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o h n C a g e
스톡하우젠은 유럽 음악에 미친 케이지의 가상적 영향을 평가함에 있어 많은 오류 중의 하나를 제거할 수 있다 . 여러 번에 걸쳐, 스톡하우젠과 뷸레즈와 푸서의 작품에서 이용되었던 ‘규제된 우연성(controlled chance)'이 케이지의 작품에 적용된 것을 보게 된다. 스톡하우젠은 그가 ’통계적’, ‘가변적’ 그리고 ‘다원적’이라고 명명한 형식의 발전이 케이지의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이 1953년 초반에 마이어 에플러(Meyer-Eppler)와의 연구에 의해 음성학과 정보 이론으로 뻗어 나갔다고 보고했다.
삐에르 뷸레즈는 최근에 존 케이지에 관한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였다.
“그는 참신하지만 아주 영리하지는 않다. 그의 신선함은 지식의 부재(不在)에서 나왔다.”
전후 전위음악의 두 대표적 작곡가들은 미국 작곡가인 존 케이지(1912년)가 그들 자신과 다른 유럽 작곡가들에게 미친 영향의 평가에 대해 후한 편이 아닌 듯하다. 이것이 아량이 모자라서인지, 아니면 미국인이 유럽 음악문화의 우세함에 위협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몹시 두려워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949년 이후 케이지가 잠시 유럽에 모습을 비친 것이 그곳의 많은 작곡가들에게 비교적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논쟁의 여지가 있긴 해도, 이러한 영향은 흔히들 생각하듯 그가 미국에서 가지고 온 음악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아이디어와 작곡 개념과 인물 자체에 더욱 기인한다. 이러한 상황은 작곡개념의 방법론이나 철학적 입장에 대한 논의 자체만으로도 이러한 방법이나 개념에 의해 쓰여진 작품들의 연주만큼이나 새로운 음악의 출현에 중요한 사건일 수 있는 시기에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한 케이지의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미학적 입장이 오랫동안 주목을 받았다는 사실을 볼 때 그의 창작품의 중요성을 가볍게 볼 수가 없다.
존 케이지의 생애 및 음악세계
존케이지는 로스엔젤레스에서 태어나 로스엔젤레스 고등학교를 1928년 최고 모범생으로 졸업했다. 포모나 대학에서 2년을 보낸 다음 파리에서 얼마간 지냈는데, 그곳은 그에게 예술-특히 시, 회화, 건축과 음악-에 대한 매력을 미국에서보다 더욱 많이 느끼게 했다. 캘리포니아의 몇몇 작곡가들의 진지한 작곡 수업에 대한 권유로 잠시 아놀드 쇤베르크의 지도를 받았는데, 그 때 쇤베르크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막 망명한 상태였다.
항상 피아노에 매력을 느꼈던 케이지는 초기에 피아노곡을 많이 작곡했고 계속적으로 일생 동안의 커리어를 통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피아노를 사용했다. 그에게는 처음부터 음높이를 선택하는 방법이라든지 피아노 소리를 변화시키는 방법을 이용한 비전통적인 아이디어를 실험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러한 변화는 간단한 약음기를 사용하여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줄 사이에 여러 가지 종류의 물건을 끼워 약간, 혹은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음색을 바꾸는 것을 익혔다. 벨트나 고무, 쇳조각들이 안에 *‘장치된(prepared)'피아노라고 알려지게 된 것에 쓰였다. 장치된 피아노를 위한 첫 곡들처럼 이 곡도 작은 무용 연구소를 위해 작곡되었다.(케이지는 그 당시 무용 수업을 위한 반주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 이후에도 계속 무용수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존 케이지는 1936년∼1938년 시애틀 코니시 스쿨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타악기만으로 된 앙상블을 조직하였고, 시카고의 디자인 학교에서 1년 간 가르친 후 뉴욕으로 옮겨갔다.
1943년부터 콘서트를 열기도 하고 교편을 잡기도 하며 작곡을 계속, 1949년 프리페어드 피아노의 창시를 비롯한 새로운 창조활동을 하여 구겐하임 재단과 국립문예 아카데미로부터 장학금과 상을 받았다.
