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무아를 체득하면 윤회는 없다 / 방경일 (2) 무아윤회는 궤변이다

무한대자유 2012. 6. 16. 13:10
 

무아를 체득하면 윤회는 없다 / 방경일 2. 무아윤회는 궤변이다 1) 무아윤회와 그 근거인 업보윤회에 대한 주장 무아윤회와 업보윤회는 안옥선의 논문인 <초기불교에서 본 '무아의 윤회': 업의 자아의 윤회>에 잘 정리되어 있다. 안옥선은 무아이지만 윤회할 수 있는 것은 업이 있어 윤회를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업이 의식과 갈애를 만나 새로운 육체를 만들어 내기 때문에 또 하나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때 업은 전신(前身)이 한 행위뿐만 아니라 행위의 반복을 통해 형성된 습관, 성향/성격, 성품 등도 포함한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브라흐만-아트만 윤회설(브라흐만에서 나온 아트만이 브라흐만으로 돌아가면 윤회는 끝난다는 주장)'에서 윤회의 실체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행위, 습관, 성향/성격, 성품 등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자각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므로 무아윤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이것들이야말로 윤회의 실체를 부정하면서 윤회를 성립시킬 수 있는 절묘한 착안물들이다. 잡아함(13권 335)에 있는 ‘업과 그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짓는 자는 없다(有業報而無作者)’는 주장은 이런 관점을 잘 대변해 주는 표현이다. 따라서 업보윤회는 무아윤회를 성립시킬 수 있는 훌륭한 근거가 되는데 무아윤회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정말 명쾌한 해결책이다. 그래서인지 안옥선은 ‘무아와 윤회’라는 표현보다는 ‘무아의 윤회’라는 표현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2) 업이 바로 실체적 자아이 안옥선의 논문에 의하면 불교의 업보윤회설에서 업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첫째, 업은 윤회의 출발점이다. 업보윤회의 기본구조는 전생의 생명체가 만든 업이 후생의 생명체를 통해 그 과보를 형성시키는 것이므로 업이 있으면 윤회가 있고 업이 없으면 윤회도 없다. 따라서 업은 윤회의 출발점이 된다. 둘째, 업은 의식과 명색을 만들어 낼 만큼 강력한 힘을 지녔다. 12연기에서 행(行)은 식(識)을, 식은 명색(名色)을 있게 하는데 행을 업으로 보면 업은 식(의식)과 명색(육체)을 만들어 내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행위, 습관, 성향/성격, 성품 등으로 구성된 업이 비록 사고능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브라흐만-아트만 윤회설에서의 아트만의 역할, 즉 의식의 배후에서 의식과 육체를 지배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업보윤회에서는 업이 사실상 실체적 자아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셋째, 업은 인격이다. 안옥선의 논문에서 주장하는 업의 주요 구성물인 행위, 습관, 성향/성격, 성품의 총합은 사실상 인격(Personality)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업에 의해서 차례로 나타나는 A, B, C, D가 사람이라는 생명체라고 가정하면 A의 인격이 B에게 전이되고, A와 B의 인격이 C에게 전이되고, A와 B와 C의 인격이 D에게 전이되는 식으로 계속해서 내려가는 것이다. 만약 중간에 동물이나 식물, 곤충과 같은 하등 생물의 몸을 받게 되었다고 할 경우에는 그 생물학적 특징으로 인해 전생으로부터 넘겨받은 사람으로서의 특징들은 발현되기 어렵다고 봐야 한다. 이상의 특징들을 고려하면 업이 바로 실체적 자아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증일아함(23권 310)에 있는 "나는 어디서 무엇이었으며 이름은 무엇이었던가? 어떤 음식을 먹었고 어떤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았던가? 저기서 죽어 여기서 나고, 여기서 죽어 저기서 난 인연의 본말을 모두 알게 되었다."라고 고백한 붓다의 경우를 고려해 볼 때도 업이 비록 의식의 배후에서 명색을 장악하는 실체적 자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와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달리 표현하면 윤회를 하는 한 업이 바로 실체적 자아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3) 업보윤회의 모순들 업과 그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만드는 자는 없다는 업보윤회는 자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모순점들을 잉태하고 있다. 첫째, 업의 상속 동력은 어떻게 생기는가? 