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기분에 따라 분위기에 따라 즐기는 재즈
재즈를 즐기는 데에는 제각각 방법이 다양하다. 누구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출근 전 한두 시간을 가뿐하게 감상 시간으로 정해 놓고 즐기는가 하면 누구는 꼭 술을 마셔야만 재즈를 듣는다. 또 어떤 이는 혼자가 아니면 재즈를 듣지 않는가 하면 반대로 떠들썩하게 사람들이 몰려들어야만 재즈 음반을 올려놓는 사람도 있다. 그에 따라 취향 역시 각양각색 이어서 여성 보컬을 즐기는 사람, 퓨전 재즈의 박력을 높이 사는 사람, 반대로 저 옛날의 케케묵은 골동품만을 재즈로 치는 사람도 있다. 따라서 재즈는 꼭 이것이다, 혹은 이런 재즈만이 즐길 가치가 있다라고 이야기하면 바보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그래서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기분을 살리기 위한 테마 별 재즈 음반 코너를 꾸며 봤다. 이를테면 술을 마실 때, 혹은 연인과 데이트할 때 등등 각각의 테마에 따라 이에 어울리는 음반을 찾아 꾸며봤다.
물론 꼭 그런 음반이 그런 분위기에 맞는다라는 정답은 없다. 하지만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는 상태에서 모든 신경을 집중해서 들어야 하는 음악을 찾는 경우란 거의 없을 것이다. 연인과 단둘이 있는 상태에서 박력 있는 리듬의 일렉트릭풍의 재즈를 듣는 경우가 드물듯이 말이다. 말하자면 보통 사람들이 흔히 가질 법한 정서에 맞춰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에서 찾아본 작업이기에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다. 어찌 되었건 재즈라는 음악이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는 만큼 그때 그때의 기분에 따라 그에 걸 맞는 재즈를 찾아 듣는다면 재미가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니 여러분도 이번 기회에 비(雨)가 되었건 커피가 되었건 적적한 테마를 설정해서 그에 걸 맞는 음반을 찾아보는 것이 어떨지.
영화로 만나는 재즈의 매력
안개 자욱한 도시의 뒷골목. 마지막 이별을 앞둔 연인의 긴 키스, 멀리 카페에서 흘러 나오는 색소폰 소리..... 아마 멜로드라마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영화 속의 이런 분위기를 한두 번쯤 상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원래 영화를 지독하게 좋아하다 재즈를 덤으로 알게 된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함께 흑백 텔레비전 앞에 앉아 졸린 눈을 부비며 ‘주말의 명화’나 ‘명화극장’ 따위를 열심히 보다가 그 속에 흐르는 음악이 재즈임을 알고 재즈광이 된 케이스이다. 사실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스타들, 이를테면 험프리 보가트는 멀리 떠나간 여인을 그리워하면 재즈 카페를 경영하는 주인으로 나오고(<카사블랑카>), 로버트 드 니로는 빅 밴드 시절 광기 어린 솔로를 불어 젖혔던 색소폰 주자로(<뉴욕 뉴욕>), 또한 어깨가 훤히 드러난 드레스 차림을 한 미셸 파이퍼는 그랜드 피아노 위에 엎드려 스탠다드 넘버를 부르는(<베이커 형제들>) 등 모두 재즈 음악을 빼놓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이미 재즈 음악을 어느 정도 듣고 살아 왔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속에 흐르는 재즈는 매력이 많다. 특히 애절한 이별의 장면이 라든가 시거를 문 사내들이 험악한 눈초리로 카드 패를 돌리는 장면에서 흐르는 재즈에는 뭔가 아련하면서도 위험스런 느낌을 전해 준다. 그래서 평소 필자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 만일 당신이 진정한 영화 광이라면 동시에 재즈 광이어야 한다고. 이건 결코 농담이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본 영화 중에 재즈를 쓴 작품이 뭐가 있어?” 라고 빈정거리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딱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다. 왜냐면 그 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재즈의 역사가 약 1백년, 영화 또한 1백 년을 넘어서고 있다. 게다가 둘은 미국에서 동시에 발생해서 또 함께 성장해 온 장르다. 어찌 보면 이 두 매체를 빼놓고 20세기 문화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정도다. 이를테면 동전의 양면이라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현재 헐리우드에서 활동하는 감독 중에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예를 들면 뉴욕을 떠나지 않고 오랫동안 뉴요커 이야기만 다루는 우디 앨런의 경우 매주 월요일마다 단골 재즈 클럽에 가서 클라리넷을 연주한다. <대부>와 <지옥의 묵시록>으로 잘 알려진 프란시스 코폴라는 아버지가 유명한 재즈 뮤지션일 뿐 아니라 약 2만장의 재즈판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택시 드라이버>의 마틴 스콜세지도 이에 뒤질세라 재즈 영화를 만드는가 하면 <라운드 미드나이트>라는 영화에 자청하기도 했다. 특히 감독 겸 배우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재즈 피아노 연주는 수준급이고, 재즈 뮤지션 찰리 파커의 일대기를 다룬 <Bird>라는 영화를 만들었는가 하면 <Straight No Chaser>라고 델로니우스 몽크라는 피아니스트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아마 여태 재즈에 무관심한 상태에서 영화를 본 것을 후회하는 독자도 꽤 나올 것 같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부지런히 영화를 통해 재즈를 공부해 보도록 하자. 여담이지만 요즘 오디오 마니아라고 자청하는 사람 중에 AV 시스템이라 하여 집안에 극장을 꾸며 놓는 경우가 많아졌다.
THX 인준을 받은 앰프에다 서라운드 스피커를 달아 놓고 커다란 프로젝트에 영사하는 스펙터클한 영화는 사실 눈과 귀를 골고루 즐겁게 해준다. 하지만 이런 분들이 재즈를 사운드 트랙으로 하는 영화에 관심을 갖는다면 단순한 사운드의 쾌감보다 더 진한 감동을 맛볼 것이다. 최근에 필자가 손수건을 적셔 가며 본 영화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다. 원작을 재미있게 읽은 탓에 일부러 극장에는 혼자 갔다. 혹 눈물이라도 글썽이면 동행한 사람에게 창피할 것 같아서다. 한데 감독이 클린트 이스트우드인만큼 역시 사운드 트랙은 1950~60년대의 걸쭉한 재즈 넘버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도 기악보다는 보컬 쪽이어서 다이나 워싱턴의 낭랑한 음성이라든가 자니 하트먼의 굵직한 저음에 흠뻑 빠질 수 있었다. 특히 이런 음악을 배경으로 중년을 넘어선 두 남녀가 초라한 부엌에서 춤을 추는 대목은 그 어떤 화려한 무도회 장면보다도 감동적이었다. 과연 나도 환갑이 다 된 나이에 저런 감수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탄식이 나오는 대목이었다.
남성들이 우글거리는 할리우드에 노라 에프런이란 여감독은 상당히 이색적인 존재다. 당초 시나리오 작가로 출발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라는 걸작을 발표한 후 감독으로 전향, 그후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발표했다. 물론 두 작품 모두 맥 라이언이 주연을 맡았고 또 배경 음악으로 재즈를 썼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흥미롭다. 먼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는 명작이다. 특히 이 영화에선 얼만 전 우리나라를 다녀간 적이 있는 해리 코닉 주니어가 음악을 담당해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과연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지지 않고 지속적인 우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런 흔하디 흔한 질문을 갖고 이 영화는 시작된다. 그러나 연이은 조크와 낭만적인 대목은 관객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든다.
당시 해리 코닉 주니어는 갓 데뷔한 신인이었다. 그렇게 빼어난 외모에 매력적인 목소리라면 당연히 팝을 했어도 좋았지만 그는 재즈에 도전했다. 기교가 듬뿍 가미된 피아노 연주에 낭랑한 보컬은 이 영화를 통해 곧 인정 받았고 재즈 뮤지션도 스타가 될 수 있다는 선례를 보여주었다. 특히 <It Had To Be You>와 <But Not For Me>등에서 보여지는 스탠다드한 맛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은 이런 여세를 몰아 제작된 일종의 후편이다. 홀아비가 된 아빠에게 멋진 애인을 만들어 주려는 한 꼬마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이 영화는 사랑이란 감정이 때로는 한 순간의 우연이라든가 찰나적인 텔레파시로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그려 내고 있다. 아마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옥상에서 결국 상봉하게 되는 두 남녀를 본 관객들이라면 언젠가 자신에게도 맞는 짝이 저렇게 멋진 순간에 나타나겠지 하는 환상을 품었을지도 모르겠다. 필자도 역시 그랬으니까.
노라 에프런 감독은 처음부터 사운드 트랙은 회상적인 분위기가 물씬 넘쳐 나는 넘버들이어야 한다고 작정한 듯한 곡들을 선택했다. 그 중에는 <Stand By Your Man>과 같은 컨트리도 있지만 역시 멋진 재즈 넘버도 잊을 수 없다. 필자는 이 앨범에서 <As Time Goes By>라든가 <Making Woopie>같은 곡을 좋아한다. 가수들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반주도 현대적이어서 좋고 분위기도 만점이다. 이런 곡들로 가득 찬 사운드 트랙이라면 며칠을 들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이번 기회에 재즈 뮤지션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도 아울러 소개해 보겠다. 주인공이 재즈맨인만큼 아주 잘 익은 솜씨의 재즈를 즐길 수 있으며 아울러 재즈라는 어려운 음악을 하면서 숱한 난관을 넘어야 하는 뮤지션들의 삶을 읽을 수 있어서 여러모로 좋았다.
숱한 재즈 영화 중에 <Round Midnight>처럼 감동적인 작품도 드물다. 필자의 시선을 끈 부분은 이 영화가 실화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과 아울러 감독이 프랑스인이라는 점이다. 재즈하면 미국을 떠올리는 독자에게 이 사실은 좀 의아스러울 것이다. 상황을 설명하면 이렇다. 50년대 미국 재즈계를 주름잡았던 버드 파웰이란 피아니스트가 있다. 재즈를 조금만 공부해도 단번에 알 수 있는 빅 네임이다. 그는 인종 차별과 재즈맨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질린 나머지 1959년 파리로 이주하고 만다. 그런데 그곳 허름한 카페에 출연하던 파웰에 매료된 나머지 매일 나타나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프란시스 포들러스란 프랑스인으로 그 또한 돈이 없어서 궁할 땐 카페 밖에서 쪼그리고 앉아 파웰의 음악을 감상할 때도 있었다. 이런 프랑스인의 재즈 사랑하는 마음을 알았는지 어느 날 그가 카페에 왔을 때 파웰은 넌지시 그에게 맥주 한잔 사라고 말을 붙인다. 어쨌든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우정은 아름답게 지속된다. 프란시스는 마약과 알코올로 몸과 정신이 피폐해진 파웰을 정성스럽게 돌봐 1964년 미국으로 귀환할 때에는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Round Midnight>는 바로 이런 스토리에 착안해서 만들어진 영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파웰 역을 맡은 배우가 덱스터 고든이라는 테너 색스 뮤지션이라서 악기는 피아노가 아니었다는 정도다. 그리고 고든의 노련한 연기는 그 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낄 정도로 뛰어났다. 놀라운 일이다.
반면 <Mo' Better Blues>는 재즈 뮤지션에 관한 영화지만 전작처럼 유명한 아티스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짙은 어둠 속에 묻혀 버린 무명 여주인공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한참 잘 나가는 트럼펫 주자.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야구하고 놀자고 해도 연습에 몰두하면서 언젠가는 일류 뮤지션이 될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런데 그의 매니저가 도박 빚에 몰려 늘 말썽이 많았다. 어느 날 그라 깡패들에게 구타당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싸움판에 끼여든 것이 잘못이었다. 날아온 주먹이 그만 입술에 맞아 흉하게 일그러지고 만 것이다. 입술은 트럼펫 주자에게 있어 일종의 악기다. 그런데 입술이 망가졌으니 다시는 연주를 할 수 없게 된다. 그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그후 낙담의 세월이 흐르고 심기일전한 주인공은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지만 대신 그의 아들에게 트럼펫을 가르친다. 아버지가 못다 한 꿈을 자식이 이뤄주길 바라는 것일까? 대부분 재즈계에 몸담았던 사람들이 이렇게 중도에서 꿈을 포기하고 만다. 혹자는 사고로 또 혹자는 재능 부족으로. 이런 뒷동네 이야기를 따뜻하게 그린 <Mo' Better Blues>는 진실되게 재즈맨에 접근한 영화인 것이다.
필자는 유달리 이 영화의 사운드 트랙을 좋아한다. 브랜포드 마살리스며 테렌스 블랑차드 등 당대의 내노라 하는 일급 뮤지션들이 총출연한 것도 대단하지만 타이틀 트랙이라든지 <Say Yeh>등 멋진 넘버들이 많다. 특히 오프닝은 신다 윌리엄스란 여가수가 부른 <Harlem Blues>인데 애절한 목소리가 일품이다. 지금도 재즈와 영화의 밀월은 계속되고 있다. 두 장르를 모두 좋아하는 팬들뿐 아니라 그 어느 한쪽에만 관심있는 사람들도 한번 관심을 가져볼 만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록과 재즈가 다른 이유와 그 나름의 매력
언젠가 록 음악으로 소문난 카페에 간 적이 있었다. 주인과는 안면이 있었으므로 맥주 한잔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코미디 같은 사실을 하나 들려주었다. 그곳은 록과 더불어 가끔 재즈를 틀어 주기도 한다. 그런데 메탈이라든가 랩같이 록과는 전혀 번지 수가 맞지 않은 음악이 나오면 대뜸 이런 음악이 재즈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농담이 아니다. 사실 재즈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 중에 록 음악과 재즈의 차이점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비틀즈나 레드 제플린의 음악을 재즈로 아는 팬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계가 모호한 장르의 음악들이 있다. 이른바 퓨전이라든가 재즈 록으로 분류되는 종류가 그렇다. 이런 음악이 나오면 대개는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록 음악이 출현한 것은 50년대 중반이다. 이제 겨우 40세를 넘겼을 뿐이다.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는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셈이다. 그런데 이 초창기 록, 이른바 록큰롤이란 음악은 주로 백인들이 흑인 음악을 차용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점이 재미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엉덩이춤, 버디 홀리의 격정적인 리듬, 척 베리의 오리걸음 제스처. 한마디로 록큰롤의 등장은 백인이 흑인의 리듬감, 원시적인 생동감 등을 차용해서 만든 장르인 것이다. 그래서 척 베리나 리틀 리차드 같은 흑인들이 자연스럽게 록큰롤의 파이오니어로 자리잡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록의 리듬은 재즈처럼 4박자를 기조로 하고 있으면서도 좀 다르다. 재즈가 두 번째와 네 번째 비트에 강조를 주는 데 반해 록은 주로 세 번째, 가끔은 첫 번째도 함께 강조를 둔다. 말하자면 전혀 반대되는 리듬감을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원시적으로 감각에 호소하는 쪽은 역시 록이다.
재즈의 리듬감을 가리켜 ‘오프비트(Offbeat)’라는 형용사를 쓰곤 하는데, 정상적인 리듬에서 좀 벗어난 듯한 느낌을 표현한다. 그런데 이런 부분을 스윙이라 하여 재즈적인 맛의 기본으로 치고 있다.
만일 스윙감을 재현해 낼 수 없다면 절대로 재즈를 연주할 수 없다. 이런 사형선고는 신인들에게 종종 내려지기도 한다. 재즈가 그만큼 한번 꼬인 음악이기 때문에 연주하기가 힘들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사용하는 악기에서도 차이가 있다. 재즈는 피아노, 베이스, 드럼 등의 리듬 파트 위에 혼 악기가 멜로디를 담당하는 것이 주조인데, 록에 오면 피아노와 혼이 리듬을 맡고, 멜로디 파트 모두를 일렉트릭 기타로 해결해 버린다. 거기에 메시지를 집어넣은 보컬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재즈의 절대 음악적인 면보다는 가곡의 느낌이 더 강하다.
그러나 초창기의 록큰롤을 보면 재즈 뮤지션이나 리듬 앤드 블루스 계열의 흑인 아티스트들과 연관된 부분이 꽤 많았다. 하지만 60년대에 들어와 영국을 중심으로 비틀즈, 롱링 스톤즈, 후 등의 수퍼 그룹들이 출현하면서 록 음악의 기본적인 틀이 완전히 정립되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이때부터 재즈와 완전히 차별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들 밴드가 기본으로 삼았던 것은 블루스 쪽이었다. 특히 블루스에서 쓰는 스케일과 음의 조합을 록적으로 절묘하게 바꿔 놓은 롤링 스톤즈 같은 그룹은 지금도 인기가 있을 정도다. 그래서 60년대 록 음반을 보면 머디 워터스, B.B. 킹 등 블루스의 거성들이 여타 백인 밴드와 어울려 잼을 벌인 경우가 많았다. 어떤 면에서 록은 철저히 블루스의 장점과 특기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장르인 셈이다.
50년대까지만 해도 대중음악이라고 하면 재즈였다. 마일즈 데이비스, 소니 롤린스, 찰리 파커 등은 단순한 재즈 뮤지션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스타였다. 그런데 60년대 초반, 일명 ‘브리티쉬 인베이션(British Invasion)’이란 움직임이 나온 후부터 대중음악의 왕좌는 록으로 넘어간다. 흑인 음악 쪽에서도 리듬 앤드 블루스, 소울 음악 등 보컬리스트 쪽이 강세였으므로 자연히 재즈는 엘리트 음악 내지는 마이너리티의 전유물로 떨어지게 되었다. 이때 역전되어 버린 전세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음반 판매량으로 말하자면 미국이 2퍼센트이고 일본이 3퍼센트 내외다. 그나마 프랑스 정도가 6퍼센트에 육박하는데, 미미한 수치라고 할 수 밖에 없다.
60년대 말에 오면 재즈 뮤지션들 중에서 자각의 목소리가 나온다. 이때 록에서는 사이키델릭 사운드라든지 포크 록 등 다양한 장르가 나왔으며, 에릭 클랩튼, 지미 헨드릭스, 제프 벡 등 연주 실력도 뛰어난 천재들이 수없이 배출되었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들춰내 주며 즉각적인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록 음악에 열광했다. 그러므로 마일즈 데이비스를 위시한 칙 코리아, 허비 행콕, 존 맬러플린 등 진보적인 재즈 뮤지션들이 서둘러 록 음악의 장점을 수입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퓨전 재즈라는 장르다.
이 즈음 발매된 문제의 퓨전 음반으로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In A Silient Way>와 <Bitches Brew> 등을 꼽을 수 있다. 물론 기조는 재즈지만 록 뿐 아니라 민속음악, 아프리카 리듬까지 골고루 차용해 와 새로운 기분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일단 이런 음반들이 포문을 열었고 70년대에는 그 뒤를 이어 많은 퓨전 뮤지션들이 나온다. 그중 주목할 만한 음반으로는 웨더 리포트의 <Heavy weather>, 보브 제임스의 <One>, <Two>, <Three>, <Four>, 칙 코리아의 <Return to Forever>, 허비 행콕의 <Head Hunters>등 상당히 많다. 이들의 특징이라면 경쾌한 록의 비트에 재즈적인 화려한 개인기를 펼친 점이라 하겠다. 특히 일렉트릭 악기를 다채롭게 사용함으로서 눈부실 만큼 복잡하면서도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애드립을 감상할 수 있다.
이즈음 록 음악계에서도 이에 응답이라도 하듯 재즈를 록 음악에 접목시키기 위한 시도들이 나온다. 이를테면 보컬, 기타 등의 일렉트릭한 사운드는 그냥 두지만 대신 중간중간 브라스 섹션을 삽입했던 밴드가 있다. 지금도 활동중인 시카고라든가 블러드, 스웨트 앤드 티어즈 등이 그런 밴드다. 한편 밴 모리스 같은 사람은 꾸준히 싱어 송 라이터로서의 길을 걸으면서도 자신의 앨범에 재즈 뮤지션들을 초빙해 세션을 해왔다. <Astral Weeks>나 <Moondance>등을 들으면 분명히 록의 기조이지만 절묘하게 재즈의 장점이 어렌지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록과 재즈는 서로에게 영감을 주며 각자의 길을 굳건히 걸어가고 있다. 최근에 발표된 허비 행콕의 <New Standards>를 들어보면 너바나, 스티비 원더, 돈 헨리 등 록 음악계의 거물들 작품을 재즈로 해석한 부분이 재미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록과 재즈의 차이란 생각보다 크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 각자의 개성을 살려 가며 함께 청취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것이다.
커피를 마시며 즐기는 재즈
필자는 커피를 무척 좋아한다. 물론 하루에 열 잔씩이나 즐길 정도로 중독자는 아니지만 커피 자체가 주는 맛과 그 분위기를 좋아한다. 필자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만 해도 우리에게 널리 퍼져있던 커피는 냉동 건조 커피였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 놓고 한동안 끓이다 보면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른다. 그러면 미리 준비해 놓은 컵에다 커피, 프림, 그리고 설탕을 두 스푼씩 넣어서 끓는 물을 부으면 멋진 커피가 된다. 그런 커피를 마시며 소설책을 읽던 풍경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그 당시 나는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우리를 가르쳤던 대학생 선배들의 집에 가면 커피포트와 커피 세트는 꼭 방 한 구석에 놓여 있었다. 어린 마음에 나도 대학에 들어가면 저 기구는 꼭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학교 앞의 조그마한 카페는 커피값이 250원이요, 조금 더 가면 클래식만 전문적으로 틀었던 ‘레테’란 곳은 5백원 이었다. 무려 두 배나 차이가 났지만 대부분 레테로 향했던 것 같다. 물론 분위기 때문이었다. 80년대 초반의 일이니까 꽤 먼 옛날이지만 내게는 아직도 어제의 일만 같다. 어쨌든 강의가 끝난 후에 이런 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면 왠지 신이 났었다. 마치 커피는 책의 내용을 머리 속에 술술 들어가게 하는 효험이 있는 약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런 카페란 곳의 커피 맛은 집에서 타 먹는 수준과 별 차이가 없었다. 물을 끓여 건조 커피를 대충 커피잔에 타고는 손님이 알아서 프림과 설탕을 넣는 식이었다. 당시 철학과에 다니던 한 친구는 이런 커피를 지독히 싫어해 무조건 블랙만을 고집했다. 그것도 앉은 자리에서 서너잔은 마셔대던 대단한 중독자였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인스턴트식의 커피보다는 원두 커피를 더 즐긴다. 입맛이 변화된 탓도 있을 것 같고, 또 여러 기구를 이용해 커피를 끓여 내는 즐거움도 한몫 차지하는 것 같다. 필자는 원두 커피를 처음 대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이야기를 해 보겠다. 대학 다닐 때 레테에 자주 모여 커피를 마시던 동아리가 있었다. 당시에는 노래방이나 비디오방 같은 곳이 전무했던 시절이므로 그저 카페에 모여 진득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때 사귄 S란 친구를 통해서 이 원두 커피를 처음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호화주택이었던 60여평의 넓은 아파트에 서구식으로 시원시원하게 꾸며진 인테리어부터 그 친구의 집은 날 압도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날 감동시켰던 것은 그 집에서 나오는 커피였다.
사람은 일단 한번 그레이드 업 되면 절대로 다운하지 못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내가 꼭 그랬다. 그 이후 웬만한 커피숍의 커피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한번은 호텔 커피가 맛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곳으로 원정을 갔던 적도 있었다. 당시 그곳의 커피는 한잔에 2천원 이상을 넘겨 받았기 때문에 대단한 용기와 모험심이 필요했다. 물론 대단히 감격했던 것 같다. 한데 재미있는 일은 그 S란 친구가 불현듯 미국의 미시건 대학으로 유학을 가면서 일어났다. 그곳에서 그는 헨드릭스란 흑인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고 한다. 함께 키스 재릿이며 팻 메스니의 음반을 들으며 친해졌는데 이 친구의 커피에 대한 탐닉이 거의 종교적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헨드릭스는 너무 가난해 변변한 오디오며 컴퓨터도 없었단다. 사는 곳이라고 해봤자 할렘을 겨우 면한 수준이고, 등록금이 없어서 아르바이트로 저축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커피 가는 기계와 끓이는 도구만큼은 최고급으로 장만해 놓고 커피 한잔 끓이려면 무려 30분은 족히 들 만큼 정성을 다했다는 것이다. 그는 원두를 커피 가는 도구에 넣어 손으로 일일이 돌린 후 끓이는 기계에 넣어 물을 조절하고, 그런 후 커피와 프림을 맞추는 일련의 행위를 마치 일본인의 다도에 버금가는 집중력과 정성으로 해냈다.
한데 정작 슬픈 이야기는 여기서 부터다. 그는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한데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엄마가 그 기구를 쓰레기통에 처넣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때 그 친구의 낙담한 표정을 상상해 보라. 거의 자살 일보 직전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상심했을까. 일반인의 시각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겠지만 커피를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어쨌든 이후 커피 하면 헨드릭스란 흑인이 떠오르고 또 커피의 색깔만큼이나 검고 진한 재즈를 연상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무슨 의식처럼 오디오의 전원을 켜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잔과 함께 재즈를 듣는다. 내 개인적으로 제일 마시고 싶음 커피는 카페오레다. 프랑스에선 이렇게 말하지만 스페인에 가면 카페 덜레체라고 한다. 이름이야 어쨌든 유럽에 갔을 때 나는 거의 이 커피에 중독되다시피 했다. 느지막이 잠꾸러기처럼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편다. 긴 하품을 하며 슬리퍼를 끌고 골목 어귀를 돌아 나가면 늘 카페가 있다. 그곳에 기어들어가 크라상과 함께 마시는 이 커피맛은 정말이지 일품이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 때마다 다음날 아침에 마실 커피를 생각하면 흥분이 되어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우리나라도 유럽처럼 이런 카페가 동네 구석구석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우선 커피하면 피아노의 앙증스러운 연타가 귀를 간지럽히는 곳이 듣고 싶어진다. 피아노 트리오의 간결한 구성과 커피의 진한 맛이 의외로 잘 조화를 이루는 것도 같다. 키스 재릿이나 칙 코리아의 앨범도 좋지만 필자는 특히 듀크 조단의 <Flight To Denmark>를 좋아한다. 사실 이 피아니스트는 이 앨범을 낸 뒤 5년 후 덴마크 시민이 되어 버렸다. 그런 때문인지 이 앨범을 듣고 있노라면 마시던 커피잔을 내 던지고 덴마크행 비행기표를 끊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얀 눈길을 걷는 조단의 모습이 그려진 자켓을 보면 신비로운 북구의 겨울을 한잔의 커피로 녹여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팻 메스니의 음반도 좋다. 그의 몽롱하고 사려깊은 음색이 돋보이는 기타는 마치 졸음이 밀려올 찰나 한잔의 커피로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효과와 같다.
커피 하면 담배를 빼놓을 수 없다. 덱스터 고든의 <Ballads>와 아트 블래키의 <Buheina's Delight>는 그런 애연의 맛이 잘 포착되어 있다. 앰프의 볼륨을 올리고 커피 한잔 마시다가 칙 하고 성냥을 그어 담배 한 모금 태우는 맛이 잘 그려진 자켓이 아닌가 한다.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타지 않은 블랙 커피를 마신다고 하면 역시 존 폴트레인의 진한 색소폰이 좋다. 그의 음울하고 풍요로운 음색은 블랙 커피의 검은 맛과 일맥상통한다. 가만히 생각하면 커피, 흑인, 재즈는 뭔가 통하는 것도 같다. 존의 <Blue Train>과 같은 음반은 커피를 연상케 하는 자켓이며 음악적 분위기가 이런 기분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50년대풍의 미인과 데이트할 때
얼마 전에 야마다 에이미란 일본 여성작가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단평을 모아 놓은 책인데, 재미있는 부분이 있어서 인상에 남았다. 그 단편의 주인공은 추리작가다. 늘 아르마니라든가 체루티 같은 일류 브랜드의 옷을 입고 50년대풍의카페와 술집을 찾는다. 말하자면 험프리 보가트라도 된 양 착각하는 것이다. 때문에 비서는 그의 취향을 잘 알고 있다. 소니 클라크의 음반 자켓중에 긴 치마를 입고 걷는 여성의 다리를 찍은 사진이 있는데, 바로 그런 유의 여자에게 매료되어 있음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 보면 그 음반에 대한 정보가 없다. 그냥 소니 클라크라는 피아니스트만 언급외어 있을 뿐이다. 이 대목에서 웃음이 나온 것이다.
실은 그 음반의 제목은 <Cool Strutting>이다. 직역하자면 점잖게 느릿느릿 걷는 모습을 이야기한다.
자켓의 사진 그대로가 제목으로 표현된 것이다. 나 역시 이 음반에 매료되어 자켓 디자인만으로도 베스트 10에 손꼽힐 만하지 않나 생각했다. 갑자기 50년대 이야기가 나온 것은 요즘 맘보의 열풍도 있고 또 패션에도 복고풍의 바람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부모님의 젊었을적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물론 50년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라 흑백에다가 화질도 떨어지지만 뭔가 가슴을 저미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 50년대라는 시간이 주는 추억 때문이 아닌가 싶다. <Cool Strutting>이 바로 그런 기분을 되살려 주었다. 또 과연 50년대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사랑했으며 또 어떻게 생각 했을까 궁금증이 일었다. 중요한 사실은 이 50년대야말로 재즈에서는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내 재즈 컬렉션 중 약 70퍼센트가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을 정도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가끔 50년대풍으로 모자를 쓰고 레인 코트도 걸치고 낯선 스탠드 바에 가 보고 싶어진다. 아마 아르마니라든가 닥스 같은 회사가 이런 기분을 십분 표현한 브랜드가 아닐까 싶다. 내 친구 중 한 명이 아르마니 하면 나자빠질 만큼 좋아하는데, 카탈로그를 보면 아무리 옷에 무심한 남자라도 한번쯤 빠질 만한 매력이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생각해 보면 이런 50년대식의 기분과 무관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50년대풍의 미인에 대한 추억도 새롭다. 내 경우 영화라든가 사진에서 본 것이 전부지만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또렷한 것은 무슨 연유일까?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오드리 헵번, 데보라 카, 나탈리 우드, 에바 가드너, 실바나 망가노‥‥,참으로 대단한 미녀들이 떠오른다. 고등학교에 다닐 땐 이런 미녀들의 흑백 사진을 모아 벽에 잔뜩 붙여놓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기분이 새삼 용솟음치는 것도 같다.
아마 이런 느낌 때문에 나는 여성 재즈 보컬을 즐겨 듣는 것도 같다. 음악성을 따지자면 기악 쪽이 한 수 위지만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재즈 보컬리스트를 볼 때마다 느끼곤 한다. 어릴 적부터 각인된 50년대의 추억, 50년대의 미인에 대한 갈망 등 복잡한 감정이 채 지워지지 않은 탓도 있을 것 같다. 잘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패션이 다양화되고 눈에 띄는 복장이 많아진 서울이지만 아직도 50년대식의 복고풍으로 멋있게 차려 입은 여성은 만나지 못했다. 기껏 되돌아간다고 해봤자 70년대의 판탈롱이나 60년대의 미니 스커트니 왠지 시작하다 만 기분이다. 그래서인지 총각 시절엔 혹 데이트라도 하게 되면 그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한때는 압구정동의 모 카페에서 50년대에 나온 명기 JBL 패러곤을 매킨토시의 진공관식 MC 275에 물려서 올디스만 틀곤 했었다. 해상력으로 말하면 지금에 훨씬 못 미치겠지만 굵직하고 매력있게 울려 나오는 보컬의 멋은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설렐 지경이었다. 그래서 제법 마음이 맞다 싶으면 그런 곳으로 여성을 초대했지만 반응은 신통찮았다. 돌이켜 보면 그저 나 혼자만 좋아서 신났던 모양이다. 그래도 좋다. 나는 이런 인간이니까 한 수 밖에. 내게 있어서 이상향은 50년대의 뉴욕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재즈를 들을 때만은 그렇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이쯤 해서 50년대의 기분을 느껴 보며 재즈를 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아직 실체화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맘보춤을 기막히게 추는 50년대식 미인을 만나리라는 희망을 안고 말이다. 처음 소개할 음반은 당연히 소니 클라크의 <Cool Strutting>이다. 언젠가 어느 일본 패션 잡지에서 위스키 광고를 하며 술병 옆에 이 음반을 코디네이션한 적이 있었다. 대단히 멋진 센스라고 여겼는데, 그렇다면 위스키 한잔으로 내처 감상할 만하다. 여성 보컬의 군단도 빼놓을 수 없다. 내 경우는 실력보다는 음색, 기교보다는 미모가 더 좋다. 당연히 금발에 허스키한 보이스 컬러에 압도적으로 매료당하고 만다. 그런 면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가수가 줄리 런던이다. 그녀는 실제 용모도 대단해 그녀의 LP 자켓을 보면 마릴린 먼로 뺨칠 정도다. 음성 또한 허스키하면서도 섹시해서 50년대식의 풍만함을 만끽할 수 있다.
혹 <Don't Explain>이란 곡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원래 이 곡은 빌리 홀리데이의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첫 남편이 외도를 하고 돌아온 날, 그녀는 그의 와이셔츠에 립스틱 자국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당황한 그가 설명하려 들자 궁색한 변명 따위는 집어치우라고 만든 곡이다. 혹 바람둥이 남자 친구가 있으면 여자 쪽에서 먼저 틀어 봄직하다. 빌리 홀리데이의 연주가 워낙 발군이므로 감상해 봄직하다. 맘보 이야기가 나왔으므로 이런 연주가 들어 있는 음반을 구입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최근에 장안을 휘젓고 있는 대히트곡히 있으므로 별다른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겠다(바로 무크 광고에 나오는 곡이다). 필자는 이전에 맘보만을 모은 베스트 앨범을 자주 들었는데 나중에 추천해 보겠다. 다음, 마지막으로 추천할 음반이 레이 브라이언트란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Trio>란 앨범이다. 담배 한대 입에 물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얼굴이 인상적인 이 앨범은 피아노 트리오란 간결한 구성으로 그 시절으 맛을 듬뿍 담았다. 누구나 편히 들으면서 추억에 잠길 수 있는 곡들이 많으므로 오랫동안 사랑받을 것으로 확신한다. 만일 타임 머신이 있다면 50년대로 날아가 보고 싶다. 마치 <Back To The Future>의 마이클 J. 폭스처럼 말이다.
술과 함께 즐기는 재즈
재즈하면 술부터 떠올리는 마니아가 주변에 꽤 된다. 그중 나이가 많은 선배 한분은 정말이지 종교적인 의식이라도 치르듯 매일매일을 술과 재즈에 젖어서 살고 있다. 그가 근무하는 곳은 정부 산하기관이다. 따라서 출근 시간이 정확한 만큼 퇴근 또한 칼 같다. 일단 직장을 나오면 그는 그냥 집으로 향한다. 말 그대로 고우 홈인 것이다. 하지만 집 근처 슈퍼에서 소주 두 병을 사는 것은 잊는 일이 없다.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말이다. 다행히 아내의 요리 솜씨가 좋은 덕분에 그분은 멋진 저녁을 즐길 수가 있다. 그후 오디오 룸에 가서 소주와 함께 새벽 한두 시까지 줄곧 재즈를 감상한다. 그때엔 아무리 재미있는 텔레비전 미니 시리즈가 방영되어도, 또 월드컵 티켓이 걸린 축구 경기를 해도 결코 오디오 룸에서 나오는 법이 없다. 지진이라도 나야 겨우 문 한번 열어볼 정도로....
어쨌든 매일 한두 병씩의 소주와 함께 재즈 감상에 탐닉하는 그 선배는 여러모로 주위의 마니아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술과 재즈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지고지순한 가치인 셈이다. 물론 꼭 이런 식으로 술과 재즈를 매치시켜서 즐기라고 권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각자의 개성에 달린 문제이므로 정답이 없는 셈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재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술집이라든가 근사한 칵테일, 혹은 알코올 냄새를 떠올리게 되어 있다. 아마 재즈의 근원이라든가 연주 장소를 따져볼 때 술집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런 상상에 항변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적당한 알코올은 재즈 감상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아니, 심지어 재즈를 연주할 때도 술은 꽤 도움이 된다. 언젠가 캐나다의 토론토 대학에서 재즈를 강의하는 교수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의 친한 친구 중에 토론토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트럼펫 주자가 있다고 한다. 한데 그는 꼭 술을 마셔야만 연주를 하는 기벽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 한잔 쭉 걸쳐야 흥이 나는 까닭도 있지만 트럼펫의 마우스피스를 불 때 입술이 촉촉해야만 적절한 소리가 나온다는 더 튼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알코올은 트럼펫 연주에 필요 불가결한 존재인 셈이다. 하긴 이렇게 쓰고 보니까 비단 재즈뿐 아니라 특별한 종류의 일에 있어서도 알코올의 도움이 결정적이 되는 수도 있는 것 같다. 내가 아는 유명한 농구 선수 한명은 술고래로 유명한데, 한때는 술기운이 오를 채 코트를 누빈 적도 있다고 한다. 한데 그럴 경우 평소보다 득점도 더 많고 어시스트에서도 발군의 기량을 보였다고 한다. 술만 마시면 싸움을 잘하는 <취권>처럼 그에게 있어서 농구란 운동은 술을 필요로 하는 무술이었던 모양이다.
물론 이 글을 쓰는 필자도 적당히 술을 마신 상태다. 아니 어떻게 맨정신으로 이런 테마의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각설하고 술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런 희망을 하나 피력해 보기로 하겠다. 언젠가 일본 고베에 갔더니 관광 상품으로 재즈를 팔고 있었다. 무슨 이야긴가 하면 고베는 역사적인 유물이 없는 도시인 만큼 재즈 카페를 하나의 관광 코스에 잡어넣은 것이다. 어쨌든 고베 시 북쪽에 가면 수도 없이 많은 재즈 카페가 있다. 대개 4천 엔 안팎에 저녁 식사와 간단한 음료, 그리고 재즈 콘서트 관람이 포함된 그곳의 프로그램은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한번 상상해 보라. 낯선 도시에 가 보니 반갑게도 재즈 카페가 있을 뿐 아니라 꽤 근사한 모양새로 저녁이 준비되며 그에 걸맞는 재즈 음악이 라이브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정말 신나는 일이 아닌가?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바라건대 우리 주변에도 많은 재즈 카페가 생겨났으면 좋겠다. 완벽한 라이브는 아니더라도 피아노에 보컬 정도만 있으면 좋겠고, 거기에 지친 심신을 달랠 수 있는 칵테일이 나왔으면 더 바랄 것도 없겠다. 이게 바로 필자의 희망인 셈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주변은 그저 술이면 술, 재즈면 재즈 하는 식으로 서로 양분화되어 있다. 그래서 술 좀 마신다면 줄창 선술집이니 호프집이니 하는 곳에서 술만 마시고, 재즈를 듣는다면 그냥 마니아적인 개념으로 재즈만 듣는다. 양자간에 타협이 별로 없는 것이다. 술만 마신다고 술꾼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진정한 술꾼은 술을 즐길 수 잇어야 한다. 이럴 때에 재즈는 더없는 술의 동반자인 것이다. 이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그러고 보니 또 한잔의 술이 마시고 싶어진다. 당연히 이에 걸맞는 재즈 음반을 CD 플레이어에 올려놓고 싶다. 마음먹고 몇 장의 음반을 골라 보기로 하자. 우선 술에 취하면 말이 많아지는 축이 있고 반대로 과묵한 축이 있으며, 또 우는가 하면 마구 웃어대는 등 그야말로 제멋대로가 된다. 내 경우엔 말이 좀 많아지지만 그럴 때면 꼭 음악이 듣고 싶어진다. 그것도 과격한 비트에 홍수처럼 쏟아지는 브라스의 향연을 말이다.
이럴 때 빼놓지 않는 것이 리 모건의 <The Sidewinder>이다. 34세일 무렵 카페에서 공연을 하고 나오다가 그의 변심을 참지 못한 전 애인이 쏜 분노의 총탄에 어이없이 사라져 버린 이 양반은 트럼펫 하나는 시원스럽게 잘 불었다. 또 이 앨범엔 사이드 맨의 수완도 좋다. 특히 빌리 히긴스의 엇박자로 연속되는 드럼 비트는 죽었다 깨나도 도저히 흉내낼 수가 없을 정도다. 독자 중에 드러머를 꿈꾼다면 일청을 권한다. 한편 리 모건과 같은 계열로 빼놓을 수 없는 아티스트가 한 명 있다. 그가 바로 재키 맥클린이다. 그의 <A Long Drink Of Blues>는 그야말로 블루스한 기분으로 술 한잔 쭉 들이킨 듯한 걸쭉함이 느껴진다. 델로니우스 몽크란 피아니스트도 술 이야기를 할 대 빼놓을 수 없다. 그의 명작 <Straight No Chaser>는 아주 의미심장한 제목이다. 여기서 체이서는 안주라든가 술 마실때 부속으로 나오는 간단한 음식을 말하는데, 그런 체이서 없이 스트레이트로 쭉 한잔 하자는 그런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들이키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 감독한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앨범도 권할 만하다. 영화에서 보면 중년의 남녀가 처음 만나 주위의 눈을 피해 술 한잔을 마신다. 그리고는 음악에 맞춰 블루스를 추는데, 바로 그런 기분이 수록곡에 담겨져 있다. 만일 열애중인 사람이라면 꼭 들어보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벤 웹스터라는 걸출한 테너 색소폰 주자를 소개하고 싶다. 그의 음색은 그 자체만으로도 술 생각이 날 정도로 진하다. 너무 진해서 거의 취할 지경이다. 특히 <Soulville>과 같은 걸작은 평소보다 과음하게 만드는 앨범이니 꼭 들어보길 바란다.
오랜 지기를 만났을 때 듣는 재즈
가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이런 식의 예를 든다. “어릴 적에는 하루가 상당히 길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너무 쏜살같이 지나가 버려,” 혹은 “서른이 넘으면 이미 내리막길이야. 그때부터는 가속이 붙어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 등등 여러 표현이 많다. 역시 그 핵심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과 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것이 일종의 정비례 관계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20대만 해도 하루가 꽤 다사다난했던 것 같다. 늘 약속이 서너 개는 넘었고 밤을 새워가며 술을 마시거나 혹은 그것도 모자라 우르르 친구 집에 몰려가서 이야기 꽃을 피웠던 일도 많았다. 돌이켜 보면 남들이 좋은 시절이라고 이야기하는 청춘이란 것도 그 진정한 맛을 모른 채 정신없이 휩쓸려 다니다가 다 보낸 느낌이다.
그런데 30대가 되고 보니까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우선 주위의 친구들이 정신없이 바쁘다. 나도 그럭저럭 그때그때 주어진 일을 하다 보면 날짜를 잊을 때가 많다. 그러다 보니 서로 전화 연락이나 하고 집들이나 생일쯤 되어야 얼굴을 보게 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야, 이번 주말에 돌찬친데 꼭 와라.”내지는 “일요일 오후 2시에 청담동에서 동생 결혼식이 있으니까 시간 있으면 갈비탕이나 한 그릇 먹고 가라.” 하는 이야기가 나와야 모일 정도고 그 조차도 잠깐 얼굴을 마주할 뿐이다. 심지어는 식사를 할 동안에도 여기저기에서 호출기가 울리고 핸드폰이 걸려오는 통에 예전처럼 진득하게 대화의 장을 마련하기가 힘들어졌다. 아니, 어쩌다 좀 한가한 경우에 만나도 예전처럼 홀몸들이 아닌지라 꼭 안사람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일이 잦아졌다. 과연 우정이란 무엇이고 친구란 무엇인가? 30대 붕반에 들어선 이 시점에서 곰곰이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어차피 30대부터 50대까지는 군대에 갔다고 생각해야 돼. 그 동안 자식 키우고 한밑천 장만하면서 때우는 거야. 진정한 친구는 환갑이 지나서 할 일이 없어졌을 때 생기는 거라구. 그때까지 몸 관리나 잘해서 정작 친구가 생겼을 때 골프나 같이 치러 갈 정도로 만들어 두라구. 그러면 그 인생은 성공한 거야.” 이런 고민에 대해 누군가 넌지시 던진 충고다. 물론 일리가 있지만 친구를 만나기 위해 20여 년을 더 기다리라는 점에 대해선 별로 수긍하고 싶지 않다. 그러던 중 최근에 고만고만한 모임 덕분에 옛 친구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기쁜 마음이야 이를 데 없지만 너무 오랜만이라 막상 공통의 화제를 찾기가 힘들었다. 그때 누가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요즘 들을 만한 재즈 없냐?” 가만히 생각해 보니 좀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는 별로 재즈에 관심도 없고 아니, 음악이며 영화며 하는 문화와는 담을 쌓고 살았기 때문이다. “아, 우리 와이프가 요즘 재즈를 듣는다고 해서 말야.” 그럼 그렇지. 하긴 이런 순간에 20대 시절 같았으면 잘 써먹던 수법을 동원하겠지만, 하면서 입맛을 다실 수밖에. 무슨 이야긴가 하면 지금부터 그 예전의 18번을 소개해 보겠다는 것이다. 우선 친구들을 집에 데려와 술부터 돌린다. 음악을 들을 때 술을 마시지 않으면 무슨 기분으로 감상한다는 말인가? 단, 지나친 음주는 감상을 해칠 수도 있으니 적절한 것이 좋다. 이렇게 분위기를 잡은 다음 꼭 첫번째 곡으로 커티스 풀러의 <Love Your Spell Is Everywhere>라는 곡을 튼다. 아마 이 곡은 한번쯤 들어본 사람이 꽤 될 듯싶다. 우연찮게 요 몇 년 사이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히트한 덕분에 CD가 불티나게 팔렸다는 소문도 들리는데,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맛이 있다. 트롬본의 나직하면서도 부드러운 톤으로 시작되는 이 곡은 첫 소절만 들어도 그냥 감이 잡힌다. 이렇게 누구나 들어도 좋은 곡은 그리 흔치 않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폼 잡아 가며 짤막한 설명도 첨가해 가며 내가 DJ를 해야 재즈가 솔솔 친구들의 귀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일을 할 수가 없으니 입맛이 쓸 수밖에 없다. 각설하고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불행히도 이 음반을 제작한 사보이 레코드사가 무려 20여 년 간 세인들의 관심사에서 지워져 버렸다는 점이다. 한때 재즈가 장사가 되지 않는 바람에 도산했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일본인들이다. 평소 사보이 레코드를 많이 모아온 그들은 이 불행을 참기가 힘들었는지 사보이의 판권을 사들이고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새로이 해서 오늘날 우리는 편하게 콤팩트 디스크로 그 시절을 다시 그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월은 가도 음은 남는 것인가 보다.
아트 페퍼가 노년이 되어 다시 재즈 씬에 나타났을 때 그의 재기를 기대한 사람은 별로 되지 않았다. 물론 젊었을 적에 보여준 그의 짤말한 전성기는 확실히 황홀하고 놀라운 것이었지만 노년의 그는 마약과 병에 찌들어 예전의 품격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알토 색소폰을 집어들었고 마지막 투혼을 불살랐다. 특히 <Among Friends>란 앨범은 그의 재기를 축하하는 듯한 사이드 맨들의 백업이 눈부시다. 그래서인지 이 곡 전반에 걸쳐 따스한 우정이 감돌고 있다. 이토록 편한 분위기에서라면 아트는 마음껏 자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다소 과격한 블로잉을 마다하지 않는 게리 토마스와 섬세하고 유약한 이미지의 팻 메스니가 한 앨범에서 만났을 때 대부분은 미스 매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들은 비록 음악 세계는 다르지만 그전부터 돈독한 우정이라도 쌓아온 듯이 서로서로 협조하면서 좋은 음반을 만들어 냈다. 그 작품이 <Till We Have Faces>이다. 특히 첫 곡 <Angel Eyes>를 들으면 서로가 천사의 눈길로 상대를 바라보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음에 몰입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이렇게 우정이란 좋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앨범은 불운의 아티스트 에릭 돌피의 <Memorial Album>이다. 왜 메모리얼이냐 하면 그와 함께 연주하는 트럼펫터 부커 리틀이 불과 25세에 요절하면서 돌피와는 이 앨범으로 마지막 협연을 장식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돌피가 리틀을 회상하는 듯한 기분을 주고 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이 앨범은 <Five Spot Live>시리즈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편이다. 그러나 그런 라이브의 열기보다는 두 사람의 우정이 불행으로 끝났음을 느끼게 하는 비장함이 더 짙게 감돈다. 물론 후일 그들의 뒷이야기를 충분히 알고 있는 팬들만이 느끼는 선입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런 기분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정말로 좋은 친구가 자신보다 먼저 천국으로 가버린 것은 어찌 되었건 큰 불행이 아닌가 싶다. 그런 기분으로 이 앨범을 감상하면 좋을 것도 같다.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며 듣는 재즈
봄, 가을이 사라진 지 꽤 오래 된 듯하다. 지구 온난화 때문인지 이상 기온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처럼 음식을 먹어도 적당히 맵고 짠 것을 즐기고, 연애를 해도 쉬엄쉬엄 하는 스타일은 불만인것이 이제는 무지막지하게 덥거나 혈관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계절만 남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베이지 색과 핑크 색이 어울리는 봄이나 레인 코트가 딱 맞아떨어지는 가을은 어느새 잊혀진 계절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가을은 가을이다. 혹 낙엽이 구르고 찬바람이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날이 온다면 코트의 깃을 세우고 잘근잘근 자신의 그림자를 씹으며 공원에라도 산책 나가 볼 일이다. 절대로 혼자여만 된다. 둘조차 부담스러운 계절인 것이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이런 대중 가요가 있는데, 한때는 가을만 오면 애청곡이 되다시피 했다. 하지만 이상 기온으로 사라진 가을처럼 이 곡도 그 팔자가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편지가 사라진 지 오래 되었다. 그런 편지라면 팩스로 얼른 보내 버리는 편이 빠를 것이다. 이러므로 그 시대의 후줄근한 센티멘털리즘처럼 이런 편지질도 구시대의 풍속도가 되고 만 셈이다.
따지고 보면 가을을 잃어버리면서 동시에 함께 잃어버린 것이 꽤 되는 것 같다. 이를테면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시집을 읽는 재미도 없어졌고 프랑스 문화원에서 심각한 영화를 보는 행위도 사라져 버렸다. 문인이라면 가을과 함께 꼭 걸치는 버버리 코트도 이제는 맵시와 유행에 휩쓸려 버려 통이 풍성하거나 깃이 요란스러워야 입는 옷이 되어 버렸다. 좀더 거창하게 말하면 ‘가을적인 인간’을 보기가 힘들어진 것도 같다. 말하자면 침착하고 생각을 많이 하고 늘 고독한 분위기에 잠겨 있는 그런 인간이 어느새 주위에서 하나 둘씩 사라져 버린 것이다. 신에게 계절에 대해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일년 중에 가을은 9개월, 그리고 봄, 여름, 겨울은 각각 1개월씩 해주세요가 아닐까?
지금까지 가을을 경험한 것 중에 최고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일본에서의 가을이다. 일본의 살인적인 여름에 대해선 아는 분이 많을 것이다. 습도도 높고 짜증도 심한 그 계절에 대해선 거의 악명이 높을 지경인데, 그 반대로 가을이 되면 적당히 비도 뿌리고 약간의 쌀쌀함을 동반한 상쾌함이 기가 막히다. 이를테면 지옥 같은 여름을 벗어난 후 천국같은 가을을 즐기게 되는 것이다. 확실히 일본의 가을은 세계적이다. 단풍도 아름다울 뿐더러 레인 코트를 걸치고 활보하기에 더없이 적합하다. 작년에 오사카에서 이런 가을을 경험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더욱 재즈가 귀에 쏙쏙 들어온 것도 같다. 가을이 재즈의 계절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재즈가 나른한 여름 오후에 어울린다고는 더더욱 말하고 싶지 않다. 이런 기분은 장황하게 묘사를 하지 않더라도 잘 전달될 것이라 믿는다.
각설하고 가을이 되면 우선 듣게 되는 음악이 있다. 바로 캐논볼 애덜리와 마일즈 에이비스가 함께 한 <Something Else>음반에 수록된 <Autumn Leaves>이다. 이 제목은 말 그대로 가을에 보도블럭에 떨어져 휘날릴 수밖에 없는 낙엽을 의미하고 있다. 당초에는 이브몽땅의 히트 샹송으로 전세계에 전파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재즈로 번안되어 스탠다드 넘버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인지 좀 한다 하는 뮤지션치고 이 곡을 연주하지 않은 아티스트가 없을 지경이다. 그럼에도 역시 애덜리, 마일즈 콤비만은 못하다. 콧수염을 길게 기르고 구수한 음색을 자랑하는 애덜리의 알토 색소폰은 풍만하고 여유롭다. 그런 애덜리가 신경질적인 마일즈의 뮤트 트럼펫과 만나면 희한하게도 기가 막힌 앙상블을 전개한다. 외견상으로 볼 때 물과 기름 같은 스타일이므로 언밸런스할 것도 같은데 실상 그렇지가 않다. 극과 극은 서로 통하는 것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만한 협연은 재즈 역사상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Workin'>에 수록되어 있는 <It Never Entered My Mind>도 가을에 자주 듣는 넘버다. 그 무엇이 그의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곡을 들으면 왠지 처량해진다. 동시에 가을이 주는 이미지를 한껏 그려볼 수도 있다. 고독, 낙엽, 실연, 적막. 특히 마일즈의 위태로운 솔로 라인을 보조하는 드러머의 간간이 이어지는 심벌즈 연타는 하나 둘씩 떨어지는 낙엽을 묘사한 듯한 기분을 준다. 앞서 오사카 이야기를 했지만 파리의 가을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런 파리의 가을을 묘사한 듯한 <Aive And Well In Paris>는 미국을 버리고 파리에 정착해 버린 알토 색소폰 주자 필 우즈의 대표작이다. 파리의 무엇이 그으 마음을 사로잡아서 미국을 포기하게 만들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이 작품을 들으면 색소폰 하나 달랑 집어들고 파리의 뒷골목을 누비며 초라한 클럽에서 연주를 할지라도 마음만은 한없이 행복한 필의 모습이 그려진다. 가을이 오면 파리를 꿈꾸며 들어볼 만한 앨범이 아닌가 싶다.