1951년 음악가와 기술자에 의한 그룹을 결성해 직접 자기(磁氣)테이프로 음악을 창작하는 새로운 수법을 개발, 크리스티안 울프, 얼 브라운, 모톤 펠드만 및 자신의 작품을 창작하였다.
1954년에는 도나우에싱겐 현대음악제에 참가, 유럽 현대작곡가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케이지는 피아노에 다양한 프레퍼레이션을 줄 수 있는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고안해 내 그 이후로는 많은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활용한 작품을 썼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작곡을 하면서 불확정적 요소의 도입, 도형악보의 창안, 콘택트 마이크나 스피커를 이용한 음악세계의 확대 등을 독창성에 넘친 새로운 활동을 선보이고 있다.
케이지는 1945∼46년에 키타 사라브하이(Gita Sarabhai)로부터 동양 철학을, 일본의 스즈키(鈴木大出)로부터 선(禪)을 배움으로써 동양 사상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의 초기 경향은 타악기의 앙상블이나 프리페어드 피아노에 의한 음악의 창시자로서 음악을 악음의 세계에서 해방하고 조음을 포함한 다채로운 음색에 의한 작품과 리듬 구성법에 의한 작품을 쓴 작가로 알려져 왔다.
또한, 1950년대에 불확정성 음악을 확립하고서, 근대 유럽적 음악에 대한 생각과 결별하고 찬스 오퍼레이션에 의하여 작곡가의 의지나 음의 선택이 될 수 있는 대로 개입되지 않는 방법을 씀으로써 인간 중심의 미의식과는 다른 새로운 예술의 개념을 탄생시킨 작곡가로서 유명하다.
케이지가 ‘우연’을 음악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부터였다.
우연을 자연의 근원적인 원리로 인식한 그는 예술가들의 작위적인 이기심을 경멸했으며 예술과 우리들이 매일매일 경험할 수 있는 것들 사이에 구별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말은 사람들에게 역설처럼 들렸다.
케이지는 음악이란 소리예술이므로 어떠한 소리도 음악의 재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과거에 사람들이 음악으로 간주하지 않던 소리들을 과감하게 재료로 사용했다.
이는 비 미학적 물질을 사용하여 예술품을 제작함으로써 전통미학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던 뒤샹(미술가)의 행위와 별로 다르지 않다.
소리에는 네 가지 요소들, 즉 음의 고저(pitch), 음색(timbre), 큰 소리(loudness), 지속(duration)이 있으며 오히려 정적(silence)이 유일한 지속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4분 33초〉는 단지 지속만이 있는 작품이다.
오늘날 우연성이나 불확실성은 작곡기법의 하나로서 널리 채용되고 있다.
우연성의 음악은 모턴 펠드먼(Morton Feldman), 얼 브라운(Earl Brown) 등 미국 새 세대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1954년 10월에 열린 도나우에싱겐 음악제에서 케이지의 음악과 사상이 소개되어 P.불레즈(Pierre Boulez), 카를하인즈 슈토크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등의 작곡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960년대부터 우연성의 사상은 기보법 개량이나 연주행위를 회복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서양의 음악사유(音樂思惟) 자체의 반성을 불러일으켰다.
연주 도중에 연주자의 행위가 들어가도 하기 때문에 음악이 아닌 해프닝으로 보기도 한다.
케이지의 영향은 독일에서 벌어진 플럭서스(Fluxus) 그룹 예술가들의 해프닝에도 미쳤는데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대부분 케이지의 제자들이었다. 음악은 소리예술이므로 음식을 씹어 먹는 소리나 망치로 두들기는 소리도 악기 소리와 마찬가지로 음악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플럭서스 그룹의 생각은 주변의 소리들을 콜라주하는 케이지의 작곡방법과 다르지 않았다.
우연을 자연적인 형태의 원리로 인식한 그는 예술가들이 형태를 이성적으로 창조하는 것에 반발했고 예술품에서 클라이막스와 단계가 나타나는 것을 배척해 반복을 선호했다.
그는 예술과 인생 사이의 간격을 없애버리기 위해 예술가 자신을 배제하는 방법에 도달했는데 여기에는 자아와 타아의 구별을 흐리게 하는 선불교의 방법이 가장 적절하다는 것을 알았다.
