 사색과 행위의 확실성을 위태롭게 한다.(WIM 45쪽) 하이데거가 요약한 자신의 무의 철학에 대한 이 비판이 19세기 유럽 정신이 불교를 만났을 때 불교에 대해 했던 비난과 동일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이데거 철학의 비난자들처럼 일세대 유럽의 불교학자들은 무상, 무아 등 무를 이야기하는 불교를 끔찍한 허무주의의 종교, 철학이라고 규정했다.10) 또한 하이데거 철학의 비난자들처럼, 헤겔은 무아, 무상을 근거로 하는 불교는 나약한 여성적 고립의 종교라고 해석했고, 불교를 그 자신이 제시한 세계 종교 발전사의 유년기에 불교를 위치시켰다.11) 나아가 서구 전통 논리학에 거스르면서도 그리고 거스르기 때문에 형이상학의 근본으로 갈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철학체계로서 불교사상이 서구 전통에서도 새롭게 해석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논리학의 법칙을 따르는 가장 ‘정밀한’ 사색이 가장 ‘엄밀한’ 사색은 아니기 때문이다. 논리학은 “사고의 본질에 대한 하나의 해석”일 뿐이다.(WIM 47) 이와 같은 하이데거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의 무의 개념은 그가 극복하고자 했던 형이상학의 잔재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는 유(있음)로의 회귀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 나타난 형이상학과 무에 대한 하이데거의 관점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형이상학은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본질을 알고자 해왔다. 그러나 당시까지의 형이상학하기의 방법으로는 이 존재자의 존재성을 밝힐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자의 근본은 존재자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보다 더 깊은 그 무엇, 존재 자체에 있으며, 존재는 무에 의해 드러난다. 일상에 매여 있는 존재자가 무와 대면하는 순간, 존재자는 스산한 느낌, 편안하지 않은 느낌을 갖게 되지만, 이를 통해 존재자는 존재와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무의 무화 작용은 왜 존재자로 하여금 존재를 만나게 하는가? 즉, 왜 무와의 만남은 존재자의 개체성의 무의미성을 일깨우면서 동시에 허무주의로 빠지지 않고 존재자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의 근본인 존재와 만나게 하는가? 불교에서 모든 존재의 항상 됨이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은 불교가 세계의 구조를 그렇게 보았기 때문이다. 즉 존재자는 개체가 불변의 실체(實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의 규정이 불가능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본 것이다. 다중적 인과론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기의 법칙은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다’는 중도의 세계관인 것이다. 불교의 무상의 개념이 세계의 근본에 고정불변의 실체를 상정하지 않고도 허무주의로 빠지지 않는 것은 불교는 세계의 근본을 무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즉 세계는 실체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고정불변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구조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 구조 자체가 고정불변의 실체에 근원을 둔 것이 아니라 연기적 변화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의 만남 자체가 곧 중생으로 하여금 깨침을 얻게 하지는 않는다. 연기적 구조의 세계 현실에도 불구하고 중생은 또한 물질적, 정신적으로 형성된 고착화에 매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상정한 무는 어떠한 구조를 통해 존재자로 하여금 존재의 무상을 인식하게 하는가? 불안이 평안함으로 바뀐다는 것은 하이데거에게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이데거에게 이는 무의 무화작용을 통해 개별 존재자가 존재의 총체성 즉 존재와 만나게 됨으로 이루어진다.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모습을 나타낼 수 없다. 그러나 존재자 없이 존재가 있을 수 없으며 존재 없이 존재자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존재자는 많은 경우 존재를 망각한다. 따라서 무의 존재는 존재자를 개별적 개체 지향적 사고에서 개별자를 넘어선 총체적 존재로 이끈다. 무를 통해 존재자가 이르는 곳은 결국 존재이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모든 존재자 가운데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존재의 목소리에 불리어 경이로움 중의 경이로움을 발견한다. 즉 존재자는 ‘있다’.” (WIM 46-7) 여기서 우리는 하이데거의 유와 무의 관계의 아이러닉한 전환을 발견한다. 결국 기존 형이상학에서 유가 무를 종속시켰다는 그의 설득력 있는 논설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하이데거의 무는 존재자의 ‘있음’을 확인하기 위한 긴긴 우회였다. 나아가 이 존재자의 ‘있음’은 그 궁극적 근원으로써 존재의 ‘있음’을 무라는 수단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자는 형이상학이 상정한 존재자와 무엇이 다른가. 이것이 형이상학이 규정해온 절대적 존재자의 다른 이름이 아니면 무엇인가. 하이데거의 무는 결국 총체적 존재로서 존재를 밝히기 위한 중간매체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다면 하이데거에서도 무는 결국 그가 존재라고 명한 절대유(絶對有)를 밝히기 위한 것이었으며, 유에 대한 무의 종속이라는 형이상학 전통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본적 이유를 우리는 하이데거 철학이 이전의 형이상학과 마찬가지로 실체론적 사고에 근거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출처 : 어부림 ( 魚付林 )
글쓴이 : 거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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