이왕 파리 이야기가 나왔으니 프랑스인 특유의 에스프리가 가득한 프렌치 재즈의 거장 미셸 르그랑과 스테판 그라펠리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들은 최근 <Michel Legrand & Stephane Grappelli>란 음반에서 함께 만나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데, 정말이지 가을의 정취가 듬뿍 우러나오는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수록곡을 보면 <Autumn Leaves>도 들어 있고 <April Fool>라든가 <Summer Of'42>와 같은 영화음악이며 그 외 각종 샹송 스탠다드가 포함되어 있다. 르그랑의 유연한 피아노 반주에 맞춰 한가롭게 바이올린을 켜는 그라펠리의 모습은 낙엽이 가득 쌓인 뤽상부르 공원에서 몇몇 사람들을 모아 놓고 콘서트를 벌이는 거리의 연주인을 연상케 한다. 어쨌든 가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지독한 여름을 보낸 사람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그것은 마치 혹독한 추위를 견뎌냈을 때 신이 주는 따스한 봄과 같은 것이다. 더구나 재즈가 있으므로 이래저래 가을은 축복받은 계절인 셈이다.
야간 열차의 창가에 앉아
밤 기차를 타본 지도 꽤 오래 된 것 같다. 기차는 다른 교통 수단보다 다소 로맨틱하므로 기차를 타는 행위가 때론 설렘을 동반하기도 하는데, 특히 밤 기차라는 아이템은 이런 낭만주의의 극치가 아닌가 싶다. 옛날에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처음 충무로에 갔을 때였다. 그때 어느 영화감독 겸 기획자 밑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는 늘 시간에 쫓겼으므로 하는 수 없이 자신의 부산 출장에까지 종종 날 데리고 갔다. 즉, 시간을 아끼기 위해 달리는 밤 기차 안에서까지 시니리오 회의를 한 것이다. 차창 밖으로는 어둠뿐이요 객석에는 조는 사람들뿐. 그러니 서너 명이 마주앉아 하품을 참아 가며 영화적인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것이 얼마나 난센스였을까?
그래도 이런 기차를 이용해서 창작의 활력을 얻곧자 하는 사람들이 꽤 되는 모양이다. 잘만 킹이란 에로틱 영화 감독은 주로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활동하는 반면 저널리스트로 일하는 그의 아내는 주로 뉴욕에 있다고 한다. 한데 문제는 그의 아이디어를 시나리오화하는 작업이 주로 와이프의 몫이라는 데에 있다. 결국 둘은 한 가지 꾀를 짜냈다. 즉, 자거리 전화로 남편이 아내에게 시나리오 아이디어를 말하면 그녀는 약 1주일 코스로 동서 횡단 열차 티켓을 끊는다. 긔고는 침대 칸에 주로 기거하면서 창 밖의 풍경도 보고 커피도 마셔 가며 뉴욕에서 LA로 이어지는 긴 여정 동안 시나리오의 초고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착역에 다다를 즈음이면 그리운 남편의 품안에 안기면서 시나리오를 한 권 건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기차는 그녀에게 있어서 집필실이자 창작의 샘인 것이다.
이왕 여행과 창작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빔 밴더스 감독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주로 로드 무비(Road Movie)를 찍어온 그는 여행을 통해 성숙해져 가는 인간을 많이 묫해 왔다. 한데 그가 이런 소재에 집요하게 탐닉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 자신이 대단한 여행가란 점이다. 예를 들어 <이 세상의 끝까지>란 영화를 보면 베를린, 파리, 리스본, 모스크바 등 유럽의 주요 도시뿐 아니라 북경, 동경과 같은 아시아 지역,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까지 등장한다. 마치 여행을 위해 이 작품에 도전한 것과 같은 트낌을 줄 만큼 대단한 서사시적인 기행을 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를 끄는 것은 그가 영화를 찍고자 아이디어를 얻게 되면 무조건 여행부터 떠난다는 것이다. 아무 계획 없이 이 도시 저 도시를 돌아다니며 창작의 문이 열릴 때까지 헤매다 보면 결국 근사한 스토리가 얻어진다는 이야기다. “인간은 동물과도 같습니다. 그러니 일단 집을 떠나면 본능적으로 예민해지게 되죠. 저는 바로 그 점이 창작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오감이 예민해져야 사물과 사람을 다른 각도에서 관찰할 수 있으니까요.” 모 시나리오 작가는 일단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가면 홀홀 단신 아무런 연락처도 남기지 않은 채 종적을 감춰 버린다. 그가 어느 곳에서 무엇을 먹어 가며 시나리오를 썼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일단 집에 나타났을 때엔 근사한 초고가 완성이 되어 있다. 역시 그에게 있어서 여행은 창작의 필수품인 셈이다.
필자 역시 굉장히 게으름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즐겨 한다. 그렇다고 무슨 마니아급은 아니고 다만 외국을 방분할 경우 한 도시만 집중적으로 탐구하면서 여행자로서의 즐거움을 만끽하려고 한다. 최소한 일주일은 한 곳에 머물러야 그 도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평소 내 생각이다. 비오는 날 거리도 걸어보고 후줄근한 카페에서 커피도 마셔 보고 해야 그 도시으 전반적인 분위기와 느낌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주마간산 격으로 유명한 사찰이나 유적을 보는 것은 내게 있어서 여행이 결코 아닌 것이다. 게으른 성격이 반영된 여행 버릇이지만 꽤 추천할 만한 방법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런 여행을 떠날 때마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음악, 특히 재즈다. 요즘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워크 맨이라든가 포터블 CD 플레이어가 발달했는데, 적어도 여행을 다닐 때엔 이 덕을 톡톡히 본다. 예전에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14시간 동안 밤 기차를 타고 파리로 이동한 적이 있었다. 저녁 7시에 출발한 기차가 다음날 아침 9시에 파리에 도착하는 다소 긴 여정이었다. 아무래도 혼자 떠난 여행인 데다 낯선 곳을 향해 처음 가 보는 설렘 때문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창 밖으론 어두컴컴한 풍경, 그것도 황야에 가까운 모습만 이어지고 함께 있는 사람들도 전혀 연고가 없는 외국인들뿐이었으므로 흡사 무슨 교도소를 연상케 했다. 만일 그때 워크 맨이 없었고 게다가 재즈마저 들을 수 없었다면 거의 미쳐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음악으로 안정을 되찾은 탓인지 새벽에 프랑스로 열차가 들어섰을 때엔 꽤 근사한 여행을 마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재즈에 감사하고 여행에 감사한 순간이었다. 그런 때문인지 가끔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엔 습관적으로 그때를 생각하며 듣는 음악이 있다. 적어도 이런 음반들은 밤 기차의 정취랄까 어디론가 문득 홀홀 단신 떠나고 싶은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오스카 피터슨은 피아노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천의무봉의 프레이즈와 정감 있는 멜로디 라인은 오랫동안 마니아들을 감동시켜 왔다. 그 역시 여행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래서 <Night Train> 같은 음반을 내놓기도 했다. 이 음반을 들으면 캐나다의 삼림지대를 뚫고 설원을 향해 질주하는 밤 기차를 연상케 된다. 팻 매스니의 <Are You Going With Me>는 아예 대놓고 함께 여행이라도 떠나지 않겠냐는 듯한 곡이다. <Offramp> 앨범에 수록된 이 곡은 필자가 팻 매스니에 빠지게 된 결정적인 필링을 제공한 작품이기도 해서 유난히 애착이 간다. 기타 신디사이저의 처절한 프레이즈를 즐길 수 있다. 듀크 엘링턴의 <Caravan>이란 곡은 낙타에 짐을 싣고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빅 밴드의 다양한 악기들이 묘한 음색을 내면서 서로 어우러진 화음도 일품이고 중동의 이국 정취가 블랜딩된 멜로디가 아름답다. 아직 그 지역을 방문해 보지 못했지만 혹 갈 기회가 있다면 함께 가져가고 싶은 곡이다.
마지막으로 제리 멀리건의 <Night Lights>를 추천하고 싶다. 다소 센티멘털하고 블루시한 느낌이 강한 이 앨범엔 푹 침잠해서 들을 만한 곡이 많다. 특히 사랑하는 연인과 멀리 여행을 떠날 땐 꼭 지참하라고 권하고 싶다. 이토록 멜랑콜리한 음악을 듣는다면 그 목적지가 어디가 되었건 간에 대단히 낭만적이 여정이 될 것이다.
2부 불세출의 재즈 영웅들을 만나다
가끔 블루 노트나 엔야(Enja)등 재즈레이블을 빛냈던 뮤지선들의 사진집을 볼경우가 있다. 대개는 흑백 톤으로 처리되어 있고, 악기와 함께 초상화 비슷하게 혹은 스냅사진 형태로 찍은 경우가 많은데, 정말이지 이런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이 이뤄냈던 그엄청난 경지의 음악이 압도적인 무게감을 갖고 귓전을 맴도는 듯한 착각을 느끼곤 한다. 왜 재즈 뮤지션들의 사진을 보면 가슴이 벅차오르고, 마음한구석이 그들에게 점령당하는 기분을 느끼는것일까? 아마 필자 자신이 재즈광이란 사실외에는 달리 설명할길이 없을것같다. 이것은 마치 그들의 전설적인 명연이 담긴 CD를 어렵사리 구했을때 자켓에서 풍기는 이미지 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것과 동일한 현상이 아닐까 쉽다.
이렇게 내게는 엄청난 존재인 그들의 개인적인 뒷이야기를 들으면 아주 평범한 진리를 하나깨닫게 된다. 그렇다. 그들도 나처럼 배가 고프면 밥 먹고 연인과 사랑하고 또 때론 실수하면서 살아가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아마 이런 점 때문에 그들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보여준 연주에서 그토록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번 챕터에서는 그 엄청난 뮤지션들의 뒷이야기를 좀 캐보려고 한다. 이런일이야 주간지 기자들이나 하는것이겠지만 따지고 보면 이런 정보로 인해 평소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뮤지션에게 애정을 가질 수도 있겠고, 또 알고 있던 뮤지션을 더욱더 사랑하게 되는 계기도 될수 있을 것 같다.뭐 어찌 되었건 상관 없다. 이런 노력이 다 재즈를 좀더 몸으로 가깝게 느끼기 위해서 하는 일들이니까.그런면에서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가끔씩은 키득거려 가며 이글을 읽어 줬으면 좋겠다. 편의상 시대적으로 구분해서 제 1장에서는 초기재즈에서 빅 밴드까지, 제2장에서는 모던재즈 중심으로, 마지막 제3장에서는 현재활동중인 컨템포러리 재즈 뮤지션 위주로 다뤘다.
제1장 스윙과 함께 춤추던 거장들 이야기
약1백여 년이 넘는 역사를 거쳐 오면서 재즈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음악이 되었다. 그리고 재즈를 통해 다채로운 대중음악이 파생됨으로써 오늘날 우리는 풍요로운 음악의 세계속에서 살게 되었다. 물론 재즈는 철저히 미국이라는 대륙의 기반 위에서 태동한 장르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나라의 문화와 특수한 환경을 고려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저레코드만 들으면 저절로 재즈의 본질을 이해할 수있는 성질은 아닌 셈 이다.
게다가 재즈계에는 많은 영인들이 있고 또 그들의 삶은 그 나름으로 굴곡이 있고 또한 상상할 수 없는 기행도 속출했다. 이런 뮤지션들의 삶까지 이해한다면 재즈는 우리들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와닿을 것이 분명하다. 재즈의 탄생을 이야기 할때 빼놓을수 없는 곳이 19세기 말의 뉴올리언스다. 이곳은 한때 프랑스가 지배했던 곳이고 또 항구도시였던 만큼 세계의 모든 인종이 우글거렸을 뿐 아니라 유곽도 꽤 발달했다.물론 이곳에서 일할 밴드도 많이 필요했으리라. 하지만 이곳 술집에서 재즈가 연주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짜르트의 현악 4중주 같은 제법 고상한 음악이 홍등가를 누볐다고 한다. 재즈는 정확히 프랑스인과 흑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크레올이라고부른다)에 의해 태동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그들은 꽤 성공한 부류였고 일부는 프랑스로 유학까지 갈 정도였으며노예 해방 전까지는 백인 못지 않은 대우를 받기도 했다. 이런 유식한 크레올 계층이 받았던 유럽의 클래식 음악 교육에다 흑인 특유의 리듬감, 그리고 뉴올리언스에서 떠돌아다니던 각 나라의 민속음악이 혼합되어 하나의 장르로 탄생한 것이 바로 재즈인 셈이다.
재즈는 내가 만들었다!
이렇개 출생이 복잡하기 때문에 재즈의 탄생에 대한 논의는 초창기부터 뜨거웠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바로 젤리 롤 모턴이다. 그는 흡사 영화 속 주인공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생을 산 사람이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의 미국이 서부 개척이다 급속한 공업화다 정신이 없던 만큼 그또한 다이내믹한 삶을 살았다. 그는 사기꾼에다 도박꾼이었으며 대단히 입심이 좋은 사내엿다.잠시 음악으로 돈을 벌어 호화판 승용차를굴리기도 했지만 말년은 비참한 가난 속에 보내야 했다. 인간성으로만 본다면 그는 쓰레기와 다름이 없었다.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몇몇 녹음에서 보여준 그의 연주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런 그의 말년에 재미있는 일이 하나 벌어졌다. 1938년 3월, ‘믿거나 말거나’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W.C. 핸디라는 작곡가를 소개하면서 자신이 재즈와 블루스를 창시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당장(다운 비트)라는 재즈 잡지에 그의 기고문이 보내졌다.
“뉴올리언스야말로 재즈의 발생지임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곳에서 1902년 재즈를 창시한 사람은 바로 본인입니다. W.C. 핸디와는 1908년에 만난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그는 전혀 재즈를 연주하지 못했습니다.” 글 말미에 ‘세계 최고의 작고가’라고 자신을 추켜세울 만큼 기고만장했지만 어찌 보면 일리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재즈가 어느 한 개인의 창조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때문에 모턴의 그 훌륭한 레코딩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그를 다소 오만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카네기 홀에서의 이상한 콘서트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나 미시시피 강을 따라 칸사르 시티, 시카고, 그리고 뉴욕 등으로 뻗어 나간 재즈는 그 영역이 넓혀져 갈수록 많은 뮤지션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하지만 1910년대까지만 해도 재즈의 형태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과는 좀 차이가 있었다. 피아노를 중심으로 연주했단 부기 우기, 랙타이임과 같은 과도기적인 음악이 많았다. 그러다가 20년대에 와서 루이 암스트롱이며 듀크 엘링턴과 같이 거물이 나오면서부터 재즈는 본격적인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1938년 카네기 홀에서는 좀 이상한 콘서트가 열렸다. 그때는 재즈가 스윙이라 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던 시기였고 그래서 재즈 발생에 대한 관심이 높았었다. 그리하여 부기 우기를 연주했던 뮤지션들을 대거 초청해서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려 했던 것이다. 출연자들은 대개 정식 음악인이 아닌 노동자나 하층 계급 출신들이었고 따라서 러프하지만 별반 기교가 가미되지 않은 음악을 연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로서는 그런 큰 무대에 섰다는 것 자체가 성공이었지만 이내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런 투박한 연주를 즐기기엔 같은 시대에 활약하던 거장들의 레코드가 휠씬 다이내믹했던 것이다.
한편 뉴올리언스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거물이 루이 암스트롱이다. 1901년 이곳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자신이 흑인이란 사실에 저항, 폭력을 휘두르는 행위로 소년원을 제집 드나들 듯 드나들었다. 한데 바로 그곳에서 재즈를 접한 후 재즈로 대성하겠다고 결심하고 양 입가를 칼로 찢어서 피를 흘린 채 트럼펫의 마우스에 맞춰 연주를 시작할 정도로 독기를 보였다. 당시 루이의 재능을 높이 산 킹 올리버라는 뮤지션이 전격적으로 그를 발탁, 뉴올리언스를 떠나 시카고로 본거지를 옮기게 한다. 이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뉴올리언스는 한물간 도시가 되어 버려 많은 흑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미시시피 강을 거슬러 올라갔던 것이다. 이 점은 재즈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시카고는 불루스가 발달해 재즈에 독특한 맛을 전해 주었고, 이런 경험이 뒷받침되어 뉴욕에 재즈가 전파될 무렵에는 뉴욕 나름의 개성이 생겼던 것이다.
가장 불행했던 재즈맨, 킹 올리버
킹 올리버 악단 시절 루이 암스트롱의 트럼펫 파워는 그야말로 대단해서 만일 녹음이라도 할라치면 마이크에서 제일 먼 위치에 자리를 잡을 정도였다. 이런 악단으 대우에 분개를 품었던 사람이 바로 같은 악단에서 피아노를 치는 릴리언이라는 여 단원이었다. 결국 그녀는 루이 암스트롱과 결혼한 후 그를 악단에서 나오게 한다. 그러고는 앞장서서 루이의 일자리를 주선했고 그 결과 프리랜서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시카고에서 제일 가는 트럼펫 주자로 각광받게 된 것이다. 이런 그으 재능은 오케 레코드사 프로듀서의 눈에 띄어 1925년 11월 대망의 데뷔 앨범을 내게에 이르다.
흔히 루이 암스트롱은 재즈 보컬의 창법이라든지 트럼펫 연주의 기본 패턴 등을 제시한 것으로 존경 받지만 그 외 영화음악이나 팝에 까지 손을 뻗어 대중음악을 살찌운 것으로도 높은 점수를 받는다. 하지만 그 자신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저항감을 숨기기 위해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만담을 펼쳤다. 그 사실을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로 해석하지 말기를 바라나. 한편 역사상 불운했던 재즈 뮤지션 중 한 사람이었던 킹 올리버는 살아 생전 고생이란 고생은 다해 보고 죽은 사람이다. 이런 비극은 재즈의 전통으로 굳어진 듯 존 콜트레인, 쳇 베이커, 빌리 홀리데이 등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의 참담함으로 이어지고 있다.
킹 올리버의 경우, 루이 암스트롱을 영입하면서 한때 전성기를 누리기고 했지만 그가 피아노 주자와 결혼해서 나가 버린 후 갖가지 불행에 휩쓸리게 된다. 이를테면 1924년 ‘링컨 가든’이란 술집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불이 나서 허사가 되어버렸고, 1927년 ‘프란테이션’에 출연중 불이 나서 일자리를 잃게 된 일, 또한 뉴욕 할렘에서 오픈한 전설적인 재즈 클럽 ‘카튼 클럽’에 출연하게 되었다가 마지막 순간에 듀크 엘링턴에게 빼앗긴 일 등 이루 열거할 수조차 없다. 심지어 1928년 1천 불을 받고 빅터 레코드사와 계약을 했지만 치아 상태에 말썽이 생겨 솔로를 불 수 없는 상태에까지 가게 되었다. 결국 1936년 사바나에서 은퇴하여 돈도 옷도 없는 빈털터리로 당구장의 심부름꾼이 되었다가 2년 후 비참하게 사망하고 만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가 52세의 나이로 죽었지만 재즈계에선 노인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하긴 한참 활동하던 당시에도 그의 사이드 맨들조차 그를 노인으로 알았다고 한다. 힘겨운 고생이 그를 일찌감치 늙은이로 만들러 버렸는지 모르겠다.
백인 재즈맨의 불운은 빅스에서부터
흔히 재즈는 흑인들의 음악으로 인식하지만 백인 뮤지션들으 역할 또한 간과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그중에 빅스 바이더벡이란 뮤지션은 빅 밴드 재즈를 이야기할 때 없어서는 안되는 거물이다. 한데 그는 루이나 듀크처럼 자신의 밴드를 갖고 있지도 못했고, 게다가 벤 웹스터나 콜맨 호킨스처럼 비록 밴드의 구성원일지라도 워낙 실력이 출중해서 솔로이스트로 대접받는 식의 인정조차 받지 못했다. 시카고에서 출생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코넷을 익혔다. 군에 갔다온 형이 축음기를 가져왔고, 그 속에 묻어 온 재즈 레코드를 들은 뒤부터 독학으로 재즈를 익혔던 것이다. 하지만 워낙 테크니션들이 재즈계에서 그처럼 독학으로 배운 사람이, 게다가 백인이라는 약점과 함께 악보를 볼 줄 모른다는 치명적인 핸디캡으로 인해 쉽게 두각을 나타낼 수가 없었다. 밴드에서 조차 그는 솔로이스트로 뽑히지 못했다. 그 결과 오늘날 레코드로 그를 추적한다면 그저 몇 소절 잠깐 부는 정도만 얻어 들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많은 컬렉터들이 만족하니 뭐라 말할 수 없는 천재성이 있었던 셈이다.
아티스트로서 이렇게 불행했던 빅스지만 더 큰 불행은 대공황 때 일어났다. 그 당시 그는 건강이 나빠져 고향에서 요양중이었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간 근근히 모아 놓은 그에게 무일푼의 처지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결국 스물여덟이란 나이에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의 죽음은 크나큰 손실이었음이 분명하다. 오죽했으면 밴드에서 그와 절친하게 지냈던 프랭키 트렌바위란 동료 뮤지션은 그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재즈계를 떠나 민간 항공회사의 조종자가 되었겠는가. 만약 폴 데스몬드, 데이브 브루벡, 빌 에반스, 스탄 게츠, 아트 페퍼등 우리가 기억하는 위대한 백인 뮤지션의 계보를 따져 본다면 그 첫머리에는 분명 빅스 바이더벡이란 신동이 존재할 것이다.
재주 부리는 놈 따로 돈 챙기는 놈 따로
옛말에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조련사가 챙긴다고 했다. 재즈계에서 플레처 핸더슨이란 뮤지션이 꼭 그 짝이다. 얼마나 불행했으면 그를 기려서 만든 컬럼비라 레코드사의 전집 제목이 (좌절의 미학)이었을까? 빅 밴드 시절, 특히 20-40년대의 기간 동안 플레처 헨더슨을 거쳐가지 않은 기물이 없을 정도였다. 루이 암스트롱조차 그의 밴드에 적을 두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한때 헨더슨 밴드 출신이면 명문 하버드 졸업생쯤으로 간주될 만큼 인정을 받았다. 특히 20년대에 헨더슨 악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빅 밴드의 기본 포뱃이 되는 색소폰부와 리드부 사이의 앙상블을 만들었고 그 외 많은 원칙을 세운 인물이었다. 이런 기본 포맷은 오늘날까지 빅 밴드를 한다면 지켜지는 불문율이기도 하다.
하지만 불황이 닥치자 꿈은 좌절되었고, 수년 간 어려운 생활이 이어졌다. 얼마 후 베니 굿맨의 스윙 붐이 일어났는데, 그 악보는 예전에 그가 준 것이었다. 재주만 부렸던 셈이다. 그것이 안쓰러웠는지 굿맨이 자신의 밴드에 넣어 주었지만 그는 눈 수술을 받기 위해 나와야만 했다. 전쟁이 끝나고 빅밴드의 열기도 식어 갈 무렵, 플래처는 무려 쉰의 나이로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에델 워터즈라는 여가수는 반주자로 순회공연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중풍을 맞아 다시 좌절, 결국 4년후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는 음악적인 재능에 있어서는 루이나 듀크 못지 않는 거인이었다. 게다가 20년대의 기세였다면 빅밴드의 저넝기에도 역시 대단한 활약을 하고도 남았어야 했다. 하지만 치명적으로 그는 셈에 약했고 매니지먼트도 엉망이었다. 무료로 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통솔력마져 결여되어 개성이 강한 멤버들을 붙잡아 두지 못했다. 이런 일련의 결점 때문에 오늘날 많은 팬들은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음악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좌절의 연속이었던 셈이다.
어느 날 깨어 보니 유명해진 베니 굿맨
어느 날 깨어보니 스타가 되었다라는 어느 시인의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인물이 바로 배니 굿맨이다. 오늘날 빅 밴드 하면 ‘스윙’을 연상하는데, 사실 스윙 이전에도 빅 밴드는 있었고 스윙 이후에도 역시 빅 밴드는 있었다. 말하자면 스윙은 리듬의 한 종류요 한시대의 유행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워낙 배니 굿맨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해서 결국 오늘날까지 스윙은 기억되고 있는 셈이다. 1933년 대공항이 시작되자 많은 밴드가 어려움에 처했다. 2년후가 되어서야 겨우 진정의 기미가 보였고 그 당시만 해도 굿맨은 스물 여섯의 클라리넷 주자였을 뿐이다. 그는 시카고의 가난한 양복 재단사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 12세 때에는 반바지 차림으로 미시간 호의 유람선 밴드에 참가햇으며, 오스틴 고교의 악단과 곧잘 즉흥연주를 하기도 했다. 16세가 될 무렵 로스앤젤레스로 나가 프로의 길을 걸었는데, 특히 벤 폴락 악단에 참가한 후 인기를 얻어 가장 바쁜 스튜디오 뮤지션이 되기도 했다.
이에 용기를 얻어 35년 4월 정식으로 자신의 밴드를 만들게 되었다. 이때 헨더슨의 곡을 사들였는데, 그중에는 <Let`s Dance>도 있었다. 그러나 밴드의 시작은 아주 나빠 처음 출연한 루즈벨트 호텔에서는 3주 만에 해고되었고, 이어 시작한 대륙 횡단 여행은 말 그대로 고생길이었다. 울면서 로스앤젤레스의 팔로마 볼륨에서 최종 연주를 한것이 1935년 8월 21일. 한데 여기서 예기치도 않은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전세계가 스윙 리듬에 맞춰 춤을 추게 되었다. 불황을 극복한 일종의 상징으로 스윙이 자리잡은 셈이다. 당시 그의 밴드에 대해 얼마난 열광적이었느냐 하면 주로 성인들만 대상으로 공연하다가 1937년 처음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삼았는데, 공연 장소였던 극장이 무너질 만큼 아찔한 환호성에 휩싸였다고 한다. 그때에는 그 누구도 그에게 험담하는 미국인이 없었다고 하니 그저 입만 벌어질 뿐이다. 사람 팔자가 이렇게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마피아까지 동원된 스타 탄생
루이와 함께 빅 밴드의 거장으로 추앙 받는 듀크 엘링턴은 그의 별명이 상징하듯 깍듯한 무대 매너와 온후한 인간성으로 존경 받던 사람이었다. 그의 배경엔 확실히 독특한 데가 있다. 다수의 뮤지션들이 하층민 출신인데 반해 그의 부친은 백악관의 집사였다. 1969년 백악관에서 그간 쌓아 온 업적을 기려 그의 70회 생일 파티를 열어 주었는데, 70년 전 그것에서 근무했던 부친을 생각하면 그에게는 남다른 순간이었다. 어쨌든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출생한 그는 어려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을 수 있었다. 음악 외에 미술에 대한 재능도 대단해 미술학교에서 장학금 입학 제의까지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그의 마음을 움직였던건 초기 재즈 피아노의 거장 제임스 P.존스의 연주였으며, 그의 롤 피아노를 들으며 운지를 익히곤 했다.
사회에 나와서는 재즈 뮤지션의 길을 추구, 낮에는 극장 간판을 그리고 밤에는 카페에서 피아노를 치는 일로 생활을 꾸며 나갔다. 그러다 뉴욕에서 윌리 더 라이언 스미스에게 사사한 뒤 뉴욕의 허름한 뒷골목에 위치한 ‘켄터키 클럽’에서 자신의 밴드와 함께 무려 4년 반에 걸쳐 연주를 하게 된다. 당시는 금주법이 있던 시기여서 몰래 술을 파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한데 들어오는 손님을 어떻게 가려서 술을 파는가 하는 일이었다. 그때의 관습으로는 커피나 음료를 시키면 웨이터가 알아서 그 속에 술을 타는 식이었으므로 순간적인 판단이 요구되었다. 한데 듀크의 밴드에서 드럼을 연주하던 소니 그리어란 사람이 이런 눈치가 대단히 빨랐다고 한다. 그는 다른 긋보다 높은 위치에 놓인 드럼 세트 앞에 앉아 연주를 했으므로 늘 문을 감시할 수 있었다. 그때그때 들어오는 손님이 있으면 웨이터에게 판단해서 눈짓을 해 주었는데, 거의 백발백중이었단다. 당시의 뮤지션은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컨터키 클럽의 출연중에 듀크는 어빙 밀즈란 인물을 알게 된다. 오늘날 듀크의 음반을 보면 많은 곡에 공동작곡자로 어빙 밀즈란 이름이 올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빙 밀즈는 작곡에 참여하지는 않았고 대신 듀크의 대외 업무를 도맡아 해주었다. 악보를 출판사에 판다거나 밴드의 급료를 대신 받아주는 식의 매니지먼트를 한 것이다. 어쨌든 듀크는 일생일대의 큰 도움을 밀즈로부터 받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커튼 클럽’의 출연을 통해서였다.
1922년 커튼 클럽이 개업한 장소인 뉴욕의 할렘은 고급 백인주택가였고, 또한 뉴욕은 영화산업의 중심지 중의 하나였다. 그런 관계로 커튼 클럽은 당대의 일급 스타여 유명인사들이 드나들던 초특급 사교클럽으로 성장했다. 그러므로 이 클럽에 출연한다는 것은 스타덤을 보장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927년 이곳 하우스 밴드의 리더가 죽자 그 후임으로 물망에 오른 사람이 듀크 엘링턴과 킹 올리버였다. 만일 이때 킹 쪽이 발탁되었더라면 재즈의 역사는 또 한 차례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밀즈의 수완으로 당시로서는 무명이었던 듀크가 기회를 잡게 되었다. 밀즈의 수완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927년 12월 4부터 듀크의 밴드가 출연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밀즈의 실수로 12월11일부터 필라델피아 극장에 출연하기로 이중 계약을 맺은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위약금을 물어 주고 필라델피아 측에 계약 파기를 요구했으나 그들은 거절했다. 다급해진 밀즈가 찾은 것은 필라델피아의 갱 두목. 돈을 주고 부탁을 하자 그들은 극장의 지배인을 찾아가 총을 들이댔다. 그 자리에서 계약서가 찢어진 것은 당연하다. 어쨌든 천신만고 끝에 얻은 그일자리를 발판으로 삼아 듀크는 한 시대의 에포크를 긋는 거인으로 성장했는데 그 이면에는 마피아의 적절한 협조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클래식의 대가를 놀래킨 맹인 피아니스트
재즈 무지션들 사이에선 가끔 경쟁적으로 ‘바틀(Battle)’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때 베틀은 주먹다짐을 하는 싸움이 아니라 자신의 악기를 갖고 연주를 통해 서로의 실력을 판가름하는 것이다. 사실 재즈는 협력의 음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경쟁의 음악이기도하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만나 연주를 벌이면 십중팔구 서로의 음을 갖고 싸우게 된다. 마일즈와 몽크 사이가 그랬고, 롤린스와 소니 스티트 사이가 그랬다. 팬으로서는 이렇게 서로 으르렁거리면 거릴수수록 볼거리는 많아진다. 아무래도 연주 또한 격렬해지기 십상이다. 빅 밴드 시절에는 정규 연주회가 끝나면 가끔 ‘애프터 아워 세션’이 벌어지곤 했다. 관객도 없고 밴드의 리더도 없는 자기들만의 시간이었으므로 뮤지션들로서는 아무 거리낌없이 실력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만일 누가 이 세션들을 포착해서 레코드를 만든다면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런 배틀에서 단연 돋보였던 인물이 아트 테이텀이란 피아니스트였다. 그 누구도 그의 자유분방하고 여유로운 프레이징 따라잡지 못했고, 다만 밀트 잭슨 정도가 적수로서 인정받았다고 한다. 사실 그의 연주 실력은 클래식계에서도 인정받는 수준이었다. 한번은 그가 정규적으로 출연하고 있던 클럽에 호로비츠란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우연히 들른 적이 있었다. 아트의 연주에 홀딱 반해 버린 호로비츠는 흑인인데가 뚱보이면서 더구나 재즈 같은 비속한 음악을 연주하는 그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시 자기가 잘못 판단한 건 아닌가 싶어 그 다음날 친구를 데려와 확인을 부탁했다. 한데 그 역시 감탄하는 게 아닌가? 사실 그 친구는 토스카니니로 당대 최고의 지휘자였다. 하지만 정작 아트 본인은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연주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재즈계의 디바 빌리 할리데이
엘레지의 여왕이라하여 우리나라에선 이미자를 최고로 꼽았던 시절이 있었다. 재즈계에서 그런 대접을 받는 인물은 일명 ‘레이디 데이(Lady Day)'라고 불리는 빌리 홀리데이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지금도 그녀의 레코드를 들으면 시간이 간극을 초월해서 전달되는 마력과 같은 카리스마에 섬뜩할 때가 있다. 이런 음악을 했던 여성답게 그녀의 삶은 블루 그 자체였다. 그녀가 3세가 되었을 때 그녀의 부모는 비로소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아빠의 나이 겨우 18세, 엄마의 나이16세였다. 철부지 청소년이나 다름없는 부부였던 셈이다. 게다가 재즈를 연주했던 아버지는 이내 가출해서 여러 밴드를 전전하며 평생 방랑 생활을 했다. 그러므로 10대 소녀나 다름없었던 어린 그녀의 어머니는 갖은 고생을 하며 딸을 키우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 고생이 어떠했으리란 것은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빌리의 아버지는 한때 트럼펫을 불었지만 뜻하지 않는 일로 그 꿈을 포기해야 했다. 군대에 징집된 후 해외 근무를 하다 실수로 독가스를 마셔 폐를 다친 것이다. 대신 집어든 것이 기타였는데, 이 일이 잘되어 그는 기타리스트가 되어 버렸다. 어릴 때의 빌리는 남보다 조숙한 소녀였다. 10세 무렵엔 이미 숙녀티가 날 정도였다. 빌리는 그 마을에 단 한대밖에 없었던 축음기를 갖고 있던 친구 집에 가서 음악을 듣곤 했다. 그때의 레코드는 루이 암스트롱과 베시 스미스. 이때 배운 교육이 음악 레슨으로선 전부였던 셈이다.
그녀의 본명은 엘리노어였다. 한데 그녀의 이름이 빌리가 된것은 어릴 적 그녀가 좋아했던 배우의 이름 '빌리 다운'에서 따온 것이다. 너무나 빌리 다운을 좋아한 나머지 17센트의 관람비가 없었던 그녀는 몰래 극장 창문으로 숨어들어가 관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빌리는 어려서부터 매음을 했고 또 마약에 손을 댔다. 때문에 소년원도 자주 드나들었고 하층민의 각종 비참한 생활이란 생활은 모두 겪었다. 그래서 30대 중반에 쓴 회고록을 보면 자신의 인생은 너무나 굴곡이 심해서 한 60년쯤 산 할머니 같은 기분이 들며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이렇게 인간은 같은 시간을 살았어도 수천만 가지나 되는 각기 다른 역경을 겪기도 하는 모양이다. 다음 회에서는 그녀가 우연찮게 가수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드라마틱한 에피소드를 소개해 보겠다.
제2장 모던 재즈를 빛낸 재주꾼들의 이야기
비밥이 시작되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재즈계엔 거센 바람이 불어닥쳤다. 이른바 '비밥(Bebop)'이라 하여 기존의 스윙과는 다른 음악이 유행을 타기 시작한다. 여기서 과연 비밥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 유래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스페인어에 기원하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가자!(Go)'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당시의 뮤지션들에게는 일종의 의성어로 자리잡았던 모양이다. 말하자면 한참 흥이 올라 연주에 몰입할 때 자기도 모르게 아티스트 입에서 "비바바 비바바...." 하는 식으로 애드립이 나왔으며 이것이 자연스럽게 용어로 정립된 것이다.
비밥을 이야기하자면 우선 이 장르를 잉태시키다시피 한 찰리 파커, 일명 버드(Bird)와 디지 길레스피 두 사람에 대한 소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우선 버드부터 말하자면 그 별명의 유래가 재미있다. 그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너무나 허기진 나머지 무척 게걸스럽게 먹어대곤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친구들이 그때마다 '야드버드(Yardbird)'라고 놀려댄 것이 발단이었다. 알다시피 야드버드는 신병이나 신참을 뜻하기도 하지만 죄수라는 의미가 좋지 않은 표현이다. 즉, 먹는 품이 꼭 며칠 굶은 죄수 같다고 놀린 셈이다. 그러다가 야드가 빠지고 버드로 불리면서 다분히 시적인 별명이 되었다.
역시 디지 길레스피의 경우 '디지(Dizzy)'란 이름도 실은 본명이 아니다. 정식 이름은 존 벅스 길레스피다. 그런데 심한 다혈질적이 성격 때문에 무대 매너가 과격했을 뿐 아니라 연주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정력적이어서 '디지'란 별명이 붙은 것이다. 이 두 거장의 일화에 대해선 많이 알려진 편이라 이만 하겠다. 다만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절친한 두사람이었지만 성격만은 판이하게 달랐다는 점이다. 버드는 즉흥적이고 무절제해서 술과 여자를 가까이했으며 무엇보다도 지독한 마약 중독자였다. 한번은 이런일이 있었다. 노먼 그랜츠라는 프로듀서가 해마다 주최했던 'Jazz At The Philharmonic'(줄여서 JATP라고 한다) 행사에 버드와 디지가 초대받은 일이 있었다. 때는 1946년, 장소는 로스앤젤레스의 오디토리엄이었다. 그런데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마약을 구하지 못한 버드는 거의 절망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관중은 그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그 자신은 금단 증상때문에 식은 땀이 나고 헛구역질이 나는 등 말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기적적으로 마약을 구해 정신을 차리고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 기량을 되찾은 그는 JATP 사상 최고의 명연을 남겼다. 타고난 재능 덕분인지 마약 덕분인지 알 길은 없다.
반면 디지는 성격답지 않게 비즈니스에 능통했다. 특히 그의 아내는 자린고비로 유명했다. 클럽의 출연료며 각종 개런티를 착실하게 저축해 자금 사정은 늘 좋았다고 한다. 그녀에게 버드는 악의 화신이었다. 틈만 나면 그를 멀리하라고 했으니 결국 두 사람 사이도 나중엔 벌어지고 말았다. 디지가 이룩한 공적 중의 하나는 재즈 전도사로서의 일일것이다. 1956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명을 받아 자신의 빅 밴드와 함께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중동을 돌면서 벌인 일련의 공연은 재즈를 보급하는 데에 있어서 큰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버드와 그의 후배들
버드는 많은 후배들을 두고 있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재능이 보이는 친구라면 나이라든가 이력에 상관없이 후한 대접을 했다. 그런 성격 덕분에 주위의 많은 아티스트들이 그에게 테크닉적인 면과 아울러 정신적인 면까지 영향을 받았다. "여태껏 내가 만난 사람 중에 버드가 최고였습니다. 그를 통해 내가 왜 재즈를 열심히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으니까요." 소니 롤린즈의 회상이다. 그뿐 아니다. 어느 연주자의 다음과 같은 평은 두고두고 새겨 볼 만하다. "만일 버드가 살아서 저작권법을 주장했더라면 그의 사후 10년간 활동했던 모든 아티스트들이 그에게 인세를 지불해야 했을 것이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 중에는 마일즈 데이비스로 끼여 있다. 그는 1940년대 말 뉴욕의 줄리어드에 다니면서 밤에는 재즈를 연주하곤 했는데 기량과 사고가 채 성숙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때 그를 발굴한 버드는 비밥 열풍으로 불이 타오를 것 같았던 52번가의 클럽을 돌면서 엄한 훈련을 시켰다. 즉, 아무 무대나 데리고 다니면서 함께 조인트 연주를 하도록 시킨 것이다. 마일즈가 머뭇거리면 그는 지체없이 닦달했다.
"뭐 어때? 일단 한번 해보라구. 어려울 것 없어." 어쨌든 이런 훈련으로 마일즈는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50년대에 들어와 비밥으로 시작된 혁명이 무르익으면서 모던 재즈(Morden Jazz)라는 개념이 확립되어 갔다. 그에 따라 이전과는 다른 감각과 기교를 갖춘 걸출한 뮤지션들이 속속 데뷔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재즈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 시기에 유행한 음악의 경향은 마일즈 데이비스와 레니 트리스타노 등에 의해 시작된 쿨 재즈가 있고 이것을 보다 부드럽고 듣기 편하게 만든 웨스트 코스트 재즈가 있으며, 한편 이에 반발해 흑인들의 개성을 살린 이스트 코스트 재즈 등이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펑키 재즈(Funky Jazz)라 하여 지금도 많은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렇게 장르가 다채로웠던 만큼 이에 가세한 아티스트 명단 또한 호화롭다. 그중에서 몇 가지 재미있는 사례를 훑어 보겠다.
숱한 화제를 뿌린 마일즈 데이비스의 신화
마일즈 데이비스는 오랫동안 재즈계의 거인으로 군림하면서 숱한 화제를 뿌렸던 아티스트다. 이미 50년대에 그는 스타였으며 발 빠르게 새로운 음악 경향을 파악해 80년대까지도 가장 선구적인 아티스트였다. 그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앨범 한 장에 편곡과 개성을 고루 담아 하나의 소장품으로 격상시킨 점이다. 이전까지의 앨범은 그저 하루 이틀의 세션을 모아 엉성하게 편집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소니 롤린즈나 디지 길레스피의 멋대가리 없는 음반들을 보면 마일즈의 위대함은 쉽게 감지될 것이다. 즉흥성이랄까 융통성에 있어서도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 예로 1956년 5월 11일과 10월 26일 양일에 걸쳐 녹음된 마라톤 세션이다. 그 당시 그는 전속사였던 프리스티지를 떠나 컬럼비아로 이적하기 위해 계약상 남아 있는 넉 장분의 앨범을 이틀 동안 한꺼번에 해치워 버린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프리스티지의 전략이었다. 컬럼비아를 통해 스타덤에 오른 마일즈를 보자 이 녹음들을 나중에 <Workin'>, <Steamin'>, <Relaxin'>, <Cookin'> 순으로 1년에 1매씩 차례차례 발매한 것이다. 마치 막 녹음을 마친 것처럼 선전하면서 말이다. 어쨌든 스타 군단이라 불릴 만큼 마일즈 악단을 거쳐간 이름은 찬란하다. 존 콜트레인, 캐논볼 애덜리, 행크 모블리, 윈튼 켈리, 필리 존스 등 이 명단만으로도 재즈사를 쓸 정도다. 이렇게 행복한 그였지만 빌 에반스만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와의 교류도 짧아 우리로서는 <Kind Of Blue> 정도의 명연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당시 20세 안팎이었던 허비 행콕은 이점을 간파했다. 원래 펑키 재즈 스타일로 데뷔했지만 정작 마일즈의 오디션 때에는 안면을 바꿔 차분하고 관조적인 빌 에반스를 그대로 카피해 버린 것이다. 물론 합격이었다. 그런 감쪽같은 속임수는 어떤 면에서는 귀엽기까지 하다.
평소 허비 행콕은 음악인들의 소원이던 그래미상보다 아카데미 영화음악 작곡상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미는 제가 활동할 즈음 생겨난 상이지만 오스카는 제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있었던 상입니다. 어릴 적부터 수상식을 지켜 보며 한 번 저 상을 타 봤으면 하고 오랫동안 바래 왔죠." 이런 그가 결국 <Round Midnight>으로 오스카 상을 수상했으니 오랜 꿈이 실현된 셈이다. 한편 말년의 마일즈는 자신을 황제로 착각, 여러 기행을 남겼다. 한 번은 유명한 일본의 재즈 비평가가 자신의 부인과 함께 뉴욕에 온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부부가 빌리지 뱅가드 클럽에서 우연히 마일즈와 맞닥뜨린 것이 화근이었다. 평론가 부인에게 반한 마일즈는 계속 치근덕거렸고 마침내 화가 난 비평가와 주먹다짐까지 할 정도로 험악해져 버렸다.
"키도 조그마하고 비쩍 마른 데다 약에 취해 눈동자에 초점도 없는 그런 친구가 황제라니, 원.... 하지만 젊었을 때 복싱을 했다니 주먹 맛은 매웠을 거야." 훗날 비평가의 회상이다. 그와 함께 죽기 얼마 전에는 이태리를 방문해 무려 2백만 불어치 옷을 쇼핑했던 마일즈. 과연 죽을 때까지 몇 번이나 그 옷을 입어 봤을까?
멍청한 놈은 주먹으로 다스려라
주먹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버드 파웰과 찰스 밍거스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재즈는 술집에서 공연을 많이 했던지라 파웰은 심심찮게 손님과 주먹다짐을 벌였던 모양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동료 뮤지션들과의 일전도 불사했다. 한번은 프리스티지 레코드사에서 녹음할 때였다. 동료 뮤지션 소니스티트가 그의 테크닉을 추켜세우자 우쭐해진 그는 부조정실의 백인 기사에게 " 이봐, 뚱보! 나가서 샌드위치 좀 사와!" 하고 소리쳤다. 한데 그 모습을 밥 와인스톡 사장에게 들킨 후 다시는 프리스티지에서 녹음할 수 없었다. 파웰은 나중에 정신이 나가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는데, 누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둥 하도 시끄럽게 굴어 간수로부터암모니아 세례를 받기도 했다. 이후 유럽으로 날아가 다소 평온을 되찾았지만 40년대말 보여주었던 활력은 연주에 나타나지 않았다. 참으로 재즈는 이상한 음악이다.
찰스 밍거스는 보스 기질이 다분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젊었을 적에는 일자리를 얻지 못해 택시 운전을 하며 빌빌거리기도 했단다. 하지만 음에 대한 그의 욕구는 대단했다. 자신의 밴드를 결성해 놓고 연주를 할 때 간혹 마음에 들지 않는 연주를 하는 멤버가 있으면 가차없이 주먹으로 다스렸다. "이봐! 자신감을 갖고 네 음을 내란 말야! 남의 눈치나 보지 말고!" 이렇게 이야기하며 스스로의 스타일을 갖도록 북돋웠던 것이다. 이런 밍거스였지만 정작 에릭 돌피 앞에서만은 온순해졌다. 아니, 거의 흠모하기까지 했다. 돌피가 1964년 돌연 사망해 버리자 그를 추모하는 밍거스의 글에는 구구절절 애절한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 돌피의 음은 굉장히 크고 찰리 파커의 톤을 닮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아티스트로서의 깊이가 배어 나왔습니다. 한편 그의 순응성은 놀라웠습니다. 그는 개성이 강한 예술가였습니다. 하지만 빅 밴드에 참가하면 완전한 리드 파트로 변했어요. 그러다 솔로 파트가 되면 스위치를 완전히 바꾸어 자기 표현에 투철했습니다...." 한번은 두 사람이 함께 허름한 클럽에서 연주할 때였다. 손님도 없고 분위기도 죽어서 맥빠진 연주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때 돌피가 밍거스에게 다가와 슬쩍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열심히 합시다. 듣고 있지 않는 것 같지만 저기 구석에 앉아 있는 남자가 충실하게 경청하고 있어요." 물론 밴드의 사기를 올려 주려는 돌피의 마음 씀씀이를 나타내는 일화다.
스스로를 극복해야 얻어지는 재즈
재즈 뮤지션들의 과거를 훑어 보면 여러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대개 10세 안팎의 나이에 연주를 시작, 서른쯤 되었을 때는 경력이 20년씩이나 된다는 것도 흥미롭고 또 그렇게 해서도 일류가 못되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점이 놀랍다. 그런 때문인지 나중에 이름을 날렸지만 정작 당사자는 재능의 결핍내지는 자신감의 결여로 방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부커 어빈이다. 1930년 텍사스 출생인 그는 일찍부터 트롬본으로 재즈를 연주했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재능이 없었는지 중단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20세쯤 군에 입대하면서 다시 생각이 바뀌었다. 군악대에서 이번에는 테너 색소폰을 불며 독학을 시작한 것이다. 제대 후 삼류 악단이며 여러 블루스 맨들과 어울려 순회 공연을 다니기도 했는데 어떤 벽을 절감했는지 그만두고 말았다.
"당시 저는 숙련된 기술자나 우체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스물여덟 살 되던 해, 생각을 바꿔 찰스 밍거스의 악단에 가입하면서 인생이 바뀌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멋진 연주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였지만 그 정도에 다다르기까지 상상하기 힘든 방황을 했던 것이다. 존 콜트레인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당초 마일즈의 악단에 가입했을 때 그는 늘 빈정거리는 말을 들어야 했다. "너는 재능도 없고 평범하기 짝이 없어. 그런 실력으로 절대 일류가 되지 못해." 이런 마일즈의 호평 속에서도 하루 종일 마우스피스를 물고 연습한 끝에 오늘날 그는 전설적인 영웅이 되었다. 재즈는 재능만으로 되는 음악은 아닌 것이다.
50년대 말 프리스티지와 계악을 끝나고 마일즈 악단에서도 나온 콜트레인은 오랜만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평소 그는 블루 노트 레코드사에 관심이 많아 그 회사와 계약하고 싶어했다. 헌데 그가 회사를 방문한 당일날 사장 알프레드 라이언은 경황이 없었다. 평소 애지중지하던 고양이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너무나 귀여워 블루 노트 식구들도 좋아했던 고양이였다. 그 덕분에 콜트레인과는 이야기를 하는 둥 마는 둥 되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알아보니 이미 콜트레인은 임펄스와 계약한 뒤였다. 라이언 사장이 뒤늦게 땅을 치고 아쉬워했음은 물론이다.
백인 재즈 뮤지션들의 고통
이쯤에서 잠시 재즈계의 정황을 살펴보고 이야기를 전개시켜 보겠다. 지금까지 다룬 부분은 1950년대, 바야흐로 비밥의 혁명이 결실을 맺어 이른바 모던 재즈라는 컨셉이 전세계적으로 화제가 될 무렵이었다. 이때에는 쿨 재즈, 웨스트 코스트 재즈, 펑키 재즈 등 다양한 장르가 퍼져 나와 마니아들을 즐겁게 했으며, 동시에 50년대 중반에 태동한 록큰롤로 인해 서서히 대세가 기우는 시기이기도 했다. 한편 기술적인 발전도 놀라워서 SP 레코드에서 LP 시대로 접어들었고, 동시에 모노럴 녹음에서 스테레오 녹음으로 혁신적인 발전을 이룩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웨스트 코스트라 하여 백인 재즈의 우상이었던 쳇 베이커, 제리 멀리건, 아트 페퍼 등이 약물 중독으로 도중 하차한 일이다.
쳇 베이커의 경우 유럽 순회 공연중이던 1959년 이태리에서 마약 소지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옥살이를 했으며, 60년대 말에는 역시 유럽에서 거리의 깡패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마지막은 더욱 비참해서, 1988년 12월 암스테르담의 한 호텔에 투숙했다가 옥상에 올라가 투신자살하고 말았다. 비참하기는 아트 페퍼도 마찬가지다. 찰리 파커에 버금가는 재능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삶의 대부분을 약물 치료로 보냈으며, 70년대 중반 재기했을 때엔 배에 종양이 나 항상 헝겊을 둘러야 했다. 하긴 약물은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대부분의 재즈 뮤지션들이 상습적으로 복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운이 없었던 케이스는 진 아몬즈이다. 그의 별명은 '보스 테너'.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재능이 출중했던 연주자였지만 한참 활동해야 했을 60년대에 두 번에 걸쳐 무려 9년 간이나 옥살이를 했다. 물론 마약 소지 때문이다. 감옥에서 출감하고 2년 뒤에 사망했으므로 이래저래 그의 소질은 땅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베이커나 페퍼처럼 백인이면서 마약 중독으로 고생한 스탄 게츠는 죽기 전에 인상적인 공연을 남겼다. 그는 평소 재즈의 즉흥성을 강조해 왔기 때문에 그 어떤 공연을 하더라도 사전에 멤버들과 조율을 많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무대 위에서 조절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그였지만 1991년 사망 직전에 가진 캐니 배런과의 듀오 공연에서는 평소보다 혹독한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그를 잘 아는 배런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미 배런도 그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연중에 게츠가 힘들어 하면 서로 눈짓으로 배런이 바톤을 이어받아 상대가 푹 쉴 수 있도록 긴 솔로를 했다. 게츠는 이 정도로 호흡이 잘 맞는 배런과의 마지막 공연을 후회없이 마쳤으리라 생각된다.
프리 재즈의 두 악동
솔로 연주에 있어서 탁월한 기량을 갖춘 소니 롤린스는 아이템이 막히거나 뭔가 한계에 부닥치면 한 2년 간 잠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펑키 재즈가 쇠퇴하고 프리 재즈로 넘어가던 1959년에서 1961년 사이의 과도기가 그 첫번째 잠적이요, 또 퓨전 재즈가 발흥할 무렵이었던 1969년에서 1971년 사이의 외출이 그 두 번째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쉬는 동안 그가 벌인 일이었다. 첫번째 잠적 기간에는 브룩클린의 다리에 가서 혼자 연습을 하다가 집에 돌아와서 자신의 레코드를 감상하며 공부했다고 한다. 두번째는 좀 이상한데 인도와 일본을 돌며 그쪽 음악을 공부한 것이다. 어쨌든 이런 휴식 덕분에 지금도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다.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 열심히 아령으로 체력을 단련한 덕분인지는 모르겠다.
한편 1961년 그가 일선에 복귀했을 때의 기대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래서 후한 돈을 받고 RCA와 계약했지만 그 당시에 낸 6장의 앨범 모두 판매 면에서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 계약을 주선한 조지 아바키언이란 프로듀서만 해고당했으니 이래저래 말썽 많은 롤린스였다. 60년대 들어서면서 불어닥친 프리 재즈의 열풍은 재즈계 전반을 뒤바꿔 버렸다. 그 대표적인 아티스트인 오네트 콜맨과 세실 테일러를 소개한다.