연이은 ‘해프닝’과 퍼포먼스로 ‘스타’가 된 케이지는 1954년 한 강연에서 “당신 자신 속에 주위의 에테르(ether)의 카오스와 유사한 것을 가꾸어라: 마음을 해방하고, 정신을 자유롭게 하라”라는 말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테이프를 이용한 전자음향의 실험을 전개하면서 그의 음악은 하나의 거대한 사조를 이루기 시작한다.
비결정성(indeterminism),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라는 단어가 그의 예술과 사상을 지칭하기 위해 동원되었고, 그는 ‘컬트’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최소의 것이 최대의 효과를 낳는다.(minimal is maximal)”라는 명제는 순수음악계와 대중음악계를 막론하고 ‘아방가르드’이고자 하는 모든 뮤지션들의 정언명령이 되었다. 또한 소음(noise)을 포함하여 ‘비음악적 소리’를 음악에 ‘무작위적’(random)으로 도입하려는 시도 역시 케이지에 의해 봇물이 터졌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케이지에 의해 최초로 시도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의 선구자들인 에드가 바레즈(Edgar Varese), 피에르 샤페르(Pierre Schaeffer) 등의 영향력이 순수음악계에 그친 반면, 케이지는 대중음악계를 변화시키는 데에도 무시 못 할 깊은 파장을 미쳤다.
라 몽트 영(La Monte Young), 테디 릴리(Teddy Riley),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 필립 글래스(Phlip Glass) 등은 케이지의 아이디어와 테크닉을 더욱 발전시켜 미니멀리즘 유파를 만들어냈고,
이들 중 라 몽트 영(La Monte Young)은 존 케일(John Cale)을 통해 1967년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를 낳았으며, 테디 릴리(Teddy Riley)는 이르민 슈미트(Irmin Schmitt)를 통해 1971년 캔(Can)을 낳았다.
현 시점에서 케이지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어느 정도는 ‘정형화’해 있다. 이는 고전음악을 포함한 서양음악 전통의 부정이라는 형식을 취한다.
조성(tonality)으로 대표되는 수직적 원리에 기초한 작곡 방법을 부정했다든가, 음의 고저(pitch) 사이의 정확한 간격을 부정했다든가, 전자 장비를 포함한 각종 비(非)악기 적 도구를 사용하여 악기에 관한 전통적 개념을 부정했다든가 등등….
하지만 그의 혁신은 음악을 창작하는 과정에 그치지 않고 음악을 수용하는 과정까지 이어진다.
청년기부터 선불교에 영향 받은 그의 음악은 명상적인 상태를 이끌어낸다.
케이지의 음악과 철학에 대한 권위자인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가 설명하듯 “케이지의 음악은 어디에 도달하는, 진보를 달성하는 문제가 아니다…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도 미래에 대한 기대도 없다. 묵수(acquiescence)를 통해 청자는 지금(now) 속에 산다.” 이리하여 그토록 복잡하고 난해한 현대음악은 마음만 바꾸면 너무나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음악이 되고, 청자는 무기적(inorganic)이고 불활적(inactive)인 열반 상태에 접어든다.
피아노 작품을 통해 본 작품세계
케이지는 항상 하면 ‘안 되는’ 걸 하는 것을 즐겼다. 피아노와 성악을 위한 The Wonderful Widow of Eighteen Spring(방년 18세 과부 1943)에선 피아노 뚜껑을 닫고는 피아니스트가 손가락 마디로 악기의 여러 부위를 두드리게 했다. 1948년에 그는 길고 진지한 Suite for Toy Piano(장난감 피아노를 위한 조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1942년부터 1951년까지 케이지 악보의 대부분은 장치된 피아노를 위한 곡이었는데, 그 장치의 정도와 성격은 각 곡의 음악적 요구에 따라 달랐다. 이 같은 장르로 보다 긴 작품 중에는 Amores(사랑 1943)와 Sonatas and Interludes(소나타와 간주곡 1948)가 있으나 또한 Our Spring Will come(우리들의 봄은 오리오 1943), Tossede as It is Untroubled(아무런 문제도 없는 듯이 건배를 1943), Root of an Unfocus(중심 없는 뿌리 1944), A Valentine Out of Season(때늦은 발렌타인 1944), Daughters of the Lonesome Isle(외로운 섬의 딸들 1945), 그리고 Music for Marcel Duchamp(마셀 뒤쌍을 위한 음악 1947) 등의 훌륭한 제목을 가진 십여 개의 짧은 곡들이 있다.