윤회한다는 것은 윤회하려는 의지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업의 구성물인 행위, 습관, 성향/성격, 성품 가운데서 어떤 것이 윤회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의지를 가진다는 것은 사고한다는 것이므로 이는 아트만과 같은 실체적 자아가 되어 버린다.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윤회에 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업과 만나는 의식과 갈애가 되어야 한다. 둘째, 업과 결합하는 의식과 갈애는 어디서 왔는가? 불교의 업보윤회에서는 생명체가 사망하면 의식이 멸절된다고 하므로 앞의 생명체가 남긴 업과 결합하는 의식은 앞의 생명체의 의식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의식은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갈애 역시 마찬가지인데 앞의 생명체가 남긴 갈애가 아니라면 이 갈애는 어디서 왔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2연기의 구조에 의탁하여 의식과 갈애가 업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업은 의식과 갈애를 생산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윤회의 주체, 즉 ‘실체적 자아’가 되고 만다. 셋째, 업을 만든 생명체와 그 과보를 받는 생명체의 상이성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업은 금생에 받기도 하고 내생에 받기도 하며 혹은 여러 생에 걸쳐서 받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금생의 생명체가 죽고 나면 의식마저 멸절된다고 하므로 바로 다음 생이나 여러 생에서 그 과보를 받는 생명체들과 금생의 생명체와는 별개의 존재가 된다. 다시 말해 현생의 A라는 생명체가 만든 업의 결과인 과보를 A와는 전혀 다른 생명체인 B, C, D, E, F, G…… 등등이 받게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즉, 업을 짓는 자와 보를 받는 자가 서로 다른 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모순이 해결되려면 A, B, C…… 등의 생명체들을 연결하는 업이라는 것이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 넷째, 동일성이 없는 연속성이 윤회의 증거가 될 수 있는가? 무아윤회를 주장하는 이들은 A, B, C, D, E, F, G…… 등이 모두 동일하지는 않지만 업이라는 연결고리로 인해 연속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윤회의 선상에 있는 생명체들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연속적인 자식은 부모가 윤회한 생명체가 되어야 한다. 윤회는 한 생명체의 죽음과 다른 생명체의 탄생을 전제조건으로 하는데 동시에 살아 있는 두 생명체를 윤회로 연결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므로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윤회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 이렇게 ‘동일성은 없지만 연속성이 있으므로 윤회가 가능하다.’라는 주장은 보편성을 획득하기 어려우므로 진실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다섯째, 무엇으로 윤회를 벗어날 것인가? 만약 업과 그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만드는 자는 없다는 주장을 진리라고 인정하면 무아이지만 윤회한다는 명제도 성립하게 되지만 ‘무아임에도 불구하고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라는 명제도 성립하게 된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탐구조차도 원천적으로 봉쇄당하고 만다. 여섯째, 업보윤회는 철칙인가? 업을 지으면 반드시 그 과보를 받아야 한다면 붓다나 아라한들도 모두 그들이 지은 업의 과보를 받기 위해 다시 태어나야 하거나 그들의 업이 다른 의식이나 갈애를 만나 생명체를 탄생시켜야 한다. 이렇게 되면 누구도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붓다가 선언한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거짓이 되고 만다. 따라서 붓다의 주장이 진실이 되려면 업보윤회에는 예외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업보윤회가 철칙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런 모순점들로 인해 업보윤회는 무아윤회를 설립시키는 근거가 될 수 없으니 유일한 근거를 잃어버린 무아윤회는 성립할 수 없다. 결국 무아윤회라는 주장은 궤변인 것이다. 뒤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붓다가 윤회의 고리를 끊을 수 있었던 것은 윤회할 아무것도 없다는 무아를 체득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무아이면 윤회가 없으므로 무아윤회라는 말은 토끼의 뿔이나 거북이의 털처럼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출처 : 어부림 ( 魚付林 )
글쓴이 : 거울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