오네트 콜맨은 난삽한 프레이징과 이해할 수 없는 솔로로 악명이 높은 사람이다. 그가 이런 음악을 갖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고 한다. 어릴 적에 그는 독학으로 알토 색소폰을 마스터했는데, 문제는 피아노 교본을 보며 연습한 점이다. 알토와 피아노의 음계를 착오한 그는 책에 적혀 있는 A를 알토라면 C일 것으로 생각해 결국 오늘날의 기묘한 음을 만들어 낸 것이다. 무명이었을 적에 그는 텍사스에서 연주를 했다. 한참 경기가 좋았을 무렵의 텍사스는 웬만한 클럽에는 꼭 밴드가 있었다. 하지만 그 밴드의 역할은 음악보다 다른 데에 있었다. 좌중에 싸움이 벌어지거나 말다툼이 났을 때 일종의 연막탄으로 음악이 쓰였던 것이다.
하루는 눈앞에서 두 남자가 칼에 찔려 죽고 다른 한 사람이 권총에 사살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래도 연주는 계속해야 했다. 주급 1백 달러는 그의 가난한 살림에 꼭 필요한 돈이었기 때문이다. 간혹 재즈는 이렇게 목숨을 걸고 연주해야 했던 음악인 것이다. 피아노를 잘 부수는 것으로 역시 악명이 높았던 세실 테일러는 집에 피아노가 없다고 한다. 모르긴 몰라도 이미 부숴 버렸을 것이다.
그가 무명이었을 때 파이프 스포트라는 뉴욕의 한 클럽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클럽에 있던 업 라이트 피아노가 개판이었다. 해머 헤드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고 앞판은 벗겨진 상태였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테일러는 과격하게 피아노를 두드렸다. 함께 공연했던 딕 휘트모어란 연주자는 며칠 후 도망가 버렸고 대타로 스티브 레이시가 올라왔다. 어쨌든 호흡이 잘 맞아 무려 7주 동안 손님이 꽉 찼단다. 그 덕분에 돈을 번 클럽 주인은 그제야 피아노를 수리했다고 하니 지독한 연주자에 지독한 주인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풍운의 60년대가 밝아 왔고 숱한 화제를 몰고 온 괴짜들도 속속 출현하게 된다. 이 흐름은 70년대의 퓨전을 지나 오늘날의 컨템포러리 재즈에도 이어지고 있다.
제3장 컨템포러리 재즈의 뒷골목 이야기
존 콜트레인의 죽음으로 재즈는 사망했다?
1960년대 중반에 다다를 즈음의 재즈계는 여러모로 위험에 직면해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난삽하고 어렵기만 한 프리 재즈가 점차 많은 연주자들에게 통용되고 있었고 외부적으로도 고전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음악적인 성격상 재즈가 록 음악보다 상업적인 흡인력이 약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음반 판매나 상업성에 있어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재즈가 고전을 면치 못한 데에는 근본적인 환경의 변화가 있었다. 사실 재즈는 여러 모로 아메리칸 클래식으로 대접받을 만했다. 한데 무용의 저슨 처치라든가 미술의 팝 아트, 그리고 오프 브로드웨이의 탄생 등 문화적으로 미국의 강세가 여러 면에서 발휘되자 사정은 달라졌다. 재즈는 어느덧 마이너러티 문화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상업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재즈가 설 자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그런 상황을 항변이라도 하듯 1967년 모던 재즈를 몸으로 불살랐던 존 콜트레인이 급사하고 말았다. 그는 짧은 생을 예감했는지 매일 입에 마우스피스를 물고 연습에 몰두했던 사람이다. 그런 치열함 끝에 탄생한 그 찬란한 음악을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다. 모던 재즈를 빛냈던 명장들이 차례로 스러져 갔다. 혹자는 죽음으로, 또 혹자는 외국 이민으로 훌훌 재즈계를 떠나 버렸던 것이다. 어쩌면 그 암운의 전조는 50년대에 이미 드리워졌는지도 모른다. 그 대표적인 예가 클리포드 브라운이다.
클리포드 브라운의 죽음
그는 자신의 밴드에 멤버로 있던 리치 파웰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은 비운의 아티스트다. 한 가지 애석한 것은 그 사고를 미연에 예방할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파웰은 그의 약혼녀 낸시에게 운전을 가르친 후 자신의 차를 몰게 했단다. 그러나 실력이 신통치 않아 늘 아슬아슬했다. 그것을 보다 못한 같은 밴드에 있던 드러머 맥스 로치가 그녀에게 핸들을 맡기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그런데 사고 당일의 운전사는 낸시였다. 만일 로치의 말을 귀담아 들었더라면 브라운의 음악 경력은 좀 더 이어졌을 것이다. 어이없이 죽은 아티스트를 들라면 또 리 모건을 꼽을 수 있다. 60년대 초반 블루 노트사를 이끌 만큼 파워 블로잉의 명수였던 리 모건은 1972년에 총격으로 사망했다. 거기엔 이런 이유가 있었다.
그에겐 애인이 한명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만 마음이 변해 다른 여자를 만났다고 한다. 이에 격분한 그녀가 일을 저지른 것이다. 리가 단골로 출연하는 클럽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연을 마치고 나오는 그를 향해 분노의 방아쇠를 당겼던 것이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더니 리 모건의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었나 보다. 한편 유럽으로 떠난 아티스트도 상당수에 다다른다. 덱스터 고든, 버드 파웰, 필 우즈, 필리 조 존스, 듀크 조던, 자니 그리핀 등등.... 이 중에 듀크 조던이란 피아니스트는 1973년 걸작 <Flight To Denmark>란 음반을 발표했다. 지금도 우리에게 친숙한 앨범이라 기억하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한데 앨범 타이틀 그대로 그는 1978년에 정식으로 덴마크에 정착하고 만다. 그럼 5년 전 녹음할 때부터 이미 덴마크로 가버릴 결심을 했다는 이야기인가?
자니 그리핀은 1994년에 재미있는 타이틀의 앨범을 발표했다. <시카코, 뉴욕, 파리>. 이 제목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태생은 시카고요, 젊었을 적에 활발한 재즈 활동을 벌인 곳은 뉴욕이며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파리임을 암시하고 있는 상징적인 제목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죽거나 이주하거나 해서 모던 재즈계는 황폐화되었다. 또 마약이라는 덫에 걸려 삶을 탕진한 아티스트도 꽤 되었으므로 이래저래 재즈계는 어려웠던 것이다. 마약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 패스란 기타리스트를 잠깐 짚고 넘어가야겠다. 그가 데뷔한 것은 70년대 중반으로 꽤 나이가 들어서였다. 하지만 그는 곧 재즈계를 평정할 만큼 대단한 테크닉을 보여줬다. 대체 이런 실력자가 그 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단 말인가 모두들 의아해했는데 그 대답이 마약이었다. 젊었을 적의 그는 지독한 마약 중독자여서 재즈는 뒷전이었다. 결국 독한 마음을 먹고 60년대 초반 시나논 요양소에서 3년 간 치료를 받았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시기에 그 수용소에 있던 다른 재즈 뮤지션들과 모여서 음반도 한장 발매했다는 점이다. 아마 이런 재즈 사랑 덕분에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나에게 한 시간만 달라"
재즈라는 음악은 참으로 어렵다. 단순한 감상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실제로 연주하려고 들면 보통의 테크닉으로는 어림도 없다. 대부분의 재즈 뮤지션들은 보통 10세 이전에 악기를 만진다. 그리고 30대가 되어서야 꽃을 피우니 보통 경력이 20년이 넘는 연주자가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서처럼 가끔 아무런 기초도 없이 우연한 기회에 음반을 내거나 혹은 외국의 작품을 슬쩍 해서 스타덤에 오르는 것은 재즈에서는 있을 수도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인지 테크닉도 테크닉이지만 최후에 가서는 재즈적인 감성이 문제시된다. 미국에서 드러머로 꽤 유망한 이언 프레드릭이란 친구가 한국에 놀러왔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도 5세 때부터 드럼 스틱을 만졌으니 20대 중반인 현재 경력이 20년이나 되는 셈이다. 그런데도 그 또래의 친구들 중에 여럿이 중도 하차했다는 것이다.
이유를 물어보니 물론 실력도 실력이지만, 어느 순간 "너는 죽어도 스윙은 할 수 없어"라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런 친구들은 전업을 하든가 아니면 록 그러머로 전향하는 것이 낫다고 했다.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우리가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듣는 많은 명인들의 음악적 감각은 상상을 초월한다. 펑키 재즈의 오르간 주자로 60년대를 풍미했던 지미 스미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스튜디오에 날 잡아 넣고 한 시간만 시간을 달라 그러면 앨범 한 장을 녹음해 주겠다."
대단한 호언장담이지만 그 말은 사실이다. 그 한 예로 지미의 선배이자 또 대단한 재능을 갖고 있었던 얼 하인즈를 소개하겠다. 60년대 중반, 얼은 10년 간의 휴지기를 끝내고 환갑이 넘은 나이에 다시 일선에 복귀했다. 그래서 1965년에는 유럽 순회 공연에 오르기도 하는데 그 중간인 런던에서 짬을 내어 녹음을 한 일이 있었다. 때는 4월 20일과 21일 사이의 새벽. 원래는 그 양일 간에 걸쳐 런던의 한 클럽에서 연주를 하기로 되어 있던 터라 그 중간인 새벽에 시간을 내어 스튜디오에 도착한 것이다. 어쨌든 녹음을 시작한 것은 오전 12시 10분. 그런데 끝난 것은 90분후인 1시 40분이었다. 그 사이에 무려 60분짜리 피아노 솔로 녹음이 완성된 것이다. 아무리 피아노 한 대를 놓고 한 녹음이라지만 연주 하나하나에 흠잡을 데도 없을 뿐더러 그중 몇곡은 2,30년 전에 녹음한 후 한번도 연주해 본 적이 없는 것도 있다.
하긴 아트 페퍼 같은 알토 색소폰 주자는 50년대 중반 마약 때문에 펑펑 놀다가 레코드사의 압력으로 녹음실에 들어간 일이 있었다. 6개월만에 처음 악기를 만지는 것은 어색했지만 리듬 섹션 또한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허세를 부려 가며 연주를 시작했지만 사실 머리 속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아주 부드럽고 따뜻한 연주가 되었다. "당시 저는 수록곡의 멜로디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원래의 멜로디를 찾으려 안간힘을 쓰다 보니 이런 앨범이 나온 것이지요." 그 앨범이 바로 <<아트 페퍼, 리듬 섹션을 만나다>>이다. 역사는 가끔 이렇게 아이러니컬한 모양이다.
퓨전과 이지 리스닝 재즈의 반격
이렇게 어수선한 60년대 말, 마일즈 데이비스는 여러 모로 생각이 많았다. 재즈계 최고의 스타인 자신의 앨범이 팔리지 않는 미래는 암담할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이러다 재즈가 고사하고 마는 게 아닌가 한숨만 푹푹 나왔다. 그러던 중 록 음악계의 전설이 되다시피 한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개최되었다. 조 카커, 제퍼슨 에어플레인, 후 등 당대의 최고 스타들이 경연을 벌인 이 공연장에는 수십만의 인파가 몰려들어 성황을 이뤘다. 바로 그순간에 마일즈는 정면 대결을 벌였다. 그 날짜에 그는 존 맥러플린을 위시해 칙 코리아, 웨인 쇼터 등 베테랑들을 불러모아 여태까지 한번도 존재하지 안았던 새로운 형태의 재즈를 녹음한 것이다. 바로 그 앨범이 <<Bitches Brew>>요, 퓨전 재즈가 본격적으로 태동한 계기가 된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앨범 제목의 뜻이다. 원래는 마장마술에서 쓰는 용어로, 말이 넘어야 하는 장벽 가운데 가장 험난한 벽을 일컫는 말이다. 말 그대로 <<Bitches Brew>>는 퓨전 재즈 뮤지션들이 결코 넘어서지 못했던 장벽이 되고 말았다. 평소의 마일즈는 누굴 흉내내거나 모사하는 것을 지극히 혐오했다고 한다. 빼어난 실력보다는 오리지널리티를 더 중요시했던 것이다. 죽기 얼마 전 그가 신인 기타리스트를 발탁해서 함께 연습한 적이 있었다. 그는 계속 그의 프레이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봐. 자꾸 지미 헨드릭스 흉내를 낼 거야?" 그러다가 화가 북받치자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그 친구 머리 위에 쏟아 부었다고 한다. 이런 마일즈였으니 늘 신선한 음악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렇게 어려움에 빠진 재즈를 되살리기 위해 마일즈처럼 퓨전을 하거나 혹은 이지 리스닝 재즈를 시작하는 아티스트도 나왓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크리드 테일러와 그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웨스 몽고메리다. 아마 70년대 초반을 석권했던 CTI란 레이블을 기억하는 독자가 꽤 있을 것이다. 이것은 '크리드 테일러 이슈'의 약자로 당시 A&M 레코드사가 1백만 불이란 거액의 스카우트 비용을 지불하고 그를 사장으로 해서 만든 회사다. 이 회사에서 나온 일련의 듣기 편한 재즈가 '이지 리스닝 재즈'라 하여 당시 화제를 모았다. 크리드 테일러는 상업적인 감각이 매우 탁월했던 프로듀서였다. 이전에 재직했던 버브 레코드사에서 '삼바 재즈'의 열풍을 몰고온 것도 그의 수완이었으니가.
이런 그가 가장 신뢰앴던 아티스트 중의 한 명이 바로 웨스 몽고메리다. 옥타브 주법을 마스터한 기타의 달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웨스는 60년대 재즈계에서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남아 있다. 웨스는 어릴 적부터 죽도록 고생만 한 사람이다. 남들은 마약에 탐닉하고 알코올에 찌들었을 때 그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노동 현장으로 나가야 했다. 기타도 비교적 늦은 나이인 18세에 시작했고, 그리고 일찍 결혼한 탓에 음악인으로서 또 가장으로서 엄청난 의무에 시달려야 했다. 때문에 첫 작품은 34세가 되어서야 발표할 수 있었다. 그것도 동료 아티스트의 소개로 리버사이드 레이블에서 겨우 한 것이다.한데 이때에도 변변한 악기 하난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동료 기타리스트 케니 버렐의 L-7이란 모델을 빌려야 했다. 당시 125불 하던 보급형 기타였다.
이토록 가난했던 그인지라 밤을 새워 클럽에서 연주를 한 뒤 오전 4시에서 7시까지는 우유 배달을 했고 그 다음은 출근을 해서 오후 4시까지 단추 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해야 햇다. 그가 43세에 아깝게 타계한 것도 어쩌면 이런 지독한 고생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크리드 테일러는 그를 아낀 나머지 버브 시절부터 중용하다가 자신의 CTI까지 데려올 정도였다.
퓨전 기타리스트의 이면
사실 웨스 몽고메리가 재즈 기타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물론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찰리 크리스찬에까지 다다르지만 아무래도 직접적인 계보를 따지자면 웨스 쪽이 더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웨스의 사후 등장한 조지 벤슨이란 기타리스트는 한때 '웨스의 재판'이니 '뉴 보스 기타'니 하여 웨스의 후광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그는 우연한 기회에 노래를 하다가 동료 뮤지션들의 추천으로 본격적인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 그런데 워낙 기타 실력이 출중해 그의 노래 솜씨를 기대한 사람은 사실 별로 없었다. 한데 성인 취향에 딱 들어맞는 감미롭고 포근한 음색이 더 인기를 얻자 나중에는 보컬로 전업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본말이 전되된 케이스인 셈이다.
70년대 중반부터 구준한 이기를 얻고 잇는 팻 메스니는 현재 최고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기타리스트다. 특히 그는 녹음할 때 다른 아티스트처럼 3~5인조의 멤버르 데려다가 일사천리로 진행시키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각종 퍼커션이며 전자 악기 등을 동원, 오버 더빙이라든다 여러 이펙트를 쓰는 데에 골몰해서 상당히 긴 시간을 요했던 것이다. 그의 단짝이자 절친한 음악 파트너인 라일 메니즈와는 20년 넘게 교류를 해오고 있는데, 사실 이들은 최초의 음악 컨셉부터 진을 빼놓고 있다. 그들은 일단 모여서 이차저차하니 이런 작곡을 해보자 하고 의견 일치를 보고 나면 악상이 떠오를 때까지 집안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는다. 특히 라일은 한번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며칠씩 굶어 가며 그것을 발전시키는 데어 몰두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렇게 어렵게 시작한 프로젝트는 녹음에서조차 간단치 않았으며, 결국 우리가 정식 앨범으로 손에 쥐었을 때엔 수많은 시행착오와 노고가 그 안에 숨어 있는 셈이다.
한데 팻 메스니는 <<Questions And Answers>>라는 앨범에서는 불과 8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녹음을 마쳤다. 여기에는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 당초 그는 뉴욕에서 한동안 휴식을 취하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로이 헤인즈와 데이브 홀랜드를 만나자 재미삼아 스튜디오를 찾아갔다. 거기서 이전의 스탠다드 넘버들을 골라 연습하다가 흥이 돋은 나머지 일사천리로 녹음을 해 버린 것이다. 팻의 앨범 하면 으레 난산이 예상되었으나 어쨌든 이 앨범만큼은 릴렉스한 상태로 접할 수 있다. 이렇게 예상치 않게 엉뚱한 일을 벌이는 것이 아티스트 사이엔 종종있는가 보다. 최근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큰 인기를 얻었던 해리 코닉 주니어가 그런 경우다.
사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놀랍다. 쇼 케이스 삼아 벌인 그의 조촐한 공연을 본 일이 있었다. 그는 주력 악기인 피아노 외에도 전자 오르간, 드럼, 베이스, 기타 등 웬만한 악기는 다 다룰 줄 안다. 가히 천부적인 실력이다. 이런 그가 최근에는 빼어난 용모와 인기를 무기로 영화계에 진출했다. <<Copy Cat>>이란 영화에서 의외로 악역을 맡앗다 하니 노래뿐 아니라 연기에서도 활약이 기대된다. 진짜롤 제2의 프랭크 시나트라가 되는 건 아닌가 싶다.
신전통주의 이후의 재즈계
80년대 벽두에 불어닥친 윈턴 마살리스의 어택은 컨템포러리 재즈계를 송두리째 변화시킨 거대한 사건이었다. 그는 퓨전 이후의 역사를 재정리하고 비밥 시대의 이디엄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컨템포러리 재즈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또 다른 업적으로는 많은 후배와 친구들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실제로 초기에 그와 단짝이었던 브랜포드 마살리스도 윈턴의 설득으로 재즈계에 들어왔으며, 맨해튼에 있던 그의 아파트엔 늘 많은 친구들로 득실거렸다. 그곳에서 연습도 하고 또 레코드도 들어 가며 실력을 키웠던 것이다. 특히 그는 많은 고등학교를 순회하며 재능있는 학생들을 발굴해 오늘날의 재즈계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로이 하그로브며 조수아 레드맨 등이 이미 그때부터 윈턴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초기에 윈턴과 일한 바 있는 마커스 로버츠라는 피아니스트는 최근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윈턴은 재즈를 연주할 때 특히 리듬에 민감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하나의 템포로 연주를 하면서도 머리 속에는 또다른 템포를 그려 내어 솔로를 할 땐 전혀 맞지도 않을 성싶은 리듬으로 연주하도록 요구했던 것이다. 사실 제대로 페이스를 맞추기도 힘든 음악이 재즈인데 여기에 또 다른 이미지를 그려 가며 연주하라는 요구였으니 얼마나 어려웠을까? 당시의 마커스는 윈턴과 연주할 땐 그야말로 머리가 돌 지경이었다고 했다. 최근에 버브를 통해 정식으로 데뷔한 니콜라스 페이턴은 윈턴과 같은 트럼펫 주자일 뿐 아니라 고향도 같은 뉴올리언스다. 이런 그가 윈턴의 덕을 보게 된 데에는 독특한 사연이 있다.
윈턴의 아버지 엘리스 마살리스는 뉴올리언스의 터줏대감으로 그쪽 재즈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미 그의 세 아들이 재즈계의 중견으로 자리잡았고, 또 해리 코닉 주니어처럼 그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은 스타도 있다. 때문에 뉴올리언스에서 그쪽 패밀리에 손이 닿는다면 출세는 보장받는 것과 다름없었다. 니콜라스는 고등학교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클럽으로 가서프로 뮤지션들과 손발을 맞출 정도였다. 이런 명성은 이내 마살리스 가문에 알려지게 되었다. 결국 궁금중을 견디다 못한 윈턴이 뉴욕에서 그에게 장거리 전화를 했다. "이봐, 자네가 니콜라스인가?" "예, 그런데요?" "나는 윈턴이야. 날 알겠어?" "물론 잘 알지요!" 얼굴이 상기된 니콜라스는 어떻게 하든 그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려고 고심하다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수화기에 대고 즉석에서 트럼펫을 분 것이다. 한데 뭐가 통했는지 감을 잡은 윈턴은 동생 델파이요에게 연락했다. 델파이요는 트롬본 주자뿐 아니라 프로듀서로서도 알려져 있었다. 그에게 니콜라스를 연결시키려 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최근에 발매된 데뷔작을 보면 역시 델파이요가 프로듀싱을 하고 있다. 그 한 통의 전화가 지금 여기까지 연결된 셈이다.
재즈계를 빛낸 형제 뮤지션들
윈턴 마살리스 이야기가 나왔으니 형제 뮤지션에 대해 조금 언급해 보도록 하겠다. 음악적인 재능이란 것은 어떤 유전적인 형질이 개입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마치 클래식에서의 바흐나 모차르트 가문처럼 재즈계에서도 유명한 가계가 몇몇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앞서 이야기한 마살리스 가문이다. 아버지 엘리스는 피아니스트, 장남 브랜포드는 테너 색소폰 주자, 둘째 윈턴은 트럼펫 주자, 그리고 셋째 델파이요는 트롬본 주자다. 만일 드럼과 베이스를 누가 맡아 준다면 그 자체로도 멋진 6중주단이 될 것이다. 그리고 웨스 몽고메리 삼형제는 악단을 조직해서 활동한 바 있다. 버디 몽고메리가 피아노와 비브라폰, 웨스가 기타, 그리고 몽크 몽고메리가 베이스를 담당했던 것이다. 물론 가끔씩 드럼이 개입하긴 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멋진 트리오의 화음을 선사할 수 있었다.
뚱보로 소문난 캐논볼 애덜리는 50년대 중반 이후 찰리 파커의 뒤를 이어 모던 재즈계를 빛낸 알토 색소폰 주자다. 그런데 그의 동생 냇 또한 트럼펫 주자로서 큰 활약을 했다. 두 형제는 사이도 좋았고 오랫동안 같은 그룹에서 활동을 했으며 다른 가계와는 달리 좋은 앨범도 많이 내놓았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형제0들이 있다 행크 존스를 큰형으로 해서 줄줄이 이어지는 테드 존스, 엘빈 존스 등이 그들이다. 우선 큰형 행크는 일찍 재즈계에 나와 비밥의 초창기를 빛냈으며, 60년대에는 컬럼비아 레코드사의 하우스 피아니스트로 일한 바 있다. 70년대 이후에는 독립하여 '그레이트 재즈 트리오'라든지 그밖의 각종 솔로로 활동, 유장하고 깊이 있는 연주를 들려 주었다.
동생 테드 존스는 60년대 블루 노트에서 멋진 음반을 많이 발표했던 베테랑이고, 막내 엘빈 존스는 두말할 나위도 없는 드럼의 거물이다. 이미 존 콜트레인 쿼텟에서 활동한 바 있고 지금은 일본을 근거로 숱한 세션에 참가하고 있다. 한편 한 사람이 아트스트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면 그 주변 인물들도 덩달아 음악계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혈연 관계는 아니지만 존 콜트레인의 경우 부인 앨리스 콜트레인이 피아니스트로 활약하면서 함께 일했다. 특히 이 부부는 콜트레인의 말기에 함께 공연을 다니면서 좋은 앙상블을 들려 주었는데, << Live At The village Vanguard Again>>이라든지 <<Live In Japan>>등을 통해 그 화음을 들을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아예 부친의 피가 아들에게 전수되어 음악의 길이 이어지는 수도 있다. 델로니우스 몽크, 케니 드류, 오네트 콜맨 등이 이에 속한다. 피아노의 거장 몽크의 아들 T.S. 몽크는 현재 드러머로 활약하고 있다. 5세 때 아트 블래키로부터 드럼 스틱을 선물 받은 추억을 갖고 있는 그는 뮤지션으로서의 활동 외에 몽크의 저작권 및 기타 음반에 대한 소유권을 관장하고 있다. 생전의 몽크가 이런 비지니스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던 덕분에 자식들은 꽤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케니 드류는 낭만적이고 센서티브한 프레이즈로 사랑받았던 피아니스트다. 그런 기교와 상상력은 그의 아들에게 그대로 전수되어 현재 케니 드류 주니어는 아버지를 방불케 하는 피아니스트로 각광받고 있다. 만일 앨범에 표기된 주니어란 글씨만 뺀다면 그의 아버지로 착각할 정도이니 부전자전이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오네트 콜맨은 과격한 블로잉으로 데뷔했고, 또 그이 뒷이야기가 마치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만큼 어떤 면에선 아나키스트적인 이미지를 주고 있다. 그러나 자식 사랑은 끔찍하여 그이 아들 데나르도 콜맨을 드러머로 키우는 데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그의 주재로 이미 10세 때 데나르도는 솔로 앨범을 발표하는데 물론 오네트도 참여해서 특유의 힘찬 솔로를 펼쳐 보이고 있다. 최근에 오네트가 발표한 솔로 앨범을 보면 데나르도가 뮤지션에서 프로듀서로 전업해 그의 앨범에 참여하고 있다. 예전에는 음악의 동반자였던 아들이 이제는 훌륭한 프로듀서로 부친을 돕고 있는 것이다.
영화배우가 재즈 클럽의 경영자로
최근의 재즈계 뉴스를 보면 몇 가지 재미있는 일이 있다. 그중 흥미로운 것을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비밥의 태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민튼즈 플레이하우스'란 재즈 클럽이 있다. 이 명소도 80년대에 들어와 경영 부실로 폐쇄되고 말았는데, 얼마 전에 이곳을 인수해서 다시 오픈한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명배우 로버트 드 니로다. 드 니로 하면 주로 갱 영화에서 혹은 뒷골목을 배경으로 한 강패 영화에서 단골 악역으로 나와 뭔가 재즈하고 어월리는 구석도 있다. 사실 그는 1977년작 <<뉴욕 뉴욕>>에서 색소폰 주자로 열연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6개월 정도 색소폰 연주를 배웠다고 하는데 이를 계기로 재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하긴 그의 콤비인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재즈광이었던 만큼 이번 사건은 아마 드 니로와 스콜세지 콤비의 작품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혹 뉴욕에 가서 그곳을 들르게 된다면 드 니로를 실제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편 이틀 동안의 공연으로 말미암아 그래미상을 2연패한 진기록이 있다. 1992년 2월에 열린 제34회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최우수 재즈 악기 그룹상은 오스카 피터슨의 <<Saturday At the Blue Note>>에 돌아갔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다. 제34회 수상작을 녹음한 날짜는 1990년 3월 17일로 되어 있고, 제33회 수상작인 피터슨의 <<Reunion>>의 ㅣ녹음 날짜는 이보다 하루 빠른 3월 16일이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사실은 이렇다. 이틀 간에 걸친 공연을 각각 한 장의 앨범에 담은 다음 무려 일 년을 사이에 두고 발매한 것이다. 결국 발매일이 달라 이렇게 그래미 2연패란 쾌거를 이룬 것이다. 아마 그 이틀 간의 공연은 오스카로서는 생애 최고의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마지막으로 1996년 1월에 한국을 방문해서 뜻깊은 시간을 가졌던 허비 행콕에 대해 잠깐 언급하겠다. 그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폴 잭슨이란 베이스 주자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 대목이 인상깊다.
폴은 창의성이 매우 뛰어난 나머지 같은 곡이라도 연주가 모두 틀렸다고 한다. 그것까진 좋은데 너무 변화무쌍해서 피와노를 맞출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스튜디오에서 레코딩을 하는 순간에도 문제는 발생했다. 허비의 항의에 뭔가 마음을 정한 폴이 이러이러하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정작 연주가 시작되자 돌변해서 전혀 다른 연주를 했던 것이다. 결국 녹음은 잘 마쳤지만 허비는 어이가 없었다. 그때 그를 향해 폴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미안해. 나도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뭔가 내 머리를 스치는 거야. 그래서 그 방식대로 하고 말았어." 허비는 껄껄 웃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우리는 재즈 뮤지션들이 남긴 연주나 공연을 통해 그들의 음악적인 면만을 보게 된다.
그러나 한 꺼풀 벗겨 보면 의외로 재미있고 드라마틱한 사건이 많다. 그런 사실 때문에 평소 좋아하던 뮤지션에 대해 실망하는 경우도 있는데, 음악과 인생은 서로 다른 것이니까 너무 신경 쓸 필요은 없다.
어찌 보면 그만큼 재즈가 힘든 음악이란 이야기도 된다. 그러니 그런 기행이 속출하는 것이 아닐까? 그때 허비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라이벌로 생각하는 칙 코리아라든지 키스 재릿 등에 실제로 경쟁심을 느끼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이때의 대답이 감동적이다. "경쟁? 그것은 스포츠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재즈에선 해당이 안 됩니다. 사실 재즈를 하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어서 우리는 서로 도우려고 애쓰는 편입니다. 그련데 경쟁이라니.... 허허허." 이렇게 어렵게 탄생되는 음악인 만큼 보다 애정을 가지고 지켜 볼 일이다.
제3부 재즈와 나, 그리고 사람들
재즈를 들으면서 한 가지 얻은 것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는 점
이다. 지금도 방안에서 불을 꺼 놓고 재즈를 듣다 보면 어느 순간 ‘아, 이 곡은
그때 그 친구가 무척 좋아했던 것인데...’라든가 ‘이 앨범을 구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던지. 원’하는 등의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다. 이를테면 아트 블래키의
<Moanin'>을 듣고 있으면 그가 동경에서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펼쳤던 라
이브가 생각나고, 마일즈 데이비스의 <It Never Entered My Mind>를 들으며
오래 전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이곡에 심취했던 일이 기억난다. 그리고 쳇 베
이커의 <My Funny Valentine>을 들으면 혼자 오피스텔에서 기거할 때 자주
만났던 여인이 떠오른다.
물론 가끔 이와는 반대로 나라는 인간은 왜 이리 틀려 먹었을까 한숨도 나오
곤 한다. 남들은 열심히 직장에 다니고 적금도 붓고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람되
게 살아가는데, 나는 재즈에 파묻혀 음 하나하나에 울고 웃고 하면서 꿈을 꾸는
사람처럼 살아왔으니 말이다. 어 떨 때는 불안해지기도 한다. 이거 정신 감정이
라도 한번 받아 봐야 되는 것 아냐 하면서. 그래도 좋다. 돈키호테가 말하지 않
았던가? 사람은 미쳐서 살다가 깨면서 죽는다고. 이왕 사는 인생, 내 나름대로
즐겁게 살다가 가자라며 자위도 해본다. 이번 챕터에서는 재즈를 들으면서 만났
던 사람들, 재즈를 좋아해서 봉변도 당하고 또 감동도 받았던 일들을 두서 없이
써봤다. 뭐 한 시대를 이끌었던 지성들에 관한 스토리도 아니고 현재 스포트라
이트를 받을 만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사람들’이 등장인물이다. 시시하다면 시시할 수도 있
겠지만 이런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작은 감동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좋겠다. 이렇게 꿈을 꾸며 살아온 내 인생이 때로는 감동을 줄 수도 있
구나 하는 기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스스럼없는 자기 합리화를 눈감아
주는 독자를 기대해 본다.
제1장 대학로에서 시작된 재즈와 JBL
심벌즈의 샤프한 파열음을 찾다
“질지언의 심벌즈 소리를 제일 잘 표현하는 스피커는 JBL밖에 없어. 수퍼 트
위터가 내장되어 있거든. 그중에서도 075 유니트가 있으면 최고지.” 이런 식으
로 P는 떠벌리기를 좋아한다. 때는 1989년의 어느 겨울. 장소는 대학로에 있는
조그마한 카페. 영국의 환경음악 뮤지션 브라이언 이노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주인은 카페의 이름을 ‘이노(ENO)'로 붙였다. 나와 재즈의 만남. 그리고 그 긴
여정은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자네는 재즈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
뭐라고 생각하지?” P가 내게 물었다. “글쎄요...” 난 머리를 긁적이며 말해다.
“전 색소폰을 좋아합니다. 콜트레인의 음색이 너무나 좋아 한때는 집에 들어
오면 어김없이 콜트레인을 플레이어에 걸어 놓곤 했죠. 마치 무슨 의식처럼....”
"조금 더 깊이 재즈를 들어보면 어떨까?” P의 눈빛은 무슨 먹이를 발견한 맹수
처럼 반짝거렸다. 하긴 그의 샤프한 관찰력은 이렇게 어설프게 생각하던 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면 음악으로서 재즈의 본질은 무엇
이라고 생각하나? 거창하게 흑인들의 저항의식이니 민속음악이니 하는 것말고
순수하게 음악적인 면에서만...” 이거 이양기가 어려워진다.
“...아무래도 클래식이나 록 음악에 비해 리듬이 발달했으니까 리듬파트에 뭔
가 있겠죠.” “바로 그거야!” 그는 득의양양하게 소리쳤다. “재즈야말로 리듬
의 향연이지. 누군 색소폰이 어떻고 피아노가 어떻고 하는데 그런 것은 재즈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해. 재즈가 흑인의 음악에 기원하고 있고. 흑인은 리듬에 관
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점을 염두에 두면 그 점은 자명해지지.” 이 대화
를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과연 재즈의 본령이 리듬 파트에 잇는 것일까? 그렇
다면 그 수많은 색소폰과 트럼펫 주자. 그리고 피아니스트는 그저 장식품에 불
과한 것일까? 물론 당시의 P는 나보다 나이도 많았고 음반도 많이 모았던 사림
이라 그이 말이라면 무조건 신봉하기도 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무엇
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하는 것은 재즈에서만은 절대로 통용될 수 없다고 생
각한다. 그렇게 일정한 선을 그어 놓고 이야기를 이어가 보겠다.
초점을 일단 드럼으로 좁혀 보자. 아마 재즈나 록 음악에 관심이 있는 마니아
치고 드럼 세트에 앉아서 신나게 두드려 봤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
은 없을 것이다. 기타나 오르간과 같은 악기와는 달리 드럼에는 뭔가 사람을 강
렬한 충동으로 이끄는 에너지 같은 것이 있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파김치가
된 상태에서도 사력을 다해 드럼 세트를 두드려대는 뮤지션들의 모습은 다른 악
기 연주자들에게서 볼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재즈 콘서트에
서도 드럼 솔로만큼은 꼭 그에 걸맞는 박수세례를 받곤 하는데, 드럼의 위력이
랄까 매력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특히 베이스 북의 둔탁한 울
림, 심벌즈의 기민한 연타음,스네어의 낭랑한 파열음은 드럼만이 가질 수 있는
백미가 아닌가 싶다.
한데, 나는 이런 드럼의 여러 파트 중에서도 단연 심벌즈의 기민한 울림을 좋
아한다. 만일 맥스 로치나 아트 블래키가 그토록 심벌즈를 절묘하게 다루지 못
했다면 오늘날 내가 이렇게 재즈 드럼에 탐닉할 수 있었을까? 마치 한여름의 오
수처럼 낭랑하게 일관된 박자로 연타되는 오픈 심벌즈의 소리는 나를 상상의 세
계로 인도하는 것 같다. 정리해 보면 바로 이 소리, 이 심벌즈 소리 때문에 나는
재즈를 좋아하게 되었고 또 그 소리를 제일 명확하게 내는 스피커를 찾아 나서
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P가 리듬의 중요성을 역설했을 때 잠자코 동의했던 것
이다. 물론 이것은 나만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피아노가 좋아서 서른이 넘은
나이에 만학의 길로 들어선 사람도 있고, 어설프게나마 색소폰을 물면서 재즈
기분을 느끼는 사나이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나는 이런 한 가닥의 줄을 잡고
재즈의 길에 들어섰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다행이란 느낌도 든다. 그 결과 재즈
계의 이런저런 사연과 뒷이야기를 캐고 음반 컬렉션에 몰두하며 가끔 콘서트에
도 가는 그런 삶을 살게 되었으니 말이다.
재즈 뮤지션의 최후는 이런 것이다
진정한 복서는 링 위에서 죽는다는 말이 있다. 초창기 러시아 몽타주 이론을
확립시켰던 영화감독이자 영화이론가였던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은 서재에서 죽
었는데, 그 순간에도 컬러 영화의 미래에 관한 논문을 집필중이었다.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을 읽어보면, 주인공인 작가는 사냥을 하다 봉변을 당해 죽
어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멋있는 비유를 하나 찾아내자 자신의 소설에 써먹
을 궁리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재즈 뮤지션의 진정한 최후는 어떤 것이어야 하
는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재즈와 함께 최후를 맞이하는 것일 것이다. 그 최후
의 순간에 재즈 뮤지션이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날 수
있다. 이번에는 나를 감동시킨 사연과 더불어 재즈가 이렇게 비감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 보겠다.
35세에 요절한 리 모건(Lee Morgan)을 보자. <The Sidewinder>앨범에서 보
여주었던 파격적인 하이 파트의 돌출음, 젊고 남성적인 프레이징은 그가 결코
사이드 와인더(보조 연주인)로 머물 아티스트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해 주고 있
다. 이토록 재능이 많고 수많은 레코딩에서 전설적인 명연을 남겼던 그였지만
정작 그의 죽음은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그는 명성에 걸맞게 많은 여성이 있었
고 스캔들도 많았다. 또 알코올과 마약 중독으로 시달리기도 했다. 화려함과 어
두움이 공존하는 그런 위태로운 인생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공연
을 마치고 술집에서 나오다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한다. 한때는 그의 애인이었
지만 이제는 바람을 맞고 찬밥 신세가 된 여성이 그를 향해 총구를 들이댄 것이
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방아쇠가 당겨졌고 그는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
고 죽었다. 실연이 살인까지 이어진 무시무시한 사건이었다.
반면 똑같이 재즈와 최후를 같이하면서도 이런 경우와는 격이 다른 아티스트
도 얼마든지 있다(그렇다고 이런 엉뚱한 죽음을 들어 리 모건을 헐뜯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루이 암스트롱은 자신의 70회 생일날 죽음을 맞이한 이상한 뮤지
션이었다. 그는 불과 3일 전만 해도 정정하게 공연을 치렀던 사람이었다. 아니,
죽기 얼마 전에도 트럼펫을 불며 흥겨워했다. 아마 그런 순간에도 겉으로는 편
안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심한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재
즈는 그가 평온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그를 돌봐주고 감싸준 음악 이상의
것이었음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하지만 진정한 재즈맨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가지도 좀더 치열하게 재즈를
온몸으로 붙들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전설적인 드러머 아트 블래키의 경
우가 그렇다. 이 사연을 이야기하기 전에 여담을 좀 해야겠다. 일전에 카나라는
일본 여성들의 외모였다. 짙은 눈썹과 약간 짧달막한 몸매가 그렇고 특히 길게
기른 생머리는 양 볼에 살짝 패인 보조개만큼이나 일본적이면서도 또 예뻤다.
친구와 함께 그녀를 하루 동안 가이드를 해주기로 했는데 우린 어떤 프로그램으
로 그녀를 기쁘게 해줄까 갖은 궁리를 짜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인사동에 있
는 조용한 찻집에서 만난 우리는 별다른 프로그램이 필요없음을 즉각 알아차렸
다. 그녀는 열렬한 재즈광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서 재즈 계통의
일도 맡아 하던 여성이었다.
일본 하면 재즈에 있어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나라인데, 이곳에서 그녀는
일본을 방문하는 재즈 뮤지션들의 가이드 겸 통역을 했던 것이다. 그녀가 일했
던 곳은 일본 유수의 재즈 카페 ‘블루 노트’. 뉴욕에 본점을 둔 이 체인점은
일본에서도 제일 유명한 곳이었는데 그녀는 그 카페에서 초청하는 외국 뮤지션
들의 방일 일정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그녀는 많은 재즈 뮤지션들을 개
인적으로 알고 있었다. 너무나 부러웠다. 특히 그녀의 입에서 마일즈 데이비스가
건방졌다는 둥 디지 길레스피가 응큼한 노인이라는 둥 떠들 때엔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카나에게서 아트 블래키의 얘기를 듣는 순간 나와 친
구는 모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죽기 얼마 전 아트 블래키는 아픈 몸을
이끌고 최후의 일본 공연을 감행한 일이 있었다.
그는 겹친 피로와 병환으로 인해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병원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뉴스는 일본의 많은 재즈 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 소식이었다.
마침 그녀는 같은 시기에 방일한 길레스피를 가이드하고 있었다. “부탁이 하나
있어요.” 디지는 자신의 공연을 앞두고 무대 뒤로 카나를 불러 조심스럽게 말
했다. “듣기로는 아트가 많이 아프다던데, 그가 있는 병원으로 연락 좀 해 주시
겠어요?” 그의 얼굴은 심각했고, 그래서 그녀는 쾌히 두 거장의 통화를 주선해
주었다. 그 역사적인 통화에서 두 사람이 무엇을 말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렇
지만 그 통화는 아마 재즈의 거장 시대를 마감하는 마지막 상징적인 사건이 아
니었을까? 한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토록 많은 팬들의 걱정
을 자아내게 했던 아트 블래키가 이부자리를 박차고 갑자기 벌떡 일어선 것이
다. 말 그대로 들끓는 팬들의 성화에 못이겨 공연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드럼 스틱이 몰고 온 감동
재즈 팬이라면 이 대목에서 손수건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열 장의 재즈 명
반보다 더 감동적인 스토리가 이제 시작된다. 공연장에 나타난 아트를 만나 본
카나는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그는 몇 년 전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너무나
쇠약해져 있었고, 심지어는 서 있을 기력조차 없어 보였다. 그런데 정상인도 견
디기 힘든 드럼연주라니! 객석에는 어쩌면 그와 마지막 대면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인지 인산인해를 이룬 팬들로 가득 찼고, 공연은 도저히 취소될 수 없
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드럼 세트 앞에 앉은 아트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파워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Moanin'>을 비롯한 <튀니지아의 밤> 등 자신의
히트곡을 잇따라 두드려대는 아트의 모습은 마치 꺼지기 직전 최후의 밝은 빛을
발산하는 촛불처럼 완전한 연소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물론 그 순간에도 밖에
는 앰뷸런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카나는 마치 자신이 병자라도 된 것처럼 조마
조마하게 공연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공연은 아무 탈없이 끝났고, 아
트는 원기 왕성한 몸짓으로 객석을 향해 정력적인 답례를 표시했다. 과연 음악
은 병마와 나이를 잊게 하는 것일까 상상해 봄직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무대 뒤로 돌아온 아트를 보는 순간 카나는 혼비백산했다고 한다. 그
의 바지는 땀과 오줌으로 완전히 젖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모습이
추하거나 역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도 자신의 눈가에서 사정없이 흘러내리
는 눈물부터 닦아내야 했다. 그녀는 그가 쓰러지기 전에 부축했지만 그는 이미
정신을 잃은 뒤였다. 아트 블래키는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로부터 한 달 뒤에 카
나는 그의 부음 소식을 접했다. 예정된 소식이긴 했지만 그 순간에도 그녀의 머
리 속에는 아트가 마지막 공연을 하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단다. 마지막 힘
을 짜내어 재즈를 연주하면서 죽음과 맞서던 아트의 모습이 말이다. 재즈맨의
이러한 최후야말로 가장 재즈적인 것이 아닐까? 꼭 아트 블래키 때문은 아니지
만 초보자들에게 재즈를 쉽게 접하는 방법으로 나는 드럼을 권하곤 한다. 무엇
보다도 처음 재즈를 접하는 사람은 대개 익숙지 못한 트럼펫과 색소폰의 음향,
다소 산만해 보이는 진행에 당황스러워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하는 일도 있기 때
문이다.
“정말이지 실체가 없는 음악이야. 아무리 들어도 뭔가 굵직하게 남는 게 없
어. 들을 땐 좋은 것 같기도 한데...” 재즈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야심적으로 내
가 선정한 셀렉션을 틀어주면 대개 이런 반응을 보이곤 한다. 심지어는 정신없
다고 끄라는 사람조차 있다. “그러지 말고 잘 들어봐. 아무리 고상한 클래식 음
악이 좋다고 하지만 이런 음악도 클래식 못지않은 가치와 음악성을 가지고 있
어.” 이렇게 설득해도 그들의 하소연은 그치질 않는다. “난 산만한 게 싫어.
뭔가 정돈되고 질서가 부여된 것이 좋아. 아니면 아예 록 음악처럼 무질서로 치
닫든가...”
이런 사람들에게 재즈에도 질서가 있고 화성악이 있으며 스타일이 존재한다고
설득해 봐야 입만 아픈 꼴이 된다. 그럴 때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다른 파
트는 다 집어치우고 드럼에만 신경써 봐. 특히 심벌즈리듬에 맞춰 발장단이나
손장단을 맞춰 보라구. 재즈를 머리를 들으려하지 말고 한번 가슴으로 느끼고
또 온몸으로 느껴봐.” 이러면 대개는 마지못해 장단을 맞추지만, 그중 몇 명은
어느새 흥겨워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면 나는 신도 하나를 만들어 놓은 전
도사마냥 씽긋 웃고 만다.
075와 심벌즈의 미학
이왕 드럼 얘기가 나왔으니 이야기를 더 해보겠다. 아까도 말했지만 심벌즈
소리에 경도되어 있던 나는 아직까지 심벌즈 소리를 JBL 회사에서 나온 075 유
니트만큼 제대로 표현해 내는 트위터를 만나지 못했다. 여기서 075란 스피커를
구성하는 요소 중의 하나인 트위터의 모델명이다. 이 알루미늄 유니트는 성인
남자의 주먹만한 크기에 생긴 모양은 꼭 전구알처럼 보인다. 그래서 오디오 마
니아들 사이에서는 유니트란 말보다 ‘알’이라는 말로 통용되기도 한다. “그
알을 수퍼 트위터로 써야 심벌즈가 들리는데 말야...”
재즈를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끔 이런 탄식이 나오곤한다. 처음
JBL 회사에서 075 유니트를 만든 것은 1963년이다. 이것은 다른 유니트와 함께
스피커를 구성하는 시스템에 포함된 하나의 모델이었다. 그것을 최초로 내장한
스피커가 바로 그 유명한 올림퍼스다. 그물 모양의 촘촘한 나무결의 그릴로 유
명한 이 스피커는 당시 JBL사가 주력하던 S시리즈의 한 종류로서 정식 명칭은
S8시스템이었다. 워낙 075의 성능이 뛰어나 뒤이어 로우디스와 같은 스피커에도
내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075를 단품으로 구입해 기존 시스템에 추가하는 마니아
도 생겼다. 이를테면 요즘 유니트를 따로 사서 스피커 통을 짜는 일이 유행인데
특히 왕년의 JBL 명기 하츠필드를 만드는 사람은 기존의 유니트에 이 075를 추
가해야 구색이 맞는 것으로 인식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같은 075라도 요즘의 것보다는 처음 시판되었을 때의 075를 더 알아
주는 마니아도 있다. 심지어 당시에 나왔던 올림피스 스피커를 구해 전부 분해
한 후 075만 쓰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이렇게 오디오 팬들 중에 재즈를 사랑하
는 사람들이 075 유니트, 특히 오리지널 075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바로 심벌
즈의 음색 때문이다. 물론 이 유니트를 달면 고음이 풍성하고 화려해지면서도
깊이가 생기기 때문에 꼭 심벌즈뿐 아니라 트럼펫의 파열음이나 피아노의 고음
부분의 선명한 터치 등이 보강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중에서 확연하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심벌즈이다. 찰랑찰랑 시원하게 뻗으면서도 뭔가 차갑고, 그러면서도
냉정한 음색을 잃지 않는 바로 그 소리는 역시 075에서밖에 기대할 수 없다. 바
로 이 유니트로 질지언 회사에서 만든 심벌즈 소리를 듣는 것이 나의 오랜 소망
이 되었다.
하지만 오지리널 075 유니트를 구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같다.
설령 075를 구했다손 치더라도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075는 일종의 수퍼 트위터이므로 전반적인 주파수 재생을 포착한다면 중음과 저
음도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075의 소리를 살리기 위해서는 대개 같은 JBL에서
나온 375라는 혼을 추천한다. 이 혼 역시 075와 비슷한 시기에 나온 물건으로
고역과 중역이 함께 어우러져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이 있는 대단한 제품이다.
여기에 조금 더 신경을 쓴다면 2220B와 같은 베이스 유닛을 함께 조합해 볼만
하다. 그러면 통상 3웨이의 멋진 JBL 시스템이 완성되는 것이다. 모던 재즈를
재생하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조합이다.
075 유니트 대신 제대로 된 심벌즈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JBL 스피
커도 괜찮다. 물론 JBL뿐 아니라 알텍의 A5나 A7과 같은 극장용 시스템도 괜찮
고 요즘의 아포지 스피커나 인피니티 스피커도 쓸 만하다. 그렇지만 왠지 재즈
하면 JBL 스피커를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내게는 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
각해 보면 ‘이노’라는 카페에서 쓴 것이 바로 JBL이고 또 내가 자주 갔던 몇
몇 재즈 카페 중에서 이태원의 한 카페도 역시 같은 회사의 스피커를 썼기 때문
이다. 대학로에서 쓴 것은 70년대 말에 나왔던 스튜디오 모니터 시리즈 4343의
개량형 4343B였고 이태원의 재즈 카페에서 썼던 것은 4345였다. 모두가 4343이
란 모델에서 출발한 43시리즈 계열의 스피커인 것이다. 바로 여기에 정석대로
매킨토시의 앰프를 물려서 재즈를 트는 것이 내가 오랫동안 추구한 음색이 아니
었나 생각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최근에 이 모델들과 같이 계열이면서 조금
작은 사이즈의 4425 모델을 과감히 구입했다. 그 이유는 다시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JBL과 결전을 벌이다
처음 4425를 장만하고 나서 들었던 음악은 에릭 돌피의 <Fire Waltz>란 곡이
었다. 이 곳은 돌피가 1961년 7월 16일 ‘파이브 스팟’이라는 재즈 카페에서
연주 한 전설적인 라이브에 수록되어 있는데, 내게는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넘
버다. 특히 돌피가 알토 색소폰으로 유명한 오프닝 프레이징을 시작하기 전에
말 왈드론의 피아노와 함께 블랙웰이 친 거친 심벌즈의 짤막한 프렐류드는 ‘여
러분, 이제 역사에 길이 남을 명연을 시작하겠으니 집중하고 들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내가 JBL을 쓰기 전에 쓰던 모델들은 클립시 회사에서 나온 것
들이었다. 이 회사는 뉴욕에 본사를 두고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혼 타입 스피
커만을 만들어 온 전통 있는 메이커다. 클럽시의 장점은 색소폰이나 피아노 음
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JBL을 선택한 이유는 에릭 돌피의 <Fire
Waltz>한 곳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Fire Waltz>를 연습 게임처럼 튼 다음 바로 내 손에 들려 있던 CD는 블루
노트 사에서 나온 아트 블래키의 앨범이었다. 그리고 그 첫 곡이 바로
<Moanin'>이었다. 보비 티몬스의 경쾌한 피아노로 시작되는 이 곡은 아트의 육
중한 드럼에 실려 낭랑하게 펼쳐져 나오는 리 모건의 트럼펫과 베니 골슨의 테
너 색소폰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확실히 아트의 대표작답게 이 작품의 모든 멤
버들의 기량은 하드 밥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힘있게 불어제치는 혼 파트말
고도 리듬 섹션의 백 업은 도저히 백인들이 흉내낼 수 없는 파워를 펼치고 있
다. 마치 동시대에 유행했던 웨스트 코스트의 졸립고 나른한 재즈에 대해 일장
훈계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지만 나는 웨스트 코스트파를 좋아하고 또 이 곡을 종종 듣는 편인데, 갑
자기 아트의 저 심벌즈 소리... 규칙적이면서도 힘이 있고 그러면서도 낭랑한 그
소리에 그만 빠져버렸다. 이제야 나는 내가 좋아하는 심벌즈 소리를 듣게 된 것
이다. 나는 스피커의 상단에 볼록하게 혼으로 만들어진 트위터를 만져 보았다.
손끝에 전해지는 풍요로운 곡선미와 금속성의 냉랭한 촉감...어느새 내 손가락은
아트의 심벌즈 박자에 따라 장단을 맞추고 있는 게 아닌가! 하지만 마음 한 구
석이 허전해짐을 느꼈다. 어쩌면 스티커에 대한 지나친 탐닉으로 재즈의 정수를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과연 내가 재즈를 듣는 방식이 올바른 것일까? 지금
생각하면 재즈를 좋아하는 데에는 각자가 설정해 놓은 방법과 원칙이 있을 것이
다. 나처럼 JBL 스피커를 좋아하고 심벌즈 음에 탐닉하고 모던 재즈 시대를 그
리워하는 마니아가 있는가 하면 영국제 스피커로 정갈하고 조용하게 재즈를 듣
는 쪽도 있을 것이고, 기악보다는 보컬 쪽에 탐닉하는 쪽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이런 방식의 재즈 음을 좋아하는구나라고
생각해 주면 고맙겠다. 재즈라는 음악은 어떤 해답이나 정답이 없는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세계니까 말이다.
제 2 장 재즈 카페와 재즈 문화
재즈 카페냐 폐허냐?