Music for Marcel Duchamp은 약 5분 정도 걸린다. 그것은 가온음자리 표를 가진 하나의 오선체계상에 변함없는 5/4박자로 되어 있다. 전곡에 단지 여덟 개의 음만 사용되었고 모두 다 장치가 되어 있다. 악보에 주의 깊게 설명되어 있는 그 장치는 아주 간단하다. 그 중 일곱 개는 현의 틈 사이를 막는 것으로 장치되어 있고-그것들의 원래 음은 변화되지 않았으나 그들의 음색은 일종의 소리를 죽여 놓는 장치를 한 작은 쇳방울 뭉치 같은 것이 된다.- 여덟 번째 음은 고무조각과 작은 나무빗장으로 막아 놓았는데, 이 빗장은 세 현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에 놓여 있고 이것이 연주되었을 때는 음이 음높이가 없는 나무 조각 같은 소리가 난다.
음악 자체는 매우 간단한데, 짧게는 두 박자 정도 길게는 네 마디 정도의 많은 음형으로 반복되고 있다. 거기에는 정해진 길이의 휴식(쉼표)이 많이 있으나, 어떤 고조되는 느낌이나 발전 혹은 절정의 느낌이 전혀 없다. 또한 대위법적이거나 템포의 변화조차도 없다. 음악이 있을 뿐이고 더 이상의 무엇은 없는 것이다. (그 단순한 반복음형이 주기적인 침묵에 의해 끼어든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 Sonatas and Interludes는 1시간 10분 정도가 소요된다. 피아노의 88음의 반 이상이 다양한 나사와 나무빗장, 콩, 고무조각과 플라스틱으로 장치되어 있다. Music for Marcel Duchamp와는 다르게 장치가 만드는 음높이와 음색과 음향의 과격한 변화 때문에 음악이 실제로는 어떻게 소리가 날지 악보를 보아서는 알 수 없다. 짜임새가 훨씬 복잡하고 리듬과 박자의 형태가 더욱 더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onatas and Interludes는 많은 점에 있어서 이전의 음악(Music for Marcel Duchamp)과 비슷하다. 사실상 그것들은 케이지가 1948년 이전까지 피아노를 위한 소품들과 장치된 피아노를 위해 작업해 왔던 종류의 것들을 결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모든 것이 주의 깊게 기보되어 있고 어떤 기회적인 전개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거기에는 다양한 종류의 음색 변화를 사용하여 음과 비음의 요소를 통합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있다. 케이지는 리듬을 배열하는 데 있어 소리 그룹과 침묵기간 사이의 관계에까지 관심을 확대시킨다.
1949년 초 카네기 리사이틀홀에서 가진 Sonatas and Interludes의 초연이 마로 아제미안(Maro Ajemian)의 연주로 성공을 거두자 영향력 있는 청중들의 관심을 끌게 하였다. 어렵던 재정 형편은 구겐하임 재단과 아메리칸 아카데미와 내셔널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 앤드 레터로부터 받게 된 연구비로 개선되었고 1949년에 다시 유럽에 갈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그는 젊고 외향적인 작곡가 삐에르 뷸레즈를 만났는데, 토론할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 두 사람은 즉시 친한 친구가 되었다. 토론의 결과 뷸레즈에게 큰 성과가 생겼다. 뷸레즈보다 13년이나 연상인데다 사교의 폭이 넓었던 케이지는 파리두 출판사를 설득시켜 First Sonata와 Second Sonata를 포함한 뷸레즈의 작품 몇 개를 출판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나중에 뷸레즈의 미국 입국을 도울 수 있었다. 이 두 사람이 좋았던 3년 동안 줄곧 연락을 취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인데, 이 기간에 뷸레즈는 그가 작곡가로서 추구하고 있던 것을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인간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서서히 표면화되어, 3년 후 그 들 사이엔 피할 수 없는 결별이 왔다.
그러는 동안 이미 동양에 대한 연구에 깊이 젖어 있던 케이지는 동전을 던진다든가 하는 기회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의견을 도출해 내는 해설집인 주역을 접하게 되었다. 어떤 전개를 따름에 있어 그는 ‘장치되지 않은’ 피아노를 위한 Music of Change(변화의 음악 1951)를 위한 작곡법에 주역을 활용했다. 그 결과는 초기의 건반음악 기법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그의 작품 세계에 기회의 사용과 나중에는 불확정성의 전개로 연관되는 전적으로 새로운 시기가 열렸다.
네 권으로 된 Music of Change는 약 45분 가량 소요된다. 연주자에게는 어떤 기회의적용도 결코 허용하지 않으면서- 기보가 전체적으로 상세하게 되어 있다-악보는 기회를 작곡 도구로 사용하는 데 대한 케이지의 새로운 관심이 잘 나타나 있다. 그가 여태까지 보다 훨씬 더 리듬적으로 복잡한 전개를 사용했다는 것은 악보를 그냥 슬쩍만 봐도 명백히 알 수 있다.
이 새로운 관심이 거의 불가피하게 연주자에게 더 많은 ‘열린’기회를 주게 되었다. 그러나 케이지에게 있어서 제일 첫 단계는 그의 작곡법을 다듬는 것이었다. 그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개인의 선택을 무시하는 작곡 행위를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자아와 취향을 배제하는 방법을 찾길 원했다.
이어서 나온 Music for Piano(피아노를 위한 음악 1953)라고 불리는 곡에서 음들은 그가 쓰고 있는 종이 위에 있는 흠집의 위치에 따라 결정된다. 장치된 피아노를 위한 31‘57.9864 ̋ for a Pianist(피아니스트를 위한 31’57.9864 ̋ 1954)에서는 장치되는 재료와 위치가 상당 부분 피아니스트에게 맡겨져 있고, 다이내믹의 정도와 타건의 종류는 알기 어려운 그래프 방식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입체적 리듬 표기는 연주자에게 상당한 여유를 준다. Winter Music(겨울음악 1957)은 훨씬 도가 심하다. 이는 한 명에서부터 이십 명의 피아니스트에 의해서까지 연주될 수 있다. 총 20페이지로 되어 있는데 그들은 어떤 순서로 연주되든지 혹은 생략되든지 상관이 없다. 템포도 완전히 자유롭고 음자리표도 일정한 한계내에서 변동이 가능하며, 몇 개의 음들은 배음으로 연주하거나 아니면 그냥은 표기된음정이 너무 높아 닿을 수 없기 때문에 그를 위해 미리 장치를 해 놓는다.
Winter Music이 출판된 이후 수십 년 동안 케이지 악보의 많은 것들이 단지 그림-선, 원, 점-으로만 되어 있었고, 그것들에서 연주를 도출시켜 낼 수 있었다. 일련의 Variations(변주곡 1958~1966)같은 곡들이 비록 피아니스트들에 의해 연주되게 되어 있지만, ‘몇 명의 연주자에 의해 어떤 방법으로 소리를 내는지’에 대해서는 특별히 지시해 놓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이 시기는 케이지가 의도적인 작곡을 극도로 부정하는 쪽으로 몰고갔다.
1960년대 말경에 케이지는 갑자기 보다 전통적인 작법으로 되돌아갔다. 새 시기에 나타난 중요한 피아노곡이 24개의 Etudes australes(남방의 연습곡 1975)이다. 각 곡이 두 페이지 길이로 된 이 곡들은 각 손이 높은음과 낮은음자리표를 동시에 가지고 있음으로써 케이지가 발명에 대한 호기심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음을 시사하기는 해도, 어쨌든 기존의 높은음자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제목은 음들이 남쪽 하늘 상에 있는 성좌들의 도표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사실에서 나왔다.