요즘 ‘재즈 카페’란 타이틀을 불이고 영업을 하는 술집이나 카페가 늘어가
고 있다. 동명의 가요가 히트를 해서인지 아니면 언어에서 풍기는 뉘앙스가 좀
센서티브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대개는 들어갔다가 실망만 하고 나오는 경우가 허
다했다. 최소한 재즈 카페한 타이틀을 붙였다면 음악은 비밥이나 쿨 재즈는 아
니더라도 팻 메스니나 조지 윈스턴 정도는 틀어놔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아무
리 너절하게 벽지를 발랐다손 치더라도 그 위에 재즈 아티스트 한두 명의 판넬
쯤은 불여놔야 하지 않을까? 동숭동 한쪽에 가면 꽤 이름난 재즈 카페가 있다.
몇 년 전에 아는 사람들하고 그 근처를 지날 일이 있어서 호기있게 데려간 적이
있었다. “이래봬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재즈 카페라구.”
한데 정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아차 싶었다. 우선 귀에 들어온
소리가 쇳소리가 나는 찢어지는 고음과 붕붕거리는 저음으로 듣기에 아주 역했
을 뿐만 아니라 실내는 지하실 특유의 매캐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나는 반
사적으로 카운터에 놓인 오디오와 또 진열해 놓은 디스크 라이브러리를 살펴보
았다. 낡을 대로 낡아서 반창고로 보수해 놓은 아주 보기 흉한 매킨토시 앰프(아
마 역사상 이렇게 초라하고 흉물스런 매킨토시 앰프는 일찍이 없었으리라)와 먼
지를 잔뜩 뒤집어 쓴 보스 스피커, 그리고 자켓 가장자리엔 몽땅 빛바랜 누런
반창고가 붙어 있는 낡은 레코드들... 나는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아니, 여기
가 카페야 아니면 페허야?” 같이 왔던 친구가 눈이 휘둥그렇게 되어 물었다.
“원래 재즈 카페 분위기가 이런 거 아냐?” 또 다른 친구가 한마디 했다. 나는
참을 수 없어서 마침 다른 레코드를 걸고 있던 종업원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
거... 소리가 왜 이래요? 좀 이상한데요?” 그러자 그 친구가 태연하게 말했다.
“뭐가 어때서요? 이거 좋은 앰픈데...” “글쎄... 뭔가 고장이 난 것 같아서요.
” “그래요?” 잠시 후 그 종업원이 말했다. “판이 워낙 낡아서 그럴 수도 있
어요. 그리고 고장이 났다 해도 지금 고칠 돈도 없어요. 우리 가겐 적자거든요.
” 그 친구 말을 듣고 좌석을 둘러보았다. 놀랍게도 우리밖에 없었다. 그때 시각
이 오후 3시. 그렇담 우리는 개시 손님이란 말인가?
일본 재즈 카페의 분투
제법 이름깨나 있다는 재즈 카페가 페허가 다 되었다면 나머지 카페들이야 오
죽하겠는가. 나는 더 이상 그런 카페에 대해 묘사할 흥미를 잃어버렸다. 이런 식
으로 우리나라의 재즈 카페는 명맥만 이어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반면 이웃 일
본의 경우 재즈 카페의 움직임은 무척 활발하다. 아마 일본을 전세계에서 재즈
가 가장 잘 보급된 나라로 만든 것은 대부분 재즈 카페 주인들의 공로일 것이
다. 그들이 손님을 끌어모으고 이것 저것 알려주면서 재즈의 맛을 점점 확산시
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 재즈 문화가 발생하고 그것이 하나의 산업으로 이
어지게 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재즈 카페 주인들이 대부분 고학력자들
이라는 점이다. 와세다나 게이오 대학 출신들도 많고 개중에는 동경 대학 출신
들도 있다. 이 사람들은 단순히 고객 관리만 한 것이 아니라 잡지에다 평도 쓰
고 또 재즈 수필집도 내고 재즈 앨범의 라이너 노트도 가끔씩 썼다.
<쌉쌀한 맛의 재즈 노트>(일본문예사), <재즈 리퀘스트 노트>(강담사), <재즈
오브 파라다이스>(JICC출판국), <재즈 카페 ‘베이시’의 선택>(강담사), <완전
블루 노트 북>(재즈비평사). <명연! 모던 재즈 베스트 셀렉션>(강담사), <재즈
명반, 명연 658>(일본문예사)... 이런 책들의 저자가 바로 ‘메그’나 ‘이글’,
‘베이시’와 같이 유명한 재즈 카페의 주인들이다.
심지어 그들은 CBS나 프리스티지와 같은 레이블의 기획도 맡아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재즈 앨범을 시리즈로 내놓기도 하고 자신이 뽑은 셀렉션을 버젓이 자
기 이름을 걸고 출판하기도 한다. 일례로 ‘메그’와 ‘이글’ 두 카페 주인이
펴낸 <대결>이란 앨범이 있는데, 이 앨범은 15개의 항목으로 구성된 질문에다
각각 나름대로 최선의 답변을 하고 있다. 물론 음악으로 말이다. 그 질문이란 이
를테면 이런 것이다. 재즈 애드립이 훌륭한 곡은? 사이드 맨의 명연이 빛나는
곡은? 평론가들한테조차 알려지지 않은 저주 받은 걸작을 뽑으라면? 커피를 마
시며 듣기 좋은 곡은? 재즈 입문용으로 추천하고 싶은 곡을 하나 꼽으라면... 등
의 질문이다. 이런 식의 질문 15개에 적합한 곡을 하나씩 추천하는 포맷인데, 정
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들이 뽑은 곡들이 대부분 생전 처음 들어볼 정도로
낯설고, 그러면서도 듣기에 썩 좋았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그들의 재즈에 대
한 깊은 이해를 엿볼 수 있었다. 이 중에서 비교적 알려진 곡은 바로 재즈 입문
용으로 선택한 곡들인데, 참고 삼아 적으면 다음과 같다. ‘Somethin' Else'(줄
리앙 캐논볼 애덜리)와 'So What'(마일즈 데이비스).
이쯤 되면 이들은 보통 카페 주인이 아니라 재즈계에서는 저명 인사이며, 실
제로 그들의 친교 범위는 일본을 넘어서 미국이나 독일 등지로까지 뻗어 있다.
일본판 스테레오 사운드나 스윙 저널에 가끔 칼럼을 연재하는 스가와라라는 재
즈 카페 주인이 있다. 그도 역시 일류 대학 출신에다 젊었을 때엔 재즈 드럼도
만졌었다고 한다. 현재 그는 도쿄에서 기차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이치노세키
지방에서 ‘베이시’라는 카페를 약 25년간 경영하고 있다. 그가 쓴 글은 일류
작가 못지않게 문학적일 뿐만 아니라 음악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깊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아마 지면을 통해 우리나라의 마니아들도 그의 명성을 알고 있
을 것이다. 그는 글에서 두가지의 테마를 전개시켜 나가고 있다. 그 하나는 그의
카페에서 20년 동안 동고동락을 함께한 JBL 시스템이고, 또 하나는 상호 ‘베이
시’의 원조인 재즈 뮤지션, ‘카운트 베이시’이다. 이 두 가지 주제는 결국 한
가지로 통일되는데, 그것은 그가 25년 동안 재즈 카페를 경영하면서 늘 꿈꿔 오
던 것으로 다음과 같은 스토리다.
어느 조용한 오후, 카페엔 손님 하나 없고 스가와라씨는 담배를 피워 물며 자
기가 좋아하는 카운트 베이시의 음악을 성능 좋은 JBL 시스템으로 대단히 만족
한 얼굴로 듣고 있었다. 그 순간 문이 열리고 카운트 베이시가 환한 얼굴로 들
어오고 있지 않은가? 순간 그는얼어붙고 말았는데 카운트는 정답게 그의 곁에
앉아 자신이 40년 전쯤에 녹음했을 그 음악을 그와 함께 듣고 있는 것이었다.
이래서 JBL과 카운트 베이시의 테마는 황홀한 결합을 하게 된 것이었다. 한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분명 카운트가 그 카페에 오긴 왔었다. 하지만 그는 혼자
가 아니라 그의 밴드 멤버들과 동행이었으며 가게 역시 손님들로 초만원이었고
시스템의 상태 또한 좋지 않았다. 물론 카운트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자신의 옛
날 녹음을 만족한 얼굴로 듣고 있었지만 스가와라 씨는 베스트 컨디션으로 만들
려고 이것저것 만지느라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었으며 정작 조정이 다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카운트는 그 가게를 떠난 후였다. 이것이 한이 되어 그는 내
내 낙담하고 있다가 카운트가 죽은 후 한참이 지난 1980년, 혼자 펜실베니아에
있는 그의 무덤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무덤에 꽃을 바치면서 당시 그가 ‘베이
시’를 방문했을 때 자신의 시스템이 부실했던 것에 대한 사죄를 했다. 적어도
재즈 카페란 상호를 달고 재즈 음악을 틀면서 영업을 한다면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과 시스템에 대한 존경심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재즈 카페를 찾아 동경으로
제5회 동경 영화제는 1992년 9월 25일에서 10월 5일까지 열흘에 걸쳐 열렸다.
칸느나 베니스와 같은 유럽의 국제 영화제에 대항하기 위해 아시아권에서 만들
어진 가장 유명한 영화제가 동경영화제인데 이 해부터 매년 열기로 한 것이다.
나는 영화제 참관을 할 겸 9월 28일 JAL기에 몸을 싣고 동경을 향해 날아갔다.
명분은 영화제 참관이었지만 실제로는 동경의 재즈 카페를 순례하는 것이 목적
이었다. 거기에 그 동안 소문으로만 듣던 재즈 명반 몇 장을 구입하고 싶었다.
이래저래 나리타 공항에 내리자마자 설렘을 멈출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런저런 영화인들과 만나고 또 동경의 명소 몇 군데를 들르다 보니
예정된 일주일이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나는 초조해졌다. 한데 우연히 동경 타
워를 방문하면서 나는 바쁜 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바로 동경 타워 건너
편에 재즈 전문지 <스윙 저널>의 사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망설인
끝에 그곳에 가 보기로 결심했다. “어디서 오셨죠?” 아담한 건물의 2층에 자
리 잡은 잡지사 내부로 들어서자 여자 한 명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
여기 영어를 하는 사람 있습니까?” 내가 묻자 그녀는 쪼르르 한쪽으로 달려가
기자 한명을 데리고 왔다. 안경을 쓰고 좀 마른 편인 그 기자는 나를 보더니 역
시 똑같은 질문을 했다. “어디서 오셨죠?” “한국에서 왔습니다.” 내가 이렇
게 말하자 그는 왜 이런 데에 왔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실은... 전 재즈 팬인데
당신네 잡지를 가끔 봅니다. 우연히 근처에 왔다가 잡지사 건물을 보고 반가워
서 들어왔습니다.” “한국에도 <스윙 저널>이 나옵니까?” “아뇨.” “그럼
어떻게...?” “가끔 외국 서적들만 파는 서점에서 책을 구하면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중요한 기사를 봅니다.” “아...!” 그때서야 그 친구는
긴장을 풀고 나를 환대해 주었다. 그는 나를 손님 접대용 소파에 앉히고는 이런
저런 질문을 던졌다. 한국에도 재즈가 인기가 있느냐, 유명한 재즈 뮤지션은 누
구냐, 당신이 즐겨 듣는 재즈 뮤지션은 누구냐...
사실 재즈를 듣는 사람에겐 국경이 없다. 또 재즈를 듣는 사람 사이엔 묘한
공통점 같은 것이 있어서 일단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재즈를 좋아한다면 오랜
지기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도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내게 재즈 CD
한장과 <스윙 저널> 10월호 한권을 선물했다. 너무나 고마웠다. “한가지 부탁
이 있습니다.”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는 뭐냐고 물었다. “평소 당신네 리스
닝 룸이 궁금했는데 한번 살펴볼 수 있을까요?” 생각과는 달리 그는 쾌해 승낙
했다. 나는 드디어 책에서만 봐 오던 <스윙 저널>의 리스닝 룸을 볼 수 있었다.
역시 예상한 대로 레퍼런스 스피커는 JBL 4344가 그릴이 벗겨진 채로 한쪽 벽
에 놓여 있었고 스레숄드 파워에 아큐페이즈 프리, 그리고 티악의 분리형 CD플
레이어가 나란히 맞은편 래크에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반가운 친구를 객지에서
만난 듯이 한동안 바라보았다. 한데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그 친구가 이 스피
커를 쓰는 한국인이 많다는 말에 적잖이 놀라는 기색이었고, 또 레퍼런스 앰프
로 쓰는 스페숄드라든지 그밖에 창고에 쌓여 있는 여러 진공관 앰프가 한국에서
도 인기가 있다는 말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는 것이다. “당신은 한
국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까?” 하도 의아해서 내가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
다. “나 오래 된 사찰을 좋아합니다. 한국에 그런 것이 많으니까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와 <스윙 저널> 방문은 짤막하게 끝났지만 아직도
내 머리 속엔 그 회사의 편집실 분위기라든지 레퍼런스 기계를 테스트하기 위해
열심히 시스템을 조립하던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한쪽 벽장에 쌓여 있던 여러
재즈 앨범과 LD 등의 영상이 강하게 남아 있다.
이후 어찌어찌하여 4년 후에 다시 한번 <스윙 저널>을 방문할 일이 있었다.
그때 나를 맞아 주었던 기자는 없었고 레퍼런스 룸의 기기도 모두 바뀌어 웨스
트레이크의 BBSM 15란 스피커에 파이오니어의 고급형 프리 파워 앰프로 라인
업되어 있었다. 게다가 사무실의 인테리어도 더 고급스러워져 이전보다 참신하
고 깔끔한 인상을 풍겼다. 4년이란 세월이 그리 짧은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어
쨌든 처음으로 방문한 일본에서 재즈와의 만남은 이렇게 <스윙 저널>로 시작했
지만 사실 이것은 더 큰 경험을 하기 위한 전주곡에 불과했다. 왜냐 하면 다음
날 맥코이 타이너를 만났기 때문이다. 존 콜트레인 쿼텟에서 일을 했던 저 전설
적인 재즈 피아니스트 맥코이 타이너를 말이다.
재즈는 감으로만 하는 음악이 아니다.
1930년대, 한참 빅 밴드가 전성기일 무렵 색소폰이나 트럼펫처럼 솔로 애드립
이 주어진 파트의 연주자들은 보통 5개에서 10개 정도의 코드 변화를 시도해 자
신의 개성을 표현했다. 이때 재즈 연주자들이 갖고 있는 화성학이나 음계 또는
코드에 관한 지식은 극히 초보적인 것으로 어떤 경우에는 어깨 너머로 들어서
알게 된 것을 스스로 마스터해서 연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
게 단순한 차원에 머문 것은 아니었다. 이 중 색소폰의 아버지로 불리는 콜맨
호킨스나 레스터영은 모던 재즈 뮤지션들의 교과서로 불릴 만큼 복잡한 코드 진
행을 전개시켜 나갔고, 벤 웹스터에 와서는 능숙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그러다
모던 재즈에 이르면 상황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우선 아티스트의 코드에 대한
지식이 보다 풍부해지고 주어진 솔로 연주에 자신을 표현해 내는 방법이 보다
발전하게 된다. 이 분야의 선두 주자는 디지 길레스피와 찰리 파커일 것이다. 그
들은 짧은 시간에 숱한 코드 체인지를 보여주면서 쉴 새 없는 상상력을 전개해
나갔다. 말하자면 스윙 시대의 연주를 두배쯤 빨리 불었다고나 할까? 그런 의미
에서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비밥의 출현은 재즈 연주자의 연주 양식을 완전히
뒤바꿔 버린 대단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이 음악적인 센스가 풍부하고 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었
다고는 하지만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기껏
해야 마일즈 데이비스가 줄리아드 음대를 다녔을 뿐 대개는 선배들의 연주 스타
일을 모방하면서 익힌 지식이 더 많았다. 바로 이런 측면 때문에 재즈를 들으면
어떤 음악적인 구조나 화성학보다는 연주자의 본능적인 음악 센스와 스타일에
더 치중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비밥의 뮤지
션들이 남들보다 감각적인 명이 뛰어나서 5,60년대 전성기 음악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한데 그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많은 재즈 팬들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모던 재즈 피아니스트의 아버지쯤 되는 아트 테이텀의
경우 그가 진행하는 코드 변화라든지 멜로디 라인 전개는 어디 하나 흠 잡을 데
가 없는 것이어서 웬만한 재즈 연주자와 음악 싸움이 붙어도 지는 법이 없다고
했다. 밀트 잭슨 정도가 상대라면 상대였다나. 아트에 대해 재미있는 일화가 하
나 있다. 어느 날 그가 한참 클럽에서 연주를 하고 있는데, 마침 그곳에 들른 저
명한 클래식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그 기민한 손놀림과 음악적 센
스에 놀라 무엇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집에 돌아온 그는 하도 기이해서
다음날엔 아예 토스카니지까지 대동하고 또 그 클럽에 들렀다. 그런데 이 대지
휘자 또한 아트 테이텀의 연주에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즉, 클래식의 거장
들도 잠재울 만큼 아트의 실력은 경지에 다다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일화는 다
음과 같은 교훈을 심어 준다.
재즈는 흑인의 한이 서린 음악이고 그래서 우리나라의 경우 창이나 민속음악
과 비슷하니까 우리나라 사람도 손쉽게 재즈를 마스터할 수 있다는 식으로 오해
되어 너도 나도 재즈다, 혹은 재즈풍의 음악이다, 혹은 프리 재즈다 법석을 떨고
있는데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재즈야말로 클래식 연주자가 고된 수련을 통해
얻은 고도의 음악적 지식에다 타고난 재능이 결합되지 않으면 결코 일류의 음악
으로 승화되기 어렵다. 아니, 그 정도까지는 근접할 수 있다고 하자. 정말로 어
려운 것은 그 모든 음악적인 형태에다 스윙이라는 생명력을 심어 줘야 하는 점
이다. 스윙이라는 화룡점정을 찍어야만 살아 있는 재즈 특유의 모습이 갖춰지는
것이다. 한데 3박자 리듬을 취하는 우리 전통 음악과 정통적으로 4박자를 발전
시켜 온 재즈가 어떻게 같을 수 있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의 이
런 생각은 바로 9월 30일 도쿄의 블루 노트 클럽에서 있었던 맥코이 타이너의
콘서트를 보면서 굳어졌다.
맥코이 타이너를 보고 얻은 교훈
맥코이 타이너가 신인 뮤지션인 베이스 주자와 드러머를 대동하고 무대에 올
라왔을 때까지만 해도 사실 나는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는 환갑이 가
까운 노인인 데다가 개인적으로는 피아노 트리오의 편성을 그리 즐기는 편이 아
니었기 때문이다. 한데 정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맥코이의 압도적인 파워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아노 음의 폭발적인 음향도 아니었고 그를 보좌하는 두 연주자
의 노련한 솜씨 때문도 아니었다. 세사람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주고 받는 대화
의 완결성, 또 끊임없이 코드의 진해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오밀조밀 이어가는
음악적인 인터 플레이.. . 모르긴 몰라도 악보를 놓고 호흡까지 조절하며 앙상블
을 전개시켜 나가는 실내악단의 치밀함이 바로 이런 수준이 아닐까 싶었다. 그
렇다. 재즈는 즉흥연주가 가미된 자유로운 형태의 음악이지만 그 자유로움은 오
랜 숙련 과정을 거쳐야만 나오는 마치 숙성된 포도주처럼 농축된 형태의 음악인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의 실내악처럼 치밀한 계산과
앙상블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일견 새삼스러운 말도 아닌 것 같지만 바로 여기에
재즈의 어떤 본질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재즈를 들으면 단언
하건대 A급 아티스트와 B급 아티스트, 그리고 싸구려 아티스트의 차이를 본능
적으로 구별하게 될 것이다. 그저 분위기가 좋고 멋있어 보이면 재즈가 되는 것
은 아닌 것이다.
혹자는 뭐 그런 얘기를 그리 대단한 것처럼 떠드느냐고 빈정거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코도가 아닌 살아 있는 연주로 직접 내 눈과 귀, 그리고 감각을 일깨
워준 맥코이 타이너의 연주엔 그 동안 알게 모르게 재즈에 대해 약간은 가볍게
생각해 왔던 내 자신을 혹독하게 질책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끝으로 여담이지만 이토록 훌륭한 연주로 재즈의 진지한 측면을 되새기게 해준
맥코이 타이너는 온화하고 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 콘서트가 끝나고 나와 여러
영화 종사자와 함께한 자리에 그를 초대했들 때 그는 자연스럽게 응해주었고 거
듭된 사진 촬영 부탁에도 귀찮은 내색 한번 보이지 않았다. 나와 악수를 나눌
때의 그의 손은 커다랗게 내 손을 감싸안았는데 무척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행여 손가락을 다칠세라 피아니스트와는 다른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졌다. 이 콘
서트로 인해서 최초의 동경 방문은 재즈 여행으로 멋지게 완성되지 않았나 싶
다. 한편 90년대 들어와 마일즈 데이비스도 떠나고 이제 5,60년대의 전성기를 몸
으로 살았던 재즈계의 거장도 몇몇 남지 않게 되었다. 나는 살아 남은 거장들이
최후로 다시 결합해 옛날의 멋진 하모니를 다시 들려줄 날을 꿈꾸며 곰곰이 블
루 노트의 맥코이 타이너 콘서트를 회고한다. 드럼에 앨빈 존스, 피아노에 맥코
이 타이너, 테너 색소폰에 소니 롤린스, 알토 색소폰에 재키 맥클린, 베이스에
론 카터.... 오프닝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My Funny Valentine>과 <Misty>가
연이어 나오고... 그리고 그 멋진 밴드가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이 아닌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재즈 카페에서 연주한다면...? 이런 재즈 카페와 재즈 문화
를 꿈꾸는 것은 비단 나만의 백일몽은 아닐 것 같다. 그런 날이 하루 빨리 오길
기대해 본다.
제3장 궁극의 컬렉션을 추구해 본다
악보로 담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마니아를 자처하면서 재즈를 듣는 사람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레코드 컬
렉션이다. 한데 재즈 레코드란 아이템은 다른 장르와는 구별되는 그 나름대로의
독특함이 있다. 왜냐면 재즈란 장르는 즉흥성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같은 멤
버와 같은 곡의 세션이라 할지라도 연주할 때마다 다른 작품이 나오기 때문이
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장르가 일정한 틀도 없고 일정한 규범조차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른 장르와 마찬가지로 재즈에서도 악보란 것이 존재하며
일정한 수준까지는 악보화할 수 있는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어느
선까지 음표화하는가에는 어느 정도 악보라는 한계성에 부딪히게 된다. 우선 클
래식 악보를 살펴보자. 내 경우엔 바흐의 작품을 즐겨 듣는 편으로, 특히 그의
작품 해석에 탁월한 오리지널리티를 갖고 있는 글렌 굴드의 연주를 즐기고 있
다. 그의 연주엔 다른 연주가에게서 볼 수 없는 파격미가 존재한다. 어느 부분에
서는 꼬마 아이가 또박또박 말을 하듯이 너무나도 느린 템포로 하나하나 음을
치다가도 또 어느 부분에서는 재즈 피아니스트 못지 않게 강한 타격과 매우 빠
른 템포로 피아노를 두드리기도 한다. 얼른 들으면 바흐의 작품이란 생각이 들
지 않을 정도이다.
특히 굴드가 연주를 하면서 노래를 하거나 흥얼거리는 대목에서는 더욱 그렇
다. 고귀한 클래식 작품, 그것도 엄격하기로 소문난 바흐의 작품을 모독해도 유
분수지, 노래라니! 그럼에도 굴드의 여주에는 다른 피아니스트가 결코 따라 할
수 없는 유니크함이 존재한다. 난 그의 연주 중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자주
듣는다. 처음의 테마 부분은 느릿느릿 연주되다가 별안간 격정적으로 변주곡에
들어가는 대목에선 나도 모르게 전율을 느낄 정도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이 작
품이 어느 귀족의 수면 촉진용으로 작곡되었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그런데
빌헬름 켐프라든가 완다 란도프스카와 같은 정통적인 해석에 충실한 피아니스트
의 연주를 듣고는 내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다. 왜냐면 감당하기 힘든 졸음이 쏟
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연주가 형편없다거나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바흐의 작품이 갖는 맛을 제대
로 표현한 피아니스트이다. 그래서 졸음을 참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
데 똑같은 곡임에도 불구하고 굴드의 연주를 들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흐
의 세계에 빠져 들게 된다. 대체 이게 무슨 조화일까? 물론 템포라든가 강약이
라든가, 아니면 악보 해석의 독창성 등으로 연주가들마다 다른 해석이 나온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도 선뜻 이해하기엔 힘든 구석이 있다. 이것은 클래식이란
장르의 특수성을 이야기하는 것도 같다. 즉, 이 장르의 재미는 어쩌면 곡 자체의
유니크함보다는 연주가들의 여러 가지 연주 형태에 따른 그 독창성에서 유니크
함이 발생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반대로 이런 이야기로 귀착된다. 아무리 독창적
인 해석이 나와도 악보에 기록된 음표만은 어쩌저 못한다는 것, 즉 연주자가 아
무리 뛰어나도 그는 결국 악보의 영역을 탈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글렌 굴드가
아무리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새롭게 해석해도 그의 연주는 철저하게 악보를
따르고 있지 새로 자기가 작곡한 것을 연주하고 있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음은 허공에 사라진다
이런 것은 팝 음악의 경우에도 해당이 된다. 이를테면 U2의 <Rattle And
Hum>의 라이브 앨범을 들어보면 비틀즈의 작품 <Hetler Skelter>가 격정적인
템포로 연주되고 있다. 여기에는 한창 전성기에 오른 보노의 힘있는 보컬이라든
가 엣지의 심플하면서도 인상적인 기타 라인의 맛을 한껏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곡조차도 원곡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연주 패턴
이나 템포가 달라도 후렴구의 가사까지 비틀즈가 당초 연주했던 스타일을 철저
히 따르고 있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다. 척 베리의 <Johnny B. Goode>이란
작품을 각각 지미 핸드릭스의 버전과 자니 윈터 그룹의 버전으로 비교해도 역시
당초의 악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든 클래식처럼 엄격
하지는 않지만 록이나 팝에도 악보가 차지하는 비중은 연주자의 독창성을 압도
할 만큼 엄청나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즈 파트에 오면 이런 악보의 개념이 완전
히 바뀐다. 좀 심하게 말하면 재즈의 악보는 처음의 테마와 솔로 애드립의 연주
순서, 그리고 코드 몇 개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전부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정작
관심을 갖는 개개 아티스트의 솔로 프레이징은 악보상에는 그냥 줄이 길게 그어
져 있을 뿐이다. 즉,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사람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와 친숙한 <Autumn Leaves>의 경우, 처음의 멜로디는 다 똑같
은데 솔로만 들어가면 이것을 변주한 수천 수만 가지의 다양한 연주가 나온다.
여기에 마일즈 데이비스의 스타일이라든가 아트 페퍼의 스타일, 혹은 찰리 파커
의 스타일 등 연주자 개개인의 개성이 나오게 된다. 이로써 재즈란 장르는 스타
일리스트의 경연장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재즈는 철저한 상상력의 장르다. 주
어진 테마 한 개, 그리고 몇개의 코드, 그 다음은 그저 머리 속에 떠오르는 대로
연주하는 것이 재즈인 것이다. 그래서 에릭 돌피는 자신의 마지막 콘서트에 앞
서 이런 얘기를 남겼다. “음은 한번 연주되면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다. 다시는
그것을 되찾을 수 없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이 말은 모든 음악에 해당되고 그
래서 음악이란 장르의 허무함을 보여준다. 조각이나 그림 혹은 문학처럼 음악은
본질적으로 기록되거나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재즈는 다시는 그 음을 되찾을 수 없다. 아티스트 마음대로 변주해 버리면 그
연주는 두번 다시 되찾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연주의 단편, 다시 말해 그 일부분
만을 기록한 것이 바로 재즈 레코드이다. 우리는 레코드를 통해 그들이 허공에
날려 버렸던 무수한 음의 일부를 보존하는 것이다. 즉, 악보화할 수도 없고 또
별다른 기록 매체가 존재하지도 않는 재즈란 장르에서 레코딩은 각 아티스트의
스타일을 알아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인 셈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는
블루 노트 사를 이끌었던 루디 반 겔더나 CBS의 존 하먼드, 혹은 CTI의 크리드
테일러와 같은 레코딩 엔지니어나 프로듀서에 전적으로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
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원칙론적인 문제이다. 이제부터 우리의 싸움터는 아티
스트와 감상자 간에 부딪히는 음의 싸움이 아니라 레코드 가게의 진열장과 자신
의 호주머니 사정과의 길고도 지루한 전투로 옮겨오니까 말이다.
컬렉션은 습관의 일종이다
과연 얼마나 재즈 레코드를 모아야 컬렉터로서의 자격이 있을까? 또 어떤 방
법으로 어떤 레코드를 모아야 컬렉터로서의 식견이 갖춰질까? 아니, 이런 것을
다 떠나서 과연 재즈 레코드란 호주머니를 몽땅 털어서라도 사 모을 만한 가치
가 있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컬렉션에 열중한 나머지 가정불화를 일
으킨 경우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사회의 부적응자 취급도 받는다. 대체 이런
극단적인 현상이 왜 존재하는 것일까? 레코드를 구입한다는 것은 일종의 습관이
다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 말을 조금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쥘 들레주의 ‘뷔사
주 현상’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말은 인간이 갖고 있는 어느 일정한 패턴 내
지는 정서적인 기울임 같은 것인데, 일반적으로 한 인간의 습성이나 형태가 결
정이 되면 그는 자신의 여태껏 늘 해오던 방식이나 취향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는 뜻이다. 이를테면 똑같은 식당에서 매일 같은 음식만 시켜 먹는 회사원이나
집으로 가는 여러 갈래의 길 주에서 늘 가던 길로만 가는 것 등이 이런 예에 속
한다. 이것은 나아가서 어떤 미학적인 취향과도 연결되는데, 예를 들면 나는 재
즈 중에서도 모던 재즈 전반에 관심을 갖는다거나 혹은 어느 친구처럼 50년대의
웨스트 코스트 재즈만 듣는 등 일정한 형태의 패턴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나는 어떤 장르의 음악이든 가리지 않고 들어!”라고 자
랑스럽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예를 내 주위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비교적 다양한 레코드를 컬렉션했다는 K씨의 경우를 보
자. 그의 방엔 약 3천 여장의 LP와 1천여장의 CD가 컬렉션되어 있다. 여기에
그렐의 파워 앰프, 오디오 리서치의 프리 앰프, 그리고 헤일즈의 시그네쳐 1 스
피커 등 하이 앤드의 오디오가 단단히 중무장되어 있다. 그러고는 자신있게 말
한다. “난 어느 장르가 유별나게 좋다고 고집하진 않아요. 무엇이든지 다 들으
면 좋아지는 걸요.”
그러나 그이 턴테이블에 정작 브라이언 이노의 환경음악 음반이 올라갔을 때
그는 경악했고 결국 판을 처분해 버리고 말았다. 세계적으로 희귀한 음반임에도
말이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그 정도는 용인되어야 할 게 아닌가? 이런 경우도
있다. Y라는 친구가 있는데 역시 록 음악으로 출발해서 클래식이며 재즈 등을
다양하게 접하고 있다. 그 동안 모아 놓은 레코드며 CD 등이 방안에 넘쳐날 지
경이며 그 역시 모든 장르를 다 좋아할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내가 좋아하는 5,60년대의 핵심적인 재즈 연주엔 무관심하다. 물론 판을 사고 가
끔은 듣지만, 그다지 열광하진 않는다. 처음엔 이런 그를 비난하기도 했지만 역
시 뷔사주란 현상이 있는 한 그것은 말이나 충고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결
론은 결국 취향 문제로 귀착된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정한 패턴의 음악을 찾아
컬렉션하는 행위, 이것이 컬렉션의 본질이자 재미이기도 한데 여기서 덧붙이고
싶은 말은 레코드를 구매하는 행위에 관한 것이다. 즉, 그 행위조차 습관성이고
결국 일종의 뷔사주 연상에 귀착된다는 것이다.
재즈 레코드를 들으며 추리소설을 쓰다
그 동안 꾸준히 레코드 가게에 들락거렸던 내 경우를 예로 들면 그 이유는 간
단하게 설명된다. 우선 레코드 가게가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옷가게나
음식점과 같이 한번 구매하면 어느 정도 충동이 메워지는 것과는 달리 구매하면
할수록 욕구만 거세어진다. 그래서 새로 구입한 수십 매의 레코드가 있어도 결
국 또 다른 레코드 가게에 들르게 된다. 게다가 며칠이라도 이런 방문을 중단하
면 온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한다. 아마 이런 취미에 빠진 사람은 사흘에 한번
구매를 하지 못하면 몸살이 나고 만일 열흘이 넘으면 미쳐 버릴 것이 분명하다.
눈에 띄는 레코드를 구해서 돈을 내고 레코드 가게를 나올 때의 기분. 집에 가
서 플레이어에 그것을 올려 놓을 때의 기분... 뷔사주에 단단히 빠져 있는 것이
다. 그러나 정작 사 놓고 본전을 뽑을 만큼 들은 앨범이 과연 몇 매나 될까? 아
마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구석에 처박아 놓고 버려진 탕아 취급하는 앨범
이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럴 줄 알면서도 또 다시 레코드 가게에 가고 또 앨범을
구하고 집에 와서는 후회하고... 이런 작심도 한다.
‘최소한 이 앨범을 열 번 이상 들을 때가진 절대 새 앨범을 사지 않을 거야.
이번 달까지만 참자. 그 다음에 사자구.’ 심지어는 ‘다시는 이곳에 오나 봐라.
또 레코드를 사면 그땐 손에 장을 지진다.’ 그러나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면
또 다시 레코드 가게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현상이 심해져 카드 빚
더미에 오른 사람도 있고 가세가 기울어진 사람도 있다. 컬렉션은 무서운 병이
지만 한편으로는 결코 저항할 수만은 없는 매력이다. 그런데 이런 컬렉터를 자
극하는 가장 큰 요인은 새로운 레코드 가게 주인의 달콤한 충고도, 또 레코드
리뷰도 아닌 먼저 자신의 길을 걸었던 선배 컬렉터의 레코드 라이브러리인 것이
다. 마치 자신이 그동안 정열을 바치고 추구해 왔던 음악과 인생에 대한 어떤
비밀이 숨겨 있을 것만 같은 그 라이브러리 말이다. 정말이지 잘 정돈되고 인테
리어된 그런 라이브러리를 방문하게 되면 갑자기 몸 속의 피가 끓으면서, 그래
이거야, 바로 이거라구라고 혼자서 다짐하게 된다. 추리소설 팬이라면 아마 헨리
슬레서란 작가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미국인으로서 주로 단편 소설을
발표해 온 그는 본업인 추리작가가 되기 전까지 광고계에 종사했었고, 이런 자
신의 본령 외에도 영화 시나리오라든가 방송 극본을 쓰는 일을 병행했던 다재다
능한 작가였다. 그를 특히 좋아했던 감독으로는 알프레드 힛치콕을 꼽을 수 있
다. 스릴러 영화의 대가로 알려진 그는 50년대에 잠깐 털레비젼용 스릴러 시리
즈를 5년간에 걸쳐 제작한 일이 있다. 그게 <알프레드 힛치콕 극장>이다.
30분 내외의 짤막한 스토리가 세편 정도 모아져서 한 회분으로 방영되는 포맷
이 주종을 이루는 이 시리즈엔 기라성 같은 단편 추리작가 군단이 라이터 쪽에
포진해 있었다. 영화 <싸이코>의 원작자로 유명한 로버트 블록, 제임스 홀링, 잭
리치 등 그 숫자는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인데, 이 중에서 제일 힛치콕의 신
임을 받았던 작가가 바로 헨리 슬레서였다. 물론 나도 이 작가를 좋아한다. 우선
세련된 문체며 기발한 착상 등이 재미있을 뿐더러 어느 날 그의 집을 공개한 사
진을 보면서 느낀 놀라움이 그를 더욱 친근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는 뉴욕
의 부유층이 모여 사는 고급 맨션에 살고 있었다. 특히 책으로 가득한 그의 서
재는 웬만한 자료는 다 모여 있을 정도로 방대한 것이었는데 정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의 거실이었다. 두개의 벽에 가득 꽂힌 5천여 장의 재즈 레코드. 그렇
다. 그는 거실에서 재즈를 들으며 생각을 정리하다가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르
면 서재로 달려가 타이프 라이터를 두드렸던 것이다 그의 기발하고 재치 넘치는
단편이 실은 한평생을 바치다시피 했던 재즈 레코드의 컬렉션 속에 이미 담겨져
있었던 것이라면 나만의 지나친 추측일까? 좋아하는 아티스트와 함께 살기 위하
여 내가 보기에 컬렉터라고 불리는 부류의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형태로 구분
이 되는 것 같다. 하나는 양으로 승부를 거는 타입. 그들의 특징은 무슨 레코드
카탈로그나 명반 컬렉션 모음집 같은 자료를 근거로 처음부터 마지막 번호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컬렉션하는 것에서 대단한 만족을 느낀다. 그러나 이것조
차도 일정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때에 따라선 전혀 엉뚱한 아이템을 잔
뜩 들여놓기도 한다, 이런 이들은 소유의 즐거움이 전부인 셈이다. 심하면 그 양
이 웬만한 레코드 가게를 능가할 정도다. 과연 그들은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
모은 자료를 얼마나 몰두해서 경청하고 이해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아나톨 프랑스라는 유명한 프랑스 작가의 일화로 그 대
답을 대신해 볼 수 있겠다.
그는 프랑스에서 유명한 장서가로 손꼽힌다 희귀본이나 한정 발매 본 같은 컬
렉터스 아이템에 관심이 많은 그의 서재는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러보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 어느 날 부유한 중년
신사 한명이 그의 서재를 방문했다. 역시 그도 프랑스의 장서를 보고 깊이 감탄
했지만 그는 누구나 한번쯤 할 법한 질문을 자연스럽게 던졌다. "대단한 컬렉션
이군요. 없는 게 없을 정도로 정말 대단합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많이
모아 놓은 책을 남김없이 다 읽어 보셨습니까?" 그러자 프랑스는 태연하게 대꾸
했다. "내가 듣기에 당신은 대단한 도자기 컬렉터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
신은 그 동안 공들여 모아 놓은 도자기로 매필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실 때 사
용하십니까?" 그렇다 사실 컬렉터들은 자신이 모아 놓은 것의 소프트웨어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의 라이브러리에 음반이 꽂혀 있다는 것으로 족한 것이
다. 다시 K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해 보겠다. 그 역시 모자라는 돈을 쪼개어 오
디오와 음반에 쏟아붓던 사람인데, 그의 경우 클래식이나 록, 혹은 팝과 같은 일
정한 장르의 구분없이 마구 모으는 타입이라 돈 고생,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의 다음과 같은 하소연은 정말웃어 넘기기 힘든 아픔이 있다.
“...어제 외상값을 갚으려고 대학로에 있는 레코드 가게에 갔었습니다. 어렵게
마련한 돈을 들고 그곳에 가면서 속으로 절대로 판을 사지 않겠다고 여러 번 다
짐을 쟀죠, 한데 정작 그곳을 나을 땐 양손에 두툼하게 새로 산 판이 들려 있었
습니다, 주머니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말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병이에요. 그래
서 내가 순진하게 캐어 물었다. "그러면 되도록 레코드 가게를 피해 가면 될 게
아닙니까?" "한데 이상하죠. 밥 딜런의 앨범은 거의 다 모아 놓았지만 실제로 자
주 듣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아요. 가끔 서가에 꽃힌 그의 앨범들을 바라보고 있
으면 그와 함께 내 방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을 만큼 말이죠. 이 얘기야말로 광적으로 이것저것 마구 컬렉션하는
이들의 속마음을 날카롭게 꿰뚫은 것이 아닌가 한다. 내가 혀를 내두른 컬렉터
가 몇명 더 있어 소개한다.
컬렉터와 셀렉터
일본의 유명한 재즈 전문지 <<스윙 저널>>지의 편집장의 경우이다. 그의 라
이브러리를 공개하면서 씌어진 동 잡지 기사의 머리말을 보자. '수집 마! 스윙
저널의 변집장 OOO씨의 라이브러리 공개!' 수집광이라고 하지 않고 수집 마라
고 표현한 점이나 편집장이라고 하지 않고 변태의 뜻인 변집장이라고 표현 한
점에 주목하길 바란다. 왜냐 하면 재즈 컬렉션에 관한 한 그는 전세계에서 몇
안 되는 유명인사이기 때문이다. 우선 삼면 벽에 가득한LP레코드가 자그마치 2
만 5천여 장에 달하고, 또 CD로 모은 것이 대략 1만여 장을 헤아린다 재즈만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이 정도라면 웬만한 아티스트의 전작은 모두 포괄하고 있다
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야말로 수집마의 광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양으로 승부하는 쪽은 아무래도 한계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이러한 컬렉션의 방
대함이랄까 어려움에 관한 짤막한 정보를 하나 소개하겠다. 과연 얼마나 모아야
재즈 레코딩 전반을 두루 섭렵 할 수 있을까? 우선 중요한 아티스트의 레코드
매수부터 꼽아 보자. 마일즈 데이비스의 경우 그가 참여했거나 리더가 되어 만
들어 낸 음반이 200여 매 존 콜트레인이 170매, 스탄 게츠가 200매, 도날드 버드
가 145매, 듀크 조단이 110매, 소니 롤린스가90매....
물론 이 중에는 중복되는 아이템이 있으므로 실제로 모아 놓으면 조금은 줄어
들 것이다. 그러면 레코드사를 중심으로 알아보자 비교적 최근에 인기를 얻고
있는 콩코드사의 레코딩 타이틀이 약 350매이다. 데논에서 CD로 발 매하기 시작
한 사보이 재즈의 초창기 레코딩이 먼저 200개의 타이틀로 나왔는데 이 시리즈
는 앞으로 계속해서 나을 전망이다. 한편 일본에서는 쭉 블루 노트의 명반 시리
즈를 기획하고 있는데 벌써 CD로 판매되는 타이틀이 300여 장에 이르고 있다
심지어 약 100여 개의 중요한 마이너 재즈 레이블클 뽑은 자료를 보라. 카운터
포인트니 비이제이니 엠아시니 하는 희귀한 이들 레이블 중에서 어떤 경우엔
500여 타이틀을 갖고 있는 회사도 있으므로 이것들을 다 모아 놓는다고 가정하
면,, ! 실제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른바 모던 재즈라 하여 5. 60년대에 나온 재
즈 레코드가 20여만 장이라고 한다 그것을 몽땅 모으겠다고 작정했다면 글쎄....
미국 뉴저지에 가면 비행장의 격납고같이 만든 엄청난 크기의 레코드 가게가
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눈앞에 까마득하게 책장이 나열 되어 있고 그 안에
현기증이 일 정도로 레코드가 빼곡이 담겨 있다. 게다가 각 책장의 높이는 보통
2, 3층높이에 해당하니 사다리를 타고 컬렉션해도 아래를 보면 아찔할 정도다
그곳에 비치된 타이틀의 숫자라 거의 1백만 장에 이른다고 하니 레코드 좋아하
는 사람이라면 거품을 물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를 두 번째 타입으로 옮겨가 보
자, 이른바 컬렉터스 아이템만을 모으는 실속파들이다. 실속파라고 해도 과연 그
수많은 레코딩 중에서 실수를 하지 않고 알차게 자신의 취향에 맞는 컬렉션을
골라서 한다는 것은 이만저만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우선 갖가지 서적과 저
널 등을 탐닉해야 하고 설령 뽑아 놓은 앨범을 발견했다손 치더라도 여러 번의
모니터와 주변의 의견을 종합하는 절차를 거쳐야만 자신의 서가에 꽂힐 수 있
다. 설령 그의 손아귀에 쥐어져 서가에 꽂히더라도 몇 번의 모니터 끝에 보기
좋게 퇴짜를 맞는 경우도 있다. 이런 유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어느 일본인 컬렉
터를 들 수 있다. 그는 서가에 꼭 S천 매의 앨범만을 모아 놓았다 그러고는 매
년 자신의 손이 닿지 않거나 별로 마음이 가지 않는 앨범을 정리해서 중고 시장
에 내놓거나 지기들에게 나눠 주면서 5천 장까지로 한정 지은 자신의 라이브러
리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앨범 하나하나가 자신의 마음에 얼마나 와 닿는가에 있
다. 아무리 주위에서 좋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물건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한데 내 경우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타입
이 아닌가 싶다. 사실 첫번째 부류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 봐도 되지 못할 경지
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주머니 사정이 허락지 않고, 또 그 많은 레코그를 일
일이 들어 볼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셀렉션을 하게 된
다. 아마 이런 경우엔 컬렉터라기보다는 셀렉터란 개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샀
다가 팔아치우고 또 샀다가 다른 것과 교환하고, 그러면서 여기저기 레코드 가
게며 아는 컬렉터의 서가를 기웃거리며 모니터 하고 귀동냥을 하면서 사고 싶은
아이셈을 수첩에 깨알같이 적어 놓지만 정작 손에 들어오는 것은 극소수다. 그
러나 나와 같은 셀렉터는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도 양으로 승
부해서 듣지도 않을 레코드며 별로 신통찮은 아이템으로 서가를 무장할 바에야
늘 손이 가는 몇 장의 귀한 레코드가 더 알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셀렉터의 유명은 아마 천차만별일 것이다.
가까운 친구 중에는 재즈의 입문을 에릭 돌피가 파이프 스포트에서 부커 리틀
과 함께 거행한 라이브 중에서 (Fire Waltz)라는 곡으로 시작한 사람이 있다. 그
는 1년 동안 에릭 돌피가 참가했거나 리드했던 모든 레코드를 모으는 데 정신이
없었다, 그러고는 에릭 돌피와 비교적 활동을 많이 했던 찰스 밍거스로 철렉션
이 이전되더니 그 다음 돌피와 1년 동안 활동했던 존 콜트레인으로 관심이 넘어
갔다. 그러다 보니 이젠 존 콜트레인의 추종자가 되어 그와 연결된 마일즈 데이
비스니 텔로니우스 몽크니 하는 쪽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았다. 마치 먹이사슬마
냥 자신의 기호에 맞는 아티스트를 차례로 공략해 가면서 모던 재즈의 역사를
읽어 내는 경우다. 아마 이 방법은 처음 재즈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에 게는 좋은
본보기가 아닐까 싶다. 처음엔 여러 작품과 아티스트를 무작위로 듣다가 끌리는
스타일리스트를 발견한 뒤에는 전적으로 그의 연대기를 추적해 가는 방법이다.
이런 경우엔 폭넓게 재즈계 전반을 파악할 능력은 모자라지만 자신이 거쳐온 아
티스트들의 이력만큼은 장점이 있다. 일본에서는 이런 유의 평론가들이 꽤 된다.
이른바 존 콜트레인 평론가, 마일즈' 데이비스 평론가, 텔로니우스 몽크 평론
가라고 불리는 이들은 자신이 표방하는 아티스트에 관한 한 둘채 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다. 극에 달한 이들의 전문성은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하긴 일본은 웬만
한 분야는 다 전문화가 되어 있으니 재즈인들 예외이겠느냐마는. 이와는 상반되
게 무슨무슨 명반 100선이니 200선이니 하는 극단적인 명반 셀렉터 부류가 있
다. 이 부류의 특징은 정말로 뛰어난 대가라 할지라도 그저 한두 장의 앨범 컬
렉션으로 만족하고 만다는 데에 있다. 이를테면 아트 페퍼 하면 <<Meets The
Rhythm Sections>>, 줄리앙캐논볼 애덜리 하면 <<Something Else>>, 재키 매
클린 하면 <<4, 5&6>>, 패츠 나바로 하면 <<The Fabulous Vol. 1 & 2>>, 커
티스 풀러 하면 <<Blues Ette>>. 존 콜트레인 하면 <<Blue Train>> 그런데
이렇게 각 아티스트의 대표 명반만을 소장하고 있는 경우는 모던이나 빅 밴드
시대의 역사에 대해선 빤히 알면서도 정작 개별 아티스트에 들어가면 장님인 경
우가 다반사다 심지어 이런 명반 컬렉션에서 제외되었지만 나름대로 튀어난 환
에 대해서도 깜깜인 경우가 많다. 게다가 이들의 경우엔 자신이 좋아서 음반을
사기보다는 자료에 의해 모으기 때문에 자칫 컬렉션의 행위 자체가 따분해질 우
려가 있다. 그러나 방법이야 어찌 되었든 내 판단으로 보면 일정한 룰에 의해
컬렉션을 셀렉션으로 이끌어 올린 이런 방법은 꽤 현명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다시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주머니 사정이 한정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정말로 라신에게 감동을 주는 앨범은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뜻대로 되지 않
는 것이 컬렉션의 함정이다. 어느 날 생각지도 않았던 아이템이 서가에 잔뜩 꽂
혀 있는 것을 우리는 쉽게 발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컬렉터의 진정한 전쟁터
는 주머니와 레코드 진열대와의 전투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일지도 모른
다 그러나 후회나 낙담은 금물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나름대로 재즈 음악을 향
한 자기만의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그런 재디나 고통조차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애당초 이 분야에 뛰어들 자격조아 없는 것은 아닐는지.
제4장 컬렉선의 병과 싸워서 얻은 것
음질 체크용으로 듣는 음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처음 묻는 말이, 요즘 어떤 음악을 즐겨 듣
느냐, 어떤 아티스트를 좋아하느냐 하는 질문이다 조금 더 발전되면 소장한 음
반은 몇 장이나 있느냐, 혹은 무슨 오디오를 쓰느냐 하는 말도 나오게 된다. "나
는 요즘 소니 클가크에 빠져 있지, 윈튼 켈리도 괜찮고. 피아노에 정신을 쏟고
있어 누가 에밀 길레스를 추천하기에 들어봤는데, 대단하더군, 아마도 베토벤 곡
연주에 있어서는 당해낼 사람이 없을 거야." "우리나라에선 데이비드 보위만큼
인정을 받지 못한 아티스트도 드물어. 음반을 구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할 수
없이 일본에 가는 사람을 통해 열 장을 구입했는데, 역시 좋더군." 팝 클래식 상
관없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식의 얘기를 많이 듣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오디오 얘기가지 가는 것은 물론이다. "매킨토시는 영 벙벙해,
옛날에 오디오가 귀할 때나 통했을 물건이야. 역시 요즘 잘 나가는 기기를 사야
제대로 듣지 안그래? 이젠 디지털 시대 아냐?" "탄노이? 아니, 요새도 탄노이를
쓰는 사람이 있나? 참 병적이군. 그게 뭐가 좋다고.... 부피만 컸지 소리는 멍청
하잖아. 그런 거 살 돈 있으면 어디 외국 여행이나 가라구.''
요즘 자주 만나는 K라는 사람은 자신이 벌어들인 돈의 약 90퍼센트를 음악에
투자하는 사람이다. 통장은 늘 텅 비었고 점심, 저녁은 회사에서 나오는 식권이
나 접대비로 해결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옷은 친척이 입다가 못 입게 된 것을
얻어 입을 정도다 이렇게 해서 남은 돈은 몽땅 음악에 투자하는 것이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그가 음악의 하드웨어라고 할 수 있는 오디오와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는 음반 양쪽 모두에 깊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문 케이스다 이를테면 오디오에 빠져 있는 사람은 대개 소프트웨어에는 무식
한 경우가 많다. "당신은 성능 좋은 오디오를 갖고 있으니까 이제부터는 음악을
다양하게 섭렵하는 것에만 신경쓰면 되 겠네요" 이런 순진한 질문을 던질 법도
하다 그럼 상대방은 빙그레 웃는다. "이보게, 친구 나는 음악을 듣는 게 아니라
'음' 을 듣는 걸세 이를테면 이 시스템에선 보컬피 어떻게 나오나, 저런 조합으
론 바이올린이 어떻게 재생되나.... 뭐 그런 게 내 주된 관심사란 말야. 물론 음
악 쪽에 신경을 쓰면 좋지. 유식해지기도 하고 오디오에 비해 큰 돈도 들지 않
고 하지만 매일 새로운 기계가 쏟아져 나오고 듣고 싶은 제품이 눈앞에 어른거
리니 낸들 어쩌겠나" 혹은 이런 대답도 가능하다.
"어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오디오가 있을 것 같은가“ 이제 됐다 싶으면 뭔
가 이상하게 들리는 부분이 발견되고 그래서 숍에 가 보면 새로운 물건이 나와
있고, 이 집에 가서 이렇게 들으면 이게 좋은 것 같구 또 다른 집에 가서 저렇
게 들으면 또 저것 같구. 뭐 일단 스피커며 앰프며 플레이어가 완성되었다 치더
라도 그것으로 끝날 것 같은가? 케이블 바꿔야지, 전원 공급에 신경 써야지, 리
스닝 룸을 조정해야지, 평생을 해도 부족한 것이 오디오라구." 하드웨어에 열중
하는 사람에게 있어 음반이란 음질 체크용밖에 안된다. 그러다 보니 기기를 비
교하기 위해 평소 자주 듣는 음반을 쓰게 되고 결국 그가 아는 음악이란 극히
일부분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반면 소프트웨어에 열중하는 사잠은 음반에 돈을
쓰는 것은 아깝지 않게 여기면서도 카트리지나 코드와 같은 오디오에서는 악세
서리와 같은 제품에 돈을 지출하는 것을 아깝게 생각한다. "전 기계에 신경 안
써요. 온악: 그냥 들으면 됐지 저음이 어떻고 피아노가 어떻고 하면서 따지는데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럴 시간 있으면 음반 한 장이라도 더 들을래요."
물론 양자 모두 장단점이 있다 자세한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일단 K씨 이야
기부터 마무리하자.