연주자의 입장에서 보면 몇몇 케이지의 작품들은 아주 쉽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많은 경우 모든 음들과 바른 리듬을 익히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게다가 피아노를 장치하는 일은 인내와 기술, 주의와 상당한 시간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Sonatas and Interludes전곡은 전과 후에 악기를 장치하는데 수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한 번 피아노가 특별한 곡을 위해 장치되었으면 다른 곡은 모든 장치를 제거하기 전까지는 그피아노에서 연주될 수 없다. (그 때 조차도 피아노가 다시 조율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연주자가 한 리사이틀 프로그램에 몇 개의 장치된 피아노 곡을 연주할 시에는 적어도 피아노 두 대는 준비해야만 한다. 게다가 장치에 들어가기 전에 상주하는 피아노 조율사나 기술자의 허락과 도움을 부탁하는 것이 좋다.
종종 우리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주는 사람들이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수가 있다. 우리가 영향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 영향 주는 것들을 더 원망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뷸레즈는 케이지가 처음에는 참으로 놀랍다고 생각해서 서로 토론도 하고 가장 관시거리가 되는 것들에 대해서 그에게 글을 쓰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케이지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으며 실제로 케이지가 했던 것과 똑같은 일들 몇 가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는 케이지가 “별로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면서 그를 맹렬하게 배척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스톡하우젠은 케이지를 1954년에 다름슈타트로 데려오는데 도움을 주었고 당시의 모든 기록에 의하면 그 때 가졌던 강의 중에 스톡하우젠이 말한 내용이 상당히 흥미로웠다고 한다. 케이지가 그에게, 혹은 다른 유럽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그가 손을 내저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의심스럽게 여겨진다.
케이지가 나름의 특이한 공헌을 하지 않았다면 현대의 음악은 지금과는 다를 것이다. 케이지 자신이 언급한 대로, “만일 내 작품이 받아들여진다면 나는 그렇지 않은 곳으로 움직여야만 한다.”라는 말을 기억하면서도, 사람들은 각각의 곡에 따라 그에 따른 가치를 둘 것이다. 그의 작품 중 일부는 넋을 앗아갈 정도로 황홀하고, 어떤 것은 무미건조하다. 장치된 피아노를 위한 곡에는 매혹적인 순수함이 있는 반면, 또 다른 곡에서는 명상적인 성격이 강해서 메시앙을(메시앙의 곡보다 세속적이긴 해도)연상시킬 정도이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곡들에는 너무나 조용하여 단지 침묵만이 큰 소리로 남아 있다고 표현할 수 있는 승려적인 고요함이 흐른다.
우연성의 음악(불확정성 음악)
우연성의 음악은 작곡이나 연주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기회나 예기치 않은 것을 내포하는 상당한 자유를 준다.
작곡가는 사용할 음과 그 음을 사용하는 방법을 미리 정해 놓지 않고 마치 주사위를 던져서 결정하는 것과 같은 방법을 쓴다. 연주자는 자신이 연주할 음과 음악의 부분 그리고 연주 순서 같은 몇 개의 대안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음 높이나 음의 길이도 선택이 가능하여, 선택한 음을 즉흥적으로 연주하기도 한다. 어떤 작품에서는 전혀 음이 나타나 있지 않고, 단지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도표, 그림, 단순한 아이디어와 같은 상징적 부호를 모아 놓고 있다.
1951년 뉴욕의 한 음악회에서는 <상상적 풍경 4번>(Imaginary Landscape no.4)이라는 작품이 연주되었다.
통상적인 악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음원(sound source)이라고는 라디오 수십 대 뿐이었다. ‘공연’은 실시간(real time)으로 방송되던 라디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향이었다. 이듬해 <4’33’’>이라는 작품의 연주회는 더욱 악명 높다.
피아니스트가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았다. 이 작품은 통상 <침묵>(Silence·1961년 그가 직접 쓴 서적의 제목이기도 하다)이라고 불리지만, 음악이라고 할 만한 게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바로 주위의 ‘배경음’이었다. 청중들의 불평소리도 포함된 것이다.
그는 무대에 올라 정확하게 4분 33초 동안 침묵을 지키다 퇴장했던 것이다.