음반을 모으는 이런저런 케이스
K씨는 양족 모두에 깊이 관심을 갖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를 만날 때면
어느 한쪽에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곤 한다, 이를테면 와디아의 DA컨버터를
쓴다고 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쎄카로 바뀌어 있고, 그러면서도 즈렐
이나 마크 레빈슨의 신제품 목록을 읽고 있다. 뿐만 아니다. JBL 4345를 매킨토
시와 오디오 리서치로 멀티 구동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 날 가 보면 헤일즈
스피커와 크렐 앰프로 바뀌어 있다. 이런 덩치가 큰 제품을 바꿀 여력이 없을
경우엔 카트리지를 85만원 짜리로 교환한다거나 스피커 케이블을 몽땅 은선으로
갈아치우는데 모르는 사람이 보면 미쳤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음악을 들을
때엔 이런 식의 말을 하곤 한다. "참, 어제 세운강가에 갔더니 알텍 604에 에어
타이트 진공관 앰프를 물렸더라구요. 모두 옛날 아이템이고 그래서 구닥다리로
취급했었는데, 소리 하난 끝내주던데요. 뭐하러 수천만 원씩 들여 이런 짓거리를
댔는지 후회되더라구요. 역시 오디오는 저 예산으로 깔끔하게 처리하는 게 좋아
요. 무엇보다도 매칭이 제일 중요한 것 같구... " 이런 탄식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쉼없는 바꿈질 못지않게 소프트웨어에 대한 열성도 대단하다. 그
런 면에서 별종은 별종이다, 언젠가는 미국의 블루스 아티스트 음반에 혈안이
되어 그것만이 최고인 양 찾아 헤매다가는 또 어느날엔 마이너 레이블에서 나온
원 포인트 레코딩의 클래식 음반에 심취해 있기도 했다. 그래서 그를 만날 때면
그 전에 벌어졌던 음악에 관한 모든 사항들은 일단 과거형으로 치고 새롭게 시
작하는 기분으로 이야기를 전개해야 한다 마치 사정 한파에 몸서리를 치는 정치
인들이 "간밤에 별일 없었습니까?" 라고 묻듯이 요즘 별일 없었냐고 물어야 하
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부류는 다이내믹해서 재미있다, 10년 전부터 지금까지
허구한 날 바흐 타령만 하는 사람이나 아니면 만날 때마다 밥 딜런 아니면 모차
르트 이야기만 하는 사람에 비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사실 요즘 무슨 음악을 즐
겨 듣느냐는 식의 질문은 어떤 면에서는 무의미할 수도 있다. 누가 밥 딜런 마
니아고 누가 재즈 음반만 듣고, 또는 누가 모노 시절에 녹음된 클래식 음반만,
그것도 아날로그 디스크로만 듣는다느니 하는 말들은 본질적으로 자기가 좋아하
는 음악 취향과는 철저하게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악을 좋아하고 그래서
음반을 모은다는 행위는 자칫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저 돈과 시간을 주체
할 수 없어 시간 때우기 용으로 보내는 취미쯤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마니아를 자처하는 입장에서는 자신 인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고상하고 성
스러운(?) 행위임에는 틀림없다.
음악을 좋아하는 H라는 대학 강사를 만난 일이 있다. 그는 음악을 듣고는 싶
은데 많지 않은 봉급 때문에 할 수 없이 대리만족으로 얼토당토않게 서울시 레
코드 가게 지도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 여성지에서 가끔 특집 기사화되는
아이템인 명동의 옷가게 지도라든가 종로의 먹자골목 약도 따위의 비슷한 지도
말이다. 한데 그 모양새가 볼썽사납기는커녕 어떤 면에서는 슬픈 느낌마저 준다.
그가 어느 정도로 판을 사고 싶어했는가는 자세한 약도를 보면 대충 짐작할 수
가 있다. 신촌 어느 지점에 무슨 레코드 가게가 있고 명동의 어느 지점에 무슨
레코드 가게가 있고, 주인의 이름은 뭐고 레코드 판매 가격은 어느 정도이고 자
기와는 어떤 인연이 있으며 게다가 그 밑에는 전화번호며 주로 취급하는 장르까
지 깨알같이 써 놓았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 강사에게
만큼은 절실한 문제였을 것이다 어쩌면 먹고 사는 문제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였
을지 모른다. 그는 돈을 아껴서 판을 사 모은 덕분에 집에 가 보면 제법 한쪽
벽을 가득 채울 만큼의 레코드와 수백 장의 CD가 그것도 포장지에 싸여 보관되
어 있다 그 정성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때그때의 주머니 사정을
따지다 보니 주로 라이센스 음반과 염가에 판매되는 CD가 주종을 이루고 있지
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음악을 깊이 듣는 사람에게는 관심을 가질 만한 아이템
이 별로 없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좋다는 데에야 무슨 말이 필
요하겠는가?
한편 이런 친구도 있다 재즈를 좋아하는 S는 H처럼 경제력이 따라 주지 못한
덕분(?)으로 주로 무슨 음반은 어디에 가면 싸게 구한다더라 하는 식의 잡다한
정보에 강하다, 이를테면 마일즈 데이비스의 <<Kind Of Blue>>는 종로에 있는
어느 레코드 가게에 가면 다른 곳보다 2천 원 싸게 살 수가 있고, 존 콜트레인
의 런mpresslon고은 현재 20퍼센트 할인중인 신촌의 어디에 가면 싸게 살 수 있
다는 식의 정보들. 이런 정보를 국제화 시대에 맞춰 전세계로 시야를 넓힌 사람
도 있다. 가끔 외국으로 출장 갈 때마다 꼭 레코드 가게를 들르는 L이란 친구인
데, 그에게 자문을 구하면 좀더 저렴한 가격으로 판을 구할 수 있다. 이를테면
흥콩 어디어디에 가면 재즈 가격이 저렴한 음반이 많고, 파리 어느 곳에 가면
샹송 음반을 싸게 구할 수 있다든지 또 미국의 뉴저지에 가면 1백만 장의 아날
로그 레코드를 모아 놓은 가게가 있는데 판매 가격은 3달러 내외라는 등의 무궁
무진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친구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의 경우도 오랫동안
음반을 사는 행위를 해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데, 여기에도 몇 가지 진
화 단계가 있다. 독자 여러분도 나름대로 참고할 부분이 있을 것 같아 간단하게
정리를 해 보았다.
음반 컬렉션의 세 단계
우선 처음에는 유명하다는 아티스트 위주의 앨범, 그것도 베스트나 명반 위주
로 구입하는 단계이다 물론 여기에는 나름대로 구입 원칙이랄까 정보 같은 것이
개재한다. 내 경우에는 각종 서적과 매니아를 자청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많이
참고했었다. <<롤링 스톤즈>>지가 뽑은 100대 록 앨범, <<스윙 저널>>이 뽑
은 악기열 100대 재즈 명반, 혹은 일본 평론가들이 뽑은 클래식 음반 100선, 또
는 선배가 추천한 음반과 아는 사람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송하는 음반 등등 이
런 식으로 하면 한이 없지만 적어도 구입 당시에는 세익스피어나 마르케스의 소
설에 대한 대단한 이론 서적이라도 구한 것과 같은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곤 했
다. 아마 여기에는 자신의 의지보다는 추천 자료가 주는 강한 압력이 더 크게
작용한 것 같다 그 결과 자신이 구한 음반이 취향에는 맞지 않더라도 억지로 참
고 듣는 이상한 결과도 낳게 된다. 다음 두 번째 단계로 가면 이제 명반이라는
것에는 차츰 흥미가 없어지고 대신 새로운 음반으로 눈길이 옮겨 가게 된다. 괜
시리 프로그레시브, 그것도 (진보적인) 이태리 복을 듣고 싶기도 하고 민속음악
코너도 기웃거리는가 하면 모노 시절에 녹음된 클래식 음반이나 아예 역사를 소
급해 중세나 르네상스 음악에 관심을 가져 보려고도 한다. 이쯤 되면 컬렉션을
하는 데 명확한 원칙이나 이유가 불분명해진다. 저 아티스트를 보면 괜히 끌리
고 이 음반을 보면 꼭 사야 할 것만 같다. 그래서 레코드 가떼의 모든 코너를
다 기웃거리게 되는 한심한(?)사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핑계없는 무덤 없다고 이
젠 이유없는 명반이 없는 식이 된다. 다 필요하고 다 명반이고 다 사연이 있다
는 식의 논리다.
전술한 K라는 사람이 꼭 여기에 속한다. 정말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이 뭐냐
고 물으면 이런 식으로 답변한다. "난 뭐 꼭 이거다 하는 게 없어요. 그때그때마
다 바뀌니까요. 음악이란 다 좋은 거 아녜요?" 물론 다 좋기는 하다. 그러나 음
반이 한두 장도 아니고, 들을 만한 앨범이 한정적인 것도 아니다. 하기 평생을
그렇게 살면서 음악과 벗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말이
다.
마지막 단계에 다다르다
몇 년 전 처음 파리의 샹젤리제에 있는 '버진'이라는 레코드 가게에 간 일이
있었다. 한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한 2백 년 전쯤에 지어졌을법한 웅장한 5층
짜리 건물이 전부 음반 판매장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1층은 싱글 레코드,
2,3층은 앨범 위주의 레코드와 CD, 오디오 숍, 4층은 비디오와 레이저 디스크, 5
층은 카페테리아가 들어서 있었다. 한 후배는 파리에 유학을 갔다가 마침 어학
연수원 근처에 그 가게가 있는 관계로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평소 음악과 영
화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그 가게는 단순한 레코드 가게가 아니라 도서관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그 후배는 버진에 무려 한 달 간을 꼬박꼬박 출근했는데도 볼
게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도쿄에 있는 아키하바라 전자상가 근처의 '이
시마루'란 음반 전문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곳의 선전 문구는 이렇다.
'CD+LD=130만 타이틀 입하!' 130만 장이 아니다. 130만 타이틀이란 점에 유의
하기 바란다. 이시마루는 벌써 근처에 5호점까지 낼 정도로 호황이다.
이쯤 되면 대체 뭘 사야 할지, 뭘 들어야 할지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된다. 나
도 비슷한 체험을 한 일이 있는데, 그저 재즈 레코드나 몇 장 사자는 식으로 들
어갔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무얼 사겠다는 계획없이 무작정 이런저런 앨
범을 뒤적이고 나니까 아예 살 기분이 안 나는 것이다. 마치 많은 음식이 한꺼
번에 상에 올라오면 갑자기 식욕이 멈추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과연 그런
곳에 가서, 나는 아무 음악이나 다 좋아해요라고 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해진다. 그러나 마지막 세 번째 단계에 들어서면 다음과 같이
소박하고 편한 위치로 오게 된다. "결국 유명한 사람이 잘하는 사람이야." 그 결
과 누구라도 익히 알 수 있는 아티스트로 되돌아오게 된다. 대신 철저한 전작
컬렉션이 수반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런 친구가 있다. 집에 가 보면 재즈, 클
래식, 록 등 여러 장르의 음악을 나름대로 명반 위주로 2천여 장의 콤팩트 디스
크를 수집한 사람이다. 누구 하면 무슨 음반 하는 식의 어찌 보면 구구단 암기
비슷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특정 아티스트 한 명을 물어보면 잘 모르는
경우가 있다. 이런 식의 컬렉션은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교보문고에 있는 서
적을 다 읽을 수 없듯이 레코드 가게에 있는 음반을 다 알거나 들을 필요는 없
는 것이다.
문제는 그 많은 정보 중에서 어떤 정보를 취득하느냐, 그리고 그 정보를 얼마
나 깊이 이해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내게 요즘 무슨 음악을 듣느냐고 물으면 나
는 그저 평범하고 유명한 아티스트의 음악을 전작 위주로 듣는다고 대답한다.
이렇게 정하고 나니까 무척 홀가분해졌다. 전에는 클래식부터 랩까지 모조리 신
경을 쓰고,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것저것 듣곤 했었는데 그 버릇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클래식에서는 글렌 굴드가 친 피아노 음반은 다 구하려 한
다거나, 말러의 교향곡을 솔티가 지휘한 음반은 그 멜로디를 다 외울 때까지 몇
번이고 듣겠다고 작심하던 때가 있었다. 록은 어떤가? 역시 비틀즈와 그 멤버들
의 솔로작들, 롤링 스톤즈의 60년대 걸작, 밥 딜런의 70년대까지의 음반들, 도어
즈의 전작, 앨비스 프레슬리의 솔로 음반 컬렉션, 킹크스와 후, 그리고 데이비드
보위의 전작 컬렉션, 아마 이름은 들어서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대표작이나 베스트 모음집이 아닌 순수한 독집 앨범을 순서대로 컬렉션하고 그
가사와 그 위미까지 이해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재즈는 다소 복잡하기
는 하지만 요즘엔 레이블별로 관심을 두고 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재즈라
는 음악의 특성상 프로듀서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에 의해 레이블의
정책이며 해당 아티스트의 관리까지 전반적인 부분 모두를 책임지는 것이다. 그
래서 현재는 블루 노트, CTI, 프리스티지, 임펄스, 그리고 컨템포러리 레이블에
관심을 두고 하나씩 컬렉션하고 있다. 이미 블루 노트는 2백 장이 넘어선 상태
인데, 일본에서 구한 <Blue Note Book>을 보면 약 450매 정도가 중요시되는 만
큼 아직 갈 길이 먼 듯하다.
음악도 우리 인생의 일부
미국에서 오랫동안 유학하고 온 L이란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우리 나라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은 후(WHO)나 데이비드 보위, 그리고 킹크스 같은 아티스트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얼마나 열심히 음악을 들었는지 자동차 안이나 카페
에서 이들의 음악이 나오면 아주 자연스럽게 가사를 흥얼거리며 따라 하는 것이
다. 그래서 물어 봤더니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는 고등학생 때 그들의 음악
을 처음 접했고, 그때 사 모은 오리지널 디스크 3백여 타이틀이 고스란히 CD로
바뀐 것 외에 새로 들어온 음반은 거의 없었다. 다시 말해 20여 년 간 같은 음
악만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 어떤 음반 하면 몇 번째 무슨 곡 하는 식의 이야기
가 나온다. 글쎄, 무슨 사법고시 공부도 아니고 이렇게 같은 음악만 줄기차게 듣
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지만 그나름의 장점이 있기 때문에
뭐라 평하기는 곤란하다. 그런데 그가 다른 음악에 대해 문외한인가 하면 그렇
지는 않다. 대충은 알고 있고 또 그런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의 기분이랄까 느낌
같은 것을 존중해 준다. 그러나 자신은 이런 음악이 좋다는 것일 뿐이다. 반면에
이런 사람이 있다. "야, 너 누구의 이런 앨범 아냐?" 또는 "아니, 아직도 이런 아
티스트를 모른단 말야?" 다그쳐 묻는 Y라는 친구다. 한데 좀 알려진 아티스트라
면 모를까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라면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럴 땐 도전장이라도 받은 느낌이 들 것이다. 한데 주위에서 가끔 이런 마니아
와 또 특정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하지만 정작 일반인에게 필요한
단계의 음악을 구하기란 상당히 어렵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를테면 후의 음악의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기 위해 데뷔 앨범부터 구하려
고 했지만 정작 네 개의 타이틀만 구했을 뿐이다. 보뒤는 좀 쉽게 구할 수 있으
려니 했는데 정작 중요한 앨범은 보이지 않았다. 말하자면 좀 평이하고 일반적
인 수준의 음반이 의외로 귀하다는 점이다. CD가 나오면서 그런 대로 상황이 나
아진 점이 있다. 처음 오리지널 디스크를 구하려고 돌아다닐 때엔 그렇게도 비
틀즈나 롤링 스톤즈의 음반을 보기가 힘들었는데 지금은 웬만한 레코드 가게엔
이들의 디스크가 조금씩은 비치되어 있다. 그러나 좀 아쉬운 점이 있다. 이상한
메틀이나 랩 밴의 앨범이 줄줄이 비치된 것을 보면 그렇다. 기초가 튼튼해야 건
물이 오래 가듯이 우리의 팝 문화도 기초공사부터 새롭게 해야 하지 않을까 싶
다. 그런 면에서 재즈는 조금 낫다. 워낙 마니아가 귀한 덕분에 그래도 마일즈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델로니우스 몽크와 같은 기초적인 아티스트의 음반은 그
런대로 구할 수가 있으니 말이다. 사실은 이런 것이 아닐까. 마니아들 사이에서
음악이란 것은 자신의 인생의 일부분을 바쳐도 모자랄 만큼 고귀하고 절대적인
것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생활의 한 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심지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일반인이 음악을 모른다고 해
서 한탄할 노릇도 아니며, 또 자신이 음악의 일부분을 깊이 안다고 해서 대단한
자부심을 느낄 필요도 없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음악이
자신의 신체 일부분이 되어 그저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각과 느낌에 맞춰져야 한
다는 것이다. 이럴 때 마니아라면 전혀 음악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다지 거부
감을 갖지 않고 그와 음악 양자 모두를 이해하려 할 것이다. 물론 이 단계는 도
인과 같은 수준이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번 회에
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음악을 겸허하게 듣자. 이것이 요즘 나의 모토이
다. 여기서 더 나아가 누군 클래식을 들으니까 필링이 오고 또 누군 록을 들으
니까 격이 없다는 식의 편견은 사실 아무 쓰잘 데 없는 것이다. 그저 자신이 좋
아하는 음악을 집중적으로 남보다는 깊게 듣고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음악감상은 취미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적어도 지나친 편식을 해도 건강에 별 무
리가 없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연 우리가 얼마나 장구한 세월을 살겠
는가? 그저 좋아하는 것만을 이해하고 사랑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할는지도 모른
다. 오늘은 몇몇 타이틀이 비어 있는 마일즈 데이비스와 존 콜트레인 섹션을 보
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제 5장 음악을 듣는 데에도 단수가 있다.
CD 래크를 정리하면서
나는 재즈 평론가로 알려져 있지만 록 음악도 즐겨 듣는다. 대개 록하면 감수
성이 예민한 10대 말에서 20대 초반쯤에나 열광하는 음악으로 알고 있다. 심지
어 대학교를 졸업하면 아예 잊고 살아도 좋을 듯한 음악으로 치부된다. 나름대
로는 맞는 말이다. 그런데 재즈 평론가가 록 음악을 듣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
까? 특히 최근에 와서 부쩍 록 앨범을 많이 구입한다. 그래서 이 부분을 한번
짚고 넘어가고 싶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런 현상은 내 개인적인 사정에 기인
한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한번쯤은 함께 고민해 볼 만한 대목이 있어
이야기를 전개해 보도록 하겠다. 발단은 이렇다. 얼마 전에 CD 래크를 정리한
일이 있었다. 그 동안 잡다하게 모아 놓았던 것들을 정리하면서 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들어왔던 음악의 궤적이랄까 흔적을 읽을 수가 있었다. 대개는 CD를
정리한다는 게 우선은 귀찮고 또 그런 것을 알파벳 순서든 혹은 장르순이든 따
지다 보면 시간도 많이 걸리기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기 십상이다. 하지만 막상
하고 나니 나름대로 보람은 있었다. 가장 먼저 후회스러운 것은 왜 장르나 특정
아티스트 위주로 음악을 듣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이를테면 레오르그 솔티 지
휘의 말러 심포니 3번 옆에 존 콜트레인의 <A Love Supreme>이 있고, 그 옆
에는 장 루이 무라의 신보가 버티고 있는 식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선 이런 잡
다한 감상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재즈 평론가라는 직함을 내걸었다손
치더라도 베토벤의 심포니나 프로그레시브의 기본적인 명반쯤은 면식이 있어야
한다. "혹시 재즈말고 이런 음악 좀 들어볼 생각은 없어요?" 가끔 누가 내게 이
런 말을 하면서 자크 티보의 연주나 디누 리파티의 연주를 적극 추천하는가 하
면, 클래식 록이라고 해서 60년대의 전성기 록 밴드의 음악을 권하기도 한다. 그
럴 때면 나는 빙그레 웃을 뿐이다. "아직 재즈도 제대로 모르는 걸요."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그런 것쯤은 이미 관심을 갖고 들어 봤다구.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문외한으로 취급하지 말란 말이야.'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것도 어느 시기, 즉 출발 선상에서 불과 몇 미터 달리지 않은 시점에서나 통할
법한 이야기다. 이런식으로 말하면 음악을 듣는 것이 무슨 도를 닦는 것처럼 대
단한 일로 느껴질 수도 있고 심지어 2급, 1급에서 초단, 1단 하는 식의 단수가
매겨져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행하게도 맞는
말이다. 좋아하는 음악을 골라서 들으면 그만이지 제 맘대로 단수를 따지고 그
래? 이렇게 반감을 가지는 독자도 분명 있을 것이다. 바로 그 부분에 대한 나름
대로의 답변을 이제부터 시작하겠다. 이야기를 처음으로 돌려보자.
뉴욕에서 온 친구가 남긴 것
CD 래크를 정리하기 얼마 전에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그곳에서는 언더그라운드 DJ로 나름대로 활발하게
활동해 온 세미 프로페셔널이다. 그의 주된 활동 무대는 뉴욕이었고, 당연히 음
악적 취향도 그쪽에 있었다. 루 리드, 벨벳 언더그라운드, 밥 딜런, 데이빗 번, 토
킹 헤즈, 레이먼즈, 뉴욕 돌스, 톰 웨이츠 등등.... 아마 이 정도의 아티스트 이림
을 모르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번쯤 이런 아티스트의 음악이 왜 이런
식으로밖에 나올 수 없는 이유를 따지면 결국 뉴욕이라는 공간과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라는 시간적인 상황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도출해 본 적이 있는
가? "그야 뉴욕에서 직접 살아 본 사람이 제일 잘 알겠지. 우리야 레코드를 통해
서밖에 짐작할 수밖에. 그리고 아티스트는 음악으로 말하는 거지. 이러저러한 신
변잡기나 거창한 역사적 상황까지 들먹여 가며 음악을 들을 필요가 있어? 그래
봤자 어차피 대중음악 아냐? 솔직히 팝송 가사 하나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데
말야." 이런 항변도 가능하다. 나름대로는 맞는 말이다. 필자 또한 그런 생각으로
그저 레코드에 소록된 정보를 가능한 한 미학적으로 분석하고 정리하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그런 내게 이 친구는 참으로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뉴욕의
뒷골목에서 자라난 이야기. 저임금의 공장을 전전한 사연, 그런 곳에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무언의 분노 같은 것들... 그렇다.
적어도 우리가 뉴욕을 대변한다는 아티스트로 꼽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백그
라운드를 음악에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 아티스트의 보컬 솜씨나
음색 또는 기타 실력에 대해 평하고 있을 때 그 친구는 그 가사와 음악 속에 숨
겨져 있는 분노를 몸으로 느끼고 그것으로 용기를 얻곤 했던 것이다. 이것은 재
즈를 들을 때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음의 홍수 속에서 꿈틀거리는 그 어떤 느
낌 같은 것, 그러니까 흑인으로 태어나 핍박 받고 어려움을 겪은 것에 대한 구
체적인 분노 같은 것과 비슷하다고 여기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모던 재즈니
쿨 재즈니 하면서 용어나 현란하게 구사하고, 화성악이니 싱코페이션이니 하는
단어로만 무장한 미악주의를 지향하는 팬들로서는 결코 가슴으로 이해할 수 없
는 부분, 바로 그것을 나는 감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를 반영하고 분노를 표현하는 록(Rock)
그럼 과연 록 음악이란 무엇인가? 과감히 결론을 내리자면 그것은 '저항정신'
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우리가 듣는 많은 록 레코드 속에는 실은 이런 메타포가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 저항정신이란 것이 막연히 체제에 대한 반항
이나 기성세대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으로 이룩되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라고 생
각한다. 다만 그런 스피리트(Spirit)에 미학적인 세련미가 더해져야 하지만 결국
은 그 음악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 대한 심층적인 통찰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
각한다. 뭔가 어려운 말 같은데 실은 간단하다. 록 아티스트도 예술가다. 예술가
라면 자기가 속한 시대에 대한 통찰과 이해가 선행되어야 작품에 혼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이다. 기타 코드를 잡는 법이나 애드립 테크닉은 그 다음의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별로 대단한 이야기도 아닌데 그렇게 심각하게 얘기한다
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실은 그 친구에게 배운 진짜 교훈은 음악을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이나 먹는 음식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음악은 공기나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자신을 맴돌고 있는 존재인 것이
다. 좋아하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그 가사 속에서 생활의 진실을 교훈 삼고, 머
리 속에서는 그 노래를 부른 아티스트의 기분이 전달되어져 오면 비로소 진정한
록 뮤직의 팬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를 포한한 이 땅의 많은 마니아들이 바로 이런 기분을 잘 모
르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보자. 만일 비틀즈 팬이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있
다면 과연 그들의 수많은 명곡 가운데 가사를 끝까지 따라 부를 수 있는 곡이
과연 몇 곡이나 될까? 또 밥 딜런의 팬이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쓴
수많은 난해한 곡을 해석해 보려고 과연 몇 번이나 영한사전을 뒤적거려 보았는
가? 그래도 여전히 자신이 록 뮤직의 골수 팬이라고 자칭한다면 과연 <롤링 스
톤>이나 <스핀>과 같은 전문지를 몇 번이나 사 봤고 수많은 록 크리틱의 아티
클을 몇 번이나 읽어 보았는가? 그리고 이 척박한 땅에서 그래도 록 문화를 꽃
피워 보겠다고 기타를 치고 드럼을 만지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의 콘서트에 몇
번이나 동참했던가? 근본적으로 과연 나는 얼마나 록 뮤직을 좋아하는가? 하루
에 단 한 시간이라도 록을 듣지 않으면 뭔가 빠진 듯한 섭섭함을 느낄 만큼 몸
이 달아 있는가? 나는 이 점을 묻고 싶은 것이다. 다시 그 친구 얘기로 옮겨가
보자. 사실 음악적인 지식만으로 이야기하자면 그 친구는 일반적인 마니아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다. 소장한 레코드 수도 얼마 되지 않고 올디스 팝이나 프로
그레시브 록, 혹은 재즈 등에는 문외한에 가깝다. 다만 뉴요커 록이나 펑크, 랩
음악에 관해서는 며칠 밤낮이 모자랄 정도로 정보도 많고 아는 이야기도 많다.
그리고 나같이 그쪽에 문외한인 사람도 그런 음악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그의
기분이랄까 느낌이 자연스럽게 전해져 온다. 나는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
각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 래크를 바라보았다.
과연 내가 저 친구처럼 자신있게 나의 기분에 맞는 음악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음악에 대한 열정이 이 친구의 열정보다 더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음악을 기분이 아닌 정
보 수집의 차원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순수하지 못한 음모, 일
종의 지적인 스노비즘 같은 것이 개재되어 있었던 것 같다. 무슨 무슨 아티스트
의 이름과 경력을 알고, 무슨 무슨 음반을 들었다고 이야기하는 별로 대단하지
도 않은 일로 호들갑을 떨면서 음악을 어떤 소유나 정복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않았나 하고 반성이 되는 것이다.
메인 스트림부터 배우자
각설하고 이런 시각에서 나는 최근에 록 음반을 새롭게 접하기 시작했다. 한
때 레드 제플린이나 지미 핸드릭스 따위는 이제 질렸다는 식으로 말하고 했던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마치 반성문을 쓰는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레코드 가게의
록 코너를 서성거리는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이쯤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고 넘어가자. 지금은 은퇴했지만 잘 나가는 레코드 가게에서 오랫동안 일을
했던 S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오랜만에 시간도 있고 구할 음반도 있고 해서
독일에 가게 되었는데 참으로 특이한 체험을 했다고 한다. 우선 그쪽의 마니아
라는 사람들이 우리와는 좀 다르다고 했다. 원래 그 친구는 록에서 시작해 재즈,
클래식순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정통 코스라고 인정되는 단계를 거치면서 음악의
폭을 넓혀 왔는데, 정작 그곳에 가 보니 하얗게 머리가 센 할아버지조차 청바지
에 운동화를 신고 록 콘서트에서 엉덩이 춤을 추는가 하면 아직도 록 코너를 서
성거리며 음반을 고르고 있더라는 것이다. 정말이지 그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원래 독일 하면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이 아닌가.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이 있
고 베를린 필하모니가 버티고 선 곳인데도 록 팬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록 팬
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점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이
때껏 음악을 잘 모르고 들었던 자신을 질책했다고 한다.
록이건 재즈건 클래식만큼 중요하고, 또 그 하나하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평
생을 바쳐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커리큘럼을 이수해 가듯 스쳐 듣고 말
았음을 말이다. 그 동안 바흐를 듣고 카잘스를 안다고 얼마나 록 밴드를 얕잡아
봤던가? 그래서 그 동안 잘 안다고 자부해 왔던 록 음반을 새롭게 보고 새롭게
듣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그 친구의 이야기도 생각나고 해서 레코드 가게에 갈
때마다 새롭게 록 코너를 뒤적이게 되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의외
로 록의 기본이 되는 아티스트에 대한 음반이나 정보가 빈약하다는 점이다. 비
틀즈, 롤링 스톤즈, 후, 킹크스, 밥 딜런, 지미 핸드릭스, 레드 제플린, 도어즈, 비
치 보이스, 밴 모리슨.... 아마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듯한 아티스트의 목록일
텐데 불행하게도 이런 메인 스트림 아트스트의 전작을 구하기란 쉽지 않다는 사
실을 새삼 확인한 것이다. 이를테면 후의 <Quadrophenia>, <Magic Bus> 혹은
<Odds & Sods>와 같은 앨범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킹크스의 경우는 더
욱 참혹하다. <Lola>나 <Arthur> <Something Else>와 같은 명반은 고사하고
겨우 초창기 베스트 정도나 손에 넣을 정도다. 심지어 킹크스란 그룹을 처음 듣
는 가게 점원이 태반이었다. 너무 답답해서 현재 구하고 있는 메인 스트림 앨범
열 장을 나름대로 곱아 본다. 혹시 참고가 될지도 모르겠다.
1. <Veedon Fleece>-밴 모리슨(Van Morrison)
2. <Magic Bus>-후(Who)
3. <Extra Texture>-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4. <Face To Face>-킹크스(Kinks)
5. <First Step>-페이스스(Faces)
6. <Songs from The Wood>-제스로 털(Jethro Tull)
7. <Goodbye>-크림(Cream)
8. <Hat Trick>-아메리카(America)
9. <Europe '72>-그레이트풀 데드(Grateful Dead)
10. <Rough Mix>-피트 타운젠트(Pete Townshend)
물론 위의 명단 중 가끔 보이는 앨범도 있기는 하다. 한데 정작 필요해서 찾
으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나는 이번 기회에 누가 레코드 가게를 차리
려고 한다면 이런 부탁을 하고 싶다. 우선 메인 스트림에 속하는 주요 아티스트
의 전작부터 갖춰 달라고. 혹 데이빗 보위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전작
을 단번에 구할 수 있고, 또 후의 팬이라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앨범을 구해서
전작을 다 메꿀 수 있게 해주라고. 뭐 그리 어려운 주문은 아닐 듯싶다.(하긴 그
런 것보단 요즘 잘 나가는 가요나 댄스 뮤직 음반을 대량으로 가져다 놓고 단기
간에 판매하는 것이 수익 면에서는 훨씬 나을 것이다. 세태가 이러니 가게 주인
만을 나무랄 수만은 없다)
요즘에도 비틀즈를 들어요?
하긴 S에 대해서 한마디 더 하면 까무러칠지도 모르겠다. 그는 잔뜩 야심을
가지고 독일에 있는 사툰이라는 레코드 가게에 갔다고 한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음반을 판매했고 나름대로 음악이라면 뭐든 제대로 꿰뚫고 있다고 생각한 그였
지만 그는 잠시 멍해지고 말았다고 한다. 클래식 코너에 갔더니 필립스, 소니,
도이치 그라모폰 등이 레이블 별로 코너가 따로 있고, 그곳에는 처음부터 지금
바로 나온 음반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넘버도 빠짐없이 구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애타게 찾던 음반을 너무나도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
입 음반을 대량으로 가져오던 날 단골 손님들만 불러서 먼저 파티를 벌였던 일
이 그렇게 창피할 수가 없었단다. 이왕 메인 스트림 이야기가 나왔으니 좀더 해
보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명동에 잘 가는 레코드 가게가 하나 있는데 주
인이나 종업원 모두 안면이 있어 가끔 놀러가곤 한다. 바로 이곳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얼마 전 지방에서 올라온 록 마니아를 그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그와 나눈 대화 몇 마디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참, 문제예요, 지방에선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의 황금기 록 앨범을 구할 수가 없어요. 기껏해야 비틀
즈의 베스트나 도어즈의 그레이스트 히트 정도니....
서울에 올라와야 그나마 몇 장 구할 수 있어요." 그는 계속 투덜댔다. "록 음
악에 관심이 많으세요?" 내가 넌지시 물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나보다 서너 살
은 더 위로 보이는 사람이 록 음반을 구하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왔다는 것이 재
미있지 않은가? "그럼요, 죽을 때까지 이런 음악을 들을 거예요." "그럼 이 앨범
들어보셨어요?" 나는 탐색전으로 우선 밥 딜런의 <Times, They Are A
Changing>을 래크에서 뽑아 왔다. "아뇨, 밥 딜런은 따분하잖아요. 웅얼웅얼대
고.... <Blowin' In The Wind> 하나면 되는 거 아녜요?" "그럼 이건....?" 나는
이번에는 트래픽의 <Mr.Fantasy>를 꼽아 봤다." "트래픽? 누구죠? 잘하는 아이
들이에요?" 이쯤 되면 대충 짐작이 된다. 나는 넌지시 물었다. "혹시 비틀즈는
몇 장이나 갖고 계시죠?" "비틀즈요? 뭐 그런 그룹까지 들어야 하나요? 나는 배
드 컴페니나 두비 브라더즈 같은 해비한 애들이면 족한데?" 물론 이런 지면을
빌려 그런 마니아를 공격하거나 무지를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새삼스
럽게 확인한 사실은 이 땅에 제대로 된 록 문화는 앞으로 당분간 피어날 길이
없다는 씁쓸한 전망뿐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갖고 있는 것부터 사랑하는 용기
단정적으로 말하면 팝 칼럼니스트며 방송인들이 록 문화를 심어 주려 애쓰기
보다는 그때그때 유행하는 팝이나 록 발라드 따위를 띄워서 청취율이나 유지하
려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말하자면 전혀 기본을 가르치지 않은 것이
다. 아무리 알고 있는 정보가 많고 음반이 넘쳐 나도 기본기가 약하면 결국 오
래가지 못한다. 많은 록 마니아들이 결국은 재즈나 클래식으로 돌아서면서 록은
한 때에 듣는 음악이나 취미 정도로 일소에 부치는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이 된
것도 기본이 갖춰지지 않은 것에 기인한다. 물론 필자는 재즈 평론가다. 누구보
다도 재즈를 사랑하고 매일 저녁 구입할 재즈 앨범 리스트를 짜는 것을 행복으
로 여기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록도 좋아한다. 이런 현상을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비난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라고 말하고 싶
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좋아하면 그만이지 나이 먹고 시야가 넓어졌다고해서
그에 걸맞는 고상하고 점잖은 것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고
생각한다. 각설하고 요즘 나는 앞에서 소개했던 친구를 통해 음악에 대한 새로
운 자세를 배우는 중이다. 거창하게 뭘 배우는 것이 아니다.
음악을 즐기는 법을 새삼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런저런 정보고 지
식이고 모두 집어치우고 순수하게 음악 그 자체를 즐기는 법을 배우자. 처음 내
가 팝이나 록, 혹은 재즈를 접했을 때의 설렘과 동경을 새롭게 발견하자는 것이
다. 철이 들면서부터 노트에다가 사고 싶은 앨범이나 좋아하는 명반 목록 따위
를 하루라도 쓰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음악은 나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가 이런 즐거움은 사라지고 대신 컬렉터 기질이 거세어지면서 음
악을 무슨 소유나 지적인 허영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런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선 습관적으로 레코드 가게를 다니기보다는, 또 집에서 새로 구입해야 할
앨범 리스트를 자기보다는 우선 자기의 라이브러리에 있는 음반부터 열심히 다
시 듣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본다. 그 수가 열 장이 되었건 혹은 1천 장이 되
었건 간에. 하지만 당장 레코드 가게 순례를 중지하라는 말은 일종의 사형선고
와도 같은 것이다. “오, 주여. 내 호주머니 속에 매일 새로 구입할 음반을 살
돈이 떨어지지 않게 해주소서!” 어느 컬렉터의 간절한 기원(물론 나도 마음속
으로는 똑같은 심정이지만)인데 어쨌든 일단은 무시하고 당분간은 사들이지 말
자. 그래서 나는 새롭게 정리된 CD 래크를 바라보며 시원섭섭한 마음과 함께 뭔
가 알게 모르게 피어오르는 흐뭇함을 니낀다. 왜냐 하면 CD를 정리해 봤더니 일
단 사다 놓기만 하고 의외로 제대로 듣지 않은 앨범이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그
러니 당분간 레코드 가게에 가지 않더라도 허기를 느끼지 않을 정도다. 그럼 그
동안 정신없이 사들이기만 했던가? 뭐 그래 봤자 기껏해야 1천 5백여 장 안팎에
불과해 크게 내세울 것도 못 된다. 남들처럼 한쪽벽이 전부 음반이라거나 혹은
레코드 창고를 마련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음반을 소유한 것은 아니니까. 그래
도 나는 그 수야 어찌 되었건 그 동안 모아 온 앨범 하나하나를 매만지면서 이
제부터는 제대로 듣고 제대로 이해하자고 결심했다. 독자 여러분도 한번 시도해
보기 바란다. 무엇보다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해지고 음악과 다시 만나는 즐거움
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제4부 재즈 음반과 오디오의 멋진 하모니를 꿈꾸며
이번 챕터에서 다룰 주제는 재즈를 멋지게 재생할 오디오 장치에 관한 것이
다. 사실 라이브로 즐기지 않는 이상 레코드가 되었건 카세트가 되었건 어차피
음반을 통해 재즈를 만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시중에 나도는 컴퍼넌트
시스템에서 재생되는 음반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경우다. 속 편하게 스피커부터
CD플레이어, 앰프 등이 한 브랜드로 만들어진 시스템이면 리모콘 하나로 조작해
서 얼마든지 감상이 가능하다. 하지만 어떤 일이 되었건 일단 깊숙이 안으로 들
어가게 되면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과 고생을 감수해야 한다. 오디오 역시 마찬
가지다. 그런 시시한 음으로 재즈를 만날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 고행의 길이
활짝 열리는 것이다.
필자 역시 오디오 때문에 많은 방황의 시간을 보냈고 지금도 비록 조그마한
방에서 음악을 듣는 상태이지만 이에 걸맞는 좀더 나은 장치가 없을까 하며 오
디오 잡지도 뒤적여 보고 용산 전자상가에도 다니고 또 마니아의 집을 탐방하며
귀동냥을 하고 있다. 물론 목표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내가 좋아하는 소리로
재생해 줄 장치를 찾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명제이지만 그리 쉽게 풀리지 않는
숙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 챕터에서는 그 동안 방황하면서 얻은 나름대로의
지식과 정보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여기에서 그 동안 선배들이 해준 숱한 조언
과 외국 저명 오디오 평론가들의 충고도 나름 대로 참고했다. 주된 이야기는 내
주관대로 판단하고자 했지만 그래도 꽤 객관적인 정보를 실었음을 밝혀 둔다.
이 글이 전반적으로 오디오에 관한 일반적인 소개 수준에 그치고 있음은 아직도
내 자신의 확고한 오디오 관이랄까 식견이 부족한 탓도 있겠고 지금 이 순간에
도 활발하게 새로운 제품이 생산되고 판매되는 실정 탓도 있을 것이다. 하긴 오
디오인들 어디 정답이 있을까? 그러니 이를 기회로 함께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갖
도록 해 보자.
제1장 최근에 벌어진 오디오계의 변화를 추적한다
오디오 병에 도전하다
최근 십년 동안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테마가 몇 가지 있다. 작가로서 느끼
는 삶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라든가 소설로 쓸 만한 소재 몇 가지가 그 속에 포
함되지만 오디오에 대한 기대와 희망 또한 포기할 수 없는 부분으로 남아온 것
같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오디오라는 것은 음악이라는 커다란 공간에 비춰봤을
때 거의 미미한 부분밖에 차지하지 못한다. 음악을 연주하거나 작품을 쓰거나
새로운 음반을 제작하거나 그것을 듣는 식의 일반적인 활동에 비한다면 오디오
는 아주 특수한 몇몇 사람의 전유물쯤인 것이다. 실제로 클래식이건 재즈건 음
악을 연주하는 사람에게 오디오에 대해 물어보면 거의 아는 것이 없다. 아니, 레
코딩 엔지니어를 찾아가서 물어봐도 음 자체에 대한 감은 갖고 있지만 오디오
전반에 대한 지식을 갖춘 이는 드물다. 양아치 정신을 모토로 삼고 있는 록 뮤
지션 쪽으로 가면 오디오는 부르주아 취미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돈 자랑하
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비싼 기계를 살 마음은 추호도 없다는 식이다. 몰매나
맞지 않는다면 다행일 것이다. 때문에 대개 음을 재생하는 일반적인 수준의 컴
포넌트를 구했다면 오디오란 항목은 마치 냉장고나 텔레비전처럼 별 의미 없이
필수 구입품목 리스트에서 지워지고 만다.
“나는 음악이 좋아서 듣지 오디오 따위엔 관심 없어.” 수천 장의 음반을 수
집해 놓은 사람이 이런 식의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하기도 한다. “거, 자꾸 오디
오에 탐닉하다 보면 결국 음악을 잃게 된다구. 함부로 바꿈질하는 게 아냐.” 이
렇게 점잖게 경고(?)를 하는 이도 있다. 물론 이런 부분 모두를 이해할 수 있다.
또 수긍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 머리 속에 오디오란 파트가 지워지
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져만 가는 것이다. 이런 경우 여러
가자 해결 방안이 있겠지만 결국 체념해 버리고 한 번 적극적으로 이 숙제를 풀
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신 남들처럼 멋진 승용차를 몰거나
좀 폼나는 옷을 입고 다닌다거나 하는 다른 종류의 사치는 과감히 포기할 각오
를 하면서 말이다.
JBL의 신화를 좇아서
재즈 팬으로서 일본과 한국의 마니아들 일부분은 JBL 스피커의 신화에서 벗
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강렬한 고음에 탄력있는 저음, 무엇보다도 막힌 가슴을
뻥 뚫어줄 듯한 상쾌한 쾌감. 여기에 창업주인 제임스 B. 랜싱이란 사람의 신화
와 패러곤, 올림퍼스, 모니터 4344-K2 등으로 이어지는 명기의 라인 업은 어지
간히 감각이 둔한 사람이라도 구매욕을 느끼게 만든다. 얼마 전 일본의 소니 뮤
직 본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재즈 파트의 담당자는 이제 막 50세쯤 되어 보
이는 점잖은 신사로 콧수염이 개성적인 이토라는 사람이었다. 자그마치 약 450
여 자의 재즈 앨범을 프로듀한 경험을 가진, 그쪽 방면에서는 알아주는 거물이
었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JBL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그는 아주 자랑스런 표정으로 자기 집에 JBL 스피커가 세 세트나 있다는 말
을 했다. 모델명이 일일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략 4425 나 4312 시리즈 정도였
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그는 한술 더 떠서, 벌써 만들어진 지 30년도 더 지난
JBL의 앰프까지 소장하고 있다는 자랑을 하는 것이었다. 모델명은 SA600. 40와
트 출력의 인티그레이티드형으로 최초 모델은 1964년도에 나온 것이었다. 이것
을 신주 모시듯 갖고 있었다.
“이 앰프를 처음 산 것은 10년 전입니다. 당시 36만 엔을 주고 샀지요. JBL
앰프를 갖는다는 사실에 정말 감격했습니다. 제품이 너무나 좋아 하나 더 갖고
싶었지만 그만한 돈을 또 쓰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지요. 그런데 다행히도 요즘에
와서 가격이 많이 내렸습니다. 작년에 13만 엔을 주고 샀는데 정말 기적적인 가
격입니다. 물론 제품에 따라 상태가 다르므로 약 10만 엔에서 30만 엔까지 가격
대가 천차만별이지만요.” JBL 하면 매킨토시를 빼놓을 수 없으므로 은근히 그
점에 대해 내가 물어봤다.
“물론 매킨토시도 좋습니다. 그러나 JBL 앰프에 맛들이고 나면 매킨토시보다
더 재즈에 어울린다는 것을 느낄 겁니다.” 사실 이토는 재즈 레코딩에서도 신
화적인 존재지만 또한 많은 재즈뮤지션과 재즈 카페 주인들을 알고 있기도 하
다. 도쿄에서 기차를 타고 약 2시간 반 정도 가면 나오는 이치노세키에 ‘베이
시’란 카페를 운영하는 스가하라도 그의 절친한 친구란다. 재미 있는 것은 이
카페의 모든 시스템, 이를테면 앰프와 이퀄라이저, 그리고 스피커 모두가 JBL의
제품이란 사실이다. 대개 30여 년 전에 생산된 모델로서 스피커의 경우엔 075의
트위터에 375의 혼을 단 대단히 거창한 시스템이다. “아마 전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재즈 LP 재생에 있어서는 이 카페를 따라올 곳이 없을 겁니다.” 이토
의 확신이다.
여담이지만 ‘베이시’에 대해 한마디 더 하겠다. 원래 스가하라와 이토, 그리
고 미나미라는 재즈 평론가 세 사람은 워낙 죽이 잘 맞아 삼총사처럼 함께 어울
리는 사이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최근에 미나미란 사람이 죽었는데 재미있는 것
은 그가 남긴 다수의 재즈 음반이 문제거리로 떠오르게 되었단다. 그의 아들이
물려받기엔 그의 집이 너무 작았으므로 하는 수 없이 전 소장품을 베이시에 기
증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양이 무려 4만 5천장. 이미 베이시에는 1만 5천
장의 앨범이 있었으므로 도합 6만 자의 LP가 그 카페에 비치된 것이다. 관심 있
는 분은 일본에 가는 길에 한번 들러보기를 권한다. 여하튼 재즈 마니아들에게
JBL 스피커는 묘한 마력으로 다가오는 모양이다. 얼마 전의 일인데, 동사에서
나온 최고급 모델 K2를 청취한 적이 있었다. 컴팩트하게 짜여진, 흡사 근육질의
몸매를 연상시키는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풍기는 디자인은 역시 정상급의 기기
다운 면모를 보여주었지만 정작 놀란 것은 그 소리였다.
우연한 듀크 엘링턴의 음반을 걸었는데 거기에서 재생되는 그 악단의 호화한
사운드는 꼭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댄스 홀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
켰다. 다시 말해 공연장에 산적한 무수한 PA 스피커군에서 터져나올 듯한 에지
지감과 실재감이 그 두개의 단단한 스피커를 통해 거침없이 재현되고 있었던 것
이다. 그것은 경악에 가까운 체험이었다. 과연 JBL이로구나 하며 거듭거듭 찬사
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마크 레빈슨의 출현이 의미하는 것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오디오의 역사를 보면 몇 개의 커다란 획이 있다. 영화
로 치면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갈 때, 또 흑백에서 컬로로 바뀔 때 대단
한 진보가 이룩되었듯이 구와 마찬가지로 오디오에서도 여러 분야에 걸쳐 이전
의 시대와는 확실한 단절을 가져오는 사건이 몇 개 있었다. 조금 소급해 들어간
다면 혼 타입의 스피커에서 북 셀프형으로 바뀐 것, 또 최근에 와서는 아날로그
디스크에서 CD로 프런트 엔드가 바뀐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하지만 이만큼의
역사적인 의미는 없지만 소리의 질이나 오디오의 개념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70년대 중반에 출시된 ‘마크 레빈슨’이라는 브랜드의 등장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당시 최고로 치던 앰프는 매킨토시였다. 한
데 이 마크 레빈슨 시스템은 무려 매킨토시의 두세 배의 가까운 가격대를 매기
소 시중에 나온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하가 앤드라는 개념이 이를 통해 제기될
만큼 이에 걸맞는 고가 오디오 제품이 차례차례 등장하게 되었다. 앰프로 치면
크릴, 네프 , 첼로 등이 그 맥이요, 이에 따라 스피커며 플레이어며 각각 이에
걸맞는 고가의 명기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속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오
디오계는 진공관 시대의 명기와는 다른 개념으로 또 한차례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사적인 견해요 타당성에서는 의문이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도
식은 이야기할 수 있다. 일례로 일본의 카 마니아를 얘기할 때 첫 단계가 국산
승용차요 그 다음은 폭스바겐, 마지막이 벤츠라는 도식을 설정하고 있다. 물론
꼭 폭스바겐, 벤츠로 이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리라. 다만 그만한 성능과 가격
대에 준하는 제품을 이야기할 때 두 회사가 각각의 그레이드를 대표하기에 하는
말일 것이다. 이것을 오디오에 도입한다면 첫 단계가 국산 오디오, 그 다음이 매
킨토시, 마지막이 마크 레빈슨이다. 너무 단순화시킨 감이 없지 않지만 대강의
뜻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요컨대 마
크 레빈슨의 등장으로 하이 엔드가 열리면서 이전과는 분명히 선을 긋는 또 다
른 차원의 음이 열렸다는 점이다. 물론 이 클래스는 앰프만을 이야기하지는 않
는다. 어떤 면에서는 스피커와도 맥을 같이하는데 그 과정이 재미있다.
현대에 오면서 고급한 소재로 새로운 유니트를 개발한 결과 스피커의 능률은
낮아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 파워 앰프에 막대한 고통을 안겨주게 되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응답 특성이 빠른 A클래스 설계를 도입하게 되었다. 아니, 그 반
대도 된다. 앰프의 성능이 향상되자 이를 믿고 스피커 회사에서는 이전에는 꿈
도 꾸지 못했던 과감한 설계를 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컴팩트한 사이즈에 저부
하의 스피커라든가 정전형 타입의 스피커가 그것이다. 둘 중에 어느 것이 정답
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이로 인해 하이 앤드의 세계는 우리가 익히 아는 음
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래저래 오디오 마니아들은 재미있
게 된 셈이다.
스피커의 개념이 바뀌고 있다
여기서 잠깐70년대 이후의 스피커의 변화에 대해 짚고 넘어가 보겠다. 당초
스피커 하면 혼 타입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만큼 60년대까지 혼을 채용한 스피커
가 상당수였다. 그 중에 알텍의 A5, A7, 탄노이의 오토그래프, 독일의 젠센, 그
외 JBL의 올림퍼스, 하츠필드 등 여러 인상적인 명기가 많았다. 그러나 트랜지
스터 타입의 앰프가 출현하고 고출력이 실현됨에 따라 스피커 크기도 북 셀프
형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강력한 파워로 인해 상당히 넓은 지역을 커버할 만
큼 질은 좋았다. 하지만 강력한 파워로 인해 상당히 넓은 지역을 커버할 만큼
질은 좋았다. 이런 것으로는 AR A3라든지 보스의 901 시리즈, 또 KLH 등의 모
델을 들 수 있는데, 탄탄한 저역과 직진서의 좋은 고음은 지금도 일부 마니아의
손에 남아 있을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물론 여기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사실 60년대만 하더라
도 오디오란 것은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급속한 경제 발달 덕분
에 유럽과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급속한 경제 발달 덕분에 유럽
과 일본이 부국으로 등장하면서 그 나라의 서민층에 걸맞는 보급품의 등장이 필
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디오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AR 3A가 나왔던 60년대
말이 중요한 것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왜냐면 트랜지스터형 앰프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과 맞물려 오디오의 대량 보급을 외친 일본 오디오 회사의 등장이 지
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스이, 소니, 켄우드, 야마하, 테크닉스 등등 본격적으로
가전제품으로서의 오디오 시대가 이 때부터 열린 것이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혼 타입에서 북 셀프형으로 바뀌면서 많은 사람들이 별 부담없이 집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스피커를 논할 때 중요해진 개념은 ‘스테레오 이미지
(Stereo Image)'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 만큼 이전과는 판이한 양상을 보이
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개념은 이를테면 두 개의 스피커를 적절히 배치했을 때
그 중간에 음악을 연주하는 무대라든가 악기의 정위감 등 마치 입체 영화를 보
는 듯한 이미지가 연출되는 것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스테레오 앰프에 두 개의
스피커를 설치하면 죄우의 채널이 분리될 뿐 아니라 제법 그럴듯하게 그 가운데
에 악기의 위치가 그려진다. 하지만 현대의 모델들은 이 개념을 더욱 극대화시
켜 마치 손으로 잡힐 듯한 실제감이 떠오르는 것이다.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녹음 기술의 발달이다. 일례로 캐나다의 한 스튜디오에서 비밀리에 제작된
스팅의 <Soul Cage>란 앨범을 들어보자. 그 첫곡을 들여보면 벽 안쪽에서 물밀
듯이 신디사이저가 올려오면서 천장으로부터 기타의 프레이징이 쏟아져 내린다.
이것은 마치 음의 홍수와 같아서 정신을 집중하고 들으면 나이애가라 폭포의 한
가운데서 서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필자는 얼마 전 일본에서 레코딩 스튜디오 공부를 하고 온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이 집에서 실험용으로 제작된 음반을 들러보았는데, 나로서는 참으로
쇼킹한 체험이었다. 여러 테스팅 소스 중에 총성이 울리는 대목이 있었다. 한데
놀랍게도 단 두 개의 스피커만이 설치 되었음에도 총알이 내 뒤통수와 벽 사이
를 꿔뚫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아니, 실제로 뒷머리를 뭔가 팍
스치고 가는 듯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맹세코 등뒤에 따로 스피커를 설
치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어째든 이 정도로 녹음 기술이 발달한 만큼 이
에 적합한 스피커의 개발은 당연한 것이었으리라. 이리하여 이전처럼 스피커의
울림을 적절히 이용해 저역의 양감을 증가시키는 방식이 사라지게 되었다. 대신
유니트 자체만의 성능을 이용해 스테레오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기술을 도입하
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유니크만의 음을 울려야 하는 만큼 우선 방진
대책이 절실해진다. 그에 따라 인클로저를 상당히 무겁고 단단하게 만들게 되었
다. 그러면서 내세우는 것이 ‘모니터적인 음’이다. 다시 말해 통 울림으로 인
한 음색의 변조 내지는 변화를 억제하고 소스 자체에서 나오는 음 자체를 생생
하게 그려 내는 이른바 ‘중립적인 음’을 표방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길 것이다. 통 울림을 억제한다면 대체 어떤 방법으로 저음을
얻는단 말인가?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정말이지 그 사이 파워 앰프의 성
능은 비약적으로 발전해 왔다. 이른바 A클래스 설계를 채용하는 하이 엔드의
회사들이 그 어떤 악조건에서도 넉넉하게 유니트를 구동할 만한 기술을 획득한
것이다. 이에 따라 수도 없이 유니트를 울려서 (오디오 용어로는 ‘댐핑 팩터’
라고 한다) 저음을 얻는 방식이 가능해졌다. 그 결과 이전과는 달리 유니트의 크
기가 줄어들었으며 어떤 반응에도 재빨리 응답하는 특성이 생기게 되었다. 베이
스 음만을 갖고 말한다면 그 전에도 부드럽고 깊이 있는 너글너글한 음이었는
데 반해 요즘엔 통통 튀는 탄력적인 음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기술을 채용하는 회사는 참으로 많다. 아발론, 헤이즈, 와트, 틸과 같은
톱 브랜드뿐 아니라 ATC, 셀레스천, 어쿠스틱 에너지, 프로악 등 중급형 모델들
도 이런 방식으로 독특한 스테레오 이미지와 개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런 스피커들의 개성이랄까 폴리시를 수용자 측에선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스피커의 설치 방식이나 앰
프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스타일대로 행한 후 실망스러워하는 경우가 많
은 것이다. “이거 뭐 이래? 저역도 하나도 나오질 않잖다!” 내지는 이런 반응
도 있다. “폼만 그럴듯하지 소리는 별로야. 선이 가늘고 양감이 없고 ...” 그런
데 필자의 체험으로는 이런 스피커를 정말고 잘 세팅했을 때의 분위기와 음감은
가히 일품이라고 할 수 있다. 소리의 결도 아름답고 저역의 깊이도 탄력 있으며
게다가 소스의 모든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해 내는 능력에서는 그만 탄복하게 되
는 것이다.
CD의 음은 다 똑같다?
앰프의 고출력화, 스피커의 모니터화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소스의
변화다. 이전의 아날로그 방식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변화함에 따라 음 자체의
성격이 좀 변화된 것이다. 흔히 CD의 음은 LP에 비해 차갑고 무기질적이라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이 말은 초창기의 디지털 기술을 설명할 때에는 맞는 말이
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른바 DA컨버터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아주
자연스럽고 풍요로운 음을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느 분야나 그렇듯이 이
토록 비약적인 음의 발전이랄까 진보를 꾀한 뒤안길에는 반드시 파이오니어적인
회사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오디오란 재미있는 모양이다. DA컨버터로 말
하면 80년대 중반 이같은 CD에 대한 다소 부정적인 개념을 획기적으로 변화시
킨 회사가 나왔는데, 그게 바로 와디아다. 컴퓨터처럼 정밀하게 음을 분해해 내
는 기술력을 지닌 이 회사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고가로 CD의 고급화에 앞장선
것이다.
"CD의 음은 어는 것이다 다 똑같다." "구태여 CD에 많은 돈을 들일 필요는
없다." 이런 식의 이야기가 한동안 오디오계에서 통용되었지만 이제는 어림도 없
는 얘기다. 한편 이렇게 DA컨버터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일정하게 디지털 테크
놀로지가 완성되자 이제는 CD를 구동하는 매커니즘으로 포커스가 바뀌게 되었
다. 다시 말해 DA컨버터의 컴퓨터적인 기술력에서 트랜스포트라는 인간의 손길
에 의해 우열이 가려지는 부분으로 관심사가 바뀌어진 것이다. 한데 재미있는
것은 이전의 톱 클래스 앰플리파이어 회사들이 바로 이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말하자면 앰프 자체를 디지털화하면서 이에 덧붙여 CD트랜스포트와 DA컨버터
를 묶어 하나의 종합 오디오 개념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마크 레빈슨, 제프 롤랜드, 크릴, 자디스, 오디오 리서치, 골드무트 같은 일류
브랜드는 그렇다 치고 조금 밑을 내려오면 매킨토시, 쿼트, 아캄, 오라, 메리디언,
레가, 미견, 네임 오디오, 뮤지컬 피델리티 등등 웬만한 앰프 메이커면 모두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여기에 일부 회사들이 튜너와 스피커까지 생산해 냄으로써
이른바 ‘종합 컴포넌트’라는 말이 들어맞는 라인 업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최근에 회사가 팔려 나간 비운을 맞이한 쿼드도 심기 일전, 보급형 컴포넌트 개
념의 제품을 출시했으므로 한동안 이런 유행은 지속될 전망이다.
오디오계의 인식론적 단절
앞서도 언급했지만 마크 레빈슨이라는 브랜드의 등장은 단순히 하나의 앰프
회사가 출현했다는 의미만을 갖지는 않는다. 이것은 하나의 ‘인식론적인 단절
’이며 과거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이정표가 된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나름대로
현재의 오디오 상황을 매킨토시로 대변되는 이전의 그룹과 마크 레빈슨으로 대
변되는 그 이후의 그룹으로 분류하고 있다. 아주 단순한 구분이지만 나처럼 무
슨 무슨 스펙이 어떻고 소재가 어떻고 댐핑 팩터가 어떻고 하는 등 오디오를 깊
이 이해하는 데에 좀 골치가 아픈 사람에겐 꽤 유용한 것 같아 소개해 보도록
하겠다. 전자의 특징이라면 아날로그 방식, AB클래스의 설계, 통 울림을 살린
풍요로운 저음, 탄노이라든지 JBL처럼 메이커 자체의 카리스마가 중요한 제품
들, 보수적인 성향 등이 주목된다. JBL, 알텍, EV, 탄노이, 웨스트레이크, 보스,
스팬더, 로저스, 하베스, 쿼드, 매킨토시 등이 이에 속하는 제품군이다.
한편 이에 반해 후자는 A클래스 설계, 빠른 응답 특성, 모니터적인 음, 종합
오디오 메이커화, 신규 브랜드의 대거 참여 등이 특징이다. 틸, 아포지, 제프 롤
랜드, 골드문트, 헤일즈, 와트, ATC, 어쿠스틱 에너지, 프로악 등이 이에 속한다.
한데 재미있는 것은 이 양자가 무슨 약속이라도 하듯 서로 다른 그룹에서는 그
다지 호환성이 없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매킨토시로 ATC를 구동한다는 것이 무
모하게 보며, 반대로 EV의 조지언과 같은 스피커를 마크 레빈슨의 최근 모델로
운용할 경우 저음이 빈약할 뿐더러 왠지 가식적인 음색이 느껴진다. 마치 군대
에 갔다 와서 복학한 예비역과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 사이의 갭이 두
그룹 사이에 존재 하는 것이다. 이상과 이제까지 오디오 업계가 진통을 겪으면
서 헤쳐 나왔던 대강의 흐름이다. 물론 위에 언급된 것은 거의 원론적이고 통시
적인 개념에 속하므로 좀더 디테일한 부분까지 파고든다면 아마 책 한권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이쯤에서 끝내는 것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런데 진정한 문제는 바로 지금부터라고 할 수 있다. 아예 오디오를 모른다
면 모를까 귀동냥 눈동냥으로 들어 알고 있는 만큼 막상 내 방식의 오디오를
구사하려는 수간 만감이 교차하면서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한기 주위에 이런 분도 있다. 오디오 평도 꽤 쓰고 앰프 정도는 조작 할
수 있을 만큼 그쪽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인데도 막상 자기 돈을 주고 하이 엔드
오디오를 장만하려는 순간 말도 못하게 깊은 질곡으로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뭐 좀 괜챦다 싶은 것으로 하자니 결국 일반 마니아들과 다를 바 없는 라인 없
이 되니까 싫다. 그렇다고 남들이 하지 않는 것으로 하자니 막상 그 제품을 팔
때 헐값 취급을 당하니까 망설여진다. 하지만 머리 속엔 이것저것 아는 기계는
많고 이런저런 조합도 빤히 아니까 무모하게 덤벼들 수도 없다.... 이런 식인 것
이다. 이래저래 오디오는 어렵다. 그 때문에 때론 절망에 빠지면서도 다음날 용
기백배해서 또 달려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만의 조합, 나만의 개성은 어떤
것일까 그런 부분을 다음 장에서 다뤄 보도록 하겠다.
제2장 이런 오디오를 꿈꿔 본다
가게마다 주인마다 다른 오디오 평
가끔 오디오 상가가 밀집된 곳을 들러볼 때가 있다. 뭐 꼭 살 물건이 있어서
라기보다는 이미 안면을 터 놓은 가게도 꽤 되고 또 신제품이 계속 출하되는 관
계로 이래저래 취미삼아 들르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것은 대단히 유험한 취미
기도 하다. 왜냐면 매자의 분위기, 제품의 가격, 그리고 소리의 질에 취해 자기
도 모르게 덥석 생각지도 않은 충동 구매를 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신제품
위조로 취급하는 용산 전자상가와 중고품이 주로 거래되는 세운상가는 분위기에
있어 완전 대조적이다. 우선 매장의 인테리어가 그렇다. 용산 쪽은 새로 단장한
만큼 분위기에 깔끔한 디스플레이가 돋보이는 반해 세운상가 쪽은 아무래도 구
수한 된장찌개랄까 암튼 다소 복고풍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가게 주인의
폴리시도 다르다.
용산 쪽이 하이 엔드 내지는 새롭게 디자인된 제품을 높게 평가하는 데에 반
해 세운상가 쪽에선 오래된 명기를 최고로 친다. 그래서 이쪽에 가면 그 제품이
단연 최고로 꼽히지만 반대로 저쪽에 가면 명함도 못 내미는 일도 있다. 최근만
해도 용산 쪽에서는 다인 오디오라 하여 유니트 위조로 생산하는 덴마크의 스피
커 회사를 높게 평하는 데에 반해 세운상가 쪽에서는 가격 대비 성능비가 형편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러니 소비자 입장에서 볼 때 웬만큼 주관이
없고서는 서로 양쪽을 왔다갔다 하다가 시간과 경비만 날릴 판이다.
오디오에도 유행과 등락이 있다
게다가 유행이랄까 흐름이 있어서 과거에 유명했던 제품이 지금에 와서는 형
편없이 격하되는 일도 있고 반대로 미국에서 최고로 치는 브랜드가 한국에서는
헐값에 거래되는 일도 있다. 예를 들면 쿼드 같은 브랜드가 그렇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쿼드앰프에 탄노이 스피커 하면 클래식 애호가 사이에서는 최상의 콤
비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파워 앰프의 성능은 인정하나 프리앰프
의 질은 형편없으니 다른 조합을 해보시오 하는 쪽이다. 한때 필자는 여러 번의
경로를 거쳐 클립시의 쿼텟이란 모델을 쓴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스피커에 대한
각 나라의 반응이 재미있다.
클립시는 약 50여 년을 헤아리는 오랜 구력의 아메리카 스피커 회사다. 창립
자의 이름을 따서 만든 만큼 가족적이고 가내 수공업적인 분위기가 지금까지 이
어져 오고 있으면 예전의 설계 방식 그대로 지금도 혼(Horn)타입의 스피커를 일
관되게 채용하고 있다. 그런 만큼 뉴욕, 보스톤을 위시한 동부 쪽에서는 클립시
를 최고로 치는 애호가들이 많다. 특히 AV사운드가 도입되면서 혼 타입의 강점
이 더욱 부각되어 최근엔 판매 면에서도 꽤 짭짤하다고 한다. 반면 일본에서는
마케팅에 실패한 덕분에 클립시를 모르는 애호가가 더 많다. 대략 톱 모델인 클
립시 혼이다 라 스칼라 정도는 그래도 알고 있지만 그 외의 주니어 모델은 수입
조차 되지 않고 있다. 그러니 한국에서도 클립시는 아는 사람이나 아는 스피커
가 되어 버렸다. 당연히 가격 면에서도 메리트가 있어서 만일 미국에서 팔리는
인기있는 브랜드의 가격대 모델이라면 클립시 쪽이 훨씬 싸다. 다시 말해 A라는
브랜드의 5백 불짜리 스피커와 같은 가격의 클립시 모델이면 한국에서 팔릴 때
한 20만 원 정도는 더 싸게 클립시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오디오를 구입하려 한
다면 어는 정도의 가격대에서 어떤 사운드를 목표로 하는가가 명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리저리 휩쓸려서 낭패만 보기 십상인 것이다.
보급형과 하이 엔드의 경계선
그런 품목을 일일이 점검하기에 앞서 우리가 지향하는 재즈 사운드는 대체 어
떤 특지을 갖고 있나 알아봐야겠다. 우선 일반론을 소개하면 이렇다.
1) 재즈는 악기가 단순하다. 빅 밴드나 그 외 올스타 세션을 빼면 대략 3~6인
조 내외이다. 그것도 피아노, 드럼, 베이스 리든 파트에 트럼펫이나 색소폰이 붙
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클래식에서처럼 바이올린이나 첼로 혹은 목관
악기 등 수없이 다양한 질감의 음을 포괄할 필요는 없다. 그런 면에서 드럼이나
베이스의 퍼커션적인 비트감과 혼 악기의 강한 사운드가 제대로만 재생되면 큰
무리가 없다.
2) 녹음된 재즈를 들어 보면 조금은 왜곡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베이스의 음
은 필요 이상으로 과장되어 있고 하이 햇이며 심벌즈의 음도 이상하게 고역의
쇠소리가 다 많이 들린다. 말하자면 고역이 다소 째지는 듯하고 저역은 벙벙거
린다. 클래식 마니아들이라면 대번에 화장기가 짙은 흠, 혹은 천한 음이라면서
혀를 내두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과장이 재즈를 좀더 재즈답게 한다는
면에 주목하기 바란다.
3) 재즈의 악기는 대개 특수한 경우를 빼면 어쿠스틱한 면이 많다. 드럼, 더불
베이스, 또 혼 등이 그렇다. 물론 일렉트릭 기타나 오르간이 쓰이기는 하지만 록
처럼 화려하거나 특수 효과를 많이 쓰는 쪽보다는 자연적인 질감을 재생하는 데
에 목적을 둔다. 그러므로 어쿠스틱 음향 특유의 섬세하고 짜임새 있는 디테일
을 잡아내는 오디오가 필요하다.
4) 마지막으로 재즈의 음엔 일종의 마약과 같은 중독성이 있다. 이 점을 뭐라
고 정의하긴 힘들지만 재즈를 재대로 재생하는 오디오에서 들어보면 재즈가 갖
고 있는 다소 사악학 측면, 어두운 측면이 교묘히 블랜딩되어 있음을 알 수 있
다. 바로 이런 묘한 기운이 재즈를 계속 듣게 하는 요소이다. 이런 면을 감안한
다면 그 마약과 같은 기분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사운드의 재생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다. 쓰다 보니 다소 장황해졌다. 하지만 재즈 사운드를 제대로
재생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평생 사운드의 완
벽한 재생을 위해 노력하는 마니아들이 많다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평생을 바쳐 만들어 내는 재즈 사운드
사운드의 완벽한 재생을 위해 노력한 일본의 전설적인 재즈 애호가 스가와라
씨의 사운드 다자인을 잠시 소개하계다. 그는 알다시피 일본의 유면한 재즈 카
페 ‘베이시’의 주인으로, 약 20여 년 간 한 장소에서 오로지 JBL의 스피커와
앰프로 최상의 재즈 사운드 재생을 위해 노력해 온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가 말
하는 재즈 재생의 지준이랄까 관점은 나름대로 참고가 될 것 같다. 우선 재즈
특유의 스윙감이 살아 있어야 한다. 재즈만이 갖는 비트감, 리듬 감각 등이 마치
어깨춤을 추듯 자연스럽게 배어나와야 한다. 둘째로, 악기 각각의 음색이 명확하
게 표현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테너 색소폰과 트럼펫, 혹은 베이스 드럼과 더블
베이스처럼 비슷비슷하게 들릴 수 있는 음이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
다. 여기에 악기 특유의 음색미가 잘 그려져야 한다.
아니, 음색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쉽게 풀어 이야기하자면 똑같은 테
너 색소폰이라도 찰리 파커가 불면 공격적이 되지만 스탄 게츠가 불면 부드럽고
따스하다. 다시 말해 연주자 개개인이 갖고 있는 개성적인 부분이 정확히 재현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연주자의 실재감이 느껴져야 한다. 마치 라이
브 홀에 온것처럼 스피커와 앰프 사이에 연주자가 쭉 늘어서서 연주하는 것을
보는 듯한 착각이 느껴져야 한다. 그의 손놀림, 발장단 등이 마치 눈앞에 선명하
게 펼쳐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소개하다 보니 더더욱
재즈 사운드의 재생이 어려워지는 것도 같다. 그러나 뭐든지 좀 어렵고 힘들어
야 도전해 볼 만한 의욕도 생기는 법이다. 심기일전해서 오디오의 망망한 대해
로 뛰어들어 보자.
선병질적이고 아름다운 사운드
재즈의 재미는 역시 오디오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의 개성있는 음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이 파트에서 소개할 음은 다소 현대적이고 최
신의 녹음에 적합한 사운드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음을 즐기는 스타일도 다소
탐미적이면서 디테일한 부분이 생생히 살아 있는 그런 음이다. 소형 스피커로는
영국에서 나온 ATC, 어쿠스틱 에너지, 셀레스천등이 있고 정전형으로 마틴 로
건, 아포지 등이 이에 속한다. 설치방식에서는 세심하게 살펴야 하고 게다가 신
설계의 유니트가 채용된 만큼 구동에 있어서도 무척 까다롭다. 그러나 여기서
만들어진 음은 군더더기와 모난데가 없으며 마치 미끈하게 잘 빠진 미녀를 보는
듯한 간결함이 있다. 베이스 음이 모자라기는 하지만 빈혈 증세까지는 아니며
대신 고역의 아름다움은 거의 부서지기 쉬운 얇은 유리잔을 연상케 한다.
그러므로 어쿠스틱 기타의 음향, 피아노의 영롱한 울림, 심벌즈의 잔잔한 여운
등 집중해서 사운드의 맛 그 자체를 즐기려는 사람들에겐 더없이 좋을 것이다.
만일 이런 스피커에 저음을 첨가하려고 시도한다면 오히려 밸런스가 깨어져 그
특유의 마력적인 음색이 사라지는 실수를 범할 수도 있다. 이런 스피커에 많이
물리는 앰프로는 저음 구동력이 좋은 크렐이 단연 추천되고, 그 외 프라이머라
는 인티그레이티드 앰프도 좋은 매칭을 보인다. 그러나 가격대가 3백만 원 이상
이므로 좁 망설여지는 부분도 없지 않다. 한 가지 희망적인 소식은 크렐에서 최
초로 인티그레이티드 앰프를 최근에 발매했는데, 채널당 출력 130와트급에 가격
대도 220만 원 내외다. 말로만 듣던 크렐을 내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좋은 찬
스가 아닌가 싶다. 요약하면 위의 조합은 다소 까탈스럽고 신경질적인 음이라
50년대의 모던 재즈가 갖고 있는 투박함과 토속적인 음색에는 다소 작합하지 않
다. 오히려 유러피안 재즈나 클래식적인 재즈에 적합한 조합이라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한번 써 보고 싶은 조합이기도 하다. 재즈는 꼭 투박스럽게만 들
어야 제 맛이 난다고 믿어 왔지만 이런 음이라면 한번 외도도 해보고 싶다.
한편 이런 식의 음을 좋아하는 사람을 통틀어서 어느 일본 평론가가 제멋대로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었다. 짤막하게 소개해 보겠다. “...보통 음식은 깔끔하고
정갈한 것을 좋아하겠군요. 생선이나 샐러드 따위의. 물론 클레스테롤은 사양하
시겠죠? 몸매는 약간 왜소하고 마른 편에다가 다소 신경질적인 면도 보이는군
요. 위장 장애도 좀 있는 것 같고. 좋아하는 장르는 베토벤이나 브람스처럼 정통
독일 음악 보다는 프랑스 인상주의의 영롱하고 풋풋한 음이 더 좋으시겠군요.
재즈라고 해도 흑인적인 열기보다는 청아하고 시적인 표현을 더 사랑하는군요.
컬렉션에 있어서도 ECM이나 스티플 체이스가 블루 노트를 압도하겠지요, 아마?
”
하이 엔드를 지향하며
짧은 귀동냥이지만 나름대로 고가의 기기를 살펴보면 이렇다. 같은 하이 엔드
라도 메이커마다 워낙 성격이 달라 일별해서 뭐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각종 데
이터와 주위의 평을 종합하자면 대략 와트, 웨스트레이크, JBL, 마그네판 등이
좋은 평을 얻고 있다. 이 제품들은 강력한 저음을 바탕으로 샤프한 고역이 충실
히 재생되며, 거기에 그 나름의 음색이 살아 있어 마니아들의 까다로운 욕구를
적절히 맞춰 주고 있다 특히 요즘 최상의 조합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와트와
마크 레빈슨 간의 커넥션이다. 이 조합은 탄탄한 저역에서 쏟아지는 어택감은
놀랄정도이며 고역의 탁 쏘는 듯한 청량감은 묵은 체증을 씻어 주기에 충분하
다. 그런 계열로는 JBL의 K2나 웨스트레이크의 BBSM 시리즈도 비슷한데, 와트
쪽이 가격대가 훨씬 낮을 뿐더러 거의 전천후적인 다양성을 지니고 있어 최근에
가장 많이 팔리고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와트는 당초 라이브 현장에서 음을 정확하게 잡아내기 위해 일
종의 모니터 스피커 스타일로 개발된 모델이라고 한다. 그러나 워낙 성능이 좋
아 스튜디오뿐 아니라 가정용으로도 보급이 되어 전세계적인 히트 상품이 되었
다. 이런 면에서 스튜디오 모니터를 지향하는 웨스트레이크도 비슷한 운명이다.
워낙 덩치가 크고 출력도 많이 필요해 구동하기가 어렵기로 소문난 스피커지만,
이상하게도 많은 재즈 팬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유니트가 JBL의 것을 채용하
고 있다는 점이 크게 어필하지 않았나 싶다. 참고로 일보늬 재즈 전문지 스윙
저널에서는 얼마 전까지 모니터 스피커로 쓰고 있던 JBL의 4344를 내놓고 웨스
트레이크로 바꾸었다. 그만큼 재즈 사운드 재생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이야기
다. 반면 JBL의 K2는 어마어마한 가격과 엄청나게 질이 좋은 파워 앰프를 요구
하는 설계와는 달리 가정용을 지향하고 있다. 말하자면 재즈 사운드에 목숨을
바칠 만한 사람이라면 한번 인생을 걸고 달려들어 보라는 식으로 만들어진 물건
이다. 디자인은 모던한 맛이 있고 재생되는 음의 압도적인 광대역감은 일품이어
서 ‘베이시’의 스가와라 같은 이도 감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시 이들 스피커엔 앰프도 하이 엔드급이 플요한 듯 마크 레빈슨, 제프 롤랜
드, 골드문트 등이 소개되고 있다. 이런 식의 조합이라면 웬만한 아파트 한 채
값은 족히 투자해야 한다. 과연 재즈는 이 정도의 돈을 투자해서 재생할 만큼
값어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소개하
는 필자 역시 같은 생각이므로 이쯤에서 이 파트는 접어두기로 하자.
보스 901과 싸워 온 10년
여태까지는 다소 뜬구름 잡는 식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우리 스스로가 운용 가
능한 부분이라고 할 수있다. 물론 주머니 사정과 리스닝 룸 환경, 그리고 적절한
성능을 고려한 추천인 만큼 실용적인 선택일 것이다. 아마 대략 4백~7백만 원
범위가 우리 같은 재즈 마니아가 오디오에서 한번쯤 사치를 부릴 수있는 금액이
아닌가 싶다. 그것을 기준으로 여태까지의 평을 종합해서 추천하자면 이렇다. 우
선 스피커로는 보스 901, 하베스 HL 7, 로저스 스튜디오 7, JBL 4425, AR 3A,
클립시의 라 스칼라 정도다. 뭐 이런 정도의 이름을 모르는 독자는 그리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또, 이런 것쯤이야.. 하는 부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역시
좋은 것은 언제 들어도 좋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따지고 보면 재즈라는 것
도 예전의 재즈가 어떤 연속성을 갖고 발전되어 온 형태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
런 구시대적인 오디오가 오히려 어룰리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 모든 기종을 필자가 모두 써 봤기 때문에 나름의 정확한 품평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슨 기계든지 일단 써 본 사람이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기
째문이다. 보스 901은 설치가 까다로운 데가 있다. 아마 신촌이나 대학로의 카페
에 가면 이 모델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반대로 너무 흔해서 오히려 평가 절
하되는 면도 있지 않나 싶다. 보스의 소리는 정확하고 흠이 없는 종류는 아니다.
오히려 음상이 명확하지 않고 다분히 붕붕거리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애초의
의도가 라이브 홀 그대로의 이미지를 재현하자는 것인 만큼 재즈 특유의 현장감
과 분위기는 멋지게 살아난다. 마치 재즈 라이브를 하는 조그마한 카페에 가서
직접 공연을 보는 듯한 실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잘아는 재즈 마니아 한 분은 약
10년에 걸쳐 보스 901을 끼고 살았다. 그의 보스 901 사용법은 권할 만하다.
1) 스피커를 설치하는 벽의 옆면과 뒷면은 단단해야 한다. 나무로 마감한 벽재
면 더욱 좋다. 이 스피커는 약 90퍼센트가 반사음에 의존하기 때문에 벽도 일종
의 스피커라고 생각하면 된다.
2) 스피커는 벽 옆면과 뒷면에 거리를 조금 두고 뛰워 놓되 스피커 사이에 앰
프나 기타 잡다한 것을 놓지 말아야 한다. 반사음이 충분히 활동할 공간을 둬야
한다.
3) 필히 전용 스탠드와 이퀄라이저를 사용해야 한다. 이 두 액세서리는 오랜
경험 끝에 제작된 것인 만큼 901의 필수 품목이라고 봐야 한다.
4) 마지막으로 힘이 좋은 파워 앰프가 필요하다. 유니트가 다소 작기 때문에
단단한 저음을 울리기 위해선 강력한 파워로 밀어줘야 하는 것이다.
이상의 조건을 구비한다면 재즈 재생에 있어서 보스 901을 따를 것이 없다는
것이 그분의 생각이다. 한번 도전해 볼 만한 모델임에는 분명하다. 한편 이와 유
사한 기분이 나오는 스피커가 AR 3A다. 이 스피커는 한때 마니아라면 한번쯤은
써 봤을 법한 모델이고 지금도 리바이벌되어 폭넓은 사앙을 받고 있다. 사실 이
처럼 포근하고 적절한 중용의 미덕을 간직한 스피커는 흔치 않다. 오랜 시간을
들어도 피곤하지 않고 나름대로 강한 저음과 탄탄한 고역을 즐길수 있다. 한마
디로 어른스러운 음인 것이다 이 모델 역시 보스처럼 크기는 작지만 웬만한 공
간을 커버할 만큼 광대역의 밸런스를 갖고 있다. 보스처럼 전용 스탠드나 이퀄
라이저 없이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는 점도 큰 메리트라고 생각한다.
영국과 미국의 재즈 사운드
로저스, 하베스, 탄노이, KEF 등은 전형적인 브리티시 사운드를 대표해 온 스
피커들이다. 이 제품들의 강점은 공간이 작고 음량을 크게 높일 수 없는 리스닝
룸에 적합한 모델로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부분 4평 안짝인 우리들의
공간 조건을 감안한다면 최적의 선택이라 할 수가 있다. 그럼데 이런 모델에 그
동안 붙여 온 앰프는 같은 영국제 계열이었다. 그러나 단도 직입덕으로 말하자
면 이런 궁합으로는 양질의 재즈 사운드를 얻을 수 없다. 보다 강력하고 적극적
인 미국이나 일본의 앰프를 추천하고 싶다. 그래도 이 제품들이 갖고 있는 온화
하고 농축된 개성은 잃어버리지 않으니까 한번 해볼 만한 조합이 아닌가 싶다.
다만 시원하게 뻗는 하이 햇이라든지 심장을 두드리는 베이스 북의 강렬한 어택
을 기대하기에는 좀 무리다. 그보다는 좀더 라이트하고 또 성숙한 음을 목표로
하면 좋을 것 같다. 사실 귀에 착 달라붙는 소리는 한동안 듣다 보면 쉽게 물리
게 된다. 뭐든지 여지가 있는 것이 좋은 만큼 다소 부족한 듯해야 스스로 채워
넣을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런 기기를 소장하고 있는 분들은 자기 계발을 게
을리 하지 말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JBL과 클립시 계열이다. 역시 재즈 재생에 있어서는 교과서와 같
은 모델이라 할 수 있으며 실제로 많은 팬들이 이런 스피커로 재즈를 즐기고 있
을 것이다. JBL은 늘 논쟁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일단 너무나 많은 모델이 있
지만 추언할 만한 기종은 몇 손가락밖에 꼽지 못한다. 한 옥타브쯤 높은 고역과
지나치게 과장된 저역, 게다가 중역대가 부실한 면 등 여러모로 약점이 많은 브
랜드다. 물론 과거 하츠필드, 패러곤 등 명기의 산실이었던 만큼 그 전통을 잇는
4344라든지 K2 등의 아성은 지금도 대단하다. 그 기분을 주니어기에 옮긴 것이
4312XP, 4425 등의 모델 이다. 투명하고 섬세한 디테일이 살아 있으면서도 대륙
적인 호방함이 녹아 있는 음이어서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외의
모델, 특히 4312의 A, B, C 등은 흔하지만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으며 요즘 시
판되는 S2600과 S3100은 좀더 시간이 흘러야 정확한 평이 내려질 것 같다.
반면 JBL의 톡 쏘는 소리가 싫은 사람들은 이보다 접잖고 그러면서도 음이
생생히 살아 있는 클립시를 선택하기도 한다. 이 회사는 JBL 만큼이나 오래 되
었으면서도 여전히 혼 타입을 고수하고 있는 다분히 외골수적인 브랜드다. 무리
없이 고역에서 저역까지 평탄하게 재현되는 모습을 보면 아주 괜찮은 브랜드라
고 여겨진다. 단, 혼 타입이어서 클래식에서 요구하는 현악기의 요염미와, 요즘
녹음의 다이내믹한 맛은 다소 부족하다. 만일 50년대의 모던 재즈와 옛스런 보
컬을 좋아한다면 탁월한 선택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과거의 리바이벌은 단순한 향수인가?
아마 국내 재즈 팬의 대부분은 지금도 모던 재즈 시대의 음반을 컬렉션하고
있을 것이다. 컨템포러리 쪽이나 그 이전의 빅 밴드 시대에 탐닉하는 경우는 그
리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요즘 들어서 5, 60년대의 명기를
재현하는 움직임이 미국에서 활삽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 결과 진공관의 대명사
였던 마란츠의 프리 앰프 7과 파워 앰프 9등이 재발매되었는가 하면 이미 리바
이벌된 매킨토시의 C22와 MC275는 한동안 구모델과 더불어 활발한 논쟁 거리
였다. 그에 힘입어 JBL의 하츠필드도 요즘 유니트를 사용, 새롭게 복원될 것이
라고 한다. 아마 이런 기계를 쓴다면 모던 재즈 특유의 흙냄새와 휴머니티가 따
스하게 재현될 것이란 기대도 가져 본다. 물론 재즈 하면 모던 재즈만이 전부는
아니다. 만일 컨템포러리 쪽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이런 기기에서 답답함과
협대역의 부족함 밖에 느끼지 못할 것 같다. 보수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
는 마크에빈슨이며 와트 같은 하이 엔드가 더 적합할 것이다.
이런 말을 꺼낸 이유는, 결국 재즈 사운드의 재생이란 것도 총체적인 어떤 형
태의 재생이라기 보다는 듣는 사람의 개성과 기호가 반여오딘 형태의 재새이어
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좋아하는 시대와 음악에 맞는 기기를 선택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조언은 독자 여러분 스스로가 판단해서
최종적인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점에서 그다지 도움이 되질 못한다. 아니, 해가
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탄노이의 스피커들은 재즈 사운드 재생이 불가능 한 것
으로 알려져 왔지만 실제로 쓰는 사람들 중엔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다고 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과연 재즈적인 사운드라는 것이 존재하느냐 하는 의문도 피할
수 없다. 이런저런 면을 다 고려한다면 이런 소개는 소개로만 그치고 재즈 사운
드의 재생이란 과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필자가 어찌 생각하든
지 결국 선택은 여러분의 몫인 것이다. 어느 순간 뭔가 잡힐 듯하던 것이 갑자
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그러다가 새로운 희망에 사로잡혀 돌진하고 뭐 그런
프로메테우스적인 순환이 어쩌면 재즈 사랑의 한 방편이 아닐까?
제5부 재즈와 커피 한잔
재즈를 들으면서 커피 한잔 하는 일을 해온 지 벌써 십년이 넘은 것 같다. 그 동안 프리랜서 생활을 했던 탓에 주로 집에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원고를 끝내고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에는 주로 재즈를 들었고 그 덕분에 커피를 즐겁게 마실 수가 있었다. 밖에 나가서도 인테리어가 화려하거나 혹은 사람이 많은 카페보다는 비좁고 낡았더라도 재즈를 틀어주는 카페를 찾곤 했다. 왠지 재즈라는 음악이 일종의 방패막처럼 나를 감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커피를 마시며 재즈를 듣는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이런 제일 편안한 시간에 읽을 수 있는 수필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 말하자면 귀로는 재즈를 듣고 그 경쾌한 리듬을 따라 쉽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써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진지하게 재즈를 감상하려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글이란 자칫 방해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좀더 나아가서 재즈란 그저 마음으로 또는 영혼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지 꼭 글이라는 형식을 빌려서 이러니저러니 사설을 늘어놓아야만 하느냐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 나름으로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의 심리라는 게 꼭 그렇지만은 않아서 뭔가 지독히 좋아 하는게 있으면 가만히 입다물고 있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뭐 굳이 성격 탓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아무리 정좌를 하고 맑은 기분으로 재즈를 듣는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뭔가 곁들일 것이 없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된다. 그래서 잡지도 구독해 보고 앨범의 라이너 노트도 읽어 보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바로 그런 기분으로 이 글을 읽어 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아니, 꼭 재즈를 듣고 있지 않아도 좋다. 그저 사무실이나 버스 안에서 가벼운 기분으로 읽다가 분득 재즈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으로 나는 족하다. 그런 가벼운 기분으로 재즈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으니까.
제1장 재즈 여민락을 위하여
익숙해진다는 것의 의미
바라건 바라지 않건 삶의 패턴이란 건 일단 한번 자리잡아 버리면 좀처럼 바꾸기가 쉽지않은 것 같다. 나름대로 새로운 요리를 찾아봐도 결국 먹는 것은 익히 아는 음식이요, 새로운 친구를 찾는다 해도 저녁에 술 한잔 하는 사람은 요즘 자주 만나는 지기가 대부분이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어떤 면에선 나태와 태만을 불러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그때의 문제일 뿐 일단 한정된 틀을 벗어나도 새로운 룰을 만들어 실행하게 된다. 어쨌든 어느새인가 재즈란 내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일단 눈을 뜨면 거실에 있는 앰프의 전원 스위치를 켠다. 그리고 CD 플레이의 트레이를 뺀 뒤 랙에서 적절한 앨범을 골라 거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세수를 한다거나 양치질을 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재즈에 관한 글을 쓰다 보니 이런저런 아티클에도 많이 손을 대게 되었다. 그러니 하루 중 글 쓰는 시간의 대부분은 재즈에 관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재즈에 관한 글을 쓰고 나서도 재즈와의 인연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가끔 외출을 하게 되면 어김없이 레코드 가게를 들러 신보나 그 동안 보이지 않았던 타이틀을 체크한다. 그중 일부는 사고, 사지 못한 것들은 노트에 기록해 둔다. 이렇게 해서 정리된 노트가 벌써 벼ㅊ 권째이니 아직도 사야 할 레퍼토리가 상당산 셈이다. 밤에는 어김없이 재즈를 듣는다. 하루 중에 새로 구한 것, 혹은 며칠째 사놓기만 하고 들어보지 못한 것 등이지만 가끔 일에 관계되어 꼭 들어야 할 CD도 있다. 그러면 라니너 노트도 훑고 책도 뒤져 보며 감상평을 메모해 둔다. 어디 그뿐인가? 가끔씩 내한하는 뮤지션들도 체크해야하고 강남, 강북의 이름난 재즈 카페도 방문 해야 한다. 만일 전적으로 재즈만 업으로 삼는다면 몸이 두개라 해도 모자랄 만큼 일이 많은 것이다.
명동의 거리를 거닐며
이러다 보니 최근에 내나름의 생활 패턴이 생겨 버렸다. 명동을 다니면서 행하는 버릇을 예로 들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우선 명동에 가면 레코드 가게부터 순례한다. 미도파 지하에 있는 ‘메트로’, 그 건너편의 ‘디아파송’, 그리고 중앙우체국 앞의 ‘부루의 뜨락’은 어김없이 들르는 코스다. 좀더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세종호텔 뒤편에 있는 ‘세종 레코드사’에도 들른다. 대략 이 정도 돌고 나면 사야 할 음반과 유보해야 될 음반이 결정나고 뭔가 해야 할 일을 한 듯한 성취감도 느낀다. 이 중에서 필자가 사랑방처럼 자주 이용하는 가게가 ‘부루의 뜨락’이다. 이가게에 가면 궁금한 음반을 직접 모니터도 할 수 있고 또 점원들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할 수 있다. 단순한 구매 행위뿐 아니라 갖가지 정보도 주고 받는 장소인 셈이다. 이 가게들을 순례하는 도중에 빼놓지 않는 곳이 바로 중국 대사관 앞에 있는 외국 서점가이다. 특히 ‘스윙저널’, ‘다운 비트’ 같은 재즈 전문지 외에 ‘프리미어’와 같은 영화잡지, ‘롤링 스톤’과 같은 록 전문지도 가끔 산다. 또 주머니 사정에 허락하면 X세대 전문지인 ‘디테일’이나 멋진 AV 시스템이 많이 소개된 ‘AV 인테리어’, 프랑스 쪽의 인테리어가 잘 소개된 ‘엘르 데코’등도 가끔 곁들인다.
물론 이 외에도 사고 싶은 잡지가 많다. 패션 쪽으로 이태리판 ‘보그’나 프랑스판 ‘엘르’ 등도 좋고 건축, 미술, 사진.오디오 등에도 좋은 잡지들이 많다. 사실 외국의 지식인들은 평균적으로 7개 이상의 잡지를 구독한다고 한다. 백남준씨의 경우 이미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은 보지 않는다고 단언할 정도다. 그만큼 정보가 늦어졌다는 뜻이다. 이렇게 레코드 가게며 서점가를 돌다 보면 저녁시간이 된다. 그러면 식사 시간이 오고 바로 그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그날 저녁을 좌우할 만큼 의미있는 판단이 된다. 자세한 메뉴며 명가에 대한 소개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 마지막으로 맥주나 커피 한잔 하러 들르는 곳, 바로 재즈 카페 ‘겨울 나그네’다. 주인 아저씨와는 어찌어찌 인연이 되어 몇 년간 담소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는데, 주로 음악 이야기보다는 생활의 잡다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일단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주인 아저씨가 더없이 재미있는 분이란 걸 알게 될 것이다. 혹 관심 있으면 들러 보길 바란다.
사실 내 명동 코스는 거의 몇 년 간 변함이 없다. 만일 명동에 있는
습관화된 재즈 감상
이런 패턴은 어딜 가도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신촌이나 홍대 혹은 압구정동 같운 곳엘 가도 레코드 가게 서점 카페 등으로 이어지는 코스가 바뀌는 법이 없다. 여기에 가끔 영화관이나 3DO 같은 게임홀이 추가 되기도 한다. 최근에 오사카에 다녀온 적이 있었는 데 , 내자신도 놀랄 만큼 이런 공식에 따라 철저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 였다.우선 오사카의 중심지인 난바 지역에 있는 레코드 가게 부터 찾았다.공항에 도착한 후 도심에 진입한 순간 부터 자동적으로 그런 일 부터한 것이다. 물론 HMV 랄까 웨이브(Wave) , 타워 레코드 등 스케일이나레퍼토리면에서 한국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대형점이 많았으므로 새삼스럽게 신선한 충격을 느꼈지만 본질적으로 한국에서의 행태 연장선상에있었음은 부인 할 수 없겠다.
그리고는 카페 순례다. 특히 재즈라고 씌어 있는 곳이라면 꼭 들러본다.그 다음이 서점 물론 재즈 책에서 찾았고 그 다음에는 이런저런 책을훑어보는 식이었다. 참고로 이때 구한 음반을 간단히 소개해 보겠다.
1. <<With Warne Marsh>>/리 코니츠(Lee Konitz)
2. <<Alive and well in Paris>>/필 우즈(Pill Woods)
3. <<Drums Unlimited>>/맥스 로치(Max Roach)
4. <<Black Rock>>/제임스 블러드 울머(James Blood Ulmer)
5. <<Priestess>>/길 에반스(Gil Evans)
당시의 나는 워크맨이나 CD 플레이어조차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하루라도 빨리 집에 가서 듣고 싶은 생각이 앞섰다. 오사카 성을 구경한다든디 인근 도시를 다녀오는 것 따윈 차후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보니 입국할 때 심사를 하던 여자 직원의 말이 생각났다. 입국 심사카드에 쓴 내 말이 좀 궁금했던 모양이다. "아니 오사카에 관광하러 오셨어요?"그녀는 진짜 내 대답을 원했다.표정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네 재즈 음반도 구하고 또 재즈 카페도 다니고..." "네 ? " "재즈 몰라요 ? 아 자-즈 ! 자-즈!" 그래도 그녀는 내 말뜻을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신이마미에 지역의 숙소로 오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것은 내 자신의행동에 대한 반성보다 더 심도 깊은 점검이었다. 과연 내게 있어서 재즈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바라기에 이토록 재즈에 탐닉하는 것일까? 혹시 나는 재즈를 방패막이로 한 현실 도피주의자는 아닐까? 물론 나름대로 방어 기개가 있었으므로 어떤식으로든 대담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즈에 관한 글릉 쓰고 또 오랫동안 관심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관연 이렇게까지 재즈에 매달릴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은 피할길이 없었던 것이다.
도피처이자 오아시스인 재즈
오에 겐자로의 소설 <<세븐틴>>을 보면 재미있는 대목이 나온다.주인공의 형에 대한 묘사인데 , 스 캐릭터가 무척 흥미롭다. 그는 대학에 다닐때에는 데모도 하고 이념 투쟁도 벌이는 등 꽤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사회에 나와 방송국에 취직이 된다음부터는 돌변해서 과묵하고 부덤덤한 인간이 되어 버린다. 하는 일이라곤 퇴근하고 집에 와서 오디오 앞에 앉아 모던 재즈를 듣는 것뿐이다. 뉴스에서 아무리 세상 돌아가는 것을 이야기하고 비분 강개해도그는 재즈 레코드만 열심히 모을 뿐이다. 물론 그 속내야 어찌 알 수 있겠냐만은 일본의 재즈붐에 많은 지식인들이 동참한덴 현실에 대한 실망내지는 자신을 엄습한 무력감이적잖이 작용했을 듯 싶다. 꼭 이런 얘기가 아니더라도 일본을 저주하고 어떻게든 일본을 떠나려 했던 많은 작가들이 재즈 혹은 로큰롤에 탐닉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가는 이미 학창시절에 '피터 캣' 이란 재즈 카페를 운영했다고하며 , 그 외 '베이' 나 '메그' 와 같은 일급 재즈 카페를 경영하는 상당수 사람들이 작가 빰치는 뛰어난 문장 수준에다 학력 또한 높다. 그렇게 볼 때 어떤 사람은 작가가 됐고 어떤 사람은 재즈 카페의 주인이 되었을 뿐 본질적인 면에선 비슷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내 주위에도 그런 인물이 있다. S라는 학교 후배가 있는데 , 느역시 데모가 치열했던 80년대 중반을 온몸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사회에 나와서는 적응을 하지 못해 이만 저만 마음 고생을 한 것이아니었다. 그런데 최근에 만나서는 좀 놀랐다. 말 그대로 쿨 가이(Cool Guy)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로지 관심이라고는 재즈 읍반뿐그 외의 이에기는 화젯거리도 봇 되었다. 하긴 그 친구의 직업이 재즈 레코드를 셀렉팅해다가 수입하는 쪽이어서 직업과도 연관이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관심이 더 큰것 같았다. "너도 참 재미있다. 매일 재즈 레퍼토리를 연구하고 , 밖에 나오면재즈 음반을 사고 , 그것도 모자라 사람을 만나면 재즈 얘기만 해대니... 나보다 더 심한데 ?"과장 같지만 사실이다.
재즈 레코드 켈렉터와 재즈 카페 주인
또 이런 분도 있다. 영화쪽 일을 하시는 분으로 공부도 많이 했도 영화뿐 아니라 각종 분야에 대한 지긱도 해박하다. 나로서는 늘 만나면 한자라도 더 주워들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런데 어느날 그분이 느닷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뭐 좀 생각한게 있는데... 재즈 카페를 차려 볼까 하고 말이야" "영화 일은 어떻게 하구요?"놀란 내가 되묻자 드는 다음과 가팅 말했다. "난 사람니 좋아.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 또 같이 있으면 좋잖아." "그런 처음부터 크게 하실 생각 마시고 조그맣게 시작하세요"이렇게밖에 할 말이 없었다. 물론 그분도 재즈를 좋아한다. 나보다도 먼저 재즈를 들었고 내가 정신없이 CD를 사 모을 무렵 이미 LP로 중요한 레퍼토리는 다 섭렵한 후 였다. 하긴 재즈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재즈까페를 차릴 사람은 없을 테니 사실 그 동안 내색만 안 했지 재즈에대한 애정은 내 상상 이상이었던 셈이다. 나는 서서히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대체 재즈가 뭐길래 이렇게까지...?
하긴 히틀러 시절 많은 독일의 지성들이 빠졌던 음악은 왈츠나 발라드 같은 클래식 소품이 아니라 재즈였다고 한다. 어떻게 하든 미국에서 흘러나오는 SP판을 구해 킹 올리버니 팻츠 왈러니 하는 초기 명인들의 기교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재즈를 듣는다는 행위에 관해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사실 대단한 사건은 아니었지만 소소한 사건이랄 수도 없었다. 이야기를 풀어보면 이렇다. 최근 잘 아는 재즈 동호인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탄노이에서 나온 웨스트 민스터란 큰 스피커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과 매칭시킬 앰프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일본의 선 오디오에서 나온 300B라는 진공관을 이용한 앰프를 구했다. 출력이라야 고작 10와트도 안 되는 앰프였지만 음색에 반해 구입하려는 마니아들이 꽤 된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모니터를 해보닌 클래식, 특히 관현악 내지는 대편성에 있어서는 도무지 힘을 못 쓰는 것이었다. 웅장하게 엄습해 와야 할 부분에 이르러선 별볼일 없는 소리로 마치 B급 할리우드 영화의 사운드 트랙 기분이나 나는 정도였다. 고생고생해서 장만한 오디오에 대해 이렇고 저렇고 험담을 하기도, 그렇다고 억지 탄성을 지르기도 뭐 했다. 그러다 재즈 음반을 건 것이 역정의 계기가 되었다.
풍요로운 혼의 질감, 나긋긋 퉁겨지는 베이스, 낭항한 피아노 소리, 요염하게 들리는 여성 보컬의 섬세한 목소리.... 언제 그랬나는 듯 시스템이 너무나 포근하게 재즈를 연주하는 것이었다. 글쎄, 과장을 한다면 음 하나하나가 가슴을 쥐어뜯고 어우르는 느낌이었다. 두사람은 그 음에 매료되어 술 한잔하지 않고도 흠뻑 취한 기분이 되었다. 내게는 사건이었다. 재즈가 왜 좋으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재즈만이 줄 수 있는 쾌락 때문이다라고 말 할수 있다. 재즈가 재즈다울 수 있을 때 재즈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구체적인 분석이나 해명은 필요없다. <다운 비트>지 1960년 12월 8일자 돈 넬슨의 대담 중에서 빌 에반스의 말로 이 장을 끝내면서 결론을 대신해 보겠다. “재즈와 선 철학은 비슷합니다. 이 둘은 경험으로만 알 수 있지 말로써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말이란 이성의 아이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설명할 수 있는 데엔 한계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즈를 지성의 잣대로 분석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재즈란 필링이기 때문입니다....”
제 2장 재즈를 좋아하게 된 내 나름의 사연
재즈 카페의 유행에 부쳐서
요즘 재즈 동호회가 많이 결성되고 있다. 그중 하나인 신촌에 있는 ‘스테레오 파일’이란 라이브 클럽은 일이라고 해야 한달에 한번 정도 모여서 공연을 보는 것이요, 이 활동을 시작으로 총무하든가 서기등 몇몇 임원진이 회동을 갖는 것이 고작인데 이런 수동적인 활동을 통해 몇가지 느끼는 점이 있다. 보통 재즈를 듣기 위해 공연장을 찾는 경우도 있도 카페에서 라이브로 듣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재즈의 붐에 편승해 나타난 이런 현상들은 그리 긍정적인 시각으로만 몰 수는 없다. 사실 80년댜애도 자즈 카페라는 형태는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재즈 음반 몇장에 보잘것없는 오디오로 구동하는 식이었고 인테리어도 어두컴컴하고 게다가 매캐한 냄새까지 나서 데이트 장소나 음악 감상의 공간으로 적합치가 못했다. 필자의 경우에도 친구들을 몇번 데리고 갔지만 커피나 한잔 마시고 나오기 바빴다.
한데 90년대에 들어와 재즈라는 아이템이 젊은 층에 꽤 신선하게 어필되면서 사태가 달라졌다. 강남을 중심으로 실내장식에도 신경을 쓰고 선곡이 잘 된 음악을 틀어주는 카페가 생겨났고 그중에는 전문적인 라이브 하우스를 지향하는 곳도 제법 생겨났다. 게다가 텔레비전의 미니 시리즈다 라디오의 특집 프로다 심지어 재즈를 주제로 한 CF까지 만들어 삼품화시키고 있는 판국이니 자현히 재즈 카페로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게 된 것이다. “대체 재즈란 어떤 음악이야?” “요즘 재즈를 모르면 신세대가 아니라면서?” “재즈카페를 해야 영업이 좀 된다면서요?”
최근 재즈 카페라는 타이틀을 단 곳을 몇 군데 가본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 수준 미달이었다. 선곡된 음악도 그렇고 주인의 열의도 그렇고대충 유행에 휩쓸려 오픈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이런 곳도 있었다. 거나하게 취해 아가씨를 옆에 끼고 한바탕 웃음을 뿌리는 모습이 룸 싸롱을 연상시키는 곳인데도 타이틀 만은 재즈 카페였다. 재미있는 것은 라이브로 재즈를 연주하는 밴드도 있었다.
그런데 재즈 카페에 웬 호스티스? 사실이다. 아마 전세계에 이런 재즈 카페는 유일무이 할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필자가 속해 있는 재즈 클럽 동호인 대부분이 호기심 반 열의 반으로 회원 등록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임을 몇번 가지고 나면 거의 떨어져 나가고 임원을 맡은 사람들까지 한달에 한번 코빼기를 내밀까 말까 할 정도였다. 재즈 카페라고 자칭하는 곳은 많이 생겼지만 재즈 동호인들의 교육이나 소양을 함양하기 위한 장소는 몇이나 될까? 또 재즈에 관심이 있다고들 하면서 과연 라이브를 보거나 레코드를 사는데 돈을 투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라이브 음향과 레코딩 음향
이런 혼란스러운 와중에 몇몇 열성 팬들의 등장은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필자는 바로 이들에게서 깊은 감덩을 받았다. 또 이일을 기회로 재즈 연주가들과도 친하게되었고 또 실제적인 부분을 많이 배울 수가 있었다. 이래저래 좋은 경험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면서 얻은 가장 큰 성과는 아무래도 생생하게 재현된 라이브 음과 오디오로 재생하는 CD 음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CD는 스튜디오에서 중립성을 목적으로 녹음된 것이 수록된다. 여기서 중립성이란 아무런 색채를 가하지 않고 악기 그 자체의 순수한 음만을 끄집어내려는 데에 치중한다는 것이다. 원론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녹음 기술이 발달하고 스튜디오 기재가 놀랄 만큼 발전하면서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실력이 뛰어난 녹음기사라면 사운드를 얼마든지 마음대로 뒤바꿀 수 있게 된 것이다.