그는 위의 세 가지 요소들을 배제한 후 환경에서 생기는 우연한 소리만을 지속의 요소로 받아들여 작곡이라고 우겼던 것이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
NOTE: The title of this work is the total length in minutes and seconds of its performance.
At Woodstock, N.Y., August 29, 1952,
the title was 4'33" and the three parts were 33", 2'40",
and 1'20". It was performed by David Tudor,
pianist, who indicated the beginnings of parts by closing,
the endings by opening, the keyboard lid. However,
the work may be performed by (any) instrumentalist or
combination of instrumentalists and last any length of time.
FOR IRWIN KREMEN JOHN CAGE
로마 숫자가 악장을 가리키고, TACET 는 "silent(침묵)" 라는 뜻의 음악용어이다.
밑의 글은 존 케이지가 직접 적은 지시 사항인데, 세 악장의 길이를 33 초, 2분 40초, 1분 20 초로 하라는 뜻이다.
'4분 33초'의 악보는 연주자로 하여금 앉아서 소리를 내지 말고 3악장을 연주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무대에 나가 인사를 하고 피아노 앞에 앉아 4분33초 동안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인사하고 퇴장한다. (관현악 편곡도 있다 ; 여담이지만 이 곡을 직접 동영상으로 감상을 했는데 , 1악장이 끝난 뒤 지휘자가 수건으로 땀을 닦는 순간 청중들의 폭소가 터져나오는 장면에 웃었던 기억이 난다. )
청중은 가만히 앉아서 다른 데서 종이를 만지는 소리라든가 바깥에서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청중들의 기침 소리나 소곤거림이 이 작품의 구성요소가 되는 것이다.
초연 당시 케이지의 설명을 빌리자면 제1악장 사이에는 음악이 흐르기를 기다리고 있는 긴장이 느껴지고 홀 밖에 서있는 나무들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청중들에게는 들렸을 것이다. 그리고 제2악장에서는 지붕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났으며 제3악장에서는 당황한 청중이 떠드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청중과 연주가라는 관계가 없어지고, 모두 같이 회장의 음향을 듣는다라는 행위로 환원되어 버리게 된다. 거기다 덧붙여 청중 자신들이 내는 소리가 그대로 작품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청중을 방관자의 입장이 아닌 그들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여기에 동적 주체가 되게 한다. 이것으로 환경이나 인간은 끊임없이 동적인 상태로 변화하며 움직여 간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당시의 환경을 개인의 작품의 대상으로 구성하고 가두어버리면 그것은 이미 환경이 아니고 청중과의 생생한 관계가 상실된다고 말하였다.
이렇게 개개의 음이 일상생활이나 환경 속과 같이 살아있는 자연의 상태에 잡아두려면 음악을 프로세스, 물리적 현상 행위로 하여 순간 순간의 영주의 사건으로 환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1950년대 초부터 시도한 불확정성이라든가 찬스 오퍼레이션(우연에 의한 조작)이라는 음악의 방법은 이러한 사상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연주 현장에서 우연적으로 만들어진 자연스런 소리들이 결국 이 작품을 구성하면서 이른바 우연성의 음악(chance music)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연주자에게는 가장 연주하기 쉽고, 듣는 사람에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곡이 아닐런지 .. 수수께끼 또는 넌센스 퀴즈 같기도 한 이 곡을 두고 혹자는 벌거벗은 임금님을 연상하기도 한다.***
주요작품으로는 《Imaginary Landscape No.4》(1951)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서트》(1954∼1958) 《Variations I》(1958) 등이 있으며, 또 도안악보의 창안 등 독창성 넘치는 활동도 하였다.
용어 해설
Prepared Piano: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살펴보면, 피아노의 현 사이에 고무나 코일, 볼트, 창틀을 메우는 패킹, 플라스틱이나 참대 조각, 천 조각 등을 끼워 넣음으로써 평균율로 조율된 피아노의 음을 변질시킨다. 그러면 피아노는 음고의 면에서나 음색의 면에서 이질적 악기로 변모되어서 마치 인도네시아의 가믈란 음악을 연상시키는 음향을 낸다. 프리페어드 됨에 따라서 악음 음악(樂音音樂)의 왕자로서 다이내믹한 표현력을 갖고 있던 피아노는 악음과 조음이 섞인 섬세한 음색 타악기의 성격을 띠게 되는데, 케이지의 악보에는 R(고무), S(나사못), B(볼트), SR(나사못과 고무의 병용) 같은 것들이 적혀 있다.