록 음악에서 사운드 혁명을 일으킨 최초의 앨범은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y Heart Club Band>이다. 이 앨번을 녹음하면서 4트랙을 처음 실험했고 그 결과 여러 개의 다른 녹음을 한데 뭍쳐서 전혀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어 내는 기법을 창안하게 되었다. 이앨범을 녹음하기 위해 꼬박 6개월을 스튜디어에 바친 서도 대단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이들이 비치 보이스의 싱글 <Good Vibrations>이란 곡에 자극을 받았다는 데 있다. 이 노래는 무려 백여번 이상의 오버 더빙을 거친 가장 긴 세월을 투자한 싱글이었다. 이 컨셉을 비틀즈는 하나의 미학으로 발전시킨 셈이다. 이렇게 해서 스튜디오의 음향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특히 핑크 플로이드 같은 그룹은 개의 울부짖음, 어린아이의 투정, 비행기의 공습, 시계바늘 돌아가는 소리 등 일사생활의 다양한 소음을 숱한 오버더빙을 거친 사운드에 맞물려 멋진 음행을 창조해 냈다. 어떤 경우엔 일정하게 녹음한 폭발음을 거꾸로 돌려 새롭게 편집하으로써 묘한 긴박감을 자아내는 사운드를 개발할 정도였다.
그러면 재즈 쪽은 어떤가? 사실 5,60년대를 주름잡은 루디 밴 겔더 사운드는 다분히 현장음과는 좀 거리가 있는 사운드라 할 수 있다. 그의 고역과 저역은 지나치게 강조되었으며 이퀄라이저도 상당히 조정된 음향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점 때문에 필링이 진하고 깊이 있는 음색의 동부 재즈가 나왔던 것이다. 반면 서부쪽 사운드를 대표하는 레스터 쾨닉은 컨템포러리 레이블을 유지하면서 철저하게 자연적인 음을 재현하는데 주력했다. 그의 녹음을 들어보면 그 어느 부분에도 왜곡의 흔적이 없다. 적당한 저역에 고역은 부드럽다. 무엇보다도 꽉 찬 중역의 밀도감니 다분히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전달해 주고 있다. 바로 이 사운드가 ‘스테레오 파일’에서 하이브를 할 때 듣던 사운드와 통한다. 이 점을 최근에 깨달은 것이다. 사실 이 카페에서 쓰는 음향 기기는 보잘것 없다. 피아노에 마이크를 설치하고 더블 베이스와 일렉트릭 기타의 재생을 위해 조그마한 앰프를 배치한 것이 전부다. 시끌시끌한 공연에서 드럼 세트의 북 하나하나에 마이크를 들이댄 것과는 거리가 있다. 이런 시스템에서 재생되는 음은 철저하게 현장음, 자연음에 가깝다. 그래서 처음 재즈를 접하는 사람도 별 무리 없이 음의 에너지와 실재감을 느끼게 된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음악은 오랫동안 들어도 귀가 아프거나 사운등에 물리는 일이없다. 그어떤 고급오디오에서 느끼는 만족감보다 훨씬 충실한 감동이 온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요즘에 와서는 레코드 가게를 들르는 일이 좀 뜸해졌도 또 음반을 구입하는 일도 꽤 줄어 들었다.
“나는 귀족이야 저런 밴들르 매일 저녁 실연으로 감상할 수 있으니 말야.”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러니 베토멘 이나 모차르트 등을 매일 저녁 살롱으로 초대해 연회를 베풀었던 귀족이란 족속들은 얼마나 축복받은 존들이며 20년대 ‘커튼 클럽’을 드나들며 듀크 엘링턴 악단의 연주를 감상했던 상류층 인사들은 또 얼마나 대단한 즐거움을 만끽했을까? 초근 10년간 필자는 좋은 오디오, 좋은 소리를 찾아 돈도 많이 쓰고 또 실망과 희망을 교차하며 지내왔다. 그런데 이 소리라는 것이 아무리 시간과 돈을 들이고 다듬어도 좋은 악단의 실연하나에 미치지 못하니 너무나 허무한 것이다.
머리 속에 내재한 재즈 음악
언젠가 신문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 대체 무슨 연유로 재즈에 빠지게 되었습니까? 다른 음악도 많은데 굳이 재즈를 고집하는 이유라도있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 질문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결과 내가 재즈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새삼 되뇌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그 짧은 순간 뇌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영화로 치면 갑자기 화면 흑백으로 바뀌면서 과거의 어는 시점으로 빠르게 플래시 백하는 것과 마찬가지 였다. 그러고 펼쳐지는 하나의 정경은 오랫동안 내 잠재의식에 내재해온 하나의 전형이었다.
내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는 오류동이었다. 오류동은 60년대 영등포 변두리의 슬라브 지붕에 블록으로 ㅈ은 허름한 집들 뿐인 동네였다. 사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그다지 재미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동네는 늘 조용했고 차도 별로 없었으며 시장에 가도 물건조차 많지 않았다.(그에 비하면 요즘의 서울은 얼마나 시끄럽고 복잡한가). 남들보다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뭔가 새롭고 흥미로운 것이 있어야만 신이 났다. 지금도 늘상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고 있으니 어찌할 수 없는 천성인가 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몰드항 만 한 대상이 딱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여느 아이들 처럼 딱지치기를 하거나 뜀박질하며 노는 것에도 흥미가 없었던 나는 결국 외톨박이에 몽상가가 되었다.
이때 유일하게 나를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텔레비젼을 통해 알게 된 영화였다. 한 동네를 통틀어 몇대 없었을 정도로 고가였던 텔레비젼을 무리를 하면서까지 구입하게 된 것은 부친이 지독한 영화광이었기 때문이다. 그 피를 고스란히 전수받은 셈이다. <제니의 초상>에 나왔던 제니퍼 존스, <애수>의 비비안 리, <젊은이의 양지>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영화속에서 나는 사랑과 이상의 여인상을 배웠고 무엇보다도 그런 흑백 필름과 같이 묻혀서 흐르던 재즈를 알게되었다. 그러나 이런 기억도 워낙 소프트웨어가 부족했던 시절을 거쳤던 만큼 현실과 쉽게 연결되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 고교시적에 봤던 <나는 살고 싶다>의 배경음악이라든가 대학에 갓 들어와 열광하며 봤던 누벨바그의 필름들, 또 <사형대의 엘리베이트>, <브레드리스> 등의 명작들에 흐르던 음악이 그저 재즈일 뿐이다하는 데에서 그쳤던 것이다.
재즈를 좋아한다는 것의 의미
아마 이쯤에서 시작되는 것이 빽판의 행렬일 것이다. 사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80년대만 해도 이런 해적판의 천국이었다. 물론 그런 판들 사이에 간간히 재즈도 섞여 나와 상당히 싼 가격으로 접할 수 있었다. 요즘 중국에서 이런 해적판 문화가 성행한다고 하는데 남의 일같지가 않다. 결국 내 모든 일들, 이를테면 시나리오 작가, 추리소설 작가, 재즈 평론가, 록 평론가, 영화 평론가 등 일련의 직책들은 따지고 보면 여화를 지독히도 좋아한 데에서 시작한 셈이다. 영화를 좋아하다 보니 그 관련 분야를 공부하게 되었고 결국 사횡에 나와서도 시나리오를 쓴다거나 그 주변의 일을 하게 되었다.
사실 전문적으로 재즈에 대한 글을 쓴 것은 약 8,9년에 불과하다. 우연히 서울음반에 다니던 학교 선배를 알게되어 레코드 속지를 쓰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물론 처음 시작한 일이라 당ㅅ만 해도 어설픈 감상문 위주의 글을 썼던 것 같다. 리 리트너, 빌리 콥햄, 데이브 그루신, 다이안 슈어... 대부분 GRP 계열의 스타들이었고 그러면서도 정작 돈을 주고 샀던 판들은 듀크 엘링텀, 존 콜트레인, 마일즈 데이비스 등이었다.
음악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오디오에도 관심으 가지게 되었고 또 평상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런저런 분야까지 손을 댄 결과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경황없이 보냈지만 지금 잡을 수 있는 한가지 맥은 어쨌던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될 수밖에 없었다은 것이다. 인생은 때론 일정한 방향으로 줄기차게 흐르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재즈에 관한 책을 두권이나 내서인지 아무리 주장해도 본업인 작가 보다는 재즈 평론가로 더 알려지게 되었다. 나는 가끔 내 자신에게 자문 해 보곤 한다.
“과연 나는 재즈를 얼마나 사랑하는 것일까?” 혹시 재즈가 담긴 레코드난 CD를 사 모으는 쇼핑 행위에 더 끄렸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넓은 공간에 근사한 오디오를 갖다 놓고 한바탕 크게 울려보고 싶은 막연한 욕망으로 달려든 것은 안ㄹ까? 만약 어릴 적부터 미국 문화에 물들어 결국 재즈라는 병에 걸려 버렸다면? 이것도 적것도 아니라면 나는 그저 컬렉터 기질 때문에 재즈 음반을 모아온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결국엔 그저 평을 써서 얻게 되는 약간의 수입이 탐나서 습관적으로 글쓰기를 하는 것은 아닐까?
바빠진다는 것은 괴롭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을 부정해도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몸과 마음이 가뿐한 상태에서 성능 좋은 오디오를 세트해 놓고 마음을 울리는 재즈 음을 듣는다는 것은 ㅂ록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이다. 어쩌면 내가 재즈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ㅇ런 막연한 유토피아응 꿈꾸기 때문은 아닐까?
이런 유토피아를 꿈꾸던 나는 어껀 연주가와의 만남에서 얼굴이 화끈거릴 만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든사한 오디오 세트도 없었고 음반도 많이 소장하고 있지도 않았다. 또 돈이 많아서 취미로 연주를 하는 처지도 아니었다. 그들은 빌과 벤이란 친그들이다. 그들은 드럼과 베이스를 담당했는데 한국에서 연주를 하면서 근근히 용돈을 벌고 있었다. 이들의 하루 일과는 저녁 연주 외엔 하루 종일 잠괴 식사, 그리고 약간의 활동 시간이 전부 였다. 대낮에 그들을 보면 무료함과 삭막함이 가득하다. 하지만 일단 악기를 만지고 연주에 몰두하면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표정이 되는 것이다. 아마도 그릉레게 하루하루의 모든 의미는 악기를 연주하는 순간에 맞춰져 있고 그 나머지 것들은 잊거나 덮어 두거나 아니면 무지의 상태로 남겨두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이런 것이다. “뭘하나 제대로 하려면 절대로 이것저것 벌려서 바빠지지 망자. 일단 산만해지면 아무것도 건질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바쁘다. 재즈 외에도 이것저것 관심도 많고 주의도 산만하다. 바쁘다는 상태를 넘어서 진정으로 재즈를 내것으로 만들려면 아직도 깨달아야 할 도가 많은 셈이다. 결국 이것도 저것도 도와의 싸움인 것이다.
제 3장 재즈와 도
재즈의 도를 닦는다.
10대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참 록 음악에 열광하던 무렵으로 뭔가 새롭고 흥미로운 게 있으면 정신없이 몰입할 때였다. 70년대 말, 런던을 중심으로 펑크 록이 휩쓸 때였지만 우리들에겐 아직도 하드록의 전성기 였다. 레드 제플린, 딥 퍼플, 에어로스미스, 유라이어 힙, 나자레스, 블랙 사베스.... 한데 가끔 논쟁이 붙기도 한다.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가 세냐 아미면 제프 벡이 세냐 하는 것이다. 세냐의 의미는 모호하지만 여하튼 이 문제를 놓고 한바탕 설전을 벌였던 기억이 난다.
사실 누가 누구보다 낫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스운 것은 없다. 특히 음악에서는 말이다. 재즈 기타만 봐도 그렇다. 각자의 스타일이 워낙 다리기 때문에 A가 B보다 잘 친다는 단순 논리가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속주에는 알 디 메올라, 솔로기타는 조 패스, 퓨전으로 가면 존 맥러플린, 진한 필링을 살린다면 케니 버렐이나 그랜트 그린 등 끝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존 맥러플린이 조 패스보다 세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난센스인 것이다. 하짐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재즈를 들어 보고 또 뮤지션들을 만나면서 느낀것은 재즈가 일종의 도가 아닌가 하는 부분이다. 이렇게 생각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대략 외국의 저면한 뮤지션들을 보면 10세 정도에 악기를 처음 난진 후 삼십줄에 들어서야 좀 인정을 받고40세 전후에 화려하게 만개 한다. 공식이랄수는 없지만 몇몇 천재를 제외하며 대략 비슷하게 맞아 떨어진다. 그러니까 약 20년간은 도를 닦아야 자기 나름의 스타일과 프레이즈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한데 재즈의 도라는 것은 무술과 같아 정도가 있고 사도가 있다. 제대로 갈고 닦으면 누구나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릴 음악을 만들어 내지만 외도를 하면 중심을 잃고 다른 부분으로 빠지고 만다. 이런 뮤지션에 대해선 부가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수와 악사가 이쪽이니까. 그만큼 정도를 밟기가 어렵고 그래서 넓게는 음악이라는 부분을 따지고 들어가면 도를 닦는 마음으로 정진해야 하는 것이다.
비트를 쪼갠다는 것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모차르트가 그랬고 찰리 파커가 그랬던 것처럼 몇몇 천재들은 범인들이 평생 갈고 닦아도 얻기 힘든 선을 단번에 돌파해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대부분의 천재들이 비참한 삶과 고통 속에서 인생을 마친것을 보면 한편으로 신은 인간에게 공평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만한 재능엔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가 보다.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니 비단 재즈뿐아니라 인간이 관여하고 있는 모든 부분이 도와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흔한 요리라도 오랫동은 연구하고 수련한 요리사의 손을 거치면 예술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멋진 음식이 탄생되는 것을 보라. 요즘 NBA를 주름잡고 있는 마이클 조단을 보고 있노라면 움직임 그 자체가 황홀경이다. 한낱 농구선수라고 치부해 버릴 수 없는 어떤 경이가 그 안에 배어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이야기는 너무 막연하고 한심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재즈의 경우를 들어 다세히 설명해 보겠다.
얼마 전에 자주 가는 클럽에서 커크 맥도날드라는 토론토 대학의 재즈학과 교수를 만난 적이 있었다. 교수라고는 하지만 클럽을 돌며 연주도 하는 사람이어서 연주가하는 개념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굉장히 빠른 연주를 선보인 적이 있었다. 정말이지 쉴 새 없이 음이 나와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한데 그 음 하나하나가 또렸하게 들리는 것이 신기햇다. 나중에 그의 숙소에서 여러 사람들과 술을 마실 때 넌지시 그 부분을 물어보왔더니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개 템포를 이야기 할때 비트를 얼마나 쪼개느냐 하는 부분을 말합니다. 보통 재즈의 비트는 4비트이지만 이것을 쪼개고 쪼개다 보면 8비트, 16비트 심지어 32비트까지 나눠지게 되지요. 이렇게 말하면 난해하죠? 좀더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1분에 몇 개의 음을 불어내느냐, 말하자면 비트를 쪼갠만큼 음이 나오게 되니까 32비트까지 가면 약 300개 이상의 음을 나열하게 돕니다. 그야말로 음의 홍수인 셈이죠"
여기서 존 콜트레인의 중기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사 추구했던 'Sheet of Sound'라는 개념은 짧은 시간 내에 얼마나 많은 음을 소화해 내느냐와 관계가 있다. 그는 악보에 표시된 두개의 코드, 다시 말해 A와 C 사이에 놓인 공간에 얼마나 많은 음을 불어 내어 모두 디테일하게 훑어 나가느냐 하는 부분에 몰두했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색소폰이나 베이스의 경우 음 하나가 코드 하나의 구실을 할 수 있다. 피아노나 기타처럼 코드 전체를 짚어줘야 하는 악기일 경우 난감한 부분이 바로 이부분이다. 도무지 컴핑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커크에게 그날 밤 그가 나열했던 음은 어느 정도냐고 물어봤다. 약 336개라는 거시 그의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음을 분 사람이 또 있습니까?" "있지요. 찰리 파커, 소니 롤린스, 존 콜트레인, 소니 소티트, 캐논 볼 애덜리 등등...." 우문이 이어졌다. "피아노 같은 악기에서도 이런 나열이 가능합니까?" "가능하죠. 기타, 피아노, 비브라폰....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역사적 속주 뮤지션들이 생각났다. 오스카 피터슨, 아트 테이텀, 버드 파웰, 밀트 잭슨 등등....
역시 재즈는 필링
이 부분을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를 짐작할 것이다. 이 정도의 테크닉을 연마하려면 대체 얼마만큼 수련을 쌓아야 하는지.... 이래도 재즈가 도가 아니란 말인가? 하지만 단순히 테크닉적인 면만 이야기해서는 절대 재즈와 도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다. 커크는 정작 중요한 대목은 토픽을 이야기 할때 언급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분다고 재즈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필링이지요." 하긴 그렇다. 스탄 게츠나 쳇 베이커 혹은 그랜트 그린이 초 일기 식의 테크닉 향연을 보여준 적이 있었는가? 하지만 그들의 음악은 훌륭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재즈를 이해하고 재즈적인 표현을 능숙하게 해내느냐인 것이다. 이래서 재즈가 어려운 것이다.
참고로 커크라는 아티스트를 옆에서 쭉 지켜본 소감은 나로서는 흔히 말하는 A급 아티스트를 곁에서 지켜보는 일이 흔치 않아서 그런지 그의 연주 실력뿐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 또 예술에 대한 이해 등에서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 한 번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 재즈에 대가는 많습니다. 그런 연주인들의 음악을 들으 때면 상대적으로 초라해지고, 과연 재즈에서 내가 설 자리가 아직도 남아있을까 고민이되지 않습니까?"
이에 대한 커크의 답변은 교훈적이다. " 그 어떤 천재라 하더라도 음악 그 자체보다 더 우월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음악이란 영역 속에서 각각의 개인이 존재할 뿐이지요. 하지만 흔히 말하는 거장들이 위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의 개성(individuality) 때문입니다. 결코 음악 그 자체보다도 우월한 존재라서 천재로 대접받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개성이란 것을 따져보면 가자 살아오면서 느낀 경험, 감정, 환경 등이 어우러져 그만의 개성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도 똑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환경과 경험이 있습니다. 그 점이 그들과 우리가 다른 점이고 또 우리가 위대해질 수 있는 바탕인 셈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몇 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그중 몇몇은 정말로 뛰어납니다. 찰리 파커, 아트 테이텀, 그리고 버드 파웰은 확실히 다른 천재들을 뛰어넘은 뭔가 또 다른 존재입니다.”
만일 그의 말이 인상적이라면 이 세사람의 음반을 집중적으로 들어 보길 바란다. 그리고 커크란 사람은 혼 주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커다란 손아귀의 악력은 엄청나서 한번 악수를 하면 손이 얼얼할 정도였다. 게다가 끊임없는 줄담배에 음주. 하지만 며칠 밤을 새워도 끄덕없는 체력 덕분에 낮에는 세미나, 저녁에는 콘서트를 가져도 지치는 법이 없어 노는 데도 빠지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와 이태리인의 피가 반반씩 섞였다는 그는 스카치의 정력에 라틴의 놀이문화가 절묘하게 믹스된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는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고, 자신은 서른 여섯, 그리고 이제 18개월 된 딸이 하나 있었다. 11년 간의 동거생활치고는 좀 의아해서 물어봤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이를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을 만큼 우리는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아내가 어느덧 마흔을 바라보더군요. 그래서 아이를 한명 낳았습니다.”
캐나다에서조차 재즈맨은 가난한 모양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자켓 디자인이며 안에 삽입된 연필화 모두 그의 아내가 디자인하고 또 직접 그린 것이란다. 상당한 수준임에도 그 쪽에서는 아마추어 대접인 모양이다. 그래서 넌지시 캐나다에서 공부했다는 한국 교포에게 그쪽 재즈 사정을 물어봤다. “아마 토론토에서 뉴욕의 클럽에 자유롭게 출연할 수 있고 또 음반을 레코딩할 수 있는 세계적인 수준의 사람만 따지면... 베이스주자만 꼽아도 서른 명은 족히 될 겁니다.” 갑자기 으쓱해졌다. 토론토가 이럴진대 만일 무대가 뉴욕이라면...!”
재즈는 어렵기만 하고 쉽기도 하다
굳이 국내의 현실을 그 쪽의 수준에 견주어 비교하고 싶지는 않다. 얼핏 감은 잡았으리라고 믿고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려 보겠다. 처음 재즈를 듣게 되면 대개는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혹자는 꽤 기분이 편해진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계속 듣다보면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재즈를 들으려는 사람에게 재즈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해 주면 또 이런 반응을 보인다. “그럼 재즈는 아주 어려운 음악이네요? 골치 아파서 어떻게 재즈를 듣죠? 난 아주 편한 음악인 줄 알고 관심을 가졌는데...” 이럴 땐 난감해진다. 어설프게 다독거릴 수밖에 없다. 이왕 약장사로 나섰으면 한 명이라도 더 사게 만드는 게 내 일이 아닌가 ? “꼭 그렇지는 않아요. 재즈는 잘 모르는 상태에서 감상해도 괜찮으니까요. 일단 기분이 좋아지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과연 이 이야기가 맞는 것일까? 나도 확신할 수는 없다. 심지어 이런 반응을 보인 사람도 있었다. “그럼 재즈를 연주하려면 테크닉이 많이 필요하나요?” 그 사람은 술집이나 클럽에서 연주하는 음악이라서 그런지 재즈를 저급 록 밴드 정도로 알고 있었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정말로 난감하다. 이런 저런 경우도 있고 한번은 동호회 모임 때 재미있는 시간을 만든 적이 있었다. 밴드를 무대에 두고 연주인 각각에게 회원들이 재즈의 리듬이며 멜로디 라인 등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해 봤다. 아주 구체적으로 악기를 악기를 통해 실례를 보여줘 평소 가지고 있던 의문점이 해소될 수 있었다. 만일 이런 기획이 방송 매체를 탄다면 좀더 많은 시청자를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사실 재즈를 듣는다는 사람 중에 록, 레게, 재즈, 블루스, 삼바등 여러 리듬의 차이를 자세히 알고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또 재즈로 들어가도 스윙, 비밥, 쿨 재즈, 하드 밥, 퓨전, 프리 등의 차이를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 역시 드물다. 앞으로 재즈에 관한 프로그램이나 책자 등이 더 많아질 전망인데 개인적으로 보면 우선 기초적인 부분부터 다뤄졌으면 한다. 만일 직접 이런 차이를 눈앞에서 실연해 보인다면 그만한 공부는 없을 것이다. 그때 모임에 참석했던 한 회원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사실 저는 이 모임에 온 사람 중에 재즈 음반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으며 또 가장 오랫동안 재즈를 들어온 사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음악 생활을 통틀어서 이 시간처럼 재즈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혹 방송 관계자나 그 밖의 전문인들이 이 부분을 읽는다면 프로그램에 반영했으면 좋겠다.
진정한 재즈 감상이란 무엇일까?
지독한 음악광으로 알려진 K씨가 폐결핵에 걸린 일은 나에게 큰 사건 중의 하나였다. 이 일은 여러모로 우리 같은 폐쇄증 환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사실 음악을 듣는다는 행위는 우리의 일반적인 삶의 양태에 비춰볼 때 상당히 독특한 경험에 속한다. 옛날과 달라서 요즘엔 놀 것도 많고 또 재미있는 일도 많다. 그런 것 다 물리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스피커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가 그닥 낭만적이거나 근사해 보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건강까지 해쳐 가며 음약에 몰입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참으로 오랜 질문이지만 K씨의 답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여지를 주고 있다. “내 경우 어릴 적부터 소리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다른 아이들이 공을 차고 놀거나 딱지치기할 때 나는 전파사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를 듣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으니까요.”
만일 그렇다면 사람마다 재능이 달라 음악광의 경우 음악을 좋아하게 될 만한 필연적인 기질을 타고났단 말인가? 검증할 길이 없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런 유의 특성은 개인마다 조금씩 다르지 않나 싶다. 들은 이야기지만 가끔 음악 때문에 몸을 망친 경우를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은 카페를 경영하다가 록 음악에 빠져 매일 대마초를 피우다가 결국 정신병원에 끌려갔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음악이 좋아 음반 가게를 열었다가 돈도 잃고 아끼던 음악도 잃었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음악이 너무 좋아 습관적으로 CD를 훔치다가 적발되어 파출소에 끌려간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런저런 꼴이 보기 싫어 그 동안 모아 놓은 음반을 모두 팔아치운 후 등산으로 소일하는 이도 있으니 뭐라고 할 말이 없다. 결국 음악이란 잘 쓰면 보약이요 잘못 쓰면 독약이란 말 밖에 뭐가 있겠는가? 그저 중용만이 해답인 모양이다.
제 4 장 과연 재즈는 자유인가 ?
자유의 음악 재즈라...
재즈의 매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는 습관적으로 “재즈는 자유의 음악이기 때문에 좋다.”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과연 그 말이 맞는 것인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물론 다른 장르의 음악에 비해 재즈는 확실히 자유로운 형식을 갖고 있다. 여기서 잠깐 찰리 파커가 클래식에 대해 평한 부분 중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 소개해 보겠다. “내게 있어서 클래식은 무슨 독보회 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악보를 앞에 두고 그 안에 명시된 대로 연주하는 것이 고작인 것이죠. 아무도 일어나서 즉흥적인 솔로를 연주하지 않으니까요.” 물론 클래식이 전혀 자유가 없는 음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재즈에 비해 다소 엄격한 룰이 적용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록 음악도 추구하는 이상이나 세계관은 때론 과격하지만 처음 작곡했을 때의 가사라든가 기타 리프 등은 아무리 라이브를 계속해도 거의 변하지 않는다. 물론 장시간에 걸쳐 솔로를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고 대개는 처음 녹음된 상태의 퀄리티와 형식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악보로부터 자유로운 재즈의 경우 당연히 이런 여타 음악에 비해 자율성이 많다고 하겠다. 그래서 재즈는 자유의 음악이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요즘 와서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다시 말해 어떤 의미에서 재즈는 일종의 정격음악이 아닌가? 그렇다면 자유와는 거리가 먼 음악인 셈이다. 이렇게 생각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사실 많은 돈을 주고 음반을 사고 또 이것저것 들으면서 재즈를 즐긴 사람들이라면 가끔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꼭 존 콜트레인이 참여한 음반을 모두 모아야 콜트레인을 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거 생돈 깨서 산 판이 왜 이래? 다른 음반하고 비슷하잖아.” “워 이런 것말고 다른 것은 없을까? 재즈 하면 맨날 그게 그것처럼 느껴진단 말야.” 사실 모던 재즈 쪽 음반이 압도적으로 많은 필자의 경우 가끔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같은 조류의 A아티스트와 B아티스트의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다라든가 혹은 서로 명기된 리더의 이름만 달랐지 참여한 멤버가 비슷비슷해 서로 다른 음반이 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경우, 또 좋아하는 아티스트라서 부지런히 음반을 샀더니 결국 대동소이하다거나 암튼 기대보다 못한 경우가 많았다.
아니, 이런 지엽적인 사실보다는 보다 심도 깊은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다. 어쩌면 테너 색소폰, 트럼펫 등이 전면에 나서고 피아노, 드럼, 베이스가 리듬을 맡는 일반적인 형태의 모던 재즈가 얼핏 보면 일정한 룰에 의해 엄격하게 진행되는 일종의 정격 음악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난센스일 수도 있다.그렇다면 이런 최소한의 룰도 없는 음악을 찾기 위해 다른 쪽으로 가는 수밖에. 이를테면 악보 이전의 단계에 있는 음악인 민속음악이나 남미, 아프리카 쪽의 음악, 혹은 중세 이전의 음악들... 여하튼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모던 재즈에 치중된 명반 컬렉션
모던 재즈 쪽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아마 전세게 재즈 팬들 중에 70퍼센트 이상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인지 대개 컬렉션도 모던 재즈 시대에 집중되어 있고 또 그 시대를 빛낸 거장들은 지금 들어봐도 어떤 신화적인 품격이랄까 멋진 모양새가 느껴진다. 일례로 그때의 아티스트들을 찍은 흑백 사진집을 볼 때마다 재즈 음악이 들려오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여지없이 모던 재즈 시대의 음반을 구하는 모양이다. 혹자는 모던 재즈 시대에 발매된 음반을 모두 모으면 20만 장은 족히 될 거라고 말한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당시 대단한 분량이 녹음된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가끔 스윙 저널을 보면 컬렉터의 아이템이라 하여 휘귀한 음반을 소개하곤 한다. 물론 처음 보는 앨범이 대부분이다. 이런 묻혀진 명작을 찾아내는 데 전심전력하는 그들이라 그쪽 레코드 가게에서 거래되는 음반들을 보면 미국이나 영국의 역사책에 등장하지도 않는 명인들이 많이 있다. 물론 명반이라고 객관적으로 입증된 음반만 구하고 말겠다라는 다짐으로 컬렉션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부지런히 책을 보고 저널을 읽고 하면서 리스트를 작성하지만 재즈 음반이 주는 매력이랄까 분위기는 선뜻 거부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최근에 웨스트 코스트 재즈와 블루 노트라는 책을 구입한 적이 있다. 전자는 서해안 재즈 뮤지션들의 음반을 모아서 컬러 화보집으로 만든 것이고 후자는 역시 같은 포맷으로 블루 노트 사의 음반을 모은 것이다. 물론 수많은 음반 중에 디자인이 잘된 것만 가려 모은 탓도 있지만 이런 책을 펼 때마다 구입하고 싶은 욕구가 이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실제로 어떤 매니아는 자켓 디자인이 좋은 음반만 구한다고 하니 디자인이 주는 매력이 음악의 퀄리티에 상당 부분 기여하는 모양이다.
언젠가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DJ가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좋은 재즈 음반을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죠?” 잠시 생각한 끝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선 푸른 빛이 도는 디자인의 자켓을 찾아보세요. 또 제목이 ‘블루’가 들어간 것도 좋고...콜트레인의 Blue Train 이라든지 마일즈의 Kind Of Blue, 티나 브룩스의 True Blue등등 말이죠”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푸른색과 재즈와는 묘한 관계가 있는 것도 같다. 오죽하면 ‘블루노트’란 재즈 레이블과 또 재즈 용어가 있을 정도니깐. 이것과는 무관한 이야기지만 어떤 멀티미디어 회사 사장은 블루를 너무 좋아해 이런 단어가 들어간 카페라면 놓치지 않고 찾는다고 한다. 그뿐이 아니다. 회사의 벽이라든가 가구도 온통 푸른색 일색이고 옷 또한 이런 계통을 즐긴다고 한다. 블루병이 단단히 들었다고나 할까?
그러므로 재즈는 어렵다
재즈는 알면 알수록 어렵다. 한번은 드럼을 배워볼 요량으로 클럽에서 일하는 외국 뮤지션에게 기본 리듬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어색하지만 그의 지도에 따라 대충 손과 발을 맞춰 봤는데 제각기 따로 노는 것이다. 연주중에 삽입되는 솔로는 얼마나 피나는 훈련 끝에 얻어진 것이었을까를 생각하면 새삼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친구는 여전히 배우려는 자세가 보기 좋았다. “아직도 배울 게 많죠.” 하긴 가장 세션을 많이 하고 또 다양한 연주를 하고 있는 케니 베런이란 피아니스트조차 대가를 만나 더 공부를 했으면 한다고 하니 수긍이 가고도 남는다. 그래서인지 그 드러머 역시 재즈가 어려운 음악이라는 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주를 하면 할수록 과거의 명인들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단계에 도달했음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연주뿐만 아니라 감상하기도 만만찮은데 재즈의 본질이랄까 매력에 대해 생각하면 여러 가지 상반된 개념에 시달리게 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재느는 과연 자유의 음악인가, 아미면 지극히 형식적인 음악인가?’ ‘훌륭한 재즈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혹은 ‘재즈 음반을 모으는 데 핵심 키 워드는?’ 하는 식으로 이것저것 생각할 여지가 많은 음악인 것이다. 하긴 이런 부분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이 재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벌릴 여지가 남아 있는 모양이다. 이야기를 다시 원점으로 돌려 과연 재즈가 자유의 음악인가 생각해 보도록 하자. 연주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자유라는 것은 대단한 희생과 노력 끝에 얻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는 재즈 공부를 위해 악보를 샀거나 연주를 해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 그런 경험이 없다면 한번 재즈 악보를 구해다 보길 바란다. 수없이 많은 샤프와 플랫이 그려진 왼쪽 부분과 복잡하게 이어지는 음과 코드의 행진. 바로 그 사이를 비집고 개인적인 솔로가 들어간다. 가히 컴퓨터적인 두뇌와 순간적인 상상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연주 패턴인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을 능수능란하게 연주하기 위해선 연주자 나름으로 피나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 재즈가 자유로운 음악이라고 해서 연주자가 별다른 준비없이 무대 위에 서도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이렇게 어려운 음악인 데다가 전문적인 교육기관이 별로 없다는 점도 우리나라 재즈 발전에 큰 장애물인 것 같다. 왜 이런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하는가 하면 우리나라에서 방송이나 라이브를 통해 종종 만날 수 있는 실력 있는 테너 색소폰 주자가 최근의 경험담을 내게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서 생각해 보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마 이 대목은 독자 여러분의 마음속에 전달되는 바가 클 것 같다.
혓바닥으로 비트를 만든다?
그 색소폰 주자는 군대에서부터 재즈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군악대에서 색소폰을 접하게 되었지만 막상 제대를 하니 마땅히 적을 둘 데가 없었다. 그러던 중 물어 물어 서울의 재즈 뮤지션들을 알게 되었고 꽤 오랜 기간 동안 레슨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한 선배가 색소폰을 불 때 비트감을 살리기 위해서는 2박과 4박에 각각 혀 끝을 마우스피스에 대라는 충고를 해주었다고 한다. 막상 그렇게 해보니 제법 그럴듯하게 비트가 살아났단다. 한데 이런 패턴은 느슨하게 전개되는 스윙 리듬에선 계산에 따라 혓바닥을 조절할 수 있지만 정작 비밥으로 오니까 사정이 달랐다. 대략 8비트 내지는 16비트로 분절되는 비밥에서는 그 짤막짤막하게 나눠지는 거의 찰나에 가까운 박자를 일일이 카운트해서 적절하게 혀 끝을 마우스피스에 대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조그만 템포가 빨라져도 그 셈을 하느라 연주가 엉망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코드도 놓치고 비트도 잊어먹고, 아무튼 전혀 진척이 없는 것이다.
그러던 차에 외국의 유명 연주인을 알게 되어 레슨을 받게 되어 이 부분에 대해 물어봤더니 그만 정색을 하더란다. 어디서 그런 사이비 테크닉을 배웠냐는 투였다. 실은 전혀 혀 끝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단다. 그리고 비트감이라는 것은 손가락으로 피스톤을 누르거나 블로잉을 조절해서 총체적인 필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지 단순한 혓바닥 놀림으론 어림도 없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레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네, 기본적인 스케일은 할 줄 아는가?” 그 질문에 그는 스케일이라면 단순히 도, 레, 미, 파, 솔 등을 내는 것인 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단다. 그러나 그가 말한 스케일은 그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자면 C라는 음 하나에도 여러 가지 스케일이 있다. C 마이너가 있고 C 세븐 프러스가 있으며 그 밖에도 수많은 조합이 있다. 바로 그것을 외워서 능란하게 불 수 있는 것만도 쉽지 않은데 그 교수는 그 기본적인 음을 갖고 여러 개를 조합해서 새롭게 불어 젖히는 것을 물어본 것이었다. 그 순간 너무나 당혹스러웠다고 한다. 여하튼 그렇게 기초적인 스케일 연습을 새롭게 하다 보니 신기하게도 머리 속에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되었다. 아주 기본적인 것이지만 막상 집중적으로 연습하다 보니 새로운 통로가 보인 것이다.
하긴 현존하는 최고의 테너 색소폰 주자 조 헨더슨도 매일 이런 스케일만 한 시간씩 연습을 한다고 한다. 색소폰이 낼 수 있는 모든 음과 가능성을 아는 명인도 이런 기초적인 부분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색소폰 주자는 큰 감명을 받았다. 한데 진짜 레슨은 집에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한 데에서 나왔다. “...비록 두 시간에 불과했지만 내겐 2년을 투자해도 배울까 말까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지금까지 한 것은 막연히 모래로 성을 쌓으려는 형국이었다. 그러니 발전이 없을 수밖에...” 그가 내린 결론은 결국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막상 이런 교습을 일찍부터 받았더라면 지금쯤 얼마나 발전했을까를 생각하니 눈물이 나오더란다.
자유에는 대가가 따른다
다소 장황하게 색소폰 주자의 경우를 이야기했지만 아마 장르는 달라도 이런 경우는 여기저기에서 많이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신문을 봤더니 미국의 목재를 가져와 조립주택을 짓는 것이 유행이라는 기사가 있었다. 그런데 웃지 못할 일은 국내의 목수 중에는 그렇게 치밀하게 못질하는 기술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목수를 데려다 두 배의 값을 지불하고 쓸 수 밖에 없는 현실을 꼬집었다. 하긴 사전에 하중이라든지 디자인이라든지 철저하게 컴퓨터로 프로그래밍되어 지어진 조립주택을 대충 눈어림으로 손을 대려는 것 자체가 난센스이긴 하다. 이런 경우를 보면 앞으로 사회 각 분야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재교육이 필요한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배웠던 공부라는 것이 핵심적인 키 워드를 생략한 채 그저 눈대중으로 얼버무리는 식은 아니었나 비감스런 기분이 든다.
결론적으로 재즈는 자유의 음악이지만 그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다는 점이다. 연주하는 쪽에서는 적절한 방법으로 바르게 연주하는 법을 기초부터 배워야 할 뿐 아니라 그 자신의 혼을 집어 넣을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야 하며, 또 듣는 쪽에서는 막연히 음반에 모든 기대를 걸고 아무런 준비 없이 감상하는 수동적인 패턴에서 벗어나야 한다. 전문서적도 읽고 기초적인 이론서도 보면서 좀더 적극적으로 재즈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즈는 어려운 음악이네요?” 누가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해 주고 싶다. “물론이죠. 저도 아직 공부중인데요.” “그럼 그렇게 재즈를 공부해서 얻어지는 것은 뭐죠?”
난감하지만 이런 답이 떠오른다. “그것은 일단 공부를 한 후에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만일 그때 가서도 적절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재즈를 버려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그 과정을 후회하지는 마십시오. 우리 모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쓸데없는 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그에 비한다면 재즈는 그렇게 공부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감동과 즐거움으로 보답했습니까.
제6부 재즈를 들으며 떠나는 여행
여느 사람과 달리 필자는 몹시 게을리 몸 움직이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한다. 그래서 운동 부족으로 체중이 불어가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반성하는 의미로 운동을 시작하지만 곧 체념하고 만다. 남들이 조깅을 하거나 테니스 치는 시간에 재즈를 듣거나 영화를 보는 것이 더 남는 것처럼 느껴지는 탓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열심히 몸을 단련해도 보통 사람보다 곱절로 사는 것도 아니요. 젊음을 한 20년쯤 연장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닐 바에야 같은 시간을 머리 속이나 꽉꽉 채워 넣는 쪽에 보내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나만의 생각이겠지만.맞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처럼 아무리 정신적인 자극이 충만해도 육체와 밸런스가 맞지 않으면 나같이 게으른 사람은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여행을 떠나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편이 자극도 되고 건강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행이란 것이 참 묘해서 일단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도착하면 처음 며칠은 신이 나고 또 활력이 넘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일정 신간이 지나면 한국에서의 생활 패턴이 그리워진다. 괜히 평소에 생각도 안 나던 사람이 보고 싶고, 자주 가던 레코드 가게가 그립기도 하고 집에 있는 오디오 세트가 눈에 어른거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차츰 자기 성찰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되니 어떤 면에서 여행이란 결국 밖을 통해서 안을 점검하게 되는 해위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다시 현실로 복귀했을 때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앞서 부지런히 전화도 걸고 또 비즈니스에 관계된 사람도 만나고 하면서 몸을 바쁘게 움직이게 된다.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다시 시간이 지나면 여행하면서 둘러본 도시가 그립고 그곳 건물이며 음식이며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결국 우리는 영원한 여행자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좀더 거창하게 말하면 지구(Planet Earth)라는 별에 탑승한 승객이 바로 우리일지도 모른다.
낯선 곳에 가면 귀소 본능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것은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보호 의식이랄까 뭐 그런 감정이 평소보다 심하게 일어난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전세계 요소 요소에 있는 재즈 카페며 라이브 하우스, 레코드 가게들은 낯설음이나 이국 정서를 헤쳐나갈 수 있는 좋은 방패막이다. 이런 기분을 이번 챕터에 담아 봤다. 만일 재즈를 좋아하고 여행을 즐기는 독자가 있다면 이 심정을 쉽게 이해해 주리라 믿고 한번 넋두리를 해봤다. 나는 내가 여행하면서 거쳐 왔던 도시들을 그리고 추억하고 회상하며 쓴 만큼 즐거운 마음으로 썼다.
제1장 유럽의 뒷골목을 거닐며
루프트한자를 타고
처음 낯선 땅을 밟았을 때의 충격과 흥분은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뇌리에 남는다고 한다. 그것은 첫 키스의 감미로움이나 동정을 잃었을 때의 혼란감 따위와 비슷한 다소 흥분스런 체험에 속한다. 요즘이야 초등학생들까지도 방학이 되면 어학 연수를 떠나는 판국에 외국 여행 운운하는 것이 우습게 되어 버렸지만, 음악을 이야기할 때 사랑이나 오디오 혹은 미식 같은 개념과 더불어 떼어 놓을 수 없는 테마임에는 분명하다. 필자의 경우 처음 외국 땅을 밝은 것은 1990년이다. 해외여행이 자율화된 지 2년이 지난 때였고, 20대 말이라는 시점에서 마지막 청춘을 보낼 시기였다. 그리고 그때 난생 처음으로 비행기라는 물건을 타 보았다. 그러니 처음 기내에 올랐을 때의 긴장과 설렘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때 탔던 비행기는 루프트한자라는 독일을 대표하는 항공기였다. 그런 만큼 내부 시설이나 기내식, 그리고 기내의 분위기 등이 상당히 청결했다. 하지만 나보다 머리 하나쯤은 더 큰 여성 승무원들이 장내를 돌아다니면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느끼기도 했다. 아마도 그들을 봄으로써 이제 정말로 외국에 나가는구나 하는 실감이 들었던 것이다. 홍콩을 경유해서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다. <백 투더 퓨처>라는 영화를 기억하시는지? 바로 그런 기분이었다. 시계 바늘이 적어도 3백 년은 뒤로 후퇴했다. 도시를 채운 건물들과 거리의 풍경이 유럽의 모습 그대로였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아주 익숙한 이야기겠지만 처음 외국에 나가 본 필자로서는 이런 유적들 사이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네들의 모양새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일찍 거리로 나선 나는 차츰 마드리드란 도시의 실체랄까 본모습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줄 지어 서 있는 시민들, 모닝 커피와 토스트를 제공하는 바, 거리의 잡지 가판대, 분주하게 영업 준비를 하고 있는 상점들. 그중 한 바에 들어가 카페덜레체와 토스트를 시켜 아침을 먹는 순간 내 인생에서 중요한 한 페이지가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다.
스페인 공장에서
마드리드에서 제일 유명한 광장은 스페인 광장이다. 그곳에 가면 돈키호테의 동상과 함께 작가 세르반테스의 인물상이 함께 진열되어 있다. 아무리 고전 소설의 주인공과 원작자라지만 이렇게 중요한 공간에 세워질 만큼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철학이 스페인 사람들의 각 방면에 파고들어 하나의 인생관으로 고착되었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즉 "인간은 미쳐서 살다가 깨면서 죽는다"라는. 사실 그들은 거의가 미쳐 있는 것 같았다. 루이스 부뉘엘과 살바도르 달리의 후예답게 정상적인 인간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럼 뭐에 미쳐 있었을까? 우습지만 노는 것. 먹는 것 따위에 미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자정이 지나면 시민들이 몰려나와 새벽 서너 시까지 거리를 산책하고 카페에서 술을 마시고 광장에서 춤을 추는 광경은 이 도시에서는 흔한 모습이다. 그래서 밤거리는 대낮보다 밝고 카페며 클럽은 온통 손님으로 북새통을 이룬다. 매일매일이 무슨 페스티벌 같은 분위기인 셈이다.
나는 재즈에 대한 본격적인 즐거움이랄가 흥분을 이곳에서 배운 것도 같다. 도시의 분위기며 사람들의 느낌이 이런 만큼 음악에 대한 정열과 사랑도 이곳은 대단하다. 일례로 왕립 오페라 하우스 건너편에 가면 웅장한 중세 건물에 음악에 관련된 것들만 파는 상점이 하나 있다. 안에 들어가 보면 악기는 물론 악보, 음반, 오디오까지 모두 음악에 관한 것들뿐이다. 게다가 상점 직원들은 일류 레스토랑에나 가야 볼 수 있는 검은 정장에 나비 텍타이를 맨 신사들이다. 서비스 또한 깍듯해서 CD 한 장을 골라도 엄청난 물건을 산 듯이 대접한다. 이곳에서 나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Sketches of Spain>과 <Ballads> 앨범을 구했다. 매장에는 오디오도 비치되어 있어 사자마자 모니터할 수 있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었다. 비록 오디오라고 해봤자 서윈 베가라든가 B&W의 보급형 모델에 국한되어 있지만 매장 분위기에 압도되어 적어도 내 귀에는 탄노이의 웨스트민스터쯤으로 들렸던 것 같다. 음반을 산다는 것은 단순한 쇼핑과는 다르다. 그것은 일종의 문화 행위이며 대리 창작이기도 하다. 따라서 똑같은 음반이라도 사는 곳의 분위기에 따라 그 음악이 다르게 들리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 매장에서 샀던 몇몇 앨범은 늘 머리 속에 마드리드와 정열적인 시민들, 그리고 강렬한 햇살을 연상시키며 알 수 없는 회한에 잠기게도 한다. 스페인 광장 잔디밭에 누워 사 온 CD 커버를 벗기고 라이너 노트를 읽으면서 과연 이 음반에서 어떤 음이 나올까 가슴 설레던 그런 순간들이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재즈 클럽에서 만난 네덜란드 사람
왜 재즈를 듣느냐? 더 나아가 클래식이 되었건 록이 되었건 왜 음악을 듣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커뮤니케이션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하겠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그 음악을 창작한 사람과 음을 통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바흐가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썼을 때나 델로니우스 몽크가 <Straight No Chaser>를 썼을 때나 아무 생각 없이 쓴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빚어낸 음을 통해 듣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 곡을 썼을 때의 감흥, 느낌, 더 나아가 그의 철학 등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음악을 알면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그곳에서 미국 여성을 알게 되었는데, 둘이 나눌 수 있었던 공통 화제는 영화라든가 록 음악 정도였다. 하지잔 이런 대화를 통해 우리는 서로의 생활 환경이라든가 세상에 대한 자세 등을 꼼곰히 읽어낼 수 있었다.(그 여자는 시카고에 살고 있다고 했다. 여러 나라를 여행해서인지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스페인 병에 걸려 매년 휴가 때마다 꼭 스페인에 들른다고 했다. 아마 올 여름에도 스페인에 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드리드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장소는 아무래도 재즈 카페다. 아담한 공간에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가 좀 불편했지만 그 점만 빼면 만족스러웠다. 흑인들이 중심이 되어 벌이는 공연도 볼 만했고 벽에 걸린 조그만 스피커에서 연신 흘러 나오는 빅 밴드 시절의 한가로운 재즈를 트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여기에서 나는 네덜란드 사람을 한 명 알게 되었다. 사실 그는 특징이 없는 인물이다. 키가 엄청나게 크고 얼굴 표정은 변화가 없고 말도 조심스럽게 했으며 마치 석고상처럼 별 다른 미동없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와 나는 우연히 합석하게 되었다. 자리가 다차서 하는 수 없이 둘이 짝이 된 것이다. 그런데 마침 스피커에서 루이 암 스트롱이 흘러 나왔고, 우리는 동시에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그러다 우리는 통성명을 하게 되었다.
그는 네덜란드의 소도시에서 살고 있으며 우연히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단다. 어려서부터 재즈라면 죽고 못 살 정도여서 뉴욕에 체류하며 그곳의 유명 재즈 클럽을 순회하는 것이 그의 꿈이란다. 나도 비슷한 욕구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모던 재즈의 명반들이며 좋아하는 아티스트, 그리고 갖고 있는 오디오 세트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여기서 내가 느낀 것은, 비록 사는 나라는 다르고 인종도 틀리지만 재즈를 좋아하는 마니아들은 다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왠지 행동이 느리고 시대 착오적이고 과묵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고,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따스한 그런 인간성이 느껴진다. 그런 공통점의 발견은 재즈를 통해서 얻은 소중한 체험이 아닐까?(물론 나를 아는 사람이 내게서 이런 분위기를 느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샹젤리제의 버진
“버진에 갑시다!” “버진이라뇨?” “샹젤리제 알아요?” “그곳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 근처에 있어요. 아주 오래된 건물에.” “샹젤리제에 오래 되지 않은 건물이 어디 있습니까?”
공항에서 운전사와 벌인 해프닝이다. 1992년 나는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샹젤리제에 있는 버진 레코드 가게 앞에서 후배와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약속 시간에 늦어 다급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운전사는 이런 나의 상황은 아랑곳없이 아주 태평하게 버진이 대체 뭐하는 곳인지 고개를 갸우둥했던 것이다.사실 나는 외국에 가면 제일 먼저 찾는 곳이 레코드 가게이다. 혹자는 흔하디흔한 곳이 레코드 가게인데 무슨 급한 볼일이 있어서 그런 곳을 찾느냐 하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같은 레퍼토리를 사더라도 가게의 분위기와 느낌에 따라 얼마든지 그 내용물에 대한 나의 느낌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버진에 처음 들렀을 때의 충격을 이야기해 보겠다. 처음 이곳을 방문한 시기는 1990년이었다. 그 당시에는 CD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기였고 음악 마니아라면 LP를 들어야 한다는 기운이 팽배하던 때였다. 그런데 처음 이곳을 찾은 나는 얼어붙을 만큼 놀라고 말았다. 그렇게 갖고 싶었던 음반들이 깨끗이 포장이 된 LP 코너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고 수많은 CD가 커다란 코너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수의 CD를 본 것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이유로 참고로 음악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샹젤리제에 있는 버진은 한번 들러볼 만하다. 고풍스런 건물 전체를 매장으로 쓰고 있고 각 층마다 재즈, 클래식 등 장르에 따라 음반이 진열되어 있다. 그리고 음향기기 코너와 분위기 좋은 카페테리아가 있어 꼭 음반을 구하지 않더라도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기엔 더없이 좋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식의 대규모 매장이 속속 문을 열고 있다. 그러나 전체 분위기를 잡아 가는 데에는 좀 모자란 느낌이 든다. 어떤 매장에는 화장실조차 없는 곳이 있으니 말이다. 아쉬운 생각이 든다.
거리의 연주와 5프랑
파리 시민들은 음악을 사랑한다. 웬만한 유럽 국가나 국민 소득이 높은 나라치고 음악을 멀리하는 국민이 없다. 그 음악이란 것도 천차만별이겠지만 적어도 신디사이저 하나로 오버 더빙한 녹음에다 어디선가 표절한 듯한 멜로디로 커버하는 그런 성의없는 음악은 절대로 자리를 잡을 수가 없다. 일례로 라디오를 켜 보자. 파리만 해도 24시간 내내 재즈를 방송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처음 그곳을 방문헀을 때엔 생 제르망이 낡은 하숙집에 묵었다. 게다가 5층에 방이 있어서 삐걱이는 계단을 힘들게 오르락거려야 했다. 하지만 비가 오는날 창가에 앉아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재즈 프로그램을 들을 때면 그 어떤 최고급 오디오에다 첨단 녹음을 입힌 음반을 듣는 것보다 행복했다. 필자의 편견일 수도 있지만 음악이란 분위기가 50퍼센트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파리라는 도시는 음악을 즐기기에는 더없이 좋은 분위기를 갖고 있다. 비단 라디오나 CD가 아니더라도 파리의 구석구석엔 음악을 즐길만한 공간이 많다. 한번은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베이스와 기타를 든 사내들이 탔다. 두 대의 일렉트릭 기타에 베이스, 총 세 명이 연주를 시작했는데 태어나서 그렇게 멋진 블루스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다. 또 한번은 생 미셸 거리에서 콧수염을 기른 라틴 사내들이 타악기까지 써 가먀 남미 민속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런 유의 음악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그저 5프랑이나 0프랑을 던져 주면 한 시간 정도 훌륭하게 라이브를 감상할 수 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나는 대학로나 명동 같은 곳을 지나갈 때면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사람에게 눈길이 간다. 물론 외국과 비교할 생각은 없다. 언젠가 프랑스 문화원에서 주최한 샹송 경연대회에 우승했던 한국인 부부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꼭 파리에 가서 남편이 통기타를 치고 부인이 샹송을 부르는 그런 콘서트를 거리에서 해볼 겁니다. 야유를 받아도 좋고 시비를 걸어도 좋아요. 샹송의 본고장에서 한국 사람도 샹송을 멋지게 부를 수 있다는 것만 증명하면 되니까요." 우리의 통기타 가수들도 한번쯤 그런 곳에서 연주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번은 에펠탑을 찾아갈 때 앞서 걷던 영국 여성이 갑자기 통기타를 꺼내 들고 내 앞에서 C.C.R의 히트 넘버들을 연주했던 것이 기억난다. 잘 부르지는 못했지만 그 열의에 감동해 걸음을 멈추고 들었던 기억이난다.
음악은 그 자체로도 축복받은 예술이 아닐까? 비록 멋진 클럽 하우스나 콘서트장이 아닌 길거리에서의 연주일지라도 말이다. 유럽의 여기저기를 샅샅이 돌아보지는 못했지만 어떤 도시를 가도 음악이 흘러넘쳤다. 칸느의 푸른 파도에도 니스의 새하얀 백사장에도 프랑크푸르트의 삭막한 고층 빌딩에도 세고비아의 오래된 로마식 상수도 건물에도 음악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클래식이 되었건 민속음악이 되었건 재즈가 되었건 상관없다. 마치 그 음악은 그곳에 있어야만 하는 것과 같은 어떤 숙명적인 면이 내 머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은 인생을 사랑한다. 나는 감히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그 확실한 증거가 바로 유럽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아직 음악의 즐거움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한없는 연민을 보내고 싶다. 비록 그들보다 적게 벌고 명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이런 점에서 만큼은 내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싶은 것이다.
제2장 오다꾸, 비틀즈, 그리고 블루 노트
오다꾸의 천국
일본에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그네들 특유의 몰입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정도가 지나쳐서 어느 순간에는 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런 극단적인 몰입 내지는 취미 생활자들을 '오다꾸'라고 부른다. 여기서 '다꾸'는 한자로 '댁'이며 '오'는 존칭의 의미다. 다시 말해 상대방의 집을 높여서 부르는 의미가 오다꾸인 것이다. 하지만 차츰 의미가 전이되어 10여 년 전만 해도 어린아이들 중에 몸이 아파서 학교에도 나오지 못하고 집에 누워 있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허약 체질의 아이들쯤 될까? 그러다가 최근에 와서는 자기만의 성을 쌓아 세상과 단절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일본에는 이런 오다꾸들이 많다. 그것도 처절한 느낌을 줄 정도로. 일례로 만화에 중독된 이들은 하루 종일 만화의 캐릭터에 빠져 만화가가 되기 위해 그림을 그리거나 아니면 그 만화의 주인공이 입고 있는 복장을 만들어 입고 다닌다. 또 그 만화에 관련된 각종 상품이며 자료를 모으고 그것도 부족해 동아리를 만들어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기도 한다. 비단 만화뿐이 아니다. 후지산에 가면 제2차 세계대전이 재현된 듯한 전쟁놀이를 볼 수 있다.
한쪽 요코하마에 가면 주말마다 자동차 오다꾸들의 축제가 벌어진다. 그래서 이미 아웃 오브 데이트가 된 과거의 명차들이 새롭게 재생되어 나타난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차들을 둥그렇게 모아 놓고는 그 가운데 빈 공간에서 벌이는 춤 파티다. 그때 나오는 음악이 50년대의 록큰롤이다. 참가자들의 복장 또한 가죽 자켓에 플레어 스커트 일색이다. 말하자면 <아메리칸 그래피티>에 나오는 50년대의 청춘 군상의 재현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도가 지나치건 혹은 미온적이건 간에 많은 부분에서 오다꾸들이 출현하고 있다. 물론 그네들의 민족성 탓으로 돌리면 되겠지만 '캐번 클럽'이란 곳에 가 보고는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록본기에 옮겨 놓은 리버풀
'캐번 클럽'은 50년대에 리버풀에서 개장한 지하 술집이다. 주 고객이 젊은 층이었던 만큼 간이 무대도 있고 춤도 출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따라서 저녁이 되면 갈 데가 없는 청춘들이 모여 당시 유행하던 록큰롤을 연주하는 무명 밴드들에게 열광했던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부터 비틀즈가 시작되었다. 물론 함부르크에 가서 공연도 벌였지만 고향에 오면 캐번 클럽부터 들렀다. 1960년대 초, 틴에이저를 벗어난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창조력이 차츰 꿈틀거리던 시절이었다. 물론 1963년도에 영국, 그 다음해에 미국을 차례차례 정복하면서 비틀즈가 세계적인 밴드가 되었을 땐 캐번 클럽의 무대에 설 일이 없었다. 하지만 비틀즈를 이야기할 때 그 클럽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리버풀에 가면 그 클럽은 없다. 많은 팬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경영난을 이기지 못해 주인이 클럽을 팔아치운 것이다. 따라서 반나절 코스의 리버풀 관광에도 스트로베리 필드며 페니 레인은 있어도 캐번 클럽은 없다. 그런데 묘하게도 도쿄의 한복판, 록본기라는 지역에 이 클럽이 운영되고 있다. 그것도 비틀즈의 넘버만을 글대로 카피하는 몇 개의 밴드들이 교대로 무대를 채우면서 말이다.
나는 그 클럽을 찾아갔다. 저녁 7시부터 입장이 시작되고 정식 공연은 8시부터 각각 한 시간씩 총 두 차례다.공연 관람료도 1천 7백 엔이나 하는 꽤 고급스런 클럽이다. 내부는 온통 비틀즈에 관련된 상품과 포스터 등으로 채워져 있으며 버젓이 비틀즈 해산 이후 중단해 버린 회보를 새롭게 발간해서 입장객들에게 나눠 주고 있었다. 물론 이정도의 일은 마음만 먹으면 별 어려운 일은 아니리라. 그런데 공연이 시작되고 어두컴컴한 무대가 환하게 밝아 왔을 때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마치 타임 머신을 탄 둣 60년대의 그리운 비틀즈가 재현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밴드의 멤버들은 영국인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니다. 복장이며 더벅머리 헤어 스타일까지 비틀즈를 모방했지만 그들은 왜소하고 볼품없는 일본인들이었다. 아니 일본인 비틀즈라니! 아마 비틀즈 팬들이라면 1966년도에 <Help>라는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비틀즈가 일본을 방문해서 공연한 일을 기억할 것이다. 그때 이미 비틀즈의 신화가 일본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 유치원에 다니거나 갓 초등학교에 입학할 정도였던 이들이 자라서 어릴 적부터 꿈과 희망을 주었던 비틀즈를 그대로 재현하는 인생을 살게.
블루 노트의 신화
캐번 클럽을 방문한 뒤 나는 나름대로 재즈에 대한 일본인들의 열광, 특히 모던 재즈 레코드의 탐닉 등에 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면이 있겠지만 일단은 오다꾸란 개념을 적용시켜 보니까 모든 상황이 술술 풀려 나갔다. 일례로 <스윙 저널>이란 재즈 전문지는 웬만한 지식이 없으면 독파하기 힘든 잡지다. 페이지도 많고 자료도 풍부하며 특히 모던 재즈에 할애한 분량이 전체의 반을 넘을 정도다. 만일 미국이나 유럽의 독자가 이 잡지를 본다면 한 30년 전쯤에 발행된 잡지로 착각할 정도다.
그런데 이 잡지의 평론가가 되려면 최소한 재즈 음반을 1-2만 장은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구력이 있어야 하며, 독자 쪽에서도 주말마다 재즈 클럽을 다니며 라이브를 관람할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잡지의 판매 부수는 30만 부나 된다. 이제는 미국에서조차 미국판 <스윙 저널>을 출판하자는 목소리가 있을 정도가 되었다. 아마 <스윙 저널>로 대표되는 일본 재즈 문화의 저변에는 모던 재즈에 대한 오다꾸가 존재하는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서점에 가면 재즈 관련 서적이 꽤 된다. 대개는 수필이나 앨범을 소개한 책 정도인데, 놀라운 것은 아트 블래키며 존 콜트레인이 지금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처럼 생생하게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모던 재즈의 거장들 음반 중에 새롭게 발굴된 것들은 마치 신보처럼 소개하고 있다. 재즈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레코드 가게에서 '아, 몽크가 새 앨범을 냈구나' 내지는 '마일즈가 소니 롤린스하고 만나서 신보를 발표했구먼' 하고 속아넘어갈 만하다. 그런 상황이 일반화된 것이 일본의 재즈 씬인 것이다.
특히 이들이 열광하는 음반은 모던 재즈의 절정기를 장식했던 블루 노트 레이블이다. 이 회사에 대한 신뢰도와 그 탐닉의 역사는 블루 노트의 신화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놀랍다. 언젠가 블루 노트에 미친 일본 팬의 수필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두 가지로 이 회사에 대한 신화를 요약하고 있다. 그 하나는 '블루 노트에는 스카(Scar : 스크래치나 흉터)가 없다'이다. 이 말은 LP 시절에 블루 노트를 모았던 사람들은 그 디스크가 워낙 견고하게 제작된 데다가 사용자들이 주의깊게 다루기 때문에 중고 음반이라 해도 흠집을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또 하나의 신화, '블루 노트에는 폐반이 없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다시 말해 블루 노트 음반이라면 두말없이 명반의 리스트에 올려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모던 재즈며 블루 노트에 대한 일본 재즈 팬들의 신화는 확고부동하다. 정작 본토에서는 새로운 형식의 재즈를 추구하는 마당에 마치 제2차 세계대전이 재현되고 비틀즈의 라이브로 입장료를 받는 것처럼 모던 재즈가 일본에서는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재즈에 탐닉하는 일본인들의 이상 심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실례가 아닐까.
신화를 찾아서
그런데 그런 한계를 알고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나는 그 신화가 싫지 않다. 억지로라도 자신의 신화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 부분을 설명하겠다. 뭐가 되었던 간에 하나에 미쳐 보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그 어떤 것을 봤을 때 설렘이나 흥분을 잘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예를 들어 보겠다. 일본에서는 <라이카>라는 잡지가 발행되고 있다. 독일의 라이카 카메라를 쓰고 또 좋아하는 동호인들이 만든 계간지다. 그 내용을 보면 히틀러 때 만들어졌던 과거의 모델에서부터 최근에 생산된 신제품까지 다양한 제품을 쓰는 마니아들이 각자의 경험이나 노하우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 동호인들에게 라이카란 얼마나 신적인 존재인가를 알게 되면 사뭇 놀랄 것이다. 오사카에 가면 아메리칸 부라라는 지역이 있다. 그 일대는 10대에서 20대들이 점유하고 있다. 주로 미국풍의 물건들과 패션,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그 지역의 가장 중심부에는 자유의 여신상을 모방한 동상이 떡하니 세워져 있고, 나이키와 리바이스 상표를 단 중고 물건들을 고가에 팔고 있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심지어 '호텔 캘리포니아'라는 간판을 내건 호텔이 세워져 있는 등 이색적인 풍경뿐이다.
그리고 거리를 메운 젊은이들은 머리카락을 요란하게 염색을 하고 갭, 게스, 바나나 리퍼블릭 등 아메리칸 브랜드로 치장을 하고 다닌다. 이것은 지금은 미국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좋았던 옛 시절의 향수가 거리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만일 5,60년대의 미국에서 청춘을 보냈던 사람이 이곳에 들른다면 이런 풍경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모르긴 몰라도 완벽하게 카피된 과거에 큰 혼돈을 느낄 것 같다. 일본에서는 모던 재즈가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래서 레코드 가게의 재즈 코너에 가면 상당히 놀라게 된다. 미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50년대 여성 보컬의 음반들이 LP와 CD로 재발매되었고, 스무 장이나 서른 장쯤 발매하고 도산해 버린 재즈 레코드 회사의 판권을 사들여 일본에서만 판매하는 음반도 상당수에 달한다. 역시《다운 비트》나 《재즈 타임》같은 잡지에서 컨템포러리 재즈를 평하는 미국 평론가가 이곳에 온다면 아메리칸 부라와 같은 충격을 받을 것이다.
신화라는 것이 나름대로 좋다라는 이야기를 한 바 있는데, 이렇게 일본의 레코드 가게에서 재즈 음반, 그것도 일본 라이센스 재즈 음반을 고를 때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감동과 설렘이 밀려온다. 그 음반을 산다는 행위가 신화를 쇼핑하는 듯한 거창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어느 나라를 가든 재즈 음반은 꼭 구입하는 필자지만 일본에서처럼 CD 한 장에 엄청난 무게감을 느껴본 적은 없다. 아마 그 CD를 만들어 내는 일본인들이 CD에 담아낸 정열과 몰입 때문은 아닐까? 신화를 만드는 나라. 마치 우상 숭배 내지는 물신 숭배를 해야만 고도 산업사회에서의 공허감을 메울 수 있다고 믿는 나라. 한번 아이템을 잡으면 일이라 생각하고 인생을 바칠 만큼 몰입하는 나라. 그런 나라인 만큼 그 어떤 사람을 만나도 해당 분야에서는 프로다. 어영부영 아마추어리즘이 숭상되는 우리 식의 풍토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정보와 데이터의 홍수 속에서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때 조금 더 빨리 와 볼걸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만큼 새로운 것이 많았다. 신화를 찾아 오랫동안 헤맨 만큼 그 오랜 세월 동안 저장해 놓은 정보와 데이터의 양은 놀랍기만 하다. 나는 레코드 컬렉터 생활을 계속해 왔기 때문에 여간해서 레코드 가게나 백화점을 찾아도 별로 놀라는 법이 없다. 그런데 아키하바라에 위치한 이시마루 레코드 가게를 보고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바로 입구에 `CD+LD=130만 타이틀`이란 휘장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빌딩 전체를 매장으로 쓰고 있는 그 가게에서 모든 장르를 뒤져 보기로 마음먹었다면 아마 일주일 이상은 걸릴 것이다. 이쯤 되면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할 때 가졌던 각오가 필요하다. 정보의 홍수가 아니라 정보의 과잉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어느 일본 가정집에서 일어났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민박을 하던 그 집엔 손님들이 텔레비전도 보고 카드 게임도 할 수 있는 거실이 있었다. 그곳에서 투숙객들과 한담을 나누다가 내가 재즈 평론을 한다고 하자 주인이 대뜸 “모던 재즈를 좋아하십니까?” 하고 물어 왔다. 좋아한다고 하자 튜너를 조작하더니 하루 종일 모던 재즈만 방송하는 채널을 잡아 주었다. 이상해서 그 튜너를 살펴본 나는 기가 질리고 말았다. 요즘 케이블 TV라 하여 우리나라에서도 백만 가구 이상이 가입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한발 더 나아가 케이블 라디오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을 깔고 튜너를 구입하면 하루 종일 음악 방송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한데 그 튜너에 기록된 채널 수만 250개가 넘었다.
무슨 음악 채널이 250개씩이나 필요할까 싶겠지만 하지만 일본이라면, 신화를 좇는 지독한 정신력을 감안한다면 이런 현상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케이블 라디오의 전문화 내지는 세분화가 소름끼칠 정도다. 이를테면 비틀즈란 채널이 있는데 하루 종일 비틀즈 노래만 틀어 준다. 또 이와 유사하게 앨비스 프레슬리 채널도 있다. 블루스만 해도 여러 장르로 나뉘어 있으며 재즈의 경우 여성 보컬, 빅 밴드, 모던 재즈, 퓨전 등 여러 채널이 있었다. 이밖에 인도 음악, 칸초네, 탱고, 살사, 삼바, 러시아 등 민속음악도 있으며 우리 가요도 올드 타임과 신세대로 구분해서 방송되고 있다. 물론 북한 가요도 한 채널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는 채널 수가 모자랄 지경인 것이다.
이럴 정도니 민박을 운영하던 주인 아줌마의 입에서 마일즈 데이비스나 존 콜트레인이 마치 마이클 잭슨처럼 자연스럽게 언급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일본이 갖는 강점이 아닌가 하다. 우선 압도적으로 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오고, 그리고 그중에서 옥석을 가려내 자기 나름의 신화를 좇아가는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착잡함을 느꼈다. 지난 많은 세월 동안 음반을 수집해 왔고 또 정보에 목말라 이런저런 잡지를 사러 다녔던 일 등이 물거품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 조그마한 케이블 라디오의 튜너가 나를 완전히 녹아웃시켰던 것이다. 요즘 극일(克日)이란 단어를 많이 쓰고 있다. 특히 독도 문제와 결부되어 감정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증오라든가 라이벌 의식은 국가의 경쟁력 강화를 이야기할 때 필요한 대목이기는 하다. 하지만 정말로 극일을 하고 싶다면 우선 우리 자신의 무지와 섣부름부터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이 이야기가 음악을 통해 본 일본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단상만은 아닐 것이다.
제3장 타이페이와 홍콩의 먹거리 골목을 누비며
엄청난 인구 밀도와 험준한 산 투성이의 대만
요즘 부쩍 관심이 가는 분야가 하나 있다. 바로 `먹는 것` 혹은 미식(美食)이라고 부르는 장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삼시 세끼를 먹어야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먹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다. 그러므로 새삼스럽게 먹는 것에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뭐 그런 기본적인 문제가 화제 거리가 되느냐는 대꾸를 많이 받는다. 내 말의 요지는 아주 간단하다. 같은 돈을 주고 사먹을 바에야 좀 잘 한다는 집을 찾고 싶고, 이왕 맛있는 것을 먹으면 그 즐거움을 좀 분석적으로 파고들고 싶은 것이다. 말하자면 다소 학구적인 탐구의 일종인 셈이다. 그러나 나는 한끼에 몇만 원씩 투자할 생각은 없다. 몸에 아무리 좋다고 해도 사슴 피라든가 해구신이라든가 하는 컬트적인 음시에 손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럴 돈이 있으면 솔직히 음반을 한 장 더 사고 말겠다.
대만과 홍콩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음식에 관한 것부터 언급하는 이유를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정말이지 이 두나라는 음식에 관한 한 목숨을 걸다시피 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대만의 수도 타이페이는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대만섬의 북부에 위치해 있다. 섬의 크기라고 해봤자 우리나라의 경상남북도 합친 정도다. 그런데 이곳에만 약 2천 150만 명 정도의 인구가 북적거린다니 그 인구 밀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게다가 국토의 70퍼센트 이상이 산이요, 사면이 바다인만큼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은 더욱 협소하다. 물론 우리처럼 표고가 낮고 보기에도 완만한 선을 그리고 있으면 개간도 하고 중턱을 깎아서 주택지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은 섬에 해발 3천 미터 이상이나 되는 산이 110여 개요, 1천 미터 이상의 산이 5백여 개라 하니 말 그대로 움치고 뛸 수도 없는 상태인 것이다.
이런 열악한 국토 환경 못지 않게 더위는 더 끔찍하다. 여름 평균 기온이 34도에서 40도를 웃도는 데다, 빌딩, 주택 등에서 내뿜는 에어컨의 열기, 거기에다 높은 불쾌지수까지 감안한다면 실제 체감 온도는 약 3~5도 정도 더 높다. 여름은 그렇다 치고 겨울은 또 어떤가? 북부 지방은 약 90퍼센트에 달하는 습도를 머금고 있으므로 가만히 앉아 있어도 몸이 축축해져 올 정도다. 당연히 집안에 잔벌레들이 끊이지 않아 청소를 소홀히 했다가는 모기며 바퀴벌레의 공격을 당하기 십상이다. 아마 이 정도 이야기했으면 대만에서 재즈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나 능히 짐작이 갈 것이다.
대만에서 전멸한 재즈 음악
사실 내 경우에도 여름이 오면 음악을 듣는 시간이 많지 않다. 우선은 짜증이 나고 가만히 앉아서 몰입하려고 해도 곧 엉덩이를 들썩이게 된다. 그래서 같은 재즈를 듣더라도 보사 노바나 팝 재즈, 혹은 여성 보컬 쪽으로 셀렉션하게 된다. 더위라는 악조건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대만 역시 마찬가지여서 집중을 해서 음악을 감상하기에는 여간 환경이 열악하지 않다. 하긴 웬만큼 방음 장치가 되어 있지 않다면 설령 시원한 날씨가 온다고 해도 문제는 될 것 같다. 그 조그마한 땅덩이에 오토바이 대수만 1천만 대. 어린아이나 노약자를 제외한다면 국민 일인당 한 대씩은 갖고 있는 셈이다. 이 오토바이에서 나오는 소음은 거의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엄청난데, 설령 주택가라 하더라도 별반 나을 게 없다. 정말이지 대만에서 재즈 팬이 되려고 하면 상당한 어려움을 감수해야 하는 모양이다. 물론 우리보다 GNP도 훨씬 많고 외환 보유고도 일본 다음으로 높은 만큼 어느 집을 가도 방마다 에어컨은 기본이요, 웬만한 오디오 세트쯤은 다 갖추고 살고 있다.
하지만 역시 남방 쪽은 어쩔 수 없는 듯 재즈라든가 클래식 같은 전문적인 감상이 필요한 장르는 그닥 크게 보급되어 있지 못한 듯하다. 우리보다 하이 엔드 오디오 시장이 훨씬 광범위한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은 좀 의아스럽기도 하다. 그 예로 타이페이의 동시아오 로드에 있는 타워 레코드에 가 보면 된다. 이공은 우리나라의 명동에 있는 지점보다도 크기가 반 정도로 작을 뿐 아니라 매장의 상당 부분이 록과 팝으로 채워져 있다. 클래식이며 재즈는 그저 형식적으로 갖춰 놓은 정도에 불과하다. 호기심에 재즈 코너를 다 뒤져 봤지만 그 레퍼토리는 우리 수준만 못했다. 다만 음반 가격은 대만 돈으로 309원에서 399원 정도. 그러니까 우리 화폐로 약 9천 원에서 1만 원이니까 맘에 드는 레퍼토리가 있다면 구매할 만은 했다.
그럼 재즈 카페는 어떤가? 불행히도 도시 구석구석을 뒤졌지만 전문적으로 재즈를 트는 곳을 찾지는 못했다. 가이드 북을 보니 `목선`이라는 카페 체인점이 유명하다고 씌어져 있어 직접 방문해 봤는데 무척 실망스러웠다. 우선 우리나라의 70년대를 연상케 하는 통나무집 스타일의 인테리어에 가수 지망생의 남녀가 듀엣으로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 부르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부분에서는 갑자기 고등학생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무한한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이런 부분만 보고 대만의 문화적인 수준을 깔보면 큰코를 다치게 된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번은 우연히 대만 대학의 앞에 있는 조그마한 레코드 가게를 들어가 봤다. 1층은 싱글 CD, 2층은 팝과 재즈, 그리고 3층은 클래식 코너로 꾸며진 그 가게에서 나는 매우 신선한 충격을 받고 말았다. 바로 문제의 3층에서 사면의 벽을 꽉 메운 CD와 함께 중앙에 비치된 하이엔드 시스템을 보고 놀랐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레퍼런스 오디오 세트로서 손님들이 음악을 들어볼 수 있도록 설치한 시스템이 거기에 있었는데, 프리와 파워가 마크 레빈슨의 넘버 23과 26이요, 스피커는 미라지였다. 약 2천만 원을 호가하는 고급 시스템이 매장을 찾는 고객을 위해 비치되어 있는 것이다. 또 이런 점도 짚고 넘어갈 만하다. 평소 나는 어느 도시를 가건 영화관에 들아가 본다. 레코드 가게를 방문하는 것과 병행해서 꼭 실시해 보는 내 나름의 습관인 것이다. 그런 이유 중의 하나는 한 나라의 대중 문화 수준을 알려면 영화관을 가 보면 된다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한극장의 1.5배 만한 크기에 앉기에 편한 의자 배열, 쾌적한 실내 분위기를 보고 나는 놀라고 말았다. 분명 극장 앞에서 표를 살때는 우리네 이류 극장의 분위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겉만 보고 알 수 없다고 하듯이 이 나라도 겉에서 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는 솜이다. 그러므로 만일 요요마와 초량린을 배출한 이 나라가 본격적으로 재즈에 관심을 둔다면 일본의 일급 뮤지션 못지않은 인재를 배출할 것도 같았다. 시간이 좀 흐르면 다시 방문해 보고 싶은 곳이었다.
홍콩에서는 일단 먹고 보자
이제 눈을 홍콩으로 돌려 보자. 홍콩은 동양의 진주라는 말처럼 무척 재미있는 곳이다. 특히 비슷한 처지의 대만과는 쓰는 언어도 다르고(홍콩은 만다린어, 대만은 북경어를 쓰고 있다. 두 언어는 같은 무자라도 읽는 법이 판이하므로 서로 다른 언어로 분류되고 있다), 재즈라든가 팝 등 외국 문물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틀리므로 내 입장에서는 대만보다 훨씬 재미있는 곳이기도 했다. 우선 앞부분에서 말한 음식에 관한 것부터 언급해 보겠다. 대만의 타이페이에 가면 이른바 야시장이라 하여 용산사라는 사찰 근처에 엄청난 규모의 먹거리 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이 나라의 요리에 대한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이골목을 가보면 된다. 예를 들어 닭 한마리가 있다고 할 때 우리는 내장은 다 버리고 몸체만 튀기거나 탕을 만드는 식으로 요리한다. 그러나 그들은 내장 하나하나까지 다 조리를 해서 닭발과 함께 팔고 있었다. 그것도 조그마한 손수레에 올려 놓고 일종의 군것질 거리로 말이다.
우리는 극장에 가면 대개는 쥐포나 오징어 따위를 심심풀이로 먹는다. 그런데 타이페이 쪽 극장가에 갔더니 수십 종류의 어포와 각종 튀긴 것, 말린 것 등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 각각이 갖고 있는 향과 맛을 이야기하자면 지면이 모자랄 지경이니 이쯤 해 두자. 그런데 타이페이에서 일반 서민이 가는 식당은 우리 입맛으로는 견디기가 힘들다. 기름에 볶은 것이 많고 이상한 향료도 많이 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좀 거친 맛이다. 이런 곳에 앉아서 식사를 하게 되면 확실히 중국과 한국은 별개의 나라임이 몸으로 느껴진다. 5천 년 동안 함께 살면서 그들의 손아귀에 우리가 들어가지 않은 이유를 음식에서 찾을 수 있을 정도다. 아니, 어떤 면에서 우리의 음식 문화는 중국에 반발해서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우리의 전통 음식을 보면 기름기를 배제하고 담백하고 좀 심심한 입맛을 추구해 왔다. 그네들이 지지고 볶고 할 때 우리는 주로 나물을 무친다거나 고기만 해도 슬쩍 데치는 정도였다. 게다가 양념 문화가 발달했으므로 냄새가 억센 향료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중국 요리가 세계 제일임은 부인할 수 없지만 우리하고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셈이다.
실제로 타이페이에서 음식을 먹는다고 하면 오히려 백화점의 지하 매장에 설치된 식당가가 좋다. 가격도 저렴하고 상당히 다양한 음식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대만은 약 50여 년 간 일본의 통치를 받았으므로 그때의 잔재가 음식 문화에도 남아 있다. 회라든가 초밥, 사부사부 등이 당당히 한 코너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반면 홍콩은 대만보다 지방색이 덜한 편이다. 구룡 반도에 있는 침사추이 거리에 가면 좌우 양편으로 무수한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다. 여기엔 중국 전통 요리뿐 아니라 인도 요리, 태국 요리, 이태리 요리, 프랑스 요리 등 세계 각국의 음식을 모두 섭렵할 수 있게끔 되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런 요리들이 각 민족의 고유한 맛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냐 하면 그렇지 않다. 조금은 중화(中華)화되어 있고 또 국제화되어 있다. 같은 스파게티를 먹어도 중국 요리처럼 좀 달콤하고 향취도 다른데 홍콩을 찾는 관광객 그 누구라도 먹을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음시도 그렇다. 이곳에서 같은 김치찌개를 먹어도 좀 다르다. 매운 맛이 상당히 제거된 반면 야간 달콤함을 느낄 정도로 입맛이 당기게 조리되어 있는 것이다.
홍콩의 음식 값은 환상적일 만큼 싸다. 내가 체류했을 때 점심의 세트 메뉴를 먹기 위해서 서너 번 방문한 곳이 있었다. 두 손바닥을 합친 크기만한 스테이크가 나오고 그 외 콜라, 오렌지, 밥 스프 등이 덤으로 나오는 이 세트는 우리 돈으로 3,500원 정도. 또 백화점이나 쇼핑몰의 상층부에 위치한 고급 식당을 가면 두 사람이 서너 개의 요리를 시킨다면 약 2만 원에서 2만 5천 원 정도를 주면 된다. 물론 그 요리들은 눈이 휘둥그래질 만큼 맛있다.
라디오 카페의 추억
먹는 이야기는 이쯤으로 하고 홍콩에서의 재즈 문화는 어떤가? 역시 영국의 자치령인 만큼 많은 재즈 카페와 라이브 하우스를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침사추이의 남단에 가면 우리 식의 카페들이 많은데, 그 중 영국인들이 경영하는 곳을 가면 대개 정장을 한 남녀들이 스탠드 앞에 서서 칵테일 잔을 기울이며 재즈를 감상하는 곳이 다수다. 사람들의 떠드는 사리도 나직하고 기분 좋은 재즈 곡들이 선곡되어 상당히 나른한 분위기에서 재즈를 즐길 수 있는 곳인 셈이다. 꼭 카페에 가야만 재즈를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쇼핑 몰이나 백화점의 강당에서도 재즈 공연이 열린다. 내가 놀란 것은 그중 한 프로그램이었는데, 일본인 14인조 빅 밴드 악단의 공연이 안내되어 있었다. 하긴 나고야에 가면 30년 간 딕시랜드 재즈만 연주한 밴드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뉴올리언스로부터 일종의 인준을 받기도 했다니 이런 홍콩 공연쯤은 놀랄 일도 아닌 것 같다.
여하튼 대만과 홍콩은 여러모로 대조적인 곳이 아닌가 싶다. 대만에서는 라디오를 켜건 레코드 가게엘 가건 그네들의 가요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홍콩에서는 기본적으로 팝송이 흘러 나온다. 카페 문화 또한 천양지차여서 대만에 있을 때엔 음악을 듣고 싶어도 갈 만한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홍콩에서는 조금만 건물들을 둘러 보면 근사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홍콩에는 많은 음악 카페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기억나는 곳이 한 군데 있다. 위치는 홍콩 섬의 센트럴 지역이고 고층건물의 17층에 자리잡은 곳이다. 이름은 라디오 카페. 왜 라디오냐면 이곳에선 세계 각국의 주요 음악 프로그램을 수신해서 틀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 밖의 전망도 좋아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고 또 바깥 구경을 하면 기분도 상당히 편안해진다. 게다가 바로 밑의 층에 가면 오디오 가게도 있어서 심심하면 구경할 수도 있다. 홍콩섬으로 말하면 고층 빌딩이 즐비할 뿐 아니라 이층 버스, 이층 전차가 다니고 거리엔 외제 차가 넘쳐 나기 때문에 그 풍경이 무슨 SF 영화와 같다. 그런 풍경을 즐기며 듣는 음악은 확실히 그 나름의 재미가 있는 것이다.
재즈 팬으로서 본 홍콩의 진가는 음반 컬렉션에 있다. 음반 값이 싸고 또 다양하다. 2년 전에 방문했을 때엔 막 찰리 파터의 다이알 시리즈가 출시되었고, OJC에서 콜트레인과 롤린스의 전집을 활발하게 홍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매장에서 본 가격이 거의 장당 8천 원꼴 안팎이어서 많이 놀랐었다. 게다가 록만 해도 그 당시 화제가 되었던 밥딜런의 부트렉 시리즈가 우리보다 먼저 나와 있었고 지금에야 라이선스되고 있는 클래식 록의 명반들이 다 비치되어 있었다. 만일 홍콩을 방문할 일이 있다면 KLP라는 레코드 가게를 찾으라고 권하고 싶다. 홍콩섬에 위치한 그 가게는 특히 미국에서 수입한 오리지널 CD가 상당수 있는데 우리 돈으로 7,8천 원이면 구할 수 있다. 필자 또한 여기에서 재즈 레코드뿐 아니라 킹크스(Kinks)며 후(Who) 등의 전집을 모두 구할 수 있었다. 아마 이만한 가격대는 전세계 레코드 가게를 통틀어 최저가 아닐까 싶다.
홍콩에서 모든 게 싸다. 심지어 베네통이며 게스와 같은 제품들이 우리나라에서 판매되는 가격의 70퍼센트 내지는 50퍼센트에 불과하다. 각종 전자제품도 일본 못지않게 저렴하고 소파며 침대까지도 싸다. 이런 가격대가 12월 말에 오면 또 30~50퍼센트 세일되어 내려간다. 만일 가능하다면 싹쓸이 쇼핑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싸다. 아니, 돈이 좀 있다면 그곳에 가서 오디오 세트부터 그 동안 사고 싶었던 음반까지 몽땅 쓸어 오고도 싶다. 확실히 홍콩은 쇼핑의 천국인 도시인 것이다.
장인 정신과 예술가 기질에 관해
마지막으로 살펴볼 부분이 하나 있다. 타이페이에 가면 이른바 고궁 박물관이라 하여 역대 중국의 진귀한 보물들을 전시해 놓은 곳이 있다. 장개석이 중국에서 1948년 철수하면서 몽땅 쓸어온 것들인데, 이중 내 관심을 끈 것은 여러 점의 동양화였다. 이 동양화를 보면 그림 옆에 많은 도장이 찍혀 있다. 의아해서 알아보니 그 스토리가 재미있었다. 만일 그 당시의 화가가 그림을 잘그리면 우리 식으로 시의원,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 하는 식으로 그 작품이 위로 위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줄줄이 결재를 받듯이 도장을 받다가 마지막으로 황제의 인준을 받으면 그때부터 그 화가의 팔자가 일변해서 웬만한 귀족 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이후 그가 그린 그림은 황제만이 볼 수 있게 되며 그 모두가 국고에 귀속이 된다. 그런데 놀란 것은 어떤 그림은 황제의 옥쇄가 무려 다섯 개나 찍혀 있었다. 이것은 다섯 명의 황제를 거치면서 그 그림이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럼 이런 질문을 던져볼 만하다. 황제의 도장을 받을 만큼 잘 그린 그림과 흔히 예술성이라고 지칭되는 어떤 고귀한 가치를 갖는 그림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즉, 옥쇄를 다섯 개나 받은 그림과 앤디 워홀의 작품은 무엇이 다른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장인 정신과 예술가의 차이를 지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장인은 말 그대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고 예술가는 그림은 잘 그릴 수 없을지 모르지만 예술성은 포착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전자의 경우 일종의 보물처럼 박물관에 전시되거나 국가적 재산으로 다뤄지지만 후자는 컬렉터에 의해 추적된다. 그중에 국가에 포착된 것만이 미술관에 전시되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내 자신에게도 확연히 감지되었다. 나 역시 오랫동안 음반을 컬렉션해 왔고 영화며 문학을 좋아하는 딜레탕트 기질의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솔직히 고궁박물관에 전시된 그림들을 보면서 탄성은 질렀지만 감동은 받지 못했다. 감동으로 말하면 오히려 파리에 있는 인상파 미술관이라든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쪽이 더 나았다. 정말이지 이곳에서는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압도적인 그 무엇이 밀려온 데 반해 고궁박물관에서는 금은 보석을 보는 듯한 신기함뿐이었다.
이 개념을 재즈에 도입하면 아주 재미있는 결론이 나온다. 연주를 잘하는 사람과 감동을 전달하는 사람의 차이. 즉, 테크닉이 현란하고 음계를 정확히 짚어 내는 사람과 비록 실수는 할지라도 마음을 움직이는 연주를 하는 사람과의 차이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가끔 장인 기질 혹은 장인 정신이라 하여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하는 사람을 칭찬하지만 그것이 결코 예술적인 성과와 동등해질 수 없음이 내 지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행을 끝내고 조용히 레코드 랙 앞에 앉아 그동안 컬렉션해 놓은 음반을 바라봤다. 이 음반들 중에 진정으로 내 마음을 움직인 연주는 얼마나 되는가? 이제부터 내 자신과 재즈의 문제가 시작된 것이다. 결코 중단될 수 없는 영원한 테마가 본격적인 의미를 갖고 전개되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여행은 내 자신에 관한 질문이었던 것 같다.
특별부록 CD 음반 수록곡목 해설
재즈 역사의 산 증인 컬럼비아 레코드사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재즈란 대체 무엇이길래 이토록 내 삶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채 떠날 줄을 모르는가? 마치 무슨 최면에라도 걸린 듯 최근 10여년 간 내 삶에서 재즈는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해 왔던 것이다. 요즘의 일과를 가만히 되짚어보면 좀 기묘한 구석이 발견될 정도다. 우선 각종 저널을 보며 신보를 체크한다. 레코드점은 1주일에 서너 번씩은 꼭 들른다. 물론 구하지 못한 구보라든가 새로 발견한 레퍼토리를 모니터하거나 호주머니를 털어 구입한다. 그뿐 아니다. 레코드사나 잡지사에서 청탁이 들어오면 하는 수 없이 CD를 들어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가끔 라디오에 나가 곡을 소개하기도 하고 외국의 저명 연주인이 오면 꼭 참석해서 실황을 봐야 한다. 처음에는 무턱대고 재미있어서 시작한 일이지만 어느새 이런 일만 처리하기에도 바쁜 몸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헤집고 다니다 보면 자정이 되어서야 컴퓨터 앞에 앉아 원고를 쓰는 경우도 생긴다. 지금이 바로 그렇다. 벌써 새벽 1시. 이 시간에 나는 재즈를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통(?) 아닌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직업인데 뭐 어쩌란 말이요 하면 할 말은 없다. 본업은 작가지만 어찌어찌 이런 일에 끼여들게 되었으므로 일종의 직업병이라 넘겨짚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을 업으로 하기 전부터 나는 재즈에 꽤 빠져 있었던 듯싶다. 최근 모임을 통해 어떤 젊은 재즈광과 나이 든 선배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는데 여기서 확인한 게 하나 있다. 모두들 나와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몰래 음반을 사다 놨다가 식구들에게 들켜서 혼난 일이라든가 외상을 져 가면서까지 음반을 구입한 일 등등... 대체 재즈가 뭐길래 이토록 정신없이 빠져드는 것일까?
각설하고 이번 책에 포함된 두 장의 부록 CD는 아마 향후 그 어떤 재즈 전문서도 하지 못할 엄청난 기획의 일환이었음을 밝혀 둔다. 물론 기존의 몇몇 책들이 레코드사의 협조를 얻어 CD를 첨가하기는 했지만 이번처럼 무려 두 장이나 포함된 것은 드문 일이요, 특히 그 내용에 있어서 거의 알짜만 모아 놨다는 점에서 내 개인적으로는 대단한 자부심까지 느낄 정도다. 본 음반들은 그 음원을 저 전설적인 컬럼비아 레코드사에서 뽑고 있다. 컬럼비아 레코드사는 RCA와 더불어 초창기 레코드의 역사를 이끌어 온 오랜 명문임과 동시에 20세기를 통틀어 클래식, 재즈, 록 등 전부문에 걸쳐서 골고루 명연을 기록한 거의 독보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마이클 잭슨, 머라이어 캐리, 마이클 볼튼, 브루스 스프링스턴, 밥 딜런 등 세계적인 팝 가수들뿐만 아니라 재즈 쪽으로는 윈턴과 브랜포트 마살리스 형제, 제임스 카터 등이 현재 컬럼비아를 모체로 활동하고 있으며,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마일즈 데이비스, 허비 행콕, 듀크 엘링턴, 델로니우스 몽크, 루이 암스트롱, 빌리 홀리데이 등 어마어마한 이름들을 만날 수 있다. 여기에 클래식으로 가면 요요마, 글렌 굴드, 부르노 발터 등 그 네임 밸류만으로도 입이 벌어질 만한 거장아 부지기수다.
그러므로 이런 굴지의 명문사에서 필자의 재즈 전문서를 위해 이렇게 아낌없이 음원을 협조한 것은 비단 개인적인 영광의 차원을 넘어서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부디 무슨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마이너 레이블의 형편없는 연주들만을 추려 모은 다른 부록 CD들과는 단단히 차별부터 두길 바란다.
CD 1 : 나의 요정 여성 재즈 보컬
THE VOCAL CLASSICS-BILLIE, ELLA, LENA, SARAH!
1. THE MAN I LOVE / BILLIE HOLIDAY
2. MY MELANCHOLY BABY / ELLA FITZGERALD
3. PRISONER OF LOVE / LENA HORNE
4. NICE WORK IF YOU CAN GET IT / SARAH VAUGHAN
5. I'LL NEVER BE THE SAME / BILLIE HOLIDAY
6. EAST OF THE SUN / SARAH VAUGHAN
7. WHAT A LITTLE MOONLIGHT CAN DO / BILLIE HOLIDAY
8. AIN'T MISBEHAVIN' / SARAH VAUGHAN
9. OUT OF NOWHERE / LENA HORNE
10. ALL MY LIFE / ELLA FITZGERALD
11. I'M GONNA LOCK MY HEART / BILLIE HOLIDAY
12. GOOD NIGHT MY LOVE / SARAH VAUGHAN
재즈에는 트럼펫이나 색소폰, 혹은 피아노 같은 기악 부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에 못지않게 재즈 보컬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오히려 재즈의 재미라든가 입문의 차원에서는 기악보다 보컬 쪽이 더 큰 호소력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재즈 보컬이 전성기를 이뤘던 시대는 1950년대다. 이때에는 이른바 여성 재즈 보컬의 3대 거물이라 할 수 있는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 사라 본(SARAH VAUGHAN), 엘라 피츠제럴드(ELLA FITZGERALD) 등이 모두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으며, 그 외 용모와 음색으로 한몫을 봤던 줄리 런던, 페기 리, 제리 서던 등의 매력을 거부할 수 없다. 그밖에도 실력과 재능을 골고루 갖춘 애비 링컨, 베티 카터 등은 현재까지도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으니 만일 조금만 관심을 갖는다면 엄청난 금맥을 캘 수 있는 분야인 셈이다.
이런 여성 재즈 보컬에 최고의 사랑과 관심을 쏟는 나라는 아마도 일본일 것이다. 다른 나라의 레코드점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여성 보컬 쪽의 섹션을 별도로 만들어 놓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50년대의 명연들을 세계 최초로 CD화하는 데 아낌없는 정성을 바치고 있다. 실제로 여성 보컬의 매력은 약간의 술과 어두컴컴한 실내, 그리고 지긋이 눈을 감고 노래에 빠져드는 재미에 있다. 기악 쪽으로 말하면 초절기교의 현란함 속에서 거의 인간 능력의 한계를 추구하는 듯한 쾌감을 느끼게 하지만 이쪽에서는 그런 기교보다는 섹시한 목소리, 릴렉스한 분위기 등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스트레스가 많고 바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일수록 이런 여성들의 정감있는 노래를 통해 긴장을 풀고 새로운 활력소를 얻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다행히 본 음반에서는 저 위대한 세 명의 여가수와 더불어 50년대 당시 여가수로서, 또 영화배우로서 여성미를 한껏 뽐냈던 레나 혼(LENA HORNE)의 목소리까지 아울러 감상할 수 있다. 여성 보컬의 재미와 매력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더없는 가이드가 아닐까 한다.
우선 빌리 홀리데이는 컬럼비아의 간판답게 무려 4곡을 선보이고 있다. <THE MAN I LOVE> <I'LL NEVER BE THE SAME> <WHAT A LITTLE MOONLIGHT CAN DO> <I'M GONNA LOCK MY HEART> 등이 그것인데, 이 중에서 <THE MAN I LOVE>는 빌리의 18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 각별히 관심을 가져 보기 바란다.
이어지는 엘라 피츠제럴드는 <MY MELANCHOLY BABY>와 <ALL MY LIFE>란 2곡을 통해 깊이 있는 성량과 무르익은 테크닉을 선보이고 있다. 또한 레나 혼은 <PRISONER OF LOVE> <OUT OF NOWHERE>에서 당대 최고의 섹시 스타다운 매력을 한껏 과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라 본은 빌리 홀리데이에 버금가는 4곡을 들려주고 있다. <NICE WORK IF YOU CAN GET IT> <EAST OF THE SUN> <AIN'T MISBEHAVIN'> <GOOD NIGHT MY LOVE> 등이 그것들로써, 당대 최고의 기교파라는 찬사가 어울릴 만큼 현기증 나는 테크닉을 선보이고 있다. 아직도 많은 팬들이 여성 재즈 보컬의 진정한 매력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이번 기회에 그 즐거움을 십분 만끽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CD 2 : 나만의 시간을 팝 재즈와 함께
POP JAZZ
1. ALONE AGAIN / ESTHER PHILLIPS
2. GEORGIA ON MY MIND / LOUIS AMSTRONG
3. SPIRIT OF SUMMER / DEODATO
4. FLY ME TO THE MOON / TONY BENNETT
5. STARDUST / ELLA FITZGERALD
6. WOMAN IN LOVE / MANHATTAN TRANSFER
7. TWO SILHOUETTES / DINAH SHORE
8. THAT OLD FEELING / CLEO LAINE
9. EVERY TIME WE SAY GOODBYE / CLEO LAINE
10. FLAMINGO / GLOVER WASHINGTON, JR.
11. OVER THE RAINBOW / ROSEMARY CLOONEY
두 번째 CD에는 여러 다채로운 곡들이 수록되어 있으므로 한곡 한곡 그 내용과 의미를 소개하는 쪽으로 가겠다. 재즈에 관심은 있지만 일반적인 곡들에는 뭔가 어렵고 난해하다는 느낌을 가진 분들에게 재즈는 이렇게 쉬운 재미도 있다는 차원에서 선곡한 만큼 부담없이 감상했으면 싶다. 가능하면 주위의 친구들에게도 녹음을 해 준다거나 혹은 소개를 해서 그 재미가 보다 널리 확산되었으면 싶다.
1. 에스터 필립스 / ALONE AGAIN
이곡은 길버트 오설리번이란 가수에 의해 70년대에 대히트한 곡이다. 특히 중간의 어쿠스틱 기타가 펼치는 솔로는 아직도 귓가에 생생할 정도다. 그러므로 이 명곡을 당시 CTI의 간판 보컬로 떠오르던 에스터 필립스가 리바이벌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에스터 필립스는 크리드 테일러의 전적인 지원으로 한 시대를 휩쓸었던 여성이다. 한데 워낙 성미가 까다로워 만일 CTI에 전화라도 걸면 직원들 중 아무도 그 전화를 받지 않으려고 했을 정도였단다. 그만큼 음악에 대한 열정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리바이벌이라고는 하나 역시 재즈의 틀을 쓴 만큼 원곡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 노련하게 불러제끼는 에스터의 풍부한 성량과 퍼스낼러티는 여러모로 매력적이다.
2. 루이 암스트롱 / GEORGIA ON MY MIND
레이 찰스의 해석으로 유명한 이 곡을 루이 암스트롱도 부른 줄 알면 놀라는 독자도 꽤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곡은 블루스의 명곡으로 많은 가수들이 부른 바 있다. 루이 암스트롱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날고 기는 그의 후배들이 짤막하게 평한 것으로 이 작품에 대한 해설을 갈음하겠다. 차라리 그 편이 루이 암스트롱을 이해하는 데 훨씬 더 나을 것 같아서이다. "루이는 모든 것을 관통해 버린 인물이다. 당신이 트럼펫을 갖고 아무리 장난을 쳐도 루이가 했던 것 이상의 새로운 부분은 결코 발견해 내지 못할 것이다." (마일즈 데이비스) "루이는 재즈 그 자체다. 그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재즈가 가능했던 것이다. 만일 루이가 없었다면 이렇게 재즈를 연주하고 있는 우리도 없었을 것이다." (디지 길레스피)
3. 디오데이토 / SPIRIT OF SUMMER
유미르 디어데이토:일렉트릭 피아노
존 트로피어:기타
론 카터:베이스
빌리 콥햄:드럼
에어토:퍼커션
브라질의 리오 출신인 이 사나이는 당초 법률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타고난 음악적 재능이 워낙 뛰어나 결국 변호사의 꿈을 포기하고 음악인으로서의 인생을 결정했다. 그래서 뉴욕에 진출했지만 60년대 말 당시의 분위기는 브라질 출신이면 무조건 보사 노바 재즈 뮤지션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보사 노바를 연주해야 했다. 그러던 중 크리드 테일러의 눈에 띄어 CTI에서 데뷔 엘범을 출반했는데, 바로 이 곡이 포함된 <프릴루드>란 작품이다. 한데 놀랍게도 이 작품은 그 레코드사의 최초 히트작이 되고 말았다.
사실 이런 음악을 재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갖는 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디오데이토는 브라질 특유의 리듬감에 전자악기의 가능성을 접목시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음악을 선보였던 것이다. 비록 사반세기가 흘렀지만 그때의 신선한 느낌은 아직도 살아있다.
4. 토니 베넷 / FLY ME TO THE MOON
토니 베넷:보컬
랠프 샤론:피아노
더그 리치슨:베이스
클레이튼 카메론:드럼
최근 토니 베넷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젊은이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M-TV에서 언플러그드 공연을 열었는가 하면 레드 핫 칠리 페퍼나 K.D. 랭과 같은 젊은 뮤지션과도 활발한 교류를 갖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철부지 어린아니들이 그의 음악에 새삼 열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곡은 M-TV 공연에 수록된 앨범에서 발췌한 것이다. 오랜 동료인 랠프 샤론 피아노 트리오가 반주를 맡고 있고 심기일전한 토니 베넷이 활기 넘치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가끔 전위적인 것이 복고적인 것과 맞물리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요즘의 토니를 보면 이토록 고집스럽게 옛스런 음악을 고집했던 사람이 또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동스럽다.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섹스 피스톨즈가 시대를 휩쓰는 동안에도 토니 베넷은 토니 베넷을 포기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보스턴 글로브지에 실린 그에 대한 이 짤막한 평만큼 정확하게 토니를 꿰뚫은 글은 아마 없을 것 같다.
5. 엘라 피츠제럴드 / STARDUST
엘라 피츠제럴드:보컬
로이 엘드리지:트럼펫
알 그레이:트롬본
키터 베츠:베이스
프레디 웨이츠:드럼
에디 록조 데이비스:테너 색소폰
토미 플래너건:피아노
조 패스:기타
1973년 뉴 포트 재즈 페스티벌이 열린 장소는 뉴 포트란 소도시가 아니라 뉴욕의 센트럴 파크였다. 게다가 엘라 피츠제럴드가 출연한 당일의 프로그램이 다소 언밸런스하여 좀 의아하기조차했다. 우선 '아트 앙상블 오브 시카고'란 전위파 그룹이 오프닝을 장식한 다음 이어지는 순서가 레이 바레토라는 남미 뮤지션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이 엘라였으므로 팬들로서는 어쩌면 버라이어티 쇼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을 것이다. 한데 노익장을 과시라도 하듯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엘라였다. 비록 나이가 들고 목소리에 에너지감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노련미로 그 약점을 커버하는 데엔 거장이란 찬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만일 노래를 잘 부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면 엘라를 철저히 연구해 보라고 빌리 스트레이혼이 말한 적이 있었다. 이 곡을 들으면 그 말이 그저 과장에 불과한 허언이 아님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6. 맨하탄 트랜스퍼 / WOMAN IN LOVE
쉐릴 벤틴
팀 하우저
앨런 폴
재니스 시켈 등 보컬
보컬의 여러 테크닉 중에 '스캣 송'이란 것이 있다. 말하자면 가사 없이 흥얼거림으로써 일종의 애드 립을 전개해 가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가면 애드 립에조차 가사를 넣어 복잡하게 연주하는 부분으로 넘어간다. '맨하탄 트랜스퍼'란 그룹은 이 대목에 있어서 가히 최고로 손꼽힌다. 여성 2명과 남성 2명의 혼성 4인조로 구성된 이 그룹은 아마 재즈 역사상 가장 절묘한 하모니를 구축하지 않았나 싶다. 그도 그럴것이 번갈아 가면서 솔로가 이어지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절묘한 코러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일종의 묘기 대행진인 것이다. 비브라토를 별로 사용하지 않고 끈적끈적한 필링을 억제하는 대신 멋들어진 하모니로 개성어린 투명감을 보여주는 이 그룹은 아마 누구라도 쉽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7. 다이나 쇼어 / TWO SHILHOUETTES
영화배우이면서 가수를 겸업한 스타는 꽤 많다. 특히 뮤지컬이라든가 디즈니 필름의 음악을 담당하면서 동시에 연기를 했던 경우는 주목할 만하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주디 갈랜드, 프랭크 시나트라, 진 켈리, 프레드 아스테어 등 참으로 그리운 이름이 꽤 된다. 그중 다이나 쇼어도 빼놓을 수 없다. 다소 어린 듯한 목소리에 앳된 용모로 사랑 받았던 그녀는 할리우드의 황금기를 장식했던 스타 중의 한 명이다. 물론 지금은 첨단의 촬영 기법에 SF적인 스펙터클이 주류를 이루는 할리우드인지라 진정한 의미의 엔터네이너는 사라진 지 오래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르고 또 연기도 빼어난 그런 스타가 그립다. 이런 음악에서 어떤 노스탤지어가 느껴지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일까?
8. 클레오 레인 / THAT OLD FEELING
클레오 레인은 노련하게 노래하는 여가수다. 다소 굵직한 음성에 기품있게 프레이즈를 전개해 가는 부분은 오랫동안 노래를 해 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테크닉인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노래엔 어떤 슬픔이 서려 있다. 고달픈 인생을 살아오면서 인생유전이 주는 감동을 겪어낸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 그녀에겐 있는 것이다. 비록 스타덤에 오른 적도 없고 또 대단한 미모를 소유한 글래머도 아니지만 늘 곁에 두고 듣고 싶은 가수임에는 틀림없다. 이 노래를 들어면 과거 잠깐이나마 느꼈던 어떤 흥분과 기쁨을 회한에 잠겨 되새기는 듯한 기분에 잠기게 된다. 나이가 들어 간다는 증거일까?
9. 클레오 레인 / EVERY TIME WE SAY GOODBYE
필자는 여가수들의 노래를 좋아한다. 예쁜 용모에 깜찍한 개성을 갖고 있는 젊은 여성도 좋고, 산전수전 다 겪고 나서 마치 넋두리라도 하듯 불러제끼는 늙은 여가수도 좋다. 그 어느 쪽이 되었건 그 자신만의 개성이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몰입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클레오 레인은 그런 면에서 어필하고 있다. 오랫동안 숱한 일급 뮤지션들과 조인트를 해왔고 독집 앨범도 여러 장 낸 바 있다. 아마 팝 재즈 기분이 나는 여성 보컬 중엔 A급에 속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만큼 어른스런 재즈를 어른스런 기분으로 즐겨 보기 바란다. 재즈란 악악대는 철부지들의 유행음악이 결코 아니다. 오랜 경륜과 인품이 쌓여야만 공감할 수 있는 종류의 음악인 것이다. 그러니 듣는 쪽에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고 보다 많은 체험으로 보다 깊은 재즈의 맛을 즐겨 보라고 권하고 싶은 것이다. 아무쪼록 본 앤솔로지가 재즈를 이해하는 데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었으면 한다.