케이지는 음악을 생각할 때, 음을 전제로 하기보다는 음색이나 음 자체를 문제시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었다. 프리페어드 피아노를「한 사람의 주자에 의하여 컨트럴 가능한 타악기 오케스트라」라고 부르고, 그 음색적 가능성을 여러 가지 형태로 추구하였다.
Minimalism: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시각 예술 분야에서 출현하여 음악, 건축, 패션, 철학 등 여러 영역으로 확대되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최소한도의, 최소의, 극미의’라는 minimal에 'ism'을 덧붙인 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는 196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미니멀리즘은 기본적으로 예술적인 기교나 각색을 최소화하고 사물의 근본 즉 본질만을 표현했을 때, 현실과 작품과의 괴리가 최소화되어 진정한 리얼리티가 달성된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회화와 조각 등 시각 예술 분야에서는 대상의 본질만을 남기고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경향으로 나타났으며, 그 결과 최소한의 색상을 사용해 기하학적인 뼈대만을 표현하는 단순한 형태의 미술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미술이론가이기도 한 도널드 주드(Donald Judd)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음악에서의 미니멀리즘은 1960년대 인기를 끌었던 필립 글래스(Philip Glass)의 단조롭고 반복적인 합주곡처럼 기본적으로 안정적인 박자에 반복과 조화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건축 디자인 분야에서도 소재와 구조를 단순화하면서도 효율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타났으며, 루드비히 미스반데어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 리차드 풀러(Richard Buckminster Fuller)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미니멀리즘은 패션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장식적인 디자인을 가능한 제거한 심플한 디자인이나 직선적인 실루엣의 선정적인 옷, 또는 최소한의 옷으로 훌륭한 옷차림을 연출하는 방법 등이 모두 미니멀리즘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도 미니멀리즘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유만을 주장하는 금욕주의 철학, 복잡한 의식을 없애고 신앙의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종교적인 흐름 등 많은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Indeterminism: 신(神) 또는 인간이 의지의 자유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신학상 ·철학상의 학설이며 결정론(決定論)과 대립된다.
⑴ 신의 자유의 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지주의(主知主義)에 대한 J.둔스 스코투스나 W.오컴의 반론으로 대두되었다. 신의 의지는 오성(悟性)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에 신의 오성의 내용을 이루는 영원진리도 신의 의지의 자유로운 결의에 의하여 성립된다고 생각한다. 이 사고방식은 근세의 철학자로서는 R.데카르트에서 현저하며 만년의 F.셸링도 같은 견해를 보인다.
⑵ 인간에서 의지의 자유는 본래 신의 예정의 필연성과 대립하여 주장된 것이다. 현저한 예로서는 M.루터의 예정설(豫定說)에 반대하여 인간의 자유를 옹호한 D.에라스무스의 경우가 있다. 근세철학에서 의지의 자유는 자연법칙의 필연성에 대립하는 것으로 다루어진다. 그것은 다음 두 입장에서 주장한다.
① 자연현상이 필연적 인과성(因果性)에 의한 지배를 승인해야 감성계(感性界)를 초월한 가상계(可想界)에서 인간의 자유가 발동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I.칸트가 주장한 선험적(先驗的) 자유에서 전형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② 자연법칙 자체에 우연성을 승인하고 그것을 토대로 의지의 자유를 긍정하는 입장이 있다. 유심론(唯心論) 철학이 대체로 이런 사고방식이다. 특히 프랑스의 신유심론(新唯心論) 철학자들(부트루, 베르그송)은 이 입장을 대표하는 사상가들이다.
이 밖에 심리학적 비결정론으로서 인간행위의 자유, 외적 조건의 제약을 받지 않는 의지의 자기 결정력을 인정하며 W.제임스, F.실러, E.부트루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 양자역학(量子力學)에서의 불확정성 원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